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남부 지방에서의 소요 : 원인과 해결책
조 흥 국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태국의 무슬림들은 태국의 여러 지방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말레이계 무슬림, 인도계 무슬림, 파키스탄계 무슬림인, 이란계 무슬림, 인도네시아계 무슬림, 참(Cham)족, 윈난(雲南) 출신 중국계 무슬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방콕을 중심으로 한 중부 태국과 치앙마이 등을 중심으로 한 북부 태국과 남부 태국 등의 여러 지역에 분포해 있다. 이들 태국 무슬림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그룹은 빠따니(Pattani), 사뚠(Satun), 얄라(Yala), 나라티왓(Narathiwat) 등 태국의 최남단 지방들에 살고 있는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로 이 지역 주민의 약 3/4을 차지한다.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민족적으로 말레이 세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역이 불교 국가인 태국에 속해 있는 것은 지난 수백년간 타이인들의 팽창주의적인 정복, 그리고 1909년 타이 정부와 영국 간 체결된 말레이반도 국경 조약의 결과이다. 이 조약으로 위의 네 지방들은 비록 인구의 대부분이 말레이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태국 영토가 되었고, 껄란딴(Kelantan), 꺼다(Kedah), 뜨렝가누(Trengganu), 뻐를리스(Perlis)는 당시 영국령 말라야 그리고 뒤에 말레이시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이 지역의 종족적 및 종교적 상황이 무시되고, 영국과 태국간의 국제정치적인 이해관계만 고려되어 임의로 국경이 그어졌던 것이다.
태국 남부의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 사회와 태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적잖은 상호 알력의 관계에 있어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은 태국 남부를 자신들의 땅으로 간주하여 이 지역을 “다르 알 이슬람”(dar al-Islam) 즉 “이슬람의 집”으로 부르지만, 자신들의 땅을 강압적으로 태국 영토로 삼고 자신들을 그동안 정치적, 문화적으로 압박하고 지배해 온 태국의 여타 지역을 “다르 알 하르브”(dar al-harb) 즉 “전쟁의 집”으로 부른다.
20세기 중엽에 위의 갈등은 태국의 민족주의자인 피분 송크람(Phibun Songkhram)의 정부(1938-1944)가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타이화하는 등 이들을 태국에 강압적으로 동화하려는 쇼비니즘적인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심각해졌다.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의 반(反)태국적 자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다음 태국 남부 지역에서 이슬람 분리주의운동이 일어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빠따니의 무슬림들은 1947년 방콕 정부에 대해 남부의 4개 지방들에게 무슬림들에 의해 세워진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는 자치권을 부여할 것으로 요구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슬람 분리주의운동은 곧 확고한 조직체들을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들로 빠따니 공화국 민족해방전선(BNPP), 민족혁명전선(BRN), 빠따니 연합해방기구(PULO) 등이 있다. 특히 1968년 인도에서 까비르 압둘 라만(Kabir Abdul Rahman)이 창설한 PULO는 학생 운동을 통해 정치화된 젊은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태국 남부 지역에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테러는 주로 학교나 절 등과 같이 타이인의 헤게모니를 상징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왔다. 그들의 연결망은 껄란딴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아쩨(Aceh)와 중동 지역에까지 미친다. 특히 끌란딴을 비롯한 북부 말레이시아는 많은 말레이계 무슬림 게릴라들에게 안전한 도피처로 간주되어 왔다.
1980년대 초 빠따니를 중심으로 한 남부에서 수천 명의 무장 반란군이 방콕 정부에 대항해서 싸웠다. PULO 게릴라들 중 많은 자들은 1984년 태국 정부의 일반사면 조치를 받아들여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남부에서 암살 및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조직의 이름이 경찰과 언론에 거론되었다. 오늘날에도 과거 분리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던 PULO와 민족혁명전선에서 파생한 많은 단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태국 남부의 무슬림 지역에서의 소요는 계속되고 있다. 1993년 8월에 빠따니와 얄라와 나라티왓에서 학교에 대한 방화사건, 불교사원에 대한 수류탄 투척, 태국의 한 공병대에 대한 습격, 열차폭파 미수 등이 일어났다. 당시 방콕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 남부 지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로 구성된 분리주의자들이 있다고 보았다.
1995년 1월 3일에 핫야이(Hat Yai)에서 폭탄이 터졌다. 태국 남단 지역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 사건과 급진적 시아파 무슬림(Shiite)간의 연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비록 태국의 무슬림들은 대부분 수니파(Sunni)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아파 무슬림들은 태국의 이슬람 분리주의운동에서 그동안 공격적인 행동을 취해 왔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소라윳(Sorayuth Sakunasantisart)은 이슬람 빠따니 독립국의 설립을 부르짖어 오다가, 1994년 10월 9일에 왕권모독죄와 국가반란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고 31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위의 폭발 현장에서 발견된 전단은 방콕 정부에게 수감 중인 모든 무슬림들의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위에서 말한 1993년 8월의 테러 사건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95년 6월 말에는 새로운 분리주의운동 단체로서 빠따니 민족군대(TNP)가 두각을 드러냈다.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신변 보호의 대가를 요구하는 이 TNP는 1994년 말에 남부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한 새로운 분리주의운동 단체인 딴뜨라 지하드 이슬람(TJI)과 연계를 맺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슬람 분리주의운동의 중심 세력인 PULO와는 정치적인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 중 PULO에 가입하는 자가 점차 늘었다. 그 이유는 PULO 회원증만 있으면 돈벌이가 좋은 말레이시아에서 비교적 쉽게 일거리를 구하며 때로는 경찰의 비호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PULO와 말레이시아 당국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지역들에서는 PULO 회원증이 심지어 여권처럼 사용되었다. 신민족전선(BNB)의 회원증 역시 많은 말레이 무슬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BNB 측은 태국에 이미 10만 명의 젊은 회원들을 확보해 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국 경찰은 이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보았다.
남부 지방의 이슬람 분리주의운동에서 방콕 정부가 안고 있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많은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이 태국 국적과 말레이시아 국적을 동시에 갖고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동안 말레이시아는 PULO, BRN 등 여러 분리주의운동 단체의 핵심인물들의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
1995년 초에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 분리주의 운동가들에게 태국에 대한 테러 행위를 중지할 것을 처음으로 경고하면서, 만약 계속할 경우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선례가 없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이같은 행동은 말레이시아가 같은 아세안 회원국인 태국과의 긴밀한 우호적인 경제 및 정치적 협력 관계의 발전을 보다 중시한 것과 상관 있을 것이다. 여러 분리주의운동 단체들은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의 이러한 압력 때문에 “버르자뚜”(Berzatoo)라고 불리는 조직의 산하에 합병하기로 상호 동의했는데, 이에 따라 태국 남단에서 통합 세력에 의한 대규모 테러의 위험에 대한 우려도 한 때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말레이시아 정부의 그같은 자세는 오늘날 분리주의자들의 세력과 활동이 현저히 약화되고 줄어든 것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1995년에는 PULO의 기존 조직으로부터 한 파가 떨어져 나와 신(新)PULO를 형성한 바가 있었는데, 태국 정부와 말레이시아 정부간 개선된 협력관계로 PULO와 신PULO의 고위 지도자들 여러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의 테러 활동은 잠잠해져, 그들의 반정부 및 분리주의운동이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태국 정부의 안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1세기 들어서서 남부 태국에서 또 다시 테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2002년 7월 초 태국 남부의 얄라 주에서 열차에 폭발물이 터져 두 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당했다. 얼마 뒤 나라티왓 주의 숭가이 빠디(Sunggai Padi) 군에서는 2명의 경찰이 테러로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2년 한 해 동안 약 20명의 경찰관과 2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아무런 혐의자도 체포하지 못했다. 테러는 대부분 달리는 오토바이를 통해 행해졌다. 2003년에 들어서서도 군인과 경찰에 대한 테러는 계속 되었다(밑의 주요 사건 연대기 참고). 이에 태국 정부는 남부 지방에 더욱 많은 군경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이 조치가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지방 현지인들은 제복을 입은 타이인 군인과 경찰 병력이 길거리에 더욱 많이 보여도 별로 놀라거나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들 눈에는 군인과 경찰들이란 남부 지방의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자들로 비칠 뿐이다.
남부 지방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현지인들이 태국 정부뿐만 아니라, 태국 정부가 남부 지방에 파견ㆍ배치하는 공무원들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경 병력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 부총리 차왈릿 용차이윳(Chavalit Yongchaiyuth)은 현지인들이 군부대에 필요한 정보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지인들의 대부분은 태국 공무원들이 현지인들의 불만 사항을 무시하고 있으며, 게다가 마약 범죄자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 부패해 있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본다. 그들은 남부 지방에 파견된 공무원들이 공무 수행에 있어서 진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또한 그들은 중앙에서 내려온 고위 공무원들이 현지인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현지인들의 의견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경찰에 대한 불신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남부 지방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당국은 그것이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예컨대 2002년 경찰들이 살해된 것은 경찰들 내부에서의 분쟁 때문이라고 본다.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경찰 공무원들은 소요를 일으켜 정부로부터 더욱 많은 예산과 경비를 타내려고 한다. 또 나라티왓의 공무원들 가운데 건설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건을 일으켜 사업 경쟁자들을 겁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남부 소요의 원인에 대해 태국의 공무원들은 마약 거래인들간의 싸움, 혹은 전문적인 범죄집단의 소행, 혹은 군부대 무기고 습격의 경우 무기 밀매상들의 th행, 혹은 남부 치안을 담당해 왔던 두 기구가 2002년 5월 초에 해체된 것, 그리고 분리주의자들이 특히 이슬람 기구로부터의 자금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를 들기도 한다.
탁신 총리는 군부대의 무기고 두 군데가 털린 사건이 일어난 직후, 그것이 말레이시아에서 추방된 뒤 태국에 들어온 약 30명 정도의 전문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이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중동으로부터 자금을 끌어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들이 진정한 분리주의자들은 아니고 다만 폭력적인 갱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편 태국 국내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의 부사령관인 판롭 핀마니(Panlop Pinmanee) 장군은 무기고의 무기 탈취 사건에 대해 이것이 무기를 태국의 이웃국가에 팔려는 범죄자들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말레이계 타이 무슬림들의 분리주의 이론도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예컨대 송클라(Songkhla) 출신의 민주당 국회의원인 타원 샌니움(Tavorn Saennium)은 신PULO와 BRN의 활동에 대한 보고를 인용하면서 태국의 최남단 3 주에서 분리주의운동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심지어 “말라유 이슬람 빠따니국”(Malayu Islam Pattani state)의 헌법 초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태국 정부가 자신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렇다면, 남부 지방 소요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남부 지방의 치안 담당 기관들은 소요 발발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긴다. 방콕의 민주당 정치인들은 정부의 무능력을 비난한다. 예컨대 타원은 남부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단일 기구가 부재하기 때문에 소요가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그는 2002년 5월에 정부가 해체한 제43 민간인 군경부대(CPMC 43: Civilian Police-Military Command 43)와 남부 국경지방 행정센터(SBPA: Southern Border Provinces Administration Centre)를 부활시킬 것을 제안한다. 최근 탁신 총리는 부총리 위사누 끄릉암(Wisanu Kruengam)에게 다음의 세 가지 이슈에 대해 조사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 많은 정보 기구들이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문제를 고려하여, 정보 기구들을 재편성하는 것. - 9ㆍ11 뉴욕 테러 사건 후 미국 정부가 설립한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 Department)의 모델을 따라 태국에도 국내 안보 담당의 안보국을 세우는 것. - 관련 기관들간 협력 체제의 발전
위에서 언급한 정부의 여러 해결방안과 다양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남부 지방의 주민들은 정부가 문제 해결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정부가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거나 더욱 많은 치안 병력을 남부에 파견하는 것이 소요를 잠재우고 평화를 갖다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왕년에 PULO의 사무총장이었던 유수프 롱삐(Yusouf Longpi)는 남부 주민들의 대부분이 태국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이 지역에 깊이 뿌리 박힌 불법적인 마약과 가난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국의 영문 일간지 Bangkok Post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현지인들이 태국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경제 문제의 해결과 지역 주민과 공무원들간의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 유수프는 또한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이 무슬림인 것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의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위의 설문조사에서 분리주의 테러리스트에 대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라티왓의 현지 주민인 데라메 다라메(Deramee Daramee)는 “정부는 분리주의자들이나 (반정부) 지하조직 운동 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현지인들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는 경제적 재분배가 보다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이 그 세력이 비록 많이 약화되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남부 지방의 현지인들이 분리주의자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내부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태국 남부 지방에 있어서의 테러와 소요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對)테러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동안 전 세계에서 무슬림 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무력적 진압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분쟁을 장기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좋은 해법이 되지 못한다. 이 점에서 남부 지방 현지인들과 일부 태국 정부 인사들이 제안하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 즉 태국의 군경과 공무원들과 남부 지방 현지인들 사이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남부 지방의 경제발전과 부의 공정한 재분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남부 태국 소요 10년간 주요 사건 연대기>
- 1993년 8월 1일: 남부 태국의 4개 주의 총 34개 학교들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 1996-1997년: 차왈릿 용차이윳의 1년 총리 재임 기간 남부에서 많은 살인, 유괴, 폭행 사건들이 일어났다. - 1998년: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 총리 시절, 10명의 공무원과 7명의 남부 민간인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 2001년 4월 7일: 탁신(Thaksin) 총리의 재임 초, 핫야이 철도역에서 폭탄이 터졌다. - 2001년 12월 25일: 나라티왓과 얄라와 빠따니에서 다섯 군데 경찰 초소에 대한 테러범들의 연쇄 공격으로 5명의 경찰관과 1명의 자원 방위병이 죽었다. - 2002년 3월 12-15일: 남부의 3개 주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여러 군데의 경찰 초소들을 공격하여 또 5명의 경찰관과 1명의 자원 방위병이 목숨을 잃었다. - 2002년 5월 1일: 태국 정부는 그동안 남부 지방의 소요를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설치해 두었던 ‘제43 민간인 군경부대’와 ‘남부 국경지방 행정센터’를 해체했다. - 2002년 10월: 송클라(Songkhla) 주의 차나(Chana)군과 테파(Thepha)군과 사바 요이(SabaYoi)군에서 3개의 학교에 불이 났다. 빠따니 주에서는 화인(華人) 사당인 림꼬니아우(Lim Kor Niaw)에서 폭탄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창하이(Chang Hai) 사원에서는 폭탄이 실제로 터진 사건이 일어났다. - 2003년 4월 19일: 나라티왓에서 화난 군중이 2명의 경찰관을 살해했다. - 2003년 4월 20일: 나라티왓과 얄라에서 군부대의 무기고 두 군데가 약탈 당했고, 그 과정에서 5명의 해군 장교가 목숨을 잃었고 몇 명이 부상을 당했다. - 2003년 5월 20일: 나라티왓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4명의 괴한이 1명의 경찰관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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