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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계서원-소백당 원문보기 글쓴이: 박맹제
백운산 산행기록 -산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출발은 언제나 설렙니다.
2006년 1월 7일 토요일 08시30분.
약속 장소, 약속 시간에 나와 같이 산행할 친구를 기다리는 것은 오늘 산행의 장소 못지않게 마음이 설렙니다. 어제까지 너무 추운 날씨였는데 오늘 낮부터 조금 풀리겠다는 기상 예보가 있긴 하여도 추위도 걱정되었고 참여 예상한 인원이 누가 빠지지는 않아야 할 텐데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하루 전날 참석여부를 체크해야 했는데 메일만 보내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역시 회장이신 梧堂선생이었습니다. 추위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중무장을 했습니다. 모두 다섯 명이 모였는데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한 두 분이 아니 오십니다. 전화를 합니다. 다른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합니다. 같이 가지 못함이 서운합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습니다.
鏡湖亭에 서서 경호강을 굽어보았습니다.
반천에서 출발할 懷山선생과 생초에서 출발하는 晩惺선생을 생초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아직 안나왔습니다. 홍수로 강 주변을 보강하는 공사가 이루어지고 나서도 지표면보다 낮게 서있던 경호정이 강둑을 눈앞에 두고 꽤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모두 강 언덕으로 올랐습니다. 경호강 맑은 물이 여울져 흐릅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불도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지런을 떨고 있습니다. 숲이 섰던 자리는 이미 보이지 않고 그 곳을 알려주는 듯 정자나무 한 그루가 서있습니다. 두 분이 합류하여 일행은 모두 일곱 명이 되었습니다. 함양 상림을 지나고 병곡면을 거쳐 백전면 백운산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름값을 한다는 백운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백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십여 개가 넘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흰구름 산”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산이 함양 백운산이라고들 합니다. 오늘 백운산 등정을 택한 것도 상고대 또는 설화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새해 첫 등산을 계획 한 것입니다. 상고대도 설화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답게 눈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서래봉으로 가는 길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묵계암도 상연대도 달라졌습니다.
병곡면을 지나 백전면으로 접어들면 잘 생긴 백운산의 하봉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하봉(1245m)입니다. 이등변 삼각형인양 뾰족한 봉우리가 안정감 있게 버티고 선 모습은 언제 보아도 오르고 싶은 산입니다. 입구인 신촌에 차를 세워 두고 걸었으면 했는데 시멘트 포장길을 걷기 싫다며 묵계암까지 앞장선 차를 따라 새로 세워진 대웅전 코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눈이 쌓여 있어서 차를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전의 묵계암 입구 왼쪽으로 무덤 한 기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웅전 앞뜰이 좁았는데 높은 축대를 쌓아 넓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웅전도 준공이 끝나지 않았는지 문은 굳게 잠겨있고 새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惠雲선생이 요사채로 가서 스님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차 허가를 받지도 못하고 차를 세워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릴 만큼이었습니다.
상연대도 달라져있었습니다. 대웅전이 다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임시로 모셔두고 있었는데 회장님과 함께 꿇어앉아 오늘 산행이 무사하고 기쁨을 주는 산행이 되기를 마음으로 빌었습니다. 묵계암과 상연대가 2005년도 같은 해에 이렇게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예전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달라진 것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불편했을 것이고 시주도 좀 많이 들어왔겠지만 어쩌다 한번 찾는 나그네에게는 옛 모습이 더 정이 갑니다.
상연대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서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하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창건한 이래 신라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 후 역대의 고승, 대덕스님들이 수도 정진해 오던 곳으로 천여 년의 영험한 수도 도량이었으나 1950년 6.25 전란에 불타고 1953년경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습니다.
明堂은 알려져야 명당이 됩니다.
백운산은 풍수학의 경전인 장경에 나타나는 擇其所相(잘 어우러진 산세), 若器之貯(마치 그릇을 쌓아 놓은 것 같은), 富如萬金(부는 만금에 이를 것), 四勢端明(사방의 산세가 단정하고 밝은) 최고 명당 터가 있다 합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와 월경산과 괘관산의 좌우 날개를 펴고 백전면을 품에 안 듯 서 있는 산의 모습이 그럴듯합니다. 정상에서 상연대 묵계암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의 힘찬 기운을 보면 어딘가에 명당이 있는지 능선을 따라 여러 군데 무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제일 좋은 자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명당을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적이 있습니다. 먼저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명당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곳 너희 고조부 산소는 할아버지 말씀이, 자손들이 영리하고 관직에 나아가 성공할 후손들이 많이 날 큰 명당이라고 하였으니 우리 집안이 이렇게 번성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니라. 그러니 너희들도 잊지 말고 자주 성묘하고 할아버지 말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하거라.” 라고 일러주시는 이 말씀이 쌓이고 쌓여 정말 명당다운 명당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소 앞에 서서 저 앞쪽을 가리키며 멀리 보이는 저 안대는 정말 잘 생겼단다. 힘이 들 때면 이 곳에 서서 앞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 보렴!
내 생각에 동의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연대의 위치는 지리산 천왕봉 일대를 바라보는 조망대로서는 이 보다 좋은 곳이 없다할 정도입니다. 백두 한라와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우뚝 서있는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늘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니 고승, 대덕 스님들이 나올만한 곳이 아닐까요.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말입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이 참 즐거움입니다.
상연대에서 치고 오르는 등산로는 매우 가파릅니다. 또 얼음이 붙어 있어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몇 번 넘어질 뻔했습니다. 가파른 길을 20여분 오르고 나면 묵계암에서 상연대로 이어지는 길 10여미터 오른쪽에서 오르는 능선 길과 만나게 됩니다. 무덤이 바로 곁에 있습니다. 한 무덤 가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속계 마을들이 환히 내려다보입니다.
오당이 오부 곶감을 내 놓았습니다. 혜운이 사질 양토에서 잘 가꾼 막을 꺼냈습니다. 자리에는 나누는 즐거움과 같이 하는 기쁨이 번졌습니다.
젊은이들의 오늘날 행복 조건은 獨樂에 가깝다고들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둔 것이지요.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독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의 즐거움은 여럿이 같이 나누는 즐거움, 같이 감동하는 기쁨이 참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與民同樂.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된다 해도 같이 한다는 안도감과 동감이라는 편안함이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해봅니다. 오늘 산행도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라고 합니다.
길가에서 다른 일행이 둘러앉아 돼지고기를 썰며 소주잔을 들어올리며 즐기고 있습니다. 꼴불견입니다. 고기를 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합니다만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주먹밥 한 덩이 가지고 와서 배고픔이기고, 물 한 병 차고 와서 목마름 벗어나며, 밀감 한 개, 고구마 한 뿌리 가져와서 간식으로 하면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못살게 굴고, 그 탓으로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연의 모습은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라고 합니다. 산에 오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서투른 준비는 힘이 들게 됩니다.
길이 얼어 있어 발을 옮기는 것이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아이젠을 준비해온 사람은 훨씬 쉽게 오릅니다. 걷는 모습을 보면 거의 같아 보여도 자세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힘씀이 다릅니다. 눈이 붙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면서도 물이 밸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온 것은 준비 부족입니다. 못 걷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 산행 때는 반드시 아이젠과 스패츠(게이트, 행전, 각반), 방한모와 적당한 등산화를 준비하겠습니다. 일상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정상에 서려합니다..
백운산정상(1279m)에 섰습니다. ←백두대간((깃대봉), →하산길(백운암․원통재) ↓하산길(상연대)4.3km 표지판이 서있고, 안내판에는 남쪽으로 전개되는 지리산의 장관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낮부터 추위가 풀릴 것이라는 예보는 정확했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일 정도로 쾌청한 날씨입니다. 조망은 더없이 시원하게 전개됩니다. 지리산 연봉이 웅장한 마루 금을 그으며 남쪽 하늘아래 장쾌하게 뻗어있습니다. 가까이는 서쪽의 장안산(1239m), 팔공산, 동쪽의 괘관산, 황석산, 거망산, 기백산, 금원산, 북쪽으로 남덕유산 등이 보입니다. 기쁨이 가슴에 닿습니다. 이런 기쁨은 산 정상에 서지 않고는 맛볼 수 없으며 그 느낌을 한 두 마디로 나타내기 어렵습니다. 양지쪽에 자리 잡아 점심을 먹습니다. 각기 다른 점심 준비는 뷔폐처럼 다양한 찬이 진열되었습니다. 차도 여러 가지입니다. 인도산 원두커피, 집에서 담근 매실주, 운지 버섯차 등입니다. 많지 않지만 조금씩 나눕니다.
여러 사람이 가면 새로운 길이 됩니다.
하산 길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의논이 있었습니다. 산행이 좀 힘든 회원이 왔었다면 논의하지 않았을 것이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어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왔던 길보다는 원점회귀 길을 택했습니다. 서래봉→화과원→용소→백운암 코스입니다.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서려니 눈이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산에 익숙한 愚峯?선생이 조금 있다가 출발하자고 했습니다. 馬昌에서 왔다는 대규모 일행이 우리 가는 코스로 간다기에 그 분들을 앞세워 길을 만든 후 가자는 제의였습니다. 만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차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지요. 길이 없어도 많은 사람이 한번 지나가면 새로운 길이 됩니다. 혼자 처음 길을 내는 것보다는 다른 이가 내어놓은 길을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준비가 안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간혹 보거나 느끼는 일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습니다.
개념도를 보면 백운산 정상에서 서래봉(1078m)→ 적멸보궁 화과원→용소→백운암으로 되어있었는데 서래봉을 돌아 조금 내려가니 대방령과 백운암 하산길만 안내되어있어 화과원을 거쳐 가는 줄 알고 백운암 하산 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화과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용소로 가는 길이었고 화과원은 용소에서 작은 계곡을 다시 올라야 했으므로 화과원은 다음기회에 탐방하기로 하고 백운암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계획했던 것과 길이 달라진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화과원에 들렀다 가겠다는 사항이 일행 모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안내판과 우리가 뽑아온 개념도와의 차이 때문입니다. 즉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대립되는 상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는 길은 그야말로 급경사였습니다. 몇 번을 미끄러졌습니다. 골짜기로 접어들자 햇볕은 자리를 비껴나고 어둠이 느껴질 정도로 그림자가 짙어졌습니다. 햇볕에서 바로 그림자로 들어선 탓입니다. 골짜기로 내려설수록 산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정상에서 상연대쪽 능선과 서래봉 사이의 큰골은 크게 패여 있었고 그리고 좁았습니다. 겨울이 아니라면 원시적인 소와 물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큰골은 그야말로 신비의 계곡처럼 느껴졌을 것이며 감동으로 닥아 올만한 곳이었습니다.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협곡과 두개의 봉우리가 골짜기를 향해 밀어 붙이는 힘을 중압감으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특히 해가 기우는 때라 그 기운은 더했습니다. 그 힘이 겨울인데도 물을 흐르게 하는가봅니다. 결과가 원인에 기인하듯 햇볕과 그림자, 산골짜기와 봉우리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거나 힘들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화과원에는 민족정신이 스며있습니다.
용소 곁에는 ←하산길(백운암) 2km, →백운산 정상 3.7km, 표지판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습니다. 계곡을 건너면 텐트를 치고 쉴 수 있는 꽤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용소는 큰골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입니다. 물이 많으면 폭포가 장관일 것 같습니다. 오른쪽 작은 계곡으로 오르면 화과원이 나옵니다. 전주가 서있었습니다. 화과원은 농사를 지으며 수도하는 선농일치를 주장하고 대각교를 창설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 분이셨던 용성스님이 농사짓고 수도하셨던 곳이며 적멸보궁이 있었던 암자 터였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민족혼이 숨쉬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일정이 잘못돼 가보지 못한 것이 좀 후회되었습니다.
수문장 석장승을 만났습니다.
백운암은 큰골 계곡가에 있는 평범한 암자였습니다. 봄부터 가을 까지는 많은 사람이 붐빌 만큼 주변 풍광이 좋습니다. 큰 길에서 가깝습니다. 조금 아래 주변에는 별장으로 보이는 집들도 있었고 새로운 암자를 지을 준비를 하는 터도 보였습니다.
큰골 입구에 영은사지석장승(靈隱寺址石長丞ㆍ경남민속자료 제19호)이 양쪽으로 서 있습니다. 이 석장승은 신라시대 영은조사가 개창하였다고 전해지는 영은사 옛 절터에 서 있는데, '右護大將軍'과 '左護大將軍'이라고 쓰여 있는 바와 같이 각종 금지 법규를 지키며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 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이라고 합니다.
장승은 우리의 수문장입니다. 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마을마다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의 수호신이요. 우리민족의 수호신이자 마음의 수호신이었던 것입니다.
귀찮다 않음이 배려입니다.
계곡을 나와 승용차가 있는 묵계암 까지는 약2km나 됩니다. 그것도 오르막 시멘트 길이니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도 먼저 자진해서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나서주시는 분이 있어서 몇 사람은 편할 수 있었습니다. 옆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짜증내지 않고 귀찮다 하지 않음이 배려입니다. 쉬울 것 같아도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배려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산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새해 첫 등산은 무사히 즐겁게 마쳤습니다. 모두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새해 백운산의 기를 가득 담으면서도 가볍게 온 몸에 담아 내려온 것입니다. 언제 찾아가도 싫다하지 않고, 누가 찾아가도 친구처럼 반겨주는 산.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가득 안겨주는 산. 그래서 여가를 만들어 산을 찾습니다. 약간 소원했던 친구가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산도 친구가 됩니다.
저녁은 원지 고향숯불갈비에서 돌솥밥으로 먹기로 했습니다. 예약을 하고 玄江선생도 합류 했습니다. 조준행 선생에게 산사랑 친구들이 雅號를 증정했습니다. 晩惺입니다. 玄江선생이 화선지에 예쁘게 썼습니다. 교직에 늦게 들어와 같은 길을 가는 친구입니다. 晩惺으로 인해 매실주가 몇 병 더 비워졌습니다. 매실주 보다 산사랑 친구가 더 좋아서입니다.
오늘은 백운산 친구와 산사랑 친구가 하나 되어 긴 시간을 함께한
즐거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