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와 기암괴석. 그리고 다랭이 마을 풍경을 찾아서
오늘 찾아가는 남해 설흘산(雪屹山)은 이름이 쉽게 귀에 담겨지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흘(屹)자가 어려운 한자여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흘(屹)은 흘립(屹立), 흘출(屹出)등의 낱말에 쓰이는 자로 흘립(屹立)은 산이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음을 말하고, 흘출(屹出) 또한 산이 험하고 날카롭게 솟아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설흘산은 눈이 많이 내리는 높은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름만 들으면 겨울에 찾아 봄 직도 하건만, 길은 암릉(岩稜)으로 눈 쌓인 겨울에는 미끄럽기도 하겠거니와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매서울 것 같다.
아침 7시에 창원종합운동장을 떠나, 마산 전신전화국에서 마산삼진중학교 선생님 한 분을 태우고, 마산 내서 농수산물 시장 앞에서 선생님 두 분을 더 태우고, 30명이 산행에 나섰다. 고속도로 옆의 과수원은 봄을 맞은 과목들이 꽃을 피워 장관이다. 배나무 과수원을 보고 중앙중학교 강정임 선생님이 이조년의 다정가인 ‘이화(梨花)에 월백(月魄)하고’를 ‘이화(梨花)에 일백(日白)하고’라 개작한다. 오랜만에 다정가를 한 번 읊어 보자.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화는 달빛과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도종환의 배꽃 지는 밤이란 시도 있다.
어제 핀 배꽃이 소리 없이 지는 밤입니다.
많은 별들 중에 큰별 하나가 이마위에 뜹니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소리 없이 울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밤, 가만히 제게 오는 당신의 눈빛 한줄 만납니다.
차창 밖 풍경에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부족한 잠에 졸기도 하면서 어언 남해대교를 지난다.
남해대교를 지나 설흘산(남면)으로 가는 길이 짧은 길이 아니다.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 연죽 사촌으로 가는 길이 바른 길인데 우리는 대사에서 바다 일주도로를 탔다. 서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이 그만이긴 한데 관광버스가 속 시원히 달릴 수 있는 길은 아니다. 2차선인 부분도 있고, 관광버스 2대가 교행하기에 힘든 부분도 있는 것이 구비 진 부분이 많아 관광버스가 다니기를 권장할 길은 아니다. 서상을 지나는데 남해해성고등학교가 눈에 띈다. 바다 쪽으로 ‘힐튼남해골프&스파리조트’가 눈에 띄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남해해성고등학교에 기간제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제자가 있어 그 사정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더욱 관심있게 보아진다.
10시에 사촌 선구마을에 도착했다. 선구마을 뒷 산을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여수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짙은 안개로 여천, 여수가 또렷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저쯤 어디가 여천이겠지, 저쯤 어딘가 돌산이련가?
선구마을에서 매봉(응봉산 412.7m)으로 오르는 길에 제법 깊게 파여진 동굴이 하나 있다. 동굴이 있을 이유가 별로 없을 만한 장소인데 누군가가 판 모양이다. 누가 여기서 도를 닦았나? 안삼태 선생님이 동굴 안까지 들어갔다 나온다.
선구마을에서 매봉까지 2.5Km인데 길이 아름답다.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능선에 도달하고, 깎아지른 듯한 산이라 양쪽으로 내려다보는 경치가 그만이다. 조금 위태롭게 보일만한 곳은 모두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았다. 요즘은 어느 산에를 가도 가이드라인이 잘 되어 있다. 뾰쪽이 선 산위 암릉으로 등산로가 나 있어, 누가 추월할 수도 뒤처질 수도 없다. 힘들지 않은 길이라 담소를 나누며 길을 간다. 선구마을에서 매봉까지는 조그만 봉들을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인 등에 혹이 여러 개 나있는 후양고사우르스 공룡의 등인 듯하다. 여기를 남해의 공룡능선이라 칭할까보다.
산은 사람에게 진취적인 기상을 준다. 범부들은 이를 객기라고 하는데, 몇 몇 선생님들이 편한 길을 두고 험한 길을 택해 봉을 오르내린다. 그저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도 여럿이다. 하지만, 저 높은데 올라 간 사람만이 그 광경을 보리다.
매봉(응봉산)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시각이 11시 30분. 시각이 좀 이른데 하산 후에 멸치쌈밤을 먹기로 했기에 점심식사를 앞당겨 하기로 했다. 용남초 전영희 선생님이 싸오신 들미나리무침, 머구무침을 맛이게 나누어 먹는다. 선생님은 집 뒤에 조그만 텃밭이 있는데, 그곳에 유기농으로 야채를 재배한다고 한다. 그 과실을 산에서 우리와 함께 나누고 계신다. 그 맛이 식당에서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매봉에는 냉장된 시원한 막걸리를 파는 사람이 있다. 막걸리 한병 5000원. 휴일에 많은 사람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매봉에서 내려다보는 다랭이마을은 자연의 모습 따라 돌아가며 만들어진 논밭에 경지 정리된 논보다 오히려 정겹다. 우리 선조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오늘은 둘째 주 토요일이라 그런지, 다랭이마을 주차장에 많은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이곳도 관광지로 이미 명성이 높은 모양이다. 나는 다랭이 마을을 ‘맨발의 기봉이’ 영화를 보고서 알았다. 영화에서 기봉이가 살던 곳이고 기봉이가 마라톤을 연습하던 곳이다.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곳인지, 유명한 곳이라 영화촬영지가 된 것인지...
매봉에서 단체 사진 촬영을 하고, 설흘산으로 향한다. 매봉에서 내려서면 이제 육산이다. 길도 넓고, 걷기도 편하다. 매봉에서 바라보는 설흘산의 자태도 우측으로 암봉이 자리하고 있어, 매봉(응봉산)에 못지않다. 이제 설흘산에 올라서면 노도(櫓島)를 보게 되리라.
노도는 서포 김만중이 유배 생활을 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한다. 만중은 숙종 14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치는 것에 대해 직간한 것 이 죄가 되어 화를 입고 남해 외딴 섬, 노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남해도 섬인데, 남해에서도 또 노도란 섬으로 귀양을 보낸 것을 보니, 숙종의 만중에 대한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지은 ‘사씨남정기(인현왕후가 장희빈에게 쫓겨나게 된 것을 빗댄 이야기)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로하여 지었다는 이 세상의 인생무상을 읊은 ’구운몽‘은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작품들이다.
김 만중의 어머니, 윤씨부인이 유배지로 떠나는 아들에게 한 말이 이렇게 전해진다.
"만중아, 상감께서 너에게 더 무서운 형벌을 내릴지 모른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다만 소자가 어머님 슬하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죄스러울 뿐입니다."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그릇된 일을 보고도 죽음이 두려워 옮음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것이 오히려 상감께 불충이요,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한 어미를 받들고자 나라위한 바른말을 못한다면 오히려 이 에미에 대한 불효이니라."
김만중은 나랏일에 충성을 다했으며 불의에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성미였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인데, 이는 어머니의 이런 꿋꿋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리라.
이런 생각에 설흘산 봉수대에 어서 올라 노도를 바라보고 싶어진다. 길을 재촉해본다. 설흘산의 봉수대는 요즘 만든 것인 냥, 쌓아 올린 돌에 연륜의 흔적은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 근간에 다시 증개축이 있었던 모양이다. 둥그런 봉화대에 올라서니, 앵강(鶯江)만이 굽어보인다. 앵강만의 앵은 꾀꼬리 앵자이다. 꾀꼬리의 울음소리는 맑고 청아하며, 암수가 함께 노닌다 한다. 황조가에서 그리 읊었으며, 동동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정겨운 곳이 앵강이런가?
김영만의 ‘앵강만 일출’을 들어보자.
파도가 내게 들어와
꽉 조인 나사를 하나씩 빼내기 시작하네요
빼서 멀리 던져버리고 구석마다 기름을 칠해주네요
생각도 잘 돌아가 난 금세 명랑해지고
고맙다고
앵강만을 한번 쓰다듬어보네요
밤늦게까지 민박집에서 함께 놀다가
새벽녘 다랭이논에 나가
모내기 하는 앵강만을
데려와 씻겨 벗겨 눕혀보네요
그러면 곧 거친 숨을 몰아쉬고
뒤척뒤척하다가 일어나
날 음탕하게 깨워놓기도 하고
철부덕 철부덕하는 소리들을 창밖에다 쌓기도 하고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아침 일찍 앵강만에게
내 친구 한 명을 더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해보네요
그랬더니 그녀가 얼굴을 갑자기 붉혀오네요
그녀의 부끄러움으로
바다도, 다랭이마을 골목도 먼 훗날까지 행복해지고
(시와상상, 2008 봄호)
앵강만의 만구(灣口)에 노도가 위치해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김삿갓 방랑기의 삿갓 모양이다. 삿갓을 쓰고, 정처없이 방랑을 하련가. 아니,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만중은 정신적 방랑을 하지 않았다. 유배생활동안 죽을 때까지 오히려 끈을 고쳐 매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았고, 성상을 일깨우려했고, 어머니를 그리던 곳이다.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을까? 한양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삿갓 모양인 모양이다. 한양으로 길 떠나기 위해서 삿갓이 필요하지 않았으리...
상념을 접고 다랭이마을로 하산한다. 하산하는 길에 산나물이며, 남해마늘 쫑지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가격은 물문하고, 정감이 가는 곳에서 정겨운 채소를 구입한다. 괜히 이곳에서 파는 채소는 옛 맛이 날 것 같고, 농약이다, 유전자 농산물 같은 듣기 깨름직한 용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랭이 마을 도로에서 위아래로 보는 다랭이 논 밭. 선조들이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산비탈을 깎아 곧추 석축을 쌓고 계단식 다랭이 논을 만든 까닭에, 기계식 농업이 불가할 줄 알았는데, 그 손바닥만한 논에 트랙터가 들어가 있다. 버스 주차장에는 막걸리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그곳 막걸리는 직접 만든 것이란다. 한잔에 1000원. 관광버스 운전사가 2병을 사고나니, 팔 물량이 1병밖에 남지 않았단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누룩으로 술 짜러 간다고 간다. 휴일이라 그런지 나물 파는 아주머니들과 상업이 제법 번성하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 옆, 산 고랑을 따라 내려오는 물소리가 제법 잘잘거린다. 정겹다. 마을에 있는 암수바위도 또한 산행 끝에 느끼는 한 맛이다. 풍요와 다산이라. 선조들에게 풍요와 다산이 그렇게 중요했으리라. 요즘의 젊은이들은 다산을 오히려 싫어하는데... 산행마무리 2시20분.
귀향길에 남해 창선 우리식당에서 멸치쌈밥을 먹었다. 유명한 집이라 그런지, 예약을 받아주지 않으려하는 것을 부탁해서 예약했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창원으로 귀향. 귀향시간 6시.
2008년 4월 13일
산악회 회장 안병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