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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러브 스토리(LOVE STORY)
신 강 남*
나이께나 먹은 사람이 왠 러브 스토리냐고 힐문하실지 모르겠으나 70년대 초에 청춘을 보낸 나를 비롯한 당시 젊은이들은 미국영화 “러브스토리”를 보고 나서 며칠 간 가슴앓이를 겪은 이들이 많았답니다. 내용이야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엇비슷한 사람이 살고 있으니 신기한 것도 아니었으나 줄거리를 다시 간추려보면 “가난한 빵집 딸인 대학생 제니와 억만장자의 아들 올리버가 우연히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던 중 제니가 불치의 백혈병으로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올리버의 품속에서 숨을 거둔다”는 어찌 보면 진부한 내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영화전편에 서정적으로, 애잔스럽게 흐르는 음악은 영화를 한결 돋보이게 하였고 뉴욕 쎈트랄 파크(Central Park)에서의 두 연인의 눈싸움과 사랑하는 아내를 보낸 후 눈 내리는 공원 스케이트장에 외롭게 홀로 앉아있는 올리버의 뒷모습은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지요. 또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엔 어여뿐 제니가 올리버에게 하였던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는 짧은 문장이 유행하였구요. 그래서 나는 요즈음도 아주 가끔은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의 디스켓에 수록된 러브 스토리의 주제가를 듣곤 하는데 느끼는 감흥이 많이 희석되기는 하였으나 조금은 남아 있는 듯 하여 나이는 먹었어도 감성(感性)은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합니다. 윗 글에서 이야기된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는 사실 에릭시걸의 베스트셀러소설로서 당시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부사장 부인이었던 알리 맥그로우가 읽고 감동을 받아 남편으로 하여금 영화화하여 히트시킨 완전히 픽션(fiction)물 이었지요.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 하여 보려는 내용은 수입산이 아니고 이 땅에서 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세상을 사셨거나 조금 늦게 태어나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자기의 아내와 자식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여 운명을 같이하는 아름다운 논픽션(Non Fiction) 사랑이야기여서 “토종 러브 스토리”라고 글제를 부쳐 보았답니다.
․ 첫 번째 이야기
1990년 9월 1일 오후 2시 40분,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62km 지점에서 강원여객 직행버스가 빗길을 과속 질주하다가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여 탑승객 28명 중 24명이 사망한 교통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당시 서울 덕수상고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장재인(당시 33세)이라는 사내는 강원도 홍천군 내면고등학교 불어교사로 근무하던 부인 최영애(27세)와 아들 호를 잃게 된답니다. 사고를 당하고 망연자실한 장재인은 계속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보름동안 섬강가에서 죽은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다렸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는 사고 닷새 뒤에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여드레 뒤 아들마저도 주검으로 발견되자 기다림의 명분조차 잃어버린 장재인은 18장에 달하는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섬 강가에서 그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장재인이 남긴 글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따라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간직해오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시지보다 더 생생한 삶의 경종이 어디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처자를 따라간 저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말 것을 당부 드리며,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원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분들은 제가 없어도 능히 견딜 수 있지만, 저희 세 사람은 함께 있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빈곤한 저를 풍요롭게 하던 가없이 고운 아내와 아들이 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희 세 식구의 주검은 가운데에 아들, 아들의 왼편에 아내, 오른편에 저의 순서로 나란히 관 하나에 묻어주시고, 묘지는 장인어른의 뜻을 존중하여 주십시오. 저와 아내의 결혼반지는 그대로 끼워두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 모두 돌아가신 후에는 다시 화장하여 강물에 띄워줄 것을 부탁합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더없이 평온하고 즐겁습니다.(1990년 9월 15일 02시)
故 장재인이란 사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대전과 이웃한 공주사대 78학번이었으며, 그의 아내는 4년 후배, 80년 5월 광주사태 시에는 총 학생회장으로 모든 시위를 주도하였고 그 와중에서도 그의 아픈 속내를 시를 통하여 토해 내곤 하였던 강하고도 여린 젊은이였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바보 같은 선생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한강 공원묘지에는 세 사람 한 식구가 같이 묻혀있는 영혼의 쉼터가 마련되었고 돌비석엔 “仁同張公在仁之墓 配 崔英愛 子 鎬”라 새겨져 있는데, 그들의 부모가 매달 한번 꼴로 들릴 때마다 사연을 알고 있는 공원묘지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바보 선생님”이라 되뇌인다고 합니다.
․ 두 번째 이야기
지난 2004년 10월 5일, 서울에서는 92세의 허모 할아버지가 치매로 1년간 고생 중이던 93세의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옷장 손잡이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일을 저지르시기 전 할아버님은 달력 뒷장에 파란 싸인펜으로 꾹꾹 눌러 쓴 유서에서
“아들아 미안하다. 살만치 살고 두 부부가 세상을 떠나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눈물 짓지 말아라. 산으로 가지 말고 화장하여 차에다 싣고 두 뼈 먼 곳에 버려다고. 누구나 죽으면 썩은 나무토막과 같으니라. 제일 서운한 내 딸을 못보고 가는 이 아비 눈에서 눈물이 나오니 한심하고 섭섭. 걱정 말고 몸 건강하길 바란다.”(첫째 장)
“78년이나 동거생활 한 나의 처를 죽이는, 나의 처를 죽이는 독한 남편 허00 불쌍하도다. 의복은 이곳에 내놓지 말고 차에 싣고 먼 곳에 버려다고.”(두 번째 장)
“잘들 살기 바라며 세상 작별한다. 출상비 250만원 있다.”(세 번째 장)
“오늘 세상 떠난다. 놀라지 말아라(마지막 장)
이와 같은 말을 남기며, 남은 자식들이 놀라지 않도록 도닥거리고 배려하시는 모습에서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자식 걱정은 죽어야 끝난다는 옛말이 새삼스럽습니다.
92년의 인생살이, 78년간의 동거생활이란 보통사람이 경험하기 쉽지 않은 여정임에 틀림없고, 78년간의 동거생활이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벼운 표현이고, 정이라 부르기에도 성이 차지 않는 영역인데 굳이 부쳐 본다면 “至高, 至純의 00”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재래식 된장, 간장 만드는 법을 소개하며 간장의 맛과 색깔을 보여주었는데 햇간장은 투명하고 맛 또한 단순한 간장의 맛만을 내고 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간장의 색이 진하여 지고 맛 또한 신비한 경지에 이르며, 그 효능은 단순한 간장이 아니라 약효의 경지에 까지 이른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78년간 숙성된 그 분들의 속칭 정이란 어떤 경지일까요? 그 경지를 글로 표현한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으니 알 길은 없으나 추측컨대 호흡 또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의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두 분 중 한 분이 날숨, 다른 분이 들숨으로 서로 호흡하여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경지이고,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생각과 뜻을 읽어낼 수 있는 경지 정도가 아니겠는지요.
돌아가신 분들은 전북 익산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7남매를 낳으셔서 건전한 생활인으로 성장시키셨다합니다. 30여 년 전에 자식들의 권유로 상경하였으나 자식들에게 짐이 되실 것을 우려해 두 분이 다른 집에서 사시며 시장과 동네에서 파지 등을 모아 생활비를 마련하셨답니다. 그러나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두 분의 기력이 다하여 3년 전부터는 비교적 생활이 나은 막내아들집에서 노후를 의탁하셨으나 1년 전부터는 할멈마저 치매에 걸리자 항시 곁에서 음식과 요구르트를 직접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 내셨답니다. 그런데 최근의 불황은 미장일을 하는 막내아들에게도 미쳐 아파트관리비까지 연체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고 사리 판단이 분명하신 어르신께서는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있는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며, 회복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랑하는 아내의 고통을 멈추어 주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결행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폐지를 주어 출상비까지 마련하여 놓고,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을 먼저 보내드린 후 뒤따라 세상을 떠나신 어르신의 모든 행위는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 세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만 다니셨다면 아마도 미당 서정주 시인쯤은 누구나 아실 겁니다. 그분을 가리켜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조탁(彫琢)하는 시인”, “한국시의 신대륙을 개척한 탁월한 언어의 연금술사”,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정히 부족 방언의 요술사”, 시를 쓰는 이들에겐 막강한 政府였고 시를 사랑하는 독자에겐 둘도 없는 情夫”라는 등의 찬사로도 미흡한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가장 사랑받으셨던 국민시인으로 여겨집니다. 하기야 그 분이 돌아가신 후 묘지의 흙도 마르기 전에 친일시인이었다며 비하시키는 철부지 글쟁이(?)들도 있긴 하였지만.
저는 그분을 직접 뵙지도 못하였고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부인 방옥숙 여사와 말년을 함께 보내실 때 자택으로 찾아간 후배 문인들과 대담한 내용을 잡지에서 읽었는데, 서정주 선생님께서는 그때의 두 분 생활을 “소꿉놀이”에 비유하셨고, 서로 발톱을 깎아 주는 모습의 사진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느꼈었지요. 그렇게 재미있게 사시던 방옥숙 여사도 돌아가시기 전에는 치매로 서정주 선생님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시다가 2000년 10월에 돌아가셨답니다. 졸지에 “소꿉장난” 하시던 할멈을 떠나보내신 늙은 홀애비의 심정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안 보아도 뻔하지. 이 모습이 안타까워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 승해(변호사)와 윤(심장전문의)이 미국에서 같이 사실 것을 종용하셨으나 누구보다도 이 땅의 말과 글을 사랑하셨고, 고향의 음식들을 즐겨 잡수시던 분이 선뜻 따라 나서시겠습니까? 그래서 이분도 사랑하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신 후 곡기를 끊어 버리고 맥주로 연명하시다가 부인보다 두 달 더 사시다가 2000년 12월 24일 85세를 일기로 소꿉동무를 따라 가셨습니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미국보다는 이 땅의 말과 글을 사랑하신 분답게 이곳을 선택하시고 소꿉동무를 따라가신 것이 그분다운, 이 땅에 대한, 부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사랑이야기를 하였는데 웬지 속이 먹먹하네요. 서정주님의 「푸르른 날」이란 시를 읽고 기분전환을 하여야겠어요.
무안(無顔)
사람이 살다보면 별이 별 경우를 당하게 되지만 실수로 인한 창피함보다는 뜻하지 않은 무안을 당하는 경우가 더욱 마음을 착잡하고 심란하게 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창피함은 환경이 변하거나 잊으려 노력하면 짧은 기간에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무안함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자리 잡고 기분 나쁜 감정이 속을 불편케 한다. ‘무안’을 한글사전에서는 “볼 낮이 없는 상태” 정도로 간단하게 풀이하여 놓았으나 정확한 해설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고, 나의 짧은 글재주로 무안한 상태를 표현해 내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몇 달 전, 내가 겪은 무안한 경우를 예시하여 봄으로써 그 실체를 설명하여 보려하는데 정확한 표현인지는 나도 자신이 없다.
나는 생활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꼴로 목욕을 가는데, 온천도시 유성(儒城)에 사는 연유로 유명호텔의 대중탕을 다른 도시인들의 동네 목욕탕요금으로 즐기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억에 없으나, 아마도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목욕탕 동행을 기피하기 시작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부터는 생활패턴이 완전히 상이하여 1년에 1-2회 정도나 부자지간에 동행이 이루어 질 뿐이다. 친근한 사이의 친구라도 목욕탕 동행은 나 자신이 원치 않아 혼자서 따뜻한 온천욕을 즐기곤 한다. 그런데 “나 홀로 목욕”이 샤워 정도로 끝을 낸다면 불편한 점이 없으나, 혼자 때를 밀다보면 손이 닿지 않는 면적이 등 가운데에 손바닥 크기만큼 남게 마련이다. 다른 곳은 말끔히 닦아 내었으나 그 곳만은 어쩔 수 없이 남겨 두고 대강 처리할라치면 여간 기분이 찝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옆에서 목욕하는 사람을 힐끔 힐끔 보면서 품앗이꾼을 물색하여 보는데 내가 평소에 설정한 물색기준은 우선 동행자가 없는 자, 둘째 몸에 문신자국이 없고 인상이 험악하지 않은 자, 셋째 뚱뚱하지 않은 자(뚱뚱하면 내가 손해 본다), 넷째 몸에 털이 많지 않은 자 등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완벽히 구비한 품앗이꾼을 만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품앗이꾼을 탐색하느냐? 돈 좀 쓰고 편안히 때밀이(요즈음은 도우미로 호칭 격상)로 하여금 깨끗이 처리하지”라며 나의 조잔함을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성격상, 내 몸의 치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노출시키며 맡기기가 민망하여 때밀이를 자제하는 편이다.
아주 오래전, 나도 격리된 공간에서 때밀이 전용침대에 누워 작업을 의뢰하여 본 적이 있는데 나의 귀한 몸을 마치 물건 다루듯 성의 없게 취급(?)하는데 기분을 망처 버린 후 다시는 그 침대에 누울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날도 이모저모를 따져서 어렵사리 품앗이꾼을 물색한 후,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아직 등을 밀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제가 밀어 드릴까요”하며 서로의 품앗이를 제의 했다. 그런데 이 양반 거동보소, 우선 하던 동작을 딱 멈추더니만 머리를 푹 숙이고는 2-3초쯤 미동을 하지 않더니 머리만 약간 내 쪽으로 돌리고 시선만 조금 주면서 “여보쇼, 요즘도 남의 등을 밀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하며 혐오스러운 물건을 쳐다보듯 하지 않는가.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이 “무안”이었다고 확신한다. 상상해 보시라, 나이께나 먹은 사람이 벌거벗고 엉거주춤 서서 품앗이에게 넘겨줄 요량으로 때 타올을 들고 모욕에 가까운 거절을 당하고 있는 모습과 심정을…. 무안을 당하고 더욱 울화가 치미는 것은 내가 당하고도 반격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상대방은 내가 먼저 제안한 사안에 대하여 거절의사를 밝혔을 뿐이고 굳이 흠을 잡자면 태도가 조금 불손하다는 것인데 그 정도 가지고 시비를 할 수도 없거니와 공연히 경미한 불손을 문제 삼아 따졌다가는 더욱 큰 화를 자초할 것이 분명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그때의 심정이란 “처참”, “참담”, “환장” 등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간신히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마도 그놈이 오늘 마누라와 대판 싸웠거나 잘 나가던 사업이 꼬여서 누구와 시비를 하고 싶은 상태였었는데 재수 없게 내가 비위를 건드렸던거야”하며 자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무안한 감정은 몇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만약에 그때 그 품앗이 대상이 나의 제안에 대하여 옅은 미소와 함께 “제가 오늘 피곤하여 응해 드릴 수 없네요” 하며 정중히 거절하였다면, 나도 조금은 무안 했겠지만 “죄송합니다”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사과하고 돌아 섰을 것이고 지금까지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요즈음 송구영신의 행사로 유행하는 것이 “해돋이”를 구경하며 소원과 다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게을러서 해돋이 구경은 못했지만, 새해 아침 조용히 묵상하면서 “금년에는 남에게 덕을 행하지는 못해도 해를 끼치거나 주는 언동은 하지말자”고 나름대로 다짐을 하였는데 잘 지켜질런지 모르겠다.
중국! 알 수 없는 나라
김 현 주*
여행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즐거움을 준다 한다.
첫째는 떠나기 전, 여행지를 선택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느끼는 설레임이고, 두 번째는 여행을 떠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등으로 여행기분을 만끽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과 기념품 등을 보며 회상의 시간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북경/백두산 5박 6일
일정을 잡아 놓고 준비를 하며 왠지 들뜬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은 남편 고등학교 친구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보다 남편이 유난히 들떠 있는 것 같다.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을 뒤로하고 어딘가로 훌쩍 날아간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
오랫만의 외유다.
드디어 공항으로 떠나는 날. 남편 친구들의 여행용 가방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5박 6일의 여행에 웬 가방이 저렇게 크고 짐이 많은 걸까? 난 그것이 그들의 여행에 대한 기대요, 설레임 일거라 생각했다.
새벽잠을 설치며 이른 공항 리무진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여행은 아이나 어른에게나 즐겁고 신나는 것 같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떠나는 것, 일상을 박차고 낯선 곳을 찾아 나서는 기분은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넉넉한 보너스이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좌석 표를 발권해 드디어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 도착지는 심양이다.
이번 주 관광지는 백두산과 북경코스이다. 난 북경에는 여러 번 다녀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편 친구 부부들을 내가 직접 인솔해 떠나는 것이다. 혼자서 부담 없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내가 모두를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따라가는 것보다 내가 함께 간다는 게 너무 편하고 좋다한다.
심양까지는 2시간 반 정도의 짧은 비행시간이었다.
공항에 내려, 짐을 찾아 출구로 나서니 현지 가이드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피켓을 본 순간 안심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그 다음부터는 가이드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니까 걱정이 없다.
심양은 중국 5대도시 중의 하나란다. 그렇게 발전 된 곳은 아니었다. 근교의 가까운 성에 잠깐 들렀다가 저녁식사를 하고는 이내 연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내의 연길시, 우리민족이 소수민족의 하나로 살고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거리의 간판에는 한글 아래 한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어느 읍 소재지 정도라 할까. 몇 년 전에 비하면 거리도 많이 깨끗해졌고 큰 건물도 많아졌다.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호텔에 도착해 방을 배정해 주고 중국에서의 첫날밤 여장을 풀었다. 모두들 일찍 나오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 없이 상기된 모습들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백두산 관광을 위해 일찍 쉬기로 했다
백두산 관광 일정인데, 날씨가 잔뜩 흐려 있다.
혹시 천지를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 혼자라면 못 봐도 괜찮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왔는데 다같이 보며 기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세 번 왔을 때 매번 천지를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꼭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고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졌다.
간단하게 호텔조식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버스에 올랐다. 백두산 까지는 연길에서 다섯 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차창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기온은 한국의 초봄 정도로 제법 쌀쌀했다.
연길은 우리나라의 6~70년대 농촌을 연상하게 했다. 아직 덜 개발된 자연 그대로의 무공해 청정지역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농촌 풍경을 뒤로 하며 우리는 백두산을 향해 달렸다. 일행이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거짓말처럼 비가 개이고 뭉게구름 사이로 해가 고갤 내밀었다.
역시 내 믿음대로 천지를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치 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양 뿌듯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프차로 갈아타고 20여 분 산등성이를 굽이돌아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6월 초입인데도 눈이 사람 키만큼이나 쌓여 녹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관광을 위해 차도의 눈만 치운 것 같았다.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자, 온통 구름에 뒤덮여 마치 무슨 신선 마을에 온 기분이었다. 비는 개었지만 구름이 가득 차 있었고 올라가는 능선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날라 갈 것 같았고 몹시 추웠다. 잔뜩 웅크린 채, 거북이 걸음으로 천지를 향해 올랐다.
드디어 정상!
구름이 바람 따라 움직이며 가끔씩 천지를 드러내 보인다. 이럴 수가! 천지가 꽁꽁 언 채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8~9월에 왔었기 때문에 파란 물빛의 천지를 보았었다. 그런데 천지가 이렇게 얼 수 있다니. 나로선 새로운 발견이었고 신기했다.
바람이 사람을 날려 보낼 듯 세차게 부는 가운데도 우리들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추위에 떨며 손을 호호 불며 부둥켜안은 채…
그래도 모두들 천지를 보았다는 행복감에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족의 영산으로 누구나 한번쯤 와 보고 싶어 하는 백두산 천지가 아니던가?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 버스로 이동하며 모두는 흥분된 어조로 백두산 여행의 성공을 자축했다. 장개석 총통은 일곱 번을 올라갔는데도 천지를 보지 못했다는데, 단 한번에 보았으니 얼마나 대견하고 뿌듯한가!
한참을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차창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무지개를 보라고. 모두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고 거기엔 선명한 두 줄기의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고, 너도 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부탁해 버스를 잠깐 세웠다. 그리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영원히 있지 못할 추억의 한 장면을 위해…
우리의 여행은 순조롭고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두만강과 해란강, 일송정을 지나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는 용정 중학교에 들렀다. 나는 워낙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우리는 미리 준비해온 한국의 소주와 안주로 근사한 파티를 했다. 혼자 와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여행의 풍요로움을 만끽한 밤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변한 것 중의 하나가 여행에 대한 취향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조용한 성격 탓에 여행도 가족끼리 아니면 남편과 단둘이 떠났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가족과의 일상의 단조로움에 지치다보니 이제 색다른 여행을 동경하게 됐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몇몇 팀이 여행 동호회처럼 만나 일년에 한두 번 함께 여행을 떠나 추억 만들기도 하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일상 속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힘겨움을 날려 버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 여행 또한 남편 동창 부부모임에 친한 직장 동료 부부까지 합세해 쟁쟁한 팀웍을 과시하며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둘이 가서는 겪을 수 없는 에피소드, 추억거리, 이야기 거리가 진진하다.
남편 친구 중에 코미디언보다도 유머가 풍부한 친구가 있다.
그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처음 보는 사람조차도 웃을 수밖에 없을 만큼 외모부터가 코믹하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는 여행은 늘 폭소와 얘기 거리로 가득하다. 그런 그가 이번 여행에서도 또 사고(?)를 쳤다. 연변에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식사를 하고 돌아오다가 로비에서 한 중국인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인 여행객을 상대로 뭔가를 파는 장사꾼이었나 보다.
중국인은 진짜 장뇌삼이라면서 팔려 했을 것이고 남편 친구의 시계가 달린 허리띠를 본 그는 그것이 가지고 싶어 바꾸자고 했나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둘 사이에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오갔는지 결국 친구는 허리띠(벨트)를 풀어 주고 장뇌삼과 바꾸어 그날 밤 그걸 먹었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겼다.
그래서 그 친구는 여행기간 내내 벨트가 없어 바지춤을 잡고 여행을 해야 했다.
북경 도착.
북경은 2008 올림픽을 대비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외래어라는 게 없다. 모든 말을 자국어로 바꾸어 표기한다. 심지어 켄터키 치킨을 견덕기(肩德基)라 쓸 정도다. 대국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일까! 그러면서도 아직도 가난과 식량난에 허덕이고 한족과 소수민족의 인종 차별이 심한 나라. 온통 가짜투성이고 허구와 기만으로 가득 찬 나라. 그 나라가 머지않아 세계를 지배한다니 조금은 두렵다.
북경의 날씨는 우리나라와 비슷해 후덥지근하다.
만리장성을 시작으로 북경 관광은 시작되었다. 북경에서는 또 사고친구 부부와 한 친구가 자금성 구경 도중 팀에서 사라졌다. 자금성은 워낙 넓어 입구와 출구가 달라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는다.
서툰 가이드가 관람 전에 주의사항을 말 했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팀과 떨어지자 출입문 쪽으로 갔을 것이고, 우리 일행은 누군가가 먼저 갔을 것이라는 소리에 일단 뒷문 출구 쪽으로 끝까지 이동했다.
결국 만나지 못해 우리는 버스를 불러 먼저 탑승해 기다리기로 하고 가이드가 입구 방향으로 떨어진 세 명을 찾으러 갔다.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를.
버스 안에서 기다리며 나는 사실, 입구 쪽에서 그들이 기다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모르니 다들 분위기가 숙연했다. 조용한 버스의 정적을 깨고 남편만 떨어진 친구의 부인이 갑자기 흐느껴 울면서 남편 걱정을 했다. 여권도 자기가 가지고 있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못 찾으면 어쩌느냐면서…
나는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며 안심을 시켰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나보다. 기사와 가이드가 통화를 하는 것 같기에 안 되는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상황을 물었다.
“칭원, 짜오마?” (찾았나요?)
“싼거런” (세명).
오-케이, 세 명 다 찾았댄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하면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밖은 어두워져 가고 있었고 비까지 내렸다. 그날은 북경 관광의 마지막 날이었고 저녁 비행기로 장춘까지 가야 했다. 다행히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그들은 가이드와 함께 택시에서 내렸고 우리는 그들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해 주었다. 남편 때문에 가슴 조였던 친구의 부인은 남편을 보자마자 우산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을까… 그러나 그 태평한 친구는 모택동 주석 사진 밑에서 기다리다가 우리가 찾으러 안 오면 대사관으로 갈려 했었다나…
거기서 팀을 기다리느라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는데, 그 와중에 사진 좀 찍어 달라는 사람이 있어 사진을 찍어 주면서도 주변을 살폈댄다. 혹시 그사이 그냥 지나가버릴까 봐.
이렇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얘기치 않은 에피소드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북경 관광은 천안문, 자금성, 이화원, 만리장성, 명13릉, 용경협까지 날씨도 좋았고 관광도 순조로웠다. 마지막 여정에서 한의원에 들러 우리부부가 한약을 사며 바가지를 쓴 것 외에는 별탈없이 여행을 잘 마친 셈이다.
5박 6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인천공항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일년에 한번 정도는 이런 여행을 갖기로 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모두는 각자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저마다 가슴 속에 여행에서의 갖가지 추억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가득 담은 채…
여행을 떠나면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것도, 맛있는 것도 며칠 지나면 내 집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지루하고 따분하던 일상에 생기가 돌고 늘 하던 가사일조차도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여행은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를 날려 버리기엔 더없이 좋은 명약이다. 짧았지만 그 어느 여행보다도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자신의 삶에 충실하길 빌어본다.
요즘 엄마와 아이들
조그맣게 교육원의 이름을 달고 아이들을 대한 지 어느새 두 해가 지났다.
퇴직 후, 무언가 할 일을 찾아 기웃거리다 우연히 알게 되어 시작한 지금의 일은 내게 새로운 희망과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교사가 꿈이었던 내가 그 꿈을 접고 오랜 외도를 한 끝에, 모양은 달랐지만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마치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 간절히 품은 꿈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해 늘 책과 함께 생활하며 누구에게나 독서를 권하고 책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나였기에 아이들에게 집중력과 이해력을 높여가며 독서지도와 학습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이 프로그램은 더없이 적합한 일이었다. 경험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친숙하고 자유로웠다. 직장 생활과는 비길 수 없는 여유로움과 ‘나의 일’이라는 애착이 있었기에 참 즐겁게 행복한 마음으로 일 할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이 다 자라, 품을 터난 터라 어린 아이들을 대할 기회가 없던 나에게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 많은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의 교사처럼 한정된 아이들과의 만남이 아닌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아이들의 보편적인 사고와 행태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환경과 과잉보호 속에 온실의 꽃처럼 자라고 있은 요즘 아이들은 모두가 왕자고 공주이다. 하나, 아니면 둘이 고작인 적은 수의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은 차고 넘친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 도움과 보살핌도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보조자로서의 손길이고 보살핌이어야 한다. 아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올바른 가치관으로 홀로 설 수 있도록 지켜보며 도와주는 것이 엄마의 진정한 역할이다.
그러나 요즘 엄마들은 어떠한가?
마치 연예인의 매니저처럼 수첩에 아이의 스케줄을 빼곡히 적어가지고 다니며 학원시간을 조율한다. 그러면서 한 두 시간의 시간을 내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토로한다. 그러기에 요즘 아이들은 2~3 개의 학원을 다니고 심한 아이는 7~8개의 학원을 순례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엄마와 아이들을 보노라면 가슴 한 켠이 갑갑해져 옴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학부모에게, 우리 교육원에 보내려면 다른 학원을 과감히 끊고 보낼 것을 권유한다.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다.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고 창의력, 상상력도 커지는데, 쉴 틈도 없이 학원을 전전하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무슨 공부가 되고 잠재력이 개발될 여유가 있겠는가.
엄마들의 욕심이 너무 지나침을 볼 수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엄마는 말리고 싶은데 아이가 이것저것 배우고 싶다며 보내 달랜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는 공교육이 사라지고 사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할 뿐이고, 공부며 기타 모든 것을 학원에서 해결하려 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이게 아니데 싶지만 내 힘으로 만류할 방법이 없다.
물론 아이는 엄마의 노력과 정성으로 완성된다. 넘치는 사랑과 관심이 문제가 아니라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진정, 내 아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어떤 걸까? 엄마로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권한다.
아직 어린 내 자녀들이 자신의 꿈과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쫓겨 다니느라 자기의 소질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고,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여성학자 박혜란은 말한다. “부모가 아이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잘 자란다”라고.
아이를 시험 보는 기계나 점수 벌레로 만들기 이전에 아이의 꿈은 무엇이고 미래에 어떤 사람으로 살아 갈 것 인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찾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일에 엄마는 아이의 멘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엄마가 해결해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해서 자신의 일을 헤쳐갈 수 있는 신념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내 아이로 하여금 실패를 경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 했을 때 딛고 일어서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21세기는 개인주의 시대이다.
갈수록 자신만 알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때일수록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고 베풀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것도 자라나는 청소년 시기에 꼭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가 자라서 사랑을 나눌 줄도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 아이에게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공부가 엄마의 강요나 선생님이 하라니까 하는 그런 수동적인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하면 아이는 알아서 열심히 공부 할 것이고, 그러면 공부가 재미없고 힘든 것이 아니라 나의 멋진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인식할 것이다. 이럴 때 아이가 바르게 자라고 이 사회가, 이 나라가 건강해진다.
교육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높다. 사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고, 학생들이 학교나 선생님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기회만 닿으면 오락실이나 게임방에 가서 시간을 보내려하고, 귀에는 늘 엠피쓰리를 달고 다닌다. 그러다보니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집중력도 전혀 없으며, 학업에 대한 의욕도 없다.
초등학생부터 중고생에 이르기까지, 핸드폰이 없는 아이가 없고 수업 중에도 수시로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열어보곤 한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할 지 암담하기도 하다.
가끔은 내 아이들이 이미 다 자라길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비록 조그만 교육원을 하는 나이지만 사명감을 느낀다. 이 아이들에게는 영어 한 단어, 수학 한 문제를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수업시간을 통해 지식의 전달이나 주입보다는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더 신경을 쓴다. 올바른 목표의식과 가치관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고,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발견 할 수 있도록 해주려한다. 그러기 위해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빌게이츠는 독서하는 습관이 하버드 졸업장보다 낫다했다. 인성 부분을 일일이 가르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여러 명사들이 쓴 책을 읽다보면 비뚤어진 생각이 바로 잡히고 미처 깨닫지 못한 지혜에 눈을 뜨고, 인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학력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평생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평생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온 우주가 교육의 장으로 모든 것에서 지식과 지혜와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경제 불황이고 어려운 시기라 한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교육에 있다. 그 교육의 주체는 학교이기 이전에 가정이다. 가정에서부터 교육이 시작되고, 가정에서 올바르고 참된 가정교육이 이루어 질 때 학교 교육, 사회 교육도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엄마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중한 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놓고 내 역할을 다 했다는 안일하고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내 아이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자. 무엇이든 다 해주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당당하게 홀로 서기를 하도록 강한 정신력과 자립심을 키워주자. 달라는 대로 용돈을 주기 보다는 어려서부터 노동의 참된 의미와 대가를 알게 해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한다면, 아이는 요행을 바라거나 한탕주의로 인생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가 하기 싫다면 어딘가에 가서 돈을 벌어 오도록 시켜보라. 그러면 공부가 왜 필요한 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깨우치고 터득한 것은 열 마디 백 마디의 잔소리에 비할 수 없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느 학자는 우리 한국의 10년 후에 대해 아주 비관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10년 후, 우리 아이들이 이 시대의 주역이 되었을 때, 지금 보다 나은 세상이 되도록 하려면 공부만 잘 하는 아이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사고를 가진 건실한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한다. 나라가 잘 되려면 여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 했다.
엄마들이여!
책임감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합시다. 내 아이가 반듯하게 자랄 때 이 사회가 살만하고 이 나라가 건재함을 잊지 맙시다.
5030 PROJECT
“당신, 사는 게 재미있어?”
“무슨 소리야?”
“난 요즘 별루 재미가 없어!”
“누군 별 수 있나. 다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런거 말구 정말 재밌구 신나게 살순 없을까?”
어느 날 TV를 보면서 내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 나이 들면서 욕망의 크기도 줄고 세상에 대한 기대도 작아진 때문일까.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것 같다.
아니다. 뭐든 다 해보고 싶기도 하다. 전에는 나와 상관없다 싶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느 시에선가 죽기 전에 해 보아야 할 일들을 적은 것을 본적이 있다.
이인용 자전거 타기, 소의 젖 짜기, 푸른 초원 위에 누워 마음껏 태양을 안아 보는 일 등.
나 또한 죽기 전에 아니 더 늙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들이 있다. 자전거를 배운 것도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그 외에 노래나 춤, 그리고 운동 등.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면서도 발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다.
그러나 막연히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인 사고와 준비만이 행동할 수 있는 나를 만들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점점 사회성은 감소되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도 나약해져 가 정말 무력한 노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나를 일깨운다.
안 그래도 이번 건강 진단에서 저근육성 비만형으로, 운동부족 때문에 체지방이 늘고 있으니 꾸준히 운동을 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앞으로 운동은 내 삶의 필수이고 비참한 노년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함을 절감한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소극적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이제 머지않은 50대를 맞기 위한 준비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50대는 진정한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
20대는 성장의 기반을 위해, 30대는 결혼, 출산과 양육, 가사 등으로, 40대는 자녀 교육과 직장 생활로 큰 여유를 누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평범한 삶의 여정을 밟아온 사람이라면 50대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시기다. 아이들도 대부분 자라 결혼 또는 독립할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유하진 못하지만 안정적일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은퇴해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때이다.
고령화 사회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중년의 개념도 바뀐다고 한다.
예전엔 40대가 중년이었는데 지금은 50대에서 60대 초반이 중년이라 한다. 나 또한 50대가 인생의 진정한 황금기란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 인생을 보는 혜안과 연륜도 쌓였고 반평생 여 살아오며 겪은 나름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 그것이 50대라 여겨진다. 이 시점에서 삶의 재 정렬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현재를 산다는 건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배우고 깨달아 더 나은 미래를 가꾸고 이루어 가는 과정이 현재의 삶이다.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계획하며 미래를 맞는 것이다.
나의 5030 PROJECT는 이렇게 시작된다.
50대가 되어서도 30대의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며 왕성한 활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 건강, 경제적 문제, 자녀의 독립 등 모든 것을 원만하고 순조롭게 해결해야 한다.
부부사이도 젊은 날의 불화, 미움, 갈등을 마음에 담아 두기 보다는 모두 다 바람에 날려 버리고 늘어가는 주름과 흰 머리를 바라보며 열정은 식었지만 연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정리한다. 경제적으로도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연금이나 보험 등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가끔 여행을 떠나거나 맛있는 것을 먹을 정도의 여유를 확보한다.
아이들은 결혼을 하면 좋겠고 그러지 않을 경우 독립시켜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게 갈무리 한다.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리라. 다 얻고도 건강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꾸준히 운동하고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건강관리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이가 든다는 게 결코 서글픈 일만은 아니며, 여유로운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삶에 대한 권태이다.
사는 것이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다면 오래 산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주변의 노인들을 보며 아무 할 일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무언가 일은 꾸준히 하리라 마음먹는다.
꼭 그것이 돈벌이가 되고 경제적으로 유익한 일이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일을 찾을 것이다. 봉사도 좋고 나눔의 현장을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늙을수록 옹졸해지고 융통성 없는 노회의 정신을 버리고 주변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하며 사사로운 간섭이나 투정은 하지 않아야 하리라.
나이가 든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며 그저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순응하리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아량이 깊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누어주고 베풀어 줄 수 있는 넉넉함을 지니고 싶다. 욕심 많고 고집스런 노인처럼 볼품없는 것은 없다. 나이 들어서까지 무언가에 집착을 보이면 오히려 추해진다. 다 주고도 또 주는 아낌없는 나무가 되어야 하리라
우 산
양 원 준*
시골에서의 하루는 일찍 시작되는 편이다.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삶의 조각조각을 엮는 것이 몸에 배인 시골 어르신들의 발걸음은 동녘이 붉게 물들기도 전에 손잡이가 부러진 삽을 손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엊그제 심어놓은 콩이 산새들의 눈을 피해서 잘 자라고 있는지, 간밤에 내린 비로 논둑은 무너지지 않았는지…. 어제를 정리하고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로 아침은 바쁘기만 하다.
일반 도시 샐러리맨들이야 휴일에는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서, 또는 산과 강가에서 여가를 즐긴다고 한다지만 일년 365일 빈틈없이 짜여진 그들만의 생활계획표에는 어느 항목을 쳐다보아도 일요일 또는 공휴일의 개념을 찾을 수 없다. 매일같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땅과 함께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시골의 일상이다. 그저 자연이 베푸는 가르침에 따라 하루하루를 묵묵히 답습할 뿐이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부모님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를 바는 아니었다. 물려받은 재산이라고는 ‘성실’ 하나 뿐, 그 이상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했던 집안에서, 부모님께서는 산짐승들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돌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황량한 산비탈을 깎아 쟁기질을 하셨고 씨 뿌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농군’이라는 단어 뒤에 땅에 대한 애착이 남모르게 깃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 역시 그런 삶을 이어오신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던 농군 중의 한 명이셨던 아버지께서 마침내 오래 전부터 언제나 부러운 마음으로 쳐다만 보셨던 논을 구입하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시간 앞에 서 계셨던 당시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셨다.
낯선 아저씨와 마주 앉은 아버지, 그 때 당신의 음성은 시종일관 상기되어 공기를 갈랐었다.
“참 좋은 논이죠. 글쎄 이 근처에서 이 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 뿐이겠어요?”
낯선 아저씨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아버지께서는 비로소 당신의 이름으로 된 논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좀처럼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젊은 시절, 쓰러져 가는 집안을 일으키고자 저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셨을 때의 꿈이 이제야 조금씩 여물어간다는 생각은 식사마저 하지 않아도 배부른 단상이었을 게다.
그렇게 마련한 논이라고 해봐야 고작 3,000여 평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면적의 대소를 떠나서 그 논의 가치는 우리 식구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근처에는 제법 큰 방죽도 있어서 가뭄이나 홍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경지정리까지 되어 있었던 터라 이래저래 농사짓는 수고로움을 덜 수도 있었다. 비록 소작농의 꼬리표까지는 뗄 수 없었지만 부모님께서는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일하는 즐거움에 녹아드셨다. 무엇보다 내게는 소위 마을 유지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던 친구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아만 보였던 자신감을 조금씩 키워갔던 계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의 땅에 대한 욕심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농기계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산비탈 천수답일망정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려고 하루해가 짧게 느껴지도록 쇠스랑질을 멈추지 않으셨고,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땅의 가르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이제 농사는 지어봐야 소용없어. 그게 농민들 다 죽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뭐겠어?”
우루과이라운드의 후폭풍이 조금씩 피부로 느껴지고 한 때나마 소 값 파동에 고추 값 파동이 불거져 왔을 때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께서는 마을 젊은이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면서 논을 맡기고 갈 때에도 매운 안타까움만을 달래는 것으로 끝내 땅에 대한 미련까지는 저버리지 않으셨다.
하지만 언제나 든든한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리라 믿어왔던 아버지께서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으셨나 보다. 갈수록 야위어만 가는 어깨며, 말수가 적어드는 목소리에는 예전의 그 강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나브로 야위어만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당신도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하신 것인지 밥숟가락을 뜨자마자 드시는 한 움큼이나 되는 약에 의지하는 모습이란 자식이란 이름만으로도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며칠 전,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시골길에서 아버지와 함께 당신이 젊으셨을 때 사셨다는 그 논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도 내 키가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신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지금껏 꼭 쥐고 계셨던 우산 손잡이를 아무런 말씀도 없이 내게 건네셨다. 그런 아버지의 옷깃에서는 농약 냄새와 풀 냄새가 높은 습도와 범벅이 되어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결코 역겹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버지의 체취라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 앞에 조금씩 야위어만 가는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당신과 당신을 조금만이라도 닮아가려고 노력해보았냐고 물으면 말없이 고개를 떨구어도 모자랄 ‘아들’이란 무거운 이름을 짊어진 나 사이에는 과연 어떤 공통분모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씀드려 본 적이 없이 오로지 당신처럼 무뚝뚝하게 커왔지만 아낀 만큼 여유가 있고 모은 만큼 기쁨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땅을 일구는 과정을 통해 가르쳐주셨던 아버지.
어려웠던 집안을 나름대로 일으켜 세우신 아버지의 그림자는 그동안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만 있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우산이 얼마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아버지께서 그 우산 손잡이를 내게 내밀었던 것처럼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며 방황만 하고 있는 내게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길 바라는 당신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산 손잡이에 스며들었던 아버지의 체온은 금세 사라졌지만 한평생 아름답게 땅을 일구며 간직해왔던 아버지의 소박한, 그러나 결코 쉽사리 잊혀지지는 않을 그 간절한 마음만은 오랫동안 손끝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복 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감에 따라 사회라는 곳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살아감에도 아는 이가 별로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곳, 자신이 웃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의 눈물을 떨구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다지 마음 내키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학창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 교문을 나섰을 때부터는 왜 그리 선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인지 언제나 한 발짝씩 늦게서야 깨닫게 되는 나 자신도 밉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치다 급기야 무릎을 꿇게 되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비록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입원도 했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밀려오는 나른함과 피곤함을 맡기는 것이 계속되는 불경기 속 취업난을 이야기하는 현실 속에서도 홀가분하게만 다가왔을 정도였다.
병원에서도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술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혈액검사를 하면 여전히 기준치 이상으로 나오는 간 기능수치에 대해서 특별히 다른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마치 녹음테이프라도 반복해서 들려주려는 듯 “마음 편히 가지고 푹 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아마도 체력적으로 열세인데다 사소한 일도 쉽게 잊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 기획사와 학원의 근무 특성상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며 사는 일상과 맞물려 빚어진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라는 둥지 속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누군가와 비교라도 하다보면 지금의 내 처지가 못내 눈물겹기만 하다. 그렇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절친했던 이들의 체온이 주는 그리움은 더해만 갈 텐데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언제나 주위에서만 맴돌고 있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할 때가 더 많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모든 인연의 끈을 끊고 싶다는 욕심을 왜 굳이 떨쳐버리지는 못하는 것인지 나로서도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그런 내게 친구 녀석이 찾아왔다. 서로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갑천 둔치에 앉아서 눈빛만을 응시하는 것으로도 그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로또에 당첨된다면 당첨금의 40%는 너에게 줄께.”
그 말의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아마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려운 말일 테지만 그런데도 왠지 믿음이 갔다. 지나가는 말일지라도 늦은 밤에 일부러 찾아와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 친구 녀석은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만 지냈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까지 이어져 오는 동안 친구가 하는 말은 주위 사람들의 신뢰와 어우러져 빛을 발하곤 했다.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처럼 장난 끼도 있었고 사춘기 시절도 겪어가며 한 때 방황도 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내 눈동자에 맺힌 그 친구의 매력은 쉽사리 흐려지지 않았다.
그런 소중한 친구가 보았을 때도 지금의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것은 아마도 우정이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어쩌면 걷지 않아도 될 그 친구의 형이 운영하는 학원에 몸을 담게 되었고, 생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시스템에 길들여지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결국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중도에 그만 두고 그 스트레스로 인해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는 친구 나름대로의 죄책감 때문이었을 게다.
그 친구와 함께 복권판매소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날은 마침 로또 추첨일이라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말만을 듣고 돌아서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복권을 사주면 자신이 직접 구입했을 때보다 당첨될 확률이 더 높다면서 만약 로또를 샀다면 분명 행운이 따라왔을 것이라고 말하던 친구. 친구는 자신이 내게 던진 말에 대한 미안함과 다시 일어서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그렇게 ‘대박’을 의미하는 로또에 묻혀 내 손에 쥐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서로가 무뚝뚝한 편이라 별다른 말도 없이 헤어질 때가 더 많았지만 그저 곁에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곤 했던 그 친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띄엄띄엄 세워져 있는 주홍빛 가로등에 의지한 채 망막에 맺힌 친구의 선한 눈가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원했던 복권이라도 쥐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그 마음이 함께 했기 때문일까? 장마철이 다가오는 징후라면서 연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책을 보더라도 글자가 크게 느껴졌고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던 친구에게서도 반가운 연락이 오곤 했다. 평상시에 원하던 직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기업체에서 입사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래, 일어서야 한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나름대로 자기 암시를 수없이 되뇌며 뛰어다녔다. 비록 아직까지는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하루하루가 계속 되고 있지만 그 친구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무력함에 빠져들기에는 젊다는 것 자체가 용서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지금 내 손에 친구 녀석이 사준 복권은 없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힘내라!’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복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이 아무리 외로운 곳일지라도 이처럼 결코 혼자만은 아니기에 아직은 덜 외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별,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작은어머니께서 돌아가셨대! 그러니 어서 서울로 올라가거라.”
전화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어머니의 잠긴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예상은 했었지만 출근하자마자 듣게 된 숙모님의 별세 소식은 하던 일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땅바닥에 멍하니 주저앉고 싶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간단히 직장 동료들에게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서둘러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좌석도 없어 2시간가량을 서서 기차 특유의 떨림 소리에 젖는 동안에도 아무런 느낌마저 오가지 않았다. 잠시 세상이 멈춰 버린 듯 객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수며 건물들도 나와는 전혀 무관한 세상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라고 해봐야 고작 명절이나 되어서야 뵐 수 있었던 숙모님께서는 여러 조카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는 계속되는 학업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는 특별한 일도 없이 찾아뵙기가 쑥스러워 자연스레 멀리만 대하다가 지금에서야 때늦은 인사를 드린다고 생각하니 죄송한 마음까지 곁들여져 조금씩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2주 전이었던가? 숙모님께서 경기도의 어느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문병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수술 후에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실 줄로만 믿었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며 밝은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셨던 분이시라 머지않아 쾌차하여 다시금 내 등을 어루만져 주실 것으로만 믿었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찾아간 병원은 너무나 고요했다. 아무리 병원이라 하지만 접수창구에서부터 대기실까지 조금의 북적거림도 찾을 수 없었고, 병문안을 위해 찾아온 사람이나 입원 환자들 모두 숙연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암환자가 누워 있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병실과 그 병실에 들어섰을 때 들고 간 음료수 상자가 오히려 어색하게만 느껴지고 여느 병원과는 달리 복도의 조명이 조금은 어둡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야 눈치 챌 수 있었던 이 병원만의 색깔….
그런 병원에 숙모님이 누워 계셨다. 전에 뵈었을 땐 조금도 편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던 숙모님이셨지만 지금의 모습은 당신이 그 누구보다 가까이 해주셨던 조카가 왔음에도 깊은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신음소리만을 토해내고 계셨다.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방울이 마약이라도 섞였을 진통제에 의지한 채 마지막을 재촉하는 사자(死者)와 힘겹고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계시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만이라도 고통 없이 보내주고 싶어 했을 숙부님께서는 내 손을 이끌고 병실을 빠져나오셨다.
“원준아, 작은어머니는 곧 돌아가셔. 알지?”
“…….”
그로부터 며칠 뒤, 숙부님의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 숙모님께서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숙모님께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계시다는 병원 영안실에 들어섰다. 어제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금세 변해 아침부터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도 어둡고 불안하다. 결혼을 하기는커녕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촌 동생도 어머니와의 긴 이별 앞에 말이 없었다.
숙모님 영전에 예를 올렸다.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미처 몰랐기에 당장이라도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곡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귓가를 울리지는 못함을 안다.
여전히 말이 없는 사촌 동생들 앞에 형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내 목소리도 목구멍을 지나 공기를 가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결국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서로의 어깨만을 보고 앉았다가 시선을 돌려 숙모님의 영전을 보노라니 그 때서야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어깨,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형광등 불빛을 응시했다. 저 불빛 안에서 숙모님께서 날 내려다보는 듯싶었다. 죽음이란 이렇듯 다가설 수만도 없는 바람만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구나.
발인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숙모님께서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과 교우들께서 오셨고 간단한 예배가 진행되었다. 간간이 들려오던 울음소리도 먼 길을 떠나시는 숙모님께 예의가 아니라는 듯 이때만은 잠잠했다. 그리고 운구차에 실려 영원히 잠드실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 마을회관 앞에서 또다시 발인제를 행하고 난 뒤에야 상여는 숙모님께서 즐겨 걸으셨던, 하지만 이제는 다시 걸을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숙모님 무릎을 베개 삼아 잠잘 때면 들려주던 옛날이야기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 했다. 애써 눈물을 감추시던 숙부님과 아버지의 모습도,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로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주마등처럼 시선을 사로잡다 이내 사라졌다.
소리꾼은 처량하기 그지없는 종을 흔들며 소리를 하고 상여꾼들은 운을 맞추며 “어허 오야” 후렴을 한다. 그 소리에 맞춰 이승과의 인연이 정리되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냇가를 건널 때 쉽사리 가지 않으려는 소리꾼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숙부님의 모습도 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이승에 대한 미련까지 송두리째 정리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하관을 하고 흙을 덮기 시작했다. 또다시 선산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하고 나의 어깨 또한 들썩거렸다. 새로 생긴 묘 주위를 정리하는 도중 숙모님의 옷가지를 불구덩이 속에 넣으려니 더욱 서럽게 눈물이 흘렀다.
“어여 가자. 3일 내내 영안실을 지켰는데 피곤하지도 않니?”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언제 그렇게 슬피 울었느냐는 듯 다시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동서지간의 정이 그토록 쉽게 무뎌질 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어쩌면 내가 더 감성적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을,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음을 잊어버린 채 무한정 현실에 얽매일 수만은 없는 노릇일 테니.
“예? 예, 갈게요.”
조문객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싣고 왔던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조금씩 숙모님의 모습 또한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듯싶었다.
축하해, 언니!
임 정 란*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린다. 뜨거운 더위와 자외선을 피해 한낮에는 집밖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거실에서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모처럼 낸 휴가지만 그 동안 일에 지쳐있었던 터라 마땅히 놀러가고 싶은 마음은 없고,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행복이 이런거구나!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걸려왔다.
“나야, 나 누군지 알겠니?”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를 그새 잊어버렸어?”
몇 마디를 더 들었는데도 이상하게 누군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전 잘 모르겠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하고 되물었다.
전화 건 사람의 심정은 빨리 내가 누군지 알아 맞추기를 바라는 듯 바로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굴까? 날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머리 속으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다 문득 생각나는 한사람이 있었다.
“은하 언니!”
4년 전 어학연수를 받고 온다며 미국으로 떠난 후 연락이 끊어졌던 언니! 바로 그 언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 언니지?”
“그래, 언니야. 이제야 기억이 났구나! 아직 내 목소릴 잊지 않았네?”
내가 언니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언니의 목소리를 4년 만에 들으니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동안 연락도 없었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미국에서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느라 바빴어. 미안해!”
언니는 미국에서 연수를 받은 후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다른 대학엘 들어간 모양이었다. 언니의 이 한 마디 말에 나는 언니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선 땅에서 유학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변에 유학하고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언니는 집안 사정이 어려운데도 혼자 힘으로 미국에 건너가 직접 돈을 벌어가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던 것이다. 당연히 연락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 동안 언니를 보고 싶었던 마음에 연락 한번 안한 언니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내가 은하 언니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대학 신문사”에서 같은 기수의 동기로 첫 만남을 가졌다. 같은 학번 동기이지만 동기들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언니는 같은 동기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줬으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열심이었다. 또 정도 많아서 한 살 어린 동생들을 가족처럼 챙겨주는 따뜻함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희생 또한 언니의 몫이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하였다. 언니가 공부한다고 미국으로 떠난 후 우리 동기들은 종종 모임이 있을 때면 늘 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언니. 결혼해”
“뭐라구, 결혼한다구! 정말이야?”
나는 결혼한다는 소리를 분명히 듣고도 내 귀가 이상해서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씩이나 다시 물어보았다. 언니의 나이가 그리 적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결혼을 할 때란 걸 잠시 잊은 채 언니의 깜짝 선언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귀국한 것도 결혼을 위해서고 바로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아까 가졌던 섭섭한 마음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언니 결혼식에 와 줄꺼지?”
“당연히 가야지, 누구 결혼식인데! 내가 휴가를 내서라도 꼭 갈께”
나는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너무나 갑작스런 소식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 언니와 함께 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면서 빨리 언니의 결혼식 날짜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결혼식이 있던 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두근두근 언니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너무 궁금했다.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신부대기실부터 찾아 다녔다. 막상 신부대기실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를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언니!” 하고 뛰어 들어갔다.
이게 얼마만인가. 4년 만의 상봉이었다.
언니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가 나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란 얼굴로 일어나 반갑게 안아주었다. 서로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많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이 사진 몇 장 찍고는 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언니의 모습을 바라다보았다. 언니와 함께 서 있는 신랑의 모습이 꼭 남매처럼 닮아 많이 행복해 보였다.
아름다운 7월의 신부가 된 은하 언니!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고, 행복하고 예쁜 가정 이루길 바랄께, 그리고 공부 다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 못다 한 얘기 밤새도록 나누자. 알았지?
돌아오는 내내 언니랑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바라보았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름다운 제주
우리는 ‘처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설레임과 열정, 순수함과 감동, 두려움과 어려움 등의 느낌을 갖는다. 또한 모든 것의 시작이 처음이었을 때 아울러 소중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처음’이라는 단어의 이런 특별한 느낌 때문인지 머리가 나쁘고 기억력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처음’과 연관된 것들은 기억하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이 ‘처음’과 연관된 것들이 좋은 기억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도 ‘처음’의 기억들이 있다. 처음의 추억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첫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순간은 내가 기억하는 처음의 것들 가운데 손꼽히는 것이다. 어린시절,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고, 비행기를 타 보는 것을 소원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비행기를 처음 타기 전까지 비행기는 내가 최고로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 첫 비행기를 탄 순간은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가슴 벅찬 기억이었다. 구름 위로 나는 비행기 밖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비행기는 제주도로 날아가 나에게 첫 제주도 여행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러 얼마 전 다시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처음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아마 ‘제주도’라고 답할 것이다. 요즘에는 해외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제주도 한번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제주도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가는 곳인 줄 만 알고 결혼이나 하면 가는 곳으로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 삯이 비싸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제주도가 관광산업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제주도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더 가기 힘들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제주도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 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 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 하늘 아래로
작년, 가수 성시경이 「제주도의 푸른 밤」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으면서 제주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놀러가고 싶은 유혹의 여행지가 되고 있다. 또한 장안의 히트를 쳤던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인 ‘섭지코지’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제주도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
섭지코지는 이번 제주도 여행 때 처음 간 곳이었는데, 함께 동행 한 가이드 말로는 드라마의 히트 못지않게 이 장소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 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가 보니 이곳은 올인 드라마에서 나왔던 성당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고, 넓은 초원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충분했으며, 또한 섭지코지에서 바라다보는 성산일출봉의 기운찬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 곳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섭지코지는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꾸준히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TV나 광고 등의 매스컴으로 제주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요즘에는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지의 일순위로 제주도가 인기가 있어 학생들 또한 많이 찾는 여행지가 되었다.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예로부터 삼다도(三多島)라 불리우던 제주도에는 독특한 것들이 많이 있다.
제주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돌하르방’인데 이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 때문에 결혼한 신부나 아들을 낳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장면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또한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감귤나무는 눈과 입과 코를 즐겁게 해 준다. 감귤나무는 제주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데, 꽃이 피는 5월경의 감귤나무는 그 꽃향기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꽃향기에 취해버릴 지경이라고 한다. 제주지역 사람들의 주된 생업이 감귤농사이다 보니 제주도에는 감귤을 수확하는 무렵에 감귤(미깡)방학이라는 특별한 방학이 있어, 학생들은 집에서 감귤을 따는 일을 돕는다고 한다. 또한 제주 곳곳에는 야자수 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야자수는 마치 하와이에 온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듯 제주도는 마(馬)가 유명하다. 넓고 푸른 초원은 말을 키우기 좋은 목장이 되는데, 이 초원에 말을 풀어놓고 자유롭게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방목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방목하여 말을 키우는 모습을 보다 문득 그 옆에 있는 특이한 무덤(산소)이 목격되었다.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무덤과는 달리 무덤주변에 돌담을 쌓아 놓은 것이다. 제주도는 돌이 많아서 무덤에까지 돌담을 쌓아 놓은 줄 알았는데 가이드가 설명하기를 말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을 방목하다 보니 무덤에까지 가서 풀을 뜯어먹을까봐 말이 못 들어가게 돌담을 쌓아놓았던 것이다. 설명을 듣고 다른 무덤들을 유심히 보니 제주도의 무덤은 모두가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주도를 여행한 사람들은 대부분 느꼈을 테지만 제주도의 문화는 우리네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르다. 표준말보다는 제주도만의 독특한 언어인 제주방언이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이 제주방언은 타 지역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꼭 타국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가이드가 제주방언이라고 몇 마디를 했는데, 같이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했을 정도이다. 통역 없이 이 지역의 방언을 소화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요즘은 제주지역도 많은 개발이 이루어져 도시화가 진전되고 있으며, 또 기존의 민속마을들도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제주 전통마을이 많이 사라져 가는 추세라고 한다. 그래서 한 마을을 전통마을로 보전하고 있는데 ‘성읍 민속마을’이 그 곳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참 특이한 문화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제주도를 아름답게 하는 것 중의 하나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바다’를 들 수 있는데, 바다를 끼며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도 멋지고,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마을은 여유도 있고, 평온해 보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이 제주도를 더 아름답게 해 주지만 정작 한라산은 기상이 안 좋은 제주날씨로 쉽게 보기는 힘든 산이라고 한다. 또한 제주도가 화산분출로 생긴 화산섬이어서 흔히 볼 수 없는 현무암 등의 돌 모양이 재미를 더해주며, 기이한 모양의 절벽 등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어 제주도의 독특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가 제주도를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제주도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관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볼거리, 먹거리, 숙박시설을 완전히 갖추어 세계 유명 관광지 못지않게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외국인들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관광지 곳곳에서 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외국인들도 아름다운 제주의 모습에 감탄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아름다운 제주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내년부터는 제주도에 제주항공이 설립된다고 한다. 직접 제주도 관광을 유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아름다운 제주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이란다. 참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 현재 한창 제주도에서는 항공설립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며, 또 아름다운 제주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기쁨의 함성이 나왔다. 아름다운 제주의 모습이 내 처음의 기억 속에 남아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