1. 들어가는말
혹자는 말한다. “청이 조선이고, 조선이 청이다.”
또는 조선의 중앙정부 이름이 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자수지(人子須知)>라는 풍수지리서에 “기전(畿佃)은 연경(燕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연(燕)이란 북쪽 유주(幽州)을 지칭한다고 하였다.(<사기>分燕置幽州, 北方幽州)
그 연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나라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최초 연(燕)은 칠패(七覇)에 들었으나 天子로서 즉위하지 못했다.
연은 제후국이 쓸 수 있는 이름이지 천자국이 쓸 이름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청나라가 서울을 연경이라 하였다.
그럼 조선과 청이 다른 나라라고 한다면 그 둘의 국경은 어디 일까?
세계 어느 나라들이든지 이웃나라와 항상 국경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청과 조선도 그러한대, 지금의 반도 사학에서는 반도 사학에서는 동북삼성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동문휘고(同文彙考)>는 청과 조선의 구경분쟁에 관 한 책이다.
아래는 <네이트 백과 사전>의 동문휘고 소개 자료이다.
“조선 후기의 대청(對淸) 및 대일(對日) 관계의 교섭 문서를 집대성한 책.
초편 129권(원편 79권, 별편 4권, 補編 10권, 附編 36권) 60책, 속편 불분권 36책. 운각활자(芸閣活字).
초편은 1784년(정조 8) 10월 왕의 하교에 의해 승문원등록(承文院謄錄) 가운데에서
인조 이후의 사대와 교린에 관한 외교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한 후 4년 만인 1788년 12월 출간한 것이다.“
필자가 소개할 사료는,
강희 50년에 있었던 조선과 청의 국경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럼으로 아래 사서의 지명을 다른 여러 사서를 통하여 그 위치를 대략이나마 알고자 하는 것이다.
2. <동문휘고(同文彙考)>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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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출전은 동북아 역사재단 [국역 동문휘고]범월 사료1에서 발취하였으나 한자에 괄호 한글은
본인이 달았다. 최대한 원문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으나 혹 누락되어 원문과 다를 수 있으므로 원문을 검증하고자 하는 분은
원전 703, 704, 789p를 보시기 바랍니다.>
査勅至會犯人交該國完決及沿江巡審咨 (사칙지회범인교해국완결급연강순심자)
康熙 50년 5월29일
原編 卷53 犯越五我國人 32b-33a쪽(1018쪽)
발신: 欽差大人穆克登(흠차대인목극등) 등
사유: 上諭(상유)를 받듭니다.
조선 사람 李枝軍 등이 越境(월경)하여 살인한 일을 회심하는 안건을 살펴 본 후
출발일정에 대해 奏聞(주문)하여 성훈을 삼가 청하니, 上諭(상유)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
과 같았습니다.
이 안건의 피살된 사람은 匪類(비류)가 아님이 없으며 모두 도망인으로써 몰래 犯越(범월)
한 무리이다. 너희들은 조선국의 관원과 함께 살인이 발생한 곳을 분명히 조사
한 후 조선국에게 넘겨 완결하되, 그 沿江(연강) 일대는 다시 드나들며 偸越(투월)한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너희들이 또한 분명한 조사를 시행하라.
조사컨대, 渭原郡(위원군) 북쪽 獐項峴(장항현) 지역에서 살해당한 2명, 강 건너 照踰德(조유덕) 지역에
서 살해당한 3명은 시신이 모두 없습니다. 李萬技(이만기) 등을 심문하여 자백한 내용은
모두 조선국왕이 아뢴 바와 일치하며 아울러 다른 진술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선국왕에게 넘기고 이를 삼가 준행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마땅히 咨를 보내오니, (旨내의 事理에) 따라 시행하십시오.
康熙 55년5월29일
回査勅擖帖(회사칙갈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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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미지는 동문휘고 원본 이미지 입니다. 스캔이 원활하지 못해서 글자가 더러 깨져 보입니다.
출판사는 동북아시아 재단이니 참조 바랍니다.703p 704p이니 참조 바랍니다.>


((각주))는 필자가 달아보았습니다.("국역 [동문휘고] 범월 사료"에는 그냥 번역문으로 주석하나 없습니다ㅜㅜ;)
강희 50년:(1711년, 숙종 37년).
奏文(주문):상주(上奏)하는 글. 임금에게 아뢰는 글.
上諭(상유):임금의 말씀.
匪類(비류):비적(匪賊)의 무리.
犯越(국경),偸越(투월):국경을(國境)을 넘어서 남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
咨(자):ㄱ)묻다 ㄴ)상의하다 ㄷ)자문하다
旨(지):ㄱ)조서(詔書), ㄴ)(聖旨: 임금의 뜻)
2-1 목극등(穆克登)
<바이두 백과> 등에서,
穆克登(1664~1735)清代官员。姓富察(傅氏)。吉林市乌拉街人。隶满洲镶黄旗。
康熙二十三年(1684),任清康熙皇帝侍卫。康熙三十七年(1698),从京城返回故里任第四任总管。
康熙五十一年(1712),奉康熙帝之命,代表清政府与朝鲜李朝京官李义复等人赴长白山分水岭处议定中朝两国边界。
康熙五十八年(1719)授吉林副都统,转年授吉林、乌拉街两城八旗兵前锋统领。
雍正三年(1725)出师新疆,任阿尔泰等处地方将军,事后返吉。雍正十年(1732),
再次率兵赴新疆巴里坤驻防,授内务大臣。雍正十三年(1735),因劳累成疾病逝。卒后,
清世宗雍正帝追封他为"光禄大夫"。?
{목극동( 1664~1735)은 청대 관원으로서 길림시 오랍가 사람으로, 강희 23년년(1684)에
강희 황제 시위가 되었고,
강희 38년(1698)에 경성에서 고향(길림)으로 돌아가서 네번째 총관이 되었다가,
강희51년 강희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 이의복(李義複) 등과 장백산 분수령에 양국 변경을
議定(의정)하였고, 강희58년에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이였다가,
그 후 오랍가량성팔기병전봉통령(乌拉街兩城八旗兵前鋒統領)이 되었으며,
옹정3년 신강(新疆)에 나가 아이태(阿爾泰) 등에서 지방장관을 지냈다가, 길림으로 돌아왔고,
옹정10년(1732년)에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신강 파리곤(巴裏坤)에 갔으며,
옹정3년(1735) 내무대신(內務大臣)이 되었으며,
과로로 인하여 죽었는데, 청 옹정제(雍宗雍)에 의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봉되었다.}
위에서 목극동은 고향은 길림이다.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일까?
감숙성, 내몽고 등 지역에 대륙의 3대 사막 중 하나인 파단길림(巴丹吉林)사막이 있다.
파단은 어디일까?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治區) 아랍선맹시(阿拉善盟市)가 있다.
목극동이 오랍(乌拉)[북경어 발음:wūlā]이라고 하는데 올랄(兀喇)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아랍(阿拉)과도 발음이 비슷하지만 현 대륙의 아랍과 동일 지명인지는 사료로서 고증하여 보아야
할 것이지 언어학적으로 만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다만 서쪽 “우랄”산맥, 현 유럽(Europe:서쪽의 땅, 혹은 해지는 곳을 가리키는 메소포타미아 사람 등의
언어 에레브(ereb)라는 말에서 유래) 있기에 언어학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 되지만,
언어의 이동은 지명이나 나라명과 꼭 일치하지 한 것은 아니므로,
“서역조선설”이나 “지구조선설“의 근거로 삼지 말기를 바란다.}
길림은 어디인가? 현 역사 구도에서는, 지금의 동북삼성 중에 하나인 지린성(吉林省)르로
되어있다.
파단길림의 이름으로 볼 때 현재의 사막의 위치와 맞지않다.
파단길림 사막은 지금의 길림성 지역의 서북부 지역이 아니라, 내몽고 감숙성 등 청(凊) 때
섬서(섬서성+감숙성+영화자치구) 북쪽에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길림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첫째 파단과 동일지역이거나 근경지역을 지칭하거나,
둘째 파단에서 ~ 길림에 이르는 일대의 지역을 지칭하는 지역일 수 있다.)
(필자가 문제 제기한 “파단길림사막”에 지명에 대하여 대조연 학인들의 많은 연구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위 두 가지 가정 역시 길림이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래 사료는 <실록>에서 목극동과 올랄에 대한 사료이다. 참조 바랍니다.
<실록 숙종(肅宗) 38年(1712), 청 강희(康熙) 51年>에,
淸差烏喇摠管穆克登等, 將審白頭山, 出來義州, 府尹以牌文上送
(청나라 차사(差使) 오랄 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이 장차 백두산을 심사(審査)하려 하여
의주(義州)로 나오니,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패문(牌文)16029) 을 올려 보냈다.)
2-2 沿江(연강)
沿江(연강)은 연하(沿河)이다.
연하는 흔한 이름일 수 있다.
<국어사전에>에서 沿江(연강)를 찾아보면,
강가를 따라서 벌여 있는 땅으로서 연하(沿河)와 같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고유명로서 즉 지명(地名)이름으로 쓰인 연강은 대륙에 여러 남아 있는데,
구글 검색을 통해 현재 보이는 연하가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1. 遼寧省 大連市 附近의 沿河
2. 重慶市 城口縣 沿河鄉
3. 江蘇省 鹽城市 建湖縣 沿河鎮
4. 江蘇省 鹽城市 濱海縣 沿河鎮.
5. 貴州省 銅仁地區 沿河 土家族自治縣
6. 北京市 順義區沿河
7. 安徽省 巢湖市 居巢區沿河
8. 江蘇省 南京市 六合區沿河
9. 陝西省 寶雞市 麟遊縣 沿河
10. 寧夏回族自治區 石嘴山市 平羅縣 沿河
그 중에 10번 영하회족자차주(寧夏回族自治區) 석취산시(石嘴山市) 평라현(平羅縣)을 주목할만하다.
지금의 현 역사체계에선 직례가 하북성으로 비정되어 있지만
<청사고(清史稿) 志二十九 地理一>에 직례(直隸) 순천부(順天府)에 평라영(平羅營)이 있으므로
섬서(원래 지금의 감숙, 영화회족자치구도 섬서에 속했다.)지역에 있어야 하지 현재의
하북성(河北省)일 수 없다.
<다산시문집 제15권 강계고 서(疆界考敍)>에서,
“지금 저들의 땅과 우리 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을 상고해 보면, 연하(沿河) 지방에
군(郡)ㆍ현(縣)ㆍ보(堡)ㆍ위(衛)가 있지는 않으나 두만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영고탑부내(寧古塔部內)
혼춘(渾春) 와이객(瓦爾喀)이고, 압록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길림부내(吉林部內) 책외번지(柵外藩地)로서,
흥경(興京)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원사>에,
命諸路市馬萬匹送開平府.以總帥汪良臣統陝西 漢軍於沿河守隘
{모든 로(路)와 시(市)에 말 만필을 개평부에 보내기를 명했다.
총사: 총사 왕량신으로 섬서한군을 통치하여 연하를 굳게 지킬 것을 명했다}
로(路):동평로(東平路), 서경로(西京路) 평양로(平陽路) 등 행정구역 이름
왕량신:汪良臣(1231~1281), 또 <원사>에서 元世祖(원세조:1260년)에 섬서(陝西),
사천四川 선무사(宣撫使)로 보냈다고 되어있다.)
<고금중국지명대사전>에는,
연하, 연강은 나오지 않으며, 연하구(沿河口) 찾아보면, “연하구(沿河口)는 경조(京兆) 완편현(宛平懸)
서(西) 200리에 있다”고 되어있는데,
<명사 지리1>에서,
경사(京師) 순천부(順天府) 완평현(宛平縣)이 있는데, 연하구수어방어소(沿河口守禦千戶所)가 있다고
되어있다.
<입체-중국지형도>에서의 파단길림(巴丹吉林) 사막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