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날의 범어사 앞 마당은 어제까지 비가 그렇게 쏟아졌다는 것을 가벼운 농담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대우형님의 선글라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조금 후에 일행들이 다 모였습니다. 고인의 이름이라 죄송합니다만 천안함 영웅 한주호 준위를 닮은 김영진형님(2기),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닮은 천성학형님(2기), 빙그레 이글스의 유승안 포수와 SK의 이호준을 반반 섞어 놓은 유석주후배(6기), 추노의 도망노비 배우 조희봉을 닮은 송상현후배(8기) 그리고 역사적인 산행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면티에 아무 거나 받쳐입은 게 역력한 양복 입은 기덕형님. 집 청소를 하기 위해 빨리 돌아가야 한답니다. 제가 기덕형님의 아내, 즉 형수님을 잘 아는데, 형수님은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하자면서 원샷 건배를 하다가 500CC 잔을 한큐에 박살 내버린 장전동 건배계의 전설이십니다. 당연 기덕이 형님이 살이 찌지 않는 것도 알겠고,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말에 섞인 가녀린 떨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행 제안을 한 대우형님과 함께 범어사 정문에서 고당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해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봄이 정말 화창한 일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15분쯤, 쉬었다 가자고 제안한 분이 바로 영진형님입니다. 영진형님은 페북의 플픽으로 보아서 잘 아시겠지만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만능 스포츠맨이신데, 유독 산과는 별로 친하지 않다고 합니다. 산은 바라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확한 기준을 갖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형님은 사직고 입학 하는 날, 동인고에 가서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신, 천성적으로 제도권 교육과는 맞지 않으신 분입니다. 남들에게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의료계에 근무하고 계시며 당신의 몸을 직접 임상에 이용, 무림의 숨은 의학자들, 일본 야매 의대 출신 교수들과 깊은 교류를 하고 계십니다. 일반인들이 입에만 하는 임플란트를 허리 아래도 장착하신 바 있으며, 우리나라 제철 사업과 관련, 볼과 베어링의 응용에도 적극적이십니다. 최근에는 중동 지역에 관심을 많이 보이셔서 낙타 눈썹의 열역학적 반응에 대한 임상도 준비 중이라고 하십니다. 존경합니다, 형님.
잠시 휴식의 뒤에 북문까지 바로 직행하였고 거기에서 우리는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무임승차한 저 때문에 젓가락이 모자랐으나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낙동강을 건넜다는 대우형님의 지도 하에 우리는 여섯 명이 젓가락 세 벌을 나누고도 오히려 젓가락이 남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영진 형님의 형수님과 대우형님, 성학형님이 준비한 도시락, 석주후배의 뽀또 비스켓을 나눠 먹으며 동문간의 정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저는 아침을 걸렀던 탓에 시장하여 마지막 남은 밥 한덩이를 입으로 가져갔는데 그 때 영진 형님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때만 해도 그것이 흐뭇하거나, 잔반을 먹어줘서 고맙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페북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밥 한 숟갈 때문에 동문 후배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 우리 동문들은 참 남다릅니다.
사십 중반이지만 산이 싫어, 나 내려갈래를 반복하는 영진형님을 달래가면서 산을 오르는 성학형님이 불쌍했지만 우짜겠습니까, 동긴데. 영진형님의 똥꼬에 손가락을 꽂다시피 하면서 산을 오르는 동기의 우애, 본받고 싶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산을 오르는 대우형님에 비해 두 분은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대우형님, 방울토마토, 그게 뭐라고. 한 시간의 산행 끝에 고당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황사가 심해서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나름 좋은 경치였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저 황사도 북한 소행일까요?
정상을 배경으로 같이 박고, 혼자 박고 난 다음 내려오니 북문에 종표형님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어제의 주인공이 효수형님 부인이라면 오늘의 주인공은 종표형님의 아내분이십니다. 역시 우리 동문 선후배님들은, 재주가 참 좋습니다. (여보, 이번엔 2기야, 2기. 어쨌건 내 선배라구) 화사한 미소가 뭇남자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너무 대놓고 침까지 흘린 석주후배, 네 얼굴로 보면 제수씨는 기본이 김태희일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그러지 마라.
참고로 2기 대우형님과 8기 상현후배는 아직 싱글입니다. 주위에 좋은 처자 있으면 소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사직 듀오, 내지는 사직 선우를 만들 생각입니다. 우성인자의 집단 내 교배를 통한 열성 인자 제거)
산을 내려와 회식 장소로 가는 길입니다. 성학형님의 말로는 10분만 가면 된다는데 지금 30분째 걷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영진형님은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앙탈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잔디 위가 아닌 아스팔트는 걸어서는 안 되는 거다, 역시 건설업계 종사자다운 멘트입니다. 활이 있었으면 쏘았을 거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도 아랑곳않고 성학형님은 무소의 뿔처럼 가던 길을 걷고 대우형님은 인증샷 촬영에 정신 없습니다. 스마트폰과 페북이 없었다면 대우형님은 무얼 하고 계실까요? 정말 인테그랄 리미트한 질문입니다.
고당봉만큼의 거리를 걸어 회식 장소 홍기와 집에 도착했습니다. 열 두명이 자리를 깔고 준비를 하니 방청소를 마친 기덕형님(뺨 주위가 조금 부은 것 같았습니다. 궤적으로 보아 주먹은 아닌 것 같고 빗자루나 뭐 이런 것 같습니다)과 권덕진형님(4기)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산악회 발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으나 영진형님과 석주후배의, 기수를 뛰어넘은 임플란트 사랑, 새로운 시술의 부작용 유무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갔습니다. 행사 진행에 맛들인 기덕형님은 돌아가면서 건배 제의와 축사, 박수로 좌중을 귀찮게 했으며 종표형님은 아무도 자기 아내에게 관심을 안 가져준다면서 삐진 나머지 혼자서 오리 불고기 세 접시, 막거리 삼병을 비우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대우형님은 그 와중에 또다시 인증샷 광촬영. 저는 가게에서 일하는 아가씨 번호 따려고 몸 접었다 펴는 신공도 발휘했습니다. 오후가 되어 정동수형님이 오셔서 산악회 발족 내용을 들으셨고 또한 다른 행사의 계획도 공유했습니다. (산악회 발족은 게시물을 따로 올리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자는 제안에 따라 영진형님이 1차를 계산하셨습니다. 30만원이 나왔는데 너무 작게 나왔다며 더 먹지 그랬냐는 형님의 구라,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 계산서 들고 덜덜 떨던 그 손은 무엇인지요? 정말 미스테리합니다. (5부에 계속됩니다)
선약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돌아가고 고당봉 등반팀과 기덕형님 일행은 온천장 금수탕으로 향했습니다. 산행의 피로를 풀기 위함입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사랑하는 후배님들과 다함께 옷을 벗는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종표형님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탕으로 들어가는데 영진형님, 석주후배, 기덕형님, 상현후배, 대우형님, 성학형님 순서였습니다. 그냥 순서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진형님은 의료계 뿐만 아니라 원예업계에도 종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해바라기도 자주 재배하셨다고 합니다.
산행의 먼지를 깨끗이 털어내고 근처 소고기국밥 집에서 허기를 달랜 다음 모두가 헤어졌습니다. 노포동 터미널까지 배웅해주신 기덕이 형님, 대우형님 감사합니다. 기덕형님 차 안에 울려퍼지던 그 끈쩍끈적한 음악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섯 시간 정도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자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문들 보니 좋더냐, 산행이 즐거웠냐, 황사는 없더냐, 사람은 많더냐, 전에 없이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하나 하나 빠짐없이 오늘 올린 후기처럼 자세히 설명을 하고 나니 웃는 얼굴로 무슨 명세서를 하나 슬쩍 보여 줍니다. 화장품, 뭐라고 적힌 것 같은데,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저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합니다. 망할 놈의 마누라쟁이.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않고 한참을 생각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좋은 추억을 만들었구나. 오랫동안 찾아서 헤맸던, 그리고 마침내 찾은 동문들과의 만남. 그 모임이 계속 되도록 더 열심히,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위의 더 많은 동문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신 효수형님 이하 모든 동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고생한 후배들도 사랑한단 말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위기에서 구해주신 삼선 교통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 드립니다.
5월입니다. 더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13일 백겸중 형님 전시회 오픈 파티, 14일 재경 관악산 등반대회, 15일 체육대회, 29일 부산 장산 등반대 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사직고등학교 동문 여러분…(끝)
첫댓글 경이로운 글빨이로세~
10년전 재탕이지만 참 대단해
행찬이 니말은 10년전부터 갈고 닦고 있다는거네..!!!
5기 졸업교지에 기고한 피천득의 인연, 인연, 이년!을 패러디한 아사코, 덴뿌라, 오뎅궁물이나 많이,,, 가 생각나는군...
오호! 성진아! 니가 재호선배 대적할만한 가능성이 좀보인다! 덴뿌라,오뎅궁물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