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金德齡: 1568-1596)은 광산인으로 자는 경수(景樹)요, 시호(죽은 뒤에 나라에서 내려준 호)는 충장(忠壯)인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어려서부터 말타기, 칼쓰기 등을 좋아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제봉(霽峯)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쳤는데 날쌔고 용맹함이 남달라 날개달린 호랑이 같은 장군 곧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호를 받았다. 아버지 붕변과 어머니 남평 반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성안마을(달리 성촌 또는 석저촌)에서 태어난 김덕령, 그는 모친 상을 당해서도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등 눈부신 활약으로 구국에 몸바쳤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종조부 환벽당의 주인 사촌 김윤제에게 배웠는데 그로부터 집안을 크게 번성시킬 아이로 주목받았다.
선조 임금으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이라는 군호(軍號)를 하사 받았을 정도로 구국에 여념이 없었던 김덕령, 그는 곽재우 장군과도 협력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옥에 갇히어 20일간 여섯 차례의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29세의 한창 나이를 일기로 몸 바쳤던 조국의 산하에 묻히고 말았다.
1661년 현종 때에 이르러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직되었으며 1788년 정조 때에 좌찬성의 벼슬이 내려졌다. 위의 시조는 ‘춘산곡’ 또는 ‘춘산화연지곡’ 등으로 불리우는데 광주 사직공원에 있는 시비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