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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땅, 캄보디아!
이 대 영*
킬링필드!
죽음의 땅, 신조차도 외면했다는 캄보디아를 가게 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나라 국토면적의 두 배가 되는 곳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불교인이 많고 언어는 크메르어, 열대 몬순성 기후, 리엘 화폐와 달러를 사용한다는 정도의 알량한 정보를 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서랍 속에 있는 여름 양말과 속옷을 있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는 일이었다. 마누라를 잘 얻은 친구들은 여행하기 전에 용품을 정리해줘서 할 일이 없다던데 내 팔자도 그리 상팔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되뇌며 이것 저것 가방에 쑤셔 넣는다. 6박 8일의 여행이라 집에 있는 속옷과 양말을 다 챙겨 넣고, 운동화와 슬리퍼, 세면도구를 집어넣으니 임산부의 배 마냥 불쑥 튀어 나온다. 맹꽁이배를 다독거리다가 카메라 충전용 연결코드가 빠졌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방을 세 곳이나 뒤져도 전원선의 꼬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베트남에 다녀온 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알코올성 침해가 점점 더 해 가는 듯싶다.
시력도 떨어지고, 거기에 침해까지…
이번 여행길에는 혹여 캄보디아에 살 만한 움집이라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프놈펜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땅이 샐로스 사르(Saloth Sar) 정권 때 200만 명이 숙청당하고 외세에 의해 핍박받던 버림받은 땅이라고 하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열이 비행기 연결통로를 타고 후끈 달아 전해온다. 특유의 향내가 났지만 중국이나 베트남 보다 덜 하는 듯싶다. 아마도 프놈펜 국제공항 규모가 작아서이거나 이미 이런 종류의 향에 나 자신이 익숙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행지에 도착하여 비자를 즉석에서 받는 나라, 5달러의 급행료를 내면 입국절차를 생략하고 군복 입은 사람의 안내를 받을 수 있는 나라, 그곳에 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눈동자를 굴리고 서 있다.
비자발급 신청을 위해 사진을 첨부하여 여권을 제출하고 20달러를 준비하여 관리인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내 이름을 호명했을 때, 나는 “옛서!”를 크게 외치며 캄보디아의 제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정말, 급행료를 낸 사람이 군복을 입은 사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며, 비자를 발급하는 한 쪽에서는 돈을 세고, 안주머니에 돈을 넣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NPIC(National Polytechnic Institude of Cambodia) 소속 직원인 속(Sok Minea)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미혼인 그녀는 성격이 쾌활하고 남자 같고 군인 같기도 한 중국인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며, 할아버지는 중국인이었다. 공항에서 대학까지는 30여 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는데 도로는 말 그대로 시골길이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착한 NPIC 캠퍼스는 자정을 넘긴 시강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속’이 소리를 지르고 웃옷을 벗고 잠을 자던 학교정문 수위가 문을 열고나서야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NPIC 본부 건물 ▲ NPIC 학생기숙사
한국정부의 자본으로 설립되어 한국인의 자긍심이 서린 국립 캄보디아 기술대학, 여기서 천 여 명의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산업연수생들이 성공을 꿈꾸는 약속의 땅, 그 꿈들이 침실 여기저기에서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는 동안 한국파견 산업연수생들이 “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며칠 안 되는 동안 배운 한국어를 사용하고픈 마음이 표정에서 보이고, 그것을 사용했다는 뿌듯함으로 즐거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학생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우리는 프놈펜 시에 있는 A1 호텔로 향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시골길,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비로소 나는 캄보디아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창한 주변인들의 영어 실력에 주눅이 든 나는 움추러드는 몸을 펼쳐 침대 위로 집어 던진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지열을 달래며 나는 호텔과 함께 잠들어 갔다.
프놈펜의 하루는 바쁘고 역동적으로 시작된다. 호텔 입구에는 투숙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고, 툭툭이가 아침부터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길거리 식당에는 밤새 꼬여 있던 굶주린 창자들이 국물을 받아들이고 있고, 무엇인가를 위해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달려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호텔 레스토랑은 30여 명 정도를 수용하는 아담한 공간이다. 중국인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생김새나 언어로는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식단은 단촐했다. 밥, 국, 죽이 있고 반찬으로는 계란 프라이와 캄보디아 식 김치, 고추, 호박무침, 과일로는 바나나, 파인애플, 수박, 음료로는 레몬주스와 커피가 준비되어 있다. 음식의 국적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먹성 좋은 나는 이것저것 입 속에 우그려 넣는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닭죽이 까칠했던 입안을 부드럽게 다독인다. 거기에 잘게 썬 붉은 캄보디아 고추 맛은 온 몸을 훈훈하게 하는 뒷맛이 있다. 거기에 반숙한 김치는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다. 이쯤되면 캄보디아 황실의 조반이다.
간단하게 세면을 마치고 달려드는 오토바이들을 피해 호텔 맞은 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마사지와 맥주집 골목이었다. 그리고 유흥업소가 뜸해질 즈음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운 좋은 만남이었다. 어두컴컴한 식당에서는 하루의 시작을 위한 만찬으로 입술이 달아오르고 있었고,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하느라 눈들이 허공에 매달려있다.
▲ 정육점 ▲ 닭 판매점
▲ 과일가게 ▲ 열대과일
시장풍경은 내 또래들이 고무신을 싣고 시장을 누비던 시간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망고, 망고스틴, 용과, 바나나 등의 과일과 각종 채소들이 시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진풍경은 푸줏간이었다. 손수래 위에 돼지나 소의 살점을 뚝뚝 잘라 걸어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거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붉은 살점 위에는 파리들이 검은콩처럼 까맣게 박혀 있었다. 이곳에는 냉장고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대부분 아이스박스 속에 얼음을 넣어 활용하고 있었다. 파리가 박힌 살점일망정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 가슴이 아려왔다.
■시아누크빌로 간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다만, 타이만(灣)의 입구 가까운 반도 서안에 위치한다는 정도의 지식뿐이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아 내 시아누크빌을 검색해 본다.
캄보디아에 해항이 없었는데, 1960년 프랑스 원조로 이곳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여 시아누크빌(Sihanoukville)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국가 원수 N. 시아누크가 실각하자 콤퐁솜으로 개칭된 곳이다. 1만 톤 급 선박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으며, 수도 프놈펜까지(220km)는 미국의 원조로 건설된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철도가 통한다. 2007년 캄보디아 시엠립 공항을 떠나 시아누크빌로 향하던 러시아 우크라이나제 AN-24에 탑승했던 13명이 사망했었던 사건도 줄줄이 기사로 이어졌다.
프놈펜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유난히 닭죽이 혀끝에 감긴다. 잘게 썬 고추도 듬뿍 담고 김치도 넉넉히 접시에 담는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오늘은 캄보디아인 여행객이 많은 듯하다. 밖에는 NPIC로 갈 관광버스가 시들하게 서 있다. 서툰 영어로 5일간의 숙박비 170달러를 지불했다. 조식을 포함하여 하루에 35달러 정도 되니 묵을 만한 요금이다.
관광버스 기사는 내 나이 또래의 현지인으로 어제 봉고차 운전기사에 비하면 인상도 좋고 가끔 웃어 보이는 모습이 한결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영어를 못하는 것이 흠이기는 하나 어찌 보면 그것은 흠도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손으로 먼저 안내하는 것으로 보아 몸짓 언어로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다소 질서 없고 지저분해 보이는 긴 시장골목을 빠져 나와서야 어제 만찬 때 NPIC 호텔학부 교수한테 물어서 알게 된 ‘곱스랄리’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다. 무슨 고기를 잡는지 서너 척의 배들이 호수 위에 떠 있었다. 그야말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호수이다. 이곳에서 낚시도 하고 배를 타고 호수 위에서 가곡이라도 부르고 싶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특히 무수히 떠 있는 연꽃들은 이국적 정취와 함께 이곳이 동남아시아임을 느끼게 해 준다.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NPIC 관계자들과 이별의 인사를 해야 했다. 사람들과의 이별은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의 이별은 특별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 또는 우리가 NPIC에 다시 올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만남을 기약하지 못하는 이별 앞에서의 서운한 감정은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학생들은 관계자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주는가 하면 그곳의 교수들은 이메일이 적힌 명함을 주며 아름다운 미소를 주고 받고 있었다. 학생들의 짐을 버스에 싣고 NPIC 정경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나는 내 기억의 한 편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새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화사한 햇살을 받고 있는 NPIC 본부 건물은 이 지역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꿈을 키우는 학생들은 캄보디아 근대화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활동하게 될 것이다. 또한, 코리아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한국에서 흘린 노동의 대가를 가져와 이 땅에 건물을 짓고 가족을 부양하며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실행하게 될 것이다.
어제 보았던 리퀴아나 학생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훌륭한 이 땅의 여성리더로 성장할 것이다. 아마도 친한파 전자공학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대학 3학년 때 한국에 와서 보고, 경험한 느낌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프놈펜 시내를 벗어나 2차선 도로를 한참이나 달린 후에야 나는 우리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편도 1차선 양 옆에는 붉은 황토가 덮여 있고, 그 위로는 가끔 오토바이보다 더 신이 난 농부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더 가관인 것은 고속도로 양 옆으로 전개되고 있는 들판에서 올라 온 소들이 자동차 경적 소리에 놀라 황급히 휭단 하는 광경이었다. 또한, 관광버스들은 자기 길을 내놓으라는 듯이 앞서가는 오토바이나 승합차 전방 20미터에서부터 요란한 경적을 울려 승객들을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한국 또는 선진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마을 앞에는 시전이 있어 바나나를 비롯해 각종 과일과 생활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고속도로 양 옆에 석유를 작은 용기나 병에 넣어 파는 광경이었다. 오토바이를 주로 이동수단으로 하다 보니 노상석유 판매자들이 생겨나고 이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또한, 캄보디아는 냉장고 시설이 거의 없어 생선이나 고기를 말려 파는 노점상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도 대로변에 원두막 같은 것을 지어놓고 고기를 걸어 놓고 잠을 자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천국이 따로 없는 풍경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느끼는 농촌정경은 평화롭기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짠해옴을 느꼈다. 밥이나 거르지 않고 제대로 먹고 사는 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어제 NPIC 교수가 대화 중에 캄보디아에는 무궁한 자원이 있기에 발전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넓은 농지와 초원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부를 이룰 수 있는 그들의 자산이었다. 또한 파인애플 농장과 망고 농장 또한 무한한 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보다 넓은 면적과 많은 자원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미래가 더 밝아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 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원조물자가 수시로 들어와도 가난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생력을 스스로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프놈펜 125km 지점에서 운전기사가 화장실 건물을 가리키며 의사를 묻는다. 나는 여러 가지 상념들을 물리치며 OK를 외쳤다. 그러나 입구에 도착한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료화장실이다. 1인당 500여로, 그러나 머뭇거릴 처지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수세식이긴 하지만 용변을 본 다음 저수고에서 물을 떠와 세게 붓는 시설이다. 한국의 뒷골목 식당 화장실에서 봄직한 정경이다.
나는 그곳을 나오면서, 지난달에 호치민시에서 우체국 주변을 서성이다 어렵게 찾은 화장실 입구에서 손을 벌리고 서 있던 노파의 얼굴이 생각났다. 금전이 만능인 세상, 여행을 위해서도 아니고 영달을 위해서도 아닌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돈을 필요로 하는 사회, 그곳에 슬픈 그림자가 어리고 있었다. 하기는 우리나라도 60년대까지 이런 풍경이 어디 한 두 곳이었던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교 화장실은 시멘트 건물로 소변을 보는 곳은 마치 경사진 도랑처럼 만들어져 누런 이끼들이 담배꽁초를 빨아들이지 않았던가? 희망이 없고 무기력했던 우리들의 삶, 마시고 먹고, 버리기에 비빴던 지난날 우리들의 자화상이 여기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버스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갑자기 소음이 심하다. 알고 보니 버스 출입문이 차체에 반 쯤 붙어 있다. 조금만 더 속력을 내면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싶다. 프놈보꾸르 국립공원을 지나고 얼마 후 톨게이트가 눈에 들어온다. “萬事如意 出入平安” 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이채롭다. 통행료를 받는 아가씨가 있고 바로 그 뒤쪽에서 이를 확인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도 특이하다.
시아누크빌은 쾌적한 항구도시였다. 이곳이 캄보디아인가 할 정도로 유럽형 신도시로 개발되고 있었다. 시아누크빌해변에는 현지인 보다는 외국관광객들이 더 많아 해외관광명소임을 실증하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빌려 섬으로 향했다. 섬 이름이 ‘KAOH RUESSEI’라는 것을 섬을 떠나기 직전에 해변에 꽂힌 작은 팻말을 보고 알았다. 15인승이나 됨직한 소선에 우리일행 20명이 승선하는 게 불안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개인용 여행가방의 무게까지 합치면 30인 정도의 분량이 될 것이었다. 배곡하게 승선한 우리는 섬으로 향하는데 순항하는 듯싶었다. 아름다운 해변과 푸른 해수는 이국적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 시간 여 끝에 우리의 목적지인 작은 섬이 시야에 들어 왔을 때, 파도의 높이와 세기가 한결 다르게 다가왔다. 지형상 밀물과 썰물의 교차점으로 파도의 충돌이 심한 지형인 듯 했다. 파도 위로 솟구치는 선박의 요동으로 일행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성을 쏟아냈다. 나는 힐끗 선주를 보았다. 선미에서 파도의 세기에 따라 모터를 조정하는 그의 기술에 약간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곳을 빠져 나오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해안으로 접근했다. 참으로 고요하고 한적한 공간이었다. 여행객들이 없다면 무인도 섬이 될 듯한 해변과 나무만이 있는 공간이었다. 발을 해변에 내려놓는 순간 열기가 후끈 얼굴로 달아올랐다.
▲ KAOH RUESSEI ▲ 숙소
아뿔사! 나는 한국식 콘도시설이 섬 안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판자로 만든 집에 이엉을 올려놓은 듯한 움막들이 10여 채 해변을 따라 자리하고 있었다. 움막 입구에는 해먹을 달아 휴양지의 정취를 더해줬다. 해변의 중앙에 자리한 레스토랑 겸 사무실은 각국에서 온 인종 전시장으로 인원이 가장 많은 우리가 작은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주의 영어강사, 스웨덴에서 온 금발아가씨, 미국에서 온 남녀 젊은 무리들 등등.
자가발전에 의해 야광을 밝히는 이 섬에서의 하룻밤은 끈적끈적 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파도소리와 짠물냄새, 훅하고 이따금 다가오는 지열, 도란거리는 다국어의 혼음, 미명의 생명체의 움직임 등.
■캄보디아의 발전을 기원하며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배를 기다리느라 아침을 다소 무료하게 보냈다. 섬 이곳저곳의사진도 찍고, 외국여행객들의 동태도 살펴보고, 어설픈 영어를 사용하여 숙박료도 지불하고, 파도에 밀려 온 바다생물의 흔적들도 살펴보는 등.
두 척의 배가 해안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우리를 승선시킬 배를 정기 여객선에 줄을 매달아 끌고 오고 있었다. 아마도 유류비를 절약하려고 한 시간씩이나 늦으면서도 연락 없이 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반가움에 우리 일행은 승선을 서둘렀다. 오는 항로에 비해 가는 항로는 큰 요동 없이 항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프놈펜으로 이어지는 캄보디아의 유일한 고속도로를 다시 되짚어 간다. 언덕에서 시동도 꺼먹고, 덜컹거리는 버스문짝, 가변에 늘어선 노점상의 지친 모습, 한가하게 풀을 먹고 있는 뼈가 앙상한 마른 소와 양,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전혀 바쁠 것 없는 농촌사람들, 풀이 학교 운동장에 가득 자라고 있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교실을 오고가는 선생님과 학생들, 조용한 호수들,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수 만 평의 평원들, 수많은 영상들이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을 느꼈다.
▲ 중앙시장 ▲ 기념품가게 모녀
프놈펜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시장은 캄포디아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적극적인 툭툭이 기사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기를 안은 여자거지, 밝은 눈빛으로 옷을 고르고 있는 시집 안간 처녀들, 액세서리 진열대 주변에서 선물을 고르는 호기심 서린 몸짓들, 가게에서도 여전히 성숙 중인 열대과일들.
길 좌측에는 캄보디아의 문화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백화점의 네온사인이 희망의 빛을 사르고 있었으며, 서양식 음식점들이 하나 둘 캄보디아를 점령하며 구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프놈펜공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두 시간 동안 시장에서 체류한 것이 차량소유주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노선을 벗어나 20여 분을 가던 버스가 으슥한 동네 어딘가에 멈추어 선다. 그리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툭툭이도 없는 한적한 곳에 정차한 것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30불을 차주가 더 요구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한 편으로 괘씸한 생각에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NPIC 관계자의 통역으로 돈을 지불하기로 한 뒤 공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순박하게 보였던 기사도 갑자기 미워졌다. 수고비도 한 푼 주지 않으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도 차주에 얽매인 사람이란 생각에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적었지만 약간의 돈을 건넸다. 순간, 아쉬운 빛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묵살했다. 한적한 동네 어귀에 정차한 그의 행동이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캄보디아를 떠난다. 죽음의 땅에 해맑은 웃음이 번지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임을 확인하며 이곳을 떠난다. 순박한 그들의 얼굴에서 희망이 살아 있음을 느꼈음에 가슴 뿌듯하다. 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며 달리기를 하고, 체조를 하며 줄을 서던 그들의 얼굴에서, 욕심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는 것이 별것 아님을 느끼며 살아 있는 땅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