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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평 】
기억의 힘
- 강병철의 『닭니』와 『꽃피는 부지깽이』1) -
김 정 숙*
1.
누구나 ‘지금 여기’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 시간은 미래를 향해 있는 일직선의 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질적인 여러 시간들이 끊임없이 개입하고 간섭한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로, 때로 기억 혹은 추억이라고 부른다. 망각되거나 기억되는 시간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그릇에 담겨진다. 곧 서사물은 새롭게 재구성되고 다시 생성되는 시간예술인 셈이다. 서사물은 어찌 보면 시간의 중첩물인 ‘나’의 기억을 재생시켜 현재화하는 생성의 과정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강병철의 『닭니』(푸른나무, 2003)와 『꽃피는 부지깽이』(온누리, 2006)는 ‘기억’에 관한 서사이다. 두 작품은 ‘기억’에 관한 아련하고도 희망적인 표정의 형상화이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한 사람에게 있어 기억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이며, 실체험이라고 믿으며 떠올리는 기억들은 내면의 심리작용과는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시간과 인간 존재의 방식에 관한 또 다른 물음인 기억의 길을 따라가 보자.
2.
강병철의 『닭니』의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잘 타는, 커서 문학가가 되고 싶은 순진한 남자 아이 강철이다. 이 작품은 강철이의 초등학교 5학년까지의 이야기가 20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그려지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개별적이면서도 연속적인 파노라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친구들과 농게와 능쟁이를 잡곤 했던 60년대 한머리 바닷가이다.
『닭니』는 크게 네 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 자연, 맛, 그리고 희망이 그것인데, 이 공간들은 서로 편안하고 자유롭게 넘나든다. 사람- 개척단 공사단에서 다이나마이트가 터져 실명한 뒤 장님이 된 거지와 풋풋한 사랑을 느끼게 된 그의 딸 석연화, 꿈에 대해 알려주신 멋진 어른 노승방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을 서로 말하는 비밀의 동지 민구, 승모, 울어서라도 가까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던 할머니, 죽어서 초록 바다가 된 옥이 이모, 장기에서 어른들을 거뜬하게 이긴 동생 준철이와 가족, 이들이 강철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자연- 학교 숙제로 쥐꼬리를 가져가는 대신 오징어다리를 가져간 일, 어린 닭을 살리기 위해 하루 종일 엉덩이를 닭장에 대고 있다 닭니가 옮겨 붙어 고생했던 일, 장마철 병에 걸려 버렸던 돼지 새끼들이 다시 돌아온 일, 꿀벌들을 살리기 위해 말벌과 한판 싸움을 벌였던 일들은 강철에게 공존과 보살핌의 윤리를 갖게 해준 소중한 물상들이다. 맛- 익기 전에 몰래 서리해서 맛보았던 떨떠름한 풋사과, 국화빵이라고 불러주고 싶던 연화 어머니가 만든 풀빵, 예상치 못한 소문을 퍼뜨려 친구에게 미안해진 마음으로 건넨 라면, 비가 와서 못 팔고 남아 녹아내린 아이스케키를 눈물로 먹던 일 등은 오래도록 몸에 새겨진 ‘맛’의 기억감각이다. 희망- 마지막으로 우리는 커서 무엇이 될 것인가를 되뇌이는 희망과 초록 바다로 상징되는 미래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처럼 강철이가 겪은 일들에는 슬픔과 이별과 가난이 있고, 웃음과 엉뚱함과 희망이 있다. 또한 자잘하고 사소한 듯 보이는 어린 강철이의 독백과 감정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휴머니즘이 배어 있으며, 가난하고 불합리한 그 시대의 잔영도 비춰진다.
네 개의 방을 지닌 『닭니』는 그렇기에 토속적이고 정겨우면서도 질박하고 애잔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내용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짧고 간결한 서정적인 문체로 해서 더 빛을 발한다. 짧기 때문에 시인이 되고 싶다던 강철의 꿈이 곧 작가의 꿈인 양 “진달래 빨간 꽃잎이 유리창에 붙었다가 훌짝 퍼지곤 한다.”와 같은 세밀하고 감각적인 형상화의 문장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또한 구수한 서산 사투리의 대화체는 실재감과 소박한 정, 그리고 웃음을 유발하는 재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삽입된 연갈색의 삽화는 잔잔한 여운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표제 『닭니』옆에 “흙 향기 묻어 있는 알토란 같은 어린 시절 이야기”라는 부제가 있다. 책 어디에도 소설이나 동화라는 말은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질 수 있겠다. 만약 작가와 같은 시공간을 지낸 독자에겐 일기나 추억집에 가까울 것이고 도시에 살면서 60년대의 바닷가의 생활을 떠올리기 어려운 어린 독자에게는 허구적인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에 『닭니』는 실제이면서 허구이고, 경험의 강도에 따라 독자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닭니』는 작가의 유년 체험을 담은 자전적 동화라고 보면 무방할 듯하다. 장년이 된 작가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아련하게 반추하면서 각박해지고 삭막한 현대인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기대는 어릴 적 순수한 시간을 떠올려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본다면 작가의 자족적인 회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독자가 될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삶과 진정한 가치를 폭넓게 공유할 수 있는 ‘공유’의 힘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3.
유년시절의 기억을 풍경화처럼 그려낸 『닭니』를 지나 더욱 성숙해진 강철이를 우리는 꽃피는 부지깽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슬픔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조약돌이 되고 싶어” 하던 강철이의 첫사랑 연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것으로도 반가운 소설이다.
『꽃피는 부지깽이』를 이루는 24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강철이가 만나고 느낀 물상들로 채워져 있다. 각 장면들은 사진으로 그려낸 듯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 뇌의 주름에 저장되었다가 그 주름을 따라 정확히 나와 배열된 듯하다. 특히 우리말의 가장 큰 묘미 중의 하나인 다채로운 의성어․의태어들은 『꽃피는 부지깽이』를 실감나게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그 소리와 행동의 감각적 표현들은 먼 기억이 아닌 바로 얼마 전 겪었을 것 같은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람’에 관한 기억이다. 함께 놀고 싸우며 지내는 친구들을 포함하여, 몸에 장애가 있어 도시에서 떠나온 길수,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얼굴을 가진 연화, 그 연화를 위해 생강밭에서 두더지를 잡아 고여 먹이는 연화 어머니가 살아간다. 소망을 이루지 못해 양잿물을 마시고 죽은 성화 누나, 놀음에 빠져 가정을 뛰쳐나온 정래 아저씨, 바보천사처럼 성을 내지 않는 노승방 선생님, 빈궁한 살림에 쪼들려 사는 민구 아버지 조덕환 씨, 한 평생 어둠 속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난 장님 석 씨가 있다. 그리고 6․25때 아이와 아내를 모두 참혹하게 잃어 정신이상자가 된 바보 덕환아재, 생강밭 매다가 죽은 붕어 할머니 등이 한내마을에서 함께 살아간다. 60년대와 70년대 무렵을 살아온 이들의 모습은 미화되거나 윤색된 기억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들로 재현된다.
특히 강철이의 시선은 어른들에 향해 있다. 그의 눈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은 모두 소박하거나 가난하고 아프다. 그들의 삶을 대하며 강철이는 총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죽는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 각자의 마음에 상처의 옹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강철이는 아프고 어두운 사람들을 통해 성장해 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봐야 하는 것임을, 그리고 혼자만의 어둠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강철이를 통해 세상은 더욱 깊어지고 확대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비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유쾌하다. 슬프고 아련한 곳곳에 해학의 지뢰가 숨겨져 있다가 슬픔의 발자국이 무거워지면 ‘파하’ 터진다. 해학적인 능력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등은 없다.
관구가 몸에 뒤척이더니 눈 녹듯이 스르르 잠에 빠진다.
- 아버지. 태권도허구 레시링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유?
- 밥 자셨으면……퇴끼풀이나 뜯어오셔.
- 놓고치기 하면 태권도가 이기구 붙잡고 싸우면 레스링이 이기지유?
- 쌈에는 돌멩이가 최고여.(63면)
- 의사들은 참 돈 잘 벌데. 이빨 하나에 얼마씩잉가?
- 하나 뽑으면 보리쌀 한 말. ……갈퀴로 긁쥬.
- 준철이라도 의살 시켜야겠어. 강철인 마음 약해서 틀렸구. 준철아, 의사 해볼텨?
- ……할뀨.
준철이가 칡뿌리 씹다가 고개를 반짝 든다.
- 무슨 의사? 치과? 내과?
- 안중근 의사유.(112면)
비가 새는 초가집에 엄마 없이 사는 민구 형제들의 곤궁한 살림을 불행하지 않도록 넘겨주는 투박한 뚝배기 같은 아버지의 음성, 의사의 노동에 빗대어 보리쌀 한 말을 버는 농민의 고된 노동에 대한 탄식을 어이없게 날려버리는 8살 준철이의 외침은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음성들이다. 구구하게 설명하면 오히려 재미가 반감된다. 갈등 상황이나 심각한 국면을 단박에 와해시킬 수 있는 묘미, 이것이 해학이 주는 처방이다.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꽃피는 부지깽이』는 “현실을 대하는 진정성과 해학성”(안도현)이 맛나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해학이 있되 그 안에는 애틋함,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가 녹아 있다. 아름다운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유도 눈동자에 어린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퍼두 실지루 맞은 거처럼 아플 수 있어. 가슴이 아플 땐 실지루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닝깐.(78면)” 어느 새 강철이는 마음의 키가 쑤욱 자란 것이다. 그 마음은 관구의 ‘식모살이 꽃신’을 잡아주기 위해 진둔벙에 뛰어들어 죽기 직전의 장면으로 극대화된다. 마을 사람들이 ‘인간띠’처럼 손을 이어서 마침내 강철이를 살리는 장면, 그 순간에 강철이가 본 ‘부지깽이나무!’ 퇴비더미 옆구리에 뿌리 내리던 부지깽이나무에 새파란 빛줄기가 터져 나오고, 그 빛줄기 속에서 무꽃 배추꽃 깨꽃 무더기로 하얗고 노랗게 피어오르며 일제히 환한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오랜만에 맛보는 가슴 뭉클한 영상이다.
마지막 장의 제목인 「우리들의 그림자」는 ‘우리’와 ‘그림자’의 관계를 의미 깊게 관계 짓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흔들리면서 어깨를 촘촘히 붙이는 것과 이전 장들에서 개별적으로 호명된 ‘그’가 ‘우리들’로 확대되어 수렴되는 과정은 행복이란 함께 나누며 “그렇게 기대며 살아가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침이 많은 삶일수록 그림자는 웅숭깊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종결된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꽃피는 부지깽이』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강철이가 겪은 그 황홀함은 가난하고 결여된 살이에도 행복이 깃들 수 있음을, 소박하고 친근한 꽃이 될 수 있음을 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행복은 어쩌면 마음의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것, 부지깽이에 꽃을 피워 다른 존재들을 품는 것과 같다. 아궁이 불길로 새까맣게 그을린 부지깽이나무에서 꽃이 피는 감격처럼,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의 마음밭에는 이미 행복의 꽃이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4.
『닭니』를 읽기 전에 소설가 강병철을 보았다. 소탈하고 투박한 외모와 말씨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영락없는 시골내기이다. 그러면서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 같은 특유의 고집스러움도 보인다. 그 기억이 오래될수록 두 작품의 인물들과 배경들의 형상과 그 여운은 더욱 또렷해진다.
유년의 기억은 메마른 눈물샘에 감성을 싹트게 하는 자양분이다. 그러기에 사건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행복의 공간, 그 가능성의 공간이 의미 있는 것이다. 닭니를 잡 던 일, 죽음을 푸르게 감싸 안은 바다, 덕환 아재 집에서 쥐들과 함께 나눈 숲속의 행복한 잔치 시간, 부지깽이에서 꽃이 핀 시간은 어리고도 아름다운 우리 모두의 행복한 시간이다. 『닭니』와 『꽃피는 부지깽이』는 행복을 느껴가는 아련한 성장소설이며, ‘진한 사연들 나뭇잎처럼 훌훌 털어낼 시점’에 이른 작가 강병철이 벼리며 쓴 행복의 숨결이다.
오늘, 저 가슴 밑바닥에 자라고 있을 나의, 당신의 오래된 이야기가 궁금하다.
* 충남 논산 출생,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metahope@hanmail.net
1)이 글은 타 잡지에 각각 실린 글을 일부 수정 및 보완한 것이다.
세헤라자데… 캐비닛을 열다.
고 영 진*
우리는 왜 캐비닛을 여는가?
우리가 눈만 뜨면 찾을 수 있는 ‘최신’이라는 접두사를 가진 모든 것들은 사실 창조보다는 업그레이드에 중점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 얼마나 보완 업그레이드 했는가가 ‘최신’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다. 때문에 세상엔 완벽한 ‘새 것’은 없다. 유통기한이 짧은 ‘신(新)’의 반복 때문에 사람들만 쉬이 무료해질 운명을 짊어져야 했다. 언제나 유행하고 있는 ‘복고(復古)’는 어쩌면 우리 상상력의 한계를 증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 치명적인 운명적 결함을 무디게 해준 것이 언어, 즉 말이었다. 이를테면 포장이다. 한정된 유전자와 한정된 자원에, 한정된 공간을 살아가면서도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말의 기술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지금은 말의 시대이다. ‘무엇’보다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이야기되는가가 중요한 시대이다. 본질 위를 바스락거리며 덮고 있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포장지, 그에 따라서 같은 것도 다른 것이, 다른 것은 더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세상살이의 진위가 경계를 잃고, 기준도 잃고, 판단해 줄 권위자도 딱히 없자 우리는 이제 ‘진짜 찾기’를 멈추고, 내 것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증명되어온 말의 권력이다. 이 와중에도 본질은 불변이라는 고루하기는 해도 안정감 있는 신뢰를 구축해왔다.
침묵은 금이라 했지만, 금만큼 시세가 유별난 귀금속도 없다. 침묵도 그렇다. 우리는 떠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떠드는 일이란 금 시세만큼 시류를 타는 일이다. 몇 백 년 전, 이국 땅에선 천 날 밤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근사한 포장지가 있었는가 하면, 살짝 잘못 꾸겨진 포장지 때문에 날아간 수많은 대권과 결혼과 인기와 국제적 위상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면에서 그 말들을 기록하는 ‘텍스트’는 증거로 남아 시류대로 다시 한번 값이 매겨진다는 점에서 화자에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다.
여기 8,90년대 동사무소에나 유행하던 낡은 캐비닛을 포장지로 선택한 이야기가 있다. 이 삐거덕거리는 13호 회색 캐비닛은 너무 낡아서 자칫하면 손을 다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열기도 전에 선반마다 희귀한 말들을 떠드는 낯선 목소리들이 심상치 않다. 진열을 정리하고 재배치하려면 크게 각오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재미난 이야기라면 일가견이 있는 우리들, 사실 시대에 가장 발맞춰야 할 것은 핸드폰이나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말’이고 말에 대한 기술이다. 이야기를 멈추지 않아야 천 날밤을 살아 이어 나갈 수 있는 우리들이 캐비닛을 연다.
제1선반 : 자주 쓰지는 않지만,
가장 좋은 것을 넣어두는…
세상에 ‘완벽하게 낯선’ 것이 없다는 것은 여름이면 어김없이 유행하는 공포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낡은 폐가, 버려진 병원, 외딴 섬, 폐교 안에 지난 비밀이나 죄를 감춘 낯선 인물이 흘러들어 온다. 그리고 시점을 같이하여 어김없이 목이 꺾어진 채 피눈물을 흘리며 무한 다크써클을 동반한 하얀 소복의 귀신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엑스트라나 준 조연들은 맥없이 비명횡사하고 주 조연들은 마지막 순간에 몇 가지 힌트를 남긴 채 공포를 증폭시키다 죽는다. 때문에 주인공은 쉽게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다. 이때 공포영화를 맨 뒷줄에서 보면 사람들이 거의 모두 같은 장면에서 놀라고, 소리 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서움에 대한 인지차이는 개인사에 기반을 두고 있을 테니, 같은 장면에서 모두 놀라줄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누군가에게서 ‘무서움’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옆 사람에게 질세라 소리를 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이것은 온전히 새로운 나의 공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의 ‘사회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공포마저 공동의 인지 영역 안에 있어야 만족하는 우리는 낯선 것을 보았을 때 당연히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우리들에게 우선 이상한 것을 먹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불편함을 시작한다. 휘발유를 마시며 연비를 계산하는 사람, 유리나 강철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 사람, 재미없는 기사가 난 신문은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흙이나 책을 먹는 사람들, 그리고도 아무런 ‘이상’ 없이 잘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가 먹지 않는 것을 먹는다. 우리는 이들을 보면 우선 “어떻게 그런 것들을 먹고도 생명을 유지”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다음으로 “왜 그런 것을 먹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의 시선을 끌기 위한 속임수나, 무모한 짓으로 빈정거리고 잊어버린다. 하지만 반대로 물어보자. “우리는 왜 저런 것들을 먹지 않는가?”
인간은 생활을 유지하는 힘을 어디에서 얻는가? 과연 그것이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물에서 오는 것이 맞는 것일까? 수많은 영양관련 학자들이 분석해 놓은 성분들이 ‘정말’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가? 사실은 “그렇다”고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에너지화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굶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명제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을 반복한다. 때문에 유리나 강철 또는 고무에 그 영양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부여한다면 -먹는 즐거움이나 맛의 다양함을 보장할 수 있다면- 그것들만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일 또한 이론상으로나마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먹는 행동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 사이에 일정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가르시아 효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심토머(Symtomer)라 부른다. 심토머는 가속화 된 변화의 징후들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화의 준비가 되지 않는 세계에 ‘미리’ 또는 ‘이미’ 등장했다는 한계를 가진 자들이다. 때문에 진화에 대한 전조현상이나, 후유증을 앓을 운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징후들을 만나게 되면 모두 놀라거나 불편해한다. 물론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토머들의 이야기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당연히 불편하다. 하지만, 일단 화자는 ‘이상’한 사람이나 상황에서 ‘평범’ 하게 비웃거나 놀라면서 독자와 공모하는 듯한 위선적 면모도 잊지 않고 불편함을 속도감 있게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화자를 우리 편이라 믿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수많은 심토머들을 조금 더 쉽게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만 허락한다면 유형화해보고자 한다. 다만 놀랍고 다양한 능력을 가진 그들이 마음을 상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분류법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여기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심토머들이 존재한다. 우선 조금 이상해서 언뜻 보고는 알 수 없는 1단계 심토머와 확연하게 드러나는 신체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 좀 더 많이 이상해 보이는 2단계 심토머,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는 없으나 알고 보면 상당히 위험하기까지 한 3단계 심토머들로 쉽게 구분해보고자 한다. 각 단계들은 발전의 양상이 아니라 다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각기의 위험성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우리에게도 고양이가 되고 싶은 순간이나,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순간이나, 하늘을 보며 외계인을 만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열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아가기엔 너무 바쁘다. 그것이 언제나 순간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상한’ 취급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그 이상한 순간이 멈춰 버린 사람들이 있다. 고양이에게만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고양이로 변하길 간절히 원하는 황봉곤씨나, ‘평범한’ 먹거리에는 전혀 식욕을 느낄 수 없는 안세철 씨, 그리고 “조금 늦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외계인들의 신호를 기다리는 고두식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을 낯선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고양이가 될 방법이나, 외계인의 신호를 지나쳤을까 고민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조금 과도한 “취미”나 여가활용 삼아 넘어가줄 수 있다. 불가능했던 미션을 여러 번 처리했던 세계적인 배우도 외계인을 신앙처럼 믿는다고 하니 이는 검색엔진 해외 토픽란을 클릭하면 널리고 널린 이야기이다. 그들은 다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채로 진지하게 계속 살아갈 뿐이다.
1단계 심토머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징후들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2단계 심토머들 경우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물리적 ‘이상’을 보이기 때문에 다르게 분류된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잠을 자는 토포러들(Torporer), 또 다른 나를 볼 뿐만 아니라 사랑까지 나눈 도플갱어 옥명국씨, 어린 시절 죽어버린 샴쌍둥이를 자꾸 만나는 여인 치(齒), 만들어 붙인 나무 손가락이 완벽하게 육질화 된 이쑤시개 공장의 피노키오,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스키퍼(Timesikpper) 강기자, 남녀 성기를 모두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neo-hermaphroditus), 서로 영혼과 육체를 바꿔 사용할 수 있는 다중소속자들1)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역시 세련되고 모더니틱한 발상의 전환으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진화의 징후들을 대부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 징후들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징후의 일상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때문에 토포러들은 다시 잠들 때를 위해서 꿈을 모으고, 타임스키퍼는 잃어버린 시간을 공유할 사람들을 찾고, 불행한 자신을 남겨두고 자꾸 죽어버리는 도플갱어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적당한 절을 찾기도 한다. 남에게 일어난 징후는 가쉽이지만, 내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징후는 일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이들 중 관심을 받는 심토머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끼 손가락에 은행나무를 키우고 있는 작은 문구점 주인 김우상씨나 혀 밑에 도마뱀을 키우고 있는 여자이다. 이들이 관심을 받는 것은 선택형 인간 연구나 인간병기 연구에 이들의 유전자가 활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검은 양복의 K가 20억을 걸고 캐비닛의 관리자인 공 대리에게 요구한 자료도 바로 이들에 대한 자료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테러리즘적인 발상이다. 경이로움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상품 가치로서의 자본주의적 정신을 캐치하는 센스는 어디서나 경이로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검은 양복의 K도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3단계 심토머들이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는 없지만 가장 위험하고 동시에 예술적 가치를 가진 존재랄까? 그들이 바로 메모리 모자이커(Memory mosaicer)와 블러퍼(Bluffer)이다.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완전하게 지우거나 조작함으로써 상실과 폐허로부터 벗어나는 자들이 메모리 모자이커들이다. 붉은 장미의 모임 회원인 피아노 치는 법만 완전하게 지워버린 피아니스트 Y, 신앙적 양심을 저버린 기억이 “실재”하는 지 고민하는 L신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믿는 정비기사 한씨, 한 해를 통째로 홍당무 하나로 바꿔버린 송 마담이 그들이다. 이들은 초기 우울증 치료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시작되었던 기억변형 기술을 변형 발전시켜 인위적인 기억조작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기억을 조작하고 지우고, 결국엔 남아있는 조작된 기억을 “사실”로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잔상까지 없애 버리거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까지 지워 버릴 테크닉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때문에 괴롭다. 메모리 모자이커들의 한계는 결국 자신의 기억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점에 있다.
사실 메모리모자이크는 그리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괴로운 기억은 잊고 싶다고 하지만, 윌 스미스가 흔드는 빨간 막대를 이용하는 데에는 주저한다. 괴로운 기억만 뽑아서 지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인과관계이다. 때론 영원히 “과”를 만들지 못하는 “인”도 있지만, “인”없는 “과”는 없다. 폐허와 같은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린다면 “과”만 남는다. 또 어느 부분은 이 빠진 “과”가 된다. 지구 주변을 떠다니는 수 억 개의 별보다도 복잡한 것이 뇌의 메커니즘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억을 지우는 대신 기억을 조작한다. 그 편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주의 심토머는 블러퍼이다. 이는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사람들로 악어공포증, 거미공포증, 고소공포증의 소소한 징후를 호소하지만 공포의 대상을 마주하면 환상을 실제의 영역에 실연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상상하면 실재가 된다. 악어공포증에 시달리던 남자는 문이 잠긴 방에서 “흡사” 악어에게 물어뜯긴 모양으로 죽어갔고, 거미공포증의 여자가 실수로 베인 귀에서는 거미들이 쏟아져 내린다. 심각한 고소공포증으로 지면에서 발이 떨어지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소녀는 불과 30cm의 높이에서 떨어져 갈빗대 6개가 나가는 중상을 입는다. 이쯤 되면 소심한 사람들이 하나쯤 갖고 있는 트라우마라 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크다. 매트릭스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단지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만, 고층 빌딩에서 떨어졌다는 상상만으로 네오의 입안에는 피가 고인다. 이는 내면에서 증폭된 힘의 위력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Bluffer를 굳이 해석하면 이는 허세나 속임수를 부리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것이 징후로서 의도되지 않는 것 또는 의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Bluffphobia 정도의 조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허세공포증 말이다. 환상을 촉진(觸診)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공포이다.
이들이 가장 심각한 심토머로 분류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들은 ‘다수’로 분류될 외부적 요소와는 달리 내면으로는 얼마든지 가공할만한 낯선 징후를 가진 완벽한 중간지의 인류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이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다수 속에 섞여 살면서 그 어떤 심토머들보다 강항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되리라”는 화자의 장담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균형을 중시한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정치에 나서고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모양이다. 나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내 삶의 주변의 상태까지 진공상태로 포장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타임스키퍼가 되는 사람들 대부분 시간관리가 유별나게 철저했던 사람들이었던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별거 없이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우리는 다음에, 내일에, 내년에, 십년 후에 할 일을 위해 지금을 살고, 지금을 저금하고 지금을 계획하고,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한다. 늘 항상 “조금 있다”를 위한 사람들은 언제나 “지금”을 잃기 마련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타임스키퍼가 된다. 지금 자기 자리를 보면, 여기까지 온 과정을 모두 디테일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이 불안하면 그 안에 제멋대로 근사한 기억을 조작하여 삽입하고 만족스러워 한다. 때문에 메모리 모자이커가 된다. 토포러를 원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위험한 블러퍼이며, 한 두 개의 ID에 기본 4~5개의 패스워드를 돌려 사용하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다중소속자가 분명하다. 다만 우리에겐 징후보다 잘 감추고자 하는 열망이 더 클 뿐이다. 합리화는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다.
우리는 어디에선가 황봉곤 씨를 만나면 비웃을 것이다. 대화를 나눈다면 처음에는 신기해하고, 설득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고 그 다음에는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빈정거릴 것이다. 이 소설은 빈정거리는 것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며, 우리 삶의 어떤 불행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세계의 조건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우리는 정상이 아니라 다수일 뿐이다. 때문에 이 캐비닛 안의 심토머들은 장치일지 모른다. 정말 “이상”한 우리들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안전한 장치..
제2선반 : 배치에 가장 신경을 쓰지만,
눈높이가 가장 맞아 어질러지기 쉬운…
이 소설은 유명 계간잡지 신인상을 거의 만장일치로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또 한번 특이하다. 자칫하면 “세상에 이런 일이” 번 외편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소설일 수 있게 한 것은 사실 첫 번째 선반에 있는 낯선 “것” 보여주기가 아니라, 그것을 배치하고 포장한 기술에 있다. 낡디 낡은 캐비닛 문을 열고 작가는 배치를 시작한다. 이 캐비닛을 연 누군가가 내용물을 보다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해선 첫 선반에서 마지막까지 정리를 잘 해둬야 한다. 때문에 공 대리는 말한다. “무엇이든 ‘형식’이 최고” 라고..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을 1등의 자리에 올려놓은 첫 번째 열쇠이다.
허를 찌르면서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법, 이는 기본이면서 언제나 일탈을 시도하는 영역이다. 정석이면서 언제나 깨어지기를 원하는 것, 산산조각 상태에서도 정도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소설에 있어서는 서사이고 플롯이다. 다양한 주연 아닌 주연들을 등장시키면서 관찰자 위치에 서 있는 진짜 주연은 단 2명의 열악한 지원사격으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잡아간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하다. 심심한 연구소 직원이 어쩌다 발견한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들을 읽다가 원래 보관자였던 주인에게 들켰으나, 오히려 책임자로 임명되어 관리하다가, 그 서류의 주인들을 만나고, 또 다른 관리자를 만나고, 그 서류를 탐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다만, 그 직원이, 서류가, 주인이, 또 다른 관리자가, 서류를 탐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기에”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이럴 때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우선, 공대리는 왜 캐비닛을 열었는가? 에서 시작하자. 그것은 '무료함'이다. 공 대리는 지독한 무료함 때문에 연구실을 어슬렁거렸고, 무료함 때문에 그 캐비닛에 관심을 보였으며, 또한 무료함 때문에 0000부터 시작하는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맞춰 열고, 그러고서도 무료함이 가시질 않아 그 안의 파일들을 읽어 나간다. 처음엔 역겨움과 낯설음에 몸서리치던 그도 역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무료함 때문에 그 파일들에서 눈이 떼지 못했고, 때문에 그 파일들을 만든 권 박사와 또 다른 기록자 손정은 씨를 만나게 된다.
무료함이라는 말은 안정이라는 말을 전제한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료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일단은 저렴하게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집이나 직장, 통장이 있어야 하고, 특별히 앞두고 있는 대소사가 없어야 하고, 넓게 보면 전쟁이나 유가폭등 같은 일들이 당분간 자제되어야 하는 상황, 그래야 무료함은 찾아온다. 일단 우리의 공 대리는 그 무료함을 온몸으로 관통한 관록 있는 경험자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취업은 안 되고, 애인과 헤어지고, 오래 동안 기르던 개까지 잃은 삼재이상의 재앙을 겪은 그 해, 공 대리는 엄마가 남겨주신 약간의 유산으로 약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양의 캔맥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450박스의 캔맥주를 178일간 마시는 동안 공 대리는 약간의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와 생수를 번갈아 마시고, 캔을 찌그러트리고, 던지는 행동을 반복하며 그 시간들을 흘려보낸다. 누구에게나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 방법으로 공 대리는 무료함을 선택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공덕근 역시 심토머의 징후를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78일 동안 2000만원 상당의 캔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철이나 유리를 먹는 사람이나, 혀 밑에 도마뱀을 기르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 그가 캐비닛을 열고 권박사를 만나고 또 다른 기록자인 손정은 씨와 인연을 맺고 살게 된다. 이 간단한 플롯은 심토머라는 또 다른 주연들과 적절하게 배치되면서 새로운 위치를 확보한다. 심토머를 완전한 거짓 또는 완전한 사실로 “결정”내릴 수 있는 담력만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심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권 박사는 왜 공 대리를 선택했는가? 와 손정은 씨는 과연 누구(또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전히 인간이라는 종을 수치스러워 하는 괴팍한 노인네 권 박사2)는 우선 연구실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로 공대리가 캐비닛에 접근하는 순간부터 파일을 읽어가는 과정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공 대리를 신고하거나 해고하지 않고 캐비닛의 관리를 맡긴 것은 아마도 공대리가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0000부터 맞춰나가기 시작한 때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직장인이 근무시간에 자물쇠 비밀번호를 맞춰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호기심 게다가 끈기와 기억력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이 캐비닛의 비밀번호는 1234 따위가 아니라 7863이라는 공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열쇠였다. 그리고 공 대리는 허황되기 그지없는 13호 캐비닛의 파일들을 감동스럽게 읽어나가는 마무리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 대리는 심토머들을 오프라인 동영상으로 만날 채비가 자연스럽게 완성된 것이다. 때문에 권 박사는 한가하고, 무료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고, 호기심이 있으며, 거기에 끈기까지 있는 공 대리를 선택했고, 허영의 산물, 이기심의 총체라는 자신의 캐비닛을 맡겼으며, 작가 역시 같은 계산으로 그러한 우리 같은 독자들을 선택했다.
이때 재미난 것은 공대리가 “권 박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 우리는 “이건 내가 만든 파일도 아니고, 내가 보관해 오던 것도 아니야. 나도 권 박사에게 처음 들었어. 나도 처음엔 많이 놀랐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 너희도 읽어서 알잖아. 그런데 말이지.. 이게 말이야 자세히 보면...”의 억울하다는 식의 공 대리의 화법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이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공 대리는 우리 편에 서 있는 척하면 권 박사의 작업에 자신이 참여하는 감정을 세세히 기술하면서, 독자를 참여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말은 기술이 반이다.
또 다른 관리자 손정은 씨는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사내에서 따돌림 받는 사람이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회식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말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하대할 권리를 확보한 듯 행동한다. 게다가 보는, 듣는 앞에서 험한 말을 지위와 나이와 남성이라는 이유를 무기삼아 떠들어댄다. 그런데 듣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떠드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녀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직접 낸 상처가 아니라는 소심한 면죄부를 안고 “입닥치고” 비굴하게 웃을 뿐이다. 인터넷 뉴스만 검색해도 “인간이 어떻게”라는 말이 나오는 일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하기 지쳤든, 내성이 생겼든 하여간 분노하지 않는다. 뒤틀어진 상황은 언제나 심토머를 잉태하기 좋은 토양을 마련한다.
거대한 고슴도치, 샌드백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손정은 씨는 딱 한 가지, 먹을 것 앞에서 달라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초밥 앞에서 달라진다. 정은 씨는 공 대리와 25만 원짜리 특대형 초밥을 시켜 놓고 백 오십 개 이상을 먹어 치우고 나서는 평범하게도 쑥스러워 하며 괴로워한다. 사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는 그녀의 삶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대신 그 어떤 충격스러운 사실을 접한다 해도 덤덤하게 흡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면이 벗겨진 괴물들은 모두 무해하다. 그녀의 존재는 충분히 심토머를 현실적인 존재로 자리 잡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좀 뚱뚱하고 말이 없고 음침하고 비사회적이고 급하게 좀 많이 먹을 뿐이다. 유리나 철을 먹는 것이 심토머의 징후이면 많이 먹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과연 그녀는 심토머인가?, 아닌가?
이 소설은 권 박사가 만들고, 공대리가 관리하며 손정은 씨가 보조하는 심토머들의 에피소드들이 독립적이지만 유기적으로 관계 맺으며 진행된다. 사실 이 소설의 각 장은 낱개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배치의 맛을 본 뒤라면 묶음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토머는 세 사람의 인생에, 세 사람은 심토머들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 박사의 철칙이며, 두 사람 역시 그럴 위험이 없기에 선택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심토머 “반대편”의 사람들을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면서 소설의 활력을 준다. 이들은 심토머를 “읽고, 대화화고, 만나고, 들으면서” 달라진다. 그들은 역겨워하고, 신기해하고, 믿지 않다가, 차츰 이해하고, 감동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는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타임스키퍼 강기자의 전화를 받고 공대리가 짜증을 내는 이유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무력함 나아가서 마치 “버스에다 우산을 ‘또’ 놓고 내렸어?”식의 짜증이다. 일상이다. 그러한 배치, 이 희귀한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주는 서사와 플롯, 그것은 이 세 사람의 몫이다.
많은 심사위원들과 평론가들이 이 소설의 한계와 위험요소로 마지막 3부 “부비트랩”의 폭력적인 결말과 권력적 화자를 든다. 여기에서 서사는 급진전을 보인다. 신나고 유쾌한 이야기 뒤로 엄청난 결말이, 자본주의적 거래가, 냉전시대를 연상시키는 납치, 피가 튀거나 신음 소리가 없는 현대식 고문, 그리고 첩보전에서나 볼 수 있는 추격전 그리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 박사는 자신의 사후 13호 캐비닛의 관리자로 100만원이라는 애매한 월급으로 공 대리를 선택했고, 손정은 씨를 예비자에 올려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공 대리는 검은 양복의 K가 20억을 조건으로 원하던 키메라 D303407 3) 파일을 대주지 못해 고난스러운 고문 끝에 손정은 씨에게 피신했다가, 안전가옥으로 옮겨 여전히 13호 캐비닛을 관리하고 있다. 유쾌한 설레발 뒤의 이러한 폭력적 결말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으로서도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있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의 최신 유행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수미쌍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데 많은 점수를 주었다.
왜 작가는 이러한 결말을 배치했을까? 거대한 거짓말을 정리할 방법이 없어서? 아님, 모든 비밀은 어떤 땅콩 모양 섬의 12호나 14호가 없는 13호 캐비닛 속에 있고 그 열쇠는 공대리만이 가지고 있다는 신비주의 전략? 이는 사실 심토머를 이 세상에 소개한 사람치고는 무책임하다. 게다가 수많은 유혹과 실수가 인계철선으로 부비트랩을 건들어서 오는 불행이라는 설정 역시 폭력적이다.
환상을 다루는 방식 중, 흔치 않게 보통 이상의 폭력적 장치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환상 경험에서 벗어나 원래의 위치로 복귀하는 극단적 방법이며 이 때 경험자는 환상을 특정 영역에 그대로 두는 심리적 상태에 이르며 안정감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 폭력적 장치가 잘못 사용되면 환상은 그저 호러나 스릴러 또는 액션물이 되고 만다. 환상에 있어 결말은 언제나 플롯의 난항이지만, 아직까지는 역시 신비주의가 대세인 듯하다. 절대반지의 유혹을 이겨낸 호빗족 역시 흰 배를 타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떠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역시 캐비닛 손잡이를 비트는 사람 마음이다.
제4선반 : 앉아서 물건을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
별 힌트도 없이 죽어버린 권 박사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고문에 더 말도 안 되는 봉합으로 풀려난 공대리가 벤치에서 처음 한 생각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였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고 만난 세상은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다. 발 한번 떼지 않고 살아온 그 도시 전체는 통째로 낯설어진다. 공 대리의 싹둑싹둑 잘린 폭력적 신체와 엉망인 봉합 그 자체가 환상을 관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을 환유한다. 동시에 환상과 맞닿은 자, 또는 환상의 영역에 깊이 관여한 자가 환상을 공식화하거나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는 환상이 리얼에 뿌리내리는 좀 거친 방식일 수도 있다. 소설의 결말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증상의 측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심토머들을 처음 접한 공 대리는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하지만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어느 날 삶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와서 정면으로 우리를 노려 볼 때가 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공 대리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나는 표를 모아요, 직장을 자주 바꿔요, 콘플레이크만 먹어요, 지하철을 탈 수 없어요, 귀에서 자꾸 벨소리가 들려요, 오로지 일만 해요, 빚이 많아요. 나는 심토머인가요?” 이런 질문 하나 갖지 않은 자 없고, 또는 이것보다 더한 증상을 가진 자 역시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혐오감에 중독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엄청난 심토머들을 접하면서 신경적으로 정서적으로 마취를 당한 상태이다. 때문에 초현대식 고문을 자행하던 고문기술자의 말과 같이 우리가 처한 고통과 상실에 대해서 좀 더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평범”이란 무엇이겠는가. 산술적인 다수는 평균치일 뿐이다. 사실 처음에는 모두 낯선 것이다. 때문에 여기에 “그런데 왜?” 라는 건 없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13호 캐비닛 안의 심토머들이 공 대리의 “공식”적인 업무로서 관리된다는 점이다. 공대리가 권 박사 사후에도 임금을 지급받기로 한 공식적인 계약서도 있다. 게다가 이를 지속적으로 집행해줄 대행회사까지 있다. 우리는 문서나 서류, 연구실이나 박사에게 어떤 낡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신뢰와 이어지기 마련이다. 또 하나, 입 안에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이야기도 그렇다. 그 여자가 키운다는 도마뱀 스피어닥티루스 아리아시4)를 재미삼아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 도마뱀이 “실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에 오히려 배신감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사실 또는 완전한 거짓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이는 배신이다. 이 도마뱀은 “사실”이다. 적어도 발견된 사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증상과 징후들에 대해서 상상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는 진언 덕분에 마음을 푹 놓았던 독자들은 실재하는 이 도마뱀 한 마리 때문에 모든 배치를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현실과 환상이 경계를 타는 양상을 보여준다. 사실 아직은 환상을 다룬 모든 영역의 정형성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긴장감을 잃지 않고 경계타기에 성공한 것이 이 소설이 ‘1등’을 거머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낯선 것이 불편한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캐비닛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낡은 캐비닛을 닫고 손잡이를 살짝 비틀어 고장 내주면 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캐비닛은 그 자체가 징후이다. 그래야 안전하다. 환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 세상에서 환상이 있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배치를 뒤바꾸고 자신의 야망을 깜찍하게 감추는 것이다. 이제 가장 구사하기 어려운 소설적 기법은 “낯설게 하기”가 되어가고 있다. 하늘을 날고, 달나라에서 토끼를 잡아오고, 얼굴을 보면서 통화하는 환상은 이미 정복되어진지 오래이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환상은 가장 작은 곳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우리들의 일상이다. 환상이 디테일한 영역을 파고들면 들수록 울림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는 새로운 낯설게 하기이다.
환상을 관통한 사람들의 폭력적인 변화는 아직 환상에 대한 문화적 토양을 갖추지 못한 우리의 탓일 수도 있다. 환상은 그대로의 환상이지만, 환상을 배치하고 기능하게 하는 환상문학은 고도의 상징과 은유의 기술이다. 심토머가 새로운 인간의 종, 징후를 가진 종, 신인류와의 중간지라면, 환상을 말하는 작가 역시 새로운 전진화자, 중간화자, 징후를 가진 화자일 것이다. 리쾨르의 해석대로라면 이는 철학이 언제나 목말라 하던 에테르의 질료가 될 수 있다. 신화가 되는 것이다. 다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정상 또는 이성 또는 평범의 틀과 싸워야 하겠지만, 이는 신화가 또는 시초가 사회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소설은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어 왔던 새로운 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권 박사는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새로운 후손이라 말한다. 우리는 심토머를 인간이라 부를 수도 있고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심토머로서의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에게 공룡들의 과감한 결단을 요구하는 권 박사도 있다. 더 나은 종을 원할 수도 있고, 이제 그만을 외칠 수도 있다. 그것은 희망일 수도 있고, 절망을 넘어서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타기가 잉태한 새로운 종족들이다.
황봉곤 씨가 고양이가 되고 싶어 찾아간 마법사는 고양이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년은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팡이를 흔들고 빤짝이 가루를 뿌린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은 없다. 마법은 오랫동안 서서히 진행되고, 진화될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 서서히 진화의 움을 트는 것이, 그 징후가 심토머인 것이다. 그것이 마법이고 언제나 토양에는 진화의 대상의 멈춰있던 상상력이 삐거덕거리며 캐비닛 문을 열었을 때의 손잡이가 있다.
다만, 아직은 경계타기가 대세이다. 한쪽으로 기울면 그 때부터는 적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하단 작은 서랍 : 캐비닛을 잘못 닫으면 문에
손가락을 다칠 수도...
- 심토머를 만났을 때 주의해야 할 점 -
혹시 사막폭풍을 일으키고 다니는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와 호주의 테즈메이니아 호랑이의 돌연변이나 변종이라고 추정되는 ‘캘리포니아 나무개’에 대해 들어 본적 있는가? 이 정체불명의 생물체들은 “See And Believe!”라는 팻말 아래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와 갤러리 「코미디즘」에 소개되었던 동물들이다. 세기말에 먼저 징후를 드러낸 건 역시 위험과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 동물들이었다. 애초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 되고 싶었던 것은 이와 같은 동물의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었던 인간이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은 하나의 인간이 여러 종류의 동물을 동시에 욕망했기 때문이다.
호언장담했듯,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캐비닛은 백민석의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의 업그레이드 모드이다. 엽기로 설명되던 그의 징후들은 한때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지만, 이제 그는 글을 쓰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오징어 모양의 섬에서 새로운 박물지를 관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는 공 대리에게 캐비닛 관리 외의 숙제가 될 것이다.
루저 실바리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기록은 가짜일 수 있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사람은 죽어도 블랙박스는 남는다. 모든 진짜는 사라지고 진짜로 추정되는 기록만 남는 것이다. 블랙박스만도 못한 생명, 진실만도 못한 기록. 공덕근은 악질적인 죄 때문에 살아남은 아이러니의 결정체인 루저 실바리스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이 소설은 「상피에르 사람들」의 21세기 한국버전인 셈이다. 때문에 이야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어딘가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로 방영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타는 일 외에 무엇보다도 고유의 영역에서 가치평가를 받을 만한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게 된다. 고유한 영역이란 그만큼 중요하다. 이건 설득력을 확보하는 기초이다.
우리는 너무도 다양한 관계와 복잡한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1차원적 심토머로는 눈에 띄지도 못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심토머는 멀티고 다차원적이다. 때문에 현실에서 심토머를 만난다면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여기에는 몇 몇 권위자들이 권한 처방전이 있으니 모두 따라해 보는 것이 좋다. 캐비닛 관리자 공 대리는 환상은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냄새를 맡아보라고 권하며, DVD5)의 심땀은 환상에 대고 손끝을 세 번 치는 촉진법을 권한다. 하여튼 무엇이라도 해보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환상에게는 말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말을 나누면, 환상을 벗어나 돌아 나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캐비닛을 닫을 때, 어떤 달콤한 눈물이 유혹하더라도 잊지 마시라! 이는 당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 있다.
겸손을 가장한 오만한 문체로 작가는 시종일관 묻는다. 당신은 심토머인가? 그리고 또 하나 아직도 당신 침대 밑의 악어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중요한 명제는 우리들의 세헤라자데
덕근씨가 다시 한번 “무료하고, 무료하고, 무료하다”는 것이다.
* 대전 출생, 충남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silra77@naver.com
1) 이 작품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중소속자로 예를 든 자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이는 오히려 팀에 가까우며 미래학자,
천재 과학자, 해부학자, 의학자, 화가, 건축설계자이자 건축가, 수학자, 물리학자, 발명가, 무기제조가, 엔지니어, 지질학자,
천문학자, 생물학자, 화학자를 완벽하게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다중소속자들이 다빈치의 몸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2) 누구하나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이는 정말 필요한 존재이다. 누구 한 명 쯤은 아니, 언어의 문제가 있으니
까.. 그 나라 정서에 맞게 설명하려면 원어민으로.. 한 나라에 한 명쯤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3) 이종교배를 가능케 하는 유전공학적 기술, SF적인 환상
4) ‘세계 최소 파충류' 16mm 도마뱀 발견 (동아일보, 2001,12,10.)
5) 천계영, 「DVD」, 서울문화사, 2005.
진창에서 핀 꽃, ‘사랑’을 노래하다
- 김해자, 『無花果는 없다』(실천문학사, 2001. 5) -
김 도 희*
1.
김해자는 미싱사, 노동자출신의 시인이다. 그녀를 명명할 때 노동자출신 시인이라는 호칭이 붙는 것처럼, 그녀의 시 속에서도 노동의 기억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아니,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게 시화되어 있다. “야근하다 잘못 내리친 망치며 힘에 부쳐 길을 잘못 든 대패가 밀어붙인 상처”(「나이테」), “빡빡한 미싱에 기름칠 하고 벨트도 조이고/ 장딴지에 힘주어 쉴 새 없이 발판을 밟아대지”(「미싱사의 노래」), “집들이 때 쌓인 슈퍼타이 슈퍼에 들고 가/ 우유와 콩나물로 바꿔먹는 여자”(「배부른 여자」), “미싱사 십오 년에 의료보험도 안 되는 / 마찌꼬바 지하공장 드륵드륵 미싱소리 듣다/ 누런 가시 바짝 세우고 철조망 기어오르는 너”(「넝쿨 장미」), “선발대 몇 놈은 돌아오지 않고 전위 소조 몇몇은 언 채로 매달려 아직 봄이 멀었음을 알렸다”(「개나리」) 등의 시구들에서 척박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 내몰린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정작 시인은 “일년 삼백예순 날 누군가를 위해 울지”못하고 자신의 누추를 울 뿐이라고 했지만, 작업도중 미싱판에 엎드려 심지에다가 초크나 쪽가위로 시를 새김으로써, 자신의 고된 노동 현실과 더불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고단한 노동자들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 날개가 달렸나 싶게 숙련된 노동력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생활의 질은 향상되지 않는 노동자의 삶, 만삭인 배로 힘겹게 일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를 맴돌아야 하는 미싱사의 삶, 밀려드는 잠을 쫓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까지 철야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살아서 아픈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2.
시인이 노래하는 노동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상기하는 것, 기억의 편린들을 퍼즐조각처럼 맞추어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게 몇 년 만이냐
중뿔나게 건강한 노동자로 살지도 못하고
알량하게 지식인도 되지 못한 너나 나나
이제는 어디 한 군데 명함 내밀 데 없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있겠지
멀리 울산에서 걸려온 전홧줄 사이로
몇 마디 못 하고 숨만 고르는구나
보나마나 눈가를 훔치고 있을 거야 그지
아직도 사식이며 내복 차입해야 할 남편 얘기일랑
혼자 아이 키우며 월세방 전전하던 세월일랑
지나치듯 수다로 떨어버리자 다만
여대생이 미싱을 밟고 선반공이 자본론을 암송하던
우리의 청춘 흘러간 유행가로 부르지는 말자
어둠이었으되 절망이었다 말하지는 말자
애초에 우리 승리는 꿈꾸지 않았으니
오늘 또 걸어가보자 비틀거리며
터널 속 그리운 눈빛 하나 만나러
버리지도 쓰지도 못할 386컴퓨터처럼
웬수 같은 386세대식 사랑을 위하여
메가도 높이고 모뎀도 깔자
헤이 업 그레이드!
(「승리는 애초에 꿈꾸지 않았으니」)
「승리는 애초에 꿈꾸지 않았으니」에는 “건강한 노동자”도 알량한 지식인도 아닌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버린 화자가 있다. 이 화자는 시인이 시집의 후기에서 “변변한 노동자로도 투사로도 시인으로도 못 산” 못난이라고 지칭한 시인 자신일 것이다. “광장과 거리의 거대한 울음 대신 남루한 굼벵이의 노래” 밖에 할 수 없는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과 밀실이 하나로 이어지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동시에 자신의 지나간 청춘을 절망이라 인식하지 않는다. 애초에 승리를 꿈꾸지 않았으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터널 속 그리운 눈빛 하나 만나러” 가기 위해서 “메가도 높이고 모뎀도 깔”아 업그레이드 시키면 되고,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는 "지나치듯 수다로 떨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오히려 삶의 무게감과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3.
과거의 처절했던 노동에 대한 기억과 고통을 담담하게 응시할 줄 아는 김해자의 시정신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보편소로서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획득할 수 있는 긍정적인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만을 응시하며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상처를 긍정적 가치인 사랑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점에서 김해자 시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잉태다.
온몸이 자궁인 흙이
어둠속에서 싹을 키우듯
딸아, 모든 사랑은 잉태다.
부디 순산하여라.
밖에서 끄집어내는 제왕절개 말고
꽃도 못 피고 사그라질까 미리 얼굴 내미는
여름 코스모스같이 조산하지 말고
어찌할 수 없이 밀려나오는 불가항력으로
깊은 우물에서 솟아오른다 사랑은
수천의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숨쉬는
우물 밑에 강물이 흐르고 그 아래
천 년 기다려 비상을 꿈꾸는 이무기가 숨 쉰단다.
사랑은 네 속의 이무기를 날게 하는 것
정녕 솟구치려무나 이무기 함께
-「사랑은」
시 「사랑은」에서 시인은 “흙이 어둠속에서 싹을 키우듯” 사랑을 잉태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깊은 우물”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을 순산하라고 말한다. “비상을 꿈꾸는 이무기”를 하늘로 날아오르게 할 ‘사랑’이야말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긍정할 수 있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을 기다린 이무기가 꿈꾸는 비상은 노동자들이 꿈꾸는 이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압과 차별 속에 억눌렸던 노동자들이 ‘사랑’을 통해 꿈을 펼칠 시기가 도래하기를 시인은 희망한다.
지금까지 시인은 “가난한 여자”, 핍박받는 노동자로 살아야 했지만, 그녀가 가진 “붉은 상처”를 이제 ‘사랑’이라는 꽃으로 피워내고자 한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경계를 지우는” 희망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 온전한 빛을 발하기를 꿈꾸며.
* 대구 출생, 대전대 강사, 96710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