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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현장, 노근리를 가다
이 대 영
▣ 금강휴게소
오랫동안 벼르던 ‘노근리 평화공원’을 향해 달려간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넘어 해외 문화기행 대신 국내 유적지 탐방으로 집필기획을 바꾸게 된 것이다. 아울러 연작형태로 게재중인 장편소설의 스토리 전개가 막 금강전투가 끝난 터이라, 후속 작품 기획을 위해서도 나로 하여금 노근리 현장답사를 재촉하게 만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노근리 평화공원의 개략적인 조감도는 이미 둘러본 후였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이전에 탐방했던 제주 4.3 평화공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평화공원’이란 명칭의 사용 의도는 알겠지만, 이것이 적합한 명칭인가 하는 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금강휴게소 진입로로 차를 몰았다. 휴게소 아래 금강의 전경과 커피, 낚시하는 풍경, 도리뱅뱅이 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파라솔 아래로 햇살에 부서지는 금강과 낚시하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뙤약볕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밀짚모자를 쓰고 낚시에 열중하는 강태공들의 모습에 부러움이 일었다. 사는 것에 쫓겨, 떨치고 일어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낚시를 다녀온 지도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며 길을 트고 있는 차도(車道) 저 아래로 내려가면, 아내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던 장소가 있을 것이다. 결혼 전, 아마도 가을이었을 게다. 그때는 승용차도 없어 시외버스를 타고 휴게소에 내려 시멘트로 이루어진 저 차도를 건너 아래로 걸어갔었다. 구두를 신어 다소 불편해하던 아내의 모습, 매운탕과 도리뱅뱅이를 먹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 애쓰던 젊은 날의 나의 모습도 영상으로 떠올랐다. 또한 임신해 만삭이 된 듯한 어느 미친 여자가 강변을 헤집고 다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 여인은 무사했을까? 그리고 아이는……
그 여인을 본 순간, 나는 천승세의 소설 「혜자의 눈꽃」에 등장하는 혜자의 엄마를 떠올렸었다. 불룩한 배를 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급히 ‘대구’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그 여자는 제 정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왜 그 여인에가 다가가 그녀를 인도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이 진한 아쉬움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혹여, 그 여인이 딸을 순산했다면 이름을 ‘혜자’라고 지었을까?
▣ 노근리 평화공원
황간 IC를 지나면서 산수가 절경이어서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月留峯)으로 갈까하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월류봉은 오래전에 둘러 본 적이 있었다. 월류봉은 백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석천과 초강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초강천으로 내려꽂히다 멈춘 듯한 산줄기, 깎아지른 듯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월류정은 가히 풍광의 화룡점정이다.
10여 년 전, 월류정을 보는 순간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적이 있었다. 마치 금강산에 있는 최고 절경의 한 부분을 옮겨다 놓은 듯한 자태를 의젓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때는 산행이 보편화 되지 않았던 터라 이곳을 방문하는 탐방객 대부분은 초강천 앞에 위치한 식당에서 쏘가리 매운탕과 회를 시켜먹으며 즐기곤 했다. 지금은 월류 1봉에서 5봉까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다음 기회에 월류봉을 직접 등산을 하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아껴두기로 했다.
▲ 표지판 ▲ 위령탑
노근리 평화공원은 황간 IC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입로로 들어서니 위령탑이 눈에 들어왔다. ‘모작 논란’이 일기도 했던 위령탑은 당시 피난민들이 쌍굴을 통과하여 이동하는 모습을 재현한 부조와 양쪽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고인들과 참배객들을 연결하는 교감의 통로인 '교감의 문', 참배객들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고인들과 후손들이 교감한다는 의미를 담은 '추모의 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평화기념관 ▲ 전시 영상물
평화기념관의 외부는 밤색 철재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고통의 벽’을 상징하고 있음은 며칠 후에 글을 정리하며 알 수 있었다. 다만, 건물의 외부가 강인한 인상을 주어 ‘전쟁’과 ‘철로’의 이미지를 접목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당시에 했던 기억이 있다.
제주 4.3평화공연과 같이 노근리 평화기념관도 지하 1층으로부터 관람할 수 있었다. 긴 통로를 따라 내려가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에 영상관이 있었으나 상영시간이 지나 관람은 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 마주한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 공간에는 광복 이후 찾아 온 분단, 민족의 비극 6.25, 지울 수 없는 그날의 기억, 그 여름날의 기억 등으로 구성되어 노근리 사건의 배경 및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간은 전쟁을 알지 못한 사람들, 무거운 발걸음, 비통의 길, 억울한 넋, 노근리를 추모하다 등으로 구성하여 피난하는 마을사람들이 철길과 쌍굴에서 미군 전투기의 폭격과 기총 사격을 당한 상황을 연출하여 관람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특히, 쌍굴 모형 아래에 놓여 있는 여러 인골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 추억의 생활전시관
▲ F-86F 전투기
밖은 노근리의 아픈 기억만큼이나 강렬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평화교 너머에는 1950년대 시골의 읍내 풍경을 재현한 작은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화관, 이발소, 다방, 식당 등이었다. 다소 허접한 인상을 주는 조형이어서 전후 민간인들이 사용하던 생활 도구나 피난민들이 지참했던 생필품들을 전시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마을을 지나자 소로 양 편으로 보리밭이 전개되고 그 끝 지점에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전시장에는 노근리 사건 당시 공중 폭격을 했던 비행기와 동일 기종인 F-86F 전투기와 K-511 2.5톤 군용트럭, 탱크, K-111 지프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적함을 달래고 있는 이 기기들은 전쟁 중에는 살생을 목적으로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피비린내를 풍겼을 것이다.
▲ 작품명 : 시련 ▲ 작품명 : 하나 되어 나아가리
▲ 작품명 : 그날의 흔적 ▲ 작품명 : 시선
몸에서 한참 동안 피비린내를 떨쳐버린 이후에야 나는 조각공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각공원에는 ‘모자상’, ‘시련’ 등을 비롯하여 사건 당시의 정황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하고 있었다. 햇볕은 조각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비극의 현장인 ‘쌍굴다리’ 탐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평화공원에서 도로를 건너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노근리 쌍굴다리가 있었다.
▲ 노근리 현장 ▲ 쌍굴다리
이 다리는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개근천 위에 축조된 아치형 쌍굴 교각으로 1950년 7월 26일∼29일까지 4일간 후퇴하던 미군이 주민들을 굴다리 안에 모아 놓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던 곳이다. 지금도 탄흔 위에 하얀 페인트칠로 표식을 해 놓아 그들이 경험했던 아픔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불과 10여 미터도 안 되는 철로 밑의 쌍굴 사이로 300여 명의 난민들을 몰아넣고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쌍굴 다리 아래에 서 있으면 포성이 울리고, 갑자기 어딘 가로부터 총알이 쏟아질 것 같은 우울함으로 나는 그곳을 벗어나고 말았다.
태양은 아까보다 더 강렬하게 대지를 태워가고 있었다.
▣ 황간역에서 시를 만나다
간이역을 보며 소박한 감정에 잠기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또한, 양복정장을 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KTX 역사보다, 튼튼한 두 무릎과 굵은 손가락을 재산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이 이용하는 한적한 시골의 간이역을 좋아하는 것도 우리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아마도 시간에 쫒기며 살고 있는 가발에 의치를 한 젊은이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 생각한다.
▲ 황간역
황간역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 앞에 너른 광장이 있거나 승용차 주차장이 있는 도심 속의 주차장과는 다르게 ‘황간역’이라는 역사명이 붙어 있지 않으면 큰 창고쯤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서울 부산 간 중간 지점에 위치한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으로 현재는 무궁화호 열차만 운행하고 있었다.
황간역은 두 장승 사이로 ‘고향의 시를 담은 항아리’란 표식이 있는 입구를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항아리에 황간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의 작품이 ‘돌’ 혹은 ‘항아리’에 담겨 탐방객들의 마음을 순화시켜주고 있었다. 역장이 누구냐에 따라 초라한 간이역이 훌륭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흐뭇한 공간이었다. 어디 이것이 비단 시골 간이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던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한 공간들이 모두 이에 해당할 터이다.
▲ 올갱이 국밥집
▲ 올갱이국
황간역에서 언덕을 조금 내려오면 황간 김천 간 국도상에 ‘올갱이국밥집’이 자리하고 있다. 영동의 특산물은 아마도 곶감과 금강어죽, 올갱이국일 것이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 선 곳은 ‘동해 식당’이었다. 열 평 남짓한 식당 안은 말 그대로 예스러운 풍경이었다. KBS 방송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다는 이 맛집은 구수한 된장국에 애기배추를 넣어 끓인 국물 맛의 시원함으로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올갱이 지짐은 그렇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이색음식을 먹어본다는 신선함과 소주 안주로 즐거움을 주었다. 현수막의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주인할머니가 곁으로 와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도시에서 선글라스를 낀 아줌마들이 식당 안을 휘 둘러보고는 이내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며, 음식의 참맛보다 시설물부터 살피는 현재의 풍토를 탓하기도 했다.
언젠가 주인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다시 이곳을 들를 것을 약속하며 승용차를 세워 둔 초강천 위 금상교로 돌아왔다. 초강천 지류에는 피라미들이 촐랑대고 승용차는 뜨거운 햇볕에 열을 받아 펄펄 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영동은 잊지 못할 기억의 공간으로 내 생의 또 한 페이지에 갈무리 될 것이다. 대학원 시절 지리산 학술세미나를 다녀오다 들른 어느 민가에서 본 곶감창고의 강렬했던 갈색 이미지, 아내와 걷던 금강휴게소 아래의 강변 길, 젊은 날 영동대학 강의를 오가며 마주했던 사람과 사물들, 월류봉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탄,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노근리 쌍굴다리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곱게 혹은, 아프게 갈무리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