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창호 (ChangHo Ahn)1878-1938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농부였던 안교지의 셋째 아들로 평안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은 대부분 양반 출신이었으나 그는 평민출신이며 조선시대에 별로 등용되지 않았던 평안도 사람이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16세였던 그는 중국군과 일본군이 대동강변에서 서로 죽이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동북아시아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던 치열한 국제적 경쟁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왜 이 두 나라가 한반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전쟁을 벌여 무고한 한국 민족이 그 피해자가 되는가를 그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국 왕실과 정부는 왜 속수무책으로 있는가 하는 생각을 거듭해 보았다. 이 때 그의 옆에는 한학에 조예가 깊고 세계의 흐름을 통찰하는 선배 필대은이 있었다. 그와의 토론에서 얻은 결론은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까닭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실력배양론이자 인재양성론 또는 국민교육 입국론의 바탕이 되었다. 곧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여러 방면의 힘을 기르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나라의 살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를 기르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작은 나라 일본이 큰나라 중국을 이기는 것은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국력을 키운 결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안창호(중앙)
1896-1899
안창호는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던 1894년에 서울에 올라가 정동에 있는 구세학당을 다녔다. 설립자는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였고 교장은 밀러(F.S. Miller)였다. 그는 이 학교에서 성경을 비롯하여, 한글, 산수, 지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서구인들의 세계관에 눈을 떴다. 그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기독교에 입교하고 새문안교회를 다녔다. 그는 1896년까지 이 학교를 다녔는데, 마지막 해에는 조교가 되었다. 밀러는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3달려를 주어 옷을 사서 입도록 하였으나 안창호는 일을 시켜달라고 해서 돈을 벌어 옷을 사서 입었다. 그가 조교가 된 것 역시 후배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성을 보이고 뛰어난 지도력까지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그무렵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포기하게 하고 자국의 세력권에 귀속시켰다. 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의 25년간 조차권까지 획득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링의 후원을 얻어 이 조차권을 취소시키는 한편 자국의 해군기지를 얻었다. 1904년의 러일전쟁의 씨가 이미 뿌려진 것이다.
한편 일본은 1895년에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일련의 개혁을 단행시켰는데 그 와중에 일본의 암살단이 민비(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러시아는 불안에 떨고 있던 고종을 자기네 공관에 1년 이상 유폐시킨 뒤 내정간섭에 나섯다. 이 무렵에 서재필이 김홍집 내각의 고문으로 귀국해 독립을 지키기 위해 국정을 개혁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창설을 그 예로 들 수 있따. 1898년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가담해 평양지회를 세웠으며 그 해 9월 10일 만민공동회 주최로 쾌재정에서 정부관리들의 부패를 규탄하고 정부가 국민을 주인으로 섬겨야한다는 내용의 명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보부상을 동원해서 독립협회를 공격하고 회장 윤치호를 원산감사로 임명하면서 독립협회를 폐쇄시키자 그는 고향마을로 내려가 점진학교를 세워 미래세대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때 그는 또 평양지역에서 선교사업을 도왔다. 그러나 일상생할보다 천당행을 더 강조하는 선교사들에 대해 그는 비판적이었다. 현샐생활의 향상과 서민들의 사회복지 증진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주장한 것이다
그 무렵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있던 그에게 결혼을 하고 떠나라는 주위의 요망이 있었다. 그는 서당에서 가르치는 이치환의 딸 혜련양과 세브란스병원에서 밀러의 주례로 혼례식을 가졌다. 미국을 떠나기 하루전의 일이었다. 그는 결혼 전 이양을 자기 누이 동생과 함께 서울로 데려가 정신여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스스로 실천하였다.

1902년도 대한제국이 발행한 안창호의 여권,
여권번호 51번
Passport issued to Ahn, ChangHo in 1902
배편으로 하와이와 시애틀을 거쳐 그 해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와 이혜련은같은 배를 타고 온 미국 연방정부 이민국 의사 드류(R. Drew)의 가정에서 집안 일을 돌보면서 이민생화를 시작하였다. 이들의 첫 거주지가 파인 스트리트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하숙집이라는 기록도 있다. 낮에는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스물세살인그는 얼마 안되어 나이가 많아 퇴교를 당하였다.
그 뒤 어느날 그는 시내 거리에서 시민들이 모여있는 그 앞에서 동포 인삼 장수들이 싸우는것을 보고 말린 뒤 새생활운동을 시작하였다. 상항한인친목회가 이 운동을 이끌어 간 것이다. 1903년 8월말 경이었다. 이 단체가 9월 22일 또는 23일에 발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노재연, 재미한인사약, 상권, 로스엔젤렛,: 아미리가 인쇄회사, 1951년, 13-14쪽 참조)상항한인친목회 창립 기록의 원본에는 그해 8월 20일 이루어졌다고 쓰여 있다. 미국 대륙의 관문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수는 인삼 장수와 망명객 그리고 유학생 등 약20명이었다.(도산학회편, 미주 지역 한국민족운동사, 제9권 52쪽 참조)

1903년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촌 와싱톤가의 중국인 광덕호 지하방에서 한인 유학생과 인삼장사 등 25명으로 조직한 친목회가 있던 거리. 미국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 단체(지금까지 주소 확인이 안된 유일한 사적지)
First Korean organization, ChinMok Hoe was organized at Washington St, Chinatown, San Francisco by Ahn ChangHo in 1903
이 사건이 그가 자신의 도미 목적이었던 공부를 포기한 배경이다. 개인의 공부보다 미주 한인들의 생활개선과 단합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사회에서 동포들이 생활기반을 다지려면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자리가 많은 리버사이드(하변)로 이주하였다.
1904년 3월 24일 그는 이혜련을 샌프란시스코에 남겨두고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와 스쿨보이로 일하면서 신학강습소를 다녔다. 리버사이드는 그 무렵 오렌지 생산으로 미국사회에서 개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지역이서 일자리가 많았다. 이 지역에 먼저 이주한 이강과 임준기는 그를 도와 이곳에 한인노동국을 설립하여 하와이와 다른 지역에서 오는 동포들의 취업을 알선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이들이 1905년 4월 5일 상항친목회를 토대 삼아 공립협회를 창립할 때 회원이 35명이나 되었다.
공립협회의 회원들을 샌프란시스코에 본부 사무실을 두어 도산이 직업을 찾는 동포들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제의하여 그해 11월 14일 퍼시픽 스트리트 938번지에 사무실을 열었다. 도산이 단신으로 그곳에 올라가고 부인이 첫아들 필립을 낳아 리버사이드 집에서 길렀다.

안창호가 리버사이드의 오랜지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1904년(후에 채색된 사진)
“오렌지 한개를 정성것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라고 한인들에게 지도하였다.
Ahn, ChangHo at work in orange grove in Riverside, Cal. 1904
공립협회는 송석준을 편집인으로 삼아(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이 조직은 로스엔젤레스와 레드랜드, 리버사이드, 와이오밍주의 록스프링스,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도 지부를세워 1909년까지 회원수가 8백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립신보는 미주 대륙은 물론 한국과중국, 시베리아(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해삼위)의 한인사회에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그는 1905년 리버사이드에서 친목회를 개편해서 공립협회를 만들어 활동한뒤 그성과를 토대로 민족의 회생과 번영에 봉사 할 신민회 창립을 발기하고 1907년 1월 8일 센프란시스코를 떠나 귀국하였다.

1905년 안창호가 SF에서 조직한 최초의 애국 단체인 공립협회, 1909년 국민회를 결성하며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공립협회 창건 멤버들,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 임준기, 정재관
First patriotic organization KongLipHupHoe founding members in San Francisco, 1905

샌프란시스코 패시픽가 공립협회가 있던 건물의 현재 모습
Pacific Ave. building where KongLip HupHoe was founded in 1095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 후에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가 되었다
The United Korea published by KongLipHupHoe

리버사이드 오랜지농장에서 한인들을 기념 찰영하는 안창호 1912년
Ahn, ChangHo taking picture of fellow Korean workers in Riverside, Cal, 1912

리버사이드의 한국학교
Korean school in Riverside, California
원글출처-http://heungsadahn.com/im_activist/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