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만한 격변의 시대가 달리 또 있을 것인가? 지난 세기 중에 이보다 빠른 변화의 시대가 없었음은 물론 앞으로도 아마 이러한 심오한 변화의 세기를 맞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변화의 크기를 양으로만 잰다면 오는 세기의 변화는 이 세기보다 더 클지 모른다. 21세기에 교통은 더 빨라질 것이고 지식은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우주개발이나 암의 극복 같은 획기적 사건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20세기에서는 인류의 문명사를 전후로 가를 수 있는 한 획이 그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질적인 변화이며, 한동안 오는 세기들은 그 변화를 이어가고 확대해가는 데 열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사건이 일으키는 변화를 아주 조금 맛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정보의 디지털화이다.
우리는 정보화 사회의 도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 정보화 사회에서의 지식의 증가, 지식 효용의 증가, 종이없는 사무실, 사무실없는 기업, 멀티미디어의 보편화, 가상현실의 등장, 통신의 발달로 인한 가상공간의 형성 등은 정보화의 큰 물결을 이루는 흐름들로서 보통 사람들도 예견하거나 이미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일반 생활인으로서는 이러한 발전을 전기의 응용과 전자기기의 발달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하고, 컴퓨터의 등장도 그 일환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의 맥락을 놓치는 관점이다.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예견하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보다 그 뒤에 있는 무형의 변화의 의미를 음미해보아야 할 때가 있는데 정보화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일반인은 컴퓨터와 핸드폰 등 정보통신기기의 발전을 경험하는 것으로 변화를 인식하여 하드웨어 중심의 발전관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이며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웨어, 즉 이 모든 것 뒤에 있는 논리적 발전이다. 오늘의 정보화의 폭발적 혁명을 가져온 것은 이 모는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논리적 변화이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인 디지털화이다.
(1)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날로그의 상대말이다. 가장 쉬운 예는 시계이다. 전통적인 기계식의 시계에서는 바늘이 꾸준히 움직여서 시간을 따라갔다. 이때에는 그 회전속도가 잘 맞아야 했고 그것은 정밀한 기계적 조정을 필요로 했다. 디지털 시계는 문자판이 있는 시계이다. 그것은 1초 또는 1분이 될 때 마다 갑자기 숫자를 바꾼다. 연속적인 움직임이 없다. 실제로 이런 시계는 결정에 의해 맥박수가 정해진 전자적인 진동의 횟수를 세서 몇만번의 진동이 세어지면 1초가 지났다는 식으로 계산한다. 이 ‘계산’된다는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요즘은 속은 전자시계인데 겉은 바늘이 움직이는 손목시계가 주종을 이룬다. 사람이 숫자보다는 바늘을 편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속으로 ‘셈’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디지털방식이다.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디지털이다. 기존의 아날로그 전기기계들이 전기의 세기에 다른 부품의 움직임을 연동시키는 원리로 동작하는 것과 달리, 컴퓨터는 전기의 세기로부터 일단 0과 1을 구별해 놓고 그 합성으로 기호를 만든다. (숫자도 기호이다) 전기의 세기 자체는 이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으며, 나머지 모든 일은 0과 1로 합성된 기호의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CD도 디지털이다. 이에 반해 오디오 테입이나 옛 레코드 판은 아날로그이다. 즉, 음량의 세기를 자기의 세기나 물리적 진동의 세기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CD는 음량의 세기를 숫자로 바꾸어서 원판에 차례대로 그 숫자를 기입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계산’이 가능해서 일부 데이터에 손상이 있어도 앞뒤를 맞춰보아 적당히 메꾸어 넘어갈 수 있다. 레코드판과 달리 표면에 흠집이 웬만큼 나도 음질에 지장이 없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종이에 인쇄한 그림들은 아날로그이지만, 컴퓨터 그래픽은 디지털이다. 화면을 미세한 점으로 나누고 각각의 점에 숫자로 표시된 색깔을 대응시킨 것이다. 이것 역시 계산이 가능한 까닭에 여러가지 특수효과를 논리적으로 구성하여 첨가할 수 있다.
요컨대 디지털은 딱 부러지는 기호로 표기되며 논리적 계산이 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정보를 디지털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보의 자유로운 논리적 활용과 가공이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정보의 표현이 전기나 기계의 물질적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정보의 원형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디지털 이전의 정보와 디지털 이후의 정보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리고 인류가 사용하는 정보가 이 차이점을 넘어 선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폭발적인 정보혁명의 근원인 것이다.
디지털 정보에는 위의 특성에서 파생되는 몇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다. 첫째로 정보의 저장이 쉽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처리 중간과정물이 저장되는 것으로부터 상당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일례로 기존의 출판과정을 보면 원고지에 내용을 쓰고 활자를 골라 조판하고 교정한 후 잉크를 묻혀 인쇄한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되돌릴 수가 없다. 컴퓨터로 입력하여 인쇄를 하는 전자조판의 경우, 일단 내용이 입력되면 반복해서 교정할 수 있다. 한번 인쇄를 한 후 필요하면 언제든지 저장된 파일로 부터 다시 인쇄할 수 있다. 기호의 저장은 물질의 저장보다 부담이 없고 경제적일 뿐 아니라 질의 저하의 문제가 없다. 그림이라 하여도 기호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오래되어도 화질의 저하없이 원래와 똑같은 출력이 가능하다. 여러가지 압축기술이 발달하여 더욱 쉽게 대량의 정보를 저장하게 되고 필요한 정보전송량도 줄여 동영상의 실시간처리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장점은 입력과 저장과 출력이 사이클을 이룬다는 것이다. 인쇄된 글과 그림은 스캐너로 다시 입력하여 문자인식 등을 통해 원래의 정보로 회복될 수 있다. 또 아예 최초 입력이나 최종 출력과정을 사이클 밖으로 밀어내고 순수한 전자적 상태에서 대부분의 업무 사이클을 구성하도록 할 수 있다. 즉, 종이나 테이프가 배제된 업무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고성능 모니터나 디지털카메라, 스캐너 등 여러 종류의 주변기기의 기여가 주효하겠으나 이러한 기기가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 자체도 정보가 디지털화된 덕택이다. 이런 가능성이 경영정보나 각종 관리시스템, 교육이나 상거래 등에 가져오는 변화는 그 크기와 깊이에서 엄청난 것이다. 현재는 겨우 변화의 시초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다른 장점은 여러 유형의 정보가 하나의 통일된 형식, 즉 기호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멀티미디어의 가능성을 연 열쇠이다. 사실 전기를 이용한 시청각 정보의 전자화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있어 왔다. 전화도 있었고 라디오나 TV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논리적 수준에서 통합되지 못하였다. 각 기계들에서 아날로그로 표현된 각 형태의 정보는 서로 논리적 관련없이 각각의 물리적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제 디지털을 통해 이 정보들이 통합되면서 생기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시각정보와 청각정보가 인간의 뇌에서 함께 처리되어 인간에게 통일된 세상으로 제시되듯이, 전자적으로 표현된 모든 유형의 정보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인간에게 통합된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멀티미디어와 가상현실기술의 궁극적 목표가 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디지털 정보의 논리적 처리 가능성이 가져 온 보다 직접적 결과에 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 논리적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정보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논리적 처리, 정보의 가공, 검색, 추출, 융합이 모두 가능하다. 이것이 이미 인쇄술의 발달, 타이프라이터나 복사기의 등장 등으로 확대되어 왔던 정보화의 추세에 결정적인 도약의 계기를 주었다. 자동적인 논리적 처리가 가능한다는 것은 보유지식의 효용을 높이면서 동시에 효과적인 정보 보유량 역시 전에 비할 수 없이 증가시켰다. 전에는 인간의 정보처리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보를 다량 모은다고 해서 꼭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컴퓨터가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기업이나 기관마다 정보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게 되었고 생산과정과 서비스산업도 모두 정보력에 생산성을 걸게 되었다. 때문에 경영정보시스템, 의사결정 지원시스템, 그리고 지식경영 등의 새로운 정보관리 패러다임이 계속하여 등장하고 있으며, 아예 산업의 역사 자체도 그 지식적 성격에 따라 산업혁명-생산성혁명-경영혁명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정보처리과정에 대한 연구가 인간지능에 대한 연구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인공지능,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human-compouter interaction), 인간-기계 시스템 (Human-machine system)등의 소프트한 연구분야를 부상시켜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는 중심적인 학문분야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상 간략하나마 고찰한 바에서 확실해진 것은 오늘의 정보화를 가능하게 한 기술적인 제일 원인을 말하자면 컴퓨터나 복사기 등 하드웨어의 발명보다는 인간의 자유로운 논리능력 구사의 장을 열어 놓은 디지털 정보의 등장을 꼽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화의 물결은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구텐베르크 이후 수백년을 눈덩이처럼 굴러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정보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정보의 디지털화로 가능하게 된 급격한 정보효용의 증가와 양상의 변화인 디지털 혁명인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 우리가 정보혁명이라는 현상을 말할 때에는 곧 이 디지털적 정보 처리에 의한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뜻하기로 한다.
2. 디지털 기술과 삶의 변화
한 때 정보화 사회가 온다는 말이 요란하더니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예언자처럼 목소리 높이는 사람이 없다. 어느 새 정보화 사회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일감은 모두 컴퓨터 안에 들어가 버리고 집집마다 개인용 컴퓨터가 있으며 작업장에는 로봇이 있고 가전제품은 모두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내장하고 있다. 금융은 전자화되고 있으며 기업의 문서는 전자우편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시장은 인터넷 안에서 생성되고 있다. 미사일과 방위시스템들은 정보전자전의 도구로서 재편성되었다.
이 모든 변화가 대체 언제 일어났는가? 1980년대 초에 필자는 회사의 중앙 컴퓨터에서 가장 가까운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프로그래머였다. 당시로서는 가히 정보화의 첨병이라고도 할 만 했는데, 그래도 컴퓨터는 자못 경외의 대상이었다. 프로그램을 종이에 작성하여 타자수에게 맡겨 천공카드를 작성하고, 이를 오퍼레이터에게 넘긴 후 유리창 너머로 그 일의 결과가 찍힌 종이 두루마리가 언제 나올 것인가 기다려 보아야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다가 전산실에서 처음 터미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와 직접 대화하는 것 같은 근접감에 고무되어 더욱 일에 몰입했던 것도 기억한다. 이어 개인이 컴퓨터를 가질 수도 있다는 놀라운 역사를 목격하게 되었고, 불과 몇 년 후에는 상상 외에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0여년, 지금 컴퓨터는 나의 노트이며 펜이고 기억의 일부인 동시에 실험도구이고 매일 계속되는 작업의 도구이다. 컴퓨터가 발명된 것은 2차대전 직후이고 기업에서 널리 사용된지도 적어도 30년 가까이 되고 있지만 보통 사람의 삶을 온통 바꾸어 놓은 것은 불과 이 20년 이내의 일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10년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격변의 시기였으며 다시 그 중에서 마지막 5년은 인터넷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삶의 구조가 바뀐 대변혁기였다. 인류 역사 수천년에 짧은 세월이 이렇게 세상을 바꾼 적이 또 있었겠는가? 확실히 우리는 정보혁명기에 살고 있으며 다음 5년을 감히 예측하기 두려운 시점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눈에 보이는 컴퓨터의 수로 표상될 수 없다. 이런 이미지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보화란 훨씬 더 깊고 넓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선 조금만 사회적인 고찰을 해 보아도 사람들의 직업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7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 절반 이상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지금은 불과 10% 내외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업화와 정보화가 바로 잇대어 일어나고 있어서 구별하기 다소 곤란한 점이 있으나, 어쨌든 근년으로 올수록 공업인구보다는 서비스업 인구가 폭증한 것은 누구나 감지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의 저작가 Naisbitt은 그의 저서 Megatrends에서 20세기 후반의 산업구조에 대해 흔히 통용되는 이론인 1차 산업인 농어업과 광업, 또는 2차 산업인 제조업으로부터 3차 산업인 상업과 서비스업으로 산업의 중심이 옮겨 간다는 가설을 반박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통계에 의하면 사실상 팽창하고 있는 산업분야는 서비스업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로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던 정보산업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서비스업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특징적 산업(?)인 음식료업을 제외하고는 정보관련업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론, 출판, 변호사, 법무사, 회계사, 부동산소개업, 증권업, 광고업 등은 전형적으로 지식 또는 정보의 저장과 유통을 주임무로 하는 것이고, 일반 회사의 사무직종이 하는 일도 예외없이 사내 정보의 생성, 가공과 의사결정으로서 정보를 다루는 것을 업무로 삼고 있다. 회사의 부서 조직도 알고 보면 거개가 다루는 정보의 종류와 흐름에 따라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산현장은 어떠한가? 화학공장이나 제철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대부분도 더 이상 손과 발로 노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어실에서 공장의 상태를 컴퓨터 모니터로 점검하며 그렇게 입력된 정보를 머릿속으로 처리하여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감독자 역할을 한다. 작업복은 입었을지언정 육체노동자는 절대 아니다. 프로 복서 한 사람, 유명 가수 한 사람에게도 여러 명씩 정보를 입수하고 처리하는 조력자들이 딸려 있다. 선진국의 경우 80년대에 이미 정보관련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체 근로자의 80%가 넘어섰다 한다. 필자가 종사하는 교수직조차 이제 교육이라기 보다는 지식의 유통업으로 취급되는 낌새가 있는데 그것이 근거없는 불안감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업무보다 산업의 종류로 보았을 때, 우선 정보를 최종산물로 하는 산업으로서 신문, 방송, 출판, 통신, 우편, 전화, 연극, 영화, 문화서비스, 도서관 등이 있고, 주요 중간서비스가 정보로 이루어진 것들로서 학교, 연구기관, 행정관계업종, 고문, 브로커, 정보서비스, R & D 회사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TV, 라디오, 컴퓨터, 통신기기, 종이 등 정보기기와 정보매체의 생산업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업무의 내용으로는 여타 산업의 종사자들도 정보처리를 주무로 삼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람들의 직업분포로 바로 체감화되다시피, 우리 세대의 산업구조의 주된 변천 방향이 정보화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이제 없다. 산업혁명 이후 가장 중대한, 아니 아마도 그를 능가하는 혁명적 사회변화는 바로 우리가 오늘 목격하는바 정보화 혁명이라는 데에 인식이 일치하고 있다. 인류역사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다시 정보사회로 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활동의 중심이 재화의 생산과 유통에서 정보, 지식의 생산과 유통으로 이동함을 뜻한다. 이러한 통찰은 비단 경제부문의 산업구조 뿐 아니라 이 시대의 사회상 전반의 방향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보다 최근에 컴퓨터 통신망은 의사소통과 상호교류의 방식마저 바꾸고 있다. 사회의 구조와 사회의 구성 방식이 달라지고 있고, 금융, 생산, 경제, 정치, 교육, 예술 등이 모두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문화도 바뀌고 있다. 일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노는 방식이 총체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다. 통신은 정작 그 수단인 컴퓨터보다도 더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설명은 컴퓨터가 증기기관의 발명과 같다면 통신망은 철도의 부설과 같다는 비유로 할 수 있다. 기술적 근원은 전자에 있지만, 인류사회를 직접적으로 변혁한 것은 후자인 철도부설이었듯이 통신망의 발달은 가까운 장래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를 거의 속속들이 변화시키고 말 것이라 보아도 틀림없다. 통신의 대중화는 정보혁명 또는 디지털 혁명으로 불리우는 하나의 거대한 변혁을 바야흐로 본 궤도에 진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EDI(Electronic Data Interchange)가 보편화되고 있다. 모든 서류의 전달이 컴퓨터 통신망으로 되어 바로 컴퓨터내에 저장되는 것이다. 관련부서 끼리 전자적으로 서류를 주고 받으니, 직원들끼리는 이름은 알아도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사이들이 된다. 디지털 통신은 신용카드를 일상생활화하여, 인류의 가장 진한 애증이 서려 온 화폐까지 축출하고 있다. 20세기말 세계는 막 전자상거래(EC: Electornic Commerce)의 보편화의 문턱을 넘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큰 책방은 이제 인터넷 안에 존재한다. 은행도 백화점도 곧 뒤를 따를 것이다. 웬만한 품목의 거래는 더 이상 사람들이 다리 품을 팔아 정보를 입수하고 거래를 결정하는 옛 방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많은 직업들이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를 기본 형식으로 하여 효율에서의 이득을 보게 될 것이며, 많은 교육기회가 불특정 다수를 위해 통신 상에서 제공될 것이다. 학생들은 방정식이나 미적분을 잘 공부할 수 있는 사이트는 어디이며 역사 공부는 어디가 낫더라고 서로 이야기할 것이다. 학회도 통신을 기반으로 조직되어 지구 상에 흩어져 있는 동료 학자들이 인터넷 상에서 늘 모여 앉아 의견을 주고 받는 상황이 될 것이다. 원래 정보와 의견의 교류가 기반인 언론이나 정치 분야의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내일 우리들에게 실현될 일상을 상상해 보자. 재택근무, 홈쇼, 원격강의, 화상진료, 주문형 TV프로그램, 통신망 회의 들이 일상화될 것은 꿈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다시 과거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유목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도, 산업혁명으로 인한 근대사회의 도래도, 정보통신에 의한 새로운 변화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2. 디지털 문명,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은 세상이 끊임없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편리해지고 있다고 서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변화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적응해간다. 그런데 한동안 지난 후 되돌아보면 그 결과는 단순히 편리한 것들의 산만한 집합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총체적 사회양상의 변화이다. 지금 정보화의 진행이 바로 그러한 변화에 해당한다. 다방면의 변화가 동일한 원인에 의해 일관된 방향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서 정보화의 도도한 내면적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 문명의 방향이다.
컴퓨터의 발명이나 정보의 디지털화는 분명히 큰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도구이며 동기와 목적이 아니다. 비근한 비유를 들어보자.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꽤 큰 배를 만들고 결코 간단치 않은 항해술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배가 있고 항해술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저 모험삼아 신대륙발견에 나서지는 않았다. 무역수요의 증가와 이슬람에 의한 동방무역로의 차단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모험의 길을 나설 동기를 준 것이다. 사회 전체를 움직일 동기가 있어야 배가 뜨게 되고, 아무리 맹목적인 바다사나이도 배가 떠야 항해에 목숨을 걸 수 있게 된다. 15세기 유럽의 영웅적인 뱃사람들도 ‘바다로 가자’한 것이 아니라 ‘인도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디지털과 컴퓨터에 의해 정보화가 급진전하고 있지만 그 항해방향은 기술개발의 방향이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는 인류문명의 방향에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정보화의 흐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에게 던져져 있는 현실적 질문이며 사치한 철학적 취미 쯤으로 삼아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은 디지털 시대에의 승차권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기술적 요소들을 다룬다. 그러나 기술은 삶의 필요에 의해 출현하고 발전하는 것이며, 그렇게 출현한 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다시 새 유형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술적 환경의 미래는 기술자체에 의해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삶과 유리되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보화 또는 디지털 문명의 기술적 환경과 추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정보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근본적 동인과 추력을 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정보화의 원인적 배경
정보화로 총칭되는 변화의 원인으로서 첫째는 지식의 효용과 요구량이 증가했다는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기업의 활동범위가 세계로 넓어진 만큼, 필요한 정보의 범위와 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학 지식의 실제적 효용은 높아지고, 과학의 발전에 따라 기술의 내용도 복잡해졌다. 기술정보와 기술지식의 축적과 사용을 어떻게 제대로 하느냐 하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되었다.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제 탈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하며 그 이유를 지식이 곧 자원과 동의어가 되었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경영자의 정의를 지식의 적용과 그 성과에 책임을 지는 자로 내려야 한다면서, 이제 산업은 산업혁명과 생산성 혁명의 시대를 지나 경영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핵심이 정보임은 물론이다.
사회부문에서도 사회조직과 산업구조가 복잡해지면서 규칙도 많아지고 정보의 양과 효용도 증가했다. 필요한 지식의 양이 많고 지식의 효용이 커진 만큼 이제 우리는 학교에서 더 오래 머물러야 사회에 나올 수 있다. 학교만 25년 동안 다닌 사람이 주위에 흔하다. 그래도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고 합리적 의사결정능력을 기르는 것이 상당한 보답을 가져다 준다. 지식이 있는 곳으로 권력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정보화의 수요-공급적 측면에서의 원인을 형성한다.
둘째는 기계적 자동화에 의해 인간이 물리적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역할은 문제해결자 또는 의사결정자이며 주된 업무는 정보의 처리이다. 제철공장에 출근하는 사람 중 ‘철강노동자’답게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이는 이제 찾기 어렵다. 그들 대부분은 공장이나 제어실에서 기계를 지켜보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것도 대부분은 기계 자체에서 아예 멀리 떨어져 모니터에 나타나는 플랜트의 여러 정보를 보면서 상황을 판단하고 할 일을 생각해내며 조심스레 이를 수행하는 식의 근무를 한다. 이들은 더 이상 육체노동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빼앗으면 인간들은 실업을 할 것이라고 생각되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전개는 달랐다. 기계가 자동으로 일을 하면 인간은 기계를 제어하는 정보처리자가 되고 그러면 다시 기계는 인간이 관리할 수 있을 만큼 늘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이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 전환된 상태가 되었고 일인당 생산하는 재화와 소비하는 에너지는 전에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증가되었다. 이것이 정보화의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세째 원인으로는 정보기술의 발전, 특히 컴퓨터의 발명과 정보의 디지털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앞에 잠시 언급했듯이 이러한 도구의 발명이 정보화 사회를 가져왔다는 인식은 피상적이 될 위험이 있다. 오히려 컴퓨터나 정보의 디지털화는 지식의 중요성과 정보처리의 필요성이 증가한 때문에 필연적으로 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정보화의 한 상징적 시점으로서 미국에서 사무직 근로자가 육체근로자를 숫적으로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경으로 되어 있다. 이때에는 아직 컴퓨터가 기업에서 보편화되었을 때가 아니며 일반인은 컴퓨터 구경을 거의 못하던 시절이었다. 컴퓨터 사용 이전에 이미 사회적 정보화는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정보의 유용성이 증대했기 때문에 유능한 과학자들이 기를 쓰고 계산기를 발명하고 정보처리기술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 오히려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컴퓨터가 발명되자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정보화가 급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디지털의 등장은 정보화의 수단적, 도구적 원인이라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정보화의 원인적 배경으로서 지식의 효용과 요구량이 증가했다는 사회적 변화와 기계적 자동화에 의해 인간이 물리적 일에서 해방된 것, 그리고 정보기술의 발전의 세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셋은 우연히 동시대에 일어난 별도의 현상이 아니라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적 요소들이라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것이 왜 오늘날 더욱 급격한 변화로 끓어 오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도구적 측면에서 정보의 디지털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정보의 축적과 활용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적적 측면에서는 위에 거론한 눈에 보이는 사회현상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는 더 내재적이고 장기적인 흐름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인류의 기술문명사를 이끌고 있는 보다 심층적 동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정보화사회의 동인
우리는 위에서 세가지 측면에서 정보화사회의 혁명적인 도래를 가능하게 한 원인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가 오게 한 것은 운명이 아니라 결국 인간 자신이다. 위에 거론한 원인적 요소들은 결국 이러한 인간의 노력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획기적인 성과와 진보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동인을 가지고서 이러한 변화를 추구해 왔는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줄기의 동인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순수한 열정으로서의 보다 나은 사회로의 진보에 대한 추구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현실적인 경제적 동인이다. 전자가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람들을 공통의 원대한 이상에 봉사시켜 오늘의 정보화 사회로 도달케 했다면, 후자는 각 개인이 매 시간 목전의 이익을 좇는 행동들이 역사의 전개를 따라 부지불식간 큰 흐름을 이루어 정보화사회로 진입하게 했다고 대비하여 말할 수 있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늘 이상향을 꿈꾸어 왔다. 그리스에서는 황금의 시대라는 말로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의 시대라는 말로 그 꿈을 질박했던 상고시대에 투영시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꿈을 과거가 아닌 미래에 투사하여 인류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며 보다 가까이는 토마스 모어 경의 ‘유토피아’가 유명하다. 공산주의의 경우와 같이 미래에의 희망적 비전이 곧 거대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역사의 굴곡으로 결과되기도 하며, 보다 작은 규모로는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그러한 이상향의 비전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 개인의 인생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어떠한 시대를 우리가 진보의 시대라고 할 때 이는 모종의 이상향을 전제하고 그리로 향해 나아가는 성과를 일컬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상향의 사회적인 속성을 다룬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달리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는 인간의 계몽된 지성에 의해 형성되는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베이컨은 근대 과학의 초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예언자적 존재로 부각된다. 베이컨의 시대에도 이미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 무언가 깊고 큰 변화가 세상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면 사람들은 희망의 눈을 가지고 다가오는 역사의 지평을 바라보게 된다. 당시 과학의 사제이며 예언자였던 베이컨은 인류의 역사를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사람들이 무언가를 불가능하다고 속단해 버리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새 아틀란티스’에서 그 곳 장로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갈파한다. “우리 체제의 목적은 세상의 원인들에 대한 지식을 얻고, 사물들의 비밀한 움직임을 발견하며, 인간의 제국을 확장하여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베이컨의 이상향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우리에게로 직접적으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하나의 범세계적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한다.
서구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 이데올로기를 별 비판없이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정부는 93년도에 대전에서 대규모의 엑스포를 개최했고 아직도 그때의 시설들을 기반으로 엑스포 과학공원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그 공원의 이름은 어느 새 영문으로 ‘엑스피아’로 되어 있으며, 전시관의 명칭도 자연과 생명관은 바이오토피아, 전기에너지관은 에너토피아, 그리고 어느 기업관은 테크노피아 등 ‘피아’합성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다. 우리는 그 외에도 컴퓨토피아, 커뮤니카토피아 라는 합성어를 광고 등에서 늘 접한다. 이렇듯 현대 과학과 기술은 유토피아에의 꿈과 합일되어 있다.
미래의 희망을 어딘가에 거는 것, 그리고 만인이 함께 그 비전을 공유하는 것, 그것은 역사의 무서운 추력이 된다. 요약하면 20세기 후반에서 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희망은 다분히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의 정보화를 가져 온 동인일 뿐 아니라 앞으로도 기술 발전을 수단으로 하여 미래의 우리 사회 모습을 형성하여 나가게 될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번영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동인
비록 정보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복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만인이 믿는다고 하여도, 그에 대한 적절한 현실적 보상과 강화가 없다면 이러한 열광적 정보화 열기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화 혁명의 배후에는 인간들의 공통된 이상향적 희망 외에 다른 현실적 동인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구체적인 기술발전 노력들이 경주되는 메커니즘을 물음으로써 그 해답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다.
오늘날 가장 열심있는 첨단연구개발의 후원자들은 누구인가? 기업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내일의 이윤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내일의 생명을 부지하게 해 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기술개발이 없이는 내일의 경쟁력이 없고,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아무리 몸집이 커도 틀림없이 머지않아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국가연구소들에 정부는 왜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는가? 연구원들에게 직장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나 연구를 통하여 이상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그것 역시 국가 차원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정보통신의 인프라의 예를 들어 보자. 기업은 정보통신력의 제고로 인한 경쟁력 확보를 사활의 관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국가도 자기 몫의 일로서 정보고속도로 구축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술개발의 방향과 추진력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동인에서 나오고 있다. 현대의 모든 국가의 국시는 번영이며, 이는 거의 경제적 번영을 의미한다 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이렇듯 폭발적인 변화의 에너지 원은 과학 자체도 아니고 국가정책도 아니고 개인적 흥미도 아니다. 바로 번영의 가치관과 경제적 동인, 그리고 경쟁의 원리이다. 개인도 살아 남으려면 이러한 사회의 동인에 적응하고 뛰어 들어야 한다. 이런 것이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 따위를 주제로 삼아 사치하고 느긋한 논란을 벌일 겨를이 우리네 정부 고위직들과 경제인들에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경제적 동인, 또는 더 깊은 배후에 깔려있는 번영의 이데올로기가 과연 기술발전의 보다 인간적 동인인 이상향의 추구와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기술발전의 속도와 방향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의 급격한 정보화 혁명이 과연 우리를 어떠한 미래로 데려 갈 것인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낙관론자가 될 수도 있고 비관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차이의 폭은 인류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크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떠하든 현재 우리에게는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천시켜나가게 할 것인가 하는 반대 방향의 두 가지 문제가 주어져 있다. 위와 같은 동인의 존재를 음미해 볼 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두 문제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기력하게 대응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보화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약속과 부정적인 위협을 고찰해 보자.
3. 약속과 위협
정보화의 세계, 디지털의 세상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가져다 줄 것인가? 우리는 보다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 역사에서 지혜를 빌려 올 길 조차 없는 새로운 곤란에 봉착할 것인가?
(1) 장미빛 미래
우리는 베이컨의 ‘새 아틀랜티스’에 담겨진,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의해 펼쳐질 수 있는 이상의 세계를 잠깐 이야기하였다. 그 이상의 뒤에 있는 믿음은 이런 것이다. 인간의 지식의 증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이다. 베이컨의 유명한 말대로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2,30년 후의 우리 사회를 거의 낙원에 가까운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100년간 쏟아졌던 많은 과학공상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의 사회는 그런 환상적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낙관적 미래상을 이야기하자면, 요컨대 우리는 아테네의 전설적 황금시대의 부유한 시민과 같은 삶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의 집은 자동기계와 전자기기, 그리고 로봇 등으로 장치될 것이다. 환경은 한때 악화되었지만 그것은 미숙한 산업방식 때문이며 곧 극복될 것이다. 새로운 첨단 생산방법들은 무공해이며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충분한 물품을 인류에 제공할 것이다. 비록 인류는 번성하여 많아지고 지구는 고갈되어 가겠지만 기술은 이 문제에도 다시 구원의 손을 뻗어 우리에게 우주의 식민지를 선사할 것이다. 에너지는 무한에 가까운 핵융합 에너지로 대체될 것이다. 정치는 통신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취할 것이고, 지식은 도처에 넘쳐 학교의 고된 수업을 옛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에덴 동산의 아담처럼 전원을 거닐거나, 진리를 찾아 연구생활을 하거나, 즐거움을 좇아 오락실이나 바에서 살거나, 평화롭게 오래 사는 것이 정 시시하면 스타트랙 함대원이 되어 모험을 찾아 나서면 된다. 이것이 극단적 낙관론자들의 미래기술문명이다.
(2) 1984년
이와는 대조되는 음울한 분위기의 전망이 조지 오웰의 ‘1984년’에 제시되어 있다. ‘1984년’은 확실히 디스토피아(Dystopia), 즉 반 유토피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인간의 자유를 세밀한 부분까지 억압하는 정부의 완벽한 제어 하에 살아가야 한다. 낮이나 밤이나 미디어를 통한 정부의 선전에 세뇌당하며, 그들의 생각까지 정부에 감시당하며 살아간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보려는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 1984년은 지나갔다. 우리는 얼마나 이 음울한 예언에 근접해 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났는가?
1948년 이 책을 쓴 오웰은 공산주의만을 겨냥하여 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더 이전에 출현한 나치즘에 대해서도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라디오와 활동사진이 없었다면 아무리 히틀러의 재능이라해도 철학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 민족을 그렇게 외곬의 열광으로 몰아 갈 수 있었겠는가? ‘1984년’은 정보기술의 발달이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 나치즘에 의해 단초가 보여졌고,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문제가 제시되고 있었으며, 미래의 어떠한 사회에서도 현실화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이 침해는 특정인의 음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역학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형태로 출현할 수 있다. 냉철히 생각해 보자. TV광고는 그들이 말하는대로 우리에게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세뇌시키고 조종하려 노력하는가? 정보기술의 발달은 분명히 인간에게 막강한 힘을 주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우리는 누가 왜 어떻게 이 힘을 사용하는가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하게 되었다.
정보화 사회에서의 이러한 권력집중과 개인에 대한 침해는 비관론자들의 주된 테마가 되어 왔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달은 오히려 행정과 산업 등 분야에서 사회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관점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정보가 어디에나 자유로이 흐른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경쟁상황에 놓이게 되고 정부의 정책 대신에 시장의 원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자유는 꽃피고 오웰이 걱정했던 생각의 통제나 정치적 조작, 폭력과 전쟁 등의 가능성은 대폭 제거된다고 낙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어떤 결과를 예상하는가?
(3) 엔트로피
다른 우려로서는 정보기술 등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자칫 자신이 서 있는 땅 밑을 파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제레미 리프킨 등이 제기하는 엔트로피 문제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어떤 경우에도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는 시간이 감에 따라 항상 증가하도록 되어있다. 뜨거운 쇠는 식게 마련인데 이는 열이 한편으로 모여있던 정돈되고 유용한 상황의 소멸을 뜻한다. 물론 전체적으로 에너지는 보존되지만 더 이상 사용가능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내어 도구를 만들 수 있다. 도구는 닳게 마련이고 분해되고 땅에 버려진 쇠는 다시 채굴될 수 없는 형태가 된다.
그러면 철을 추출해내거나 도구를 만드는 과정은 질서가 증가하고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때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그 유용성의 증가보다 더 큰 에너지의 사용이 반드시 요구된다. 미국농부의 경우 270칼로리짜리 옥수수 깡통 하나의 생산에 2,790칼로리에 해당하는 연료와 농약과 비료를 소비해야 한다. 즉 소비된 유용성의 10분의 1은 식량이 되고 10분의 9는 허비되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즉, 전체 지구의 유용성을 떨어 뜨린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통해 재화의 가치를 증대시킨다는 것이 우주적으로 보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엔트로피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큰 이유는 인간이 더욱 발달된 기술을 사용할수록 일의 효율이 높아지는데, 바로 이러한 효율이라는 것이 한 사람당 엔트로피 증가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례로 재레식 농부 한 사람은 1칼로리의 노동력을 가지고 겨우 10칼로리의 식량을 생산한다. 미국의 농부는 1칼로리의 노동으로 무려 6000칼로리의 식량을 생산해낸다. 이 말을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보면 이 미국농부는 아프리카의 농부보다 훨씬 빨리 지구를 고갈시키는 덕분에 더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된다. 결국 기술문명이란 더욱 빠른 속도로 지구를 파먹고 삶의 터전을 결딴내는 방법에 불과하다. 정보화도 예외일 수 없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보기술이 보다 발전되면 우리는 생산의 에너지 측면에서의 효율도 높일 수 있을 것이며 엔트로피 증가율도 줄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이 문제해결에 충분할지는 불분명하다. 근거없는 희망보다는 책임있는 대응이 중요하다. 우선 우리는 정보화의 시대에 있어서 기술발전을 추구하되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많이 소유하기 보다는 많이 누려야 하며, 부유하게 살기 보다는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편안하고 편리하기 보다는 즐거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보편화시켜야 한다. 나이스 빗이 이야기한 하이터치라든가 최근 연구가 되고 있는 감성공학 등의 의미도 그런데 부회할 수 있지 않나 한다.
(4) 노동의 종말
기술의 유토피아 주의자들은 그들의 공상소설과 영화에서 미래의 사람들을 모든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버렸다. 거기서는 거대한 기계들이 아주 조용히 매우 신비로운 방법으로 물건을 만들고 일들을 해 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는 이런 공상이 기술발전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과 직결되어 있다. 실업의 두려움이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서 자동화로 인한 노동수요의 축소와 대량 실업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는 극복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단순노동의 직업을 스틸칼라 즉 로봇과 기계들에 양도하는 대신 감독자와 의사결정자 또는 계획자로서의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되어 실업을 면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자동화가 진행되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노동직 만큼의 감독직을 얻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시설의 확대를 의미한다. 한 사람에 의한 생산량도 늘겠지만 생산품목도 증가할 수 있다. 어쨌든 수요 측에서 보면 한 사람에 의한 재화와 에너지의 소비는 증가해야만 한다. 5,60년대에서의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생산자동화에 의한 실업 우려는 이러한 경제적 성장이라는 마술에 의해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경제학자들은 성장이라는 축복이 있는 한(그들중 많은 사람에게 있어 인류의 진보는 성장과 동의어였다) 공산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긴장은 심각한 것이 될 수 없다고 득의양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성장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도 성장이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난다면 지구는 당장 환경문제와 더불어 에너지 문제, 자원고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위에 거론한 엔트로피 문제를 겪어야 한다. 이제 세월이 흘러 세기말이 되었고 우리는 가설들보다는 통계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있게 되었다. 1981년에서 1991년 사이에 미국의 제조부문에서는 18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우리 세대는 카터 대통령 시대에 시작된 미국내 실업의 우려의 여파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때 주요한 원인으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외국의 값싼 노동력과 그에 의한 미국 기업의 국제 경쟁력 상실이 지적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전문가들은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5,60년대에 우려했던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효과,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에서 미국은 일본에 밀려 지리멸렬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일본을 따라 로봇으로 자동차 공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필자의 친척인 한 교포도 이때 제너럴모터즈의 공장에서 고용정지를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미국 자동차 노동자의 실업은 일본 사람들 때문인가, 아니면 생산자동화 때문인가? 생산자동화는 높은 효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시장경제와 당시의 자동화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이 아니었어도 미국의 어느 회사인가가 먼저 자동화를 확대했을 것이고 나머지도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업은 일어났을 것이다. 결국 성장이라는 마약이 약화되었을 때, 잠복하고 지연되어 있던 이 자동화에 의한 실업문제가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정보화는 자동화 문제를 완화할 것인가? 미국 내 제조업의 경우 컴퓨터에 의한 자동화 증진 등에 힘입어 1979년부터 92년까지 35%의 생산성 증가를 이루었다. 반면 노동력은 15% 감축되었다. 그만큼 숫자의 기계 감독자 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는 희망에 불과하다. 오직 성장, 즉 미국경제의 확장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지식산업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것은 임시적이며 특수상황에 속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면 정보화 사회니까 육체근로자가 줄어 든 만큼 사무직의 숫자가 늘어났을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컴퓨터는 이제 육체적 노동 뿐 아니라 정신 근로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1984년 부터 10년간 미국에서는 300만개의 사무직 일자리가 사라졌다. 사무직의 많은 일들도 일정한 규칙과 지식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컴퓨터로 대체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리엔지니어링에 의해서 미국의 금융업에서만 앞으로 7년간 30%이상의 인원이 감축될 것이란 전망이 앤더슨 컨설팅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대규모의 인력 절약을 할 수 있는 리엔지니어링도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하게 된 부분이 많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정직히 말한다면 정보화는 사람들의 일의 성격을 바꾸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일을 없애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기계적 자동화가 스틸칼라 노동력을 도입하였다면 정보화는 실리콘 칼라 즉 반도체로 이루어진 노동력을 현장에 들여오고 있는 것이다.
육체노동에서 밀려나고 단순한 정신노동도 빼앗긴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두가 창의력으로 살고 벤쳐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정한 일에서 밀려 난 사람들이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려고 노력할수록 경제의 구조는 거품에 싸이고 건전성을 잃게 될 수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우리는 자동화와 정보화는 할수록 좋고 효율은 높을수록 좋다고 믿고 있는데, 이제는 오히려 지나침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의심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경제는 이미 글로벌 경쟁시대로 돌입했다. 서서 생각할 시간은 없다. 남이 내 기회를 빼앗기 전에 성장과 효율의 게임에 몰두하지 않으면 생존도 없다. 우리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인지도 모른다.
(5) 모럴리티 갭
한편 아놀드 토인비는 ‘모럴리티 갭 (Morality Gap)’이라는 용어로 기술 문명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은 확실히 전에 없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힘에 걸맞는 지혜와 윤리는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럴리티 갭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이 갭을 메꾸기 위하여 인간은 앞으로 더 많이 철학과 신학 등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성숙하지 못한 인류에게 주어진 기술문명이라는 막강한 힘은 자신을 파멸시키거나 불행하게 할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영화나 소설이 통제기능을 잃어 버린 탓에 발발하는 핵전쟁의 위험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힘만 소유하는데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기 확신에 차서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될 것인가?
(6) 계획은 가능한가
현재로서는 우리가 낙관이나 비관 중 하나의 태도를 확신있게 취할 방법도 이유도 없어 보인다. 단지 그러한 양편의 논리와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이 혁명의 진전을 지켜보는 것이 도움이 될 뿐이다. 엘빈 토플러와 같은 대표적 미래학자 조차도 첫번째 베스트 셀러였던 ‘미래충격’에서는 지나친 속도의 변화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적응 곤란에 대해 우려했다가, 후속작인 ‘제3의 물결’에서는 시각을 돌려 대폭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서 토플러는 임박한 정보화사회를 맞아 인류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적절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기상예측으로부터 가족계획에 이르기 까지 발달한 현대적 기술은 이러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을 도와줄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미래학은 사회와 기술의 발전, 인간적 가치들, 사회의 추세 등을 종합하여 인류의 미래를 계획하려 한다. 그러나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이러한 미래학적 시도는 한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계획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제는 결코 쉬운 전제가 아니다.
4. 세계관과 문화의 변화
(1) 컴퓨터와 심리학과 인간관
정보기술의 편만함은 우리들의 사회생활 뿐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며 장기적으로 문화와 규범을 변천시키는 원인이 된다.
컴퓨터 관련기술의 발달과 심리학의 발전은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과학의 일부로서의 심리학은 19세기말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심리학은 피실험자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얼마 못 가 방법론적 한계에 부딪혔다. 인간이 자기 내면의 과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분명해진 객관성의 상실은 실증주의로 대표되는 당시의 과학정신에 의해 철저히 비판되기에 이르른다.
이에 1910년 왓슨과 스키너 등 후세 ‘행동주의자’로 명명되는 젊고 공격적인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 즉 행동의 관찰만이 과학적 심리학의 방법적 기초라고 선언하고 행동주의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출발시켰다. 우리는 인간이 어떠한 조건에서는 어떠한 행동 특성을 보인다는 것 이상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든가 하는 추측은 정확할 수도 없고 과학적일 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바른 과학을 세우려는 열정으로 확산되어 순식간에 행동주의 심리학은 미국과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40년 가까이 인간은 내부가 무시된 블랙박스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 마침내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이 해 9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는 ‘인간행동의 뇌내 메커니즘’이라는 제목을 가진 학회가 개최되었다. 존 폰 노이만 등 저명한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리학자 칼 래쉴리 등은 사람이 마음 속에 계획을 구성하고 그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여러가지 예를 들었다. 이런 당연한 지적은 그러나 행동주의 심리학에 통렬한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 보이는 인간의 내면에 대해 무언가 연구해야 된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인지심리학의 시작이었으며, 행동주의 심리학은 그 득세만큼이나 빨리 이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몰락하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억작용, 지각작용, 의사결정, 문제해결 등의 과정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왔고 빠른 속도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40년에 걸친 행동주의 심리학의 독단을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이 하필 1948년이었던가? 물론 이유가 있다. 1946년 최초의 컴퓨터인 ENIAC이 제작되었다. 곧 이어 존 폰 노이만은 소프트웨어의 개념을 창시하였다. 소프트웨어는 무형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컴퓨터의 행동을 확실히 제어하는 실재이다. 이에 심리학자들이 어떠한 충격과 영감을 받았을까는 곰곰히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이후 인지심리학의 주된 테마는 ‘인간 정보처리’ 과정이었는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인지심리학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정보처리의 과정을 밝혀내기 시작하자 컴퓨터과학 쪽에서도 새로운 사건이 촉발되었다. 인공지능의 출현이 그것이다. 1956년 미국 뉴햄프셔 주의 다트머스 대학에 모인 존 매카시, 마빈 민스키, 허버트 사이먼 등 십여명의 소장 학자들은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적 행동과 유사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연구를 하나의 학문분야로 출범시키고 인공지능이라 명명하였다.
심리학과 컴퓨터과학이 왜 이렇게 자극을 주고 받았는가는 자명하다. 컴퓨터는 가장 많이 인간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은 인공지능의 참고자료나 목표가 되고, 인공지능의 모형은 인간에 대한 연구에 강력한 검증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트머스 모임 불과 몇 주 후, MIT에 모인 일단의 학자들은 인간의 인지적 기능과 컴퓨터의 기능을 연결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것이 ‘인지과학’ (Cognitive Science)이 탄생하였다. 여기서 인지란 인간의 인지와 기계에 의한 인지를 총칭하는 뜻에서 쓰인 단어이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으나 이는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 통찰을 주는 역사적 맥락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환경과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결정론적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은 적절한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썰물진 후에도 이러한 인간관은 사회과학과 일반적 인간관에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조지 오웰의 ‘1984년’을 회상하게 된다. 사람들은 감시되고 세뇌되며 조종된다. 헉슬리의 ‘용감한 신세계’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의 행복의 느낌까지 프로그램되고 있다. 실제로 행동주의 심리학의 대표적 거장인 스키너는 서구 사회를 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잘 결정하여 인간에 대한 ‘행동공학적’ 제어와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렇게 되도록 조건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정보화 사회의 환경과 디지털 기술들은 인간에 대한 행동주의적인 조작에 언제든지 사용될 수 있다. 오늘날 이미 정보기술을 이용한 인간에 대한 조작은 학교와 기업과 병원과 메스미디어의 도구통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이 자기에게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면 한번 광고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광고문구의 효과를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 인지심리학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정보처리의 기관으로 이해한다. 우리 행동의 의미는 해체되고 시스템 안의 부품처럼 기능만이 정의되어 그 성능과 정확도가 측정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기계에 의한 정보처리로 대체하는 것이 시도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보의 디지털화는 기계에 의한 정보의 논리적 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모형으로 인식되며 한 걸음 나아가서 인간은 곧 논리적 정보처리기관으로 인식된다. 이와 같이 인간과 컴퓨터가 구별되지 않기 시작하면 이는 우리의 자신관과 인간관을 비인격화시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컴퓨터를 쓰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컴퓨터의 그것에 투영하여 생각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자신을 객체화하여 바라보다 보면 자기 정체성을 잃고 인간 경험의 진지성을 외면하게도 된다. 이것이 정말 인지심리학이 주장하는 인간관인가? 인지심리학은 인간의 정보처리 측면을 선택적으로 다루는 것이지, 인간이 정보처리기계에 ‘불과하다’고 시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비인격적 인간관을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한 것이다.
어쨌든 현대의 대규모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인간-기계 시스템이며 인지적 시스템이다. 그것은 인지심리학적 인간, 즉 정보처리자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며, 따라서 인간은 그 시스템 내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일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동료 인간들을 단지 그러한 기능적 존재로 여기게 되어 갈지 모른다. 어떠한 내용이든 인간을 대하여 ‘~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보화의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인간관과 자기정체성에 대한 위험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이웃과 사회와 문화
중고생 자녀에게 컴퓨터를 사 준 부모들이 가장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아이가 통신에 빠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자녀가 통신을 하기 시작하면 거실과의 사이에 방문은 굳게 닫히고 바깥을 향하여 창문은 활짝 열리는 형국이 된다. 그는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행동규범에 있어 부모와 가족은 빠르게 상대적 존재로 전락한다. 가상공간의 시대에 가족은 더 이상 문화공동체가 못될지 모른다. 지역사회의 동화적 기능도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통신망에서 생성되는 사회가 문화공동체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가상공간 속의 인간은 전인격이 아니고 그러한 만남에서는 삶이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보화사회에서 이웃을 잃어가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회사에서 정보화의 여파로 동료들을 잃었다. 못 만나는 먼 곳 친구와의 전자 우편은 반가운 것이지만 근처 어딘가에 있을 동료와 전자우편으로 공동작업하는 것은 메마른 일이다. 재택근무는 참으로 무미건조하고 심심한 일이다. 우리는 이웃이 필요하다.
대신 사람들은 미디어 안에서 새로운 이웃을 얻었다. 좋은 점은 그 이웃은 전국민의 이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몇백 킬로 떨어진 도시로 여행을 가서도 그 곳 사람들과 은주 또는 대발이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다. 물론 은주도 대발이도 TV드라마의 극중 인물이다. 전 국민이 대발이네 집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선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통해 얻는 간접경험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공통적 경험이 되면서도 허구적 경험에 불과하다. 그래도 바쁜 오늘의 우리에게 그만큼 가슴에 와 닿는 다른 인생도 없다. 우리는 진짜 이웃들의 인생에 대해서는 전편 까지의 줄거리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매스미디어의 역할에 큰 문제점을 시사한다. 대부분의 국민은 미국에 살아본 적이 없다. 그들의 미국 경험은 헐리우드를 통해서이다. 헐리우드의 시각을 통해서 본 미국은 실제의 미국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인이 아닌 우리는 헐리우드의 특수성을 걸러내며 볼 문화적 필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헐리우드에 무차별하게 영향을 받고 영화의 주인공들의 행동에 빠르게 동화되어 간다. 허구적 이웃들이지만 그 영향력 만큼은 사실적 이웃들보다 더 사실적인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이 문제는 새로운 단면을 가진다. 즉, 이러한 정보적 경험이 그나마 개인화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TV는 곧 주문형 프로그램에 대화형 TV로 변천해 갈 것이다. 이미 우리는 비디오를 골라서 빌려 보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서 볼 때, 그러한 경험에서는 더 이상 규범적 동질성이 강화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문화형성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프로그램들에 시간을 빼앗기고 거의 모든 경험을 거기 의존하게 될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 문화해체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인터넷 안에도 너무나 다양한 문화가 있어서 매우 일탈적 유형의 사람들도 동료를 찾아 사회를 이룬다. 가상공간과 가상사회로 부터 우리의 실제 공동체와 사회를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지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5.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서
여기까지 우리는 정보화의 현상과 동인, 전망, 그리고 외부적 문제와 내면적 문제를 차례로 다루어 왔다. 우리는 흔히 디지털 기술로 인해 인간의 능력이 확장되고 부가 증진되는 오늘의 상황을 의심없는 진보의 시대로 생각한다. 분명 여기에 진보의 기회는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진보는 우리의 인간적 선택과 무관할 수 없다.
흔히 인간이 정보화의 한 현상으로 단조로운 육체 노동을 떠나 정보처리적인 일을 맡게 된 것을 들어 진보라고 생각한다. 보다 인간적인 일을 하게 된 것이며 삶을 기계적인 일에 낭비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긍정한다. 과연 이것이 노동의 질을 높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가?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가족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손으로 장작을 패는 동안 머리는 다른 무엇이든 할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글을 쓰거나 프로그램을 짜거나 자동화공장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하고 가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 머리를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하게 되면서 우리는 정말 머리를 써야 할, 보다 인간적인 일들을 할 여유를 빼앗기게 되었다. 육체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인간적인 것은 아니며 진보의 동의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정보화의 시대는 인간의 능력이 증진되고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는 시대인 것이 사실이다. 디지털적 도구를 사용하여 시스템 차원에서 극도의 효율이 실현되고, 생산성이 높으니 적은 시간으로 더 많은 부가 창출된다. 이것은 번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에 부합하고 경제라는 우리의 소망을 충족한다. 어차피 이것을 위해 기업은 활동하고 개인은 수고하며 국가는 투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정보화가 가져다 주는 생산성과 부는 아주 실질적 진보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앞의 절에서 정보화의 약속과 위협을 살펴 보면서 생산성이 조건없는 축복이 아니며 우리가 반드시 다루어내어야만 하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정보화가 진행되고 생산성이 증가될 때 경제적 이득과 함꼐 실업의 문제와 엔트로피의 문제가 제기된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생산성이 높아진 결과 더 이상 내가 그 회사에 필요치 않다고 선고받는다면 그래도 그것을 진보로 여길 수 있는가? 또는 나는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 아들이나 손자의 몫의 엔트로피를 미리 가불하여 살아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가? 또 경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행복을 위한 보편적 도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높아진 생산성을 우리 인생의 여유로 돌리지 못하고 더 많은 일을 하는데 투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받는다면 그것을 과연 부의 증진으로 볼 수 있는가? 수단에서의 진보가 목적을 잠식해서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한편 정보화를 통해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더 많은 편리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진보인가?아마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확신있게 그렇다고 (특히 행복을 삶의 지상적 가치로 보았을 때) 긍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편리와 즐거움이 우리의 삶의 의미를 오히려 감소시킬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예를 들어 모두들 저녁에는 가상공간의 경험과 대화형 TV에 시간을 쏟고 낮에는 그에 필요한 돈을 벌려고 일해야 한다면 이웃은 상실되고 문화는 해체되며 삶의 내용은 실종될 것이다.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는 재미있게 살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마치 이성교제의 즐거움을 계속 갖기 위하여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는 처녀와도 같다. 오늘의 재미와 편리에 팔려 인생의 중요한 것을 잃고 있으면서도 무엇를 잃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즐거움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역사를 두고 논란을 야기하였던 문제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즐거움을 곧 행복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취제는 치료약일 수 없고 마약은 보약일 수 없다.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는 잠재적 수단(즉, 돈이나 권력, 성적 쾌락 등)의 확보가 곧 행복일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는 빠른 것은 좋은 것이며 작고 간편하고 기능적이고 강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곧 진보라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맹목적 추구는 우리를 진정한 행복에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보화 사회는 곧 낙원이라는 보장이 없고 디지털 기술은 곧 축복이라는 약속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천시켜나가게 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방향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요컨대 사회적으로는 책임있는 기술의 개발과 현명한 기술의 사용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는 삶의 목표와 가치를 자율적으로 정의하고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이고 기술지향적인 것이면 의례 좋은 것으로 알고 앞다투어 공적거리로 삼으려고 경쟁하는 공무원들이나, 새로운 것을 부단히 쫓아 목적없는 과정에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바쳐 종속되어버리는 개인이나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정보화나 디지털 기술을 우리의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보이는 정보화의 물결에 팔려 보이지 않는 삶의 본질이 침수되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는대로 우리가 미래를 선택하고 계획하는 것이 해답인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도 어렵다. 만일 인류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능력과 실천능력이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노도 키도 없이 항해계획만 세우는 셈인 까닭이다. 역사나 문화의 변천은 위로부터의 계획에 따르기 보다는 흔히 개별적 움직임들이 아래로부터 위로 종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방식으로 전진한다. 인류가 과연 민주적으로 일치하여 미래를 계획할 수 있으며, 또 그대로 실천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한가지 긴요하고도 실제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가치관의 확립과 강화가 시급히 또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권력자의 손에 들려 있는 항해계획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중요한 것은 대중 공통의 방향감각과 가치관인 것이다. 이 장에서의 긴 논의의 종합으로서 우리는 인간 중심의 사회가 유지되어야 하며 그 인간적 가치들이 온존되어야 함을 확인했다고 믿는다. 이를 요약하면 ‘아름다운 인간의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의 각 장에서 정보화 사회의 각 기술과 단면을 살펴보겠지만, 그 각 부분에서도 독자들은 이 ‘아름다운 인간의 사회’라는 방향 기준을 명시적으로 반복 적용하며 내용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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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디지털 문화예술 연구회 < http://culture.kaist.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