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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42기 분포도이며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습니다
㉠ 제릉(조선 제1대 왕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 : 경기도 개성군 판도면 상도리)
㉡ 후릉(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구 영정리)
남한에 있는 40기 능이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였습니다
세조 왕릉을 찾아서 2부 입니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조선 제7대왕 세조의 릉 입니다
정희왕후의 릉
정희왕후 윤씨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둘째 딸로 1418년에 태어나, 1428(세종 10년)년 11살의 나이에 수양대군(세조)과 혼례를 올리고, 1455년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슬하의 자녀로는 장남 의경세자(추존 : 덕종), 차남 예종, 의숙공주를 낳았으며
조선 7대 왕 세조에 뒤를 이어 예종이 8대 왕(1468년)으로 19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했고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사망하자, 정희왕후는 맏아들인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을 조선 제9대왕으로 당일 즉위하게
했지만, 성종 역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정희왕후는 그 뒤로도 7년 동안 섭정을 계속했습니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으며 148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국(朝鮮國)
세조대왕 광릉(世祖大王 光陵)
정희왕후 부좌강(貞熹王后 祔左岡 : 정희왕후를 남편의 왼쪽 언덕에 묻는다)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수복방 입니다
세조의릉
정희왕후 릉
세조의 릉
광릉쪽을 뒤돌아 보고~
곧 도착하게될 금천교 오른쪽으로
음료, 커피 자판기가 있는 앞쪽에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후계목이란 어린 2그루의 소나무는
2012년 4월19일 산림청과 문화재청은 오후 3시30분부터 조선 세조 능이 있는 경기도 포천 국립수목원 광릉숲에서
조선 세조와 관련이 깊은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의 후계목(後繼木) 나무가 세조릉이 있는 광릉 숲에 기념식수식를 하였습니다.
정이품송 후계목은 충청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2002년 어미나무인 충북 보은의 서원리에 있는 소나무인 천연기념물
352호인 정부인송에 정이품송을 인공수분 시켜 2003년에 씨앗을 받아 파종하여 1년 뒤 2004년부터 8년간 키워온
후계목 나무로서 일반소나무와 달리 줄기가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는 정이품송 후계목은
400여 그루가 충북 산림환경연구소 포지에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2016년을 기준으로 13살이된 보은 속리산 정이품송 후계목 어린 소나무 2그루는
조선 제7대왕 세조와 관련이 있으며 재위 14년 동안 많은 치적을 올렸지만 만년에는
조카 단종에게 빼앗은 왕위 찬탈에 대한 고뇌와 피부병에 시달려 불문에 깊이 귀의하게 된답니다.
1464년 세조는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에 머무르다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길에 말티고개를 넘고
1974년 여름 어느날 보은읍에서 버스를 타고 말티고개를 넘은지 41년만에 이번에는 승용차편으로
2번째 넘는 말티고개 입니다
세조 임금이 탄 가마가 노거수에 이르니~
(계속 이어지는 글 내용은 아래 사진속 글을 읽으시면 됩니다)
세조임금이 속리산
법주사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참고 : 경복궁 민속박물관 건물을 자세히 보시면~
사진속 법주사 팔상전을 꼭 닮았지요 ㅎㅎ. 모방하였답니다. 그러면
경복궁 민속박물관 팔상전 밑부분은 어디를 모방하였을까요?? 경주 불국사 백운교를 모방하였답니다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입니다
경주 불국사 백운교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과 똑같이 닮았지요.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속리산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 세조는 꿈속에서 귀공자가 일러준데로 문장대에 오르니 삼강오륜이란 책 한권이 있어~
다음 이어지는 글은
아래 글을 읽으시면 됩니다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시 한수를 짓고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는다 하여 일명 운장대(雲藏臺)라 일컷던 봉우리를
세조가 삼강오륜 책 한권을 다 읽고 시 한수를 짓은 이후론
문장대(文藏臺)로 부르고 있다 합니다
오대산 오대 암자 중에는 <중대 사자암>이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암자 이름도 사자암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사자암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기 때문에 비로전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중대 사자암 비로전 측면 후면 외벽에 그려진 벽화들을 올려 볼까 합니다
상원사의 역사가 담겨있는 벽화랍니다
(아래 사진 일부는 한강기맥을 할적에 담아두었던 사진 입니다)
오대산의 유래는 비로봉(1,563m)을 주봉으로 하여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처져 있다 하여 오대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던
중국의 상서성 청량산의 별칭인 오대산과 매우 유사하다하여 오대산이라 명명하였다고도 합니다
오대산의 오봉과 오대 암자가 그려진 비로전 측면 외벽의 벽화을 촬영하였습니다
오대산의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렀습니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 효명왕자가 신문왕의 뒤를 이어 성덕왕으로 왕위에 오름)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들어 더욱 거세어져 박해를 받으며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는등
척불정책에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합니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괴질(怪疾)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애 고양이의 도움으로 자객의 습격을 피해 목숨을 건진 일화가 서려 있는
(이적(異跡) :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1465년(세조11)에
상원사 중창하여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지게 됩니다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종 1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태종 1년부터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어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지암스님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을 하였다 합니다
1951년 6·25전쟁 때에는 상원사를 화재로부터 지켜낸 일이 한암스님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지요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북한 게릴라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월정사에 불을 질러 태운 국군이
상원사까지 불태우려 하자 군인들 앞에서 가사를 갖추어 입고 법당에 정좌해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께 공양하겠다"는
불심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합니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으며, 한암스님은 1951년 2월 14일 입적하셨습니다
한암스님이 중대사자암으로 오르실 때 짚고 다니시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마당에 꽂아 둔것이
어느날부터 싹이 돋아나 지금은 큰 단풍나무로 자랐다고 합니다
2006년 비로전 앞에 요사체와 공양실 등 건물을 지으며
비로전 앞에 있는 한암스님의 단풍나무 지팡이를 산신각 가는길 옆에 옮겨 심었는데 안타깝게도 죽어버렸답니다
그런데 죽었던 단풍나무 밑둥치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 있다고
스님께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단종의 심복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이른바 여섯신하(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 집니다
좌의정 김종서의 두 아들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것에 반발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단종 복위를
계획하던 친동생 금성대군을 안동 순흥으로 귀양 보내 사사 시키며,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에게 여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지요.
이렇게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종 복위 꾀하는 충신들의 목숨을 잔악하게 살육하는 악한 업을 쌓은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합니다
세조는 어느날 잠자리에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 세조의 형수)의 혼백이 나타나 세조의 몸에 침을 뱉는 꿈을 꾸웠다고 합니다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고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며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백약이 무효하니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병이 낫기를 발원하였다 합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할
그 때 숲속에서 놀고 있는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습니다.
세조는 동자승에세 등을 밀어 줄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남깁니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하자 동자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도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동자승은 홀연히 사라졌다 합니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듯이 나은 것을 알게 돼고서
왕은 크게 감격하며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된 목각문수동자상 입니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아래 벽화는 중대사자암 후면 외벽에 그려저 있으며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벽화 입니다
국보 제36호 지정된 동종 용뉴 좌우에 오목새김된 명문에 의해 이 종이
725년(성덕왕 24=성덕왕은 신문왕의 둘때 아들 효명)에 주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에 어떠한 목적으로 주성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루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 국명(國命)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鐘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보존하고 있으며 이젠 종은 사용하지 않으며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으로부터
서대우통수로 끓인 차를 공양을 받고 있는 벽화 입다
신라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받아 643년 귀국한 뒤
오대산 적멸보궁에 봉안하는 그림이 그려저 있습니다
조선 세조 왕실이 적멸보궁에서 삼배하며 참회로 마음의 수양을 쌓는 벽화 입니다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 계단 좌우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닌다는 사자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비로나자불을 모시는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을 지키기 위한 암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문수보살을 본존불로 모신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입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 이지요
문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고양이 석상이 있습니다
묘상(猫像) 즉 고양이 모양의 석물 한 쌍이 있습니다. 이 고양이 석상은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다시 이적의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하자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합니다
(이적(異跡) :
마치 법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이였죠
이상히 여긴 세조는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팎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뜻밖에도 부처님을 모신 불단 밑에
한 자객이 숨어 있었다 합니다. 그 고양이가 아니였더라면 세조는 꼼짝없이 자객의 칼에 비명할 뻔 했던 것입니다
세조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 묘전(猫田)을 하사하고,
한 쌍의 묘상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고양이를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합니다
서울 근교에도 여러 군데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하는군요
지금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상원사 문수전 측면 외벽에도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벽화와
보천, 효명(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효명 왕자는 성덕왕이 됨) 두 왕자가 서대 우통수 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서 문수보살에게 공양하는 벽화가 그려저 있습 니다
관대걸이란 뭐일까요
세조대왕이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 관대걸이라 합니다
조선 제7대왕 세조의 릉 관람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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