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좋아하던 내가 소설에 빠질 줄은 몰랐다.
유명한 소설들이 있지만 조금 읽다보면 멈춰지고, 다시 빠져들진 않았다.
이 모든 건 글의 호흡이 짧은 내 탓이라 여겼다.
최근에야 내 탓이 아니란 걸 알았다. 고마운 첫 소설이 <딸에 대하여>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그의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김혜진 장편소설이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소설 중반부터 첨예하게 대립하는 딸과 엄마, 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조정자로 개입하게 된 딸의 동성 연인.
삼자의 미묘한 관계 줄다리기가 흥미롭다. 후반부로 갈수록 엄마는 세상의 관습에 저항하는 딸의 고달픈 현실을 마주하며 생각의 균열이 일어난다. 문장이 속도감 있게 읽히고, 상황들의 묘사가 세밀하다. 때때로 소설 속에 뛰어들어가 화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하고, 같이 울고, 함께 분노하도록 초대한다.
글쓰는 모임에서 한 권의 소설을 소개받았다. 최은영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
제목부터 이상하네. 흥미가 일진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와 아무 기대 없이 "쇼코의 미소" 부터 읽었다. 조금씩 이야기에 빠져든다. 의외의 문장에서 감정이 툭 건드려지고 급기야 격해져선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와 "먼 곳에서 온 노래"도 읽어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쇼코의 미소"에서도 느꼈지만, 작가 최은영은 감정의 마술사 같다. 이타심이 실은 이기심인 걸 간파한 것은 물론이고, 미묘하고 혼란스런 감정을 어찌나 잘 잡아내는지. 절로 감탄이 나온다. 불편한 감정들인 질투와 미움, 부러움, 경쟁심, 선함과 악함도 판단 없이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래, 이런 소설을 읽고 싶었어.
그동안 여성인 내가 공감하지 못했으니까 안 읽은 거야.
소설을 읽으며 글쓰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많이 애쓰지 않아도 매끄럽게 이어진다. 소설의 호흡이 달라 붙기 시작하나 보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최근 1달 간 무료로 제공되는 오디오북 서비스 <윌라>를 듣고 있다. 김혜진 작가를 또 찾았다. <9번의 일>이 있었다.
권고사직을 거부한 채 회사에 남아 계속해서 일을 해 나가는 '9번'이라 불리는 한 남자의 일과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딸에 대하여>를 쓴 김혜진 작가 맞나? 몇 번이나 확인했다. 동명이인의 다른 작가가 아닌가 하고.
분명 통신회사 설비기사인 남성의 일인데, 작가가 직접 경험한 듯 이리 생생할 수가?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통신회사 설비기사로 26년을 일한 '9번 남자'가 외지로, 더 외지로 밀려나는 과정을 참혹하고 억척스럽게도 묘사한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일하는 사람의 실체가 이 정도까지 비참하고 치욕적일 줄이야.
소설을 읽다보면. 화자들이 자꾸 묻는다.
'넌 어떤 사람이야?'
'어디로 가고 있어?'
'사람을 알아?'
'삶이 뭐라고 생각해?'
그럼 난...
질문 받지 않던 삶에서 질문받는 삶으로,
아니 질문 없던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주체적으로 진화해가는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