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음력 11월 7일) ~ 1936년 2월 21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배우자
박자혜(재혼)
풍양 조씨 부인(이혼)
자녀
신관일(장남)
신수범(차남)
신두범(삼남)
친인척
신향란(조카딸)
박원순(장인)
신성우(할아버지)
신약우(큰할아버지)
신명휴(증조할아버지)
종교
무종교(무신론)
웹사이트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생애 초기
출생과 인생
신채호는 충청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라산리(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申光植)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세조 때의 재상 범옹 신숙주의 18대손이었지만 일찍이 몰락하여 그의 11대조 때부터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28년 무신난에 연루되어 그의 가계는 한미하게 몰락했고, 증조할아버지 신명휴(申命休)가 첨지중추부사에 올라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사간원 정언, 사헌부장령 벼슬을 역임했고, 신성우의 형 신약우(申若雨)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신성우는 1899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38세에 사망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을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895년(16세)에 첫 번째 부인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1909년에 어린 아들 신관일(申貫日)이 죽자 사실상 이혼하게 되었다. 형 신재호(申在浩)는 순흥 안씨와 결혼했지만 27세의 나이로 딸들만 남기고 요절하였다. 후에 신채호는 조카딸들을 친딸처럼 양육하였지만 의사충돌이 생긴 조카딸 신향란(申香蘭)과는 1919년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성균관 수학
할아버지 신성우는 손자 신채호의 영특함을 보고 근처 읍내의 서당으로 보내다가 자신의 친구이자 먼 친척이며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에게 신채호를 소개해 주었고 신채호는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898년(19세)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성토하는 성토문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작성되자 이에 연명하기도 했다.
애국계몽운동
언론 활동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7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개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 것은 이런 활발한 저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