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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1~2절
제목 : 무엇을 먼저 보고 계십니까? (2)고넬료와 베드로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장 1~2절, 새번역)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 명의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어루만진다는 말로 흔히 식견(識見)이 좁아 자기 주관대로만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를 이르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군맹무상’이란 말이 만들어진 스토리가 참 흥미롭습니다.
인도의 경면왕은 어느 날 시각장애인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의 생김새를 가르쳐주기 위해 궁궐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신하에게 코끼리를 끌고 오게 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만져 보게 한 후 왕이 물었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느냐?” 그들 중 상아를 만져 본 자는 “무와 같습니다.”라고 답했고 귀를 만져 본 자는 “곡식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키와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머리를 만져 본 자는 “돌과 같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코를 만져 본 자는 “절굿공이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각자 자신들이 만져 본 부위가 코끼리의 전부인양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를 빗대는 말로 “군맹무상”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 한 것입니다.
이 ‘군맹무상’의 모습을 오늘 사도행전 10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1~2절을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구절 중에 어떤 구절로 ‘고넬료’를 설명하시겠습니까? 물론 1~2절을 섞어 고넬료를 표현한다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1절이 먼저 보인다면, 반대로 2절이 먼저 보인다면 우리는 고넬료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나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이방인이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기록한 누가는 1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사도행전 10장 1절, 새번역>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 ‘로마 사람들의 이태원’이었던 가이사랴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부대 백부장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 소개만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움과 저주를 받을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식민지 국가에서 바라본 로마의 백부장은 그저 무서운 공포의 대상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1900년 초반 식민지 때 일본 장군에 대한 소개가 기독교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왜? 이런 인간이 여기에 등장하는거야? 어떤 정신나간 기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기사를 쓰는거야?’라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절과 완전히 반대 설명을 하는 2절이 등장합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장 2절, 새번역>
2절을 시작하면서 ‘하지만’이 등장하지 않는 것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에피오피아 무명의 예배자를 만나게 하시고, 사울이 바울이 되게 하셨으며, 다마스쿠스 제자들을 초심으로 돌려놓으신 하나님의 행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 로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이방인이 바로 로마 사람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 중 다수 역시 말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이라고 하면 고개를 돌려버리고 상대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구절이 등장한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대제사장에게서 들을 수 있던 칭호를 지금 이방인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대제사장들처럼 그저 칭호로만 불리던 회칠한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찐~찐~찐~찐~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하지만’ 이라고 2절을 시작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고넬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누가는 이미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고넬료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왜 경건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이 구절을 한 구절 한 구절 뜯어보고 곱씹어야 합니다. 진짜 경건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공포심이 아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이 아니라 온 가족입니다. 아니 오히려 온 가족을 넘어서서 하인들과 병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말하던 천사가 떠났을 때에,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자기 부하 가운데서 경건한 병사 하나를 불러서,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고, 그들을 욥바로 보냈다. <사도행전 10장 7~8절, 새번역>
둘째,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같은 로마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억눌려 있던 식민지로 삼은 국가의 백성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유대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한 것입니다.
셋째,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베드로’를 만나게 되는 계시를 받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세 시쯤에, 그는 환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똑똑히 보았다. 그가 보니, 천사가 자기에게로 들어와서, "고넬료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고넬료가 천사를 주시하여 보고, 두려워서 물었다. "천사님, 무슨 일입니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을 데려오너라. 그는 무두장이인 시몬의 집에 묵고 있는데, 그 집은 바닷가에 있다." <사도행전 10장 3~6절, 새번역>
지금까지 드린 3가지 설명은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방인인 고넬료가 이토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자! 여기서 다시 질문 드립니다. 여러분은 1절과 2절 중 어떤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십니까? 어떤 부분으로 먼저 고넬료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으십니까? 그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출신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한계를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가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2절’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지 아십니까? 2절이라고 말하면서 무언가 꼬리표를 달아 놓습니다. ‘이방인인데 경건한 사람이라니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일거야’, ‘하나님을 그저 로마 신들 중 한명으로 알고 무서워 하는거 아닐까?’,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베푸는 건 다 이유가 있을거야’, ‘늘 기도했겠어? 그냥 누가가 고넬료를 치켜세우느라 그렇게 표현했겠지’ 등등....이럴거면 그냥 1절로 고넬료를 소개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3진(眞)무(無)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이 없고 거짓만 있습니다. 진심은 없고 가식만 남았습니다. 진짜가 없고 가짜만 가득합니다. 안타깝지만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 진심, 진짜는 없고 거짓, 가식, 가짜만 가득합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곧이곧대로 보이지 않는 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진실과 진심과 진짜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어찌 보면 진실과 진실과의 만남, 진심과 진심과의 조우, 진짜와 진짜와의 대담이 이젠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한 것 같습니다.
부교역자로 교회를 섬겼던 지난 20년을 뒤돌아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저를 판단하는 잣대로 쓰였던 소위 ‘스펙’이었습니다. 면접을 보러가기 전에는 우리 교회는 스펙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 하는 사람이면 청빙한다고 거의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막상 면접이 시작되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어떤 비전을 받았는지,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대학교, 어떤 대학원 출신이냐? 운전은 잘 하냐? 악기는 몇 가지나 다룰 줄 아냐? 컴퓨터는 능숙하냐? 등등의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제가 지금 부교역자 면접을 보러 온 것인지, 무엇하러 온 것인지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교회뿐만이 아니라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녀보신 분들은 거의 느끼셨을 것입니다. 단적인 스펙만을 보고 내가 판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입니다. 면접 뿐이겠습니까? 교회에서나 사회 어디서든 만남에 스펙이 먼저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저희들입니다.
어느 한 쪽 편으로 쏠려 있습니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잡아야 하고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어 하나 되도록 연합하게 해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쪽의 설명만 듣고, 한 쪽만을 응원하며, 다른 쪽의 설명은 무시하고, 다른 한쪽을 깎아 내립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라고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사실 그대로, 말씀 그대로,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부터, 그리스도인들부터 스펙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7장 6절, 새번역>
그리고 옛날 사무엘처럼 겉모습을 따라 판단하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제 곧 고넬료와의 만남을 가질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실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절을 이용하여 고넬료를 그저 로마 백부장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를 경건한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고집스레 밀어내게 됩니다. 한 편으로 참 다행입니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이런 모습이 있었으니, 우리에게도 충분히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고집과 편향된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역시 기도하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지붕으로 올라가 기도하려던 베드로는 갑자기 쌩뚱맞게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고는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무엇을 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들어갔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땅으로 드리워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다. <사도행전 10장 10~12절, 새번역>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도행전 10장 13절, 새번역>
음성을 들었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될 터인데 왜 이렇게 매번 순종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제자들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순종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4절, 새번역>
그런 베드로의 답변을 듣고 두 번째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0장에서 첫 번째로 마음에 두셔야 할 핵심 구절입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사도행전 10장 15절, 새번역>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으니 먹으라고 하셨음에도 자신의 고집과 신념에 빠져 있는 베드로는 끝까지 이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3번이나 반복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고집’이라는 녀석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아무리 이야기하셔도 내가 안 괜찮으면 안 괜찮은 것입니다.
‘고집불통’은 단어만큼이나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리고 이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고집불통’입니다. 참 안 바뀝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자리로 갑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말씀보다는 나의 경험, 생각, 방법을 여전히 더 신뢰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곧 자신의 고집을 꺾고 새로운 만남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만나 왜 그런 환상을 보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끝까지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만져주시니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굳고 딱딱해진 베드로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 역시 말씀을 보면서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성령 하나님! 저희의 딱딱하고 굳어진 마음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일어나서 내려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거라." <사도행전 10장 20절, 새번역>
그제서야 베드로는 그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물어보고는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에 집에 가자마자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먼저 그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마치 자신을 하나님처럼 기다린 고넬료 가족에게 자신도 동일하게 연약한 사람일 뿐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8절, 새번역>
드디어 편견과 고정관념과 고집불통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불법이 합법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이든 이방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외딴 섬이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어진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베드로의 행보가 의미가 있고 고넬료의 기다림 역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귀한 만남이 이루어지자 은혜를 간구하던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선물로 부어지는 것을 베드로로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시작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여기 ‘군맹무상’의 모습을 가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고백을 그 대표주자 베드로가 먼저 선창합니다. 우리도 함께 제창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구절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 새번역>
하나님은 특정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녀노소,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새번역>
그렇게 고넬료 가족은 선물처럼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체하지 않고 선포합니다. 무명의 에티오피아 사람이 그랬듯이, 바울이 회심 후에 그랬듯이, 고넬료 가족들도 곧바로 ‘침례’를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10장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0장 47절, 새번역>
사도행전 10장 강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고집불통 베드로를 만나면서 또한 제 자신을 만납니다.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것에 더 집중하면서 그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다른 이들이 나를 볼 때 이렇게 편협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냐!’, ‘당신이 나에게 뭘 안다고 마음대로 말하는 거야?’,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그저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면서 판단해 버리곤 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저 스스로에게뿐 아니라 사랑하고 축복하는 모든 동역자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드려봅니다. 혹시나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이런 시선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한 쪽의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마치 ‘그 정도의 그런’ 분이라고 이미 ‘낙인’을 찍고 계시진 않습니까? 구약의 하나님만이, 신약의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 속에 거하는 좁은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전혀 예측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던 하나님이 아니어도 놀라지 마십시오. 내가 알던 하나님만을 생각한다면 그 하나님은 그저 나에게 우상일 뿐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개역개정>
하나님이 명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욥기 37장 5절, 새번역>
성경에서도 좁은 시선을 가지고 좁은 하나님으로 만든 수많은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만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하고 놀랍고 크고 비밀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직도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을 만큼 미워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도 그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다리가 되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렇게 할 분이 아니야,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야’라고 확신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 믿음을 더욱 더 확장시킬 수 있도록 더욱 깊고 넓은 하나님을 만날 시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분이라는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고넬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찾아가 편견과 고정관념과 고집과 불통을 뛰어 넘어 함께 가족임을 선포하고, 주님을 머리로 하여 한 지체가 되어 하나의 교회가 될 길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한 시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의 시선을 가지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경험했던 모든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 10장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우리 모두 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로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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