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창녕군지 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창녕군지 하권에는 수원백씨관련 기록이 있어
여기로 옮겨 옵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수원백씨 중흥을 기대합니다.
■ 전설
백씨와 말무덤(군지 하권 125페이지)
옛날 창녕읍 외부리(가매실)에는 백씨가 한 동리를 이루어 살았다 한다. 어느 백씨 집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가 잘 생기고 재주가
있어 보여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고. 집안이 모두 기뻐했다.
그 아이가 태어난 지 7일째 되던 날, 가족이 이웃집에 방아를 찧고 오니 아기는 온데 간데 없어 놀라 사방으로 찾으니 아기는 천장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그 주먹을 펼쳐 보았더니 손바닥에 임금(王)자가 박혀 있었다.
부모는 아기가 자라 임금이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나라에서 알면 큰 화를 면치 못하겠으므로 아기를 죽여 버렸다. 사흘 후 뒤편 개천
에서 용마가 솟아났다. 용마(龍馬)는 큰 소리로 울면서 마을 주위를 빙빙 돌더니 죽고 말았다. 바로 아기가 장성하면 타고 천하를
호령할 용마였으나 주인이 죽었으므로 따라 죽은 것이었다.
이 말무덤이 지금도 토옥골 ‘등산(嶝山)’에 있는데 그 후로 백씨 집안은 차츰 몰락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한다. (창녕군지, 1984)
■ 지명유래
● 창녕읍 외부리(군지 하권 430페이지)
가매실이라 지명이 불리어지는 것은 대체적으로 산이 주위를 빙 둘러싸서 분지형을 이룬 지역으로 가마솥과 같이 생긴 지형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 가매실도 서편은 성지산, 남동은 등산 등의 산줄기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매실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신문부곡의 땅으로 오래 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온 곳으로 말 무덤으로 알려져 오는 고분과 이곳에서 도자기를 생산한 가마터와 불을 지펴 도자기를 만들었다하여 분터라는 지명도 있음을 보아 신문부곡일 당시 일부 주민이 농사를 지으며 도자기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리는 외부 1개 리이며 전에는 131호였으나 지금은 95호이다.
- 가매실(釜谷) : 바깥 가매실, 안 가매실 등을 총칭하여 부를 때 가매실이라 부른다. 지형이 가마처럼 생겨서 가매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남쪽 1km 쯤 떨어진 토오골 산등성이에 말 무덤이라 알려진 고분이 있는데 이것은 가매실에 오래 전에 살았다 하는 백씨(白氏)와 관련이 있다. 창녕의 구성(舊姓)을 흔히 ‘조(曺), 장(張), 황(黃), 백(白)’이라 하는데 그때 이곳은 백씨 촌이었다 한다. 그러나 아기와 백마가 죽자 그 집안도 망하여 이사를 가니 지금은 성씨촌(成氏 村)이 되었으니 창녕의 신성(新姓)은 ‘성)成), 하(河), 노(盧)’라 한다.
- 말무덤 : 어울고개 아래 토오골에 있는 고분으로 예전에 외부에 살았던 백씨 가문과 성지산의 장군등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온다.
- 성지산(聖智山) : 광정 동편에 있는 산으로 창녕읍 외부리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성지도사가 다녀간 산이라 한다.
이 산에 장군이 태어날 줄기라는 장군등이 있다.
● 유어면 풍조리 (군지 하권 600페이지)
풍조리(風槽里)느 유어면의 중부 동남에 있는 법정리이다. 풍조의 앞산이 성지산의 줄기인 천마봉(天馬峰)으로 천마봉의 산세는
용마가 나르는 형국이라 하여 이것과 관련하여 인근 지명들이 불리어졌다 한다.
즉 천마봉 동쪽 창녕읍 가매실(外釜里)은 용마가 먹을 죽을 끓이는 가마솥이고, 이곳은 용마의 먹이가 든 구시(구유)라 한다.
바람구시-파랑구실 등으로 불러져 바람은 ‘風’, 구시는 ‘槽’로 기사되었는데 구시는 옛부터 땅이 움푹 패어지고 낮은 지대에 붙었다.
■ 창녕 입향성씨(入鄕姓氏) (군지 하권 754페이지)
본관성씨 | 입향조 | 입향년대 | 입향 전 거소 | 입향 후 세거지 | 가계도 |
수원백씨 | 백감 | 약 450년전 | 전남 장흥 | 창녕읍 외부리 | 정신재공파 정해군의 손자 |
수원백씨 | 백옥 | 약 400년전 | 합천 초계 | 창녕읍 여초리 | 선정공파 송산-중손-인석의 자 |
수원백씨 | 백동달 | 약 250년전 | 전남 순천 |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 | 정신재공파 행-언성-의걸 후손 |
■ 열녀 주씨(烈女 周氏) (군지 하권 795페이지)
白惟精妻 壬難爲賊所擄 抗節不汚 卒爲賊所害 事 聞旌閭
백유정의 아내이다. 임란 때에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욕되지 않게 절조를 지켰다.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효녀 백이랑(孝女 白二娘)(군지 하권 801페이지)
만호(萬戶) 백수(白璲)의 딸 이랑은 임진외란 때 적이 그 부모를 죽이고 이랑을 빼앗아 가려하였다. 이랑이 몸으로 부모를 가리워
그 칼날에 함께 죽었다. 이일이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창영 고암면 )
■ 관직자
백감 (군지 하권 941페이지)
수원, 통정대부, 이조참의
1550년대에 전남 장흥에서 창녕 외부리로 이거한 입향조
군지 기록을 옮긴이의 생각
외부리는 참의공 백감님이 장흥에서 창녕에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고
풍조리에는 백감님의 묘소가 있습니다. 창녕군지에 백씨관련기사가 있어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생각입니다.
참의공 감은 전남장흥에서 경남창녕으로 이사 왔네
좋은세월 흘러가니 외부리도 타성(他姓)들이 살고있네
천운은 돌고 돈다고 했으니 수원백씨 중흥을 기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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