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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편
第七篇 : 論人性本善 而述天主門士正學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배움을 서술함
최소자 역
7-1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先尋示以天主爲兆民尊父 則知宜慕愛 次示人類靈魂身後不滅 則知本世暫寄 不可爲重
선심시이천주위조민존부 칙지의모애 차시인류영혼신후불멸 칙지본세잠기 불가위중
선생께서는 수고스럽게도 첫째, 천주는 만물들의 높으신 아버지임을 가르쳐주셨으니 그 분을 마땅히 앙모하고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영혼은 사후에도 불멸함을 가르쳐주셨으니 현세에는 잠시 머무는 것이니 중시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復聞 且有天堂爲善者昇焉 居彼已定心修德 以事上帝 與神人爲侶
복문 차유천당위선자승언 거피이정심수덕 이사상제 여신인위여
더 나아가 이렇게 들었습니다. “천당에는 또한 착한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곳에 살면서 이미 덕성을 닦는 데에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면서 천사들과 착한 사람들과 더불어 동무들이 된다.
況有地獄 居彼已定心不改惡 以受刑殃 致萬世不可脫也
황유지옥 거피이정심불개악 이수형앙 치만세불가탈야
또한 지옥이 있어서 그곳에 살면서 이미 악행을 고치지 않기로 마음을 작정하였기 때문에 형벌과 재앙을 받으면서 영원토록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玆欲詢事天主正道 夫吾儒之學 以率性爲修道 設使性善 則率之無錯
자욕순사천주정도 부오유지학 이솔성위수도 설사성선 즉솔지무착
이제 천주를 섬기는 올바른 도리를 묻고자 합니다. 우리 유학에서는 “완전한 본성에 따름을 修道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다 선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에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若或非盡性善 固不足恃也 奈何?
약혹비진성선 고부족시야 나하?
하지만 누구나 다 ‘좋은 본성(善性)’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좋은 본성 또한 진실로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吾觀儒書 嘗論性情 而未見定論之結 故一門之中 恒出異說
오관유서 상론성정 이미견정론지결 고일문지중 항출이설
제가 유가의 서적을 보니 性과 情을 논한 적은 있으나 그것들에 대한 定論의 묘책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학파라도 언제나 다른 주장이 나왔습니다.
知事而不知已本 知之亦非知也
지사이부지이본 지지역비지야
이는 사물의 이치는 알지만 인간 자신의 근본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여도 역시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欲知人性其本善耶 先論 何謂性 何謂善惡
욕지인성기본선야 선론 하위성 하위선악
人性의 근본이 선하다는 것을 알려면 무엇이 性이며 무엇이 선악인지를 먼저 논해야 합니다.
夫性也者 非他 乃各物類之本體耳 曰 各物類也 則同類同性 異類異性
부성야자 비타 내가물류지본체이 왈 각물류야 즉동류동성 이류이성
本性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각 사물 부류의 본체일 뿐입니다. 개개 새물들을 부류로 말하자면 부류가 같으면 본성이 같고, 부류를 달리하면 본성도 달라집니다.
曰 本也 則凡在別類理中 卽非玆類本性 曰 體也 則凡不在其物之體界內 亦非性也
왈 본야 즉범재별류이중 즉비자류본성 왈 체야 즉범부재기물지체계내 역비성야
根本이란 “무릇 다른 부류의 관념에 속해 있으면 그 부류의 근본적 성질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體란 “무릇 그 개체의 범위 안에 있지 않으면 또한 그 개체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但物有自立者 而性逆爲自立 有依賴者 而性兼爲依賴
단물유자립자 이성역위자립 유의뢰자 이성겸위의뢰
단지 그 개체가 실체로 존재하면 본성 역시 실체이고, 속성으로 존재하면 그것의 본성 모두가 속성이 됩니다.
何愛可欲謂善 可惡可疾爲惡也 通此義者 可以論人性之善否矣
하애하성지선 가악가질위악야 통차의자 가이논인성지선부의
우리 인간들이 사랑해야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 善이요, 싱ㅎ어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런 뜻을 이해하신다면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아닌지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다.
西儒說人云 是乃性 覺者 能推論理也
서유설인운 시내성 각자 능추론리야
서양의 철학자는 사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있으면서 지각하는 존재이며, 이치를 추론할 수 있다.”
曰 性 以別于金石 曰 覺 以異于草木 曰 能推論理 以殊乎鳥獸
왈 성 이별우금석 왈 각 이이우초목 왈 능추론리 이수호조수
살아있기 때문에 금석과 다르다고 합니다. 지각하기 때문에 초목과 다르다고 합니다. (이치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曰 推論 不直曰 明達 又以分之乎鬼神
왈 추론 부직왈 명달 우이분지호귀신
이치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들과 다르다고 합니다. 추론한다고 말하지 명백히 이해하고 있음이라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한 귀신들과 구분됩니다.
鬼神者 徹盡物理 如照如視 不待推論
귀신자 철진물리 여조여시 불대추론
귀신들은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다 터득하고 있음이 마치 거울로 비추어 보고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사람들처럼 추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人也者 以其前推明其後 以基顯驗其隱 以其旣曉及其所未曉也
인야자 이기전추명기후 이기현험기은 이기기효급기소미효야
사람은 이전의 것을 미루어서 이후의 것을 이해하며, 그 드러난 것으로써 숨겨져 있는 것을 증명해 냅니다. 이미 알아낸 것으로써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까지 미칩니다.
故曰 能推論理者 立人於本類 而別其體於他物 及所謂人性也
고왈 능추론이자 입인어본류 이별기체어타물 급소위인성야
그러므로 이치를 추론할 수 있음이 인간을 본래의 부류로 만들어 주고 사람이라는 개체를 다른 개체들과 구별해 주니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仁義禮智 在推理之後也
인의예지 재추리지후야
인의예지는 사람들이 도리를 추론하고 난 다음에 있게 된 것입니다.
理也乃依賴之品 不得爲人性也 古有岐人性之善否 誰有疑理爲有不善者乎?
이야내의뢰지품 부득위인성야 고유기인성지선부 수유의리위유불선자호?
理는 바로 사물에 속한 속성이므로 사람의 본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인성이 선한지 아닌지 갈라졌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理에 불선함이 있다고 의심한 적이 있습니까?
孟子曰 人性 與牛犬性不同
맹자왈 인성 여우견성부동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소나 개의 본성과 같지 않다.”
解者曰 人得性之正 禽獸得性之偏也
해자왈 인득성지정 금수득성지편야
어떤 해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바름’을 얻었지만 짐승들은 본성의 ‘편벽됨’을 얻은 것이다.”
理則無二無偏 是古之賢者 固不同性於理矣
이즉무이무편 시고지현자 고부동성어이의
그러나 理라면 오직 하나뿐인 완전함 그 자체이기에 둘일 수가 없고 편벽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옛날의 현인들은 本性을 진실로 理와는 같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釋此 庶可答者所問 人性善否歟?
석차 서가답자소문 인성선부여?
이렇게 (理와 本性을 다르게) 풀이했으니 “인간 본성은 선합니까?”하고 선비께서 물으신 것에 대한 대답이 거의 되었다고 봅니다.
若論厥性之體及情 均爲天主所化生 而以理爲主 則俱可愛可欲 而本善無惡矣
약논궐성지체급정 균위천주소화생 이이이위주 즉구가애가욕 이본선무악의
만약 (모든 존재를) 그 본성을 가진 개체들과 그것들의 실정(情)들로 논의 한다면 모두가 천주에 의해서 창생된 것입니다. 그러니 理로써 주재해 나간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만하고 소망할 만한 것이니 근본은 선한 것이요 악한 것은 있을 수 없겠습니다.
至論其用 幾又由乎我 我或有可愛 或有可惡
지론기용 기우유호아 아혹유가애 혹유가악
그러나 그 본성의 쓰임새로 말하자면 그 動因은 또한 우리 자신들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저는 혹 사랑받을 만하게, 혹 미움을 받을 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所行異 則用之善惡 無定焉 所爲情也
소행이 즉용지선악 무정언 소위정야
이와 같이 행동한 (결과가) 다르다면 본성의 쓰임새(用)에는 선과 악함이 원래부터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 情에 의해서 (그렇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夫性之所發 若無病疾 必自聽命于理 無有違節 卽無不善
부성지소발 약무병질 필자청명우리 무유위절 즉무불선
무릇 본성의 발동에 문제점이 없다면 반드시 理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절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면 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然情也者 性之足也 時著偏疾者也 故不當 臺隨其欲 不察于理之所指也
연정야자 성지족야 시저편질자야 고부당 대수기욕 불찰우리지소지야
그러나 情은 본성에 붙어있는 蛇足과 같은 것이기에 때때로 치우쳐서 문젯거리를 드러내기 때문에 한결같이 情欲을 따라가서 理가 지시하는 바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身無病時 口之所啖 甛者甛之 苦者苦之 乍遇疾變 以甛爲苦 以苦爲甛者有焉
신무병시 구지소담 첨자첨지 고자고지 사우질변 이첨위고 이고위첨자유언
몸에 병이 없을 때에 입으로 맛을 보면 단 것은 달다고 여기고 쓴 것은 쓰다고 여깁니다. 갑자기 병들어 변하게 되면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性情之已病 而接物之際 悞感而拂于理 其所愛惡 其所是非者 鮮得其正 鮮合其之者
성정지이병 이접물지제 오감이불우리 기소애악 기소시비자 선득기정 선합기지자
本性과 情欲이 이미 병들어서 사물을 접할 때에 감응이 착오를 일으켜서 도리에 어긋나게 되면 그것들(性과 情)의 좋아함과 싫어함, 그것들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것에는 올바름을 얻은 것도 적고, 진리와 합치하는 것도 매우 적게 됩니다.
然本性者善 此亦無碍于稱之爲善
연본성자선 차역무애우칭지위선
그러나 본성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또한 선하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盖其能推論理 則良能常存 可以認本炳 而復治療之
개기능추론리 칙양능상존 가이인본병 이복치료지
대개 사람들이 도리를 추론할 수 있으면 良能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근본이 병들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다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
7-2 ◈ 중국 선비가 말한다.
貴邦定善之理曰 可愛 定惡之理曰 可愛 是一說固盡善惡之情
귀방정선지리왈 가애 정악지리왈 가애 시일설고진선악지정
귀국 에서는 선의 도리는 “사랑할 만하다.”, 악의 도리는 “미워할 만하다.”고 정의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선악의 실정을 다 말한 하나의 학설입니다.
敝國之士 有曰 出善乃善 出惡乃惡
폐국지사 유왈 철선내선 출악내악
저희 나라 선비 중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서 나왔으면 선이고, 악에서 나왔으면 악이다.”
亦是一端之理 若吾性旣善 此惡自何來乎?
역시일단지리 약오성기선 차악자하래호?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도리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본성이 이미 선하다고 한다면 이 악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吾以性爲能行善惡 固不可謂性自本有惡矣 惡非實物 乃無善之謂
오이성위능행선악 고불가위성자본유악의 악비실물 내무선지위
저는 사람의 본성이란 선도 악도 다 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사람의 본성 자체에 본래 악이 잇다는 말은 아닙니다. 악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선의 부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如死非他 乃無生之謂耳 如士師 能死罪人 詎其有死在己乎?
여사비타 내무생지위이 여사사 능사죄인 거기유사재기호?
마치 죽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마치 재판관처럼 죄인에게 사형 죄를 줄 수 있다고 한들 (그 재판관은)어찌 죽음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겠습니까?
苟世人者生而不能不爲善 從何處可稱 成善 乎? 天下無無 意于爲善而可以爲善也
구세인자생이불능불위선 종하처가칭 성선 호? 천하무무 의우위선이가이위선야
만약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선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선을 이루어 낸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자유의지)가 없었는데도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吾能無强我爲善 而自往爲之 方可謂爲善之君子
오능무강아위선 이자왕위지 방가위위선지군자
억지로 우리 자신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들 스스로 나아가서 그것을 행할 수 있으면 비로소 선을 행하는 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天主賦人此性 能行二者 所以厚人類也
천주부인차성 능행이자 소이후인류야
천주께서 이런 본성을 인간들에게 부여하여 두 가지(선과 악) 모두를 행할 수 있게 한 것은 인류를 두텁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其能取捨此善 非但增爲善之功 尤俾其功爲我功焉
기능취사차선 비단증위선지공 우비기공위아공언
사람들이 이렇게 선을 선택할 수도 그만둘 수도 있게 하신 것은 단지 선을 실천하는 인간의 공로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공로를 우리 인간의 공로로 만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故曰 天主所以生我 非用我 所以善我 乃用我 此之謂我
고왈 천주소이생아 비용아 소이선아 내용아 차지위아
그러므로 “천주께서 우리 인간을 창생하신 까닭은 우리 인간을 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하게 만들려는 이유 때문에 바로 우리 인간을 쓰시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을 말함입니다.
卽如設正鵠 非使射者失之 亦有惡情於世 非以使人爲之
즉여설정곡 비사사자실지 역유악정어세 비이사인위지
만약 활쏘기 시합에 과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활을 쏘는 사람으로 하여금 빗맞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정서가 세상에 있는 것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彼金石鳥獸之性 不能爲善惡 不知人性能之以建其功也
피금석조수지성 불능위선악 부지인성능지이건기공야
저들 쇠붙이나 돌멩이, 짐승들의 본성은 선도 악도 저지를 수 없으나 사람의 본성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자기의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
其功非功名之功 德行之眞功也
기공비공명지공 덕행지진공야
이런 사람들의 공로는 기능적인 공명의 공로가 아니라 덕행의 진실한 공덕입니다.
人之性情 雖本善 不可人而謂世人之悉善人也
인지성정 수본선 불가인이위세인지실선인야
인간의 性情은 비록 근본은 선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善人이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惟有德之人 乃爲善人 德加于善 其用也 在本善性體之上焉
유유덕지인 내위선인 덕가우선 기용야 재본선성체지상언
오로지 덕이 있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입니다. 선에 덕성을 보태는 일은 인간 본성의 쓰임으로 인하여 본래 선한 본성의 바탕 위에 덕성을 쌓아 놓는 일입니다.
7-3 ◈ 중국 선비가 말한다.
性本必有德 無德 何爲善? 所謂君子 亦復其初也
성본필유덕 무덕 하위선? 소위군자 역복기초야
본성에는 반드시 덕성이 있어야 하는데 덕성이 없으면 어떻게 선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군자란 또한 그 원초(性)에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設謂善者 惟復其初 則人皆生而聖人也 而何謂有生而知之 有學而知之之別乎?
설위선자 유복기초 칙인개생이성인야 이하위유생이지지 유학이지지지별호?
만약 선이라는 것이 오로지 그 원초에로 돌아감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입니다. 그렇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것의 구별은 무엇을 말합니까?
如謂 德非自我新知 而但返其所已有 已失之 大犯罪 今復之 不足以爲大功
여위 덕비자아신지 이단반기소이유 이실지 대범죄 금복지 부족이위대공
“만약 덕이라는 것이 스스로 우리들이 후천적으로 새롭게 알아낸 것이 아니고 단지 이미 있는 것에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것을 상실한 것 자체가 크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회복한다고 해도 큰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則固須認二善之品矣 性之善爲良善 德之善爲習善 夫良善者 天主原化性命之德
칙고수인이선지품의 성지선위양선 덕지선위습선 부양선자 천주원화성명지덕
而我無功焉
이아무공언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로 두 종류의 선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성의 선은 천부적인 良善이고 덕행의 선은 나중에 배워서 쌓은 習善입니다. 무릇 양선은 천주께서 원래 창생한 본성 생명의 덕성이니 우리들은 그것에 기여한 공로가 없습니다.
我所謂功 止在自習積德之善也
아소위공 지재자습적덕지선야
제가 말씀드리려는 공로는 스스로 배워서 쌓아올리는 習善에 있을 뿐입니다.
孩提之童愛親 鳥獸亦愛之 常人不論仁與不仁 乍見儒子入於井 卽皆怵惕 此皆良善耳
해제지동애친 조수역애지 상인불론인여불인 사견유자입어정 즉개출척 차개양선이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를 사랑한다면 짐승들도 역시 그 부모들을 사랑합니다. 보통 사람이면 ‘어질든’ ‘어질지 않든’ 졸지에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면 곧 모두 놀라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가 천부적인 양선일 뿐입니다.
鳥獸與不忍者 何德之有乎? 見義而卽行之 乃爲德耳
조수여불인자 하덕지유호? 견의이즉행지 내위덕이
(이런 양선만 있는) 짐승들이나 어질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공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義를 보면 곧 실천하는 것이 덕행일 뿐입니다.
彼或有所未能 或有所未假視義 無以成德也 故謂人心者始生 如素簡無所書也
피혹유소미능 혹유소미가시의 무이성덕야 고위인심자시생 여소간무소서야
저들이 혹 의를 실천할 수 없다거나 혹 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면 덕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처음 태어날 때에는 아무 글자도 써 있지 않은 종이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友如艶貌女人 其美則可愛 然皆其父母之遺德也 不足以見其本德之巧
우여염모여인 기미칙가애 연개기부모지유덕야 부족이견기본덕지교
또한 아리따운 여인네와도 같습니다. 그녀의 미모는 사랑스럽지만 모두 그 부모가 물려 준 덕성이니 그녀가 자기식대로 쌓은 덕성의 어여쁨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합니다.
若視其 衣錦尙絅而後 其德可知也 玆乃女子本德矣
약시기 의금상경이후 기덕가지야 자내여자본덕의
만약 그녀가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더 입은 뒤에 보았다면 그녀의 덕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여자가 스스로 꾸며 낸 진짜 덕입니다.
吾性質雖姸 女無德以餙之 何足譽乎?
오성질수연 여무덕이희지 하족예호?
우리들의 본성의 바탕이 비록 곱더라도 그것을 꾸며 줄 덕이 없다면 어떻게 칭찬할 만하겠습니까?
吾西國學者 謂 德乃神性之寶服 以久習義念義行生也
오서국학자 위 덕내신성지보복 이구습의념의행생야
우리 서양 나라의 학자들은 정신적 본성의 보배로운 의복으로서 오랫동안 도의를 익히고 그것의 실천을 생각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謂服 則可著可脫 而得之于欣然爲善之念 所謂聖賢者也
위복 칙가저가탈 이득지우흔연위선지념 소위성현자야
덕을 의복이라고 말했다면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즐겁게 선을 행하려는 생각에서 덕을 얻는 것이 이른바 성현입니다.
不宣者反是 但德與罪 皆無形之服也 而惟無形之心 卽吾所謂神者衣之耳
불선자반시 단덕여죄 개무현지복야 이유무형지심 즉오소위신자의지이
선하지 않는 것은 이와 반대입니다. 다만 덕성과 죄악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의복들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즉 저희들이 말하는 정신이 그것을 입을 뿐입니다.
7-4 ◈ 중국 선비가 말한다.
論性與德 古今衆矣 如闡其衷根 則玆始聞焉 夫爲非義 猶以汗穢汚本性 爲義猶以文錦彰之
논성여덕 고금중의 여천기충근 칙자시문언 부위비의 유이한예오본성 위의유이문금창지
본성과 덕을 논의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만 그 속의 근원을 밝힌 것으로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듣습니다. 무릇 불의를 행하는 것은 마치 더러운 오물로써 본성을 물들이는 것과 같으며 의를 행하는 것은 마치 화려한 비단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드러내 놓는 것과 같습니다.
故德修而性彌美焉 此誠君子修己之功 然又有勉于外事 而不復反本者
고덕수이성미미언 차성군자수기지공 연우유면우외사 이불복반본자
그러므로 덕이 닦아지면 본성은 더욱더 아름답게 됩니다. 이것은 진실로 군자가 자기를 수양한 공로입니다. 그러나 또한 밖의 일에 힘쓰게 되면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惜哉 世俗之盡日周望 殫心力以疊僞珍悅肉眼
석재 세속지진일주망 탄심력이첩위진열육안
애석한 일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둘레둘레 사방을 바라보면서 거짓된 보배를 쌓으며 육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마음의 노력을 다 소모합니다.
而不肯 畧啓心目 以視千萬世之文彩內神之眞寶也
이불긍 략계심목 이시천만세지문채내신지진보야
그래서 대체로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영원토록 빛나는 마음 속 정신의 진실 된 보배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宜其遂日操心困苦 而臨終之候 哀慟惧慄 如畜獸被牽於屢矣
의기수일조심곤고 이임종지후 애통구율 여축수피견어루의
그들은 매이매일 마음을 졸이고 곤고해 하면서 임종 째에는 애통하고 두려워서 떠는 것이 마치 가축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天主生我世間 使我獨勤事于德業 常自得無窮之福 不煩外借焉
천주생아세간 사아독근사우덕업 상자득무궁지복 불번외차언
천주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로지 덕업에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언제나 우리들 스스로 무궁한 복락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며 번거롭게 마음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而我自棄之 反以行萬物之役 趨百危險 誰咎乎? 誰咎乎?
이아자기지 반이행만물지역 추백위험 수구호? 수구호?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포기하고 도리어 밖의 만물이 하는 짓을 행하는 데에 온갖 위험들을 무릅쓴 채 좇아가고 있으니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夫人非願爲尊富 惟願恒得其所欲耳
부인비원위존부 유원항득기소욕이
무릇 사람들이 존귀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들이 소망하는 것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得所欲之路 無他 惟勿重其所求得之不在俄者焉
득소욕지로 무타 유물중기소구득지부재아자언
소망하는 것을 얻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가 찾아서 얻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 안에 없는 것을 중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我固有眞我也 我自害之心之害 乃眞害也
아고유진아야 아자해지심지해 내진해야
우리들은 본래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해치려는 마음의 해침이 진짜 해로움입니다.
人以形神兩端 相結成人 然神之精 超于形 故智者以神爲眞己 以形爲藏己之器
인이형신양단 상결성인 연신지정 초우형 고지자이신위진기 이형위장기지기
사람은 육체와 정신 두 가지로써 서로 결합하여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정신의 정교함은 육체를 초월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정신을 참된 자아로 삼고, 육체는 자기 자신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깁니다.
古有賢臣亞那 爲簒國者所傷
고유현신아나 위찬국자소상
옛날에 야나(Yana)라는 현명한 신하가 있었는데 나라를 찬탈한 자에게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泰然曰 爾傷亞那之器 非能傷亞那者也 此所謂達人者也
태연왈 이상아나지기 비능상아나자야 차소위달인자야
그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야나를 담고 있는 도구는 부상시켰지만 야나는 부상시킬 수 없다.” 이런 사람이 이른바 달통한 사람(達人)입니다.
7-5 ◈ 중국 선비가 말한다.
人亦誰不知 違義之自殃 從德者之自有大吉盛福 而不須外求也?
인역수부지 위의지자앙 종덕자지자유대길성복 이불수외구야?
도의를 거스르면 스스로 재앙을 받고 적을 쫓는 이는 스스로 큰 행운과 대단한 복락을 누리게 되니, 모름지기 덕행 밖에서 그런 것들을 찾을 필요가 없음을 또한 사람이라면 누가 모르겠습니까?
然而 務德子世世更稀 其德之路 雖曉乎? 抑難進乎?
연이 무덕자세세경희 기덕지로 수효호? 억난진호?
그러나 덕행에 쓰이는 이는 세세대대로 더욱더 드물어집니다. 수덕의 길이란 깨닫기가 어려운 것입니까? 아니면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입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俱難也 進尤甚焉 知此道而不幸 則倍其愆 且滅其知
구난야 진우심언 지차도이불행 즉배기건 차멸기지
모두가 어렵습니다만 나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누가 그런 도리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의 허물은 배로 늘어나고 또한 그가 알고 있는 지식도 감소되는 것입니다.
比于食者 而不能化其所食 則充而無養 反傷其身
비우식자 이불능화기소식 즉충이무양 반상기신
먹는 일에 비유하면 자기가 먹은 것을 소화하지 못하면 배는 채웠으나 몸을 보양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力行위 踐其所知 卽增闢其才光 益厚其心力 以行其餘 試之 則覺其然焉
역행위 천기소지 즉증벽기재광 익후기심력 이행기여 시지 칙각기연언
덕행을 힘써 행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실천하면 곧 자기의 재능의 빛이 더욱 계발되고 자기 마음의 역량이 더욱더 두텁게 됨으로써 나머지를 실천 할 수 있게 됩니다. 시험해 보시면 이것들이 다 맞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7-6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吾中州士 古者學聖敎而爲聖 今久非見聖人 則竊疑 今之學非聖人之學
오중주사 고자학성교이위성 금구비견성인 즉절의 금지학이성인지학
玆願詳示學術
자원상시학술
우리들 중국 땅의 선비들은 옛날에는 거룩한 가르침을 배워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랫동안 성인을 만나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배움’은 ‘성인이 되는 배움’이 아니겠지 하는 의아심을 저는 갖게 됩니다. 이제 올바르게 배우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嘗竊視群書 論學各具己私 若已測悟公學 吾何不聽命 而復有稱述西庠學乎?
상절시군서 논학각구기사 약이측오공학 오하불청명 이복유칭술서상학호
顧取捨之在自耳
고취사지재자이
일찍이 저는 중국의 여러 책들을 보았으나 학문을 논함에 각각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중국 선비들이 보편타당한 학문(公學)을 헤아리고 깨달았다면 우리 서양 선교사들이 그것을 듣지 않고서 다시 서양의 학문을 들먹이며 말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저의 이런 말씀을 취하고 버리심은 선비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夫學之謂 非但專效先各行動語錄謂之學 亦有自己領悟之學 有視察天地萬物
부학지위 비단전효선각행동어록위지학 역유자기령오지학 유시찰천지만물
而推習人事之學
이추습인사지학
학문으로 말하자면 다만 선각자들의 행동과 어록을 오로지 본받음을 일컫는 학문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스스로 깨달아 가는 학문이 있으며 천지의 만물을 보고 살펴서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을 미루어서 배워 나가는 학문도 있습니다.
故曰 智者不患乏書冊 無傳師 天地萬物 盡我師 盡我卷也
고왈 지자불환핍서책 무전사 천지만물 진아사 진아권야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서책들의 부족이나 학문을 전해주는 스승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지의 만물이 모두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고 모두 우리를 가르치는 책들입니다.
學之爲者 其義廣矣 正邪 大小 利鈍 均該焉
학지위자 기의광의 정사 대소 이둔 균해언
배움이라는 글자는 그 뜻이 넓다고 하겠습니다. 바른 것 과 비뚠 것, 큰 것과 작은 것, 날카로운 것과 무딘 것, 모두 다 배움에 해당됩니다.
彼邪學 固非子之所問 其世利及無益之習 君子不以營心彦
피사학 고비자지소문 기세이급무익지습 군자불이영심언
저들 비뚠 학문들(邪學)은 진실로 선비께서 묻고자 하시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들이 가르치는 권력(勢), 이득(利) 및 그 밖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습들에 올바른 지식인들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吾所論學 惟內也 爲己也 約之以一言 謂成己也
오소논학 유내야 위기야 약지이일언 위성기야
우리가 논하려는 배움은 오직 내면(마음에 관한 것)이요, 자기를 위한 것(爲己)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완성을 말합니다.
世之弊 非無學也 是乃徒習 夫寧無習之方 乃竟無補乎行
세지폐 비무학야 시내도습 부녕무습지방 내경무보호행
세상의 폐해는 배움이 없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차라리 배우지 말아야 할 방편들을 그저 맹목적으로 배운 것입니다. 맹목적 배움은 바로 자기완성의 행위에 결국 보탬이 못 되는 것입니다.
吾儕本體之神 非徒爲精貴 又爲形之本主 故神修卽形修 神成卽形無不成矣
오제본체지신 비도위정귀 우위형지본주 고신수즉형수 신성즉형무불성의
우리 인간들의 본체인 정신은 단지 핵심적으로 귀중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육신의 본래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정신을 수양하면 곧 육신도 수양되는 것입니다. 정신이 이루어지면 육신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是以君子之本業 特在于神 貴邦所謂無形之心也
시이군자지본업 특재우신 귀방소위무형지심야
이렇게 때문에 올바른 지식인의 본업은 특히 정신, 즉 선비님의 나라 중국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有形之身 得耳目口鼻四肢五司 以交覺于物 無形之神 有三司以接通之
유형지신 득이목구비사지오사 이교각우물 무형지신 유삼사이접통지
曰 司記含 司明悟 司愛欲焉
왈 사기함 사명오 사애욕언
유형한 육신은 귀, 눈, 입, 코, 사지의 다섯 기관을 가지고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각을 합니다. 무형한 정신은 세 가지 기능이 있어서 이것들을 받아들이고 소통시킵니다. 기억능력, 이성능력, 의지력입니다.
凡吾視聞啖覺 卽其像由身之五門竅 以進達于神 而神以司記者受之
범오시문담각 즉기상유신지오문규 이진달우신 이신이사기자수지
如藏之倉庫 不令忘矣
여장지창고 불령망의
무릇 우리 인간들이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 즉 이들 감성의 자료들은 신체의 오관을 통하여 정신에 도달해 가는 것입니다. 정신은 기억력으로써 이것들을 받아들여서 마치 창고에 저장하는 것처럼 잊어버리지 않게 합니다.
後吾欲明通一物 卽以司明者 取其物之在司記者像 而委曲折衷其體 恊其性情之眞于理當否
후오욕명통일물 즉이사명자 취기물지재사기자상 이위곡절충기체 협기성정지진우리당부
다음으로 우리 인간들은 한 사물을 명백하게 인식하고자 하면, 곧 바로 이성능력은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물의 자료를 취하여 그 사물의 실체와 이모저모로 상세히 절충하여 보고 그 사물의 본성과 실정들이 참으로 理에 합당한지를 합치시켜 봅니다.
其善也 吾以司愛者愛之欲之 其惡也 吾以司愛者惡之恨之
기선야 오이사애자애지욕지 기악야 오이사애자악지한지
그것이 좋으면 우리는 의지로써 그것을 사랑하고 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쁘면 우리는 의지로써 그것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盖司明者 達是 又達非 司愛者 司善善 又司惡惡者也
개사명자 달시 우달비 사애자 사선선 우사악악자야
대개 이성능력은 어느 것이 옳다고 인식하거나 또한 그르다고 인식합니다. 의지는 선한 것을 좋게 대하고, 또한 악한 것은 싫어하게 합니다.
三司已成 吾無事不成矣 又其司愛司明者已成 其司記者自成矣 故講學只論其二爾已
삼사이성 오무사불성의 우기사애사명자이성 기사기자자성의 고강학지논기이이이
마음에 이 세 가지 기능이 일단 이루어져 있으면 우리 인간들은 성취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와 이성능력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의 기억 능력은 저절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말할 때 다만 이 두 가지(이성과 의지)만 말할 뿐입니다.
司明者尙眞 司愛者尙好 是以吾所達愈眞 其眞愈廣濶 則司明者愈成矣
사명자상진 사애자상호 시이오소달유진 기진유광활 칙사명자유성의
이성은 참(眞)을 높이 보고, 의지는 좋아함을 높이 봅니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들이 인식한 바가 참이면 침일수록 그 진리는 더욱더 보편타당하고, 그 이성능력은 그만큼 더욱더 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吾所愛益好 其好益深厚 則司愛益成就也
오소애익호 기호익심후 즉사애익성취야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이 더욱더 좋을수록 그 좋아함이 더욱더 깊어지고 두터워진다면 의지의 지향은 더욱더 성취되는 것입니다.
若司明不得眞者 司愛不得好者 則以司者俱失其養 而神乃病餒
약사명부득진자 사애부득호자 즉이사자구실기양 이신내병뇌
만약 이성능력이 참됨을 얻을 수 없고, 의지의 지향이 좋아함을 얻을 수 없다면 이 두 기능 모두 양성되지 못한 것이니, 정신 활동은 이내 병이 들고 피폐하게 될 것입니다.
司明之大功在義 司愛之大本在仁 故君子以仁義爲重焉 二者相須 一不可廢
사명지대공재의 사애지대본재인 고군자이인의위중언 이자상수 일불가폐
이성의 큰 공능은 義에 인식이 있고, 의지의 대본은 仁을 실천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선비들은 어짐과 도의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둘은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니 하나도 폐할 수 없습니다.
然 推司明者明仁之善 而後司愛者愛而存之 司愛者愛義之德 而後司明者察而求之
연 추사명자명인지선 이후사애자애이존지 사애자애의지덕 이후사명자찰이구지
그렇습니다. 오직 이성만이 仁의 선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의지가 그것을 애호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지는 義의 덕을 욕구합니다. 그 다음에 이성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但仁也者 又爲義之至精 仁盛 則司明者滋明 故君子之學 又以仁爲主焉
단인야자 우위의지지정 인성 즉사명자자명 고군자지학 우이인위주언
그러나 仁은 또한 義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仁이 지극하면 이성의 활동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올바른 선비의 배움은 仁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仁尊德也 德之爲學 不以强奪 不以久藏毁而殺 施之與人 而更長茂
인존덕야 덕지위학 불이강탈 불이구장훼이살 시지여인 이경장무
仁은 미덕을 높이 보는 것입니다. 미덕의 배움은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으며 오랫동안 숨겨두어서 망가뜨리고 죽여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면 다시 더욱 자라서 무성해집니다.
在高益珍 所謂德在百姓爲銀 在牧者爲金 在君爲具也
재고익진 소위덕재백성위은 재목자위금 재군위구야
덕행은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는 진귀함을 더하게 됩니다. 이른바 덕행이 백성들에게 있으면 은이요, 관리들에게 있으면 황금이요, 군주에게 있으면 보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嘗聞 智者爲事 必先立一主意 而後圖其善具以獲之
상문 지자위사 필선립일주의 이후도기선구이획지
“지혜로운 사람이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의 중심된 의도를 세우고 그 다음에 최상의 방도로써 그것의 실현을 도모한다.”고 저는 일찍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如旅人先定所往之域 而後尋詢去路也 終之意 固在其始也
여여인선정소왕지역 이후심순거로야 종지의 고재기시야
이것은 마치 여행자가 먼저 행선지를 정한 후에 가는 길을 찾아서 묻는 것과 같습니다. 최종의 의도는 진실로 그 시작에 있는 것입니다.
夫學道亦要識其向往者 吾果爲何者而學乎? 不然 則貿貿而往 自不知其所求
부학도역요식기향왕자 오과위하자이학호? 불연 즉무무이왕 자부지기소구
무릇 도리를 배우는 것 또한 그것이 지향하는 바, 즉 우리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배우는 것인가를 인식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턱대고 배워 나가는 것이요, 스스로 자기가 추구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或學特以知識 此乃徒學 或以售知 此乃賤利
혹학특이지식 차내도학 혹이수지 차내천리
어떤 이가 다만 지식 때문에 배운다면 그것은 바로 헛되이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지식을 팔려는 때문이라면 그것은 천한 돈벌이입니다.
或以使人知 此乃罔勤
혹이사인지 차내망근
어떤 이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학식을 알게 하려는 때문이라면 그것은 망령된 부지런함입니다.
或以誨人 乃所爲慈 或以淑己 乃所爲智
혹이회인 내소위자 혹이숙기 내소위지
어떤 이가 사람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려는 때문이라면 그것이 바로 자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자기 자신을 닦으려는 때문이라면 그것이 바로 지혜로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故吾曰 學之上志 惟此成己 以合天主之聖旨耳 所謂由此而歸此者也
고오왈 학지상지 유차성기 이합천주지성지이 소위유차이귀차자야
그러므로 저는 “학문의 높은 뜻은 오직 이와 같이 자기를 완성함으로써 천주의 거룩한 뜻(聖旨)에 합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것(成己)으로 말미암아 이것(聖旨)으로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7-7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如是 則其成己爲天主也 非爲己也 則毋奈外學也?
여시 칙기성기위천주야 비위기야 즉무나외학야?
이와 같다면 그런 자기완성은 천주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함(爲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기 밖의 것을 위한 배움(外學)이 아닐런지요?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吾有成己而非爲己者乎? 其爲天主也 正其所以成也
오유성기이비위기자호? 기위천주야 정기소이성야
어떤 ‘자기완성’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천주를 위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를 완성하는 所以가 되는 것입니다.
仲尼說 仁惟曰 愛人 而儒者不以爲外學也
중니설 인유왈 애인 이유자불이위외학야
공자는 “어짐(仁)은 오직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교 선비들은 이 공자의 말씀을 결코 자기 밖의 것을 위한 배움(外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余曰 仁也者 乃愛天主與夫愛人者 崇其宗原而不遺其枝派 何以謂外乎?
여왈 인야자 내애천주여부애인자 숭기종원이불유기지파 하이위외호?
저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짐(仁)이란 바로 천주를 사랑하고 그리고 무릇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 근원을 흠숭하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지파들(피조물)까지를 배척하지 않음이다.” 이것을 어찌 자기 밖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人之中 雖親若父母 此于天主者 猶爲外焉 況天州常在物內 自不當外
인지중 수친약부모 차우천주자 유위외언 황천주상재물내 자부당외
사람들 중에 비록 부모처럼 가깝더라도 그는 천주와 비교하면 오히려 밖의 사람이 됩니다. 하물며 천주는 항상 개개의 사물 속에 존재하고 게시기에 스스로를 밖의 존재로 보시지 않습니다.
意益高者 學益尊 如學者之意 止於一己 何高之有?
의익고자 학익존 여학자지의 지어일기 하고지유?
의도함이 더욱 높으면 배우려는 것도 더욱 높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배우려는 사람의 의도가 자기 한 몸에 그친다면 어찌 높다고 하겠습니까?
至于爲天主 其尊乃不可加矣 執以爲賤乎?
지우위천주 기존내불가가의 집이위천호?
천주를 위함에 이르면 그 존귀한 뜻은 바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천박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聖學在吾性內 天主銘之人心 原不能壞 貴邦儒經所謂明德明命 是也
성학재오성내 천주명지인심 원불능괴 귀방유경소위명덕명명 시야
성인으로 되게 하는 학문(聖學)은 우리 인간들의 본성 안에 있으니, 천주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 주셨기에 근원적으로 파괴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덕을 명백히 터득함(明德)”, “천명을 명백히 터득함(明命)”이 바로 그것입니다.
但是明爲使欲蔽揜 以致昏暝 不以聖賢 躬親喩世人 豈能覺?
단시명위사욕폐엄 이치혼명 불이성현 궁친유세인 개능각?
그러나 이런 “명백히 터득함(明悟)”이 사욕으로 은폐됨으로써 혼돈하여 몽몽하게 되었으면 성현들께서 몸소 친히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저들이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恐以私欲悞認明德 愈悖正學耳
공이사욕오인명덕 유패정학이
저들이 사욕을 “밝은 미덕(明德)”으로 착각함으로써 성인으로 되게 하는 올바른 배움(正學)을 더욱 망가뜨릴까 두려울 뿐입니다.
然 此學之貴 全在力行 而近人妄當之以講論 豈知 善學之驗在行德 不在言德乎?
연 차학지귀 전재역행 이근인망당지이강론 개지 선학지험재행덕 부재언덕호?
그러나 이런 배움의 귀함은 전적으로 실천에 힘씀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강론만 하는 것을 망녕되이 합당하게 여기고 있으니, “잘 배우는 것이란 덕행을 실천함에서 증명되는 것이요, 그것을 말로만 하는 데 있지 않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然 其講亦不可遺也
연 기강역불가유야
하지만 덕행을 강론하는 것 역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講學也者 溫故而習新 達蘊而釋疑 奪己而勸人 博學而篤信者也 善之道無窮
강학야자 온고이습신 달온이석의 탈기이권인 박학이독신자야 선지도무궁
講學이란 “옛것을 온습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심오함에 통달하여 의문을 해소하고, 자기를 분발시키며 타인을 권면하여 넓게 배워서 돈독하게 믿는 일입니다. 선의 도리는 끝이 없습니다.
故學爲善者 與身同終焉 身在 不可一日不學
고학위선자 여신동종언 신재 불가일일불학
따라서 선의 실천을 배우는 일은 자신의 생명과 함께 끝이 납니다. 살아 있으면 하루라도 배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凡曰 已至 其必未起也 凡曰 吾其不欲進於善 卽是退復於惡也
범왈 이지 기필미기야 범왈 오기불욕진어선 즉시퇴복어악야
무릇 이미 자기완성에 도달하였다고 말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릇 내 자신은 선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바로 퇴보하여 다시 악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7-8 ◈ 중국 선비가 말한다.
此皆眞語 敢問下手工夫!
차개진어 감문하수공부!
말씀해주신 이것들은 모두 진실 된 말입니다. 실천 공부를 묻고 싶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吾素譬此工如圃 然 先繕地 拔其野草 除其瓦石 注其泥水於溝壑 而後藝嘉種也
오소비차공여포 연 선선지 발기야초 제기와석 주기니수어구학 이후예가종야
저는 이런 공부를 소박하게 채소밭을 가꾸는 이로 비유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땅을 고르고 잡초들을 뽑아내고 기와나 돌멩이를 골라내고 흙탕물을 골짜기나 도랑으로 빼낸 다음에 좋은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學者先去惡 而後能致善 所謂 有所不爲 方能有爲焉
학자선거악 이후능치선 소위 유소불위 방능유위언
도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악습을 제가한 후에 선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이제 비로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夫學之始 習心橫肆 其惡根固 深透乎心 抽使去之 可不黽黽乎?
부학지시 습심횡진 기악근고 심투호심 추사거지 가불민민호?
무릇 배움의 초기에는 잘못 익혀진 마음들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그 악의 뿌리가 굳건하여 마음속 깊이까지 들어와 있으니, 만약 이것들을 뽑아 버리려면 면면히 힘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勇者 克己之謂也 童年者蚤卽于學 其工如一 得工如十 無前習之累故也
용자 극기지위야 동년자조즉우학 기공여일 득공여십 무전습지누고야
용기란 “자신을 이김(克己)”을 말합니다. 어린 아기가 일찍이 곧바로 배움으로 나아가면 그 공부가 하나지만 열 배 공부의 효과를 얻는 것은 전에 배운 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古有一善敎者 子弟從之 必問曾從他師否
고유일선교자 자제종지 필문증종타사부
옛날 서양에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자 하면 이전에 다른 스승을 따른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드시 물었습니다.
以從他師者爲其已蹈曩時之悞 必倍其將誠之義
이종타사자위기이도낭시지오 필배기장성지의
다른 스승을 따랐던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이미 답습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여 그들이 장차 내야 할 ‘성의의 의례(학비)’를 반드시 두 배로 하였습니다.
一因改易前悞 一因敎之以知新也
일인개역전오 일인교지이지신야
하나는 그들의 앞서의 잘못을 바로잡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것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旣已知學矣 尙迷乎色慾 則何以建於勇毅? 尙驕傲自滿欺人 則何以進乎謙德?
기이지학의 상미호색욕 즉하이건어용의? 상교오자만기인 즉하이진호겸덕?
도리를 이미 배워서 알고 있지만, 아직도 색욕에 미혹되어 있으면 어떻게 그 악을 끊는 용감함과 의연함을 세울 수 있습니까? 아직도 교만하고 자만하며 사람을 속이면 어떻게 겸손으로 나아가겠습니까?
尙惑非義之財物 不返其主 則何以秉廉
상혹비의지재물 불반기주 즉하이병렴
아직도 의롭지 못한 재물에 미혹되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청렴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尙溺乎榮顯工 則何以超于道德? 尙將怨天尤人 則何以立於仁義?
상익호영현공 즉하이초우도덕? 상장원천우인 즉하이립어인의?
아직도 공명이 영화롭게 드러나는 데에 탐닉해 있다면 어떻게 인륜도덕에서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고 있다”면 어떻게 자신의 목표를 仁義의 도리에 세울 수 있겠습니까?
秬卣盈以醯鹽 不能斟之鬱鬯矣 知己之惡者 見善之倪 而易入于德路者也
거유영이혜염 불능짐지울창의 지기지악자 견선지예 이이입우덕로자야
거유(秬卣 : 검은 기장으로 담근 술)에 식초와 소금이 그득하면 제사에 쓰이는 울창(鬱鬯 : 옻 기장으로 담근 좋은 술)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의 악습을 알게 되면 선행의 단서를 보게 되는 것이니 쉽게 덕업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欲剪諸惡之根與己於善 不若守敝會規例 遂日再次 省察凡已半日間 所思所言所行善惡
욕전제악지근여기어선 불약수폐회규례 수일재차 성찰범이반일간 소사소언소행선악
우리들이 모든 악의 근원을 잘라버리고 좋은 일에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면 저의 수도회의 규칙을 지키고 날마다 두 번씩 무릇 반나절 동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 중에 선과 악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有善者 自勸繼之 有惡者 自懲絶之
유선자 자권계지 유악자 자징절지
선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권면하여 그것을 계속하고 악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징벌하여 그것을 끊어내야 합니다.
久用此功 雖無師保之責 亦不患有大過
구용차공 수무사보지책 역불환유대과
오랫동안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간다면 비록 스승과 보호인의 추궁이 없더라도 또한 큰 잘못을 저지를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然勤修之至 恒習見天主於心目 儼如對越至尊 不離于心
연근수지지 항습견천주어심목 엄여대월지존 불이우심
그러나 마음을 부지런히 수양하여 지극하게 되면 마음의 눈에 천주를 뵙게 됨이 언제나 익숙하여 마치 지존을 진실로 우러러 마주 대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枉念自不萌起 不須他功 其外 四肢莫之禁 而自不適於非義矣
왕념자불맹기 불수타공 기외 사지막지금 이자부적어비의의
비뚤어진 생각이 저절로 싹터 일어나지 않으니 다른 공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온 몸은 억지로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옳지 못한 도의에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故改惡之要 惟罪深悔 悔其昔所已犯 自誓弗敢再蹈 心之旣沐 德之寶服可衣焉
고개악지요 유죄심회 회기석소이범 자서불감재도 심지기목 덕지보복가의언
따라서 악을 고치는 요점은 오직 깊이 통회하여 자기가 예전에 이미 저질렀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 범하지 않을 것을 맹세함에 있습니다. 마음이 일단 깨끗해지면 우리는 미덕의 보배로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夫德之品衆矣 不能具論 吾今爲子惟擖其綱 則仁其要焉 得其綱則餘者隨之
부덕지품중의 불능구론 오금위자유갈기강 칙인기요언 득기사즉여자수지
무릇 덕의 종류는 많으니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을 위하여 그 대강을 말씀드리자면 仁이 그 핵심입니다. 대강을 얻고 나면 나머지는 부수되어 나옵니다.
故易云 元者善之長 君子體人 足以長人
고역운 원자선지장 군자체인 족이장인
따라서 주역에 “元이란 善의 으뜸이다. ~~ 군자는 仁을 體現하였으니 사람들의 으뜸이 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愛天主 爲天主 無以尙 而爲天主者 愛人如己也
애천주 위천주 무이상 이위천주자 애인여기야
仁이란 바로 두 마디로 그 뜻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천주를 사랑하라. 천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천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라!” 이위천주자
行斯二者 百行全備矣 然二亦一而已 篤愛一人 則幷愛其所愛者矣
행기이자 백행전비의 연이역일이이 독애일인 즉병애기소애자의
이 두 가지를 실천할 수 있으면 모든 행동이 다 이루어진 것이겠습니다. 그러하니 둘이지만 또한 하나일 뿐입니다. 누가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받들어 사랑할 것입니다.
天主愛人 吾眞愛天主者 有不愛人者乎? 此 仁之德所以爲尊 其尊非他 乃因上帝
천주애인 오진애천주자 유불애인자호? 차 인지덕소이위존 기존비타 내인상제
천주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천주를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이 바로 仁의 덕이 존중되는 까닭입니다. 그 존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借令天主所以成我者 由他外物 又或求得之而不能得 則尙有歉
차령천주소이성아자 유타외물 우혹구득지이불능득 칙상유겸
만약 천주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자아를 완성시키는 바탕을 우리 마음 밖의 것들에서 추구한다고 해도 반드시 다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아 완성 또한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然 皆由我內關 特在一愛云耳
연 개유아내관 특재일애운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자아 완성은 모두 우리 인간들의 내면과 연관된 것들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다만 사랑 하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孰曰 吾不能愛乎? 天主諸善之聚 化育我 施生我 使我爲人 不爲禽虫
숙왈 오불능애호? 천주제선지취 화육아 시생아 사아위인 불위금충
누가 “우리들이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주께서는 여러 좋은 점들을 모아서 우리 인간들을 창생 하여 길러주십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을 베풀고 우리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서 짐승이나 벌레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且賜之以作德之性 吾愛天主 卽天主亦寵答之 何適不詳乎?
차사지이작덕지성 오애천주 즉천주역총답지 하적불상호?
또한 우리들에게 덕을 실천하려는 본성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천주를 사랑하면 곧바로 천주께서도 또한 은총으로 이에 보답하여 주시니 어디 간들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人心之司愛 向于善 則其善彌大 司愛者亦彌充 天主之善無限界
인심지사애 향우선 칙기선미대 사애자역미충 천주지선무한계
사람 마음의 의지가 선을 지향하면 그 선은 그만큼 커지고 의지 또한 그만큼 충만하게 됩니다. 천주의 선함은 한계가 없으니 우리 인간들의 미덕이 자라남에도 한계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則吾德可長無定界矣 則不能充滿我情性 惟天主者也 然于善有未通 則必不能愛
칙오덕가장무정계의 즉불능충만아정성 유천주자야 연우선유미통 즉필불능애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의 감정과 본성을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천주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반드시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故之寸具之價當百 則愛之如百 知拱壁之價當千 則愛之如千
고지촌구지가당백 즉애지여백 지공벽지가당천 즉애지여천
따라서 한 치의 작은 패화의 값이 백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백만큼 사랑하고, 두 손으로 잡을 만큼 크고 둥근 벽옥의 값이 천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천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是故愛之機在明達 而欲致力以廣仁 先須竭心以通天主之事理 乃識從其敎也
시고애지기재명달 이욕치력이광인 선수갈심이통천주지사리 내식종기교야
이렇기 때문에 사랑의 동기는 명백한 이해(明達)에 있으니, 힘을 들여서 仁을 넓히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마음을 다해 천주의 사리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르침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7-9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天主事理 目不得見 所信者 人所言所錄耳 信人之知 有恍惚之知 何能結所向往?
천주사리 목불득견 소신자 인소언소록이 신인지지 유황홀지지 하능결소향왕?
천주께서 하시는 일과 이치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한 것과 기록한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믿는 이들의 지식은 오직 홀연하게 직관적으로 얻은 지식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지식이 어떻게 선비들의 합리적인 의지가 지향하는 바를 결판 지을 수 있겠습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人有形者也 敎于人道者 非信人不可 況交乎無形者耶?
인유형자야 교우인도자 비신인불가 황교호무형자야?
사람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도리에 따라서 서로 사귀고 내왕함에도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육신이 없는 분(천주)과 내왕함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今余不欲擖他遠事也 子孝嚴親 無所不至
금여불욕갈타원사야 자효엄친 무소불지
지금 저는 다른 먼 사례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데에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然子何以知孝? 惟信人之言 知其乃生己之父也 非人言 自何以知之乎?
연자하이지효? 유신인지언 지기내생기지부야 비인언 자하이지지호?
그러나 그 자식들이 어떻게 그에게 효도할 줄 아는 것입니까? 오직 다른 사람의 말만을 믿고서 그분이 바로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임을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子又忠於君 雖損命無悔 其爲君 亦只信經書所傳耳 臣孰自知其爲己君乎?
자우충어군 수손명무회 기위군 역지신경서소전이 신숙자지기위기군호?
선비께서는 또한 임금께 충성하여 비록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임금이라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책들이 전한 것을 믿는 것뿐입니다. 신하가 어떻게 저절로 그분이 자기의 임금임을 알겠습니까?
則吾所信有實錄 不可謂 不眞切明曉 足以爲仁之基也
칙오소신유실록 불가위 부진절명효 족이위인지기야
그렇다면 우리 서양 선교사들이 믿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참되고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천주께 대한 사랑의 기초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況夫天主事 非一夫之言 天主親貽正經 諸國之聖賢傳之
황부천주사 비일부지언 천주친이정경 제국지성현전지
하물며 무릇 천주와 관련된 일들은 한낱 필부의 말이 아닙니다. 천주께서 몸소 바른 경전(성서)을 내려 주셨고 여러 나라의 성현들이 그것을 전하여 왔습니다.
天下之英俊 僉從之信之 固不爲妄 何恍惚之有?
천하지영준 첨종지신지 고불위망 하황홀지유?
세상의 영재들이 모두 그것을 따르고 믿었으니 진실로 거짓일 수 없습니다. 오직 홀연하게 직관적으로 얻은 지식이겠습니까?
7-10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如此 則信之 無容疑矣 但仁道之大 比諸天地 無不覆載 今日 一愛已爾 似乎太隘
여차 칙신지 무용의의 단인도지대 비제천지 무불복재 금일 일애이이 사호태애
말씀하신대로 그와 같다면 그것을 믿어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仁의 道理는 하늘과 땅에도 비견될 만큼 큰 것이니,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오로지 사랑하나만을 말씀하시니 그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협소한 듯싶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血氣之愛 尙爲群情之主 矧神理之愛乎? 試如逐財之人
혈기지애 상위군정지주 신신리지애호? 시여축재지인?
물리적인 사랑이라 해도 또한 여러 다른 감정들을 주재해야 합니다. 하물며 정신적 도리의 사랑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예로 재물을 좇고 있는 사람을 살펴봅시다.
以富爲好 以貧爲醜 則其愛財也
이부위호 이빈위추 칙기애재야
그가 부유함을 좋은 것으로, 가난을 미운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재물을 애호하기 때문입니다.
如未得 즉欲之 如可得 則望之
여미득 칙욕지 여가득 즉망지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얻고자 욕구(欲)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갖기를 갈망(望)합니다.
如不可得 則棄之 旣得之 則喜樂也
여불가득 즉기지 기득지 즉희락야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棄)합니다. 그것을 일단 얻게 되면 희열(喜)을 느낍니다.
若更有奪其所取者 則惡之
약경유탈기소취자 즉악지
만약 누가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가면 그를 미워(惡)합니다.
慮爲人之所奪則避之 如可勝則發用爭之 如不可勝則懼之 一旦失其所愛則哀之
려위인지소탈즉피지 여가승즉발용쟁지 여불가승즉구지 일단실기소애즉애지
다른 사람이 빼앗을까 염려가 되면 그를 피(避)합니다. 이길 수 있으면 용기를 내서 싸우고(爭), 이길 수 없으면 그를 두려워(懼0합니다. 일단 자기가 아끼는 것을 잃으면 그것을 슬퍼(哀)합니다.
如奪我愛自强而難敵 則又或思禦之 或欲復之而忿怒也 此十一情者 特自一愛財所發
여탈아애자강이난적 즉우혹사어지 혹욕복지이분노야 차십일정자 특백일애재소발
만약 우리가 아끼는 것을 빼앗으려는 자가 강하여 대적하기가 힘들면 또한 어떤 이는 그를 방어(禦)할 생각을 하거나, 어떤 이는 그에게 보복하고자 하여 분노(忿怒)합니다. 이 열한 가지 감정은 오로지 재물 사랑 하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總之 有所愛 則心搖 其身體豈能靜漠 無所爲乎?
총지 유소애 즉심요 기신체개능정막 무소위호?
요컨대 애착이 가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동요됩니다. 그 몸이 어찌 고요하고 잠잠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故愛財者 必逝四極 交易以殖貨 愛절者 必朝暮動費 以備嬖妾
고애재자 필서사극 교이이식화 애절자 필조모동비 이비폐첩
그러므로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방으로 가서 장사하여 재물을 늘립니다.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비용을 들여서 애첩을 마련합니다.
愛功名者 終身經歷百險 以逞其計謀 愛爵祿者 攻苦文武之業 以通其幹才
애공명자 종신경력백험 이령기계모 애작녹자 공고문무지업 이통기간재
공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서 그 계획을 달성합니다. 관직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은 문무에 애써 학업을 닦아서 자기의 재간이 능통하게 됩니다.
天下萬事 皆由愛作 而天主之愛 獨可已乎?
천하만사 개유애작 이천주지애 독가이호?
천하만사는 모두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천주께 대한 사랑만이 유독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愛天主者 固奉敬之 必顯其功德 揚其聲敎 傳其聖道 闢彼異端者
애천주자 고봉경지 필현기공덕 양기성교 전기성도 벽피이단자
천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진실로 받들고 공경하고 반드시 그 공덕을 나타냅니다. 그 평판이 좋은 교의를 널리 알리고 성스러운 도리를 전교하며 이단들을 물리칩니다.
然愛天主之效 寞誠乎愛人也 所謂仁者 愛人 不愛人 何以驗其聖敬上帝歟?
연애천주지효 막성호애인야 소위인자 애인 불애인 하이험기성경상제여?
그러나 천주를 사랑하는 공효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 된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진실 되게 하느님을 섬긴다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愛人 非虛愛
애인 비허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공허한 사랑이 아닙니다.
必將渠饑則食之 渴則飮之 舞衣則衣之 無屋則舍之 憂患則恤之慰之 愚蒙則誨之
필장거기즉식지 갈즉음지 무의즉의지 무옥즉사지 우환즉휼지위지 우몽즉회지
罪過則諫之 侮我則恕之 旣死則葬之 而爲代祈上帝 且死生不敢忘之
죄과즉간지 모아즉서지 기사즉장지 이위대기상제 차사생불감망지
누가 배고파하면 먹여주고, 갈증을 느끼면 물을 마시게 해 주고, 옷이 없으면 입혀주고, 집이 없으면 재워주고, 우환이 있으면 동정하고 위로해 주고, 어리석으면 가르쳐 주고, 죄를 지으려 하면 올바른 말로 말리고, 우리를 모욕해도 용서해 주고, 죽으면 장사지내 주고 그를 위해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 주며, 또한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故昔大西有問于聖人者曰 行何事 則可以至善歟?
고석대서유문우성인자왈 행하사 칙가이지선여?
서양에 어떤 이가 성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일을 행하면 선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曰 愛天主 而任汝行也
왈 애천주 이임여행야
성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주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의 뜻대로 행하라.”
聖人之意 乃從此指引者 固不差路矣
성인지의 내종차지인자 고불차로의
바로 이 지시대로 좇아간다면 진실로 우리들의 진로가 잘못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성인의 뜻입니다.
7-11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司愛者 用于善人可耳 人不皆善 其惡者必不可愛 況厚愛乎? 若論他人 其無大損
사애자 용우선인가이 인불개선 기악자필불가애 황후애호? 약론타인 기무대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착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착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어찌 두텁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비록 악인이라고 해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若論在五倫之問 雖不善者 我中國亦愛之 故父爲瞽瞍 弟爲象 舜猶愛友焉
약론재오륜지문 수불선자 아중국역애지 고부위고수 제위상 순유애우언
그러나 오륜 안에 드는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선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그를 우리 중국에서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고수이고 동생이 상과 같은 악당이었어도 순임금은 그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우애했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俗言 仁之爲愛 但謂愛者 可相答之物耳 故愛鳥獸金石 非仁也
속언 인지위애 단위애자 가상답지물이 고애조수금석 비인야
“仁이란 사랑함이다.”라고 세속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이나 쇠붙이나 돌멩이를 사랑하는 것은 仁이 아닙니다.
然或有愛之 而反以仇 則我家不愛之乎? 夫仁之理 惟在愛其人之得善之美
연혹유애지 이반이구 즉아가불애지호? 부인지리 유재애기인지득선지미
非愛得其 善與美而爲己有也
비애득기 선여미이위기유야
그러나 우리가 혹시 누구를 사랑하였는데 그가 도리어 우리를 원수로 대한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仁의 도리는 사랑을 받은 그 사람이 오직 선해질 수 있는 미덕을 사랑함에 있을 뿐이요, 그의 선과 미덕을 우리가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음을 사랑함에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譬如愛醴酒 非愛其酒之有美 愛其酒之好味可爲我嘗也 則非可謂仁于酒矣
비여애례주 비애기주지유미 애기주지호미가위아상야 즉비가위인우주의
맛 좋은 술(體酒)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 술의 좋은 점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술의 좋은 맛을 우리가 맛볼 수 있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술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愛己之子 則愛其有善 卽有當貴安逸 才學德行 此乃謂仁愛其子
애기지자 즉애기유선 즉유당귀안일 재학덕행 차내위인애기자
우리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잘되기를, 즉 그들이 부귀하고 편안하게 살며 학문과 덕행을 갖추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若爾愛爾子 惟爲愛其奉己 此非愛子也 惟愛自己也 何謂之仁乎?
약이애이자 유위애기봉기 차비애자야 유애자기야 하위지인호?
만약 선비께서 당신 자식을 사랑함이 오로지 그가 자기를 봉양함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를 사랑함이니, 어찌 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惡者 固不可愛 但惡之中亦有可取之善 則無絶不可愛之人 仁者愛天主
악자 고불가애 단악지중역유가취지선 즉무절불가애지인 인자애천주
故因爲天主 而愛己愛人
고인위천주 이애기애인
악이란 진실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악한 중에도 또한 취할 만한 좋은 점이 있다면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없습니다. 仁이란 천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위하기 때문에 자기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知爲天主 則知人人可愛 何特愛善者乎?
지위천주 칙지인인가애 하특애선자호?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천주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찌 오직 착한 사람만을 사랑해야겠습니까?
愛人之善綠 在天主之善 非在人之善
애인지선록 재천주지선 비재인지선
사람의 좋은 점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천주의 좋으심에 있는 것이지 사람의 좋은 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故雖惡者 亦可用吾之仁 非愛其惡 惟愛其惡者之或可以改惡而化善也
고수악자 역가용오지인 비애기악 유애기악자지혹가이개악이화선야
그러므로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해도 우리들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악한 사람이 혹시 악을 고쳐서 선으로 교화될 수 있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況雙親兄弟君長 與我有恩有倫之相繫 吾宜報之
황쌍친형제군장 여아유은유륜지상계 오의보지
하물며 그 나쁜 이들이 부모나 형제, 임금이나 웃어른들이라면 우리들과 은덕과 인륜으로 서로 묶여 있으니 우리들은 이들에게 마땅히 사랑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有天主誡令慕愛之 吾宜守之 又非他人等乎
유천주계령모애지 오의수지 우비타인등호
천주의 계명에 이들을 흠모하고 사랑하라고 되어 있으니, 우리는 반드시 그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아무 관련 없는 다른 사람과 똑같게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則雖其不善 豈容斷愛耶?
칙수기불선 개용단애야?
그렇다면 비록 그들이 선하지 않더라도 어찌 사랑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人有愛父母 不爲天主者 玆乃善情 非成仁之德也
인유애부모 불위천주자 자내선정 비성인지덕야
사람들 중에 부모는 사랑하고 천주를 위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좋은 마음이긴 해도 천주에 대한 사랑의 덕업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雖虎之子爲豹 均愛親矣 故有志於天主之旨 則博愛于人
수호지자위표 균애친의 고유지어천주지지 즉박애우인
비록 호랑이 새끼가 표범이라도 모두 자기 어미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의 가르침(敎旨)에 뜻을 두면 사람들을 박애하게 됩니다.
以及天下萬物 不須徒膠之爲一體耳
이급천하만물 불수도교지위일체이
그러나 세상의 만물에까지 미치어 모름지기 이들과 혼융하여 헛되이 만물과 한 몸이 될 필요까지는 없을 뿐입니다.
7-12 ◈ 중국 선비가 말한다.
世之誦讀經書者 徒視其文 而闇其旨
세지송독경서자 도시기문 이암기지
세상에서 경서를 읽는 사람은 그저 그 글자만 보는 것이요, 그 뜻에는 어둡습니다.
某曩者嘗誦詩云
모낭자상송시운
저는 일찍이 시경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維此文王 小心翼翼 昭事上帝 聿懷多福 厥德不回
유차문왕 소심익익 소사상제 율회다복 궐덕불회
“바로 이(주나라) 문왕께선 삼가삼가 조심조심 밝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시어 많은 복을 누리시니 그분의 덕을 어긋남이 없네!”
今聞 仁之玄論 歸于天主 而始知詩人之旨也 志事上帝 卽德無缺矣
금문 인지현론 귀우천주 이시지시인지지야 지사상제 즉덕무결의
“사랑의 오묘한 논의는 천주께로 귀결된다.”고 이제 선생으로부터 들었으니 문왕을 노래한 시인의 뜻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 뜻을 두게 되면 곧바로 우리 인간들의 덕성은 완전무결하게 될 것입니다.
然仁旣惟愛天主 則天主必眷愛仁人
연인기유애천주 즉천주필권애인인
그렇다면 사랑(仁)이란 오로지 천주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천주께서는 사랑 하는 이들을 반드시 돌아보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何須焚香 禮拜 誦經 作功乎? 吾檢愼于日用 各合其義 斯已焉
하수분향 예배 송경 작공호? 오검신우일용 각합기의 사이언
천주 앞에 분향하고 예배드리며 경전을 외우며 공을 드리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스스로를 점검하고 삼가 각각 자기의 도의와 합치한다면 그것으로 끝날 뿐입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天主賜我形神 兩備 我宜兼用二者以事之 天主繁育鳥獸 昭布萬像
천주사아형신 양비 아의겸용이자이사지 천주번육조수 소포만상
천주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몸과 정신을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졌으니 우리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다 써서 천주를 섬겨야 합니다. 천주께서는 새와 짐승들을 번성하게 길러 내셨고 삼라만상들을 분명하게 배열시켜 놓았습니다.
而其竟寞有知所酬報者 獨人類能建殿堂 設禮祭祈拜誦經 以申感謝 何者?
이기경막유지소수보자 독인류능건전당 설예제기배송경 이신감사 하자?
그러나 그들 중에 천주께 보답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들만이 성전을 세워서 제례를 차려놓고 기도하고 절하고 경서를 읽음으로써 감사를 드리고 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天主之愛人甚矣
천주지애인심의
천주께서는 인간을 사랑함이 깊으시기 때문입니다.
大父之慈 恐人以外物 幻其內仁 則命聖人作此外儀
대부지자 공인이외물 환기내인 칙명성인작차외의
하느님 아버지(大父)의 사랑하심은 사람들이 밖(세속)의 일 때문에 자기 마음속의 사랑(仁 )을 허망하게 볼까 염려하여서 성인들에게 명령하여 그러한 외적인 의례들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以啓吾內德 而常存省之 俾吾日日仰目禱祈其恩 卽得之 則讚揚其盛 而感之不忘
이계오내덕 이상존성지 비오일일앙목도기기은 즉득지 즉찬양기성 이감지불망
그럼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내면의 덕을 계발시키며 언제나 그것을 보존하고 성찰하게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매일매일 눈을 우러러 그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기원하게 하며, 일단 그 은총을 얻게 되면 그 하느님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감격하여 잊지 못하게 합니다.
且以是明我本來予無毫髮之非上賜 而因以增廣吾仁 且令後世彌厚亨賞也
차이시명아본래여무호발지비상사 이인이증광오인 차령후세미후형상야
또한 이것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본래 천주께서 베풀어 주시지 않은 것은 터럭만큼도 없음을 명백히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더욱더 넓혀 나감으로써 또한 결국 내세에서 그만큼 더 후한 보상을 향유하도록 해 줍니다.
天主之經無他 只是欽崇上帝恩德 而讚美之
천주지경무타 지시흠숭상제은덕 이찬미지
천주의 성경의 요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덕을 흠숭하고 그것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或祈 怨宥昔者所犯罪惡 或乞 恩祐以勝危難 以避咎愆 以進于至德
혹기 원유석자소범죄악 혹걸 은우이승위난 이피구건 이진우지덕
어떤 이는 옛날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용서를 천주께 기도합니다. 어떤 이는 천주의 은총으로 위험과 가난을 이기고 재앙과 허물을 피함으로써 지극한 덕에 나아가기를 갈구합니다.
故數數誦之者 必益敦信此道 愈闢心明 以達學術之隱也
고수수송지자 필익돈신차도 유벽심명 이달학술지은야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은 이런 천주의 도리를 더욱더 돈독하게 믿게 되고, 더욱더 마음의 밝은 지혜를 열어서 학술의 은밀한 것 까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又恐汚邪妄想侵滑人心因而煥散
우공오사망상침골인심인이환산
또한 천주교회는 더럽고 사특한 망상들이 사람의 마음에 침입하여 그것을 휘저어 놓아서 사람의 마음이 그로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염려합니다.
于是 天主又敎之以禮 不拘男女 咸日誦經拜叩 以閑其邪
우시 천주우교지이예 불구남녀 함일송경배고 이한기사
이에 천주께서는 또한 이들에게 예식을 가르쳐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여 날마다 성경을 읽고 천주께 머리를 조아리고 절함으로써 그들의 그릇됨을 막으시려는 것입니다.
夫吾天主所授工夫 匪佛老空 無寂寞之敎 乃悉以誠實引心于仁道之玅
부오천주소수공부 비불노공 무적막지교 내실이성실인심우인도지묘
무릇 우리 천주께서 인간들에게 내려주신 공부들이란, 부처나 노자가 말하는 “허망(空)이나 없음(無)”이라는 고요한 관념적(寂寞)인 가르침이 아니고 모든 참된 정성(誠)과 사실(實)들로써 사람의 마음을 오묘한 사람의 도리(仁道)에로 이끌어 가려는 것입니다.
故初使掃去心惡 次乃光其闇惑 卒至合之于天主之旨
고초사소거심악 차내광기암혹 졸지합지우천주지지
그러므로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악을 쓸어버리고, 다음으로 가려져서 착각하고 있는 마음을 빛나게 닦아 내어서, 마침내 천주의 뜻과 합일하는 데 이르도록 합니다.
俾之化爲一心 而與天神無異
비지화위일심 이여천신무이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교화시킴으로써 한결같은 마음이 되게 하여 천신들과 다를 바 없게 합니다.
用之 必有其驗 但今不假詳解耳
용지 필유기험 단금불가상해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반드시 그 효험이 증명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상세히 말씀드릴 겨를 이 없을 뿐입니다.
吾竊視貴邦儒者病正在此 第言明德之修 而不知 人意易疲 不能自勉而修
오절시귀방유자병정재차 제언명덕지수 이불지 인의이피 불능자면이수
제가 보기에는 선비님의 나라(중국) 선비들의 문제점(病)은 바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천명으로 부여받은 밝은 덕(明德)의 수양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가 쉽게 지쳐서 스스로를 독려해 가면서 수양해 나갈 수 없음을 정말로 모릅니다.
又不知 瞻仰天帝 以祈慈父之佑 成德者所以鮮見
우불지 첨앙천제 이기자부지우 성덕자소이선견
또한 하늘의 임금님(天帝)을 우러러보고 자애로운 아버지(天主)의 은총을 기구할 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이룬 사람이 중국에 별로 보이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7-13 ◈ 중국 선비가 말한다.
拜佛像 念其經 全無益乎?
배불상 념기경 전무익호?
불상에 예배하고 불경을 읽는 것이 전혀 무익합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奚啻無益乎? 大害正道 惟此異端 愈祭拜尊崇 罪愈重矣
해시무익호? 대해정도 유차이단 유제배존숭 죄유중의
어찌 무익에 그치겠습니까? 천주의 바른 도리를 크게 해치는 것입니다. 오직 이 이단만큼은 제사 드리고 절하며 존숭하면 할수록 죄는 그만큼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一家止有一長 二之 則罪 一國惟得一君 二之 則罪
일가지유일장 이지 즉죄 일국유득일군 이지 즉죄
한 집안에 다만 어른 한 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둘로 하면 죄가 됩니다. 한 나라에 오직 임금 한 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둘로 하면 죄가 됩니다.
乾坤亦特由一主 二之 豈非宇宙間重大罪犯乎?
건곤역특유일주 이지 개비우주간중대죄범호?
우주 또한 하나의 주인에 의해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인을 둘로 하면 어찌 우주에 무겁고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儒者欲태二氏敎于中國 而今乃建二宗之寺觀 拜其像 比如欲枯槁惡樹
유자욕태이씨교우중국 이금내건이종지사관 배기상 비여욕고고악수
而厚培其本根 必反榮焉
이후배기본근 필반영언
유학자들은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를 폐지시키려 하면서도 지금도 두 교파의 사원이나 도관을 세우고 그들이 모시는 신상에게 절합니다. 비유하면 나쁜 나무를 바싹 시들게 하려고 하면서도 그 뿌리를 후하게 북돋워 주어서 반드시 이들을 도리어 번성하도록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7-14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天主爲宇內至尊 無疑也 然天下萬國 九州之廣 或天主委此等佛祖神仙菩薩
천주위우내지존 무의야 연천하만국 구주지광 혹천주위차등불조신선보살
保固各方 如天子宅中而差官 布政于九州百郡? 或者貴方有神祖耳?
보고각방 여천자택중이차관 포정우구주백군? 혹자귀방유신조이?
천주께서 우주 안에서 가장 높으심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아홉 개의 구역(九州)은 아주 넓으므로 마치 천자가 궁중 안에 있으면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아홉 개의 지역과 수많은 군현들에 정치를 베푸는 것처럼 혹시 천주께서 이들 부처, 신선, 보살들에게 위탁하여 각 지역을 보호하고 튼튼하게 하시는지요? 혹시 선생의 나라에도 천주 이외에 다른 신들이 있는지요?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此於本失而似得 不細察則誤信之矣
차어본실이사득 불세찰칙오신지의
선비님의 이 말씀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잘못 믿게 됩니다.
天主者 非若地主 但居一方 不遺人分任 卽不能兼治他方者也
천주자 비약지주 단거일방 불유인분임 즉불능겸치타방자야
천주는 地主와 다릅니다. 단지 지주는 한 곳에 살기에 사람들을 보내어 자기의 소임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다른 곳들을 모두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上帝知能無限 無外位而成 無所不在
상제지능무한 무외위이성 무소부재
하느님의 지능은 무한하고 밖에 운동인이 없어도 스스로 이루어 내며, 어느 곳이든 존재하고 있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所御九天萬國 體用造化 比吾示掌猶易 奚大彼流人代司之哉?
소어구천만국 체용조화 비오시장유이 해대피류인대사지재?
온 우주와 온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하느님의 본체와 작용의 조화는 우리들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쉽습니다. 어찌 저들 이단의 인물들을 기다려 그들에게 대신 다스리라고 위탁하겠습니까?
且理無二是 設上帝之敎是 則他校非矣 設他敎是 則上帝之敎非矣
차리무이시 설상제지교시 즉타교비의 설타교시 즉상제지교비의
또한 도리에는 둘이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교리가 옳다면 다른 교리들은 틀린 것이겠습니다. 만약 다른 교리가 옳다면 하느님의 교리가 그릇된 것이겠습니다.
朝廷設官分職 咸奉一君 無異禮樂 無異法令
조정설관분직 함봉일군 무이예악 무이법령
조정에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어서 모든 관료들이 한 군주를 받드는 데에도 서로 다른 예악이 있을 수 없고 서로 다른 법령이 있을 수 없습니다.
彼二氏敎 自不同 況可謂天主同乎?
피이씨교 자부동 황가위천주동호?
저들 둘(불교와 도교)의 교리도 그 자체로는 (서로) 같지 않은데 하물며 천주(의 교리)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彼敎不尊上帝 惟尊一己耳 已昧于大原本焉 所宜誨諭 大非天主之制具
피교불존상제 유존일기이 이매우대원본언 소의회유 대비천주지제구
저들 이단의 교리들은 하느님을 존숭하지 않고 오직 자기 한 몸만을 높이 볼 뿐입니다. 저들이 만물의 원대한 근원과 근본을 알지 못하면서도 가르침을 선포한 것들은 대부분 천주께서 제정하여 갖추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何謂自任 豈天主任之乎?
하위자임 개천주임지호?
저들은 만민의 교회를 “스스로 맡고 나온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천주께서 그들에게 위임까지 하셨겠습니까?
天主經曰 防之 有着羊皮 而內爲豺狼 極猛者 善樹生善菓 惡樹生惡果
천주경왈 방지 유착양피 이내위시랑 극맹자 선수생선과 악수생악과
視其所行 卽知何人 謂此輩耳
시기소행 즉지하인 위차배이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막아라! 그것을 막아라! 양의 가죽을 쓰고 승냥이나 이리여서 극히 사나운 자가 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에서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 소행을 보면 곡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이런 무리를 두고 말했을 뿐입니다.
凡經 半句不眞 決非天主之經也 天主者 豈能欺人 傳其僞理乎?
범경 반구부진 결비천주지경야 천주자 개능기인 전기위리호?
무릇 어느 경전이고 그것의 반 구절이라도 진실하지 않으면 결코 천주의성경은 아닙니다. 천주께서 어찌 사람을 속일 수 있으며 거짓 도리를 전하시겠습니까?
異端僞經 虛詞誕言 難以勝數 悉非由天主出者
이단위경 허사탄언 난이승수 실비유천주출자
이단의 거짓 경전들에는 공허한 낱말들과 거짓된 주장들이 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으니 그것들은 모두 천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如曰 日輪夜藏須彌山之背 曰 天下有四大部洲 皆浮海中 半見半浸
여왈 일륜야장수미산지배 왈 천하유사대부주 개부해중 반견반침
曰 阿函以左右掩日月 爲日月之蝕
왈 아함이좌우엄일월 위일월지식
예를 들어 말하자면, “태양은 밤에 수미산의 뒤에 숨는다.” “세상에는 네 개의 큰 대륙이 있는데 모두 바다 가운데 떠있으며, 반쯤은 보이고 반쯤은 잠겨 있다.” “아함이 좌우의 손으로 해와 달을 가리면 일식과 월식이 된다.”
此乃天文地理事 身毒國原所未達 吾西儒笑之 而不屑辯焉
차내천문지리사 신독국원소미달 오서유소지 이불설변언
이러한 현상들은 천문지리에 관한 일들이나 인도에서는 원래 이해를 하지 못하였기에 우리 서양학자들은 이를 비웃었고 그것을 따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吾今試指釋氏論人道之事三四處 其失不可勝窮也 曰 四生六道 人魂輪廻
오금시지석씨논인도지사삼사처 기실불가승궁야 왈 사생육도 인혼윤회
우리는 이제 석가모니가 논한 삶의 도리 중에서 서너 가지만 지적해 보려고 합니다. 그의 잘못은 이루 다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사생”과 육도를 통한 “인간 영혼의 윤회”를 말하였습니다.
又曰 殺生者靈魂不昇天堂 或歸天堂 亦復廻生世界 以及地獄充滿之際 復得再生于人間
우왈 살생자영혼불승천당 혹귀천당 역복회생세계 이급지옥충만지제 복득재생우인간
또한 “살생한 사람의 영혼은 천당에 올라가지 못하지만 혹시 천당에 올라가도 또한 다시 이 세상에 회생한다. 그리고 지옥이 꽉 찼을 때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又曰 禽獸聽講佛法 亦成道 果此皆拂理之語 第四 五篇已明辯之
우왈 금수청강불법 역성도 과차개불리지어 제사 오편이명변지
또한 “짐승들도 불법을 들으면 역시 도리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이런 것들은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말들입니다. 저는 앞의 제4편과 제5편에서 이미 이런 망론들을 명백하게 논박하였습니다.
又言婚姻俱非正道 則天主何爲生男女 以傳人類? 豈不忘乎?
우언혼인구비정도 즉천주하위생남녀 이전인류? 개불망호?
또한 윤회가 사실이라면 혼인은 모두 올바른 도리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남녀를 출생시켜 인류를 이어져 내려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윤회설이 어찌 망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無婚姻 不從何生乎? 禁殺生 復禁人娶 意 惟滅人類 而讓天下於畜類耳
무혼인 불종하생호? 금살생 복금인취 의 유멸인류 이양천하어축류이
혼인이 없다면 부처는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짐승들의 살생을 금하면서 또한 사람들의 결혼도 금한다면 오직 인류만 멸망시키고 이 세상을 짐승들에게 내어 주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又有一經 名曰 大乘妙法蓮華經 囑其後曰 能誦此經者 得到天堂受福
우유일경 명왈 대승묘법연화경 촉기후왈 능송차경자 득도천당수복
또한 ‘대승묘법연화경’이라는 불경이 있습니다. 자기 후손들에게 당부하기를 “이 불경을 암송하는 이는 천당에 이르러 북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今且以理論之 使有罪大惡極之徒 力能置經誦讀 則得升天受福
금차이이론지 사유죄대악극지도 역능치경송독 즉득승천수복
지금 이런 이치대로 따져 본다면 죄가 크고 악이 극에 달한 사람일지라도 이 불경을 펴놓고 크게 읽어 나가는데 힘을 쓸 수 있다면 하늘에 올라가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若夫脩德行道之人 貧窮困苦 買經不便 亦將墮於地獄與?
약부수덕행도지인 빈궁곤고 매경불편 역장타어지옥여?
그러나 만약 덕을 수양하고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도 가난하고 궁핍하여 살기가 아주 어려워서 그 불경을 살 형편이 못 된다면 역시 장차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입니까?
又曰 呼誦南無阿彌陀佛 不知幾聲 則免前罪 而死後平吉 子無凶禍 如此其易
우왈 호송남무아미타불 부지기성 즉면전죄 이사후평길 자무흉화 여차기이
卽可自地獄而登天堂乎?
즉가자지옥이등천당호?
또한 ‘나무아미타불’을 헤아릴 수 없이 큰 소리로 외운다면 전에 지은 죄를 면하고 죽은 후에 화평하고 행복하게 되며 재앙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쉽다면 바로 지옥에서도 천당에 올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豈不亦無益於德 而反導世俗以爲惡乎? 小人聞而信之
개불역무익어덕 이반도세속이위악호? 소인문이신지
(이렇게 쉽다면) 또한 덕에도 보탬이 안 되며, 도리어 속세의 사람들을 이끌어서 악을 짓게 하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소인들이 (그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이) 믿게 될 것입니다.
執不遂私欲 汙本身 매上帝 亂五倫 以爲臨終念佛者若干 次可變爲仙佛也
집불수사욕 오본신 매상제 난오륜 이위임종염불자약간 차가변위선불야
“누가 사욕을 좇아서 자신을 더럽혔고, 하느님을 모욕하였고, 오륜의 도리를 어지럽혔다 해도 임종 때에 나무아미타불을 몇 차례 외운다면 다음 세상에 신선이나 부처로 변한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天主刑賞 必無如是之失公失正者 夫南無阿彌陀佛一句 有何深玅 卽可逃重殃
천주형상 필무여시지실공실정자 부남무아미타불일구 유하심묘 즉가도중앙
而著厚賞
이저후상
천주께서 벌을 주거나 상을 주시는 데는 이런 정도로 공평서과 정도를 잃은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무릇 나무아미타불 한 구절이 무슨 깊은 묘력이 있어서 곧바로 무거운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후한 상을 드러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不讚德 不祈佑 不悔已前罪 不述宜守規誡 則從何處立功修行哉?
불찬덕 불기우 불회이전죄 부술의수규계 칙종하처립공수행재?
덕행을 찬미하지 않고, 천주의 은우를 구하지 않고, 이전에 지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 마땅히 지켜야 되는 계율을 논하지도 않는다면 어디로부터 수행의 공로를 확립할 수 있겠습니까?
世人交友 或有一二語誑 則終身不敢盡信其焉
세인교우 혹유일이어광 즉종신불감진신기언
세상 사람들이 친구들과 사귐에 누가 혹시 한두 마디 거짓말을 했다면 평생토록 아무도 그 사람의 말을 다 믿지 않습니다.
今二氏論大事 許多誑謬 人尙畢信其餘 何也?
금이씨논대사 허다광류 인상필신기여 하야?
지금 둘(불교, 도교)이 사람의 사후 도덕 심판에 관한 중대사를 논함에는 이처럼 매우 많은 거짓들과 오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다른 나머지 도리들을 다 믿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7-15 ◈ 중국 선비가 말한다.
佛神諸像? 何從而起?
불신제상? 하종이기?
불교의 여러 신상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上古之時 人甚愚 直不識天主 或見世人畧有威權 或自變愛己親 及其死
상고지시 인심우 직불식천주 혹견세인략유위권 혹자변애기친 급기사
而立之貌像 建之祠宇廟穪 以爲思慕之跡
이립지모상 건지사우조칭 이위사모지적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매우 우매하여 곧바로 천주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세상 사람들 중에 약간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본 경우거나, 혹 스스로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경우에 이들이 죽고 나서 그들의 모상을 세우고 사당이나 종묘를 지어서 사모의 흔적으로 삼았습니다.
曁其久也 人或進向獻紙 以祈福佑
기기구야 인혹진향헌지 이기복우
이런 것들이 오래 습관화 되면서 사람들은 혹 향을 올리고 소지를 바침으로써 저들에게 복과 도움을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又有最惡之人 以邪法制服妖怪 以此異事 自稱佛仙 假布誡術 以駭惑頑俗
우유최악지인 이사법제복요괴 이차이사 자칭불선 가포계술 이해혹완속
而使之塑像祀奉 此其始耳
이사지소상사봉 차기시이
또한 아주 사악한 사람들은 옳지 못한 방법(邪法)으로 요괴를 제압하고 이 경이로운 사건을 가지고 스스로를 부처나 신선으로 부르며, 거짓으로 계율과 술책을 펴고 속임수로 행복(福祉)을 만들어 주면서 우매한 사람들을 겁주고 잘못된 길로 유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조각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불상들이 생겨난) 시작입니자.
7-16 ◈ 중국 선비가 말한다.
非正神 何以天主容之不滅之? 且有焚禱像下 或致感應者
비정신 하이천주용지불멸지? 차유분도상하 혹치감응자
그렇다면 부처는 올바른 신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천주께서는 그들을 용납하고 멸망시키지 않으십니까? 또한 불상 아래에서 분향하고 기도를 하면 어느 때는 응답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有應也 亦有不應也 則其應非由被神邪像也 人心自靈 或有非理 常自驚託已
유응야 역유불응야 즉기응비유피신사상야 인심자령 혹유비리 상자경탁이
응답은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응답은 저들의 신이라는 삿된 우상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체로 영험하여 혹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늘 스스로 놀라고 자기 자신을 이상하게 여길 뿐입니다.
而規其隱者 不須外威也 又綠人旣爲非 則天主弃之 不祐
이규기은자 불수외위야 우록인기위비 즉천주기지 불우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규명하려고 하고 자기 마음 밖의 권위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이 일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천주께서는 그를 버리고 돕지 않으십니다.
故邪神魔鬼 潛附彼像之中 得以侵迷誑誘 以增其愚
고사신마귀 잠부피상지중 득이침미광유 이증기우
그러므로 삿된 귀신과 마귀들이 저들 불교나 도교의 우상 속에 몰래 들어가 붙어 있어서 그들을 미혹 시키고 거짓으로 유혹함으로써 그들의 어리석음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夫人旣奉邪神 至其已死 靈魂墮於地獄 卒爲魔鬼所役使 此乃魔鬼之願也
부인기봉사신 지기이사 영혼타어지옥 졸위마귀소역사 차내마귀지원야
무릇 사람들이 일단 삿된 신을 받들었으면 그들이 죽음에 이르러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고 마침내 마귀의 부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幸得天主不甚許此等邪神發見於人間 見亦少以美像 常睹醜惡
행득천주불심허차등사신발견어인간 견역소이미상 상도추악
다행히 천주께서는 이러한 사악한 우상들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별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보이는 것 또한 아름다운 모습을 한 것은 적고 언제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或一身百臂 或三頭六肩 或牛頭 或龍尾等怪類
혹일신백비 혹삼두육견 혹우두 혹용미등괴류
혹은 몸이 하나에 팔이 백 개, 혹은 머리 셋에 어깨가 여섯, 혹은 소의 머리, 혹은 용의 꼬리 등등 괴상한 부류들입니다.
正欲人覺悟 知 其非天上容貌 乃諸魔境惡相耳 而人猶迷惑 塑其像而置之金座
정욕인각오 지 기비천상용모 내제마경악상이 이인유미혹 소기상이치지금좌
拜之祀之 悲哉
배지사지 비재
천주께서 사람들을 올바로 깨우치시려고 그것들은 천상의 용모가 아니고 마귀 소굴의 추악한 모습일 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삶이 아직 혼미하여 착각을 하기에 저들의 상들을 조각하여 황금을 칠한 자리에 안치하고 절하고 제사지내니 슬픈 일입니다.
夫前世貴邦三敎 各撰其一 近世不知從何出 一妖怪 一身三首 名曰 三函敎
부전세귀방삼교 각찬기일 근세부지종하출 일요괴 일신삼수 명왈 삼함교
무릇 과거에 중국에는 삼교(유교, 불교와 도교)가 각기 따로따로 하나씩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요괴로 합쳐져서 몸은 하나요, 머리는 셋이니 삼함교(三函敎)라고 합니다.
庶氓所宜駭避 高士所宜疾擊之 而乃御拜師之 豈不愈傷壞人心乎?
서맹소의해피 고사소의질격지 이내어배사지 개불유상괴인심호?
서민들은 마땅히 놀라서 피해야 할 것이며 선비들은 마땅히 그들을 재빨리 공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내 그것에 엎드려 절하고 모범으로 섬기니 어찌 더욱 사람의 마음을 해치고 망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7-17 ◈ 중국 선비가 말한다.
曾聞此語 然儒者不與也 願相與直指其失
증문차어 연유자불여야 원상여직지기실
저도 그런 말(삼함교)을 들은 저기 잇습니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간여하지 않습니다. 서로 함께 그 잘못을 바로 지적하였으면 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吾且具四五端實理 以証其誣
오차구사오단실리 이정기무
제가 잠시 너 댓 가지의 참된 이치를 들어서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一曰 三敎者 或各眞全 或各僞缺 或一眞全 而其二僞缺也
일왈 삼교자 혹각진전 혹각위결 혹일진전 이기이위결야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세 교리(유, 불, 도)는 혹시 각각이 다 참되고 완전하거나ㅣ 혹시 각각이 다 거짓되어 불완전하거나 혹시 하나는 참이고 완전하지만 그 나머지 둘은 거짓되고 불완전할 것입니다.
구각眞全 則專從其一而足 何以其二爲乎?
구각진전 칙전종기일이족 하이기이위호?
가령 각각이 참이고 완전하다면 오로지 그 하나를 따르면 충분하지 그 나머지들은 무엇 하자는 것입니까?
苟各僞缺 則當竟爲郤屛 奚以三海蓄之哉? 使一人習一僞敎 其誤已甚也
구각위결 칙당경위극병 해이삼해축지재? 사일인습일위교 기오이심야
況兼三敎之僞乎?
황겸삼교지위호?
만약 각각이 거짓이고 불완전하다면 필경 마땅히 물리치고 치워버려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셋을 뒤섞어 놓습니까? 한 사람에게 잘못된 교리 하나를 배우게 한다면 그 잘못도 이미 심한 것인데 하물며 세 가지 교리의 잘못을 아우르게 하겠습니까?
苟惟一眞全 其二僞缺 則惟宜從其一眞 其僞者何用乎?
구유일진전 기이위결 즉유의종기일진 기위자하용호?
오직 하나만이 참되고 완전하면 그 둘은 거짓이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참된 하나만을 좇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거짓된 것을 어디에 쓸 것입니까?
一曰 與論云 善者以全成之 惡者以一耳 如一艶貌婦人 但乏鼻 人皆醜之
일왈 여론운 선자이전성지 악자이일이 여일염모부인 단핍비 인개추지
또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여론에서 “선이란 다 온전해야 이루어지나 악은 하나로써 될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네가 단지 코가 없다면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밉다고 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吾前明釋二氏之敎 俱各有病 若欲包含爲一 不免惡謬矣
오전명석이씨지교 구각유병 약욕포함위일 불면악류의
저는 앞에서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은 모두 각각 병폐를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설명했습니다. 만약 이들을 포괄하여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면 나쁜 오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一曰 正敎門 令入者篤信 心一無二
일왈 정교문 영입자독신 심일무이
또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올바른 교파라면 입교자로 하여금 믿음을 돈독히 하여서 마음이 하나가 되고 둘이 됨이 없도록 합니다.
若奉三函之敎 豈不俾心分于三路 信心彌薄乎?
약봉삼함지교 개불비심분우삼로 신심미박호?
만약 삼함교를 받들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세 갈래로 나누게 함으로써 믿는 마음을 얄팍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一曰 三門由三氏立也 孔子無取于老氏之道 則立儒門 釋氏不足于道儒之門
일왈 삼문유삼씨립야 공자무취우노씨지도 즉립유문 석씨부족우도유지문
故又立佛門于中國
고우립불문우중국
또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삼교(유, 불, 도)는 세 사람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공자는 노자의 도리에서 취함이 없이 유가 학파를 세웠습니다. 석가모니는 도교와 유가 학파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또한 중국에 불교를 세웠습니다.
夫三宗自己意不相同 而二千年之後 測度彼三心意 不亦誣歟?
부삼종자기의불상동 이이천년지후 측도피삼심의 불역무여?
무릇 세 종파는 자기의 뜻이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천년 후에 그 세 사람의 뜻을 억측하여서 그것을 억지로 같다고 한다면 역시 속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一曰 三敎者 一尙無 一尙空 一尙誠有焉
일왈 삼교자 일상무 일상공 일상성유언
또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세 종교는 하나(도교)는 無를 숭상하고, 하나(불교)는 空을 숭상하며, 하나(유교)는 진실로 있음(誠有)를 숭상합니다.
天下相離之事 寞遠乎虛實有無也
천하상이지사 막원호허실유무야
세상에 서로 동떨어진 사실 중에서 虛와 實, 有와 無보다 더 거리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借彼能合有與無 虛與實 則吾能合水與火 方與圓 東與西 天與地也
차피능합유여무 허여실 즉오능합수여화 방여원 동여서 천여지야
而天下無事不可也
이천하무사불가야
저 이단들이 유와 무, 허와 실을 합쳐 놓은 것(속임수)을 우리들이 빌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물과 불, 네모와 원, 동과 서. 하늘과 땅이라도 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을 것입니다.
胡不思每敎本戒不同? 若一戒殺生 一令用牲祭祀
호불사매교본계부동? 약일계살생 일령용생제사
삼교 각각은 근본 계율이 서로 같지 않음을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는 살생을 금하고, 하나는 희생 재물을 써서 제사지내게 합니다.
則函三者 欲守此 固違彼 守而違 違而守 詎不亂敎之極哉?
칙함삼자 욕수차 고위피 수이위 위이수 거불란교지극재?
그렇다면 세 종교를 합쳐 놓게 되면 누가 (그중에서) 하나를 지키려면 진실로 다른 것을 어기게 됩니다. (하나를) 지키면 (다른 것을) 어기게 되고 하나를 어겨야만 다른 것을 지키게 된다면 (삼함교는) 어찌 교리를 어지럽히는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於以從三敎 寧無一敎可從 無敎可從 必別尋正路 其從三者 自意敎爲有餘
어이종삼교 녕무일교가종 무교가종 필별심정로 기종삼자 자의교위유여
而實無一得焉
이실무일득언
삼교를 한꺼번에 따르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따를 만한 교파가 하나도 없게 되는 편이 낫습니다. 따를 만한 교파가 없으면 반드시 따로 바른 길을 찾을 것입니다. 저들 셋을 동시에 좇는 사람은 교리에 여유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不學上帝正道 而殉人夢中說道乎?
불학상제정도 이순인몽중설도호?
하느님의 바른 도리를 배우지 않고서 사람들이 꿈속에서 떠들어대는 도리를 좇아가야 합니까?
夫眞維一耳 道契於其眞 故能榮生 不得其一 則根透不深 根不深 則道不定
부진유일이 도결어기진 고능영생 부득기일 즉근투불심 근불심 즉도부정
진리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도리가 진리와 꼭 맞아떨어지면 다라서 어느 믿음이든 영화롭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 진리를 얻지 못하면 뿌리가 깊게 박힐 수 없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으면 도리가 확정되지 못합니다.
道不定 則信不篤 不一不深不篤 其學烏能成乎?
도부정 칙신부독 불일불심부독 기학오능성호?
도리가 확정되지 못하면 믿는 마음이 돈독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이 하나가 아니고 깊지도 않고 돈독하지도 않다면 그런 배움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7-18 ◈ 중국 선비가 말한다.
噫嘻 寇者殘人 深夜而起 吾儕自救 猶弗醒也 聞先生之語 若霹靂焉 動吾眠而使知覺
희의 구자천인 심야이기 오제자구 유불성야 문선생지어 약벽력언 동오면이사지각
아! 도둑이 사람을 해치려고 깊은 밤에 일어납니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나 아직도 개어 있지 못합니다.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마치 벽력같이 저의 잠을 깨우고 깨닫게 합니다.
雖然 猶望卒以正道之宗援我
수연 유망졸이정도지종워아
비록 그러하지만 올바른 도리의 근본으로써 마침내 저를 구원해 주실 것을 아직도 앙망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心旣醒矣 眠旣啓矣 仰天而祈上祐 其時也夫
심기성의 면기계의 앙천이기상우 기시야부
선비께서는 일단 마음이 깨어났고 눈도 이미 뜨셨습니다. 지금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느님의 도움을 기도할 바로 그 때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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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