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회 1·26 ‘SGI의 날’ 기념 제언 - “시대정신의 물결 세계정신의 빛”
인간의 존엄성을 빛내기 위해 ‘평화’와 ‘공생’의 지구사회를!
‘善’의 침묵은 ‘惡’을 조장
지난달 26일, ‘SGI(국제창가학회)의 날’을 맞이하여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시대정신의 물결 세계정신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제언을 발표했다.
무차별적인 테러와 대량파괴무기에 의한 위협, 글로벌화에 수반되는 빈부격차 확대 등, 산적해 있는 지구적 문제군의 해결책을 탐색하면서 평화와 공생의 지구사회를 위한 길을 전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보는 탁월한 식견과 전망으로 인류가 나갈 미래를 제시한 이케다 SGI회장의 ‘SGI의 날’ 기념제언의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제28회 ‘SGI의 날’을 기념하여 제 소감의 일단을 말하고자 합니다.
‘평화의 문화’와 ‘문명간의 대화’를 시대의 키워드로 꼽으며 시작한 21세기도 3년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둘러싼 정세는 갑자기 위기 상황을 고조시킨 북한문제 등, ‘평화’나 ‘대화’와는 1백80도로 다른, 살기 등등한 험악한 분위기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전쟁과 폭력의 세기’라고 평가된 20세기 부(負)의 유산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아니 더 악화되었으며 지금도 조장하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긴박해진 이라크와 북한 정세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을 때의 밝고 쾌활한 표정 등은 자취를 감추고 인간정신이 숨쉬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대화의 숨통마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폐색한 느낌과 초조함만 눈에 뜨입니다.
전세계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평화적 해결을 위해 기원하는 심정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미국의 이라크공격은 피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며, 중동문제의 초점인 팔레스타인 정세도 새해 연초부터 자폭테러와 보복이라는 힘에는 힘으로 대결하는 악순환이 점점 확대될 뿐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급부상한 것이 긴박해지고 있는 북한 정세입니다.
수년 전에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시행한 ‘햇볕정책’으로 긴장완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움직임도,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나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협정에서 탈퇴를 표명한 것과 미사일 재개발을 암시하는 등의 ‘벼랑끝 외교’로 무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암전(暗轉)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보고 있으니, 30년 전에 토인비 박사와 제가 함께 엮은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 속에서 박사가 말씀하신, 인류에 대한 경고와 묵시록적인 말이 떠오릅니다.
박사는 과학기술로 얻은 ‘힘’이 미증유의 기세로 증대하여 사람들의 ‘윤리적 행동수준’과 그 힘 사이에 갭이 커지고 있을 뿐이며 이를 극적으로 확대한 것이 원자력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원자력시대에서 인류는 그 품행의 평균적인 수준을, 일찍이 불타(佛陀) 혹은 아시시주1)의 성 프란체스코가 실제로 도달한 수준까지 높이는 이외에 집단자살을 피할 길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하자면 ‘완벽한 덕을 갖추도록 권장하는 것’입니다.
핵무기와 같은 기술문명의 비대화가 초래한 몬스터(괴물)를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는 불타나 성 프란체스코가 체현(體現)한 바와 같은 ‘완벽한 덕’ 즉 철저한 비폭력 정신의 힘이 불가결하다고.
그리고 박사는 종교적 거인과 같은 뛰어난 인격이라면 상관없으나 인류 전체의 ‘품행의 평균수준’을 거기까지 끌어올리는 일에는 인류사의 거울에 비추어 비관적이었습니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종교적인 면에서 혁명을 통해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심정 변화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일도 있을 수 있고 혹은 그것이 사태를 호전시킬지도 모릅니다”라고.
현재와 같이 핵 등의 대량파괴무기를 둘러싼 위기 상황이 더해질수록 우리는 이 석학이 남긴 말을 마음에 간직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평소 “창가학회의 사회적 역할과 사명은 폭력, 권력, 금력(金力) 등의 외적 구속력으로 인간의 존엄을 계속 침해하는 ‘힘’에 대해 내적 생명의 깊은 곳에서 발하는 ‘정신’의 투쟁”이라고 호소해 온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 ‘정신의 투쟁’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 처해도 말을 멈추지 않는 것, 계속해서 철저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투쟁’ 앞에는 논의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거나 대화를 거절하는 악(惡)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예사이기에, 말이나 대화라는 것은 그런 악과 대치했을 때 어디까지나 끈기 있게 언론의 투쟁을 계속 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그 진가가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아이히만의 침묵이 묻는 것
이런 점에서 야마자키 마사카즈(山崎正和) 씨가 쓴 희곡 ‘말 - 아이히만을 체포한 남자’는 시사적이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말할 필요도 없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수행한 주요 인물 중 한사람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가명으로 숨어살다가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에 체포되어 비밀리에 예루살렘으로 압송됩니다.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재판 결과,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법정에서 그는 그토록 엄청나게 나쁜 일을 저질렀으면서도 나치라는 관료기구의 톱니바퀴 속에서 명령에 복종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할 뿐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아이히만을 체포한 피터 마킹이라는 실존 인물(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의 전직 정보요원)과 아이히만 사이의 대치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테마는 한가지, 아이히만에게 ‘개전(改悛)의 정’을 일깨워 줄 수 있는지 없는지에 있습니다.
그토록 냉혹하기 짝이 없는 무도한 행위를 했지만 법정에서는 보잘것없는 그에게 피터는 개인적으로, 어느 때는 규칙을 어기면서 음반을 틀어주기도 하고 담배나 와인을 대접하면서 차근차근 정의를 설하고 정에 호소하며 죄를 인정케 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애원하듯이 “나는 말을 원해. 말을 해 줘. 부탁이야. 제발. … 아”라고 하며 다그치지만 아이히만은 마지막까지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침묵한 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피터는 동료에게 말합니다.
“정의라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네. 악은 설명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악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도 망치게 할 수가 있어. 그러나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힘도 낼 수 없어. 정의는 설명이야.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정의인 거야. 그러기 때문에 정의는 전세계의 그 어떤 것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싶어. 악인도, 악 그 자체도 왜 그런 것이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 해.”
‘설명’과 ‘납득’, 실로 말의 힘이며 정의와 선은 그 바탕 위에 성립합니다.
그런 ‘정신의 투쟁’을 철저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는 아이히만의 침묵(말이나 대화를 거절)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피터의 모습이 상징하고 있습니다.
토인비 박사가 말한 비관론의 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이 정신성을 압살할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 중요한 것은 사기를 잃지 않는 점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의 침묵은 ‘악’이 생각하는 대로 하게 만듭니다. 작은 일에서든, 큰 일에서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로쿠엔스)의 얼굴에 대고 돌멩이를 던지듯 계속해서 언론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정에 휩쓸리지 않고 대국을 잘 살피며 가능한 한 정신력을 쏟아 대화를 계속하여 어둠의 장막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을 따름입니다.
고심 참담한 끝에 차지한 거대한 청새치를 가로채려고 덤벼드는 상어와 격투하는 쿠바의 늙은 어부인 산티아고를 계속 고무시킨 그런 용기를 가지고.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져 있지는 않아” “인간은 죽음을 당하면 당했지 패배하는 일은 없는 거야.”(‘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著)
9.11 이후 계속되는 ‘테러 위협’
이라크와 북한을 둘러싼 일련의 불온한 움직임이 지지난해 9월11일, 미국에서 일어난 동시다발테러를 계기로 개시된 ‘테러와의 전쟁’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탈레반 정권의 파멸로 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삼은 테러조직은 일단 그곳에서 추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절하기에는 아직 멀었고, 진위의 정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도네시아, 러시아, 케냐 등에서 일어난 테러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풍문조차 돌고 있습니다. 테러조직이라는, 국경을 초월한 데다 주권국가와 같은 명확한 주체가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끝없는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결코 기우(杞憂)는 아닙니다.
일촉즉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초점이 되는 것은 유일한 초강대국이고 현재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힘(경제력, 군사력)을 손에 거머쥔 미국의 동향입니다.
물론 일본으로서도 다만 미국의 의향에 추종만 하고 있으면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동맹국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라크, 북한 또는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문제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지, 냉전 이후 일본외교의 주체성을 시험받는 가장 중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눈앞의 위급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좋든 싫든 미국입니다.
그런 만큼 테러와의 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자리 매김하고 난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서는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즉 ‘선제공격 독트린’주2)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강경한 자세에 대해서 세상의 많은 식자들처럼 저 역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동시다발테러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전세계의 동정은 전부 미국으로 쏠렸습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이 냉전시대조차 발동한 적이 없는 ‘집단적 자위권행사’를 결정해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려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은 그 국제협조에 대한 성원을 무시하고 영국군만을 아군으로 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얻은 ‘성과’는 미국이 국제협조주의에서 발길을 돌려 단독행동주의(unilateralism)로 더욱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구온난화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에서 이탈, ABM(탄도요격미사일)제한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CTBT(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와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불참 등, 요 몇해 사이에 미국의 단독행동주의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편향에 대해 미국 국내외에서 비판이 거세지는 듯합니다.
21세기의 ‘국력’
이러한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식자 중 한사람으로,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만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 원장으로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지낸 바 있는 조지프. S. 나이 씨가 있습니다.
나이 씨는 국력에는 경제력과 군사력 등의 하드 파워(Hard power)와 가치관과 문화 등 ‘자국이 바라는 것을 타국도 바라게 하는 힘’ ‘무리하게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닌 자기편으로 하는 힘’으로써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는 두가지가 있으며 이 양자가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작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은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의 일부다. 테러리즘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시민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등, 장기간에 걸쳐 인내를 요하는 착실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외교포럼’ 2002년 1월호)
“21세기에는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조합한 것이 국력이 된다.(중략) 최악의 과오는 단편적인 분석으로 군사력만 증강하면 미국의 힘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다.”(‘제국의 패러독스 The Paradox of American Power’)
참으로 올바른 주장입니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잔학한 테러 사건이 세계 각지에서 왜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누구라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분명 테러 행위는 절대로 용인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그것과 투쟁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을 동반한 긴급대응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또는 그런 의연한 자세가 테러를 억지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측면을 전적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이 씨가 한때 미국 국방부의 요직에 있었듯이 군사력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일은 한 인간의 ‘심정윤리’(막스 베버)라면 몰라도 정치의 장에서의 옵션 즉 ‘책임윤리’(막스 베버)주3)로서는 반드시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드 파워, 특히 군사력이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는 일 없이 어떤 형태든 효과를 낳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유하는 측에게 또는 어쩔 수 없이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도 거기에 철저한 자제심, 그 자체가 소프트 파워의 연원이기도 한 자제심과 절도가 작용하고 있는지 어떤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문명이란, 힘을 울티마 라치오(최후의 수단)로 만드는 시도(試圖) 바로 그것이다”(‘대중의 반역 La rebelion de las masas’)라는 명언을 남기고 있듯이, 이른바 ‘문명’이란, 내면의 자제심이 여러 가지 모습과 형태로 나타난 외면적 결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일련의 단독행동주의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미국이 내건 보편적 이념(나이 씨는 그것들을, 정보화시대가 진전함에 따라 미국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가능성을 간직한 소프트 파워의 기축이라고 합니다)과 어떻게 정합성(整合性)을 갖는지에 의문을 제기해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초강대국의 자제를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결코 저 혼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닥친 이라크 위기를 통해서도 분명 독재정권이 대량파괴무기를 지배했을 때 초래하는 공포와 두려움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방지하려는 시도가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진정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대량파괴무기의 최대 소유자는 자신들이라는 자각이 불가결하며, 그 위협을 봉쇄하기 위한 국제적인 관리시스템 혹은 삭감에서 폐기로 전향하는 방도와 과정이라는 ‘자제심의 형태’를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의적 설득력이 결여되었다고 해도 반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병리
하드 파워가 돌출한 배경에는 미국의 ‘나홀로 승리’라고 하는 세계화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자유화와 규제완화라는 슬로건으로 추진되는 이 흐름이 현저하게 화폐자본주의, 금융주도형 국가로 기울어지게 한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자유화 즉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가운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경쟁이 격화하면 필연적으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승자’라고 해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계속 ‘승자’이려면 쉴 새 없이, 논리상 마지막 한사람이 될 때까지 계속 달려야만 합니다. 이른바 ‘세이프티 네트(안전망)’가 결여된 금융주도형 세계화는 구조적으로 ‘나홀로 승리’ ‘머니 게임화’를 내장하고 있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상위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부(富)의 거의 반절을 소유한다는 극단적인 소득 격차와 불공평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나라의 내외를 막론하고 ‘패자’와 ‘약자’를 향한 시선도 약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타자(他者)’에 대한 시선의 쇠약함은 자제심과 도의심의 쇠약함을 말합니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세계은행 부총재 재임 중에 세계화의 여파를 입고 있는 나라들과 지역을 찾아가 그 문제점을 탐구한 조지프 E. 스티글리츠 씨는 최근 저서 ‘세계화와 그 불만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속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하이테크 전쟁은 육체적인 접촉을 동반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상공 1만5천m에서 폭탄을 투하하면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가 없다. 현대의 경제관리도 이와 같다. 고급 호텔 방에서는 어떤 정책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다. 상대를 잘 알고 그 사람의 생활을 자기가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분명 재고할 정책도”라고.
본래 돈이라는 것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어 재투자, 재생산을 원활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경제활동의 활성화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단이며 보조 역할에 불과합니다. 그 수단이 목적으로, 조역이 주역으로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불전(佛典)에는 “곳간의 재(財)보다도 몸의 재가 뛰어나고, 몸의 재보다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 1173쪽)라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주역 중에 주역이어야 하는 인간은 단역으로 내몰리고, 살고 죽는 이의 아픔과 괴로움에 대한 감수성 즉 ‘마음의 재’도 무뎌지고 있습니다. 미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화의 큰 물결이 넘나드는 현대세계는 승패의 여하에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승자 쪽이 생명감각의 깊숙한 곳에 일종의 병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적어도 저는 네트 버블(Net bubble)에 경종을 끊임없이 울려온, 존경하는 지기(知己)이자 선배인 갤브레이스 박사(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가 말한 다음과 같은 가치관 전환의 권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만이 이정표는 아니고 성공의 척도도 아니다. 앞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생활상의 여러 즐거움이고 그것이 가져오는 진정한 행복이다”라고.(니혼게이자이신문 1월3일자)
미국은 도량이 넓은 나라이지만, 동시다발테러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인지 대화를 통한 설명과 납득, 합의 대신에 힘으로 밀어붙여 일을 추진하려는 하드 파워의 석권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무차별 테러의 무도함과 잔학함은 어디까지나 규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테러에 대항하는 데 하드 파워 일변도라면 너무 대응책이 없다고 해야 할지,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증오와 보복의 연쇄’를 반복한다면 요컨대 테러리즘과 똑같은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르며, 오르테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명’에서 ‘야만’으로 역사를 역행시키는 일이며 ‘문명의 충돌’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마저 현실로 나타날까 저는 두렵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악몽에 몹시 시달린 20세기와 결별한 우리는, 모습을 바꾼 악몽에 사로잡히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국제협조의 틀을 지탱하는 소프트 파워의 원천
자제심의 자세 속에 문명의 진수가!
等身大 발상·思考의 복권을!
‘他者’ 없는 ‘자기’는 없다! ‘환경’ 없는 ‘인륜’은 없다
공생의 에토스를 시대정신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글로벌화’의 조류를!
파스칼이 제기한 ‘인간관’
여기서 저는 시대정신의 긴요한 요청으로서 ‘등신대(等身大)적’ 패러다임, ‘등신대적’인 발상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 논급해 보고자 합니다.
‘등신대’란 문자 그대로 자기 ‘신장’ 즉 치수에 맞는 사고의 자세이자 감수성을 움직이는 작용입니다. 인간다움을 벗어나지 않는 생명감각, 생활감각이라 해도 좋습니다.
육체적인 면만을 본다면 자연계에서 인간은 자그마한 하찮은 존재이고 자신들의 악업(惡業)으로 인류가 멸망해도 지구 전체의 유구한 영위에서 본다면 긁힌 상처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장’이라 해도 파스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내가 아무리 많은 영토를 소유하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주는 공간으로써 나를 포용하고, 하나의 점인 양 나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로써 우주를 포용할 수 있다.”(‘팡세’) 이 ‘포용한다(comprendre)’는 단어는 ‘이해한다’ ‘납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사고’란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양적으로 동질화하려는 좁은 의미의 지적 영위뿐 아니라 인간의 감성이 전적으로 감지하는 질적 측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을 겸비한 생명 전체의 영위, 작용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벡터에 따라 파스칼은 ‘등신대’의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성을 탐구했습니다.
‘자신 일인의 일기문서’의 관점
그것은 ‘육근(六根)’의 균형을 중시하는 불교의 초문(初門)과 근본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육근이란 당연히 안근(眼根: 시각능력), 이근(耳根: 청각능력), 비근(鼻根: 후각능력), 설근(舌根: 미각능력), 신근(身根: 촉각능력), 의근(意根: 사유능력)을 가리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의근의 더 깊숙한 곳에서 무의식의 중층구조를 찾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일단 접어두고, 중요한 것은 육근의 편파(偏頗)함이 없고 과부족(過不足) 없이 균형이 잡혔을 때 비로소 생명활동의 완전한 발현(發現)으로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그 벡터가 향하는 곳 즉 파스칼이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 “사고로써 나는 우주를 포용할 수 있다”라고 말한 관점을, 불전에서는 “팔만사천의 법장(法藏)은 자신 일인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어서전집 563쪽)라는 금언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장대한 ‘등신대’의 패러다임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구상과 광대함을 지니고 있는지. 거기에서 어떠한 실천규범, 토인비 박사가 말하는 ‘윤리적 행동기준’ ‘품행의 수준’을 도출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몸 속에 고루 천지를 모방함을 아느니라.(중략) 코의 숨의 출입은 산택계곡(山澤溪谷) 중의 바람에 준(準)하며, 입의 숨의 출입은 허공 중의 바람에 준하고, 눈은 일월에 준하며, 개폐(開閉)는 주야에 준하고, 두발은 성진(星辰)에 준하며, 눈썹은 북두에 준하고, 맥은 강하(江河)에 준하며, 뼈는 옥석에 준하고, 피육(皮肉)은 지토(地土)에 준하며, 모(毛)는 총림(叢林)에 준하고, 오장은 천(天)에 있어서는 오성에 준하며, 지(地)에 있어서는 오악(五岳)에 준하고”(어서전집 567쪽) 운운이라고.
‘준하다’는 말은 모범으로 삼아 그것을 모방한다는 말이므로 그 의미는 인간과 우주, 자연은 불리일체(不離一體)이고 서로 의존하며 같은 이법(理法) 즉 현대어로는 에코시스템(생태계)에 따라 영위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언뜻 조잡하게 보여도 실로 함축성(含蓄性) 깊은 구상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 의미의 함축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의 갈대’인 한, 삼라만상 구석구석에 둘러쳐진 의존성과 관계성이라는 네트워크의 테두리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며 시스템을 깨뜨리거나 플루토늄 등의 이물질을 그 안에 가지고 들어오면 조만간 뼈아픈 보복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르테가가 “환경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도 구제될 수 없다”(‘돈키호테의 명상’)라고 갈파한 것처럼, D. H. 로렌스가 죽음의 병상에서 “먼저 태양과 함께 시작하자”(‘묵시록 Apocalypse’)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확실히 ‘타자’ 없는 ‘자기’는 없으며 ‘환경’ 없는 ‘인륜’도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제일로 지향해야 할 격률(格率)주4)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키구치(牧口) 초대 회장은 주요 저서인 ‘인생지리학’에서 “자애, 호의, 우의, 친절, 진지함, 소박함 등의 고상한 심정(心情)의 함양은 그 향리(鄕里)를 떠나서는 쉽게 얻을 수 없다”라는 선견의 말을 남겼습니다.
거기에서 귀결될 윤리규범을 저는 ‘공생의 에토스(도덕적 기풍)’(일찍이 중국사회과학원의 강연에서 키워드로 사용한 것입니다)라는 말로 집약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대립보다는 조화, 분열보다는 결합, ‘나’보다는 ‘우리’를 기조로 인간끼리 또 인간과 자연이 같이 살고 서로 도우면서 함께 번영하자는 정신을 말합니다.
이 ‘공생의 에토스’를 시대정신으로 공유할 수 있을 때, 토인비 박사가 기대한 ‘힘과 윤리적 행동수준의 갭’을 메울 왕도가 열린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관점에서 보면 현상은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은 핵이나 생물무기 등, ‘힘’ 차원에서 오가는 것뿐이고 에토스나 윤리 등은 전혀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입니다. 대량파괴무기라고 해도 일단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이 위협하는 인간의 심성마저도 포함하는 사회적 요인까지 깊이 파고들어 대응하지 않으면 무기의 폐기는커녕 삭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구의 눈으로 보나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번영’과 空洞化
스티글리츠 씨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계화의 잠재적 이익을 현실로 하기 위해서는 환경에 배려할 것,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발언권을 갖게 할 것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정한 거래를 견지하는 일이 필요’(‘세계화와 그 불안’)하며 그것은 즉 테러의 온상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중 어느 것도 ‘공생의 에토스’라는 뒷받침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고자세의 고함과 완력이 세력을 떨치는 시대에 ‘공생의 에토스’라고 하면 허풍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일에 쫓겨 매우 바쁜 나머지 아버지가 집에 없어 외로워하는 전화기 너머의 아들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아 사직을 해서 화제가 된 로버트. B. 라이시 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결코 허풍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번영하는 시대에 가장 깊이 우려하는 것은 가족의 붕괴와 공동체의 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성실성을 지키는 어려움이다. 이런 우려는 신경제가 가져올 막대한 은혜 즉 부(富)와 기술혁신, 새로운 기회나 선택과 비교해도 하찮은 것은 아니다”(‘부유한 노예 The Future of Success’)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라이시 씨는 신경제가 가져오는 정보화사회라는 시류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도구나 노예로 전락하는 일 없이 어떻게 균형 잡힌 생활을 실현해 갈 수 있는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목표로 삼을 것은 스티글리츠 씨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에 본떠 ‘인간의 얼굴을 한 정보화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경제는 분명히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폭을 넓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기회를 확대시켰습니다. 급속하게 넓혀지는 전자(電子)의 물결은 주권국가의 틀 따위는 아주 쉽게 초월하고 있으며 결국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회사와 학교 등의 조직과 다양한 지역공동체 혹은 가정마저도 여지없이 변질 혹은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의 비중이 증대함에 따라 지금까지 의존해 온 ‘장(場)’의 해체와 고조되는 ‘아이덴티티의 위기(자아인식의 불안정한 상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행복의 실상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한 추세에 몸을 내맡기고 행복감의 리얼리티를 수중에 넣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스티글리츠 씨도 우려하는 것처럼 도저히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만물의 움직임 속에서도 눈에 띄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미국의 민주주의’)라는 토크빌 이후의 난문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더 절박한 지구환경문제가 혹독하게 ‘노(NO)’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에코시스템(생태계)에 편성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라고 하는 ‘신장’을 잊지 말라고. 그것을 망각하면 일찍이 매머드주5)처럼 어느 시기 급속히 멸망의 길로 전락할 것이다 라고.
만약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선진국만큼은 쓰지는 않더라도 그 에너지의 반을 사용한다면 구체(球體) 모양의 한정된 에너지 저장고는 바닥을 드러내버리지 않을까 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또 세계의 최부유층 1%의 사람들이 받는 소득은 최빈곤층 57%의 사람들의 소득과 맞먹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한 부의 편재(偏在)와 불공정에 민감한 위기의식을 가지는 일이 ‘공생의 에토스’의 본분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선다면 지구온난화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를 냉담하게 대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또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다고 해도 하루 1달러에서 2달러로 극빈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민중의 머리 위로 한발에 1백만 달러 이상이나 하는 미사일이 날아다닌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라는 구도를 무관심하게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구도가 얼마나 심하고 괴상할 정도로 ‘등신대’의 패러다임을 벗어났는가. 이 자각이야말로 인간존엄의 증거입니다.
근대과학문명의 왜곡과 환경문제
일찍이 윌리엄 제임스는 반군국주의(反軍國主義)의 깃발을 내걸면서도 ‘인민이 성장하는 성격 속에 인내와 훈련이라는 군사적 이상을 포함시킬’ 필요성을 인정하고 사회봉사나 공헌을 위한 고역(苦役) 등의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等價物)’을 구상했습니다.
이른바 ‘등신대’의 발상과 패러다임을 제임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은 어떤 시대라도 나쁜 일인 것은 틀림없지만 현대의 하이테크 전쟁에 과연 이러한 ‘등신대’의 발상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슬픔을 동반한 자각이 일종의 각성을 촉구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과 각성의 부단한 확인작업을 거듭했을 때, 반드시 일종의 ‘자제심의 형태’가 되어 결실을 이루고 ‘강자’ ‘승자’의 도의적(道義的) 리더십을 보장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를 초강대국 미국에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등신대’라는 패러다임에서 근대과학기술문명총체의 요철(凹凸)을 검증해 보면, 그 왜곡은 ‘육근(六根)’ 중의 ‘의근(意根: 지성)’이라는 ‘비(非)등신대’의 비대화와 다른 오근(五根: 일반적으로 감성)의 왜소화(矮小化)와 축소화(縮小化)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왜곡은 민중의 소박한 생명감각과 생활실감에서 생기는 괴리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종교사(宗敎史)와 정신사(精神史)를 두루 섭렵한 역사가 미슐레가 “인간은 언제나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외친 인류의 보편적 심성과 같은 뿌리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곡을 시정하는 것도 생명감각과 생활실감의 회귀(回歸)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곧 여성이 가장 뛰어나고 여성 본래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 분야가 아니겠습니까. 남성이 자칫하면 지성이나 관념의 비대화에 사로잡히기 쉬운 것에 비해 여성은 어떠한 시대에도 대자연이라는 에코시스템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부지런히 생업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문명의 폭주(暴走)를 ‘한사람의 영웅이 빛나는 목표를 향해 창(槍)과 같이 격렬하게 똑바로 돌진’하는 모습으로 비유한 오르테가는 그 결과, 지구환경문제라는 아포리아주6)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환경! Circum-stantia! 우리 주위에 있는 이 과묵한 것들!’이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오르테가는, 환경은 과묵하고 조심스럽지만 인위적인 잔재주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 커패서티(capacity:허용량) 그리고 깊이를 가질 것과 그 호소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새로운 문명의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선견지명의 사람이었습니다.(‘대중의 반역’)
그러한 통찰을 통해 오르테가가 환경의 힘과 커패서티 그리고 깊이를 ‘소녀’의 이미지로 비유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파우스트의 혼을 멸망에서 구제한 것이 ‘여성적인 힘’이었던 것처럼 ‘빛나는 목표’이어야 할 것이 완전히 색이 바래버린 현대에, 환경과 공생하는 방향 이외에 돌파구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요.
21세기가 ‘여성의 시대’라고 제가 계속해서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채택 55주년
올해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지 5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 초안 작성의 중심자인 엘러너 루스벨트는 “보편적인 인권이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일까요. 실은 집 주위 등 조그마한 장소에서 시작합니다”라는 인상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관계의 모든 기초인 가정이라는 장(場)이나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상생활 속에야말로 ‘생(生)의 리얼리티’로 뒷받침된, 피부로 느끼는 인권의식이 풍요롭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상생활 속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 내는 것이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저는 미래학자인 헤이젤 헨더슨 박사와 지난달 발간한 대담집 ‘지구대담 빛나는 여성의 세기로’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사는 환경문제에 몰두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시작한 대기오염방지를 위한 운동의 동료들 중 대부분은 저와 같은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다’라는 강하고 간절한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이 ‘등신대’의 발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운동은 공감을 넓히고 현실의 무거운 벽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고 박사는 술회하셨습니다.
그러한 견실하고 착실한 일대일의 대화의 주인공이야말로 여성입니다.
왜냐하면 ‘혁명’과 같은 급격한 변화와 달리 여성이 주역인 ‘생활’의 특질은 ‘계속성’에 있으며 마치 태양의 리듬과 같이 한사람 또 한사람으로 착실하고 평범한 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비로소 진실한 가치창조는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유엔 중심으로 ‘희망의 세기’ 건설
원폭투하 60주년인 2005년 “핵폐기 위한 특별총회를!”
탄도미사일 확산방지 위한 조약의 조기제정!
동북아시아 평화회의 개최로
‘북한 핵문제’ 해결의 길을!
어린이의 미소를 사회 ‘지표’로
이 점에 대해서 세계은행의 울펜손 총재도 개발원조와 같은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수치나 통계보다도 ‘어린이의 웃는 얼굴로 알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눈높이는 헨더슨 박사와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박사가 경제성장 일변도의 GNP(국민총생산)가 아니라 인간의 행복의 정도를 측정하는 지수로 이행할 것을 호소하며 ‘애정의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학을 수립한 것도 ‘이론상에서 옳다고 여긴 일이 현실사회에서 올바른 결과를 낳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이 지닌 생활실감에 뒷받침된 ‘등신대’ 발상의 중요성은 경제분야에 한정하지 않고 근년에 들어 평화와 안전보장의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분쟁의 예방, 관리, 해결, 이 모든 국면의 의사결정에 여성 대표의 증원을 보장할 것을 가맹국에 요청하는 획기적인 결의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런 방향성은 같은 해에 개최된 2000유엔여성특별총회주7)의 결과문서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분쟁에서 다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도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분쟁예방을 위한 최선의 전략은 평화창조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확대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흐름이 국제사회의 합의로서 확립된다면 단순히 분쟁억제나 긴장완화라는 차원을 넘어 ‘전쟁의 문화’에서 ‘평화의 문화’로 전환하는 데 반드시 연결되리라고 저는 믿는 바입니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인간본위’ ‘민중본위’의 지구사회를 21세기에 건설하기 위한 방법을 논하고 싶습니다.
그 대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유엔에서 혹은 유엔을 매개로 한 전개를 기대할 수 있으나, 그 전에 미국의 독자적인 행동주의가 눈에 띄는 것과는 반비례로 유일한 세계적 국제협력기구인 유엔 시스템의 약화는 우려할 만한 사태입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행사로 기능이 불완전하다는 극단적인 논의도 있는 유엔에게, 냉전 후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파워게임에 농락당하여 항구평화와 인류의 이익을 지향하는 ‘칸트적인 것’이 모습을 감추고 주권국가간에 권익을 놓고 서로 다투는 ‘홉스적인 것’만 횡행하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역사의 톱니바퀴는 거꾸로 돌고 말 것입니다.
당장 다른 것으로 대체할 조직이 없으므로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소수의견의 존중, ‘약자’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민주주의 철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표방하는 보편적 이념에 따른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21세기 평화는 ‘약자’에게
그럼 여기서 저는 최근 10년 가까이 여러 각도로 논의를 거듭해 온 ‘인간의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2001년 6월 ‘인간의 안전보장위원회’주8)가 발족했습니다.
이 위원회에서는 ‘인간의 안전보장’에 대한 이해를 넓혀 이것을 국제사회의 공통된 정책방침으로 자리잡기 위한 보고서 작성에 들어가 올 6월에 발표될 예정입니다. 이 작업에 대해 ‘인간의 안전보장’을 연구해 온 연구자 그룹이 공동으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안전보장에 관한 공개서한’이라는 제목으로 36명의 연구자가 토의 끝에 성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 서한에는 ①일상의 불안을 중심에 둘 것 ②가장 약한 자를 중심에 둘 것 ③다양성을 소중히 할 것 ④상호성을 소중히 할 것의 4가지 관점에 유의하여 인간의 불안이나 위협의 원천인 군사화나 세계화에 따르는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제가 몇해 전부터 주장한 것과 중복되는 것으로 강하게 공명하는 바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가 첫째로 거론하고 싶은 것은, 현재 이라크와 북한문제로 초점이 된 대량파괴무기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더욱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핵무기 확산방지와 군축, 폐기를 위한 방법을 논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과학지 ‘원자력과학자회보’가 발표한 ‘핵시계’의 바늘이 지난해에는 ‘7분 전’까지 갔습니다.
그 이유로, 지금까지 미국과 러시아간에 핵군축의 토대가 된 ABM(탄도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의 붕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핵물질 관리에 대한 우려의 증대, 핵무기 탈취를 노리는 테러리스트의 존재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북한이 핵시설의 재가동을 선언한 것에 이어 NPT(핵확산금지조약)의 탈퇴를 표명했습니다.
이대로 상태가 계속되면 NPT를 축으로 한 핵확산방지의 틀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뿐 아니라 점점 끝이 보이지 않는 군비경쟁의 확대를 초래할 수도 있고, 생화학무기 등 다른 대량파괴무기의 군축의 진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4월에 실시된 NPT재검토회의의 제1회 준비위원회에서는 ①CTBT(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의 발효촉진 ②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쿠바의 NPT가입 ③북한의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엄수 등을 촉구하는 내용을 총괄하여 의장이 발표했습니다.
이중 쿠바가 지난해 10월, NPT에 대한 비준과 함께 틀라텔롤코조약(중남미 핵무기금지조약)에 대한 비준을 이루었습니다.
다른 3국의 조기 가맹과 북한의 NPT재가입이 강하게 요망됩니다. 그러기 위해 국제사회도 각 지역에서 신뢰구축을 촉진시키는 환경조성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문제는 쿠바가 선택한 길과 똑같은 길을 즉 지역에서 비핵화의 틀에 참가하는 것을 통하여 지역안전보장을 확보하면서 NPT체제의 재가입을 도모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핵지대’를 북반구에 확대
저는 오래 전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에 비핵지대의 설치를 호소해 왔습니다.
이 지역에는 이미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과 몽골의 ‘비핵무기국 지위선언’이 있고 일본도 ‘비핵3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이런 선언 등을 토대로 하여 유엔 주도하에 북한을 포함한 형태의 ‘동북아시아평화회의’를 개최하여 이 지역에 신뢰구축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비핵지대 설치를 시야에 넣은 토의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현재 북한이 참가하고 있는 지역안전보장의 틀은 ARF(아세안지역포럼)뿐입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 초점을 둔 토의를 유엔 관계자들과 함께 실시하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를 통하여 지구의 남반구는 거의 비핵화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보다 보유하지 않음으로써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자국의 국익과 지역전체의 안전보장에도 이바지하는 일이고 그것이 현실적인 정치에서 선택할 수 있는 중요성을 지닌 하나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21세기에 국제사회가 다루어야 할 도전은 지구의 북반구의 비핵화에 있다고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중, 이미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은 비핵지대의 설치를 위한 구상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드디어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이 아닐까요.
설사 비핵지대의 설치에 시간이 필요한 경우일지라도 북한이 몽골과 마찬가지로 ‘비핵무기국 지위선언’을 하는 길이 있습니다.
유엔총회가 몽골의 선언을 환영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 이외에도 핵보유국 5개국이 1995년에 표명한 NPT가맹의 비핵무기국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비핵무기 국가를 핵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몽골에게 재확인하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대응이 확립된다면 언젠가는 비핵지대의 길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 NPT와 함께 핵확산방지체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 CTBT입니다. 그러나 CTBT는 유감스럽게도, 조약채택 후 6년간이나 발효되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비준국이 일정 수에 도달한 단계에서 조약을 잠정적으로 발효시켜 핵실험을 국제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먼저 도입해야 한다는 안도 나왔습니다. 핵군축의 기운을 더는 후퇴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유엔에 핵군축 전문기관을 설치
그리고 2005년의 NPT재검토회의를 목표로, 핵확산방지를 위해 불가결한 탄도미사일의 군비관리를 도모하기 위해 지난해 11월에 채택된 ‘ICOC(탄도미사일 확산방지를 위한 행동강령)’주9)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만들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핵확산방지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앞에서 다룬 ‘자제심의 형태’로서 구체적으로 핵무기를 삭감하고 폐기하는 길을 열기 위한 노력이 핵보유국에게 강하게 요구됩니다.
그래서 저는 NPT재검토회의가 개최되는 2005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60주년에 해당하는 것과 맞추어 각국 정상이 참가한 ‘핵폐기를 위한 특별총회’를 개최하면 어떨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유엔에서 15년 전에 제3회 군축특별총회가 열린 이후 핵폐기문제를 전 지구적인 규모로 검토할 기회는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테마에 정면으로 대처하여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21세기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핵군축을 위한 국제적인 틀은 ABM제한조약을 대체할 ‘모스크바조약(전략공격무기삭감조약)’이 지난해 5월에 미국과 러시아간의 두나라에서 합의되었을 뿐 핵무기를 구체적으로 삭감시키기 위한 다국간조약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부터 ‘핵무기전면금지조약’의 제정을 호소해 왔듯이, 특별총회에서는 그 제일보가 되는, 핵무기를 보유한 모든 국가간에 군축조약의 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그것은 3년 전의 NPT재검토회의의 최종문서에 넣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완전폐기를 달성한다는 명확한 약속’을 실현시키는 틀이기도 합니다.
덧붙여 유엔총회의 장에서 NPT 제6조가 정하는 핵군축의 성실한 이행을 확보하기 위한 전문기관을 유엔에 새롭게 설치할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저는 호소하고 싶습니다.
핵무기를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절대악’이라고 규탄한 도다(戶田) 제2대 회장의 평화사상을 원점으로 하는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에서도 2005년을 향해 세계의 연구기관과 서로 협력하면서 핵군축과 폐기를 위한 연구프로젝트에 착수하고자 합니다.
밀레니엄 개발목표의 달성
둘째로 빈곤과 기아 등 ‘인간존엄’을 위협하는 문제의 극복입니다.
UNDP(유엔개발계획)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28억명에 달하여 그중 12억명이 1달러 미만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에서 영양부족에 허덕이는 사람 수는 8억명이 넘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강한 결의로 시급히 대응할 것을 요청 받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채택한 유엔 밀레니엄선언에서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굴욕적이고 비인간적인 극빈 상황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라는 서약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엔에서는 구체적인 목표로 2015년을 하나의 기한으로 ①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인구의 비율을 반감시킨다. ②기아에 허덕이는 인구의 비율을 반감시키는 등 8분야 18항목에 걸친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이것들은 1990년대에 개최된 주요 국제회의와 정상회담 그리고 유엔 밀레니엄선언에서 합의를 본 목표를 통합한 것으로 ‘밀레니엄 개발목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페이스라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33개국에서는 목표의 반절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으며, UNDP의 보고서에도 “극적인 전환이 없으면 1세대 후에 세계의 지도자는 다시 똑같은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은 분명하다”라는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3년 전, 발표한 제언에서 지구사회의 왜곡이라 할 수 있는 빈곤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글로벌 마셜플랜’의 실시를 호소했습니다.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셜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사회에서 승자의 ‘자제심의 형태’로 성공한 좋은 예입니다.
21세기에 이런 ‘자제심의 형태’를 세계화의 형태로 실현시키는 도전이 지금 강력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구정상회의에서 채택한 실시계획에서 개발도상국가의 빈곤을 퇴치하고 사회개발과 인간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세계연대기금’ 설립에 합의를 본 것을 저는 크게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 기금은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는데, 빈곤퇴치에 초점을 둔 기금 설립은 이것이 처음으로, 1992년 지구정상회의를 거쳐 설치된 ‘지구환경기금’주10)에 이어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세계적인 규모의 기금으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밀레니엄 개발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라도 국제사회의 강력한 연대의 증거로서 각국의 협력이 요구될 것입니다.
또 유엔에서는 ‘밀레니엄 개발목표’의 실시상황에 관한 사무총장의 보고를 해마다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세계 각국의 정상이 엄숙하게 받아들여 더욱 국제협력의 심화와 확대를 도모하기 위한 ‘세계정상회의’를 2015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하면 어떻겠습니까.
2년마다 격년으로 개최하는 것도 좋습니다. 유엔총회의 회기가 시작하기 전에 세계의 정상이 한곳에 모여 함께 21세기의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생각하는 자리로 삼는다는 꿈에 부푼 전망입니다.
장소는 유엔본부에 국한하지 않고 빈곤과 기아로 가장 허덕이는 지역에서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국제협력의 틀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와 협력이 불가결합니다.
유엔에서는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밀레니엄 개발지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그 달성을 위해 각종 조직과 단체가 연대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목적으로 한 ‘밀레니엄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SGI도 이 캠페인의 취지에 찬성하여 각종 전시회와 세미나를 비롯한 민중 차원의 ‘풀뿌리 의식계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해에 공정한 지구사회 본연의 모습을 전망한 ‘탐욕의 극복’을 발간한 보스턴21세기센터의 활동을 통하여 학술과 연구에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데 공헌할 생각입니다.
‘세계 물의 해’와 개발도상국 과제
빈곤과 기아에 추가하여 지금 큰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 수자원(水資源) 문제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의 40%가 물 부족에 직면하여 11억명이 안전한 식수를 구할 수 없고 25억의 사람이 적절한 위생설비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또 물과 관련된 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해마다 5백만명이 넘는다고 추산되어 이 숫자는 연평균 전쟁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10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개발도상지역에서 병을 줄이고 인명을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안전한 물을 공급하고 충분한 위생설비를 설치하는 길밖에 없다”라고 강조한 바와 같이 안전한 식수의 확보와 위생환경의 정비가 급선무입니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물의 해’로 3월에는 제3회 ‘물에 관한 포럼’이 일본에서 열립니다.
저는 주체국인 일본이 이 분야에서 기술지원과 인적지원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역할(役割)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 문제가 주요 테마 중 하나가 된 지난해 지구정상회의에서 일본은 미국과 협력하여 ‘깨끗한 물을 사람들에게’라는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추진하겠다고 표명했습니다.
일본에는 지금까지 세계 4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안전한 식수의 확보와 위생환경의 정비에 노력한 실적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살려 일본이 수자원 분야에서 세계를 리드할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셋째로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원천이자 ‘평화의 문화’의 초석이 되는 교육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처럼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수렁에 빠진 분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장래가 기대되는 청소년 교육밖에 없다고 적지 않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1990년에 타이에서 열린 ‘만인을 위한 교육’의 세계회의에서 기초교육의 완전보급이 국제사회의 목표로 등장한 이후 세계 전체적으로 볼 때,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정 수준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1억 이상의 미취학아동과 8억8천만명의 문맹자가 있고 그중 3분의 2를 여성이 차지하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받아들여 지난해 5월의 ‘유엔어린이특별총회’와 6월의 G8정상회의(서방 선진7개국+러시아)에 이 문제가 상정되어 기초교육의 완전보급과 여성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조성을 목표로 할 것을 새삼 강조했습니다.
현재 그 촉진을 위해 유네스코(유엔의 교육·과학·문화기구)를 중심으로 ‘만인을 위한 교육’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올해부터는 ‘유엔의 문맹퇴치운동 1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평생교육을 추진한 초대 회장
‘만인을 위한 교육’이라는 지표는 창가교육학의 아버지인 마키구치(牧口) 초대 회장의 이념에도 통하는 것으로, 마키구치 회장은 그 실현을 위해 생애를 바쳤습니다.
지금까지 몇번 이 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키구치 회장은 ‘인생지리학’에서 ‘세계시민의식’의 함양과 ‘자타 함께 행복’을 목표로 하는 ‘인도적 경쟁’의 시대를 열자고 호소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 실현을 위해 자진하여 일본에서 여성교육의 충실과 평생교육의 확립이라는 ‘인간교육’의 저변을 넓히는 도전에 선구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여성을 위해 통신교육을 추진한 것 이외에도 반나절 일하고 반나절 공부하는 ‘반나절 학교제도’의 도입을 제삼 제창하고 생애학습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자인 도다 제2대 회장도 통신교육에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두회장의 정신을 계승하여 소카(創價)대학교의 설립구상 때부터 ‘통신교육부’를 설치할 것을 생각하여 1976년에 개설했습니다.
이후 현재는 일본에서 톱클래스의 재학생 수와 일본 최고의 졸업률을 자랑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SGI에서도 마키구치 초대 회장 이후의 전통에 입각하여 기초교육의 보급을 위해 적극적인 태세로 임해 왔습니다.
일본에서는 청년부를 중심으로 유네스코와 함께 각국의 문맹퇴치를 위한 활동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도 1987년부터 브라질SGI의 교육부가 폭넓은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자원봉사로 추진하여 브라질 교육부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극복을 목표로
세계 서밋’ 정기 개최를!
인간교육은 ‘평화 문화’의 초석
지속가능한 개발 ‘교육의 10년’
근년에는 이런 ‘읽고 쓰기’ 등의 기초능력의 습득을 테마로 한 문맹퇴치운동에 가세하여 ‘평화의 문화’를 육성하고 자연환경과 공생을 도모하는 ‘새로운 인간교육’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SGI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지구정상회의(2002년, 요하네스버그)에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의 10년’의 제정을 제안했습니다.
지속가능한 지구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교육 추진을 목표로 한 이 제안은 지구정상회의의 이행계획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에는 유엔총회에서 결의되어 2005년부터 시작하기로 정식으로 결정했습니다.
환경교육은 평화교육, 인권교육과 나란히 새로운 인간교육의 기둥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행복을 쟁취하여 미래를 개척할 힘을 기르는 교육의 보급이야말로 ‘희망의 21세기’의 기반이 됩니다.
지금까지 SGI에서는 1992년의 지구정상회의(리우데자네이루)의 관련행사로서 개최한 ‘환경과 개발전(展)’을 각지에서 순회하는 등,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계발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계속하여 앞으로도 각국에서 환경교육을 여러 형태로 추진하고자 합니다.
문맹퇴치(文盲退治)와 환경교육이라는 이 두가지 ‘교육의 10년’의 성공을 목표로 유엔의 여러 기관과 다른 NGO(비정부기구)와 협력하면서 최대한 지원하고 싶습니다.
이 환경교육의 기둥은 NGO의 지구평의회가 제정을 추진하고 우리 SGI가 그 운동을 지원해 온 ‘지구헌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통의 운명으로 새로운 행동을 시작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재출발이야말로 지구헌장의 원칙에 담겨 있는 다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과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지구규모의 상호의존과 책임감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필요로 한다.”
환경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런 책임감과 주체성을 한사람 한사람이 확립해야 합니다.
한 인간에게 세계를 바꾸는 힘이
그리고 SGI에서는 영화 ‘조용한 혁명’(지구평의회)의 제작에 협력했습니다.
인도 니미마을 수자원문제, 슬로바키아의 젬플린스카 시라바호수의 환경오염, 케냐의 사막화 등,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의 드라마를 추적한 이 영화의 테마는 ‘한 인간이 세계를 바꾼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현실에 뛰어들어 시대변혁의 물결을 일으킨 것은 불굴의 신념과 용기와 정열을 태운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자기 혼자 한다고 해서…’라는 지우기 어려운 무력감과 ‘무엇을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병들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뜻 있는 사람조차 현실 앞에 희망을 잃고 자신의 세계에 힘없이 파묻히고 맙니다. 저는 여기에 현대의 ‘일흉(一凶)’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핵시대평화재단의 데이비드 크리거 소장과 함께 펴낸 대담집 ‘희망의 선택’에서도 이것이 초점이었습니다.
소장은 아인슈타인 박사가 발견한 에너지와 질량에 관한 방정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한 인간의 일념에는 세계를 변혁할 힘이 있다’는 평화의 방정식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SGI가 노력하고 있는 ‘인간혁명’운동의 안목은 실로 이 일점에 있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하여 수수방관하면 안 됩니다. 자각한 민중이 연대하여 행동할 때 얼마나 큰 힘이 생겨 변화의 물결이 일겠는가. 이것을 증명하는 데에 바로 21세기의 인류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구해설
주1. 아시시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페르자와주에 있는 도시.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주2. 선제공격 독트린
“적대국과 테러 조직에 대해 필요할 경우, 단독으로 선제 공격한다”라는, 미국이 지난해 9월 ‘국가안보전략’으로 발표한 새로운 방침.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앞으로 계속 유지한다”라는 방침과 함께 이 전략의 기둥이다.
주3. 심정윤리와 책임윤리
막스 베버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치’에서 인간이 윤리적인 행동을 취할 때 신념에 대한 순수성(심정윤리)과 결과에 대한 책임(책임윤리)의 딜레마에 빠진다고 지적. 정치가의 과제는 그 딜레마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주4. 격률(格率)
윤리학에서는 라틴어의 ‘maxima’ ‘propositio’에서 유래된 영어의 맥심(maxim)이나 독일어의 막시머(Maxime) 등의 역어(譯語)로 쓰이며, 윤리학상의 근본 규칙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다.
이 격률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칸트는 주관적인 규칙을 객관적인 최고원리와 구별하여 부르는 데 썼다. 일반적인 경우는 개인이 자기 생활을 다스리기 위해 다소나마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준을 격률이라고 부른다.
주5. 매머드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빙하기에 생존하였다. 특히 중기에 생존했던 것은 고형(古形) 매머드라고 한다. 크기는 3m가 넘지만, 코끼리로서는 중형으로 약간 큰 부류에 들 정도다.
주6. 아포리아
철학용어.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7. 2000유엔여성특별총회
‘21세기 남녀평등, 발전, 평화’를 주제로 유엔본부에서 2000년 6월에 열렸다. ‘여성차별 철폐협약’의 완전비준을 촉구하며 NGO의 역할과 공헌을 재확인하는 ‘정치선언’ 채택과 더불어 평화창조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등을 강조한 ‘결과문서’를 채택했다.
주8. 인간의 안전보장위원회(CHS)
‘인간의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적인 이해를 넓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위원회로, 유엔과 국제기관, 각국 정부에서 독립된 성격을 갖는다. 아마르티아 센 씨(1998년, 노벨경제학상수상)와 오가타 사다코 씨(전<前> 유엔난민고등판무관)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주9. ICOC(탄도미사일 확산방지를 위한 행동강령)
탄도미사일 확산방지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국제적인 행동으로, 지난해 11월에 네덜란드서 열린 회의에서 채택. 탄도미사일의 개발, 실험, 배치와 대량파괴무기보유 의혹이 있는 나라에 미사일계발지원의 자제 등을 호소하여 93개국이 참가를 표명하고 있다.
주10. 지구환경기금(GEF)
1992년의 지구정상회의(리우데자네이루)의 결과, 1994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세계은행, 유엔개발계획, 유엔환경계획의 3기관이 공동으로 운영. ①지구온난화방지 ②생물다양성의 보전 ③국제수자원보호 ④오존층의 보호 등 지구환경전체에 이익이 되는 4분야가 주된 자금투자 대상이다.
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전 동지에게 감사!
명랑하게
완벽한 승리의 정상을 향해!
이상에 살아라! 사명에 살아라!
자기답게 살아라!
거기에 후회없는 인생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