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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역사 제3장 : 수코타이 왕국
Sukhothai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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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람캄행 치세의 수코타이 세력권
"수코타이 왕국"(อาณาจักรสุโขทัย, Sukhothai kingdom)은 태국의 중북부에 위치한 수코타이 시가지를 중심으로 1238년부터 1438년까지 존속한 왕조이다. 현재 옛 도성은 "므앙까오"(เมืองเก่า, Mueang Kao) 면(땀본)에 위치한 "뉴 수코타이"(New Sukhothai) 시내에서 북쪽으로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유적공원은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1. 역사
1.1. 라워로부터의 독립
13세기 이전에는 따이족(Tai) 왕국인 "은양왕국"(Ngoenyang, อาณาจักรหิรัญเงินยาง) 및 따이족의 분파인 따이르족(Tai Lue)이 세운 허깜왕국(Heokam: 오늘날 중국의 징홍[Jinghong]에 위치)을 비롯한 대부분의 따이계 왕국들은, 북부의 고지대에 위치했다. 따이족들이 상-짜오파야(Chao Phraya, 짜오파야) 계곡으로 이주해 들어온 것은 상당히 점진적인 과정을 거쳤다.
수코타이는, 원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나중에 라워왕국(Lavo, 라보)의 한 부분이자 교역중심지가 되었다.
(사진) "수코타이 역사공원"에 있는 "왓 시사완"(Wat Si Sawan)의 모습. ☞ 확대사진 바로가기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지역의 권력이 크메르제국으로부터 이탈되기 시작한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1180년경, 퍼쿤(พ่อขุน: 고위 작위명) 시나우 남톰(Po Khun Sri Naw Namthom) 치세시를 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나우 남톰은 수코타이 및 --- 현재는 수코타이 도의 한 군(암퍼)이 된 --- 시 사차날라이(Sri Satchanalai) 인근 성읍들을 통치했다.
크메르제국에서 벗어나 잠시 자치권을 누리던 수코타이는 1180년경에 콤사밧 콩람뽕(Khomsabad Khlonlampong)이 통치하던 몬족(Mon) 국가 라워왕국에 다시 병합되었다.
1239년 퍼쿤 방깡하오(Bangklanghao)와 퍼쿤 파믕(Phameung) 형제는 반란을 일으켜 몬족국자 라워로부터 독립을 했다. 방깡하오는 "시 이타라디따야"(Sri Inthraditaya)라는 이름으로 수코타이를 통치하면서, 파루앙 왕조(Phra Ruang dynasty)를 개창했다. 그는 이후 인근의 성읍들로도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치세말기인 1257년 무렵에 이르면 상-짜오파야 계곡 거의 전체가 수코타이의 영토가 되었다.
태국의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수코타이 왕국을 태국역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보다 이전의 기록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연구를 통해, 태국역사가 수코타이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에서는 여전히 수코타이 왕국 건국일을 기념하고 있다.
1.2. 랑캄헹 시대의 팽창
퍼꾼 반매웅(Banmeaung)과 그 아우인 람캄행 대왕(Ramkhamhaeng, รามคำแหงมหาราช) 치세에 이르면, 수코타이는 이웃 문명권에 이르기까지 그 영토를 확장한다. 이 시기에 따이족이 세운 국가로는 최초로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람캄행은 남쪽으로 수완나품(Supannabhum, 수와르나부미) 및 시 탐나콘(Sri Thamnakorn: =땀브라링가[Tambralinga])을 복속시키고, 상좌부불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전통적인 역사서들은 수코타이의 팽창에 대해 대단한 정열을 가지고 기술하여,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람캄행은 북쪽으로는 패(Phrae, 프래)와 므앙수아(Muang Sua: 현재의 라오스 수도 루앙 프라방)를 조공국으로 복속시켰다.
서쪽으로는 와레루(Wareru)가 통치하던 몬족 국가가 파간(Pagan)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는데, 와레루는 람캄행의 딸과 결혼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와레루는 처음 마르타반(Martaban)에 왕국을 건설했다가 후에 페구(Pegu)로 천도했다. 태국 역사가들은 이러한 점을 들어 마르타반 왕국도 수코타이의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수코타이의 지배력은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수코타이 역사공원"에 있는 "왓 따판힌"(Wat Taphan Hin: 돌다리 사찰)의 모습. ☞ 확대사진 바로가기
문화적인 측면에서, 람캄행은 시 탐나콘으로부터 고승들을 초청하여 수코타이에 상좌부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람캄행은 1283년 태국문자를 창제했다. 이 문자는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라마 4세인 몽꿋(Mongkut, มงกุฎ) 국왕이 발견해낸 논란의 여지가 많은 "람캄행 석주"(Ramkamhaeng Stele)에 새겨져 있다. 현재 알려진 스코타이에 대한 지식은 거의 모두 이 비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래 설명 참조)
람캄행 정부의 통치철학은 "선정"(善政, patrocracy)이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개념 속에서 왕은 "아버지"이고 백성들은 "자식"으로 비유된다. 람캄행은 "코끼리를 팔고자 하는 자는 코끼리를 팔고, 말(馬)을 팔고자 하는 자는 말을 팔라"는 모토 속에서 자유무역을 장려했다.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와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도 람캄행 시대였고, 수코타이는 이 시대에 통상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냈다. 이 시대에 수코타이가 수출한 유명한 품목이 "상깔록"(Sangkalok), 즉 송나라 도자기였다. 람캄행 시대는 시암(태국)이 중국식 도자기를 만든 유일한 시대였고, 이러한 경향은 14세기에 들어오면서 중지된다.
람캄행 석주
The Ramkhamhaeng stele
람캄행 석주는 현재 방콕의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석주는 몽꿋 국왕(라마 4세)가 "왓 마하탓"(Wat Mahathat)에서 발견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석주의 진위여부 혹은 최소 일부분은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점은 지적돼야만 한다.(주1)
(사진) 수코타이 역사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람캄행 석주의 모조품. ☞ 확대사진 바로가기
"태국 카디 연구소"(Thai Khadi Research Institute)의 연구원 삐리야 까이릭(Piriya Krairiksh)은, 이 석주에 새겨진 모음들을 관찰해보면, 이 석주의 조성자들이 유럽식 알파벳에 익숙한 이들이었다는 점을 암시해준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이 석주가 라마 4세 통치기 혹은 그보다 약간 앞서서 누군가가 날조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 문제는 엄청나게 민감한 것인데, 왜냐하면 만일 이 비문이 날조된 것이라면 수코타이 시대 전체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주2)
학계의 의견은 아직도 이 석주의 진위여부에 대해 양분되어 있다.(주3)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저술들 속에서도 이 문제는 하나의 예외로 남아있다. 실제로 어떠한 저술들도 람캄행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일부 저자들은 이 석주가 완벽한 19세기의 위조물이라고 기술했고, 또다른 이들은 최초 17행의 내용은 진짜라고 적기도 했다. 또 일부 학자들은 이 석주가 러타이 왕이 날조한 것이라고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이 석주의 진위여부에 대해 의견을 보류해두기도 했다.(주4)
람캄행 석주 및 수코타이 시대의 유토피아(이상향)는 태국 민족주의에서 중심적인 주제로 남아있다. 영국 학자 마이클 라이트(Michael Wright)는 이 석주가 1800년대에 날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제안을 했다가, 태국의 <왕실모독처벌법>(lese majeste laws, 불경죄)에 따른 기소 및 추방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주5)
주 석
(주1) "Centuries-old stone set in controversy", The Nation, 2003-9-8.
(주2) The Ramkhamhaeng Controversy: Selected Papers. Edited by James F. Chamberlain. The Siam Society, 1991.
(주3) Intellectual Might and National Myth: A Forensic Investigation of the Ram Khamhaeng Controversy in Thai Society, by Mukhom Wongthes. Matichon publishing, ltd. 2003.
(주4) 앞의 책.
(주5) Seditious Histories: Contesting Thai and Southeast Asian Pasts, by Craig J. Reynold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6, p.vii. |
1.3. 쇠퇴와 아유타야의 지배
하지만 수코타이가 주도하던 시대는 매우 짧았다. 람캄행 대왕 사후 수코타이의 조공국들은 떨어져나갔다. 람캄행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그의 아들 러타이(Loethai, เลอไท)였다.
먼저 북쪽로는 우따라딧(Uttaradit)이 자유를 획득했고, 얼마 안있어 현재 라오스에 위치한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과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이 떨어져나갔다. 서쪽으로는 1319년 몬족 왕국이 떨어져나갔고, 1321년에는 아유타야 왕국이 가장 오랬동안 수코타이 지배하에 있던 읍성인 딱(Tak)을 점령했다. 남쪽으로는 강성했던 도시 수판부리(Suphanburi, สุพรรณบุรี)가 러타이 왕 치세 초기에 떨어져나갔다.
그리하여 수코타이는 상당히 급속도로 과거의 본거지를 중심으로만 위축되었다. 이 사이에 아유타야 왕국이 강국으로 부상했고, 결국 탐마라차 2세(Thammaracha II)는 1378년 이 새로운 강국에 복속하고야 말았다. 1378년 아유타야의 군대는 수코타이를 침공했고, 수코타이는 아유타야의 조공국이 되었다. 도시의 쇠퇴에 고통을 겪던 러타이는 결국 피사눌록(Pitsanulok, พิษณุโลก, 피차눌록)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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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수코타이 역사공원"에 있는 "왓 시춤"(Wat Si Chum)의 불상.
원래는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다. |
1424년 사일르타이(Sailuethai) 왕이 죽자, 파야 람(Paya Ram) 왕자와 파야 반믕(Paya Banmeung) 형제가 왕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아유타야의 나가린드라티랏(Nagarindrathirat) 왕이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 국가는 더욱더 양분되었다.
파야 람과 파야 반믕의 누이는 아유타야의 보롬마라차 2세(Borommaracha II)와 결혼하여, 라메수완(Ramesuan) 왕자를 낳았다. 1446년 보롬마라차 2세가 다른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아유타야의 왕위는 라메수완(=따일록낫, Trailokanat, ไตรโลกนาถ)에게 전해졌다. 1448년 라메수완이 즉위를 하면서 아유타야 왕국과 수코타이 왕국의 통합시대가 시작되었다.
"사일라짜륵 수코타이"(Silajaruek Sukhotai)는 바로 그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수백개의 비문들로 구성된 기록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들로는 "사일라짜륵 포쿤 람캄행"(Silajaruek Pho Khun Ramkamhaeng: 람캄행 왕 비문), "사일라짜륵 왓 시춤"(Silajaruek Wat Srichum: 지역 및 스리랑카 역사), "사일라짜륵 왓 빠마무앙"(Silajaruek Wat Pamamuang: 러타이 왕 치세의 정치-종교 기록) 등을 들 수 있다.
2. 수코타이의 역대 국왕들
King Pho Khun Sri Indraditya (1249- 1257)
King Pho Khun Ban Muang (1257 - 1277)
King Pho Khun Ramkhamhaeng (Ramkhamhaeng the Great) (ruled 1277 - 1298 or 1317) (called Rammaraj in the Ayutthaya chronicles)
King Pu Phraya Si Songklam: After Ramkhamheang's death, ruled temporarily in absence of Loethai who was on trip to China. He was not styled Pho Khun. (Not counted as a King)
King Pho Khun Loethai (1298 - 1347)
King Pho Khun Nguanamthom (1347)
King Phya Lithai or Thammaracha I (1347 - 1368/1374)
King Thammaracha II or Phya Leuthai (1368/1374 - 1399)
King Thammaracha III or Phya Saileuthai (1399 - 1419)
King Thammaracha IV (1419 - 1438) |
3. 태국 사료편찬학에 있어서 수코타이의 의미
수코타이에 관한 이야기들은 몽꿋 국왕(Mongkut, 라마 4세)에 의해 태국의 "국사"(國史)에 편입되었다. 이 역사적인 문헌은 영국의 외교사절단에게 증정한 것이다. 몽꿋 왕은 수코타이 역사를 서술하는 데 최고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수코타이 역사를 서술한 "제1 증거"인 자신이 발견해낸 "제일비문"(Number One Stone Inscription)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근대국가 건설 과정의 일환으로, 근대의 시암(태국) 역사서들은 수코타이의 역사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수코타이를 "민족의 첫번째 수도"(first national capital)로 보고, 그 뒤로 아유타야 왕국, 톤부리 왕국, 그리고 라따나꼬신 시대 --- 혹은 오늘날의 방콕 시대 --- 가 이어진다. 수코타이 역사는 시암(태국)의 "근대주의자"(modernists), 그리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모두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라마 4세(몽꿋) 국왕은 수코타이에서 "제일비문"을 발견해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은 수코타이 왕국의 기원과 람캄행 대왕 등 영웅들의 일대기, 그리고 전성기의 행정제도 및 여타 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 "수코타이 역사공원"의 불상들. ☞ 확대사진 바로가기
수코타이의 역사는 심지어 1932년 입헌혁명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요한 사항으로 남아있다. 수코타이에 대한 연구와 저술들도 풍부한 편이다. 비문의 세부내용도 연구되어 "이론화"되어 있다.
수코타이 왕국에 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주제는 수코타이의 "민주적" 통치에 관한 것이다. 이 내용은 왕과 백성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부자관계"로 표현하여, 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힌두교와 대승불교에 영향을 받은 외래전통, 즉 크메르 전통이 유입되면서 통치문화에 변화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수코타이에 관한 이야기는 "자유"의 모델로도 기능한다. 태국의 혁명적 역사학자 찟 푸미삭(Jit Bhumisak, จิตร ภูมิศักดิ์: 1930-1966) 역시 수코타이 시대를 앙코르(크메르)라는 외세로부터 태국민족 인민들이 최초로 해방운동을 펼쳤던 시발점으로 보았다.
1950년대 군사정권 시대에는 수코타이 역사가 태국 국가 교육과정에 편입됐다. 여기서는 수코타이의 "부자관계" 통치이념이 "외세의 이념"에서 자유로운 "태국적 민주주의"(Thai Democracy)의 모델로 설명되었다. 여기서 "외세의 이념"이란 찟 푸미삭의 "앙코르 전통"에 대비하여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밖의 수코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탐구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평민 및 노예들의 신분적 상황, 경제 상황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주제들은 특히 1960~1970년대 냉전시대 및 시민혁명기에 이념투쟁의 산물로 산출되었다고 평가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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