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커피 같은 사람 / 최용순
며칠 전 외국계 커피점을 운영하는 친구로부터 신장개업을 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하는 일 없이 시간에 쫓기다 보니 미안하게도 개업축하 자리에 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오지랖이 넓은 만큼이나 씀씀이가 남달리 좋은 그 친구는 상업 수완도 물이 올라 있다. 내가 보기로는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친구, 그래서일까, 국내외 여건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놀랍게도 꾸준히 외길을 승승장구하고 있다. 시내에 나갈 때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종이컵을 들고 주름 빨대로 쫄쫄 빨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똑같은 종이컵에 커피를 내리고 있을 친구를 생각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대표적 문화 흐름 중 하나가 커피문화다. 한국 사람들이 접대용으로 애호하는 음료가 커피이고, 전 국민이 가장 즐겨 찾는 음료가 커피라는 것을 방증이라도 하는 것일까. 서울 강남역, 잠실역처럼 통행이 빈번한 전철역 부근 몫 좋은 빌딩은 각종 브랜드의 외국계 커피 전문점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2012년 11월 말 국내에 입점한 외국계 커피 전문점은 카페베네 831, 할리스커피 396, 탐앤탐스 347, 투썸커피 282개 점포나 된다.
이렇게 많은 커피점을 먹여 살리는 커피가 에스프레소 Espresso 커피이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에스프레소 커피는 여과기에 볶은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고압 수증기 열탕을 통과시켜 커피 원액을 추출한다. 적은 양이라도 순수한 커피의 참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커피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문점에서 유독 잘 팔리지 않는 것이 에스프레소 커피이다. 너무 쓴 데다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양마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프레소 커피는 전문점 메뉴에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다. 비록 인기는 없지만 에스프레소 커피는 쓴맛을 간직한 채 첨가물로 애호가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뜨거운 물을 첨가하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스팀 밀크를 첨가하면 카페라떼가 되고, 스팀 밀크와 우유 거품을 첨가하면 마키아또가 되고, 스팀 밀크와 초코 시럽을 첨가하면 카페모카로 변신한다. 그리고 우유 거품과 계핏가루를 첨가하면 카푸치노가 되고, 휘핑크림을 첨가하면 에스프레소 콘파나가 되고, 아이스 크림을 첨가하면 에스프레소 아포가또가 된다. 이처럼 쓰고 맛없는 에스프레소 커피는 모든 커피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원액이다. 결국, 커피 애호가들은 첨가물로 맛과 향이 가미된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기는 것이다.
에스프레소 커피에서 생명탄생의 신비를 배울 일이다. 에스프레소 커피가 생명과도 같은 쓴맛을 고집하지 않고, 물과 밀크와 우유와 초코 그리고 계피와 크림을 받아들여 새로운 맛을 탄생시키듯이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생명탄생의 원리이다. 어느 한 쪽이 막히면 소통이 끊어져서 생명력을 상실하고 원치 않는 기형이 탄생하기도 한다. 생명이 약동하는 호수도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것도 서식할 수 없는 사해死海가 되고, 어디론가 흘러보내기만 하면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사막이 되듯 주고 받는 것이야말로 삼라만상을 거느리는 자연의 이법이다. 흔히 주는 것과 받는 것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받는 것이 곧 주는 것이요,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주기 때문에 받고, 받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커피 뿐만 아니라 사람들 중에도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켜간 어둡고 낮은 곳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 기본을 갖춘 참된 사람 그래서 쓰임 받는 사람, 잠시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환영받는 사람, 스타는 아니지만 스타를 빛나게 하는 들러리,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하고 격려할 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 그리고 에스프레소 커피가 고유의 쓴맛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맛을 드러내듯 창의적인 일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에스프레소 커피 같은 사람이라고 할만하다.
어렵고 힘든 하루하루를 헤쳐나갈 에스프레소 커피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2013. 04. 14)
첫댓글 자주 들리세요.
발동이 걸리면 그리 어렵지 않을거예요^^^ ^^^ ^^^
에스프레소의 참 맛을 아시나요?
저는 일 년에 몇 차례씩 에스프레소를 마시야 직성이 풀린답니다..
그것도 아주 친한 사람과 함께 할 때이지요.
여럿이 우르르 몰려 가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쓰기만 할 뿐,
제 맛을 못 느낀답니다.
글을 읽고나니
앙증스런 작은 찻잔에 한 모금 될까 말까한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순수한 커피맛이 그립습니다.
글의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을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그 때 커피값은 물론 제가 지불할 것이고요.ㅎㅎㅎ.
1004님, 전문가라 자처해도 될만큼 커피이야기가 佳境에 이릅니다
학창시절을 공유한 同期면서도 사는 곳이 갈리다보니 커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네요.
한 15 여년쯤 전엔 어렵사리 수동식 에스프레소 추출기를 구해 그맛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머신기로 뽑아마시는 편의함에 익숙해져 예전 것은 그냥 모셔두고 있는 형편이지요.
올 강릉 커피축제 땐 우리 회원님들 모두 강릉행 작정해두길 요청합니다
고향바다와 어우러지는 커피향을 외면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세 분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시니. 저요. 에스프레소 보다는 숭늉을 좋아하고, 그 보다는 쵸코파이의 마시멜로를 미치도록 좋아합니다.
건강하시고 다음 뵈요.
글을 읽고 보니 커피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커피맛이 제일 좋은 곳이 강릉이랍니다. 구정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학산 쪽에 있습니다. 언제 한 번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