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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
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
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
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
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반박: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의 보도에서도 확인되듯이 박정희는 전체수석이 아니라 만계(조선인, 한족, 만족) 중 1등입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되지만 실제 답사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경례를 붙이는 그 유명한 군관학교 졸업사진 기사의 우측에서 13번째 줄에 정확히 두 일본인이 답사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
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증거짤을 첨부한다. (출처는 위에 명기한 일제의 공문자료와 같다.)
두번째로 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한 부분을 보자.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23페이지에 실린 박정희의 구미보통학교 1,2학년 성적부에는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정희는 나이를 고친 적이 없다.
또한 만주군관학교에는 만주족이, 일본육사에서는 일본 국민이 지원할 수 있었는데, 조선인은 나이와 상관 없이 전혀 만주군관학교 지원자격이 없었습니다. 마치 경성제대처럼 조선인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학교였던 것처럼 착각하고 하는 주장은 좌우 양편의 큰 오류입니다.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만주국 국적을 취득한 후에만 만주군관학교 지원이 가능했었습니다.
(미나르바 )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그어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반론 )
자, 지난 5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데, 아래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자료가 밝히듯이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된 신문이었다.
만약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신문 자료에 의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었던 것이라면 무엇하러 1939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일보에 실렸었다고 전 매체를 통하여 지난 5년간 주장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글을 읽을 줄 몰라 만주신문을 만주일보로 읽었던 것인가? 만약 이처럼 실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문맹자들의 집단일진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저능아 재교육장이다. 역사 토론은, 더욱이 민족 문제에 대한 역사 토론은 책을 위조하는 사기꾼들은 그 버릇을 고친 후에, 그리고 신문이름조차 지난 5년간 틀리게 읽었던 문맹자들은 저능아 재교육장에서 공부 좀 더 한 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9미나르바)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
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
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
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
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
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
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
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
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
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
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
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
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
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
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
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
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
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
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
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
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
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
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
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
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
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 반론)
중국 중경이나 남만주 연변에서 활약한 광복군과 만주군 소위와 중위로 만주 9군단, 몽골 동북방 지두우에서 근무하던 박정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박정희가 광복군을 110회 토벌했다는 사실무근의 거짓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전교조 교사의 거짓 교육을 받고, 검색해도 그 단체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니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정희가 근무하던 만주 9군단은 만리장성 넘어서 중국 화북으로 올라오던 중국 홍군과 팔로군과 대적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부대인 홍군과 팔로군이 한국의 독립과 어떤 상관이 있나? 어떻게 우리의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이트에 물어보니 박정희 독재어쩌고 저쩌고하는 소리만 늘어놓던데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으니 박정희가 토벌한 독립군의 이름과 그 소속 독립운동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출처가 어딘지만 가르쳐주시길 부탁한다고 했다.
전교조와 친북주사파 사이비 애국지사 김삼웅이 1995년을 전후해서 쓴 사기극이 퍼지고 퍼져서 박정희 친일파설이 된 것이다. 만주지역의 친북단체 사람들과 말까지 맞췄지만 박정희가 반대로 독립군의 밀정이었다는 김학규, 조경한, 박창암 등 애국지사들의 증언들은 있다.
(미나르바 )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
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
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
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
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
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
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
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반박:) 해방 후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근무하던 조선인이 광복군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해방이전부터 그런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된 광복군은 군대꼴을 갖추려고 김학규 장군이 초모(모집)공작에 나서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방당시까지 고작 300명 정도만을 모았을 뿐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도 광복군의 확대개편은 절실한 과제였고,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 소속의 조선인의 광복군 편입에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삼웅은 대단치도 않은 만주군 중위 출신의 광복군 편입을 무슨 기회주의처럼 각색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E. H. 카가 김삼웅이를 보았다면 뺨싸대기를 올려 부쳤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인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남근의 영향을 받았고 국군에 편입되어 최남근의 선후배인 만군출신과 동료의 신분으로 어울립니다. 게다가 1949년 10월 6일 박정희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존경하는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폭동의 여파로 경찰에게 살해됩니다. 그 영향의 반동으로 한때 좌익과 어울려 곤욕을 치렀지만 6.25 발발 후 얼마든지 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하하여 국군에 합류함으로써 진심으로 전향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 좌익경력의 전부입니다.
( 미나르바)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
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
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
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
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뻣泳兌릿?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
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
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
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
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
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
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반박 )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미나르바)
지금 박근혜의 행동을보라 기회주의자의 표본이다
박정희 딸.주민과악수 이외에 국민에게 한일이 하나도 없고 무슨사건이 나면 아무런 말도않고
있다가 한쪽으로 여론이 기우는 쪽에다 한마디하는 기회주의자의 표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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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르바가 너무도 사기침을 뭇 자료들로 확인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기록: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서 소만(蘇滿)국경 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라고도 한다]에 배속돼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배장(排長 :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09.12.13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