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온천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온천-김길수
<단편소설> 도시 이웃
김 길 수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 왔다고들 하지만, 아직 찬 기운이 여전하다. 예년에 비해 추위가 오래 갈 거라는 TV예보를 귓등으로 들으며, 나는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뾰족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이불속에 엎드린 채, 손끝에 닿는 조그만 손거울에다 눈을 가져갔다. ‘짜~식이 어딜 보고, 그 따위 소리를 지껄였을까?’ 나는 아내의 휴대용 손거울에 비치는 나의 얼굴을 마치 처음 보는 양 뜯어보았다. 처음엔 녀석이 ‘내 외모를 보고 그랬겠지?’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눈꼬리와 이마에 생긴 주름살이나 듬성듬성 보이는 흰 머리칼이야 제 놈도 나와 엇비슷한 수준이고, 비록 나의 외모가 눈에 띄게 잘 생긴 거야 어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입쌀에 오르내릴 만치 형편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도 그 녀석은 내가 뭘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첫 대면에 그따위 무례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상당한 시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괘씸한 기분은 여전하다. ‘제깟 놈이 나를 언제 보았다고? 감히…?’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아내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아내의 활달한 성격상 그냥 가만 듣고만 있었느냐? 뭘 어떻게 잘못하고 다니기에 그런 소리를 듣느냐? 며 핀잔을 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외모 문제가 아니라면…?’ 그건 바로 그날 입었던 남루한 입성이리라. 아마 틀림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새삼 입맛이 쓰다. 그날은 평소 촘촘한 잔소리로 일상을 챙겨주는 아내도 외출한 상태였고, 혼자서 이삿짐 정리를 하다 잠깐 목욕탕이나 알아보고 오자! 하는 생각에, 무심코 입은 그대로 나섰던 것이다. 아마 그때 그게 녀석이 나를 얕잡아보게 된 빌미가 아닐까? 헐렁한 입성에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나의 얼굴에서, 단 한 번 뜨내기손님으로 스쳐 지나가버릴 시골 촌놈쯤으로 보았으리라. ‘그래. 오늘은 내가 먼저 그 밥맛없는 녀석을 한 번 곯려주어야겠는데…! 어떻게? 무턱대고 시비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뭔가 미끼를 던지고, 반응해 오는 걸 보면서 야무지게 되치기를 해야지!’ 하다가 언뜻 한 가지 생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래, 오늘은 그거다! 약간 졸렬하긴 하지만…!’ 나는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동명해수탕은 아파트단지 바로 옆에 있는 대중목욕탕이다. 내가 헬스와 목욕을 위해 거의 매일 출근한지도 어느 듯 삼 개월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기분이 찜찜한 게 시쳇말로 별로다.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녀석 대하기의 불편함과 서먹함 때문이다. 그 녀석은 항시 목욕탕 탈의실 귀퉁이 음료수 매대(賣臺)앞에 웅크리고 있다. 시선은 욕탕 입구 쪽에 걸린 대형 TV를 멀뚱하게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여 스탠드로 가려진 안쪽에서 스마트폰으로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는지 혼자 키득거리는 게 일이다. 어쩌다가 휴게용 소파에 손님들과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기야 하지만. 녀석은 언제나 반바지에다 붉은색 티셔츠 차림인데, 우리나라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의 유니폼이다. 처음엔 ‘붉은 악마의 회원인가! 나이보다 열정적이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나 깨나 입고 있는 걸 보자, ‘녀석에겐 완전 작업복이구만! 아들 녀석이 입다버린 거 주워 입기라도 했겠지!’싶었다. 그러자 축구생각은 간 곳 없고, ‘녀석이 정말 악마의 인상 같다!‘ 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명색이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친절이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대신 뭔가 감시라도 하듯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실눈을 이리저리 번득이는 뚱한 시선에서 영판 악마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 온 후, 제일 먼저 찾아간 목욕탕이었다. 시골에서도 다른 일은 몰라도 목욕탕만은 열 일 젖혀두고 매일 다닌 습관 탓에, 이사를 오자마자 제일 먼저 파악한 일이 주변의 목욕탕이었다. 습관도 습관이려니와 이태 전에 다친 허리통증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매일 하는 스트레칭과 냉온탕 찜질이 그저 그만이었다.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손주 녀석들에게 자칫 영감 냄새라도 풍길까봐 항시 몸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아내의 강요성 권유도 매일 가게 만드는 이유였다. 목욕탕에 갔던 첫 날!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 달린 매표소에는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중년사내가 앉아있었다. 내가 조그만 창문사이로 가격표에 적힌 요금을 들이밀자, 중년은 어서 오시라는 인사도 없이 게임소리가 요란한 컴퓨터모니터만 응시한 채, 왼손을 내밀었다. 내심 참 고약스럽네! 싶었지만, 꾹 참으며 “헬스장은 몇 층이요?” 하고 묻자, 그때서야 힐끗 돌아보았다 “4층인데요. 헬스 하시게요?” 무덤덤한 소리였다. “오늘은 우선 구경이나 한 번 해봅시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구조가 1층은 주차장, 2층은 여탕이고, 3층은 남탕, 그리고 4층이 헬스장이었다. 나는 앞으로 이곳을 이용할 요량이었으므로 곧장 4층부터 올라가보았다. 헬스장은 나의 예상보다 엄청 넓었다. 운동기구도 꽤나 많았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 몇 명이 기구에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헬스장에서 내려와 3층 목욕탕에 들어가다 문제의 그 녀석을 처음 보았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스탠드에 엎드린 채, 사람이 들어가는데도 매표소에서 본 사내처럼 인사도 없이, TV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날 녀석의 복장이 바로 축구응원단복인 붉은 악마(Reds devil)란 글자가 선명한 반소매 T셔츠였다. 참 하나같이 불친절한 녀석들이라는 생각과 손님 대하는 태도가 저래서 되나? 싶은 생각에 영 마뜩찮았다. 매일 몇 번을 만나도 친절하게 인사를 해 오던 고향마을의 목욕탕을 생각하며 옷을 벗다가, 자신이 낡아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바지와 탈색된 헌 잠바대기차림임을 깨달았다. 잠간동안 ‘이게 뭐야?’ 싶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욕실도 헬스장 비슷하게 넓었다. 고향마을의 그 작은 목욕탕에 익숙한 눈이라 그런지 엄청 넓구나! 싶었다. 허리운동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냉탕도 마치 미니수영장이라 할 만큼이나 길었고, 손님들도 꽤나 많았다. ‘사장이나 종업원들 보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우니까…!’ 나는 이곳을 정기적으로 다니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증실 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참 시간을 보낸 뒤, 느긋해진 기분으로 탈의실로 나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려는 내게로 녀석이 다가왔다. “입욕티켓 주시오” 마치 시비를 걸어오듯 딱딱한 음성이었다. “무슨…?” “목욕탕 입장권 말이요” “아, 그런 거 안 받았는데…!” 그러자 녀석은 고약한 인상으로 변하더니 다짜고짜 따지듯 대들었다. “이 사람이? 뭐라고요? 혹시 요금도 안내고 그냥 들어온 거 아니요?” “아니, 그 무슨? 들어올 때 당연히 요금 주고 들어왔지” “그런데 왜 티켓이 없어요?” “표를 안 주더라니까…?” 녀석은 나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제자리로 갔다. 인터폰인가를 꺼내 들고는 뭐라고 지껄이더니 요금을 받았다는 신호인 듯,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녀석의 행동에 한편 이해가 가면서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말투가 참 고약스럽네. 이거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녀석이 앉아 있는 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거, 사람을 어떻게 보고,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요?”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치 큰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녀석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받았다. “무슨? 내가 뭐라 했어요? 그냥 목욕티켓 달라고 했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요?” 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나는 녀석의 능숙한 표정변화에 놀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몇 사람의 시선이 나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찜찜하고 주위사람들도 오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처음 들어올 때부터 얘길 해야 할 것 아니오?” “아따, 미안하게 됐소. 그만 일로 뭐…!” 녀석은 마치 남 말하듯 넉살스럽게 받아넘겼다. 녀석이 그렇게 나오니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져 버렸고, 머쓱한 기분마저 들었다. 치고 빠지는 녀석의 화술에 완전히 걸렸구나! 싶었지만, 드러내놓고 싸울 일도 못되는 일이 아닌가! “……!, 괜히 생사람 잡지마소.” “네 알았습니다. 사장님” 녀석이 장난하듯 재빨리 대답했다. 조롱기가 다분한 녀석의 말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첫날부터…?’ 하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 이곳을 계속 다녀? 아니면 좀 거리가 멀어도 다른 목욕탕을 찾아 봐?’ 하는 고민이 다시 일었다. 결국, 근방에서는 이곳만한 데도 없다 싶어, 이틀 뒤 한 달 치 이용티켓을 끊었다. 두 번째 갔던 날, 나는 지난일은 잊어버리자는 생각으로 먼저 인사를 보냈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흐트러지지도 않은 곱슬머리를 손바닥으로 싹 쓸어 올리며 지난번과 같이 고개만 까딱했다. 나는 또다시 ‘원래부터 참 시건방진 놈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녀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녀석은 늘 실내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피부가 허연 게 제법 미남형이었다. 키도 늘씬하고 당당한 덩치에다 상당히 균형 잡힌 몸매였다. 째려보듯 하는 실눈을 제외하면 얼굴표정도 나무랄 데 없는 호남이었다. 나이도 아무리 많게 보아도 나보다는, 네다섯 살 정도는 아래로 보였다. 문득 저렇게 훤한 친구가 퀴퀴한 탈의실 안에서, 하루 종일 벌거벗은 남자들의 아랫도리나 쳐다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허우대가 멀쩡한 자식이 참 따분하고, 좀스러운 일도 하고 있구나!’ 싶어 큭!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내 나의 외모나 처지가 훨씬 더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덩달아 잠깐이나마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나의 오지랖 넓은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녀석에 비해 나는 왜소한 체구와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새까만데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죽이는 백수라는 자괴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손님들의 구두를 닦거나 음료수를 팔았다. 틈틈이 바닥청소도 하는 등, 말하자면 탈의실내 관리인격이었다. 따라서 나와는 직접 부닥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마치 나를 감시하듯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곤 했다. ‘처음이라 호기심 때문이겠지!’ 싶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녀석은 제대로 인사 한 번 없는 것은 물론, 내가 먼저 보내는 인사에도 영 시큰둥했다. 그러자 녀석이 의도적으로 호시탐탐 ‘나의 신경을 건드리려 하는 구나!’ 싶어 불쾌감이 들었고, 그에 대한 반발심인지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눈에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며칠 후에야 안 일이지만, 녀석은 가끔씩 산약(山藥)이라 불리는 마를 씻고 다듬었다. 홍보가 잘 된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목욕 후에 마 즙(汁)을 구매해 마시는 것 같았다. 녀석은 벌거벗은 채 목욕탕 안벽에 돌출한 수도꼭지 앞에서 긴 막대기 솔을 휘저으며 마 즙 용기로 쓰는 생맥주 잔을 씻곤 했는데, 참 꼴 볼견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아울러 ‘저렇게 적당히 세척을 해도 위생상에 문제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잔뜩 일었지만, 내가 사 마시는 것도 아닌지라 뭐라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며칠 후에야 처음으로 벽에 걸린 마에 대한 요란한 홍보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앉은 자리 뒷벽에 붙여놓은 거기엔 붉은 붓글씨체로 큼직큼직하게 ‘위장병에 특효, 숙취해소 탁월, 강장과 정력 증강, 고혈압과 당뇨에 특효, 폐질환 완화’ 등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적혀있었다. 나는 그런 홍보문구에도 비위가 거슬렸다. ‘밉상이 꼭 하는 일도 미운 일만 골라 하네. 내가 저 놈의 마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보고, 체면을 구겼는데…! 녀석과는 매사에 살이 끼었군!’
내가 동명해수탕에 다닌 지 한 일주일 가까이 됐을까?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데 녀석이 내게 다가오며 마 즙(汁)을 한 컵 가득 건넸다. 며칠간 녀석의 불친절하고, 시건방진 태도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는 순간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드셔보세요. 잘 아시겠지만 시원하고 몸에 좋은 건강음료입니다.” 깍듯한 말투에 비굴하다 싶은 미소까지 지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녀석의 행동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당황한 나머지, 아뿔싸! 나도 이해 못할 뜻밖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난, 마 이거 안 좋아 하는데…”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지나 싶더니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아. 그래요? 난 또 새 손님이고 해서 인사차 권했더니…?” “미안합니다. 마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이 있기에…!” 또다시 요령부득한 나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나는 안 해도 될 말을 꺼냈다 싶어 내심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뒤돌아가는 녀석을 바라보며, 녀석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나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며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친절에는 앞으로 나를 마 즙 구매손님으로 만들겠다는 상술이 깔려있는 듯 했고, 거기다 몇 해 전에 실패한 마 농사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으니까. 경험도 없이 마 농사를 시작했다가 그 해의 유난했던 장마에다, 토양선충이란 병충해관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렸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삼십대 초반부터 농사에 매달려 왔지만, 특별히 기술을 요하는 작물은 재배해 본 적이 없었다. 주로 벼농사를 지었고, 얼마 되지 않는 밭농사로는 콩, 고추, 고구마 등이 주된 재배작물이었다. 원예작물이나 약초처럼 일손이 많이 가거나 기술을 요하는 작물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랬던 내게 귀농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인 강호가 적극 마 농사를 권했고, 꾐에 빠지듯 내가 넘어가버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참 맹한 짓을 했다싶어 지금도 후회스럽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나이 50대 후반에야 고향으로 귀농한 강호는, 요즘은 농사도 뭔가 특별하게 짓지 않으면 안 된다며 부산을 떨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강호는 안동에서 마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지인에게서 듣고 배웠다며 함께 마 농사를 제의했다.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지라, 수요가 많아 판로도 넓고 수익성도 좋다며 적극적이었다. 처음에 무관심했던 나도 강호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나름대로는 여러 군 데 알아보았다. 농업기술센터에서도 괜찮은 아이디어라며 다른 작물과 비교해서 결코 못할 게 없겠다는 조언이었다. 실농을 한 이후에 강호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명규 이 친구, 마 농사는 완전 맹구네. 난 이 친구만 믿고 시작했는데…!” 그 동안의 자기주장은 싹 빼버리고 엉뚱하게 내게 뒤집어씌우듯 떠벌렸다. 입장을 뒤바꿔, 마치 내 꾐에 빠져 마 농사를 시작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동네사람들이야 그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나의 입장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기분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베테랑이 초보 농사꾼의 꾐에 빠져 농사를 망쳐버렸다는 얘기는 드러내놓고 할 처지가 아니었고, 혼자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다 싶었으니까.
마 즙을 거절한 이후로 녀석과는 서로를 마치 소가 닭 쳐다보듯 했다. 겉으로야 평온해보였지만, 내심으로는 서로에 대해 ‘언제 한 번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긴장관계가 팽팽했다. 탈의실에는 이발사도, 때밀이 청년도 있었다. 한 달 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친절하게 대해줬다. 동네가 변두리 주택가인지라 고객은 거의 고정손님들이었다. 얼마 안 가 비슷한 연배의 손님들은 거의 눈인사를 나눌 정도의 친구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독 녀석과는 그렇지 못했다. 목욕탕에 갈 때마다 녀석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 그러던 중 목욕탕에 다닌 지 달포 정도나 지났을까? 목욕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는데 녀석이 다가왔다. “형씨. 이거 안보여요?” 내가 녀석이 가리키는 벽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물을 아낍시다! 타월은 가급적 한 장으로! 탈의실에 물기를 흘리지 맙시다!’등의 알림사항이 붙어있었다. 내가 ‘그래서요?’ 하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자, 녀석은 예의 그 실눈으로 나의 아래위를 스윽 훑어보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형씨, 공짜라고 마구 쓰는 거요? 타월을…?” 나는 순간, 이거 또 시비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욱! 하는 기분이 치솟았다. “이봐요. 내가 언제 몇 장씩의 수건을 사용했다고 그래요?” “아니 지금도 사용하고 있잖아요? 서로서로 조금씩 아끼는 게 상식 아닌가요?” 녀석은 소파에 앉아있는 다른 손님들도 함께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였다. 나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해졌다. 동시에 ‘이건 순전히 의도적인 시비구나! 그래, 기회는 이때다!’ 싶어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녀석과 꼭 같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뭐. 상식?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래?”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올 때마다 두 장, 석 장씩 쓰지 않았어요? 오늘도 벌써 두 장 째네.” 그러면서 녀석은 혼잣말하듯 하고는 표정을 바꿔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녀석이 일부러 내게 시비를 걸어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실수를 저지르게 하려는 교활한 의도구나! 싶었다. ‘녀석의 의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전혀 몰랐던 것처럼 녀석의 뒤통수에다 한껏 능청을 떨었다. “아! 그래요. 미처 몰랐네요. 진작 일러주시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말이 그렇다 이 말이요. 사장님!” 녀석이 또 금방 사과를 했다. 마치 나를 곯려먹는 재미의 대상으로 삼는가 싶었고, 빈정거리듯 하는 녀석의 언사를 생각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녀석의 말이나 행동거지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의 성정머리도 참 문제구나! 싶은 자괴심까지 함께 일면서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옷장에서 양복을 꺼냈다. 그리고 오래된 넥타이도 하나 찾아내고, 신발장에서 이삿짐 박스에 포장된 채 넣어두었던 구두까지 꺼냈다. 너무 오랫동안 신지 않은 탓이라 뽀얗게 먼지투성이였다. 자주 신었던 것처럼 보이고자, 구두 솔로 대충 닦고, 시골에서 묻혀온 밑바닥 흙도 털어냈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현관문을 향했다. 마침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오다가 뜻밖의 입성에 놀랐다. “아니, 당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은 무슨? 오랜만에 그냥 한 번 입어본거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집을 나섰다.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나는 문을 열고 입구 쪽에서 언제나처럼 앉아있는 녀석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이 보소. 이 구두 좀 닦아주소.” 녀석은 사람을 처음 보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입구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거 잘 닦아야 돼요. 오늘 잔치 집에 갈 거니까” “……?” ‘나야 원래 촌놈이지만, 너도 뭐 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녀석도 질 수 없다는 듯 미소를 띠며 큰 소리로 답했다. “예. 알았습니다. 사장님! 잘 닦아드립지요 하하” 틀림없이 약간의 조소기가 깃든 녀석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 녀석에게 골탕을 먹이자면 이 정도의 미끼와 인내는 기본이고, 남이야 뭐라 하든 촌놈다운 끈기와 뚝심으로 대처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촌놈이 뭐 어쨌다고?’ 내가 덕유산 두메에서 이곳 항구도시로 이사를 온 것은 시골생활이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아이들의 권유에 따른 결과다. 맞벌이를 하는 아들 내외가 함께 살며 자신들의 육아문제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내에겐 꽤나 바라던 일이었고, 나도 회갑을 넘긴 고령에다 이태 전에 다친 허리부상후유증으로 농사일이 버거웠기에 시골생활을 벗어나고픈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막상 이사를 미적미적 대니까, 아들내외는 저희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의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전세로 구했다며 무조건 오라고 했다. 생활해보고 정 불편하고 힘이 들면 다시 고향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를 오긴 했는데, 문제는 내게만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생활해보는 것도 내심 바라던 일이었고, 손주들 돌보는 일만해도 시골농사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는 아들 녀석의 논리가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건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아내야 매일 아들네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집안일도 도맡아하고, 무엇보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인 손자 녀석들 뒷바라지에 시골에서 보다 더 바쁜 나날이었다. 내가 이사를 결심했을 때, 동네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특히 엇비슷한 나이에 고향으로 내려온 강호가 적극적으로 말렸다. “나이 들면 나갔던 사람들도 나처럼 귀향을 하는데, 이제야 도시로 나가다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살아가라고 해. 그리고 정 안 되면 제수씨만 보내. 그럼 되잖아? 혼자 살아도 여기가 맘 편할 걸.” 강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나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혼자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지라 일단 이사부터 해보자 싶었다. 모든 게 생소한 이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고작 어릴 적 학교친구 몇 명이 있었지만 모두 옛 친구일 뿐이었다. 이사 온 뒤 이 친구들과 한 번 만났지만, 이내 시큰둥해졌다. 반갑다는 인사 몇 마디 외는 특별한 얘기꺼리도 없었다. 평생 시골에서 살아온 나와 도회지에서만 살아온 친구들과는 공통된 화제꺼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허드렛일자리라도 찾아보려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냥 쉬라고 하지만,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놀러갈 데는 더욱 없었다. 대신 아내는 나와 달리 활기가 넘쳤다. 손자들의 뒷바라지야 바라던 일이었지만, 사람들을 사귀는 재주도 놀라울 정도였다. 아내는 고향에서도 50여 호에 이르는 마을의 이장 역할을 맡았을 만치 활달한 성격이다. 여기서도 아파트단지내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매일 아침 나가더니 어느새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했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그곳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친구가 되었고, 아파트 부녀회에도 초청을 받아 참석하는 등 하루가 다르게 도시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내가 비교적 오래 머무는 곳이 헬스클럽과 목욕탕이었다. 거기서는 새로 사귄 몇몇 이웃들과 비록 겉돌지언정 세상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붉은 악마 녀석이야말로 내게는 마치 사타구니에 선 가래톳처럼 거북살스러운 존재였다.
구두는 반질반질하게 닦여져 있었다. 나는 만 원짜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팁이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지갑에서 천 원짜리 일곱 장을 내가 보라는 듯, 한 장씩 한 장씩 또박또박 세며 꺼냈다. “팁이라니까요.” 내가 잔돈을 받지 않고,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약간 뜸을 들이다가 씩 웃었다. “팁이라…? 사장님! 다음에 많이 주세요.” “적어서 안 받는 거요?” 나는 일부러 뒤퉁스런 소리를 했다. “아니오. 팁은 받지 않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요? 팁을 받게. 아 참! 그보다 사장님 구두 뒤축이나 좀 갈아 끼우시지요, 많이 닳았던 데…!” “……. 그래요? 고맙소.” 낡은 구두를 비꼬는 말투다. 나는 구두를 신으며 몇 푼의 팁으로 기를 꺾어보리라 던 생각이 구두뒤축 때문에 헝클어지고 말았구나! 싶었다. ‘여우같은 놈…!’ 나는 일부러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녀석의 입가에 묻어있을 비릿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애써 양복을 찾아 입고 구두까지 꺼내 신으며 묘안을 짜냈건만, 오늘도 판정패했구나! 싶었다. ‘녀석에게 왜 이리 신경을 쓰지? 나이 탓인가?’ 계단을 내려오며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서푼어치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에 얽매여 촌놈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목욕탕을 나왔으나 갈 곳이 마땅찮다. 양복까지 차려입고 나왔으니 벌건 대낮에 곧바로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마치 패잔병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야 보나마나 아이들 집에 갔을 테니 신경 쓸 일도 아니다. 모처럼 넥타이에다 반질거리는 구두까지 신은 김에 시내구경이라도 한 번 해 볼까? 그동안 가보았던 몇 안 되는 곳을 기억해냈다. 시내로 가는 도시철도를 타기위해 가까운 역을 향해 걸었다. 먼 거리도 아니건만 운동화의 편안함이 생각났다. 도시철도에서 내려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특별히 할 일도 없는지라 전망대 옥상에 올라 항구의 이모저모를 내려다보았다. 바다와 배와 다리와 건물들이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키들을 자랑하는 건물도, 다리 위를 달리는 차들도, 파도를 가르는 선박들도…,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도시 전체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심지어 끊임없이 들리는 소음마저도 제 때 들리지 않으면 모두가 마비되지나 않을까? 문득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거대한 도시를 이루는 부속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물론, 물건까지도 모두 맡은 역할이 있는데…. 나 혼자만 구경꾼이구나? 싶었다. 그러자 ,정말 잉여인간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우울한 잠기기도 했다. “여보, 내일 저녁에는 아랫집에 놀러갑시다.” 오후 내내 자갈치시장 해안가를 거닐며 스산한 바닷바람을 쐬다가, 모처럼 늦은 시각에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자 대뜸 아내가 말을 걸어왔다. “아랫집이라니? 당신 아는 사람이요?” 심드렁한 기분으로 내가 물었다. “우리 집 아래층. 그럼 알죠. 매일 아침 배드민턴 같이 치는 아줌만데…!” 아내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로서는 벌써 아는 사람 집에 초대까지 받았다는 게 신기했다. “왜 무슨 일로?” “구경할 거야 뭐가 있을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랫집에 누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야 마찬가지였다. “아래 집 아저씨는 연세가 어떻게 된대? 그리고 뭘 하는 분이래?” 때 아닌 궁금증으로 의례적이긴 하지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이는 당신하고 동갑인가 봐. 작년에 환갑을 지냈다니까. 내일이 생일이면 당신보다는 형뻘이겠네. 그리고 아저씨를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사촌동생 빌딩 관리해준다며 아직 매일 출근을 한 대. 제법 큰 회사 다니다가 재작년에 정년퇴직했다던가.” “그래. 잘 됐네. 나이가 동갑이면 친구해도 되겠네.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내일 같이 가 보자니까. 우리처럼 아이들도 모두 분가하고 둘이서 생활하나 봐.” 나는 한사람이라도 새로운 이웃이 생기면 다행이라 싶었고, 오랜 고향친구들 같진 않겠지만, 만나서 인사하고 가끔 자리를 함께 할 수만 있어도 그게 어딘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래층 사람 얼굴도 몰랐다는 사실이, 새삼 내가 많이 잘못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튿날은 종일 저녁시간이 기다려졌다. 평소 무관심했던 타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잠자던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양복 그대로다. 첫 대면인데 가급적 깨끗한 인상이 좋겠다 싶어서다. 아내는 어느새 준비해두었던지 조그만 선물꾸러미까지 들고 나섰다. 구두를 신으며 어제 구두를 닦은 게 참 잘한 일이구나! 싶었고, 나의 선견지명이 대견스러웠다. 아랫집 현관 앞에 이르자, 아내는 나의 옷차림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약간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아주고는 현관 벨을 눌렀다. 이윽고 안으로부터 어서 오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내와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아내의 뒤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는 순간, 어디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얼른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비명 같은 소리가 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 당신은…?” 동시에 상대방도 소리쳤다. “아니 당신이었소?” 오늘 저녁, 그 녀석은 붉은 악마의 티셔츠가 아닌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끝.
|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맨끝의 반전이 아주 매력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