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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광전사(重光前史)
(1) 대단군(大檀君)과 중광전후사(重光前後史)
한국근대(韓國近代) 민중종교사상(民衆宗敎思想)의 대종교 편을 집필하는 데 있어서 교사연혁(敎史沿革)인 중광전사(重光前史)와 중광후사(重光後史)가 대종교 교리사상보다 좀 길게 다루어진 느낌이 든다. 종교사상이라고 하면 교리사상과 실천사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교리사상은 경전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이므로 이 진리는 흔히 이상주의로서 과장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교사(敎史) 속에 보이는 활동업적은 교리의 성과라 하겠으므로 그 교단의 실천사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 가치 면에서 교리사상보다 이 실천사상이 더 소중할 수 있다.
대종교의 중광전사(重光前史)와 후사(後史)는 바로 대종교의 실천사상으로서 다루려한 것이다. 지면상 자세히 논구할 수 없어 간단한 제목 제시로 끝내는 데 불과하였으나 이 전후사(前後事)를 통하여 대강이나마 대종교의 실천사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조선에서 역대 임금의 존칭이 단군왕검(檀君王儉)․단군부루(檀君夫婁)․단군가륵(檀君嘉勒)․단군오사구(檀君烏斯丘)․단군구을(檀君丘乙) 등과 같이 반드시 단군을 위에 붙였다. 단군은 삼신 한얼님의 지상 대언자(代言者)요 대행자(代行者)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신권적 성직의 표상이다. 우리가 단군하면 첫 시조 임금이신 단군왕검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에서는 모든 제왕에게 단군을 붙였으므로 첫시조 임금이신 단군왕검과 후대 단군임금들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시조단군을 대단군(大檀君)이라고 그의 조선상고사(조선상고사)에서 썼으므로 필자도 이 용법을 취하여 대단군(大檀君)이라고 써서 다른 단군들과 구별하기로 하였다.
대단군은 왕검이시니 신성제왕의 뜻이요, 또 한배검이시니 시조제왕과 시조국신(始祖國神)의 뜻이다. 또 단황상제(檀皇上帝)이시니 삼신 한얼님의 후천 지상대권(後天地上代權)이시다. 대종교는 바로 이 대단군을 개교의 교조로 받들고 있다. 그래서 대종교는 한 옛날 대단군께서 세우신 대단군의 종교를 오늘에 계승하여 세상에 거듭 밝힌 것이므로 대종교의 출현은 창립이 아니라 중광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 중광(重光)의 교조는 나철 홍암대종사(羅喆弘巖大宗師)다. 대종사가 친히 써놓은 이력서가 있는데 거기에 대종교의 개교일인 음력 정월 15일을 중광일(重光日)이라고 기록했고,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지키게 하였다. 이상과 같은 홍암대종사의 구분법에 따라 대종교 이전의 단군종교를 대종교의 중광전사(重光前史)로 하고, 대종교 중광 이후의 단군종교를 중광후사(重光後史)로 하여 여기에 그 개요를 약술하겠다.
(2) 대단군(大檀君)의 개교(開敎)
대단군(大檀君)께서 종교를 여셨다고 하면 어떤 이는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고려 충열왕(忠烈王) 때 일연 대선사(一然大禪師)가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권제일 고조선조」(紀異卷第一古朝鮮條)를 보면 거룩한 종교가 하늘나라로부터 백두천산(白頭天山)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한얼님[桓因]의 아들 한웅[桓雄]님이 있어 항상 천하에 뜻을 두시고 인간세상을 그리워하시거늘 한얼님께서 아들의 그 뜻을 아시고 삼신태백(三神太白)인 백두천산(白頭天山)을 내려다보시며,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하겠다 하시고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시면서 내려가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에 한웅[桓雄]님께서는 삼천천신(三千天神)의 호위를 받으시며 백두산상 신단신수(白頭山上神壇神樹) 아래에 강림(降臨)하시니 신시(神市)라 일렀고 또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불렀다. 한웅님께서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명령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으시고 세상에 계시면서 이화(理化)하셨다. 이때에 검녀(儉女=熊女: 神聖族인 검겨레의 女王)와 불녀[市女=虎女: 光明族의 불겨레의 女王]가 한 굴에 있으면서 한웅[桓雄]님께 저희들도 참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사 하고 빌었다.
한웅님께서는 신령(神靈)한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받아먹고 굴속에서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수도(修道)하면 곧 참사람이 되리라고 하셨다. 검녀(儉女)와 불녀[市女]는 이것을 받아먹었다. 이 분부를 잘 지킨 검녀는 21일 만에 참사람이 되었으나 분부하신대로 지키지 못한 불녀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참사람이 된 검녀는 자기와 결혼(結婚)할만한 참사람을 구해보았으나 그러한 남자가 없었으므로 다시 신단(神壇) 앞에 나가서 한웅님께 아기를 배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이에 한웅님께서는 신화(神化)로서 아기를 잉태케 하시어 아들을 낳으시니 이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시다. 단군께서는 당(唐)의 요(堯)가 임금이 된지 50년인 강인(康寅)에 평양에 도읍하시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칭하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기시니 이곳을 궁흘산(弓屹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한다.
단군조선이 1천5백 년을 갔을 때, 주(周)는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단군께서는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셨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에 돌아가시어 신(神)이 되시니 수(壽)가 1천9백8 세(歲)시었다.’
이상과 같은 고기(古記)의 원문을 보면 천상(天上) 하늘나라[桓國]에서 한얼님이 세상을 홍익인세(弘益人世)하시기 위하여 천부삼인(天符三印)을 가지시고, 천신삼천(天神三千)의 옹호(擁護)를 받으시며 풍백(風伯)․우사(雨師)․뇌공(雷公)․운사(雲師) 등 선관(仙官)․영장(靈將)을 앞세우고, 백두천산(白頭天山) 신단(神壇)에 강림하시어 잠시 인세에 머무시면서 곡식․명령․질병․형벌 그리고 선악의 360여 가지 일을 주재하시어 이 세상을 이화세계(理化世界)하셨다고 하였으니 이 고기(古記)의 내용은 그대로 교정일체(敎政一體)의 대정사(大政事)요 대교화(大敎化)였다. 특히 오사(五事) 중의 주선악(主善惡)은 현대적 종교의 교화(敎化)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이 고기(古記)에 나오는 검녀와 불녀에게 쑥과 마늘로 된 선약을 먹이고 백 일간 굴속에서 기도드리게 한 것은 신선도(神仙道)의 시작이며, 검녀의 21일 성도(成道)는 인류 최초의 선도적 진인화(仙道的眞人化)요 신도적 영인화(神道的靈人化)이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적 교화성사(敎化聖事)의 시원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한얼님께서 개천 강세(開天降世)하시고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종교를 내려주신 천지대공사(天地大公事)인 동시에 검녀의 진인성취(眞人成就)는 인간 최초의 해탈성사(解脫聖事)였다.
천제 한임[桓因]의 아들 한웅님께서 검녀에게 아드님을 잉태케 하여 대단군을 낳으셨다는 것은 한임 한웅 대단군(한검)은 일체임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 민족의 삼신일체의 한얼님, 삼신사상과 신앙을 잘못 인식하고 저술했거나, 아니면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외세의 압력 때문에 일부러 당시 우리 민족의 상식을 넘어선 삼대설로 나타내어, 후대에서 민족의 역사를 바로 찾아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깨닫는 자만이 알도록 기술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대단군(한검)의 역사는 우리 고유의 삼신사상대로 풀어 해석하면 한임의 자리가 곧 대단군의 자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연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한얼님의 자손이요 하늘백성[天民]인 것이다. 이와 같이 대단군은 나라를 세우시고, 교화를 베푸신 것이 종교를 개교하신 입장이기에 대단군이 대교조가 되시었다.
(3) 대단군교(大檀君敎)의 역대전승(歷代傳承)
중국 고대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을 비롯하여 한서(漢書) 당서(唐書)의 「동이전」에는 우리나라 고대종교에 곤한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대단군의 개교 건국일인 10월 3일 개천성절(開天聖節)을 위의 중국사서들은 ‘시월제천대회(十月祭天大會)라고 기록하였으니 부여가 10월 제천대회를 영고(迎鼓)라 한 것이 그것이요, 예(濊)가 무천(舞天)이라 한 것이 그것이요, 고구려가 동맹(東盟) 또는 한맹(寒盟)이라 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10월 제천대회가 배달민족 공동의 종교적 대축제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고구려의 예를 든다면, 이날에는 임금님이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온 백성이 동참한 가운데 나라 동쪽에 있는 수혈(隧穴)에서 수신(隧神)을 밖으로 모시어 내놓고 제천대회를 개최했었다. 여기의 수신(隧神)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웅신(熊神)을 수신(樹神)이라고 한 것과 음이 같기 때문에 수(隧)나 수(樹)는 한웅을 가리키는 웅(熊)에 대한 우리말 ‘수’의 이두표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수혈(隧穴)이라는 굴에 한웅님 신위를 모셨다는 것은 혈거시대(穴居時代)부터 내려온 지하신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의 대단군 종교는 참으로 아득한 원시사회부터의 신앙이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고대의 단군종교가 동방제국의 국교였다는 것과, 10월 축제가 오늘의 초파일이나 크리스마스와는 비길 수 없는 거국적인 초대축제(超大祝祭)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놀라운 일은 마한의 대단군 종교에 관한 삼국지 「위지동이전 마한전」(魏志東夷傳馬韓傳)의 기록이다.
‘마한은 신을 믿으므로 서울인 국읍(國邑)마다 각기 천군(天君) 한 사람을 세워 삼신한얼님께 천제를 드린다.
또 나라마다 별읍(別邑)이 있으니 이름을 수두[蘇塗]라 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고 한얼님을 섬긴다. 이 별읍으로 죄지은 사람이 도망하여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므로 나쁜 짓도 잘 한다. 그 수두[蘇塗]는 부도(浮屠)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이 기록은 마한이 54국의 연방 국가이므로 나라마다 그 서울인 국읍(國邑)에서 10월 제천대회가 개최되는데, 이 제천에는 천군(단군) 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마한에서 별읍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행정수도가 아닌 종교수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과 같은 것이다. 이 별읍을 수두[蘇塗]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수혈(隧穴)과 같은 것으로서 마한의 수두[蘇塗]는 지하신전이 아니고 지상신전으로서 ‘수터’, 즉 수한얼님인 한웅제단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수두[蘇塗] 별읍에 죄인이 들어가 숨으면 국읍의 경찰관이 감히 들어가서 체포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제도가 유럽에서는 중세기에 와서야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정일체는 이미 마한시대에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 고대의 대단군 종교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각국으로 전승되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新羅本紀 眞興王37年條)에 수록된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序)에,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교를 세운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실로 유․불․선(儒佛仙) 3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接化)한다.’ 고 한 고운(孤雲) 선생의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은 우리를 크게 놀라게 해주고 있다.
신라의 현묘(玄妙)한 종교인 풍류교의 풍류는 이두표기이므로 육당 최남선은 광명인 ‘밝’이나 ‘불’[火]의 ‘부루’로서의 ‘부루교’라고 풀었고, 한뫼 안호상 박사는 ‘배달교’라고 풀었다. ‘풍’은 우리말의 ‘바람’도는 ‘배람’이므로 ‘배’가 되고, ‘류’는 다다를 ‘류’자이므로 ‘다’나 ‘달’이 되기 때문에 풍류교는 ‘배달교’ 또는 ‘밝달교’의 이두라고 말하였다. ‘부루’의 본음은 ‘불’[火]이고, ‘배달’의 본음은 ‘밝’[明]이므로 두 가지가 다 우리말에 ‘단’(檀)을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에 신라의 풍류교는 바로 단군교를 이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0월 개천성절을 나라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영고(迎鼓)니 무천(舞天)이니 동맹(東盟)이니 천군(天君)이니 했듯이 대단군 종교도 나라마다 전승되면서 그 명칭을 달리 하였다.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에,
‘단군께서 동방에 처음 나오시어 백성들을 신성한 교화로써 가르치어 근면하고 잘 살게 되므로 나라마다 강한 민족이 되었으니, 그 교명이 부여는 대천교(代天敎) 신라는 숭천교(崇天敎)요 고구려는 경천교(敬天敎)요 고려는 왕검교(王儉敎)로서 매년 시월에 배천(拜天)한다.’ 고 한 이것이 우리 고대국가들이 지녔던 단군교명이 각기 달랐던 것을 말해주는 실례이며, 신라의 단군교를 일명 풍류도라고 한 것도 그 한 예이다. 또 영조 때 실학자 성호 이익(李翼) 선생이 동사유고(東事類考)에,
‘우리 동방 ‘종교(倧敎)를 그것을 가리켜 선교(仙敎)라고 하지만 실은 단군께서 세우신 종교이다.’
라고 한 것은 조선왕조에서의 단군교명이 ‘종교’(倧敎)였음을 고증하는 자료라 하겠다. 종(倧)자는 공교롭게도 인조대왕의 위(謂)가 되어서 인종대왕 이후에는 두 인(人) 변을 붙여서 종교(倧敎)라고 썼다고 한다.
조선 말엽에 이르러 백봉대신사(白峰大神師)라는 신인(神人)이 백두천산(白頭天山)에 출현하고, 이 신인을 중심으로 두암선인(頭巖仙人), 미도선인(彌島仙人) 등 13신선이 모여 단군기원 4237년 갑진 광무 8년 10월 3일에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작성․서명하고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여 홍암 나철(弘巖羅喆) 선생에게 전수하였다. 이것이 뒤에 대종교가 되는 것으로서 대단군의 대종교는 실로 6천 3백여 년의 기나긴 세월을 숨바꼭질하여 오늘의 우리들 세대에까지 전승되었으니 사연도 많으련만 그 역사를 잃는 우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다.
2. 중광후사(重光後史)
(1) 나철 홍암(羅喆弘巖)의 중광(重光)
홍암대종사(弘巖大宗師)의 구국운동(救國運動): 홍암대종사 나철 선생의 구명(舊名)은 인영(寅永)이었다.
전남 벌교에서 철종 연간인 단기 4196년, 서기 1863년 계해(癸亥) 12월 2일 유시(酉時)에 탄생하였다. 홍암 대종사는 29세에 과거에 장원하여 기거주(起居注)에 오르고, 31세에는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되었으나 곧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 33세에는 고종 황제로부터 징세서장(徵稅署長)을 제수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종사가 31세 되던 계사년부터 갑오․을미년간은 동학혁명․청일전쟁․명성황후 시해 등 청국․일본․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각축과 외우내란(外憂內亂)을 마구 일으키던 때였기에 국운은 날로 쇠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종사는 구국의 대망을 품고 10년간 입산수도에 들어갔다가 42세 되던 갑진년에 다시 나왔다. 그러나 갑진․을사 양년은 10년 전의 갑오․을미 양년보다도 외우내란이 더욱 클 뿐만 아니라 노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있었다.
홍암 대종사는 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오기호(吳基鎬: 개명 赫) 동지와 함께 미국 포츠머드에서 개최되는 일․러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고자 을사년(1905) 6월에 일본으로 밀항하였고 이것이 홍암의 제1차 도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도미가 좌절된 두 분 지사는 궁성 앞에 앉아 3일간 침식을 전폐하면서 명치(明治) 천왕에게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선언하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에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대종사는 이 망국조약을 저지할 결심으로 급히 귀국하기는 하였으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다시 제2차, 제3차로 도일하였고, 일본 요로를 찾아 을사조약을 폐기를 교섭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동양 삼국이 선린(善隣)하여 서세(西勢)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모두가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한 대종사는 매국정부를 전복하고 구국정부를 수립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권총 50여 정으로 오기호(吳基鎬) 등 50여 동지와 더불어 6개 결사대를 편성하고 매국노 6적을 암살하려고 쏘아댄 권총 알이 빗나가 정미년(1906)에 ‘정부전복 대신암살기도사건’(政府顚覆 大臣暗殺企圖事件)의 죄목으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내명이 있어 이해 10월에 사면되었다. 하지만 대종사는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것이 제4차 도일이었다. 이로서 을사 제1차 도일로부터 제4차 도일(渡日)까지 4년간은 홍암대종사가 정치․외교적 구국운동에 모든 정열을 쏟은 기간이었다.
홍암대종사의 단군교 중광(重光): 대종사가 제1차 도일 때에 을사조약 체결을 저지할 목적으로 급히 오기호 동지와 귀국하던 을사년 섣달 그믐날 밤(양력 병오년 1월 24일)에 당시 서울 서대문역 앞에서 백두천산(白頭天山)에 있는 백봉대신사(白峰大神師)의 제자인 90 고령의 두암 백전선(頭巖 佰詮仙) 옹을 만나 두 분은 노상에서 단군교에 입교하고, 신서(神書)인 「삼일신고」(三一신誥)와 「신사기」(신事記) 두 권을 받았다. 이것이 대종사가 단군교와 인연을 맺게 되는 첫 사건이었다. 그러나 구국일념에 불타고 있는 때이라 단군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홍암 대종사가 지도(智島)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정훈모(鄭薰模) 동지와 제4차로 도일한 무신년(1908)에 동경 청광관(淸光館) 숙소에 머물렀는데, 12월 5일 아침에 미도 두일백(彌島 杜一白)이라 하는 노인이 대종사 방으로 들어왔다. 미도선옹(彌島仙翁)은 두암선옹(頭巖仙翁)이 도형(道兄)이 된다고 자기소개를 하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고본 신가집」(古本神歌集)․「입교의절」(入敎儀節)․「봉교절차」(奉敎節次)․「봉교과규」(奉敎課規) 등의 책을 전해주고 말하기를 “나공(羅公)의 금후사(今後事)는 이 단군교 포명서에 관한 일이니 명심하시오”하고 나가버렸다.
며칠 후 대종사 일행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숙소를 개평관(蓋平館)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미도선옹(彌島仙翁)이 나타나서 두 분에게 영계(靈戒)를 내리고,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는가? 곧 귀국하여 단군 대황조의 교화(敎化)를 펴시오. 이 한 마디가 마지막 부탁이 빨리 떠나시오!” 하고는 나가버렸다.
이 순간 홍암대종사는 무엇인가 모를 감동이 온몸을 진동하였고, 마음에는 홀연히 대오대각(大悟大覺)하고 있었다. “옳지, 단군 대황조께서 나를 부르시구나. 백두천산(白頭天山)의 백봉대신사(白峰大神師)와 그 제자 두암(頭巖)과 미도(彌島) 두 선옹(仙翁)은 대황조 단군께서 내게 보내신 신선들이다. 그렇지, 이제 와서 한두 사람의 애국정객 따위의 외교행각으로 국권을 회복해 보겠다고 한 생각은 어이없는 일이다. 나라는 망했으나 겨레는 살아있다. 이 살아있는 겨레를 건지는 단군 교화운동이야말로 참된 구국운동이다. 민족의 정신이 독립된다면 조국이 독립될 날은 반드시 온다.” 대종사의 생각이 이에 미치자 미련 없이 외교활동을 단념하고, 단군교를 천하에 포명한다는 대명을 안고 이튿날 정훈모 동지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대종사는 이듬해 기유년, 즉 단기 4242년(1909) 정월 보름날 밤 11시를 기하여 한성부 북부 재동 8통 10호 육간초옥 북벽에 ‘단군대황신위’(檀君大皇神位)를 봉안하고 오기호(吳基鎬), 강석화(姜錫華 개명 우), 최동식(崔東植 개명 顯),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개명 翼), 이석(李析), 김인식(金寅植), 김춘식(金春植), 김윤식(金允植) 등 수십 명 동지가 모여 제천보본(祭天報本)의 대례를 봉행하고, 천상의 억만 신(神)과 천하의 억만 민(民)을 향하여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선포하니 이것이 홍암의 단군교 중광이었다.
대단군 종교는 그 큰 도맥(道脈)이 고려의 왕검교(王儉敎)로 이어왔다. 그런데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 고려 원종(元宗: 1247~1260) 때부터 이 단군도의 원맥이 끊기기 시작하여 대한제국 고종황제(1863~1907) 때까지 약 7백 년간 끊어져 왔다. 이 끊어진 단군도의 대원맥을 홍암 대종사가 백봉 대신사로부터 전수받아서 다시 이었기 때문에 홍암이 단군교를 기유중광(己酉重光)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홍암대종사의 대종교와 순명(殉命): 단군교가 중광한 이듬해는 나라가 일본에게 병탄당한 경술년(1910)이다. 홍암대종사는 일제의 탄압을 예감하였다. 그래서 순수한 종교단체로 나가기 위하여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이 교명은 이익(李翼) 선생이 밝혔던 조선시대의 단군교명인 ‘종교’(倧敎)를 전승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대종사는 옛날 대단군 조선의 3만 리 신국(神國) 성역을 되찾아 배달나라의 영화를 재건하고자 만주로 들어가서 백두천산(白頭天山) 아래에 있는 화룡현 청파호(和龍縣靑坡湖)에 총본사를 설치하고, 동북아시아를 동서남북의 사도교구(四道敎區)로 나누고 기타 지역을 외도교구(外道敎區)에 둔 뒤 각 교구의 책임을 서일(徐一), 신규식(申圭植), 이동녕(李東寧), 강우(姜우), 이상설(李相卨)로 하여금 담당케 하는 한편, 대종사 친히 만주각지를 대순(大巡)하면서 신이(神異)․기적(奇蹟)을 나타내고 단군의 진리를 설파하는 등 눈부신 선도 시교(宣道施敎)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경술․신해․임자․계축․갑인까지 5년 동안에 만주․노령․중국 등지에서 당시 교포 수의 80%에 해당되는 30만 동포를 대종교도로 되찾게 되었다. 대종교의 이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을 본 일본정부는 크게 당황하고, 조선내의 대종교도를 감시하는 한편 대종교 말살책을 강구하였다. 서기 1915년 봄에 대종사가 국내 현황을 시찰차 일시 귀국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이해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써 종교 통제 안을 공포하여 대종교를 폐쇄하고, 홍암대종사의 자유를 속박하였다.
“아, 나철은 신성무비(神聖無比)하옵신 단군 대황조님의 천명을 받자옵고, 무상하신 단황대교(檀皇大敎)를 중광한지 불과 7년에 교(敎)를 죽인 대죄를 저질렀사옵기에 대죄인은 한 올의 목숨을 끊어 사죄하고자 하옵니다.”
이 같은 비통한 결심을 병진년(1916) 설날 아침에 서울 남도본사 삼신전(三神殿) 앞에서 눈물로써 맹세하였다. 그리고 6명의 시봉(侍奉) 제자를 대동하고 음력 8월 4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향하였다. 대종사는 삼성사에 체류하면서 청소하고 기도하였다.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한 추석날 밤이 왔다. 대종사는 뜰 언덕에 올라가 북으로 백두천산(白頭天山)에 읍배(揖拜)하고, 남으로는 신영선산에 곡배(哭拜)하고, 내려와서 제자와 신도들을 데리고 제천대회를 봉행하였다. 그리고 수도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전수도통문」(傳授道統文)과 「순명삼조」(殉命三條)와 유서들을 써놓고, 폐기법(閉氣法)을 사용하여 54세의 목숨을 스스로 끊으시니 이것이 홍암대종사의 순명조천(殉命朝天)이었다.
「순명삼조」는 목숨을 끊는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힌 유서이다.
‘제1조는 죄악이 무겁고, 재덕(才德)이 없어서 능히 단군 신족(神族)을 건지지 못하여 오늘의 모욕을 당하여 대종교를 위하여 죽노라.
제2조는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빌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 주신한얼님 은혜를 갚지 못하여 한얼님을 위하여 죽노라.
제3조는 이 몸이 가달길에 떨어진 인류의 죄를 대신으로 받았으니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이것은 홍암이 대자애(大慈愛)의 구세심(救世心)을 발휘하여 스스로 하신 속죄의 순명이요, 순교이므로 당시 윤주찬(尹柱瓚) 지사는 홍암 대종사를 가리켜 “순명삼조(殉命三條)는 선생이 천하를 널리 건지심이니 참으로 전만고(前萬古) 후만고(後萬古)에 큰 대성인이요 대신인이라 이를진저!”라고 찬탄하였다(김헌, 「신사기」 참조).
(2) 무원종사(茂園宗師)의 대종교 망명과 무오독립선언서
무원종사(茂園宗師)는 김헌(金獻, 舊名 敎獻) 선생이다. 무원종사는 단기 4201년 서기 1868년 7월 5일에 수원 지방에서 탄생하고 18세에 과거에 올라 두루 요직을 거쳐 대종교가 중광 되던 기유년에는 규장각 부제학으로 칙임(勅任)되었다.
그러나 국파민멸(國破民滅)의 한을 어디에 호소할 곳이 없어 이듬해 43세 되던 경술 국치년 정월에 대교에 입교하였다. 종사는 이 해에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대교에 몸을 바치기로 하였다. 홍암대종사 때에는 대종교의 교주를 도사교(都司敎)라고 불렀다. 대종사가 제1대 도사교가 되고, 무원종사가 천궁영성(天宮靈選)에서 뽑히게 되어 병진년(1916) 홍암의 유서에 의하여 교통(敎統)을 전수받고 제2대 도사교가 되었다.
홍암대종사의 순명은 일제가 대종교를 없애버린 데 대한 순교적 항쟁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무원종사 또한 이 뜻을 이어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원종사는 “지존하옵신 한배님의 대종교가 어찌 왜정과 타협할 수 있으랴!”하고, 이듬해인 정사년(1917)에 대종교를 부둥켜안고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망명하였다.
무원종사는 망명 이듬해인 무오년에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 발의하고, 김규식, 박은식, 김동삼, 이승만, 이시영, 김좌진,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조소앙, 안창호 등 독립운동 대표 39명의 동의를 얻어 대종교 총본사에서 11월에 선언식을 거행했고, 즉시 이 독립선언서는 중국․노령․미국․일본 그리고 국내로 발송되었다. 그리하여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다음해인 기미년(1919) 2월 8일 동경에서 유학생들에 의하여 선언된 2․8독립선언서와 3월 1일 국내에서 선언된 기미독립선언서가 나올 수 있도록 한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 백포종사(白圃宗師)편에서 청산리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겠지만, 청산리 전투의 영웅들은 대종교의 교도와 대종교도의 자금으로 양성된 북로군정서 독립군이기 때문에 이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은 그 보복으로 이른바 병신토벌(1920)을 감행하여 만주에 있는 대종교 동포들을 도처에서 악랄한 수법으로 수없이 학살하였다. 또 백포종사는 독립군을 인솔하여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가 비적단의 야습을 받고 많은 청년동지가 희생당한 참경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종교의 중진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공로를 세운 예관 신규식(晲觀 申圭植) 선생이 해외 독립 운동가들이 단합하지 못하는 것을 비관 자살하였고, 독실한 교도인 호정 한기욱(湖亭 韓基昱) 선생 일가가 비적에게 참화를 당하는 사건 등이 거듭되자 무원종사는 울분과 비통 속에 심한 상심을 일으켜 약도 받지 않는 병환을 얻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무원종사는 단기 4256년(1923) 계해 11월 18일에 영안현 남관 총본사 수도실에서 ‘상교 윤세복 초승사교 위임 경각부인’(尙敎 尹世復 超昇司敎 委任 經閣符印)이라는 유명(遺命)을 남기고 56세를 일기로 병으로 인하여 조천(朝天)하였다.
(3) 백포종사(白圃宗師)의 북로군정서와 청산리대첩
대종교의 백포종사(白圃宗師)는 저 유명한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 선생이다. 단기 4214년(1881)년에 함경북도 경원에서 탄생하고, 함일사범학교를 나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32세 되던 임자(1912)년에 만주로 들어가서 왕청현(旺淸縣)에 명동학교를 창설하고, 이 해 10월에 대종교에 봉교하였다.
홍암대종사는 두 사람의 큰 제자를 얻었으니 그 한 분은 무원종사이고, 또 한 분은 백포종사였다. 무원종사는 당시 사학의 대가여서 일찍이 최남선 선생도 스승으로 모셨다. 무원종사는 「신단민사」(神檀民史), 「신단실기」(神檀實記),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의 단군 역사서를 발간하여 대종교의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백포종사는 철학의 대가여서 「삼일신고강의」(三一신誥講義)와 「회삼경」(會三經)과 「진리도설」(眞理圖說) 등 단군 진리서를 집필하여 대종교의 교리관을 정립하였다. 백포종사는 주야로 수도에 정진하여 대종교 봉교 3년만에 성통(性通)하고 견문지행(見聞知行)의 사대신기(四大神機)를 마음대로 구사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가는 곳마다 덕행을 베풀고 진리를 규명하여, 신도가 운집하고 한 번에 수백 수천의 동포들을 봉교(奉敎)시켰다.
백포종사는 국내에서 항일 투쟁하다가 만주에서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어서 적극적인 활동의 어려움을 알고,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한 정의단으로 바꾸고 무장독립운동을 도모하였다. 이럴 때에 백야 김좌진 장군을 맞이하게 된 백포종사는 무오년(1918) 12월에 이르러 대종교 교우들이 현천묵(玄天黙), 조성환(曺成煥),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김규식(金奎植), 계화(桂和), 정신(鄭信), 이홍래(李鴻來), 나중소(羅仲昭), 박성태(朴性泰) 등과 협의하여 정의단을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본영은 밀림 속 왕청현 서대보(旺淸縣西大堡)에 두고, 백포종사가 총재로 추대되어 무장독립군 양성에 돌입하였다. 역시 대종교의 중진인 이시영 선생이 초대 학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는 이시영 선생 형제들의 가재로써 설립했고 운영되었지만, 북로군정서는 순수 대종교도로 구성되었고, 군자금도 무원종사가 거두어들인 40만 교도의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무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의 특별한 후의가 있어 노령 해삼위에서 구입하여 장백산맥 밀림을 헤치면서 운반하였다. 이로써 북로군정서 설립초기에 보유하였던 5백 명의 독립군은 완전무장이 이루어졌고, 왕천현 십리평에다 개설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에서는 298명의 제1회 사관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기미년에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무원종사는 기미년 여름에 문무의 지용을 겸비한 백포종사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하였으나 백포종사의 무력광복이라는 대웅지로 말미암아 교통전수(敎統傳授)는 5년 후로 약속하고 신전에 이를 고유(告由)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종사는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연성대장에 이범석 장군 등을 세우고 군사훈련을 실시한지 약 1년이 되던 경신년(1920) 7월에는 정규독립군 1천5백 명을 양성해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중국 동북구 혼성 여단장 맹부덕(孟富德)이 사대보(四大堡) 군정서를 찾아와서 “중국 당국이 중국 영토 내에 있는 한인을 도와 한국 독립군이 무장하고 일본에 항쟁하게 되었으니 일본은 부득이 중국을 상대로 무력행사를 하겠다고 하기 때문에, 귀 군정서는 길림성 경계를 떠나 산중으로 옮겨 달라”는 부탁이었다. 할 수 없이 군정서는 군사 이동단을 조직하고, 백두천산 동북록(白頭天山東北麓)으로 이동하여 화룡현 삼도구(和龍縣三道溝)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에 출정했던 제19사단 장지봉(張枝峰)을 넘어 남하하고, 제21사단은 나남으로부터 북상하여 북로군정서를 양면으로 협공할 작전을 계획하고 진격 중이었다.
9월에 이르러 군정서 독립군은 참모장에 나중소 장군을 세우고, 2대로 나누어 제1지대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고, 제2지대는 이범석 장군이 인솔하여 철통같은 미전태세로 들어갔다. 백운평(白雲坪)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자 진입하는 일본군을 아군이 좌우산협에 십자진으로 매복하였다가 2천 수백 명을 섬멸하였다. 또 천수평(泉水坪)을 공격하여 일본군 기병대를 전멸시켰다. 또 아군이 전술상 청산리를 살짝 빠져나오자 일본군은 저희들끼리 대전하여 6, 7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양군의 최후 결전장인 마록구(馬鹿溝) 전투에서는 아군의 10배가 넘는 왜군을 맞아 1천여 명을 섬멸하고 나니, 적은 재기불능이 되었고, 청산리대첩은 북로군정서의 것이 되었다. 청산리전투에서의 아군은 총 병력 1천8백여 명으로, 일본의 2개 사단과 전투동원 3개 여단 병력과 싸워 아군 60명 사상에 적군 가납연대장 이하 3천 수백여 명을 살상하는 세계 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청산리대첩의 영광을 세운 북로군정서는 무기와 군량의 보급도 끊어졌고, 일본군의 보복작전으로 죄 없는 대종교도와 동포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참사를 미리 방지할 목적도 있고 해서 잠시 노두구(老頭溝)로 퇴각하였다가 심산백설(深山白雪)을 헤치면서 주야로 강행군을 하여 소․만 국경 밀산 당벽진(密山當壁鎭)으로 이동하였다. 뒤를 따라 홍범도 장군과 이천청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단과 구춘선(具春先)의 예수교파 간도대한국민회와 이명순(李明淳)의 간도대한국민회 그리고 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협성단․원종교(元宗敎)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사 등 10개 독립군 단체가 밀산으로 모여 북로군정서와 합류하였다.
이들 11개 단체는 회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에 백포종사 서일 장군을, 부총재에 현순(玄楯) 장군을, 총사령관에 홍범도 장군을, 부사령관에 이청천 장군을, 참모장에 이장녕 장군을 선임하였고 군단병력도 3천5백 명으로 증가하였다. 일본정부는 이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을 탐지하고, 이듬해 신유년(1920) 8월 26일에 비적단 고산적을 매수하여 야포까지 동원한 2만 비적 떼로 하여금 우리 대한독립군단을 야습케 하였다. 치열한 전투는 밤중에 천지를 뒤흔들었다. 새벽에 백포종사가 전황을 살피면서 참상을 돌아보니 사랑하던 청년교우들은 총을 안고 쓰러져 말이 없고, 살인․방화․약탈이 그 비참함은 눈을 뜨고서는 볼 수가 없었다. 백포종사는 한참 말없이 서 있다가 “귀신․도깨비가 날뛰니 해는 빛을 잃고, 뱀․돼지가 물어뜯으니 인족은 피로 얼룩졌구나. 해는 저물고 길은 다했으니 사람은 어디로 가나!”하는 한탄시를 읊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사람들은 3일이 지나서야 뒷산에 앉아계신 백포종사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폐기법(閉氣法)을 써서 정좌하신 채 이미 순명조천하신 거룩한 모습이었다. 아, 아깝도다 41세의 백포여! 하늘도 통곡하고, 땅도 통곡하였으나 가신 성자는 역시 말이 없었다.
(4) 단애종사(檀崖宗師) 임오교변과 대종교 환국
단애종사(檀崖宗師)는 윤세복(尹世復, 舊名: 世麟) 선생이다. 단기 4214년(1881)에 밀양에서 탄생하여, 수학을 전공한 측량 기사였다. 단애종사는 피 끓는 30세 때에 한일병탄의 쓰라림을 당했다. 종사는 홍암대종사를 3일 밤 모시고 밤을 새우면서 깊은 감명을 받고, 대종교에 봉교(奉敎)하였다. 그 즉시 밀양으로 내려가서 친형 윤세용 선생과 상의하여 2천석 사재를 팔아가지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단애종사는 환인현(桓因縣)에 정착하여, 포교의 한 방법으로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학비를 전담했고, 가난한 동포의 생활비도 보조하였다. 일제의 침략은 여기에도 미쳐 중국관헌을 시켜 학교를 폐쇄하고 교수진에 대한 축출령까지 내렸다. 단애종사는 무송현(撫松縣)으로 근거를 옮기고 도처에 대종교 지부와 백산(白山)․대흥(大興) 등 학교를 신설했고 흥업단․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 단체를 조직하여 단장이 되어 광복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다가 문득 무원종사의 유명을 받고, 44세가 되던 갑자년(1924) 정월 22일에 영안현(寧安縣) 남관에서 제3대 도사교(都司敎)로 취임하였다.
일본정부는 만주에서의 대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크게 우려하고, 그 봉쇄를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을 당시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에게 보내 삼시조약(三矢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중국 동잠성인 만주에서도 1928년 11월을 기하여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발표되어 대종교 총본사는 소만 국경인 밀산 당벽진(密山當壁鎭)으로 피난해야 했다. 단애종사는 대종교 중진이며 상해임시정부의 외교가인 남파 박찬익(南坡 朴贊翊) 선생에게 지시하여 중국 중앙정부와 해금을 교섭케 하였다. 경오년(1930) 봄에 기다리던 대종교 해금령이 봉천․길림․흑룡강․열하의 동북 4성에 내려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미년(1931) 9월 18일에 일본은 중국침략 제1보인 만주사변을 일으켜 무력으로 만주를 강점하게 되니 대종교는 또다시 간판을 내렸고, 단애종사도 지하로 숨어야 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세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밀산 당벽진에 있는 대종교 대일시교당(大一施敎堂)을 임시 총본사로 정하고 단애종사는 그곳에 은거하면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단애종사는 계유년(1933) 초에 문득 단군 한배검의 묵시를 받았다. 종교의 사명은 선도시교(宣道施敎)에 있으므로 은거의 안일을 박차고 일어나 나가라는 하명이었다. 그래서 이 해 3월 보름에 대일시교당에서 거행된 어천절(御天節) 경하식 석상에서 단애종사는, “우리 대교가 중광한지 25년 동안에 일본의 박해를 무수히 받아왔다. 지금은 갈 곳도 올 곳도 없이 되었다. 이때에 나는 한배검의 묵시를 받게 되어 나 스스로 순교의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다행히 만주국과 포교의 양해가 성립된다면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도는 가히 존재한다’하신 홍암대종사의 유지를 받들게 되는 것이요, 만일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내 한 몸 받쳐 선종사(先宗師)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튿날 즉시 밀산을 떠났다.
밀산을 떠나 단애종사는 영안(寧安)까지 나오면서 5개 시교당을 신설하였다. 하얼빈에 도착하여서는 김응두(金應斗), 박관해(朴觀海) 형제들의 알선으로 관동 군특무 기관장, 한얼빈 총영사, 조선총독부 특파원 등을 만나 대종교 재만시교권 인허신청서를 제출하고, 일본 총영사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숙(金永肅), 김서종(金書鐘) 형제를 세워 갑술년(1934) 3월에 하얼빈에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총본사를 발해국 옛 상경(上京) 터인 동경성(東京城)으로 옮겨놓고, 발해 고궁 유지(遺地)에 단군전(檀君殿)을 건축하기로 하여 목단강성공서(牧丹江省公署)의 건축인가도 받았고, 대종학원도 신설하여 초․고등부를 개학하였다. 1939년(기묘)에는 강철구(姜銕求) 형제의 노력으로 만주국 정부로부터 교적(敎籍) 간행도 승인 받았다.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형제 등이 앞장서거 교적 5종 1만5백 부를 출판하고, 「천가집」(天歌集) 4천 부는 서울에 이극로(李克魯) 형제가 맡아서 간행하였다.
이제야 대종교의 수난기는 사라지고, 중흥기가 도래된 듯 기쁘고 희망찼으나 이것이 바로 일본이 조선어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학자를 체포 홍원감옥에 투옥한 것과 같이, 조선의 종교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만주에서 지하로 숨은 대종교를 짐짓 양성화시켜 전 간부를 체포하려는 간악한 흉계에 말려든 것임을 그때 누가 알았으랴!
조선총독부 촉탁 조병현(趙秉炫)이 교인을 가장하고 들어와서 모든 교내 사정을 정탐하여 밀고하였다. 이리하여 1942년 임오년에 단애종사를 비롯하여 간부 교인 25명이 구속되고, ‘대종교는 조선고유의 신도 중심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하는 표방 하에서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을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다.’
라는 죄목으로 단애종사는 무기형에, 김영숙(金永肅) 15년에, 윤정현(尹珽鉉)․이용태(李容兌)․최관(崔冠)은 8년에, 이현익(李顯翼)은 7년에, 이재유(李在囿)는 5년으로 원로교인들이 실형을 받았다. 그리고 오근태(吳根泰), 안희제(安熙濟), 강철구(姜銕求), 김서종(金書鐘), 이창언(李昌彦), 이재유(李在囿), 나정련(羅正練), 나정문(羅正紋), 이정(李楨), 권상익(權相益) 등 열 분의 원로교인은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니, 이분들을 순교십현이라고 하고 이 사건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한다.
형기 없는 단애종사의 옥중생활은 죽어야 끝나건만 한얼님의 조운화법에 따라 천지가 변화하고 운도가 바뀌어 일락동천(日落東天)하니 왜국은 망하고, 한국은 광복이 왔도다. 어허, 옥중 4년에 을유 8․15일에 목단강(牧丹江) 액하감옥(掖河監獄)은 활짝 열렸다. 70 고령에 생사를 초탈한 옥중수도로 선풍도골(仙風道骨)로 화하신 단애종사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으로 옥중 교우일행을 이끌고 유유히 출옥하였다. 신도는 운집하였고, 대종교 간판은 동경성에 다시 나부꼈고, 대종학원에는 남녀노소가 벌 떼처럼 모여들어 국문과 국사를 배우고 단군찬양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거리를 누볐다.
그러나 소련군에 이어 중공의 팔로군이 진주하고, 공산당 치하로 급변하게 되면서 반동(反動) 대종교 타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공갈․협박․암살의 공포는 몸서리치게 조여들었다. 이듬해 병술년(1946) 정월 14일에 총본사 직원회의를 소집하고, 정월 17일에 단애종사의 환국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단애종사는 수행교우 5명을 대동하고 은밀히 동경성을 빠져나와 하얼빈을 거쳐 서울에 당도하고 보니 이것이 대종교의 환국이었다.
단애종사가 실로 망명포교 36년 만에 환국하였고, 제3대 대종교 도사교 취임 후 관교 22년간은 해외 독립운동자의 정신적 지주였다. 단애종사가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서울 총본사 단군전에서 직접 피부로 체험했을 때의 애통은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금식기도를 밥 먹듯 하면서도 후세를 위한 종사(倧史) 집필을 쉬지 않았다가 80세로 세상을 떠나 천궁에 조회하시니 때는 단기 4293년(1960) 경자 2월 13일이었다.
홍암대종사는 단군대교(檀君大敎)를 일으켰고, 무원종사는 그 교사(敎史)를 찾았고, 백포종사는 그 교리(敎理)를 다듬었으며, 단애종사는 그 교단(敎壇)을 사수한 것이다. 이분들을 단황상제(檀皇上帝)를 받들고 민족을 건지는 스승으로 섰을 때 술과 담배는 물론 미식(美食)과 부부의 정도 끊고 오로지 눈물의 기도로써 생과 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구국광복으로 대종교의 교리를 실천하였다.
밀 유(密諭)
이 밀유는 홍암대종사께서 대교와 한배검과 인류를 위하여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시어 순교순명(殉敎殉命)하시던 병진년(1916) 팔월 보름 추석날에 우리들 교우 형제자매에게 유언으로 부탁하신 말씀이다.
‘우리 대종교의 뒤를 이을 이들은 항상 공경으로 한얼님을 받들며, 반드시 사랑으로 인간세상을 구원하라. 우리 대교를 널리 펴서 공덕을 빛내며, 사람의 기강(紀綱)을 떨치라. 방심하여 한얼님을 속이지 말며, 감정으로 소란을 피우지 말라. 나쁜 생각으로 정치에 덤비지 말며, 못된 버릇으로 법률을 어기지 말라. 겁을 내거나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과 미신을 가까이 말라.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지르지 말며, 교중(敎衆)을 앞세우고 세상일을 다투지 말라. 다른 종교의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구차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안정(安靖)으로써 몸을 닦으며, 청직(淸直)으로써 뜻을 가지라. 원도(願禱)로써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늘려라. 자손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돈목하여라. 안은 인지(仁智)로써 닦으며, 밖은 신의로써 사귀라.
지극한 정성에 이름은 반드시 우리의 팔관(八關)을 써서 하고, 후덕한 예의를 가르침은 반드시 우리의 구서(九誓)를 써서 하여라.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되 먼저 욕심 물결을 가라앉히고, 한뜻을 확고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열림을 얻게 하여라.
이와 같이 하면 하늘에서 복이 내릴 것이요, 만일 어기면 한얼님이 반드시 화를 내리시니 조심하고 힘쓸지니라.
단제강세 4천3백73년 병진 8월 15일 대종교 도사교 나철
대종교중 첨위 인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