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일심' '화쟁'으로 불교대중화부처님 가르침 현실서 구현거리에서 민초들과 어울려 한국불교의 새벽을 열은 원효(元曉,617~686)스님.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대업 성취를 위해 격렬한 대립과 전쟁으로 낮밤을 지새우던 시기에 태어났다. 40세 즈음에 백제가 멸망하고, 50세 무렵에는 고구려가 멸망했다. 당나라와 손을 잡은 신라가 통일을 이루었지만, 진정한 통합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원효스님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의 가르침으로 ‘통일신라’ 완성을 위해 정진했다. 원적에 든지 1400년이란 세월이 무상하게 흘러갔지만 원효스님이 남긴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편집자>고려 시대 일연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편은 ‘성사원효(聖師元曉)’로 시작한다. 성사, 즉 ‘성스러운 스승’ 또는 ‘성스러운 스님’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은 것이 충렬왕 7년(1281년) 경이다. 원효스님이 세상을 떠난지 무려 6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후인들이 여전히 높이 받들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이보다 앞서 12세기에는 고려 숙종이 원효스님을 기리며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우도록 했으며,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원효스님은 생전에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낮추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높이며 존경했다. 비록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등의 지위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중에게는 그 어떤 스님 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일본 고잔지(고산사)에 소장되어 있는 원효대사 진영. 무로마치 시대(1336~15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부처님 가르침을 현실세계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원효스님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백성의 눈높이에 맞춰 ‘무애가’를 유행시켰다. 어느날 마을에서 한 광대가 커다란 표주박을 갖고 춤추며 노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은 스님은 불교 진리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안타깝게도 가사 내용이 온전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화엄경>의 가르침을 담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글을 모르는 이들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즉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를 염송하도록 권했다고 전한다.원효스님의 사상은 바다처럼 넓고 수미산처럼 크다. 학자마다 견해는 다르지만 스님이 남긴 저서(주석서 포함)는 100여종 240여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는 물론 입적 14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은 중국 스님들도 ‘해동소(海東疏)’라며 자주 인용할 정도이다. 명성이 한반도를 넘어 중국까지 전해졌던 것이다.방대한 스님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원효사상의 핵심을 논할 때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을 꼽는다.일심이란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으며, 마음의 근원을 찾으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즉 마음의 근원이 일심(一心)이란 것이다. 일심의 자리에는 그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중생이 곧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마음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면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이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을 이뤘지만 전쟁의 후유증이 컸던 통일신라 시기에 중생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또한 원효스님은 화쟁(和諍)을 통해 진정한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각자의 이해에 따라 분열하고 대립하는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다툼이 발생하는 가장 큰 요인은 끊임없는 집착임을 직시하라는 뜻도 들어 있다.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일심과 화쟁사상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것이다. 스님에게 불교대중화는 단순한 포교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차별 없는 세상 그리고 누구나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바세계에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여 소통과 화합으로 진정한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극락세계가 내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잘 살펴 깨닫고, 진정한 통합을 이룬다면 바로 지금이 정토(淨土)임을 역설했던 것이다.원효스님의 가르침이 신라에서는 적극적으로 계승되지 못했지만 이후에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고려의 의천 대사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스님의 가르침이나 사상이 위대했기 때문이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원효스님의 위대성은 단순히 학승(學僧)이 아니라 행(行)으로 옮겼기 때문”이라면서 “스님의 행화(行化)가 대중에게 감동을 주었기에 원효스님의 가르침이나 사상이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 원효스님의 스승 낭지 혜공 보덕 스님 가르침 두루 섭렵해원효스님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각종 자료에 따르면 스님의 스승으로 언급된 이들은 대략 보덕(普德), 낭지(朗智), 혜공(惠空) 스님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특정한 스승 밑에서 오랜 기간 수행한 것으로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로운 성품도 영향을 끼쳤으며, 다양한 가르침을 섭렵했던 것으로 추정한다.낭지스님(생몰 연대 미상)은 신라후기 삽량주 아곡현(지금의 양산) 영취산에 은거하며 수행했다고 한다.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는데, 울산 반고사에서 원효스님에게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원효스님이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한 것도 낭지스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낭지스님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4년(527년)에 영취산에 입산해 문무왕 원년(661년)까지 135년간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661년에는 지통(智通)스님을 제자로 받았다고 한다.혜공스님은 달마대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승조(僧肇)대사의 후신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십성(十聖)으로 존경받았지만 술과 춤을 좋아한 기승(奇僧)이라 전한다. 삼태기를 등에 지고 저자를 돌아다녀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리기도 했다. 노년에 항사사(恒沙寺)에 주석했는데, 불교 경전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던 원효스님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오어사(吾魚寺) 창건 설화에 나오는 스님으로, 공중에 떠서 입적했다는 설화가 있다.보덕스님은 고구려 스님으로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도교(道敎)를 숭상하고 불교를 소외시키자 여러차례 진언 했지만 거절 당한 뒤 백제로 이주해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고대산에 경복사(景福寺)를 세워 수행했다. 이때가 650년이다. 열반종의 개조(開祖)이다. 경복사에서 <열반경> <유마경> <방등경> 등을 강론했는데, 이 때 원효스님은 의상스님과 같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 원효스님 살던 시대 어떤 일 있었나.고구려 백제 멸망, 신라 통일원효스님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영토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쟁투로 낮과 밤을 보냈다. 삼국 가운데 신라는 당나라와 연대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이 시기에는 유명한 스님들의 활동도 주목된다. 631년 담징스님, 638년 원광스님이 입적했고, 643년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스님이 대국통(大國統)이 됐다. 자장스님은 645년에 통도사를 창건했다.불교문화도 꽃을 피웠다. 622년에는 신라가 일본에 불상, 금탑, 사리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636년에는 황룡사에 백과좌도량이 개설됐다. 639년에는 백제가 (익산)미륵사를 창건했고, 신라는 645년에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원효스님이 살아있던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는 선덕여왕, 무왕, 의자왕, 연개소문, 보장왕, 계백, 김유신, 진평왕, 김춘추(무열왕), 진덕여왕, 성충, 문무왕 등이 있다.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