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의 조건 - 레이블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
클래식 음악을 즐기기 시작하여 음반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에게 명반의 기준은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그것은 연령충이나 혹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음악에서 추구하는 미의 철학이 바뀌기 떄문이다. 따라서 클래식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명반이란 어떤것인가?라는 물음을 하게되고 그해답을 찾아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나 굳이 선정 한다면 명연주가 많은 레이블의 선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작사에도 메이저들이 있듯이 음반사에도 '5대 메이저'가 있다
최근 폴리그램을 인수한 유니버설 음반사를 위시하여 영국에 본사를 둔
EMI, 과거 RCA 레이블을 인수한 BMG, 과거 CBS레코드사를 인수한 소니뮤직, 그리고 '텔덱'에라토' '넌서치' 등의 만만찮은 레이블을 거느리고 있는 워너뮤직등이 바로 그'5대 메이저 음반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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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록 -
1.메이저 레이블
1)UMG(유니버설 뮤직 그룹)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 Grammophone)
*필립스(Philips)
*데카(Decca)
2)EMI
3)BMG
4)소니 뮤직(Sony Classical)
5)워너 뮤직(Warner Classics)
*에라토
*텔덱
*논서치
2.마이너 레이블
1)고음악 전문 레이블
*프랑스-아르모니아 문디
*영국-하이페리온
*벨기에-악상
*독일-크리스토포루스
*이탈리아-탁투스,오푸스111
*스페인-칸투스
2)현대음악 전문 레이블
*독일-ECM,베르고,CPO
*프랑스-디스크 몽타뉴,콜린스
3)복각 전문 레이블
*펄,님버스,뮤직 앤 아트,AS 디스크,프라이저,비덜프,APR,헌트,아카디아
*디스코프,단테,테오라마,멜로드람
*영국-테스타먼트
*이탈리아-포니트 체트라,그라모포노2000,아를레키노,타라
*미국-브리지
4)오디오 파일용 음반 전문 레이블
*준메이저급-텔락
*일본-데논
*스웨덴-프로프리우스
*미국-도리안,오디오폰,클라비어,델로스,레퍼런스 레코딩,셰필드 랩,오
디오폰,린,윌슨 오디오 파일
*독일-토로폰
5)그외의 마이너 레이블
*영국-샨도스(준메이저)
*독일-오르페오
*오스트리아-코흐
*낙소스,베를린 클래식,아르스 비벤디
*체코-수프라폰
*헝가리-흥가로톤
*핀란드-온딘
*덴마크-다니카
*네델란드-채널 클래식,에체트라
*스웨덴-BIS
*이탈리아-다이나믹,서미트
*스위스-마르코폰
*뱅가드,칼리오페,MDG
- 국내 주요 마이너 레이블 수입사 -
<신나라>
아르모니아 문디,샨도스,낙소스,오르페오,피에르 베라니,뱅가드,린,아를레키노,킹,프라이저,마르코 폴로,베르고,콜레뇨,VAI,APR비울러,칼리오페,오코라,엠데게,킹,알리아 복스,텔락,하이페리온,오푸스111,텔락,칸투스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451 TEL-(02-512-5011)
-C & L뮤직-
악상, 크리스토포러스,리체르카르,채널,K.617,테스터먼트,아이코네,Vox,메모리아,오디오폰,체스키,클라비어,무직클랑,델로스,마르코폰,PAN,다이나믹,지그눔,아코드,ADDA,안비투스,CPO,뮤지디스크,토로폰,ASV,바이에르,칼리히,클라베스,ebs,갈로,Koch,핸슬러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474-3 효원빌딩 3층 TEL(02)522-1886
<명음레코드>
님버스, 펄, 뮤직&아트, 수프라폰, 콜린스
서울특별시 중랑구 중화2동 210-17 대주빌딩 6층 TEL(02)208-5333
<굿 인터네셔널>
포노 엔터프라이저, 포니트 체트라, 아르츠, 서미트, 브리지, 탁투스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226 TEL(02)921-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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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UMG (유니버설 뮤직그룹)
1972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필립스사가 뭉쳐서 폴리그램이란 회사를 만들었다.
이후 1980년에 이들은 데카 음반사까지 끌어들여, 3개의 메이저 레이블이 모여있는 초유의 공룡 음반사를 구축했다.
3개의 메이저 레이블은 자체 카탈로그 외에도 <아르히프> <와조 리르> <머큐리>와 같은 각종 서브 레이블을 거느리고 있어 그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1998년, 폴리그램이 캐나다의 시그램에 팔리는 바람에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유니버설 뮤직은 폴리그램 클래식의 주축을 이루는 3개의 메이저 레이블 DG, 필립스, 데카를 거느린데다, 과거 웨스트민스터 레이블의 녹음들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적어도 클래식 음반에 관한 한 유니버설 뮤직을 당할만한 규모의 음반사는 없게 되었다.
설립 : EMI와 함께 클래식 음반 레이블의 왕위를 다투는 DG는 1898년 12월 6일, 그 유명한 베를리너 축음기의 발명가인 에밀 베를리너와 그의 동생들이 독일 하노버에 유한회사 형태로 설립한 회사다.
1897년:런던에 파견된 오웬이 세실 호텔에 임시로 그라모폰 영국 지사를 설립했고, 곧 이어 하노버 공장을 건립했다.
1898년: 12월에 정식으로 도이치 그라모폰 유한회사(DeutscheGrammophon Gesellschaft mbH)를 등록한 것이며, 이 시점이 곧 DG의 시작이다.
1918년:전쟁이 끝나고 DG는 HMV 레이블을 포기해야 했고, 독일 국외에서 만든 녹음을 음반화해서 수출할 수도 없었다. 패전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DG의 자체적인 레퍼토리 개발이 시작되지만 다른 음반사에 비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1924년: 폴리도르로 변경 1
1937년: 도산으로 인해 다시 지멘스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살아남았으나, 급기야 2차 대전 중엔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까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 DG에 남은 것은 푸르트벵글러나 에리히 클라이버같은 독일계 연주자의 녹음 몇 종 뿐이었다. 적어도 1950년 이전의 DG는 마이너 레이블이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여건에서 EMI, CBS, RCA같은 메이저와 경쟁할 수 없었다.
1947년: DG는 고음악 전문 레이블인 <아르히프>를 발족시켜 메이저들의 빈틈을 먹어갔다. 이후 <아르히프>는 리히터, 피노크, 가디너 등의 명연주자들을 보유하면서 고음악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1949년:아르히프는 은색, DG는 노란색 바탕에 23송이의 튤립이 그려진 문양으로 차별화했다. 이 때부터 DG는 본격적으로 아티스트들을 영입하기 시작한다.
1951년:하노버 공장이 재건되어 다시 LP 생산에 들어고, '게르만 음악의 전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전범 시비 끝에 복귀했다.
1959년: DG는 2년 전 베를린 필 지휘자로 선출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독점 계약을 채결했다. 이 사건은 DG의 가장 큰 분수령이자 레코드 산업의 분수령이었다. 카라얀은 레코드가 비즈니스의 영역임을, 그것도 가장 가능성있는 산업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탁월한 홍보, 마케팅 전략으로 인해 음악의 문외한도 카라얀이란 이름은 알 수 있었다. 일반인들이 음반을 구입한다면 카라얀의 음반이었고 그것은 곧 DG의 음반이었다.
1962년:DG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위해 <필립스>와 50:50으로 주식분배함
1964년: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페렌크 프리차이를 비롯하여 오이겐 요훔, 빌헬름 켐프, 이고르 마르케비치, 카를 뵘 등이 DG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1972년: 이를 토대로 <폴리그램>을 출범시켰다. 이 사건 역시 레코드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1981년: 영국의 <데카> 레이블까지 <폴리그램> 산하에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폴리그램>이란 제국은 곧 클래식의 제국이 되었다. 카라얀이 주는 지나친 상업성은 카를 뵘이란 카드로 달랠 수 있었다.
DG의 명 아티스트 레코딩-
지휘자: 말년의 번스타인을 비롯하여 아바도, 시노폴리, 오자와
피아노: 미켈란젤리, 아르헤리치, 길렐스, 치머만, 폴리니, 말년의 호로 비츠, 기인 포고렐리치
첼로: 피에르 푸르니에,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린: 기돈 크레머, 이차크 펄먼, 핀커스 주커먼, 슐로모 민츠
성악: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플라시도 도밍고 .
현재:한국의 정명훈을 비롯하여 미하일 플레트뇨프, 길 샤함, 안네 소피 무터, 브라인 터펠, 안네 소피 폰 오터, 매트 하이모비츠 같은 신진, 중견 연주자들이 즐비하게 있다.
90년대에 들어서도 87개의 CD로 이루어진 베토벤 에디션을 발매하고, 100개의 CD로 이루어진 오리지널스 시리즈를 완결하는 등 기세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DG의 미래에도 변수가 없다고 할 순 없다. DG가 속한 <폴리그램> 그룹이 98년말, 캐나다의 <시그램>에 팔려 99년부턴 <유니버설> 산하로 들어간 것이다.
1950년 이후에 생겨난 음반사로는 유일하게 메이저 레이블로 급부상한 레이블이다.
필립스가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한 이유는 그들의 정책과 기획력이나, 이미지 프로모션, 마케팅 등이 골고루 작용했다. 사실 필립스의 마케팅은 계속 대서특필의 대상이 되었다.
1956년- 58년:클라라 하스킬과 아르투르 그뤼미오라는 불세출의 명콤비를 동원하여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녹음했다. 이 녹음은 현재에 와서도 최고의 해석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1958년: 펠리스 아요의 바이올린 독주와 이 무지치의 합주로 엮어진 비발디 '사계'를 녹음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 음반은 유럽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베스트 셀러로 이름높았고, 그 위세는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61년: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흐테르 콤비에 의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집을 녹음했고, 그 후 '리빙 프레즌스 시리즈'라는 놀라운 음질을 들려주던 <머큐리>를 합병하여 또 한번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해엔 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을 동원해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했다.
그러나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필립스의 레퍼토리는 다른 메이저 음반사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질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필립스는 DG와 50:50으로 주식을 나누었다.
이 결정은 고도의 마케팅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필립스의 몸통은 하드웨어였으며, 소프트웨어로 진출한 것 역시 하드웨어와의 연계를 위한 것이었다. DG 역시 당시까지는 여타 메이저 음반사의 레퍼토리에 비해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가 사돈 관계를 맺고나면서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독자적으로 경영하면서 서로 아티스트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DG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바이올리니스트를 찾지 못한 적 있다. 그 때 필립스가 전속 계약을 맺은 헨릭 셰링을 빌어와 녹음할 수 있었다. 필립스 역시 요훔 등의 아티스트들을 같은 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1964년: 필립스의 하드웨어 팀이 휴대용 녹음기를 세계 최초로 내놓았다. 기존 릴 테이프의 1/8정도 폭을 가진 테이프를 플라스틱 카트리지에 감은 이 실용적인 녹음기는 자동차에 탑재되면서 더욱 대중적인 기기가 되었다.
게다가 필립스 측은 카세트의 노하우를 과감하게 공개하여 모든 전자업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소니가 세계 최초로 베타 방식의 VCR을 개발했지만 독점에 집착하다가 결국 VHS에게 시장을 내준 것과 비교되는, 현명하고도 대국적인 결정이었다. 이러한 하드웨어의 우수성과 좋은 기업 이미지는 그대로 소프트웨어에도 적용되었다.
또한 데카에서 스카웃해온 프로듀서 에릭 스미스가 막강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명지휘자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의 아들인 에릭은 콜린 데이비스를 위시한 명장들에게 속속 필립스 레이블의 인장을 받아냈다.
필립스의 명 아티스트 레코딩-
지휘: 프란스 브뤼헨, 콜린 데이비스, 안탈 도라티, 존 엘리엇 가디너, 네빌 매리너,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세이지 오자와
바이올린: 빅토리아 뮬로바,
첼로: 하인리히 쉬프, 줄리언 로이드 웨버
피아노: 클라우디오 아라우, 알프레드 브렌델, 미츠코 우치다, 바이런 재니스, 졸탄 코치슈, 라베크 자매
소프라노: 제시 노먼
테너: 프란시스코 아라이자
오보에: 하인츠 홀리거
혼의 헤르만 바우만, 기타의 페페 로메로, 이 무지치 합주단, 과르네리 4중주단, 보자르 트리오... 열거하기에만도 숨찬 명인들이 필립스에 모여들었다.
1981년 4월 15일, 잘츠부르크에서 처음으로 CD라는 은빛 매체를 선보였을 때, 그 주동자는 필립스와 소니였다.
90년대 필립스 아티스트-
90년대 들어선 DCC라는 신매체를 만들어 소니의 MD와 싸움을 벌인 바 있다. 이러한 하드웨어의 끊임없는 혁신과 함께 소프트웨어에서도 새로운 연주자들이 속속 영입되었다.
지휘자 :세미온 비슈코프, 발레리 게르기예프,
바이올린:레일라 조세포비치,
소프라노: 실비아 맥네어, 갈리나 고르차코바,
메조 소프라노: 올가 보로디나,
맹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바리톤 볼프강 홀츠마이어, 드미트리 호보로스토프스키 같은 이들이 모두 90년대 들어 새로 필립스에 가세한 아티스트들이다. 소니나 BMG가 아티스트들을 잃어가는 데 비해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서브 레이블-
머큐리 ,
포인트 뮤직-진보적인 현대음악을 다룸
기멜-탈리스 스콜라스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음악의 선도
이매지너리 로드- 크로스오버나 뉴에이지 음악을 다룸
힛트작: DUO 시리즈라는 저가 시리즈로 <낙소스> 등의 저가 레이블 공세에 맞서 내놓은 이 시리즈물은 세계적으로 600만장 이상 팔려 저가 음반 시장을 휩쓸어버렸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필립스의 모습은 여전히 믿음직 스럽다.
3) 데카
레코드의 역사는 곧 연주자의 역사이다. 그러나 레코드사를 보다 깊숙히 들여다보면 연주자들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명프로듀서의 몫이었다. 다른 메이저사에 비해 늦깍이로 출발한 데카가 메이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로젠가르텐과 컬쇼라는 걸출한 프로듀서가 있었다.
설립:1914년 영국 런던의 악기 제작회사를 운영하던 베넷 사무엘 부자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이 처음 만든 휴대용 축음기 '데카 덜시폰'의 상호에 사용된 이름이다. 그러나 초기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다.
1929년: 증권중계업자인 에드워드 루이스가 이 회사를 장악하고부터 데카의 변신이 이루어졌다.
경영을 떠맡은 루이스는 이름을 <데카 그라모폰 컴퍼니>로 바꾸고 군소 레코드사 몇 개를 합병시킨 후 획기적인 염가반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1932년: 독일 폴리돌 레이블의 클래식 판권을 인수했고 이어 워너 부라더스가 갖고 있던 <브랜스윅> 레이블을 흡수하고, 동시에 빙 크로스비의 음반을 히트시키면서 메이저로 급부상해버렸다.
1937년: <렉스> <보칼리안> <파나코드> 등의 레이블과 웨스트 햄스테드의 연합녹음 스투디오를 인수했다.
1945년:데카는영국 해군이 독일 잠수함의 엔진 소리를 듣기 위해 개발한 시스템을 이용하여 ffrr이라는 고음질의 기계를 내놓았다. 그 때까지 7,8천 Hz이상은 불가능하던 주파수 범위를 단번에 1만 2천Hz 이상으로 확대시켰고, 그 결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질의 레코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이 피델리티'라는 음향의 혁신이었다.
1747년:음질의 우위에 힘입어 <런던>이라는 레이블로 미국에 진출했다. 마치 EMI를 엔젤이라 부르는 것처럼 아직도 미국에선 데카라고 부르지 않고 <런던>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950년:유럽에서 처음으로 LP를 택했다. 테카의 혜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바로 그 시점부터 데카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전성기는 루이스가 영입한 스위스의 음반업자 모리스 로젠가르텐에서 비롯되었다.
로젠가르텐은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는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세계 일류의 지휘자, 연주단체로 키워냈다. 빈필로 하여금 데카와 계약을 맺도록 한 것도 로젠가르텐의 공로였다. 그 결과로 태어난 음반이 페리어-발터의 <대지의 노래> 또는 델라 카사-클라이버의 <피가로의 결혼>같은 명반이었다. 이 외에 박하우스-크라우스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브리튼이 직접 지휘를 맡은 <피터 그라임스>, 그리고 EMI의 칼라스 공세에 맞서 테발디로 정면 돌파해보려한 일련의 오페라물들이 모두 로젠가르텐의 작업이었다.
무명의 피아노 주자이던 게오르그 솔티를 끌어낸 사람 역시 로젠가르텐이었다.
1958년에 시작하여 1964년에 끝난 바그너의 '반지 사이클' 은 최초의 스튜디오 전곡 녹음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솔티의 이름과 함께 컬쇼의 이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로젠가르텐과 컬쇼가 가장 주력한 분야는 오페라였다. 링 사이클 이 외에도 테발디와 델 모나코를 기용한 <오텔로>같은 명연이 있었고,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이나 바르토크의 <푸른 수염 공작의 성> 같은 다양한 오페라 음반이 데카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테발디나 델 모나코 외에도 리자 델라 카사, 캐슬린 패리어,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수잔 당코, 이르마 콜라시, 자닌 미쇼, 마도 로빈, 줄리어스 파차크, 힐데 귀덴, 류바 벨리치, 잉게 보르크, 줄리에타 시묘나토,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같은 위대한 성악가들이 데카에 녹음을 남겼고 이 분위기는 서덜랜드-파바로티로 계속 이어져 데카를 오페라 왕국으로 자리매김해주었다.
1957년: <아르고>레이블을 인수
1958년부터 스테레오 레코딩을 내놓았다. 또한 메이저 레이블로는 데카가 처음으로 디지털 녹음을 채용했다. 보스코프스키가 지휘한 1979년 신년음악회 실황음반이 그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1년, 데카는 이미 필립스와 DG가 모여있던 폴리그램 산하로 들어가 더욱 위세등등해졌다.
현재의 데카에는 샤를르 뒤투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라두 루푸,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노장에서부터 올리 머스토넨, 피터 야블론스키, 체칠리아 바르톨리에 이르는 연주자들이 고루 포진되어 있으며, 정경화가 빠져 나간 한국인의 자리를 다니엘 리가 새로이 가세하여 메워가고 있다
[2] EMI (Electric Musical Industries Ltd)
-1997년 EMI가 100주년 기념하여 꼽아 본 명연주자 리스트-
1900년대 : 엔리코 카루소, 아델리나 패티, 넬리 멜바, 프란세스코 타마뇨, 요제프 요아힘, 파블로 데 사라사테, 티타 루포, 엠마 칼베, 폴 플라송, 주세페 데 루카...
1910년대 : 페오도르 샬리아핀, 루이자 테트라치니,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얀 쿠벨릭, 마티아 바티스티니, 에미 데스틴, 티토 스키파, 아르투르 니키슈, 요제프 시게티, 엘레나 게르하르트.
1920년대 : 알프레드 코르토, 안드레스 세고비아,리하르트 타우버, 존 맥코맥, 빌헬름 박하우스, 조르주 틸, 로테 레만, 라우리츠 멜히오르, 에바 터너, 클라라 버트...
1930년대 : 베냐미노 질리, 아르투르 슈나벨, 파블로 카잘스, 에드워드 엘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부슈 4중주단, 완다 란도프스카, 콘치타 수페르비아...
1940년대 : 프리츠 크라이슬러, 디누 리파티, 유시 비욜링, 에트빈 피셔, 지네트 느뵈, 리바 웰티쉬, 귀도 칸텔리, 매기 테이트, 벤노 모이세비치, 마이라 헤스...
1950년대 : 마리아 칼라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예후디 메뉴인, 토마스 비첨,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데니스 브레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 티토 곱비, 솔로몬, 발터 기제킹...
1960년대 :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니콜라이 겟다,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오토 클렘페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존 바비롤리, 보리스 크리스토프, 존 옥던.
1970년대 : 이차크 펄만, 플라시도 도밍고, 다니엘 바렌보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자클린느 뒤 프레, 안넬리제 로텐베르거, 자네트 베이커, 폴 토르틀리에, 아드리안 보울트, 데이비드 먼로...
1980년대 : 앙드레 프레빈, 리카르도 무티, 로저 노링턴, 클라우스 텐슈테트, 알반 베르크 4중주단, 모리스 앙드레, 네빌 매리너, 호세 카레라스, 안네-소피 무터, 빌리 보스코프스키...
1990년대 : 사이먼 래틀, 나이젤 케네디, 마리스 얀손스, 볼프강 자발리쉬, 바바라 헨드릭스, 스티븐 코바세비치, 토마스 햄프슨, 로베르토 알라냐, 자비네 마이어, 프랑크 페터 침머만...
적어도 1960년대 이전의 명연주자치고 EMI에 발을 디뎌보지 않은 연주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된다. 물론 초기 레코딩 시절엔 레이블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고, 따라서 카루소, 토스카니니, 발터 같은 경우엔 다른 레이블에 더 좋은 음반이 남아 있으며, 카라얀의 경우, 후반부의 작업은 DG와 이루어냈으며, 내빌 매리너 같은 연주자도 필립스에 더 많은 음반을 남겼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만한 아티스트 목록을 선보일 수 있는 레이블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설립: EMI는 원반형 유성기의 창시자인 에밀 베를리너가 윌리엄 오웬을 런던에 파견하여 영국 그라모폰사를 설립한 1897년 7월을 자신의 탄생일로 잡고 있다. 깃털 펜을 들고 있는 엔젤을 로고로 한 그라모폰사는 1939년까지 EMI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의 진두 지휘에 힘입어 수많은 당대 명인들을 마이크 앞에 서게 만들었다.
1931년: EMI 명칭 사용
당시 영국은 대공황의 여파를 줄이고 파산을 피하기 위해 영국 그라모폰사와 영국 컬럼비아사를 합해 EMI를 만들었다. 영국 그라모폰사의 레이블인 HMV와 영국 컬럼비아의 컬럼비아 상표는 이후에도 EMI-HMV, EMI-Columbia 하는 식으로 한동안 같이 사용되었다. 이 해 11월에 그 유명한 애비 로드 스튜디오가 런던에 건립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클래식 뿐 아니라 비틀스의 녹음으로도 유명하다.
2차 대전 당시, EMI의 활동은 대폭 축소되었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따라서 이 시기엔 CBS나 RCA같은 미국의 레이블들이 호황을 이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EMI의 레코딩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커크넬은 로마에서 베냐미노 질리,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티토 곱비 등을 녹음해왔고, 월터 레그는 빈으로 가서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에리히 쿤츠, 카라얀 등과 작업을 시작했다.
가이스버그 이후 최고의 프로듀서로 꼽히던 레그는 이 외에도 무명 시절의 슈나벨을 스카웃해서 역사상 최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녹음했고, 최초의 레코딩 전문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아를 창설해서 오토 클렘페러를 비롯한 무수한 연주자들의 명반을 남겼고, 자신이 키워낸 슈바르츠코프와는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 콧대높던 칼라스 조차도 레그 앞에선 고분고분했으며 카라얀의 경우엔 레그의 통제를 받던 당시에 가장 좋은 음반을 남겼다. 레그의 활동은 1964년까지 이어졌고, 거의 그 시점까지가 EMI의 전성기였다.
1952년: 11월에 미국 컬럼비아사인 CBS가 완전히 독립했다.
1957년: 3월엔 RCA가 독립했다. 이 말은 곧 더 이상 EMI의 레퍼토리들이 컬럼비아나 RCA의 이름을 달고 발매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EMI는 초기 영국 컬럼비아 시절의 엔젤 레이블을 부활시켜 자신의 로고로 삼았으며, 이러한 경과로 인해 아직도 미국에선 EMI를 엔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0년: EMI의 위기.
포만감으로 인해 많은 연주자들을 DG, 필립스 등에 빼앗기고 만다.
1980년: 비행기 제작사인 Thorn과 결합하여 Thorn-EMI로 재발족했으나 모기업인 Thorn의 방치로 인해 더욱 침체되었다. EMI가 제 정신을 차린 것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카라얀으로 위세를 드높이던 DG가 카라얀의 죽음으로 당황해하던 시점과 맥을 같이 한다.
1992년: 혜성처럼 등장하여 성장해나가던 버진 클래식 (VIRGIN CLASSICS)을 흡수해버렸다. 놀라운 가격으로 대서양 횡단 항로에 취입해 돌풍을 일으켰던 버진 항공이 소유주인 버진 클래식은 1988년 혜성처럼 등장한 레이블이다. 신진 연주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왔으며 미하일 플레트뇨프나 주카 페카 사라스테 같은 일류 연주자들의 음반이 카탈로그에 즐비하다.
이에 더해 EMI는 나이젤 케네디나 바네사 메이같은 이단적(?)인 아티스트들을 키우는 한편 사이먼 래틀, 마리스 얀손스, 토마스 햄프슨, 사라 장, 로베르토 알라냐같은 보물들을 계속 나꿔채며 현재에 이르렀다.
참고로 한국에 있어서 EMI 레이블은 한동안 열세를 면치 못했다. DG나 필립스, 데카가 성음이란 라이센스 업체로 인해 꾸준히 사랑받아 온 데 비해, EMI는 초기에 오아시스라는 최악의 한국 라이센스 업체를 만났다. 이 업체의 조악한 음질과 산만한 관리로 말미암아 한국에서 EMI라는 레이블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EMI의 음반들이 제대로 소개된 것은 80년대 후반, EMI 직배사가 상륙해서부터의 일이다.
[3] BMG
1901년:베를리너의 유성기에다 정속회전의 스프링모터를 탑재,사운드 박스 구조 개량,커팅용 왁스 실험등으로 에디슨 유성기를 앞서게 해준 엘드리지 존슨이 베를리너와의 결별 후"빅터 토킹머신"이라는 회사를 발족시켰다. 비록 싸움은 잦았지만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사와 존슨의 빅터 토킹머신의재휴는 그라모폰사 소프트웨어,빅터는 하드웨어로 1950년까지 지속되었다.
1907년:한국에서 일본 빅터의 서울지사 설립
1928년:1925년세계최초 전기 녹음방식의 레코드를 발매한 빅터 토킹머신사가 RCA에 흡수된다. RCA 빅터의 전성기로 스토코프스키,뮌시,몽퇴 쿠세비츠키,라이너,루빈슈타인,란도프스카,크라이슬러, 카루소,토스카니니,하이페츠등의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1948년:제1,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연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어 컬럼비아 ,RCA가 양쪽에서 대립하다가 1948년 컬럼비아가 최초로 LP를 개발을계기로 1987년 서독의 BMG그룹으로 넘어가게된다.
출판사로 시작한 막강한 미디어 재벌의 BMG가 RCA를 인수하면서 지휘의레너드 슬래트킨,앙드레 프레빈,유리 테미르카노프,콜린 데이비스 첼로의 나탈리아 굳맨,비올라의 유리바슈메트, 피아노의 에프게니 키신, 리코더의 미캘라 패트리등을 불러 들였다.
(서브 레이블)
*도이치 아르모니아 문디 - 레온하르트,안너 빌스마,쿠이겐 형제등의 네덜란드 고음악 전문 연주자 밀집
*코니퍼 -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 음악 시리즈
*밀란 - 재즈,영화음악
*아르테 노바 - 중저가 음반
*카탈리스트 - 현대 음악
현재:정상에서 후퇴한 하여 이렇다 할 명반이 그다지 많지만 BMG가 갖고 있는 자금력이 그미래를 주시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 될 것이다.
1894년:노스 아메리칸 포노그라프가 파산 하면서 워싱턴 지역 자회사인 컬럼비아 포노그래프가 컬럼비아 그라모폰사로 이름을 바꿔 독자적인 영업을 시작 하였다.
1938년:컬럼비아가 CBS 방송국에 흡수되어 도약의 계기가 된다.
1950~1960년대:LP라는 신 매체에 힘입어 브루너 발터 지휘 나탄 밀스타인의 바이올린연주인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컬럼비아 사에 의해 첫 LP로 등록 되었다.
그 밖의 조지 셀의 클리블랜드 사운드,유진 오먼디의 필라델피아 사운드,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화,프란체스카티의 파가니니 협주곡,호로비츠의 역사적 귀환,카잘스의 백악관 실황,카잘스의 말보로 페스티벌 시리즈,루돌프 제르킨의 고고한 피아니즘,부더페스트 4중주단의 베토벤 4중주 전집,번스타인등의 '마스터웍 시리즈'로 발매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1970년대:1977년 약 40년간 컬럼비아 클래식을 책임져 온 고다르 리버슨이 사망하면서 점차 내리막길로 접어 들게된다.
로린 마젤,핀커스 주커만,요요 마,엠마누엘 액스,머레이 페라이어와 같은 연주자를 새로 불러들였지만 이전 시대와 같은 위치로 돌아가긴 역부족이였다.
1987년:일본 소니는 CBS사를 인수하여 '소니 클래시컬'을 발족시키고 카라얀,아바도,레바인,폴리니,도밍고등을 담당해서 녹음해온 도이치 그라모폰의 수석 프로듀서인 귄터 브레스트를 영입했다.그후로 카를로스 클라이버,줄리니를 끌여 들였고 또 한명의 프로듀서 볼프 에리히슨 고음악에 열악한 CBS카달로그 보안을 위해 '비바르테'라는 고음악 전문레이블을 창설설, 안너 빌스마 잔느 라몽,브루노 바일,아르키부델리,후엘가스 앙상블과 같은 고음악의 명인 명 연주자들을 끌여들였다. 그러나 브레스트가 쏟아붓는 돈에 비해 수익이 별로 없게되자 90년대 중반에 브레스트를 해고 하였다.
그러나 그후로 진지한 녹음의 수는 급격히 감소 했고 과거 명연주자 시리즈에 의존,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과 같은 돈이 되는 것외엔 투자를 꺼린 결과 과거 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에 되었다. 그 부정적인 시각을 보정하는 길은 단기적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보다 좋은 음반을 만들어내는 정통적인 방법 뿐이다.
워너 뮤직은 '텔덱' '에라토' '넌서치'라는 3개의 레이블이 마치 권력에서의 3권 분립처럼 골고루 힘을 발휘하는 레이블이다.
*에라토
1952년 필립 룰리와 미셀 가르생이 발족 하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반사로 성장 였다.
계약 연주자들
프랑스 바로크음악 녹음을 위해 프랑수아 피야르,마리 클래르(바흐 오르간 음악 전집),캉프라의 레퀴엠등의 묻혀있던 르네상스-바로크 음악들을 계속적으로 발굴, 미셀 코르보(지휘),톤 코프만(쳄발로),모리스 앙드레(트럼펫), 장 피에르 랑팔(풀룻),'이 솔리스트 베네티,존 엘리어트 가디너등의 거장들이 녹음하였다.
90년대 이후 에라토는 이전의 르네상스-바로크음악의 편식을 버리고 근 현대 영역까지 레파토리를 확장했다. 한국의 소프라노 조수미가 계속적으로 음반을 내 놓고 있는 레이블 역시 에라토다.
*텔덱
1929년에 설립된 울트라폰을 인수한 텔레푼켄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음반사 최초로 라이브 레코딩을 성공 시켰다. 그당시 연주자로 한스 크나퍼츠부슈,요제프 카일베르크,빌헤름 푸르트 벵글러등이 녹음 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텔레푼켄'을'텔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에도 텔덱은 DMM(Direct Metal Mastering)과 같은 신기술을 선보이는 등 기술력의 최 일선에 있었다.
과거 텔레풍켄 시대의 유산인 '히스토리 시리즈'와'Das Alte Werk 시리즈'등으로 뼈대를 형성하는 한편 근래에 들어선 CD 60매로 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바흐 칸타타 전집,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내놓았고, 막심 벤게로프와 같은 신에 연주자의 발굴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현재 텔덱은 야심찬 바흐 전곡 녹음을 진행중이다.
*논서치
1964년에 생긴 이 레이블은 현대음악 분야의 최일선에 서있다. 크로노스 4중주단이라는 불세출의 현대음악 전문 4중주단을 비롯하여 스티브 라이히와 같은 미니멀리스트, 그리그 교향곡 제3번(슬픔의 노래)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폴란드의 현대 작곡가 헨릭 쿠레츠키 등이 모두 이 레이블에 포진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넌서치는 "현대 음악은 장사기 안된다"는 음반계의 속설을 뒤집어 놓았다.
무엇보다 간과하기 쉬운 논서치의 매력은 '월드 뮤직 시리즈'이다. 이미 20여개국의 탁월한 민속음악들을 선보였으며 그 중에는 한국의 김소희가 부른 절창도 포함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