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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 神鐘)
종 목 : 국보 제29호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크 기 : 종고(鐘高) 333㎝, 구경(口徑) 227㎝. 무게 12만근
제 작 : 경덕왕 시작(742년) ~ 혜공왕 완성(771) 30년 걸림.
일 명 : 봉덕사종·에밀레종
▣탐방일자 : 2015년 1월 25일
▣소 재 지 : 경주국립박물관
최초 봉덕사(奉德寺)에 달았다가 조선시대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靈廟寺)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현재의 경주문화관)으로 옮겼다. 그 뒤 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거종(巨鐘)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며, 상원사동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종신의 상하에는 견대(肩帶, 上帶)와 구연대(口緣帶, 下帶)를 둘렀고, 그 속에 주로 보상당초문을 주문양대(主文樣帶)로 장식하였으며, 특히 하대에 속하는 구연대는 종구(鐘口)가 팔능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팔능형의 윤곽형이 되는 능(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대형 연화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견대 밑으로는 4개소에 연주문 안에 견대에서와 같은 보상당초문양으로 조식된 유곽을 둘렀으며, 그 내부에 돋을새김 연화로 표현된 9유두(乳頭)가 들어 있다. 이 유곽 밑으로 종신에 비천상(飛天像) 2구(軀)를 상대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서로 어긋나게 8판(瓣)의 연화당좌 2개를 배치하고 있다.
특히 오대산 상원사 동종의 명문이 동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에 명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종신에 장문의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것이 또한 신라 동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전체적인 동종의 조각수법은 동양 어느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종인 동시에 상원사동종과 더불어 최대의 조각양식을 구비한 동종이다. 종신에 2구씩 마주보는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으로서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으로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이다.
특히, 이 동종의 명문은 종명(鐘銘)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문장 면에서도 지극히 뛰어난 것이다. 지은 사람은 신라 혜공왕 때 한림랑급찬(翰林郎級飡)인 김필계(金弼溪)라고도 하고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하나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하지는 않다. 종명은 630자로 된 서문(序文)과 200자로 된 명(銘)으로 짜여 있다.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서문은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첫째는 종소리야말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신기(神器)임을 역설하였다.
둘째는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러한 공덕을 종에 담아서 그 공덕을 영원히 기릴 뿐만 아니라,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화롭고 민중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發願)을 담았다.
셋째는 그러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하였다.
넷째는 그러한 사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그 사업을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하였다.
다섯째는 종이 완성되자 이에 대한 감격과 신비로움, 그리고 종의 효용성을 서술하고 종소리와 함께 온 누리가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빌었다. 이어서 명이 덧붙여지는데, 이것도 서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4자구(四字句)로 시적(詩的)인 맛을 살려 찬양과 발원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 동종의 명문 내용과 종의 형태가 고유섭(高裕燮)의 해석에 따르면
“팔화(八花)는 팔음(八音)을 상징하였으리라. 화엄의 유(乳)를 없애고 36화(花)를 안배함은 삼귀계(三歸戒)를 옹호하기 위한 36선신(善神)의 상징이리라(大音震動於天地間, 聰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貴之奧義, 懸神鐘悟一乘云圓音).”고 한 것은 이 신종의 법기(法器)로서의 존재이유일 것이라고 하였다.
에밀레 종
성덕대왕신종에 '에밀레 종'이라는 별명이 붙은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1925년 8월 5일자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 동화가 올라있다.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득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었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어밀네 종이 성덕 대왕 신종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의 글을 보면
"...the legend of the casting of the great bell that hangs in the centre of Seoul....(중략)....The Koreans hear in the dull thud of the wooden beam against the bell a faroff resemblance to the word 'em-mi', which means 'Mother'. Hence the legend.
라는 글이 있다.
이는 '에미'(엄마)라고 부르는 종이 서울 중심에 있다는 것인데, 이는 보신각종으로 보인다.
한편, 에밀레종 전설을 연구한 황인덕에 의하면 중국 감숙성 무위시 대운사(大云寺)에 있는 종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 종은 당 또는 오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종이 울릴 때 "낭아娘呀, 낭娘"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하는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있다. 이 낭이라는 말이 어머니를 가리킨다는 설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모양의 용뉴 부분에는 음관(용통)이라고 부르는 대나무 모양의 통이 하나 있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서는 볼 수 없는 이 구멍은 종이 울릴 때 내부에서 나는 잡음을 배출한다. 64Hz와 168Hz의 기본 진동은 내부로 되돌려 보내고 높은 진동수의 잡음은 재빨리 방출해 버리는 것이다.
서양의 종과 달리 우리나라의 종은 타격 위치(당좌, 撞座)가 정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당좌는 종의 안전이나 수명에 유리하며 소리의 여운도 길어지도록 절묘하게 제작됐다.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종을 매단 지점에서 당좌 중심까지의 이상적인 거리는 260cm다. 성덕대왕신종의 경우 당좌 중심까지의 거리는 238cm로 불과 22cm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구조적인 특징은 종 아래에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부분인 명동(鳴洞)에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종각(鐘閣)에 높이 매달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지상보다 조금 위에 매달고 친다. 이때 종구(鐘口) 바로 밑에 만들어 놓은 명동은 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共鳴洞)의 역할을 한다.
아래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명동(鳴洞)은 종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 역할을 한다.
이 명동 시스템은 세계 다른 나라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시스템이다. 이렇게 음관으로 종 내부의 잡음을 빨아내고 명동 시스템으로 공명진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종을 쳤을 때 긴 여운이 남는다.
성덕대왕신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됐다.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일반종과 비교하면 그 형태나 소리 모두에서 차이가 난다. 납형법은 청동으로 범종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주로 작은 종을 제작할 때 쓰이는 방법인데,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됐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려면 20여 톤의 쇳물에 여분 20∼30%를 더해 총24∼26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부을 때는 압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거푸집을 웬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뜨거운 쇳물을 쏟아 부으면 거품이 일어나 부글거린다. 이때 공기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고 굳으면 범종에 기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에는 기포가 없다.
정말 어린아이를 쇳물에 녹였을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의 소리를 좋게 하려고 어린아이를 쇳물과 함께 녹였다는 전설에 대해서는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청동을 주물 할 때 뼈 속에 있는 인(燐, Phosphorus)을 섞으면 산화석이 제거돼 강도가 세지고 녹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무쇠와 청동불상에는 인이 소량 들어있으므로 성덕대왕신종에서 인이 발견된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70년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성덕대왕신종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체 분량에 해당하는 인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매우 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덕대왕신종에 포함된 인은 동물의 뼈라기보다는 인신공양으로 사람의 뼈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998년 포항산업과학원의 분석 결과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항산업과학원에서도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우므로 만일 어린아이를 넣었다면 위에 뜬 상태에서 타기 때문에 쇠 찌꺼기처럼 남게 된다. 만일 성덕대왕신종 제작 당시에 이것을 불순물로 취급해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다.
기록이 없는 한1,300여 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때 우리 조상들의 종 제작기술이 종의 주조와 설계뿐 아니라 음향학, 진동학 등 최적 시스템을 활용해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종의 형태는 위, 아래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한 항아리형의 몸체에 상, 하대라는 문양 띠를 두고 방형의 연곽(蓮廓)과 당좌, 주악상을 배치하였다. 몸체 위쪽으로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목 뒤로 굵은 음통이 솟아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덕대왕 신종은 다른 통일신라 종과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 향로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자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의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종의 중심은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종구를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과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긴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이다.
종신 앞, 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서(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자(四句)씩 짝을 맞춘 [명(銘)]을 배치하였다. 특히 서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은 성덕대왕 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一乘之圓音)]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필오(金弼奧)이며 종의 제작자로는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박종일(朴從鎰)과 박빈나(朴賓奈), 박한미(朴韓味), 박부악(朴負岳) 등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ton에 달했다.
종유(鐘乳)
종의 맨 위쪽에는 당초무늬의 띠가 둘러있고 비천상의 위쪽에는 아홉 개의 종유(종 젖꼭지)가 네 곳에 새겨져 있다.
▲신종의 동쪽과 서쪽에는 종 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의 당좌(撞座)가 종신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지 그렇지 않고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제대로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종을 치는 나무봉은 어디로
언제부터인가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울리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박물관에 가보니 매 시 마다 녹음해 놓은 종소리를 흘려 보내주고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에밀레종은 예나 다름없이 금이 가거나 깨질 기미가 전혀 없는데도 1200년이나 변함없이 울려왔던 종소리가 그치게 된 이유에 대해 상당히 높은 톤으로 '명작들의 공동묘지'에 에밀레종이 안치되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에밀레종에는 위의 그림과 같이 종을 치는 나무봉은 보이지 않고 나무봉을 걸어 놓았던 쇠줄만 서로 얽매여 묶여 있었다. 아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사진에는 나무봉이 균형있게 매달려 있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이 있다. 웅장하고도 해맑은 이 종 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이다.
이처럼 소리와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애절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이다.
다시 말해 호적등본상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면 주민등록상으로는 봉덕사종이 맞지만 별칭에 해당되는 에밀레종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종에 얽힌 전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이나마 성덕대왕 신종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종(725년) 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국 범종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맑고 웅장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녀 일찍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종이 걸려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의 남쪽인 남천리에 있던 절로서 효성왕(孝成王) 대인 738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혜공왕(慧恭王)대인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런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됨에 따라 이후에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世祖) 5년(1460년)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다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되었는데, 진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타종과 보존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 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打鐘)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打鐘)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 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을 위해 타종(打鐘)을 중단하였다.
아래쪽 당초(唐草)무늬
종의 아래쪽에도 당초무늬의 띠가 둘러져 있다
종구(鐘口)가 팔능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팔능형의 윤곽형이 되는 능(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대형 연화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다.
용뉴(龍鈕)와 음통(音筒)
신종의 상부에 있는 종 고리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종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어 이 종의 소리에는 다른 종에서 들을 수 없는 장엄한 맥놀이가 생기고 있다. 이 음통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경주의 구 박물관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 신종을 옮기기 전에 종각을 짓고 종 고리를 달았는데 그 때 박물관장이던 소불 정양모 선생이 이 종 고리의 부실여부를 확인하고자 포항제철에서 28톤짜리 강괴를 빌려와 종 고리에 걸어 놓고 Load Test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22ton의 종 무게를 견디기 위한 Load Test라면 44Ton의 강괴가 필요한 것을 알고는 소불선생은 틈만 나면 이 28Ton짜리 강괴를 흔들었는데 7일째 되는 날 종 고리가 휘어져 벌어졌고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종정(鐘頂)의 용통(甬筒), 즉 음관에도 몇 개의 단(段)을 두어 단마다 앙련과 복련으로 된 화려한 연판(蓮瓣)이 장식되어 있고, 용뉴의 용두(龍頭)와 몸체도 박진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수법으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동종을 완성하였을 당시는 통일신라의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극성기를 이루던 시기로서, 이 시대적 배경에 의해 이와 같은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 성덕대왕 신종 이전 모습(1915년 8월)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5년 8월에 다시 봉황대 아래에서 관아가 있던 동부동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 사진은 마침 조선고적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관아 자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동부동 옛 박물관에 오랜 기간 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5월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경주 노동리 고분군의 봉황대(鳳凰臺)
경주봉황대고분(慶州鳳凰臺古墳)
사적 제38호
높이 22m, 지름: 82m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경주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며, 경주평지에 산재하는 단독 원분(圓墳) 중 제일 거대한 무덤으로 분구의 높이는 22m, 지름은 82m이다. 보다 큰 고분으로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 있으나 이것의 경우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 내부구조 및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관찰되어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황대 고분은 지금으로서는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위치한 식리총(飾履塚)․금령총(金鈴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함께 5세기 말∼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되고 있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일대 1,642평이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
경주 법원 뒤쪽에 있는 구경주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을,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까지 새로 지은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의 숨은 얘기는 소불선생(당시 경주박물관장 정양모씨)이 "이제야 털어놓는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한국인 1985년 11월호)에 그 일부를 써놓은 바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던 소불선생은 이 위대한 종을 무사히 옮겨 거는 일, 거기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일로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이 신종에 어떤 손상이 간다는 것은 영원한 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밀레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은 대한통운이 맡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m, 무게가 22톤이다.
이것을 운반하기 위해 포장을 하니 높이가 5m, 무게가 30톤이 되었다.
이것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또 6m가 넘게 되고 트레일러 무게와 합치면 50톤이 넘게 되었다.
(...중략...)
소불선생은 이렇게 에밀레종을 신관 새 종각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안전하게 거는 일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다.
종각이 부실공사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공사자들이 신식기술을 너무 과신하거나 옛 유물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고리가 휘어 부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불선생은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강괴 28톤을 빌려 시험적으로 달아보고자 공문으로 요청했다. 그것은 만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포철은 강괴를 외부로 내준 일도 없고, 강괴를 운반하는 비용만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소불선생은 그저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다시는 못 만드는 문화유산이라는 말로만 몇날 며칠을 설득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안될 일도 되게 하는 길은 실무자를 잘 알면 되는 것인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포철의 한 실무간부가 소불선생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철은 강괴 28톤을 빌려주고 대한통운에서는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중기계장 이용일씨, 작업반장 김창배씨 등 여러분이 작업비도 받지 않고 거기에 옮겨 걸어 주었다.
소불선생은 에밀레종 무게보다 6톤의 여분으로 28톤을 빌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22톤의 하중을 견디는지 시험하려면 44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람에 움직이기 때문에 정지된 물체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불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강괴를 흔들어보았다.
시공자 공영토건 공사장은 6톤을 더 얹었다고 불평하면서 이 시험 자체를 불쾌해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소불선생은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종을 치듯 흔들어보았다. 이레째 되던 날 아침, 경비원이 소불선생을 찾아 뛰어왔다.
종고리가 휘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
소불선생은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떼어들고는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소불선생은 그것을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로 올라와 국립중앙박물관장실에 풀어놓고는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어이없는 일로 지체 높은 분들이 모였다.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수 없이 하기로 했다.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는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박사, 금속실장 황창규선생 등 과학자와 소불선생 등 박물관 관계자로 구성되었다.
종고리위원회는 먼저 일그러진 고리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시험해보니 연구관 하는 말이 "이 쇠는 똥쇠(똥철)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고리만이 아니었다.
종을 걸 쇠막대기도 22톤 하중을 잘 지탱해야 한다.
황실장은 이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 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직경 15cm가 되는 철봉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휘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것을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생겼다.
에밀레종 머리에 쇠막대를 끼우는 부분은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그 용허리에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은 지름이 9cm도 안 되는 것이었다.
최상의 질로 15cm 밖에 안된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황실장은 고민 끝에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오직 한 방법, 와이어(철사)로 계속 말면 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서야 종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황실장은 "관장님, 그전에 매단 쇠막대기 있습니까?"
하고 물어왔다.
소불선생이 창고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황실장은 득의만면하여 " 이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현대공학의 기술로는 15cm 쇠막대기 이하로는 안되지만 이것은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옛날 쇠막대기는 그것을 신라시대에 만들었는지 조선시대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금속을 합금해서 넓고 기다란 판을 만들어 두드리면서(鍛造) 말아서 만들었으니 와이어가 분산된 힘을 결합하듯 만든 형태라는 것이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연하면 휘기 쉬운데 이렇게 만들면 강하면서 부드러워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종고리위원회는 에밀레종 종고리에 끼울 쇠막대기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20세기에 에밀레종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정성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기술부족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은 발달했지만 청동주물 솜씨는 그 옛날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경험과 필요에 의한 기술의 축적과 과학적 사고란 발전이 아니라 변화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 당좌(撞座)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안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詞),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鍾乳), 입부분의 보상당초문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1963년 2월, 원자력연구소 고종건, 함인영 두 박사팀이 삼국시대 불상과 범종을 특수촬영(감마선 투과촬영)하여 과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미술자료' 제8호, 9호에 실려 있는데 이 두 박사는 당시 어떻게 그렇게 얇은 주물이 가능했고, 깨끗한 용접이 가능했고, 주물에 기포(氣泡)가 없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에도 물론 기포가 없다.
남천우 박사의 '유물의 재발견'이라는 명저에는 우리나라 범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장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종, 일본종이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것과는 큰 차이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법의 차이는 곧 형태와 소리 모두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종 몸체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긴 여운을 내지 못한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몇 해 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소리를 특집으로 꾸민 적이 있는데 에밀레종이 단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장중하고 맑은 소리 뿐만 아니라 긴 여운을 갖는 것은 에밀레종 뿐이라고 한다.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을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 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g을 한 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27톤의 끓는 쇳물을 거푸집(鑄型)에 일시에 붓는데 염영하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10곳에 쇳물 주입구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 압력이 대단하여 거푸집이 웬만큼 튼튼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한다. 또 쇳물이 쏟아질 때는 거품이 일어나 버글거리는데 이 때 공기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면 공기를 품은 채 굳어버려 기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공기를 어떻게 빼내었을까?
요즘 만든 주물에는 기포가 많은데 그 때는 없었다니 신비할 따름이다.
그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일일 따름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
▲소불선생이 포철에서 빌려온 28톤 강괴로 Load Test를 하는 모습: 문화유산답사기
▲성덕대왕신종의 1975년 이동모습
위 그림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실려 있는 사진으로 1975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종을 옮길 때의 모습이다.
신종을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기자 수 만 명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라 왔는데 이를 본 박물관장이던 소불 정양모선생이 광목 10필을 사오라고 하여 이를 세 줄로 만들어 신종의 뒤에 묶어 놓자 시민들이 이 광목 줄을 잡고 종을 따라 오는 장대한 행렬을 연출했다고 한다.
취재차 왔던 TV기자가 촌지를 주지 않는다고 촬영을 하지 않고 철수하여 신종의 이동 모습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고 유홍준 교수가 '문화유산 답사기'에 썼는데, 이를 본 경주에 사는 손용득씨가 찍어 놓았던 위의 사진을 보내주어 다음 판 부터 이 사진을 책에 올렸다고 한다.
▲ 성덕대왕신종의 맥놀이 현상[한국과학창의재단/작가 김화연]
맑고 긴 천상의 울림을 만드는 ‘맥놀이’
성덕대왕신종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난다. 특히 유난히 길고 특별한 소리의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히 천상의 울림이라 할 만 하다. 이 특별한 소리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이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나는 ‘맥놀이 현상’ 때문이다.
맥놀이란 두 음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진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의 소리(진동)와 반대편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가 마주치면서 합해지거나 적어지는 현상이다. 두 소리가 합해질 때는 소리가 커지며 적어질 때는 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후 9초부터 ‘에밀레~’ 소리가 한번 나면서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9초 후 약하게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9초를 주기로 맥놀이를 한다. 또 사람이 숨을 쉬는 듯한 ‘허억~’ 하는 작은 소리도 같은 방식으로 3초마다 한 번씩 맥놀이를 한다.
이 소리가 가장 나중까지 남는데, 3초는 사람의 숨소리 주기와 비슷해 익숙한 느낌을 준다. 맥놀이 횟수는 1초당 6회 정도까지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30~40회 정도가 되면 불쾌감을 준다.
성덕대왕신종 소리의 주성분은 기본진동수 64헤르츠(Hz) 근방의 음파와 168Hz근방의 음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음파들은 각각 진동수가 조금씩 차이 나는 두 쌍의 음파로 구성된다. 각각 64.06Hz와 64.38Hz, 168.31Hz와 168.44Hz의 음파가 섞인 소리인 것이다. 이들 진동수의 미묘한 차이가 맥놀이를 일으킨다.
성덕대왕신종의 낱소리 음파는 1,000Hz 이내에서만 무려 50여 가지나 된다. 이에 비해 일반 종소리의 낱소리는 20여 가지여서 성덕대왕신종 소리보다 빠르게 소멸된다. 성덕대왕신종은 낱소리 수가 많아 타종 후 소리가 거의 사라진 후에도 숨소리 같은 64Hz와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168Hz의 음파가 남아 심금을 울린다.
성덕대왕신종이 맥놀이를 유발하는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종의 재질이나 두께가 균일하지 않아 종소리의 진동수가 미세하게 차이 난다. 겉보기에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만 표면의 문양과 조각이 비대칭을 이루고 몸체 곳곳의 밀도나 두께도 미세하게 다르다.
또한 범종 내부에는 쇠 찌꺼기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서양종은 이 같은 비대칭성과 비균일성을 가능한 한 제거하기 때문에 맥놀이 현상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은하게 울리지 않고 소위 ‘학교종이 땡땡땡’처럼 다소 경박한 소리가 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이병호 교수는 주파수 스펙트럼 분석(Frequency Spectrum Analysis)으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해 여러 종소리를 비교 평가했다. 이 분석방법은 음질 평가치를 정의해 그 수치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종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결과는 다음과 같다.
종 류 | 점 수 |
성덕대왕신종 | 86.6 |
상원사종 | 71.5 |
중국 영락대종 | 40 |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적인 명종들의 종소리를 모두 녹음해 일종의 ‘종소리 경연대회’를 연 일이 있다. 당시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는 단연 으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신종/불국사 범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970년대 유신시절에 불국사에는 에밀레종을 모방하여 반쯤 크기가 되는 꽤 큰 범종 하나가 새로 제작하여 걸었는데 이 종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한*그룹 조** 올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종은 항상 삐닥하게 걸려 있어 마치 6시 5분을 가리키는 시계방향과 같았다고 한다. 이 종소리가 고르게 퍼져 나가지 못하고 항시 웅웅거리자 불국사의 월산스님이 경주박물관에 왜 그런지 조사를 의뢰하였다고 한다.
에밀레종은 어디를 측정하더라도 두께가 위쪽은 10Cm이고, 아래쪽은 22Cm인데, 이 종은 같은 면이라고 하더라도 어디는 10Cm, 어디는 5Cm로 균일하지 못하고 기포도 엄청 많이 들어가 어느 곳은 하늘이 보일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러니 삐딱하게 걸릴 수밖에......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가서 보니 그 명문은 깎이어 없어졌더란다.
신라대종 주조위원회 발대식[2014/03/31 연합뉴스]
경주시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모델로 한 '신라대종'을 만들기로 하고 31일 신라대종 주조위원회 발대식을 열었다.
시는 한국 대표 종인 신라대종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주조에 관심이 많은 각계 인사 및 학계 전문가 50명으로 주조위원회를 구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1992년 제야의 종 타종 이후 1996년 학술조사와 2002·2003년 개천절 타종행사를 마지막으로 종 보존을 위해 타종이 중단됐다.
이에 경주시는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재현하기 되어 신라대종을 만들기로 했다.
15억 원을 들여 내년 연말까지 신라대종을 주조할 계획이다.
옛 시청 부지인 역사도시문화관 건립부지 내 170㎡에 종각을 설치하고 신라대종을 봉헌할 예정이다. 또 주변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설치해 신라대종 테마파크를 조성한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종의 형식을 빠짐없이 갖춘 우리나라 최대의 종이다.
삼국통일 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실현하고 사회 전반의 전성기를 이룬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할 목적으로 제작됐다.
최양식 경주시장은 "신라왕궁 복원 원년의 해를 맞아 국민화합과 새로운 천년의 도약을 기원하기 위해 시민의 염원을 담아 신라대종을 성공적으로 제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