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3강 -1(2009.07.06)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義 근래 불교 뉴스를 보니까 기독교 계통에서 여러해 전부터 성시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성시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전 도시를 기독교 도시로 만든다 하는 그런 운동이랍니다. 그게 이제 벌써 여러해 전부터 그 부서가 기독교 계통에서 딱 있고 그 연구와 그런 어떤 실천을 위한 자금도 상당히 거출을 많이 해서 아주 본격적으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는 종교 자유 국가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아주 인간으로서 어떤 기본권, 그것을 한껏 용납하고 살려주는 그런 민주주의 국가이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 근대사를 보면은 소위 ‘근대화’니 ‘현대화’니 그런 말을 우리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곧 ‘서양화’ 라는 뜻과 같은 거죠. 동양식으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살아오던 그런 관습과 생활 환경에서 서양의 물결이 들어와 가지고 소위 근대화니 현대화니 하는 것은 곧 서양식 삶의 방법으로 변해갔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 서양화가 되다 보니까 그것이 곧 서양화인데 그러다 보니까 서양에서 들어오는 소위 종교까지도 함께 들어와 가지고 불과 일이백 년 밖에 안된 종교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뭐 그 숫자로도 상당하고 실제적인 그 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놀라울 정도로 참 그렇게 막강한 그런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정부의 각 부서의 장관하며 또 국회하며 등등 지방의 어떤 그 공무원 사회에까지도 그 사람들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뭐 엄청납니다. 불교하고 비교를 하면 십분의 일도 안돼요 불교는. 교육계, 학교도 마찬가지고 유치원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어떤 힘으로 생각하면은 도저히 이거 이겨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예요, 사실은. 지금 그 정도로 됐습니다. 그 한 가지 좋은 예로서 서울 시내만 가지고 치기로 하면은 물론 양이 많다고 해서 질이 우수한 건 물론 아니지마는 교회가 오천 칠백 개가 있습니다. 서울에. 그런데 불교 계통 사찰, 물론 천태종, 태고종, 기타 뭐 다른 관음종 뭐 다른 종을 다 합하면은 그 배로 되겠지마는 조계종만 가지고 따지면은 조계종 사찰이 서울에 백 팔십 개. 그 다른 종단까지 다 합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한 삼백 여개 사찰 내지 사백 개, 삼사백 개 밖에 안되는데 기독교 교회는 오천 칠백 개의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아주 막무가내고 지극히 공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그렇게 하고 심지어 그쪽 단체에서 도시와 국가를 모두 기독교화 할려고 하는 그런 전략과 연구 부서와 인력과 재정을 결집시키고 있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조계종에서도 몇일 전에 그 문제에 대해서 세미나를 열은 것을 내가 봤는데 참 이게 보통 일이 아니예요. 이게 그럼 기독교 국가로 되면은, 기독교 국가로 그렇게 쉽게 될리는 없겠지마는 어떤 한 부분이라도 그렇게 되면은 국가의 재정을 가지고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쓰이는 그런 사례가 생기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백 퍼센트, 한 구청 직원이 위에서부터 백 퍼센트 기독교인이다 라고 하면은 그 사람들이 예산을 짜는데 기독교를 발전시키고 교회를 밀어주는 그런 데로 돈을 얼마든지 집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이제 국가의 돈이고 우리 국민들의 돈인데 국민의 재산이고 국가의 재산인데 그것이 그렇게 쓰일 우려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게 이제 참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불교 포교 문제가 더욱 아주 시급하고 정말 발등에 떨어진 불 이상으로, 어쩌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라 머리에 붙은 불일지도 몰라요. 그만치 포교가 아주 급하고 심각한 그런 상황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왜 그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그런 큰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됐는가. 그건 이제.. 불교는 모든 문제를 인연의 법칙으로 또는 인과의 법칙 내지 연기의 법칙으로 풀어냅니다. 거기에 맞지 아니하면 불교도 역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고, 사실, 전부 우린 이제 인과의 법칙, 연기의 법칙, 인연의 법칙에 맞아야 되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선전한 것도 우리의 연기의 법칙, 소위 인연의 법칙으로 해석해내야 됩니다. 우리는 천 칠백년의 역사를 가졌는데도 숫자는 이천만, 불교도가 이천만 운운 하지마는 실제적으로 천만이 될까 말까 할 정도고 다른 공무원이라든지 각 교육계라든지 정치계라든지 등등 분야에 분포돼 있는 그 세력을 가지고 따지자면은 십분의 일이 안돼요, 사실, 우리 불교인이. 그 정도입니다. 국회의원 숫자로 보든지 정부에서 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든지 열명의 한 사람도 안돼요, 불교인이. 그 정도로 지금 열세라구요. 그걸 이제 우리가 인과로, 연기로, 인연의 이치로 한번 풀어보는데 나는 그렇게 풉니다. 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일이백 년 사이에 그와 같이 천 칠백 년된 불교보다도 훨씬 더 세력이 확장이 되고 그렇게 방대하게 됐는가. 그것은 6.25 를 거치면서 말하자면 서구의 문화와 물질이 물밀듯이 들어온 것이 하나의 큰 원인이고, 거기에 이제 붙어서 들어온 것이 소위 그 선교 활동인데 이 사람들의 선교활동이 처음에는 무조건 질량 공세, 물질 공세를 했습니다. 그거 저기 먹는 거다 뭐, 온갖 분야에.. 예를 들어서 의료 사업이라든지 교육 사업이라든지 또는 뭐 복지 사업이라든지 이런 분야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큰 활동을 하고 이 우리 나라에다가 그렇게 쏟아 부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의 예로서 6.25 이후에 전쟁 고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 십 만명이라고 할 정도로 전쟁 고아가 있었는데 사실 절에서 거둬들인 전쟁 고아는 불과 백 명에 한 두 사람이 될까 말까여. 나머지는 전부 기독교, 천주교에서 그 전쟁 고아를 거뒀습니다, 한 예로서. 그렇게 그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다가 말하자면은 투자한 것이 많습니다. 그만치 복을 많이 지었다고 볼 수 있는 거요. 복도 많이 지었고 돈도 많이 썼고 투자도 많이 하고 사람들을 위한 그런 복지와 소위 봉사, 이 분야에 대해서 우리보다 백 배, 천 배의 그런 힘을 기울였어요. 그러니까 그 인연으로 짧은 시간에, 일이백 년된 그 짧은 시간에 그만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못했거든요, 사실은. 뭐 수행한다 하고, 자기 수행한다 하고 전부 소극적으로 소승이 돼 가지고 살았지 무슨 사회 활동이라든지 사회를 위해서 기여하는 거라든지 무슨 봉사활동이라든지 복지라든지 이런 데 대해서 전혀 눈뜨지 못했습니다. 근래에 조금 이제 하고 있지만 그런데 근래 그거 다 통계 내 보면 백분의 일도 안돼요, 아직도. 상당히 많이 한다고 하는데 백분의 일이 안됩니다. 뭐 유치원이라든지 병원이라든지 기타 뭐 복지회관이라든지 또 단체별로 나가서 봉사활동하는 거라든지 아직도 백분의 일이 안돼요, 그 사람들의. 그럼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회에다가 기여를 하고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다 대고 복을 많이 짓습니다. 뭐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은. 우리는 그 분야에 대해서는 너무 부족해요. 그러니까 계속 딸리는 거요. 그리고 스님들은 또 소극적이고. 그저 자기 수행, 자기 수행하면서 아주 뭐 끊임없이 소극적인 거요. 그 사람들은 아주 공격적이고.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까 지금 그렇게 우리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그 사람들이 지금 상황을 가만히 통계적으로 보니까 머지 않아 기독교 국가, 기독교 도시가 되는 것이 뭐 아주 너무나도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쉬운 일인 거야, 자기들 계산상으로 보면.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그런 부서를 만들고 거기다 기금을 투자를 하고 그래서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시급한 것이 뭐 그 사람들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 불교의 본분으로서 포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공부하는 스님들은 대개 포교 일선에 계시기 때문에 더욱 포교에 아주 헌신적으로 박차를 가해야 되는데 포교를 이제.. 무엇이 포교인가. 지금 어떻게 보면 상당히 막연하거든요. 뭐 초하루 법회하고 관음재일 지장재일 법회하는 거, 물론 그것도 포교예요. 하지만 그보다 더 지금 이 시대에서 복이 되고 결과적으로 좋은 효과를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 복지 포교, 봉사 포교입니다. 소단위면 소단위대로 그 지역에서 그 동네에서 그 이웃에서 A 라고 하는 사찰이 있으면 그 A 라고 하는 사찰 그 주변에 불과 다섯 가구든지 열 가구든지 그 정도만이라도 보살피고 뭔가 좀 베풀어 주는 그런 복지 내지 봉사포교를 제일 우선으로 해야 돼요. 그걸 더 우선으로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전법포교. 전법포교는 재일날 법회라든지 그 다음에 교양대학이라든지 이런 것이 전법 포교에 해당되는데 옛날엔 그것만 했어요. 그것만 했는데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사실 복지포교입니다. 그게 이제 복이 되는 거예요. 전법 포교는 복은 별로 안됩니다, 사실은. 뭐 법회 들으러 오긴 오지만 와 가지고 자기 공덕 빌고 복 빌고 자기 기도하고 하다가 돌아가지 정말 불교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정말 불교의 진리가 어떤가를 정말 진지하게 공부하겠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오는 사람 불과 몇이 안돼요. 근래에는 조금 나아졌지마는 그래도 불과 몇이 안되고 무슨 관음재일이다 지장재일이다 오는 사람들이 거의 복 빌러 오고 기도하러 오는 거지 불교 알러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교양대학 같은 거, 법회, 소위 전법 포교, 교양대학을 포함해서, 이런 것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건 뭐 한문 서당이라든지 방학을 위한 아이들에게 한문 교실 같은 걸 연다든지 이런 등등 살펴보면 부지기수죠. 그런 걸 사실 많이 해야 되고. 그 다음에 요즘 또 상당히 빛을 보고 있는게 문화 포교인데 그건 소위 템플 스테이라고, 그건 특수한 사찰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사찰이나 할 수 없어요 그거는. 우리 나라에 그걸 할 수 있는 사찰이 뭐 오십 갠가 육십 갠가 밖에 안돼요. 본사도 못하는 본사도 있습니다. 말사라 하더라도 규모가 괜찮은 사찰이라고 한다면 템플 스테이 할 수 있는데 그게 문화 포교인데. 그건 이제 기독교인도 오고 비불교인도 오고 와 가지고 불교의 전통 문화를 한번 체험하려고 하는 것, 그야말로 사찰 생활을 아주 경험하고 가는 그건 상당히 호응이 좋고 또 서양 사람들에게, 특히 서양 사람들, 또 비불교인들이 한번쯤 접하고 싶어하는 그런 그 문화 포교인데 그것도 상당히 바람직하긴 해요. 그 다음에 또 요즘 소위 수행포교라고 할 수가 있는데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불교의 어떤 고유한 그런 장점 중의 하나인데 옛날에 우리는 거의 불교 하면 수행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행만 한다고 그렇게 앉아 있을 겨를이 없어요 지금은.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뭐 토요 참선회라든지 주말 참선회라든지 아니면 뭐 일요참선회라든지 이런 등등, 시민 선방이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수행 포교 이것도 상당히 필요하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리도 필요없고 법문도 필요없고 그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또 그런 것을 통한 그런 포교도 한편 펼쳐 나가야 되는데. 무엇보다 내가 맨 처음 강조한 그 봉사, 복지, 복지 포교, 이것이 복이 되고 첫째 우리가 그건 이제 할려면은 없는 돈이라도 주머니 돈를 털어야 되고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은 복이 되는 데는 제일 우선하거든요. 뭐 전법 포교도 복도 되고 물론 문화 포교, 수행 포교 다 좋은 일이지마는 복지 포교가 제일 그 사람들에게 바로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상당히 효과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에 맞대응한다는 그런 표현보다는 그런 의식보다는, 우리가 불교가 살아 남을려면은 복을 많이 지어야 돼요. 이게 이제 내가 인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으로 풀어본 것입니다. 사실 그걸로 풀어야지 어떤 상황도 그걸로 풀어야지 인과의 법칙으로 풀지 않고 그냥 세속적인 논리로 맞대응 한다든지 세속적인 논리로 붉은 띠 두르고 가서 막 고래고래 고함치고 해달라고 하고, 이거 가지고는 안됀다고요. 마지 못해서 한다든지 더 욕하면서 해준다, 해 줘도 더 욕하면서, 반감만 더 사면서 마지 못해서 해 주는 거요. 몇일 전에 우리 통도사에서도 스님들이 뭐 그렇게 천 오백 명 모였다고 그러는데 모여가지고 그렇게 시위를 통도사 안에서 했죠. 안에서 해 가지고 이제 언론에서부터 그걸 보도해서 그렇게 이제 뭔가 건의를 했지마는 그것도 전부, 정부 요소 요소에 전부 기독교인이 들어 있어 가지고 불교가 발전될 것은 전부 브레이크 다 거는 거야. 불교에 이익이 돌아간다 하는 건 전부 브레이크를 다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고 그만치 그 사람들은 짧은 시간 내에 일이백 년 사이에 인연을 많이 짓고 인연을 지으면서 복을 많이 지은 거야. 한 마디로. 병원을 세운다든지 무슨 뭐 복지 회관을 만든다든지 고아원을 만든다든지 해 가지고 옛날 고아원 전부 기독교 고아원이지 어디 있습니까. 불교 고아원 하나도 없었어요. 겨우 사찰에서 그저 두 세 명 아이들 키웠지. 우리 6.25 전쟁 이후에 그러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그 전쟁 고아, 수십만 명을 전부 그 사람들이 감싸줬으니까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습니까. 그 사람들 그렇게 복을 많이 지은 거요, 짧은 시간에. 그래 놓으니까 오늘날 그렇게 크게 성장을 해서 큰소리 땅땅 치고 온 국토를 전부 이제 기독교화한다 하는 이런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사실은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더라도 복을 많이 지어야 돼요. 뭐 소금 먹은 사람이 물킨다고 복 많이 지어 놓으면 저절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불교라고 하는 단체에서 그런 복지 쪽으로 사회 봉사 쪽으로 복을 많이 지으면은 그것이 언젠가 다 그 은혜를 입어서 다 귀의하게 돼 있고 그 다음에 뭐 불교 교리야 더 말할 수 없는 좋은 소재니까 게임이 안돼죠, 교리 같은 거 가지고는. 전법이라든지 이런 분야는 뭐 귀의하기만 하면은, 호감만 가지고 있으면은 뭐 그 사람들 교화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은. 워낙 교리가 좋고 부처님 가르침이 위대하기 때문에. 이런 시사성도 우리가 항상 피부로 느끼고 늘 경각심을 가지고 사실은 어떤 사찰 운영도 하고 또 포교도 하고 그래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사실 전시라는 표현을 하더라구요. 세미나를 하면서, 전시다, 이게. 완전히 북한에서 무슨 미사일 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불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완전히 전쟁 중이다. 아주 심각한가봐요. 특히 서울 사는 사람들은 그걸 아주 더 느낍니다. 오천 칠백 개 교회에서 조계종 사찰이 백 칠십 개 밖에 안된다니 그게 뭐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닙니까 그거? 그러니까 완전히 심각하고 전쟁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대요. 그래 힘닿는 대로 포교당을 많이 열고. 자꾸 포교당을 많이 열어서 그래 인연을 자꾸 지어주고 포교당 열면 거기에서 이제 봉사 활동, 복지 활동 이런 것을 소규모라도, 복지 회관이 꼭 필요한 게 아닙니다. 복지 회관 사실은 큰 덕 안돼요. 솔직하게. 개별적으로 뭐 독거노인이라든지 그다음에 저 무의탁 노인들 그 다음에 소년소녀 가장들, 또 무료 급식 이런 것을 통해서 아주 그야말로 소규모로 복을 짓는 그런 복지 운동을 많이 펼쳐야 됩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지방에 사니까 심각한 걸 덜 느끼는데 서울 사는 사람들은 완전히 전쟁터와 같답니다, 스님들. 뭘 해볼려고 하면 도대체 안되는 거요. 동회에 가도 전부, 뭐 하나 허가 맡으러 하나 가도 전부 그 사람들이 브레이크 다 걸지. 브레이크 걸어서 아무 것도 안된다는 거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서 더욱 더 우리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전법 활동도 열심히 하고 복지, 봉사, 이런 것을 통해서 세상에다가 보탬이 되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그런 일을 좀 관심있게 생각해야 될 그런 시대가 바야흐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수행만 가지고 생각하고 있을 그런 때가 아니예요. 내가 늘 말씀드리고 존경해 마지않는 증엄 스님은 수녀들로부터 ‘그 좋은 불교 교리 가지고 당신들은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 이 한 마디에 그만 사람이 팽 돌아 가지고 오늘날 정말 훌륭한 그런 관세음보살로, 정말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로 세상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참 정말 아주 그 한마디에 눈을 잘 떴어요. 불교의 눈을 잘 떴습니다. 그래 이제 불교, 우리 선불교하고 이 좋은 임제록을 공부하지마는 사실은 불교 궁극은 이타행이거든요. 보살행입니다. 이 선불교는 어떻게 보면은 순 자리행이거든요. 순전히 철저히 자리행입니다. 자기만 이익하게 하는 거요. 자기 한 사람 인생 문제 해결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마는 남에게 보탬은 전혀 안되거든요. 그래서 대,소승의 입장에서 보면은 철저히 소승 불교인거야. 철저히 소승 불교요. 신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야 돼요. 정말 새롭게 대승 불교 운동이 일어나서 대승 불교는 철저히 이타행입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 이게 이제 우리가 습관이 안되고 뭐 평소에 이타행, 이타행 해도 용기가 잘 안나죠. 하지마는 해야 하는 것이 이타행입니다. 그래서 자기 수행은 잘 하지마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은 참 그렇게 어려운 거요. 보살행이라는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참 어려운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불교인 걸 어떻게 합니까. 진짜 불교는 보살행입니다. 이타행이에요. 우리가 하든 못하든 우리가 그렇게 실천을 하든 못하든 알고는 있어야 되는 거여. 그 외 자기 수행은 아무리 뭐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자리행, 소승적인, 소승불교고 자리행일 뿐입니다. 실천은 안되지만은 우리가 그렇게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타행이야말로 이게 불교인데 이게 진짜 불교인데 이게 진짜 부처님 마음인데 하는 그런 갈등을 해야 해요. 항상 고민을 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 갈등을 하다보면은 언젠가 보살이 될 수가 있고 하나하나 행이 보살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사찰 운영도 정말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고 덕이 되는 그런 입장으로 사찰을 운영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찰이 거덜나는 것도 아니예요, 사실은. 그 마음만 조금만 이제 둑을 무너뜨리고 마음의 문을 열면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 퍼줬다고 해서 뭐 한 두끼 굶지 하루 내내 굶는 거 아니고 한달 내내 굶는 거 결코 아닙니다. 그 정도의 어떤 용기를 가지고 정말 확 터지게 그렇게 마음을 열어서 하면은 얼마든지 그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도 이제 시급한 일이고 정말 전시와 같이 생각해야 할 그런 상황이어서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10-4 밖에서 찾지 말라 大德(대덕)아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此不是儞久停主處(차불시이구정주처)니 無常殺鬼(무상살귀)가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不揀貴賤老少(불간귀천노소)니라 儞要與祖佛不別(이요여조불불별)인댄 但莫外求(단막외구)어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淸淨光(청정광)은 是儞屋裏法身佛(시이옥리법신불)이며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分別光(무분별광)은 是儞屋裏報身佛(시이옥리보신불)이요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差別光(무차별광)은 是儞屋裏化身佛(시이옥리화신불)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시이즉금목전청법저인)이라 祗爲不向外馳求(지위불향외치구)하면 有此功用(유차공용)이니라 據經論家(거경론가)하면 取三種身(취삼종신)하야 爲極則(위극칙)이나 約山僧見處不然(약산승견처불연)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名言(시명언)이며 亦是三種依(역시삼종의)니라 古人云 身依義立(고인운 신의의립)이요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 이니라. 임제록 28쪽, 밖에서 찾지 말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건 이제 철저히 선불교의 교전이고 또 선불교 입장에서 보면 임제록 같은 그런 최상승은 없어요. 하지마는 이것도 결국은 바람직한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은 소승불교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소승불교예요. 자기 한 사람 그 인생 문제 해결에는 뭐 그럴 수 없이 좋은 가르침이긴 합니다마는 세상에 크게 보탬이 되는 거는 아냐. 大德(대덕)아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삼계가 편안하지 못한 것이 마치 불난 집과 같다. 此不是(차불시), 此, 이곳은 여기는, 우리가 사는 여기는, 불난 집과 같으니까 바로 불난 집이라고 여기는, 儞久停主處(이구정주처), 그대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不, 못된다. 그렇죠. 불난 집이라면 얼른 뛰어 나가야겠죠. 오래 머물 곳이 못돼죠. 無常殺鬼(무상살귀)가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不揀貴賤老少(불간귀천노소)니라. 無常殺鬼(무상살귀), 이건 이제, 無常,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도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고 숨을 들이쉬든 내쉬든 간에 시간은 흘러가는 거요. 바로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그것은 바로 죽음의 귀신이야. 무상한 시간은 殺鬼, 죽음의 귀신이다. 사람을 죽이는 죽음의 귀신이다 이 말이여. 그래서 一刹那間(일찰라간)에, 한 순간에도 貴賤(귀천), 귀한 이든 천한 이든, 늙은 이든 젊은 이들을 가리지 않는다. 뭐 귀천 노소를 가려가지고 무슨 죽음이 찾아오는 게 아니거든요. 순서대로 아니라고요. 儞要與祖佛不別(이요여조불불별)인댄, 그대들이, 與祖佛不別(여조불불별), 조사나 부처로 더불어 다르지 않기를 요할진댄, 요구할 진댄, 그러니까 조사가 되거나 부처가 되고저 한다면은, 이런 말이죠. 그럴려면은, 뭐라고, 但莫外求(단막외구)어다. 다만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일심상의 문제다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절대 구하는 건 아니예요. 이건 이제 선불교로서는 아주 그냥 정말 정확한 말씀이고 정통파죠.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淸淨光(청정광)은,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에 청정한 광명은. 우리의 한마음이 그야말로 온갖 사물을 분별하고 온갖 것을 다 분별하지마는 그것은 텅 비어 있어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이야기하는 거야. 금방 내가 드린 말씀 가운데 허 그 참 공감하고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아이고 뭐 중이 뭐 기독교야 어떻게 되든지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그거 뭐 귀찮게 생각할 게 있겠냐고, 그렇게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그래도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근본이 텅 비어 있어. 이게 청정광이야. 텅 비어 있는 그것이 청정광입니다. 우리가 청정도량 또는 수월도량, 같은 말이예요. 존재하기는 하는데 텅 비었어.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은 도량, 그래 수월도량 하잖아요. 청정도량 해도 마찬가지고. 청정이란 말은 거의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텅 비었으면서도 달 그림자처럼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이 온갖 것을 분별하고 하더라도 텅 비었기 때문에 그것이 청정광이라. 이것을 뭐라고 하면 是儞屋裏法身佛(시이옥리법신불)이다 그랬어요. 그대들 집 속에, 집이 뭡니까, 우리 몸이죠. 그대들의 몸 속에 있는 법신불이다. 또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그대들 일념심상의, 無分別光(무분별광)한, 그러니까 텅 비었으니까 차별이 없는 거야. 여긴 무차별광이라고 이제 또 나오지만 이래 저래 분별하는 거. 뭐 남자다 여자다 그런 분별 없잖아요 우리 마음 자리에. 내가 이제 가끔 그런 말 하죠. 이 말을 듣는 그 존재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야. 여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남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스님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속인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는 것도 아니야. 아무 조건없이 듣는 그 사실. 무분별광이죠. 일념심상의 무분별광은 是儞屋裏報身佛(시이옥리보신불)이다. 그대들 몸 속에, 옥리, 집 속에, 옥리, 집 속에 있는 보신불이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差別光(무차별광). 차별없는 빛, 요건 이제 무분별광하고 비슷한데 여기에서 이제 분별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을 해서도 안되는 거죠. 본래 우리가 보통 차별 많이 하잖아요. 그럼 차별하기 전에는 분별합니다. 아, 저사람은 나하고 친한 사람이구나. 머리 속에 분별해 놓고 그 다음에 차별이 나갑니다. 행동으로 차별이 나가요. 그래서 이제 무분별, 무차별, 이렇게 이제 순서가 되는 거죠. 일념심상의 무차별광은 그대들 屋裏(옥리), 집 속의 化身佛(화신불)이니, 이 三種身(삼종신)은, 이 세가지 몸이라고 하는 것은 是儞卽今 (시이즉금), 이것은 그대들의 즉금, 目前聽法底人(목전청법저인) 이다. 결국은 눈 앞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현재 우리가 법문 듣는 그 사람이여. 그러니까 거기는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고 젊은이도 아닌 바로 그 한 존재, 그 한 존재가 말하자면은 뭐 이름을 이렇게 지어 붙힐 수도 있고 저렇게 지어 붙힐 수도 있고, 법신불이라고 지어 붙힐 수도 있고 보신불이라고 지어 붙힐 수도 있고 화신불이라고도 지어 붙힐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워낙 불가사의한 존재고 워낙 오묘한 존재라. 지금 말한 그 당사자, 그 사실, 그리고 말하는 소리를 역력히 듣는 그 사람, 聽法底人(청법저인), 지금 눈 앞에서 법문 듣는 그 사람은 너무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들 개인의 어떤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재산을 축적한다고 하면은 제일 크고 아주 뛰어나고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재산은 바로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눈 앞에서 현재 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깊은 이해, 그리고 확신, 이것보다 더 훌륭한 재산은 없어요 사실은. 이거 하나 제대로 우리가 자기 살림 살이로 손에 잡혔다고 하면은 뭐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다 해결이야. 祗爲不向外馳求(지위불향외치구)하면 다만 밖을 향해서 치구하지만 아니할 것 같으면 有此功用(유차공용)이니라, 그와 같은 공용이 있다. 법신, 보신, 화신. 그러니까 자꾸 밖을 향해서 나가다 보니까 자꾸 밖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밖을 향해 나가다 보니까 자기 속에 있는 법신, 보신, 화신이 그만 맥을 잃고 마는 거죠. 그래 밖을 향해서 나가지만 않으면은 자기 안에 법신, 보신, 화신이 다 있다. 이 법,보,화 삼신이 불교 용어 중에서는 아주, 열 가지 십대 불교 용어 안에 들어가죠. 법신, 보신, 화신은 불교 용어 십대 용어 중에 들어가요. 그 안에 들어가. 진여, 열반, 이런 것도 물론 중요하지마는, 아주 중요한 거지마는 그래봤자 뭐라고, 임제 스님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그 당사자, 말소리를 듣는 그 당사자,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據經論家(거경론가)하면 경론가, 경이나 논을 공부하는 교학자들의 정신에 근거, 의거할 것 같으면 取三種身(취삼종신)하야, 삼종신을 취해가지고서 爲極則(위극칙)이다, 내가 뭐라고? 법보화 삼신은 불교 십대 용어 안에 들어간다, 그랬잖아요. 법보화 삼신은 최고로 극칙으로 삼는다 이거여. 경론가에서는 이건 뭐 정말 첫손가락, 둘째 손가락, 셋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렇게 최고의 용어가 되는 거지. 극칙으로 삼지마는 約山僧見處不然(약산승견처불연)이다, 산승의 견해에 의지한다면은 산승견의 입장에서 본다면은 그렇지않다.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名言(시명언)이다, 정말 십대 용어 안에 들어가는 일,이,삼위를 다투는 그런 뛰어난 용어이지마는 그래봤자 이름이고 말일 뿐이다. 삼종신은 시명언이다. 亦是三種依(역시삼종의)다, 세가지의 의지할 것 밖에 안된다. 왜 의지를 해. 의지할 필요가 없는 거요.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존재하는 까닭에 하나도 의지할 것이 못된다. 이름이고 말일 뿐이다. 그리고 삼종의지라 세 가지 의지할 거다. 그래 이름 근사하게 지어놓고 그 이름에 의지하는 거요. 이게 이제 경론, 교리, 경학, 여기에만 치중돼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거 지어낸 것이 아니고 본래 있는 줄 알았어요. 한참 경전 공부하고 화엄경 같은 거 보면은 그 안에 얼마나 부처님의 명호와 보살들의 명호와 세계의 명호가 많습니까. 뭐 온갖 경이 다 그렇죠. 법화경도 마찬가지고. 그게 지어낸 것이 아니고 본래 있는 건 줄 알았어. 아니야, 전부 지어낸 거야. 전부 지어낸 거야. 우리 한마음의 도리가 너무 불가사의하고 심심미묘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냥 그야말로 뭐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온갖 것을 다 잣어내는 거요. 그 안에서. 다 뽑아 내는 거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훌륭한 마음을 가지고 이 불교인들은 그 기기묘묘한 경전의 말씀과 교리를 만들어 냈지마는 지금은 뭐 비행기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고 뭐 온갖 거 인공위성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 내잖아요. 한마음이 들어서 그걸 만들어 내는 거야.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옛날에는 물질이 발달하기 전에는 무엇이든 못만들어 내겠어요. 법신이니 보신이니 화신이니 진여니 열반이니 뭐 온갖 고급스런 용어를 다 지어 붙히는 거지. 요즘 인공위성 만들고 컴퓨터 만들듯이 그렇게 만들어 내는 거죠. 古人云 身依義立(고인운 신의의립)이요,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법신, 보신, 화신이라고 하는 이것은 뜻에 의지해서 세운 말이고.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 토, 이게 국토가 있어요, 또. 법신은 또 법신이 있는 국토가 있고 보신은 보신이 있는 국토가 있고 화신은 화신이 있는 국토가 있어요. 그러니까 몸이 있다 할 거 같으면은 그들이 사는 곳이 있어야 될 거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겼는가. 그래서 그냥 부처님 한 분 딱 이렇게 만들면은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론이 그냥 처억 이렇게 엮어지는 겁니다. 뭐 다른 건 다 생략하고 국토만 하더라도 국토는 거체론이다. 체에 의지해서 우리의 신체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말하는 것이다.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이로다, 법성신이니 법성토니 하는, 말하자면 우리의 몸이 있으면 우리가 사는 절이 있을 거다. 여기에 이제.. 우리는 그래도 이 몸이라도 가지고 있고 또 뭐 암자가 됐든 절이 됐든 그 나름의 의지처가 있지마는 옛날 이 저 경학가들이 만들어 내놓은 그 이름과 그 국토는 이건 토굴보다도 못한 거요, 암자보다도 못한 거요. 법성신 법성토 해봤자 텐트 하나만도 못해. 사실 따지고 보면. 전부 한 생각이 만들어 내 놓은 것이니까. 그래서 뭐라고?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이다. 이 빛 光 자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전부 그림자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겠도다. 明知. 분명히 알겠도다. 전부 그림자여. 우리가 불교의 의식을 통하든지 경이라든지 논이라든지 기타 불교에 귀의하면서부터 들어온 불교 안의 온갖 지식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자꾸 이제 듣고 정말 세뇌 교육이 되는 거죠. 세뇌 교육이 되다 보면은 모든 게 실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한다고, 실재하는 것처럼. 나도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지금도 사실은 그런 의식이 완전히 깨끗이 지워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저 임제록 같은 이런 그 정말, 우리 인간의 주체성을 또는 이 우주와 세상의 주인, 바로 그 핵심, 그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해 놓은 이러한 가르침을 무수히 공부하고 말하고 설명하고 내가 또 혼자 보기도 하고 그리고 또 사유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그동안 들어 놓은 교리상으로 경전상으로 또 절에 들어와서 이렇게 저렇게 듣고 보고 한 그런 것을 통해서 의식 속에 쩔어 있는 소위 그 교리나 부처님 명호나 보살의 명호나 세계의 명호나 무슨 삼십 삼 천이 어떻고 무슨 도솔천, 도리천, 야마천, 그런 등등, 또 하늘은 좀 많습니까. 보살들 이름 또 좀 많습니까. 등등 그런 것들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 거여, 이게. 워낙 그런 이야기로 우리의 의식 속에 주입이 되고 쩔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뭐라고? 법성신 법성토는 명지시광영이다. 그림자라고 하는 사실, 마음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겠도다. 그런 말입니다. 사실 이 법신, 제일 불교 용어 중에 첫 손가락 꼽는 게 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하자면 主佛이거든요. 법신을 통해서 화신도 있고 보신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을 설명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이제 임제 스님은 바로 뭐라고? 目前聽法底人(목전청법저인), 無依眞人(무의진인). 바로 이순간 우리가 말하는 소리 듣는 그 사람. 그거 하나만 그냥 봐 주지 그 외에는 하나도 봐 주는 게 없습니다. 싹 털어버리는 거요. 아무리 컴퓨터 안에 복잡한 서류가 수천만 가지가 돼 있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포맷 싹 시켜버리면은 문서 싹 날라가버려. 깨끗해져버려. 그런 식이라. 아주 얽히고 설킨 그런 아주 복잡한 거기에 뭐 바이러스가 끼고 어쩌고 저쩌고 해도 싹 포맷 시켜버리면 깨끗해져 버리는데 임제록을 내가 보면 볼 수록 아!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의식 속에 잡다한 그런 불교적 상식, 그것이 장애를 일으켜 가지고 이리 충돌하고 저리 충돌하고. 여기는 이렇게 말했는데 저기는 저렇게 말하고, 서로 상반되기도 하고, 그래서 공이냐 무아냐, 또는 뭐 일심이냐, 일심인데 왜 무아냐. 무아면 무아지 왜 일심은 또 왜 일심을 자꾸 주장하느냐. 그래 가지고 지금도 끊임없이 무아다, 불교는 무아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아, 불교는 일심이 생명이야, 일심. 어째서 무아냐, 진아가 생명이지, 진아. 일심이 진아 아니냐. 상락아정, 그건 왜 그러냐 하고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교리상으로. 이건 지어 내 놓은 소리 가지고 하면은 모순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모순이 있으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거요. 그거 가지고 지어 내 놓은 소리 가지고 따지기로 하면은 그게 해결이 안납니다, 절대 해결이 안나요. 무아하고 일심하고, 그게 해결이 안나요. 그런데 무아다 일심이다 따지고 시시비비하는 바로 그 사람, 지금 이 순간 그 사람, 여기는 그거 하나만 오롯이 살려두는 그런 이론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참 우리의 정신을, 어지러운 세계에서 아주 깨끗하게 청정하게 해 버리는 그런 이론으로서는 참 임제록 같은 게 없어요.
첫댓글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此三種身(차신)은 卽今目前聽法底人(즉금목전청법저인)이라. ㅡ 이 순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법신,보신,화신佛이다. 다만 밖에서 구하고 찾지 말아라.但莫外求(단막외구) 禪慧珠보살님 녹취 불사공덕을 지으주신 덕분에 임제록을 제복습하며 다질수있기에 너무 감사드립니다._()()()_
_()()()_
'당신은 부처님'으로 知見을 새롭게 눈뜨게 해주시더니 '보살행'으로 우리의 行願을 새롭게 움직여 주십니다. 信受奉行하겠습니다.
目前聽法底人...눈앞에 듣고 있는 사람 ...지금 이 순간 그 사람. 참 우리의 정신을 어지러운 세계에서 청정하게 해 버리는 이론으로서는 임제록 같은 것이 없다...고맙습니다. _()()()_
此三種身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이라...고맙습니다. _()()()_
但莫外求(단막외구)어다. 다만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고맙습니다..._()()()_
_()()()_
삼배 올립니다
_()()()_
目前聽法底人 無依眞人...고맙습니다 _()()()_
祗爲不向外馳求하면 有此功用이니라...다만 밖을 향해서 치구하지만 아니할 것 같으면 자기 안에 법신, 보신, 화신이 다 있느니라... 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_()()()_
_()()()_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얼마나 부처님의 명호와 보살들의 명호와 세계의 명호가 많습니까. 뭐 온갖 경이 다 그렇죠. 그게 지어낸 것이 아니고 본래 있는 건 줄 알았어. 아니야, 전부 지어낸 거야. 전부 지어낸 거야. 우리 한마음의 도리가 너무 불가사의하고 심심미묘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냥 그야말로 뭐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온갖 것을 다 잣어내는 거요. 그 안에서. 다 뽑아 내는 거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_()_
此三種身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
法性身法性土 明知是光影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열심히 보고 듣습니다 . 보람을 얻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선혜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_()()()_
_()()()_
내 앞에서 내 말을 알아듣는 바로 그 사람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나무무위진인 나무무위진인 나무무위진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