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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세례자 요한(1754 ~1785)
1. 탄생
이벽의 자는 덕조(德祖) 호는 광암(曠菴)이다. 이름은 벽蘗으로, ‘회나무처럼 무성하다’란 뜻이다.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주보 성인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과 복음을 예비하였으니 이름과 세례명이 예언적이며, 애주애민의 천주교 사상을 가장 깊이 통찰하고 복음의 문을 활짝 열었던 조선 천주교 성조이며 창설자이다.
이벽은 동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이부만<李溥萬/ 이보만(정민교수, 파란191p)>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육 남매 중 둘째 아들 태어났다. 누이 이정실은(1750-1780) 정약현과 혼인하여 이벽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과 사돈이 된다. 이승훈이 1776년 20세가 되던 해 정약용의 친누이 정이실과 혼인 함으로써 이벽과 동서 사이가 된다. 형은 이격(1748-1812), 동생은 이석( 1759-1829)으로 이 둘은 무관이다. 탄생지로는 두 곳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설(니벽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두미(정씨가문 족보)-이 제시되고 있다. 1769년에 권엄의 딸과 결혼하여 1781년 사별하였다. 권엄은 서학을 따르는 천주교 인사들에게 적대적이었고, 1801년 신유박해때는 극형을 상소하였다. 이벽은 1783년 정씨와 재혼하여 1784년 아들 이현모를 낳았다.
이벽은 고려 때 문신으로 유명한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본래 문관 집안이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을 비롯하여 형과 동생이 모두 무관 벼슬을 지냈으나, 이벽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여 일곱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외워 인근의 선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그를 가리켜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라고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문하였다. 이벽은 1776년 10월 15일에 스승 이병휴의 영전에 친필 제문을 올렸는데 남아 있다. 이병휴는 양명학에 기운 성호 좌파에 속한 학자였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또한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드는 장사였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된 후 이미 세상을 떠난 이벽을 회상하면서, “나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 하며 이벽의 뛰어난 학문과 행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집안이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므로, 그의 아버지 이부만은 총명하고 공부에도 뛰어난 둘째 아들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크게 빛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벽은 당대 실학의 대학자였던 성호 이익과 그의 조카 이 정휴 그리고 순암 안정복에게 한동안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학문에는 열심이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천주학을 접촉하고 몰두하였다.
2. 사명
중국은 이미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고, 중국을 통해 한국에 전파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북경에 주청사로 갔던 이수광이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등 천주교 문헌을 가지고 귀국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로 활약하던 아담 샬 신부와 교제를 나누고 귀국할 때 천주교 서적을 선물로 받아온 적이 있었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적을 통해 서양 학문의 하나로 천주교 교리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성호 이익 같은 대학자는 문인인 안정복, 신후담, 이헌경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찾아 읽고 그 교리에 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던 천주교를 조선 사람들에게 종교로써 접근시킨 최초의 인물이 이벽이다.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6대 조부 이경상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8년간이나 가까이 모셨다. 이때 소현세자는 북경의 동화문 동화관에 머물면서 당시 북경의 남당 천주교회에 선교 활동을 하던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였다. 이경상은 소현세자를 가까이 모시면서 함께 청국과 서양의 문화에 접촉하였다. 1645년 인질에서 풀려난 소현세자는 귀국할 때, 아담 샬이라는 서양인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천주실의, 칠 극 등 천주교 서적과 건강 공여도 등 기념품을 받고, 천주교 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경상도 천주교에 관한 책 중 일부를 가져와 대대로 집안의 가보로 전하여졌는데 그중에 천주실의와 칠극이 대표적 책이었다.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다. 이때의 조선은 천주교 서적을 읽는 것에 대해서 금하지 않았을 때였고, 조선인 최초로 스스로 천주교)서학을 연구하고 익힌 분이 바로 이 벽(李檗) 성조였다. 이벽의 이러한 면모는 이승훈이 1789년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저는 어떤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도 더욱 대단하였습니다.”
이승훈이 만났다는 어떤 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벽이다.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젊은 학자들이 1779년(정조 3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대학자이며 사부 격인 권철신을 주재자로 모시고 강학회를 열었다. 모인 사람들은 권일신, 이벽,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남인가의 자제들이었다. 이 강학회가 유교적 모임이냐 천주교 성격의 모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강학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천주교가 유교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강학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이 백여리 길을 걸어 주어사를 찾았고 강학에 참여하면서 서양 지식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점차 ‘천주교’라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3. 전교
1) 지식인 계급을 찾아서
1779년 양력 정월 중순쯤 대학자 권철신이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일신, 정약전, 김원성(이윤하의 처가쪽 사위),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등과 강학회를 개최하였다. 이 강학회 소식을 들은 이벽 은 한양에서 백여리 떨어진 주어사로 그들을 찾아 갔다. 천진암 강학회 모임을 통해 이벽은 양반이며 지식인 계층들과 10여 일간 서학)천주학에 관해 연구하고 전교하였다. 이 강학회가 유교적 모임이냐 천주교 성격의 모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강학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천주교가 유교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벽은 강학회가 끝난 뒤 한성 수표교에 있는 그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나 서적으로서는 서학)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한계가 있음을 파악하였다.
2) 이승훈 파견과 첫 세례자 탄생
1783년에 이르러 이벽은 여러 해 동안 갈망해 온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행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회의 종교적 우수성과 교리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서양 성직자들을 만나 천주교의 교리와 전례를 자세히 알아보고 세례를 청하여 받은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얻어 오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1783년 12월 하순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북당 천주당을 찾아갔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 외에 개인적으로 수학을 배우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당시 북당 성당에는 통역관과 수학자로 예수회 소속 그라몽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수학보다 신앙을 더 권면하여 선교하였고,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로부터 교리를 받고, 1784년 1월 북경을 떠나기 직전에, 부친 이동욱의 허락을 받고 예수회 사제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선교사들과 헤어지면 세속의 모든 부귀공명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매년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784년 봄(3월 말) 이승훈 귀국하여 이벽과 함께 교리서를 읽고 연구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벽은 더욱 신앙심이 강화되어 이승훈과 선교 활동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을 찾아와 세례를 받게 된 경위에 대한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보도록 하자. <“1784년에 조선 왕국에서 온 사신 중 한 명이 아들이 서양 수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북경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이후 그는 틈틈이 들려서 수학을 배우고 수학 서적을 얻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선교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교의 이치를 설명해 주고 천주교 서적들을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이내 그 조선의 젊은이는 그리스도교의 주요 교리를 알게 되었고 수학보다는 천주교 신앙을 더 좋아하게 되어 세례를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런 다음 사신으로 온 부친의 동의를 받아내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해 자신의 나라고 돌아간 베드로는 훌륭한 전교자가 되어 편협한 학문에 빠져 있던 여러 사람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음 이벽에 대한 이승훈 베드로 글을 요약한 것을 보도록 하자.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하여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영혼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1789년, 이승훈 편지에서-
3) 전교의 확대(친지*중인계급)
이벽은 1784년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전교하여 신자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는 이승훈과 선교 활동에 나서서 우선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중인 계급의 친지들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아울러 양반과 지식인 계급의 친척과 지인들에게도 천주 교리 전파를 시도하여 성공하였다. 이벽은 1784년 사월(음력) 정약현의 아내이며 이벽의 누이인 이 정실(+1780)의 기일에 광주 마재의 정씨가문에 들려 제를 지내고 배를 타고 한성으로 귀가하는 도중 정약전과 정약용에게 천주교 교리의 세계관 인생관 인간관을 설파였다. 정씨 형제는 한성에 들어온 후에 이벽의 집을 찾아, 천주실의와 칠극들의 교리서를 빌려다가 탐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정약용의 기록을 보자
<갑진년 4월 보름께 형수(이정실)의 제사를 마치고 우리 형제가 이벽과 함께 배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배 안에서 이벽은 천지조화의 시초와 영혼 육신의 살고 죽음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너무나 황홀하고도 놀라워 마치 끝없는 바다를 보는 듯하였고 서울에 들어와 그를 따라가서 천주실의와 칠극등 몇 권을 책을 빌려 오게 되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비로서 혼연히 마음을 기울어져 맛들이게 되었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회고-
이벽 서학을 두고, 이가환 이기양과 토론하여 압승하다
이승훈의 외삼촌인 이가환은 당대 대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이벽과 이승훈 정약용 형제가 주축이 되어 천주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제지하기 위해 이벽을 찾아 격정적인 토론을 하였는데 이벽의 압승이었다. 토론에 패한 이가환이 한마디 남겼다.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가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에게 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후 2차 논쟁은 이기양과 있었다. 달레의 조선교회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 하였으나, 솔직하게 그렇다고 시인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이 토론은 도성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선교에 자신감을 얻은 이벽은 복음이 빨리 전파되고 동시에 견고한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적 인사 영입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러한 선교 정책의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 지방의 명망 높은 가문인 권철신과 권일신을 방문하여 10여일간 머물며 전교하였다. 권철신은 이른바 남인 녹암계의 수장이었으며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전국에 유력하고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권철신은 천주교 가르침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고 그 신앙이 올바르다는 이벽의 견해에 동의하였으나, 천주학 입문에는 미진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우인 권일신은 매우 놀라워하며 즉각적이고 입교를 결심하고 그의 가족과 친구 제자 중인계급의 사람들에게까지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시켰다. 이후 양근지역은 신앙촌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4) 신앙공동체 창설
1784년 9월(음력) 이벽은 이승훈 정약전 약용 형제와 만나 세례식에 대해 의논하였다. 양근의 권일신에게 연락하여 올라오도록 하였고, 그들은 각자의 세례명을 선택하였다. 이승훈은 한성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 성조는 조선에 복음과 구세주의 전파를 준비 준비하였으므로, 본명을 세례자 요한으로 하였고,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하였다. 이렇게 조선의 천주교회는 세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복음선포에 모든 것을 다 바치기로 하였다.
5) 교세 확장(양반, 중인)
이벽과 이승훈은 혈연 학벌 당색으로 연결된 주위 사람들에게 전교하였다. 그리하여 정약전,정약용(요한), 이윤하 마태오, 홍낙민 루카에게 전교하였다. 이들은 또한 중인 계급인 최인길 마티아, 김범우 토마스, 최창현 요한, 지황 사바에게 입교를 권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양근)한감개에서 연락이 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벽과 이승훈은 행장을 꾸려 한감개로 갔다. 그곳에는 충청도의 이존창과 전라도의 유항검도 와 있었다. 이들은 권일신의 제자들로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페르비스트 신부의 ‘교요서론’과 ‘성교절요’ 디아즈 신부의 ‘성경직해’와 ‘수진일과’ 마이야 신부의 ‘성년광익’이 낭독되었다. 이승훈은 북경의 선교사들이 자신에게 한국 교회의 사도가 되기를 지시한 것처럼, 이존창과 유항검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되기를 권유하였다. 권철신은 성년광익에서 성인들을 찾아본 뒤 암브로시오로, 이존창은 곤자가의 루도비꼬로 유항검은 아우구스티노로 주보성인을 택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의 진술에 의하면 1784년에 1785년 1년 동안에 신자 수가 천명에 달했고 교세도 두루 천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잠깐 살펴보자.
충청도와 전라도의 저 유명한 공동체는 이처럼 한감개)양근에서 시작되었다. 이존창과 유항검은 그 지방에서 존경받던 유력자들이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이러한 특권을 버렸다. 이것은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사상의 실천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복음이 전해지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무식한 천민들도 스스로 이끌려 교회를 찾았고 그때부터 충청도 내포와 전라도 전주는 늘 열심한 천주교 신자들과 훌륭한 신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
사대부들은 이벽에 의해 전파되는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이념인 성리학적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당대의 대학자였던 이가환은 이벽이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하니 이대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이벽을 바른길로 인도하겠다고 회담 날짜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서 대토론회를 삼일 동안 벌였다. 이것에 대한 기록인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의하면 이가환의 주장에 이벽이 정곡을 찌르며 대답하는 논리를 보고 "그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하여 사방에 빛을 던져 주었으며, 그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라고 하였다. 이 토론에서 이가환은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기양(李基讓)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6) 신생 공동체의 수난
(1) 명례방 집회 사건(을사추조 적발사건)
과정>
1784 겨울부터 신앙공동체는 명례방(명동)에 있는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1785년 3월 어느 날 같은 장소에서 이벽이 푸른색의 책건으로 머리를 덮어 이마에서 어깨까지 내리 우고 중앙에 스승처럼 앉아 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권일신과 권상연 부자, 권일신의 매부인 이윤하와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이기양의 외종인 정섭 등 십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이벽과 이승훈이 강론을 하고 있었다. 다들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을 중심으로 한 남인 명문가의 집안 자제들이었다 이때 추조(형조)의 금리들이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노름판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급습하였다가 천주교 서적 성화 성물들을 압수하고 신자들을 추조로 끌고 갔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체포된 이들이 대부분 양반집 자제임을 알고 훈계 방면 하였고 중인 계급인 김범우만 구속하였다. 이에 권일신은 자기 아들 권상연과, 이윤하(성호 이익의 외손자), 이총억, 정섭과 함께 추조에 가서 압수된 물건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며, 자신들도 김범우처럼 천주교를 신봉하니 같은 운명을 받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다시 훈방 조치하였다. 김화진이 김범우에게 어째서 서학을 믿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서학은 좋은 점이 너무 많은데, 이것을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나온다. 결연한 의지의 그 대답과 미사와 집회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는 매서운 형벌을 받은 후에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에 처해졌다. 김범우는 1786년 가을에 유배지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은 관변기록의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우연히 적발한 것이 아니다. 안정복(권일신의 장인으로 이념과 소신의 문제로 절연)은 기호 남인파의 원로이며 정통 주자학자로 서학 문제를 놓고 이들과 논쟁을 주고받다가 실태를 파악한 후, 서학에 빠진 이들을 교정하고 책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고의로 흘렸다. 말하자면 밀고자인 셈인데 이것이 기호남인파 조정 대신들에게 여론이 형성되어 형조에 단속 지시가 제보되었다. (최보식 기자/정민 교수 '파란' 참고)
결과>
을사년 추조 적발 사건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반천주학 저서들이 나타나고, 성균관 유생들은 통문을 작성하여 사교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저서와 통문들이 나돌자 양반 집안에서는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애소하거나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벽과 이승훈으로 이벽과 이승훈은 문중門中 박해를 받았다.
4. 순교
김범우 마태오가 배교를 거부하여 단양에서 유배를 살고 있을 때, 교회 창설의 주역 이벽은 자신의 집안에서 유배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였다. 박해의 원인은 유교(儒敎)의 이념을 들어 천주교는 아비도, 임금도 없다고 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라면서 사교(邪교)로 낙인 찍었고, 삼강오륜을 거역한 죄인으로 여겼다. 당시 조선의 법도는 상인(常人)은 나라에서 처벌하였으나 양반(兩班)들은 문중 처벌에 맡기고 있었다. 이후 이벽은 성리학 사회의 비방과 문중門中의 강압으로 집안에 감금되고, 아버지 이부만은 문중 회의에 불려가 모욕과 문책을 당한다. 아들 이벽의 천주교 전교를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족보에서 빼 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부모에게 제사 드리지 말라고도 하며, 양반집 부녀자들이 남정네들과 동석하기도 하니, 이는 오랑캐의 법도이므로 양반을 상놈으로 만들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드는 이러한 불법을 가르치는 사문난적은 문중에서 제명처분 해야만 한다." "이 벽은 사특한 물리들의 괴수이니, 우선 그 형 이격이 아직도 벼슬에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즉시 벌을 주어 내쫓아야 한다."(1801년 조선 왕조실록)는 기록만 보아도 그 아버지의 고민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벽의 형 이격은 십육 년째 별군직에 있었고 아우 이석은 좌포도 대장직에 있었다)
성정이 과격했던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추조 적발’ 이후 아들이 그 수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이부만은 아들 이벽을 불러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가며 천주교를 버릴 것과 문중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설득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해도 자식의 뜻을 돌릴 수 없고 문중의 압박은 거세어지자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 이부만은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이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지하겠다’고 말했다. 집안과 문중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고자 한 것이다. 목을 매달려던 이부만은 자살 기도를 중지하고 아들이 천주교를 끊었다고 문중에 알렸다. 그런데 문중에서 이번에는 이벽 자신이 직접 문중 회의에 나와 자명소自明疏를 올릴 것을 요구했다. 이벽은 오히려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를 간략하게 알리는 글을 지었다. 크게 분노한 아버지는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하면서 그를 후원 별당에 가두어 출입문에 못을 치고 하인들에게 엄히 지키게 하여 외부와 단절시키고, 문중에는 아들 이벽이 천주교를 믿다가 천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알렸다. 1785년 6월말경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다블뤼와 달레는 페스트로 표현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쇠진한 육신에 역질이 스며들자, 가족들은 이벽에게 땀을 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이불 속에서 이벽은 땀구멍이 열리지 않은 채 질식사하였다. 병을 앓은 지 8일만의 일이었다. 변기영 신부님의 자료에는 훗날 시신 발굴시 치아를 검색했을 때 독극물에 의하 치사라는 설도 있다. 이벽의 죽음은 정황적으로 맞아죽음이나 목잘려 죽음 못지 않은 어쩌면 더 비극적인 혈육인 가족과 가문에 의한 비극적인 죽음인 것만은 확실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벽은 때가 이르렀음을 느끼고 방안에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14일만인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탈진하여, 31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앓아 누운지 8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벽의 사망 시기는 기록에 따라 얼마간의 혼선이 있다. 다블뤼와 달레는 이벽의 사망이 1786년 봄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산이 쓴 ‘우인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挽詞)’가 편년 순인 다산 시집에 1785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실렸고, 제 7구에 “가을 타고 홀연히 날아 떠나니(乘秋忽飛去)”라 했으니, 1785년 음력 7월의 일이 분명하다. 족보에도 그렇게 나온다.
그는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구세주와 복음을 받아들여 어두움 속에 잠겨 있던 조선 땅에 밝은 여명을 열어간 시대의 선구자였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殉敎)였던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그의 책 매혹에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이벽은 계절을 모르고 너무 일찍 핀 꽃이라 피면 꺾일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절의 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시절의 꽃으로 왔던 것이고, 그의 행보와 죽음의 시작으로 이 땅에 구세주와 그리스도교가 비로소 알려질 수 있게 만든 성조였다.
참고: 이벽(변기영 신부님,한국문화재청), 가톨릭 사전, 김성태 신부님 대신학교 강의록, 최보식 ‘매혹’, 정민 ‘파란,다산독본’
죽을 운명을 앞두고 이벽 세례자께서 지은 시>
무협중봉에 서 있는 형세로다
이제는 죽어서 황천길로 들어가니
은하수 별자리에 떠오르는 달처럼
비단옷 곱게 차려 입고 하늘나라 가노라
-정학술 니벽전 말문에서 발췌 한문 원본은 없고 한글본만이 전해짐-
정약용이 이벽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지은 시>
신선나라 학이 인간들 사이에 내려오시니,
헌연히도 신선의 풍채를 보이셨네.
깃과 날개는 희기가 눈 같으니,
닭들과 집오리들이 시새워 골내며 샘내네.
울음소리는 우렁차서 아홉 하늘 진동시키고,
내는 소리 밝고 맑아 풍진에 뛰어났네.
가을이 되어 돌아갈 때를 맞아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
하염없이 슬퍼하며 애달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이덕조 추도시(追悼時) -박제가(1750~1805)-
진인은 명리를 숭상하여서
청담으로 그 시대 어지렵혔지
덕조는 천지사방 논의 했으나.
어이 실제에서 벗어났으리
필부로 시운에 관심을 두고.
파옥에서 경제에 뜻을 두었네
가슴속에 기형을 크게 품으니
사해에 그대 홀로 조예 깊었지.
사물 마다 본성을 깨우쳐 주고
형상마다 비례를 밝히었다네
몽매함이 진실로 열리지 않아
훌륭한 말 그 누가 알아들으랴
하늘 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 장 나갈 계획 세웠지
살던 곳에 남은 꿈 깨어나서는
푸른 산에 그 지혜를 묻고 말았네.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으니
만물은 떠나가지 않음이 없네
긴 휘파람 기러기 전송하면서
천지간에 남몰래 눈물 흘리요
박제가(1750~1805)는 1788년 평소 그와 가까웠던 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도시(四悼時)를 지었다. 그중 한 편이 이덕조이다. 이덕조는 이벽 세례자 요한으로 천주학에 연루되어 요절한 3년 뒤에 이 시를 썼다. 이 시에서 앞의 열 줄까지는 이벽의 천학天學에 대한 성취를 말한다. 나머지 내용은 세상이 그와 그 지혜를 알아 듣지 못하여 묻어버렸음을 아까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이다. 박제가는 1778부터 네 차례 사신으로 중국을 행차했다.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조선을 개방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 (정민 교수, 파란 212-213p)
다산 중요강의보 서문에서, 이벽을 추모함>
그 후 다산은 유배시절에 이벽과 젊은 시절 함께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새로 정리해 ‘중용 강의보’로 마무리 한 뒤, 서문에 이렇게 썼다. “위로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덕에 나아가고 학문에 해박함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옛 글과 지금 글을 합쳐서 본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1814년 7월 말에 썼다. 그 행간에 이벽에 대한 존경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인생과 삶에 대한 회한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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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9월 순교자 성월에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인 이 벽 세례자 요한에 대한 순교 기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어른의 깊은 혜안과 열정과 투신 그리고 참혹한 순교에 감사드리며 부끄러운 신앙을 분발합니다.
교회사는 또 하나의 성경"이라는 말이 참으로 와 닿은 날 2023년 09월 15일
오늘은 고통의 성모 어머니 기념일이기도 하다.
박해와 순교의 십자가를 부활로 승화시킨 한국천주교)증거자님들과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40년전 조선땅에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와 복음의 세례를 베푸는 이가 있었다. 마리아처럼 순결을 지킨 여인이 있었으며 요셉처럼 아내의 동정을 지켜준 사내가 있었다. 살로메와 유다도 빌라도도 있었다. 물론 쿼바디스도. 이 땅 조선에도 무수히 성경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김길수 요한. '하늘로 가는 나그네' )
사생관死生觀
사랑의 진성성은
이 하나로 판정된다
네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박노해 사생관死生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