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GTI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의도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강 둔치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간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만치서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베이스만 '쿵쿵'거리며 가까워진다. 시선을 돌리면 형형색색의 안개등, 네온빛이 소리와 함께 다가와 우렁찬 배기음만 남기고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그 괴물의 꽁무니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엇비슷한 소리와 불빛들이 줄줄이 이어져 멀어진다. 오늘도 카폭들의 주행 아닌 비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공기를 가르는 그 묵직한 소리에 피가 끓는다.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다. 미지의 오너와 벌이는 한 판 배틀의 환상. 그러나 내게는 배틀을 위한 머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필요 이상의 겉치장은 드라이브와 아무 상관없는 것들. 튀지 않는 겉모습에서는 전혀 성능을 짐작할 수 없고 비슷한 급 차들과의 경쟁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는 뛰어난 성능을 가진 그런 머신이 내게는 필요하다.
VR6 이전 골프 라인업 최고모델 ,1.8ℓ5밸브 저압터보 엔진 얹고
그래서 내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차가 바로 폴크스바겐 골프 VR6였다. 5세대로 넘어오면서 없어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핫 해치 매니아들을 위해 폴크스바겐은 VR6를 한결 세련되게 다듬고 2.8ℓ V6 엔진에 풀타임 4WD 시스템까지 얹어 4모션(motio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갖고싶은 차의 넘버 투는 골프 4모션이다. 2년 전 BMW M 쿠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넘버 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릴레이 시승에 마련된 골프는 4모션이 아닌 GTI지만, GTI 역시 만만치 않은 힘이 실려 있는 이니셜이다. 골프 VR6나 코라도 G60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 라인업의 최고봉으로 자리잡고 있던 모델이기 때문이다. 입맛 잃은 여름날, 감칠맛 나는 드라이브를 기대하며 두터운 도어를 열고 레카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잠시 국내시장에서 철수했다가 새로운 딜러와 함께 돌아온 폴크스바겐은 간판모델인 골프 GTI라는 밥상 위에 3도어와 매뉴얼 트랜스미션이라는 입맛 당기는 반찬을 올려놓았다. 운전하는 즐거움을 위한 모델이라면 3도어는 몰라도 매뉴얼 트랜스미션은 필수적이다. 스포츠 모델에도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을 얹은 탓에 모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여타 수입차들과 비교하면 대단한 파격이다.
레카로제 시트는 몸을 단단히
잡아주고 2단계로 완전히 젖혀진다
튀지 않는 겈모습에 고성능을
감춘 머신을 꿈꾸는 류청희씨
실내의 허리 아랫부분은 블랙톤으로 차분하면서도 건강한 분위기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적게, 그리고 작게 사용된 짙은 브라운톤 우드 그레인이 눈을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스타일은 물론이고 운전감각, 여러 장치들의 조작에 이르기까지 독일차 특유의 절제, 단단함, 그리고 강인함이 골고루 배어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 마련된 다양한 편의장비들이 눈과 손을 즐겁게 해준다. 약간 높게 앉는 자세 덕분에 여전히 머리는 살짝 천장에 닿는다. 인슬라이딩 방식의 선루프가 달린 탓도 크겠다. 좌석 높낮이는 쉽게 조절할 수 있지만 등받이 조절은 여전히 다이얼 방식이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안는 레카로 시트는 한 번 맞춰 놓으면 종일 편안하다.
3도어라서 차 안팎에서 시트를 젖히기 쉽도록 등받이 양쪽에 모두 레버가 달려 있다. 접히는 방식도 타고 내리기 편리하도록 2단계로 완전히 앞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물론 원상복귀시킨 뒤에는 원래 조절해 놓았던 등받이 위치로 돌아와서 다시 조절할 필요가 없다.
해치백치고는 비교적 깊은 트렁크는 깔끔한 마무리로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6:4 비율로 나뉘어 접히는 뒷시트의 가운데 부분에도 헤드레스트가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에 마련된 팔걸이는 폭이 제법 넓어 어린이용 좌석으로도 쓸 수 있다.
GTI의 엔진은 윗급인 파사트는 물론 형제차인 아우디 A3와 A4에도 얹히는 1.8ℓ 터보 엔진이다. 아우디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5밸브 시스템과 저압터보를 갖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흔히 국산차에서 접했던 엔진배치와는 앞뒤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흡기 매니폴드가 앞쪽으로 나 있고, 여유공간이 충분한 뒤쪽으로 터보 로터와 배기 매니폴드가 자리잡고 있다. 흡기 필터로부터 흡기 매니폴드로 이어지는 파이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엔진룸 내부를 한 바퀴 크게 돌아 들어가는 것이다. 흡기관의 길이가 길면 응답성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GTI는 오히려 이런 배치를 통해 지나친 민감함을 배제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속 때나 감속 때 액셀러레이터 반응은 부드러움 속에 정확함이 녹아 있다.
MT로만 느낄 수 있는 드라이빙의 기쁨 ,골프에는 대중차 이상의 잠재력 내재되어
종종 찾던 와인딩 로드에는 푸른 빛 만발한 여름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참 교통량이 많은 시간이라 제대로 달려보지는 못했지만, 끈적끈적하게 매 코너를 감아돌 때마다 야금야금 커지는 그 드라이빙의 즐거움은 매뉴얼 시프트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것이다. 3단에서 4천rpm을 쓰나 4단에서 3천rpm을 쓰나 차이나는 것은 속도뿐이다. 힘과 소음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매끄러운 엔진반응이 내가 몇 단으로 달리고 있는가를 순간순간 잊게 만든다.
2천100rpm부터 4천600rpm까지 고르게 이어지는 21.43kgm의 최대토크는 무딘 감각을 지닌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빠르게 어깨 너머로 사라져가는 차들을 보면서 그 밋밋함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실감해 보시라.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한 차림새의 해치백이 미끄러지듯, 그러나 쏜살같이 자신의 차를 추월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경악하는 그 상대 운전자의 달걀만한 눈동자를 상상해보시라. 그 쾌감이란... 후훗.
1.8L DOHC 터보 150마력
엔진을 얹었다
독일차다운 단단함과 강인함을
간직한 골프 GTI에는 대중차
이상의 잠재력이 있다
물론 스포츠카가 아닌 대중차로서 스포츠 드라이빙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나의 몸무게까지 합쳐 1.3톤이 약간 넘는 무게에 150마력의 힘은 여유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서스펜션 역시 약간은 무른 듯 하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세팅은 횡가속도에 모자람 없이 깔끔하게 버텨준다. 이만하면 드라이빙을 즐기는 데에는 알맞겠다.
적당한 힘으로 운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GTI만큼 4모션 모델이 기대된다. 큰 엔진의 큰 출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섀시가 가져야 할 조건들이 더욱 많아진다. 때문에 골프에 내재된 잠재력은 보통 생각하는 대중차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잠재력과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차에서 내려 가만히 차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뚱뚱해지는 탓에 초대 모델의 아담함(오죽하면 미국시장에 '토끼(Rabbit)'라는 이름으로 팔았겠는가!)은 찾아보기 어렵다. 차체 밖으로 터져나올 듯 자리잡고 있는 피렐리 P6000 타이어가 끼워진 16인치 휠 덕분에 차의 모습은 튼튼한 운동화를 연상케 했다. 운동화... 어쩌면 GTI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대변할 수 있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뉴 비틀
되돌아볼 수 있는 과거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과거가 영화로운 것이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폴크스바겐 뉴 비틀은 그런 영화로운 과거를 오늘에 되살린 차다. 오리지널 비틀만큼 뉴 비틀도 컬트카의 자질을 갖고 있다. 옛 비틀은 평범한 차가 대중에 의해 컬트카가 되었다면 뉴 비틀은 대중을 위한 컬트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실물의 덩치는 훨씬 더 크다. 옛 비틀 모양의 풍선에 입김을 많이 불어넣으면 이런 모양이 나올까. 단아하고 클래식한 비틀이 골프의 뼈대 덕분에 훨씬 빵빵해졌다. 사실 뉴 비틀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비틀일 뿐 알맹이는 골프와 같다. 섀시는 물론 2.0ℓ 115마력 엔진 역시 골프와 나누어 쓴다.
원을 주제로 한 조형미 기가 막혀 , 섀시와 엔진은 골프와 나누어 써
밖에서 보는 뉴 비틀은 온통 원과 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선이 사용된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두세 곳뿐이다. 기가 막힌 조형미다. 앞뒤로 바퀴를 동그랗게 감싸는 귀여운 펜더는 놀랍게도 플라스틱이다. 스틸 패널보다 교환하기 간편할 뿐 아니라 비용도 싸서 미국에서는 저속충돌 테스트에서 수리비가 가장 적게 드는 모델로 꼽혔다. 리어 해치를 열면 아담한 크기의 트렁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벼운 쇼핑에나 어울릴 만한 크기다. 곰곰히 살펴보면 그다지 실용적인 구조는 아니다. 어차피 퍼스트카로 쓸 차는 아니기에 '이 정도야 봐줄 수 있지' 하고 곱게 봐 주며 넘어갔다. 뒷좌석을 접어 넘길 수 있는 해치백은 그래서 한 점 따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실내는 얘기가 다르다. 운전석 창문 위에 선글라스 보관함이 마련되어 있는 덕분에 룸미러 위에는 적당한 크기의 작은 사물함을 놓을 수 있다. 글로브 박스도 낮기는 하지만 2단으로 되어 있어 차에 관련된 서류는 거의 다 집어넣을 수 있다. 도어 밑의 맵포켓도 그물망으로 되어 웬만한 크기의 물건들은 구겨 넣으면 다 들어갈 정도고, 컵홀더도 예쁘장하게 4개가 마련되어 있다. 룸미러 밑에 숨어 있는 실내등도 불편하지만 독특하게 느껴진다.
깔끔한 세팅으로 1.3톤 무게에
150마력 출력으로 드라이빙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5밸브 시스템에 저압터보 엔진을
얹어 1천750rpm까지 21.4kg.m의
고른 최대토크가 나온다
밝은 베이지톤의 실내.빛 반사를
막기 위해 대시보드 위쪽을
검은색으로 처리했다
2.0L 15마력 엔진은 골프와
함께 쓴다
절제된 강인함과 독일식 유머러스함
골프 GTI는 4모션 다음의 최고급 모델로 1.8ℓ 5밸브 저압터보 엔진을 달고 있다. 매뉴얼 트랜스미션이 달려 있어 평범한 외모와는 달리 운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4모션 모델이 기대된다. 골프의 섀시와 엔진을 쓰는 뉴 비틀은 오리지널 비틀이 가지고 있던 컬트카의 자질을 충분히 이어받았다. 뒷좌석 공간은 좁지만 미운 구석보다 예쁘게 볼 구석이 훨씬 많다. 비틀에게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글·류청희<자동차 칼럼니스트 aryton@netsgo.com>,사진·김홍래
골프 GTI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의도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강 둔치에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간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만치서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베이스만 '쿵쿵'거리며 가까워진다. 시선을 돌리면 형형색색의 안개등, 네온빛이 소리와 함께 다가와 우렁찬 배기음만 남기고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그 괴물의 꽁무니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엇비슷한 소리와 불빛들이 줄줄이 이어져 멀어진다. 오늘도 카폭들의 주행 아닌 비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공기를 가르는 그 묵직한 소리에 피가 끓는다.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다. 미지의 오너와 벌이는 한 판 배틀의 환상. 그러나 내게는 배틀을 위한 머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필요 이상의 겉치장은 드라이브와 아무 상관없는 것들. 튀지 않는 겉모습에서는 전혀 성능을 짐작할 수 없고 비슷한 급 차들과의 경쟁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는 뛰어난 성능을 가진 그런 머신이 내게는 필요하다.
VR6 이전 골프 라인업 최고모델 ,1.8ℓ5밸브 저압터보 엔진 얹고
그래서 내가 가장 갖고 싶어하던 차가 바로 폴크스바겐 골프 VR6였다. 5세대로 넘어오면서 없어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핫 해치 매니아들을 위해 폴크스바겐은 VR6를 한결 세련되게 다듬고 2.8ℓ V6 엔진에 풀타임 4WD 시스템까지 얹어 4모션(motio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내놓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갖고싶은 차의 넘버 투는 골프 4모션이다. 2년 전 BMW M 쿠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넘버 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릴레이 시승에 마련된 골프는 4모션이 아닌 GTI지만, GTI 역시 만만치 않은 힘이 실려 있는 이니셜이다. 골프 VR6나 코라도 G60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 라인업의 최고봉으로 자리잡고 있던 모델이기 때문이다. 입맛 잃은 여름날, 감칠맛 나는 드라이브를 기대하며 두터운 도어를 열고 레카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잠시 국내시장에서 철수했다가 새로운 딜러와 함께 돌아온 폴크스바겐은 간판모델인 골프 GTI라는 밥상 위에 3도어와 매뉴얼 트랜스미션이라는 입맛 당기는 반찬을 올려놓았다. 운전하는 즐거움을 위한 모델이라면 3도어는 몰라도 매뉴얼 트랜스미션은 필수적이다. 스포츠 모델에도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을 얹은 탓에 모는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여타 수입차들과 비교하면 대단한 파격이다.
겉모습은 원과 반원을 주제로 한
귀여운 모습이다. 외부의 라인을
살리다보니 실내의 뒤죄석
공간이 손해를 봤다
이 차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허허실실'이다. 물론 골프 GTI의 심장을 얹은 1.8ℓ 터보 모델은 얘기가 다를 것이다. 해외에서의 평가도 GTI 모델은 '이거야 이거~'였다. 동글동글 귀여운 녀석이 200km가 넘는 속력을 낸다면 그 또한 기가 막힌 컬트적 발상이다. '풍요로운 2.0ℓ 엔진, 그리고 강력한 1.8ℓ 터보 엔진. 어떤 선택도 행복합니다'라는 카피 문구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의외로 가볍게 느껴지는 엔진소리는 차에서 느껴지는 얌전함과는 거리가 있다. 귀여운 차라고 해서 귀여운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거칠지는 않아도 방음처리만 조금 잘 되어 있다면 보다 흐뭇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풍요로운 시대는 컬트카도 팔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실패한 플리머스 프롤러도 있기는 하지만 비틀뿐 아니라 PT 크루저 같은 차는 없어서 못 파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 풍요가 앞서야 하기에 척박한 우리 나라의 자동차문화가 아쉽기 그지없다.
뉴 비틀을 타고 있는 내내 웃음이 입가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안에서 보면 세상이 다 밝아 보이고, 밖에서 보면 어디에 있어도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차다. 차로 인해 사람이 행복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