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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린이란 무엇이고 붉은 광장이란 무엇인가?’ 무척 궁금하게 생각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관람을 했다. 크레믈린이란 성벽이란 뜻이다. 크레믈린 성 안에는 위의 배치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모승천 대성당, 천사 대성당, 성모수태 대성당, 12 사도 대성당, 나사로 교회, 망루궁전, 그라노비따야궁전, 총주교궁전, 국립무기궁전, 궁중극장, 대클레늘린궁전, 국립클레믈린궁전, 상원건물, 별기창, 이반대제 종각, 황제의 종, 황제의 대포 등 국가의 중요한 시설이 들어 있고, 성벽 둘레에는 탑들이 있다. 성벽을 따라 해자가 둘러 있어서 성 안을 못 들어가게 했었다. 지금은 해자는 없앴다. 황제와 그 가족들 그리고 황제를 도우기 위해 있는 요직들의 생활 터전이다. 궁전을 중심으로 대성당들이 가깝게 세워져 있다. 대성당 광장에서 보면 성당, 궁전들이 한눈에 보인다. 외모로 보이는 성당과 궁전들이 여간 화려하지 않다.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난 건축 예술가들의 솜씨라고 한다. 성당 안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러시아 상징, 별....
붉은 광장 안의 스파스카야 시계탑
레닌 묘
붉은 광장
15세기말경 크렘린 성벽이 완공되면서 만들어져 오랫동안 러시아와 소련의 정치사·사회사의 구심점이 되어왔다.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17세기말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어로 'Krasnaya'('붉은색'이라는 뜻)는 '아름답다'는 뜻도 있다. 줄곧 장터로 사용되었으며 종종 교회, 모스크바 최초의 공공도서관 및 대학·대중극장·인쇄소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붉은 광장은 처형·시위·폭동·열병(閱兵)·연설 등의 무대가 되어왔다. 면적은 약 7만 3,000㎡에 이르며 크렘린의 정동쪽, 모스크바 강의 북쪽에 있다. 1812년 크렘린과 광장 사이에 해자(垓字)를 둘렀다. 광장의 북쪽 끝에는 1875~81년에 건립된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다. 남쪽 끝에는 1555~60년에 건립된 8개 탑이 있는 상트바실 대성당(처음엔 '중재의 성당'이라고 했음)이 있다. 동쪽에는 국영백화점인 GUM이 있으며, 서쪽에는 1930년 완공된 레닌 영묘가 있다. 레닌 영묘 주위의 다른 묘들은 크렘린 성벽 측면에 맞닿아 있다. 1930년 광장을 포장한 자갈을 석판으로 바꾸었으며, 1818년 중앙에 세운 미닌·포자르스키 기념비는 열병 및 시위를 위한 공간확보를 위해 상트바실 대성당 앞으로 옮겼다. 노동절(5. 1)과 10월혁명기념일(11. 7)의 연례 행렬은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가장 유명한 행사이다.
가이드를 따라 바쁘게 둘러보느라 다 보고 나서도 대성당 광장과 붉은 광장을 혼돈했었다. 조감도를 보고 나서야 대성당 광장은 레닌글라드 성벽 안에 있는 것이고, 붉은 광장은 성벽에 붙어 있는 성 밖의 광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대성당 광장에서 보면 그라노비따야 궁전, 베르호스빠스끼 대성당, 성모승천대성당, 총주교궁전, 12사도대성당,황제의 종, ‘이반 대제’ 종각, 천사 대성당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붉은 광장에는 성모출현 기념 대성당(성바씰리성당), 미닌 뽀쥐아르스끼 기념비, 고대, 레닌 묘, 국립역사박물관, 부활문, 쥐우꼬프 원수 기념비 등을 볼 수 있다. 어느 성당, 어느 궁전, 그리고 박물관이나 어느 시설물을 보아도 예사로운 것이 없다. 한결같이 예술품이다. 성당이나 궁전 어느 건축물이든 이탈리아, 로마 등 외국의 세계적인 건축 예술가나 러시아의 세계적인 건축예술가의 손으로 건축되었다. 그뿐 아니라 성당 안의 벽과 격벽 (칸막이 벽)에 성상과 그림 등이 금빛의 화려하고 우아함에 감동이 되었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크리스토 사상이 그렇게 뿌리가 깊은 줄은 몰랐었다. 외부의 건축에 세계적인 건축예술가의 정성이 든 것만큼 내부의 장식에도 세계적인 미술가의 정성이 들어 있다. 뿌리 깊은 크리스도 정신과 뿌리 깊은 예술의 전통이 어우러진 열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성당의 격벽 사진)
성모수태성당의 격벽 천사대성당의 격벽 천사대성당의 성상 |
크레믈린궁전-대성당 옆에 있는 크레믈린 궁전은 길이 200m, 폭 70m의 건물로 700개의 방이 있으며, 1층에서는 역대 황제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1776년에 착공하여 1787년에 완공한 이 건물은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의 3층은 1918년~1922년에 레닌이 거주하던 곳으로 3개의 방에 그가 사용하던 작은 책상과 필기구들 그리고 그가 쓴 마지막 쓴 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러시아 대통령 푸시킨의 집무실이다.
대톨령 집무실 크레믈린 궁에서 1921년 9월 고려공산당 대표 이동휘 등이 11월 3일 러시아 혁명 4주년 행사에 참석한 뒤, 11월 28일에 레닌과 면담 1922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여운형과 김규식도 크레믈린 궁에서 레닌과 한국의 독립문제 논의했다.
세계 최대급의 차르 종과 대포
대성당 광장에에는 광장을 중심으로 크렘린에서 가장 높은 이반 대제의 종탑이 있고, 그 밖에도 이반 3세 시대의 그라노비타야 궁, 황실 무덤인 아르항겔스키 사원, 황실 사원인 블라고베시첸스키 사원, 성화로 장식된 우스펜스키 사원 등이 위치해 있다.
흰 벽과 금색 돔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52개의 종이 설치된 이반 대제의 종탑 앞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차르의 종'이 서 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종은 무게가 무려 2백 톤이 넘으며 높이는 6미터, 지름은 7미터나 된다. 불행하게도 이 종은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치명적인 금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도 소리를 내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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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붕은 수직선 무늬로, 또 어떤 지붕은 수평선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또 다른 지붕의 색채는 선인장을 연상시키고,
대포의 왕
다른 하나는 그 무늬와 색채가 파인애플을 닮았다. 이 재미있고 신비롭게 보이는 성 바실리우스 사원은 실제로 러시아 문화가 응축된 비잔틴 양식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1561년 완공된 이 사원은 2백여 년 간 이곳에 군림했던 몽골족 카잔한을 물리친 기념으로 이반 대제가 수주한 것이다. 바실리우스의 아홉 개 탑은 높이와 크기가 각각 다르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잘 이루고 있고, 탑과 지붕의 독특한 무늬와 현란한 색체는 마치 불길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생동감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시 후퇴하면서 내팽개쳤던 대포들
조국전쟁 (祖國戰爭)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직접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선다 알렉산드르 1세의 기본 전략은 장기전을 펼치며 초토화 작전과 기습으로 적군에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 영토 모스크바 크렘린까지 입성하여 들어갔으나, 제대로 된 집이나 곡식 한 톨이 남아 있지 않았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가 가진 치명적 무기인 "겨울"이 자신들을 겨누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그들은 6월에 여름 옷만 걸치고 프랑스를 출발했었다. 러시아 영토 너무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수렁이었다. 얼어 죽는 병사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입성 한 달만에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후퇴의 길은 참혹했다. 쓰러진 전우의 옷과 신발을 벗겨 입고 죽은 말의 고기를 씹으며 필사적으로 눈보라를 헤쳐 나가던 패잔병들은 러시아군의 기습에 맥없이 쓰러져 갔다 나폴레옹은 결국 군대를 해산하여 병사들이 각자 알아서 살아 돌아가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60만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3만이 채 되지 못했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유럽을 정복한 영웅 나폴레옹을 러시아가 몰락시켜 버린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나폴레옹을 격파한 이 전쟁을 "조국전쟁" 이란 이름으로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7월 25일(목) 상드 페테스부르크, 바실리 등대, 여름 궁전, 에르미타줘 박물관
호텔 식사를 하고 9시에 관광버스를 타고 네바강의 바실리 섬을 향해 갔다.
바실리의 등대
이 도시의 제일 큰 섬 바실리 섬이 보이는 네바강가에 도착했다. 네바강이 두갈레로 나뉘어져 핀란드만으로 흐르는 곳에 붉은 기둥의 등대 2개가 나란히 서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동물학박물관과 해군중앙박물관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등대는 19세기 초 건축가 토만이 세웠으며, 당시는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였고, 해군박물관은 당시 상공회의소로 쓰여진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한 겨울엔 이곳이 말썰매 경주장이기도 하다. 등대는 지금도 국경일이나 도시의 경축일 전야와 축제 때 불을 밝힌다.
이곳은 에르미따쉬박물관, 성 이삭성당, 피터폴요새 등을 네바강과 함께 사진 배경으론 하기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관광객들뿐 아니라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함께 와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행복한 앞날을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또한 이미 100년이 넘은 예수의 다리 등 네바강의 12개 다리들은 조각품들이 각기 다르고, 얼음이 녹은 초여름부터 새벽에 양쪽으로 들리며 배들이 발달된 운하를 통해 모스크바까지 다다른다.새벽에 부지런하면 교량 관리자와 이야기를 하고, 직접 가운데까지 내려가서 이 광경을 만끽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다음엔 뾰뜨르 1세의 여름궁전을 향해 갔다. 현지 가이드가 성페테스부르그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이 도시는 러시아의 둘째 큰 도시이고, 모스크바가 수도로 되기 전에 러시아 수도였다고 한다. 이 도시의 4대 특징이 첫째, 흰 피부에 좁은 얼굴의 미녀. 둘째 보드카 술 셋째 자작나무 원료로 만든 국수 등이라고 했다. 평균수명은 58세이고 인성이 스타카토가 없는 음악처럼 부드럽다고 했다. 여름에는 밤이 없는 백야가 계속되지만 겨울에는 낮이 없는 밤이 계속되기 때문에 문학이 발달했다고 한다. 추위가 심하기 때문에 여름을 축복의 날이라고 한다.
쌍뜨 뻬쩨르부르크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지닌 도시다.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탄생은 수많은 획기적인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성 삼위일체의 날인 1703년 5월 16일 (구 달력 27일),스웨덴 요니엔샨쯔와 멀지 않은, 녜바강 하구에 위치한 태고부터 러시아의 영토였던 곳에, 뾰뜨르 1세는 두 발로 굳건히 서기 위한 해안 근처의 땅을 택했다. 이 지역이 황제를 사로잡은 것은 유럽을 향하고 있는 녜바강을 끼고 있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백야(白夜)와 또한 러시아의 역사가 천 년 전 ‘라도가’호와 가까운 바로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뾰뜨르 1세는 자기 병사의 단검을 뽑아 들고 십자가 모양으로 땅을 두 줄로 가른 뒤 “여기에 도시가 생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제 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문화와 예술, 역사와 유적의 도시다. 시내에는 약 250개의 박물관과 50개의 극장, 80개의 미술관이 있으며 해마다 900여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화려한 유럽식 근대도시로 변모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피터) 대제'의 정치적 야욕의 소산이기도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 이름에서도 표트르 대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트(saint)'는 영어로 '성스러운'이란 뜻이고, '페테르'는 영어로는 '피터 대제', 러시아어로는 '표트르 대제'를 의미한다. 마지막 '부르크'는 독일어나 네덜란드어에서 '도시'란 뜻이다. 즉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성스러운 표트르(피터) 대제의 도시'란 뜻으로 표트르 대제의 계획 하에 설치된 계획도시다.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
베르사이유궁전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뾰뜨르 1세의 여름궁전에 도착했다. 뻬쩨르부르크 건축의 독특함은 정원예술이다. 뾰뜨르 1세는 어린 시절 네덜란드 풍 바로크식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스크바의 공원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러시아의 관습을 깨고 젋은 황제는 공원부터 재건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인을 네덜란드로 파견해 원예예술을 배우도록 했다. 녜바강, 판딴까강, 백조 천으로 둘러싸인 섬, 쌍뜨-뻬쩨르부르크의 중앙에 뾰뜨르대제는 1704년 자신의 여름 궁전 근처에 11.7ha 여름 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은 녜바강변과 판딴까(분수) 강변 모퉁이에 2층의 석조 건물인 뾰르뜨르 1세의 여름궁전을 에워싸고 있다. 여기서 황제는 야회(夜會)를 자주 열었다. 이궁전은 여름 정원의 진주로 표현된다. 1934년부터 이 궁전은 박물관 형태로 개관되었고, 민속품과 가구, 18세기 초반의 회화 작품들, 뾰뜨르 1세의 개인 물품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는 이 별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분수만 구경했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 별장에는 겨울궁전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우리는 여름궁전보다 더 볼거리가 많은 겨울 궁전에 간다고 했다.
우리는 분수대 근처를 갖가지 조각상, 분수의 모습 등을 1시간 감상하고 점심 식사을 한 뒤 겨울 궁전으로 갔다.
성스러운 뾰뜨르 도시
쌍뜨 뻬쩨르부르크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물
뾰뜨르 1세가
“여기에 도시가 생길 것이다.”
고 선언한 힘으로 만들어졌다.
1703년 5월 16일
성삼위일체의 날에 선언을 했기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네델란드 상선,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꼬프
안나 요아나브나 여제,
알레산드르 1세 황제......
대대로 일할 황제들을 불러들였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겨울궁전(짐니이 드바례쯔)과 에르미따쥐 박물관은 같은 건물로써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영국 대영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이 박물관의 전시품은 각 시대별로 여러 나라와 민족의 고대 문화기념물 등 고대 이집트에서 20세기 회화 걸작에 이르기까지 약 300만 점에 달한다. 박물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걸작이다. 전 러시아의 영광을 위해 엘리자베따 뻬뜨로브나의 염원에 따라 녜바강변에 건축된 황제의 거처는 F. -B. 라스트텔리의 대성공작이다. 궁전의 벽돌은 호화로운 조각 장식으로 섞어 놓은 듯 화려하게 꾸며졌고, 다채로운 장식품으로 꾸며졌지만 전체적인 통일감을 잃지 않았다. 강변 쪽 하얀 기둥들은 확 트인 녜바강 위를 위풍당당히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 1837년 참혹한 화재로 궁전의 모든 공간이 불탔지만 건물 전면은 그대로 남아 있고 18세기 중반 바르크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궁전에서 가장 넓은 방(800㎡)은 계오르기옙스끼 홀(혹은 볼쇼이 옥좌 홀)이다. 현재 겨울궁전에는 1050개의 방, 1886개의 문, 1945개의 창문과 117개의 계단이 있다. 에르미따쥐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현지 가이드가 입구에서 이어폰을 나누어 주었다. 관람자가 많기 때문에 육성으로는 듣기지 않는다. 관람자 단체별로 인솔자들이 이어폰을 통해서 인솔을 하고 설명을 한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품을 골라 설명을 하면서 지나가는 것 같다. 빠르게 설명을 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 들어도 놓치는 것이 많다.
겨울궁전이었던 에르미타쥐(Hermitage) 박물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네버강변에 위치한 에르미타쥐 박물관은 제정 러시아 황제들이 기거했던 겨울궁전과 5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은 하루 방문객이 35,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놓친 설명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찾았다. 마침 책을 발견했다. <에르미타쥐>는 5유로, 쌍뜨-뻬쩨르부르크와는 8유로 모두 13유로이다. 어제는 모스크바 공항으로 가려고 버스를 타려다가 길거리에서 <모스크바>라는 책을 샀다. 우리나라 말로 된 책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우리나라 말로 된 책을 발견하게 돼서 무척 기뻤다.
아르미타쥐 박물관에서 나와 이삭 성당 앞에서 우리 일행이 사진을 찍었다.
이삭 성당은 오늘날 러시아 성당 중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높이 101.5m) 유럽의 가장 큰 성당들 중 하나이다. 건축과 예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성당 내부를 장식했던 회화의 거장들로는 K. 브률로프, F. 브루니, P. 바씬, V. 쉐부예프, T.네프 등이 있다. 이렇게 내부 장식 회화 거장 이름을 드는 것은 거장들의 정성의 결정체라는 걸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성당에 그만큼 온 국민의 정성을 모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겠다.
에르미타쥐 박물관
해마다 수천만 명을 맞이한다는
에르미타쥐 박물관.
찾아온 손님에게
무슨 선물을 주었을까?
받은 게 없다면
손님이 끊길 텐데,
저마다 얻은 게 있나보다.
내가 받은 건 뭘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기 예수와 마돈나,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레인의
돌아온 탕자
저마다 아름다운 작품들.
예술품은 실제보다 아름다운 것.
내가 받은 선물이다.
오늘 관광을 마치고 극장에 들어가서 러시아 민속춤을 구경했다. 관람료가 70유로이다. 옵션이기 때문에 34명 중에서 10여 명은 들어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독특한 노래와 춤이 볼 만하기는 했으나 가이드가 이야기한 만큼 가치는 못 느꼈다. 중간에 와인과 기타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자리는 마련해 주었다. 극장 관람을 다 마치고 나니 10시가 훨씬 지났다. 일기를 대충 써 놓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성페테스부르크는 제정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렸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에 옛 이름인 상트베트로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트르 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7월 26일(금) 에스토니아 탈린, 알렉산드 넵스키 성당, 시청사 건물, 비루게이트와 탈린 구 시가지
성페테스브르그 브리스톨 호텔에서 5:30에 아침 도시락을 받아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향하여 버스로 출발했다.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수속을 밟느라 버스 안에서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경찰인 듯한 사람이 버스에 올라서 안에까지 들어와 자기 나름대로 확인을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기다리게 했다.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했다.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로 가는 사람,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가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2013. 7. 26.
우리가 버스 안에서 멈춰 있는 사이
지금 이 시각에 필요한 걸 해결하기 위해서
먼 꿈을 향해서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손수레를 끌고
생각만 품고 맨몸으로
부지런히 가고 있다.
우리 버스는 멈춰선 사이에
저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국경선을 넘어 탈린으로 달리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길섶이 자작나무 숲으로만 이어졌는데 에스토니아에서는 밭에 밀과 보리, 유채꽃 같은 농작물을 볼 수 있었다. 보리와 밀이 아직 덜 익은 것도 있고 다 익은 것도 볼 수 있었다. 길섶에 바위 언덕도 모처럼 볼 수 있었다. 현재 에스토니아의 수도이고 인구는 약 40만이다. BC 1000년경부터 형성된 오래된 도시이나, 그동안 스웨덴, 러시아,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점령당하였다가 1991년에 러시아로부터 독립되었다. 오늘날의 탈린은 상업 및 어업 항구이며, 공업 중심지이다. 조선업과 기계제작업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에 걸친 기계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소비재가 생산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문화 중심지로서 과학 아카데미, 종합기술대학, 미술대학, 사범대학, 음악학교 등이 있으며, 극장과 박물관도 여럿 있다. 에스토니아 국기는 위에는 파랑, 중간은 검은 색, 맨 아래는 흰색이다. 파랑은 에스토니아의 하늘, 호수, 바다를, 검정은 에스토니아의 대지와 지난 백년간의 에스토니아의 암울한 역사를, 하양은 순수, 행복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드디어 탈린에 도착했다. 버스로 6시간을 달려서 왔다. 국경을 넘기 전에는 러시아 문자의 간판들이 있었으나 국경을 넘어서부터는 러시아 문자는 볼 수 없었고, 모두 알파벳 문자였다. 세계에서 가장 국토가 넓은 러시아의 자존심을 반영한 것이리라 짐작을 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먼저 분수가 눈에 띄었다. 분수 모습이 아릅답다. 분수를 배경으로 모두 사진을 찍었다. 길거리에는 야외식당이 많았다. 여름이라서 거리를 걷는 사람이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복장이 노출이 우리나라보다 더 심하다. 야외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점심을 먹고 현지 가이드를 따라 관광을 했다. 오래 된 도시라서 옛날 건물이 많다. 골목길을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고양이 우물, 긴 다리길과 짧은 다리길을 안내했다. 긴 다리길로는 귀족이 다녔고, 짧은 다리길로는 서민이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한 국민적 영웅 알렉산더 넵스키의 이름을 딴 알렉산더 넵스키 성당은 탈린의 가장 크고 장엄한 돔을 가진 성당이다. 이 크고 풍성하게 장식된 러시아 정교회는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의 왕정치하에 있던 1900년에 톰페아 언덕에 세워졌다. 교회의 건축은 상페테르부르그의 미하일 프레오브라즈헨스키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노브고라드의 왕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성당건축 전에 그곳에는 마틴 루터의 기념비와 더불어 툼페아성 앞의 같은 자리에 정원이 있었다. 현재도 잘 보존되고 있어 탈린의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이다.교회의 종탑은 11개의 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15톤의 무게이다. 예배 전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부 장식과 모자이크와 이콘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알렉산더 넵스키 성당 맞은편의 핑크색 건물이 에스토니아의 톰페아 성(Toompea loss)이다. 지금은 국회 의사당으로 쓰고 있는데 처음에 지어졌을 때는 13C 경으로 덴마크인이 지었고, 14~15C 에 지었을 때는 더 높고 두껍게 지어졌으나 현재의 화려한 건물은 18~ 19C에 당시에 맞게 개, 보선한 것이라고 한다.
제 2전망대를 가기 위해 가다 보면 만나는 좁은 골목길~! 옛날 중세 시대의 귀부인들은 치마가 넓었다. 이런 좁은 길을 지나가려면 혼자서 가야 겨우 갈 수 있는데 맞은편에 다른 부인이 오게 되면 자존심에 서로 길을 비켜 주지 않아 싸움이 나게 되는데, 그러면 기사들이 대신 나와 싸웠고 그런 일이 자주 있게 되자 나중에는 서로 양보하며 다니기로 하였다는 옛이야기가 있는 골목길이다.
시청사 건물. 시청광장(Raekoja Plats)에 있는 시청사는 1404년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며 65m의 시청사 종탑을 올라가면 광장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시청사 안에는 역사박물관이 있고 누구나에게 개방되어 있다. 용의 머리 모양을 한 물받이 홈통이 아무 장식도 없는 시청사의 넓은 벽 꼭대기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모습이 익살스럽고, 종탑의 꼭대기에 장식된 탈린의 수호신인 토마스 성인은 너무나 많은 외국의 침략에 시달려 온 시민들이 '게으른 토마스'나 '늙은 토마스'라고 부른다고 한다.
폼레아 언덕에서 내려다본 탈린 구시가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됨)
비루게이트와 탈린 구시가지. 구시가지 입구를 비루게이트라고 한다. 중세디대로 들어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에 지어진 건물 속에서 중세시대를 느끼고 중세시대의 음식을 먹어 볼 수 있다. 또 중세시대에 깔린 돌길을 걸을 수 있다. 톰페이 언덕 고지대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정부 관료들의 거주지였다면 저지대는 이들을 위해 일했던 에스파니아인들이 생활했던 곳이다. 톰페아 언덕에 있는 전망대에서 탈린 구시가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저지대를 내려다보니, 뾰족한 빨간색 지붕과 초록의 나무들이 희색의 성벽, 망루와 어우러지면서 차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중세의 모습을 아름답게 자아내고 있다. 구시가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탈린은 발트해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발트해의 핀란드만 연안에 있는 항만 도시이다. 탈린 도시의 의미는 ‘덴마크인의 도시’로 기원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이 만든 성채 자리에 성을 만든 데에서 비롯한다. 그 후 13세기에 비스뷔, 리베크, 브레멘 등 발트해 연안 여러 도시의 상인들이 이주하면서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가 되어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탈린 관광을 마치고 백화점에 들어갔다. 김현숙, 박경선은 기념품을 샀으나 나는 처한테 선물할 묵주를 찾다가 없어서 호텔에 들어갔다. 일기를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6일 에스토니아 탈린 사진)
7월 27일(토) 핀란드 헬싱키, 만네르하임 거리, 지하 암석 교회, 시벨리우스 공원, 투르크
탈린 SUSI 호텔에서 조식 후 탈린 항구로 이동하여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가려고 FERRY에 탑승했다. 약 3시간 후인 10시에 헬싱키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버스에 탑승했다. 핀란드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핀란드는 인구가 520만이고 넓이는 우리나라의 3배이다. 1905년에 독립을 했고 종교는 기독교(복음 루터파), 민족은 핀란드인, 스웨덴인, 사미족인데 언어는 각 민족의 말과 많은 국민이 영어를 할 줄 안다. 발틱해는 염분이 적어서 겨울에 언다. 어느새 암석교회에 도착했다. 천연 바위언덕을 굴처럼 파내서 만들었다는데 뒤쪽에서 보면 풀과 꽃, 나무들이 마구 자라있는, 그저 작은 암석산처럼 보인다. 초록색 둥근 지붕이 없다면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이 언덕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언덕에 오르기 전에 암석교회 안에 들어갔다. 벽은 암벽이다. 바위를 다이나마이트로 깨서 생긴 그대로를 두고 가운데를 파내어 교회를 지은 것이다. 지붕은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돔을 만들었다. 자연 채광이 아름답다. 한쪽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자연과 인공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연 암석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디자인으로 돼 있으며 암석 사이로 물이 흐르고, 파이프 오르간이 이색적이다. 자연의 음향효과를 충분히 고려해 디자인되어 음악회장으로도 자주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엔 원로원 광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핀란드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필란드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독립 이후 핀란드의 명물 광장인 이곳에 지배자인 러시아의 동상이 서 있는데 대해 찬반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도 교훈이 되고 역사이므로 그냥 두기로 했다고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정부청사 건물이 있다. 광장 한쪽 구석대로변, 일반 사무실과 나란히 이어져 있는 노란색건물에 검은 지붕을 이고 있는 평범하고 수수한 건물. 이 건물 앞에는 일반인들의 승용차와 관광버스 화물차들이 아무렇게나 서 있다. 이 건물이 대통령 관저라고 한다.
반대쪽에는 핀란드 헬싱키 국립대학이 있다.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에는 헬싱키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헬싱키를 대표하는 장엄한 건축이다. 흰색의 돔이 아름답다. 하늘로 뻗은 5개의 대칭형 돔이다. 대성당 안에 들어가서 내부의 화려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대성당답게 무척 화려하고 웅장했다.
대성당 내부의 피에타 상
피에티 상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 시신을
성모님이 비통한 마음으로 안고 있다.
성모님 상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더 오래 체취를 맡고 싶어
더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다 대견스러웠다.
밖에 나가면 다투기라도 할까봐
늘 마음이 조이었다.
밖에서 큰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는 저승에서도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마리아처럼
나를 무릎에서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와 헬싱키 대학 내부에 들어가려고 문을 찾았으나 모두 닫겨 있었다. 노천시장으로 갔다. 블루베리와 벚지를 한 봉지씩 사 들고 먹으며 시장을 돌아보다가 점심 식사하러 갔다. 점심을 먹고 헬싱키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그늘에서 더위을 시키다가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이동했다. 시벨리우스 공원은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시벨리우스(1865-1967)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1967년 에일라 힐투넨이 제작한 스테인리스 파이프 기념비와 시베리우스의 초상 오브제가 있다.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서쪽 해안 거리를 걸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계획에 없던 해우라 섬에 있는 민속촌을 관람했다.
눈이 많이 오고 춥고 바다로 둘러싸인 데서 옛날 사람들이 살아온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헬싱키 관광을 마치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가기 위해서 투르크로 갔다. 헬싱키에서 투르크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걸렸다. 투르크에서 배를 탔다. 스톡홀름까지 약 10시간 걸린단다.
7월 28일 (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 대성당, 바사호 박물관
선상에서 조식 후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스톡홀름은 14개의 섬으로 되어 있고,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되었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7m이다. 스웨덴 인구는 927만 명이고, 면적은 45만㎢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은 6만불. 호수가 많아서 수렵 소득이 많다. 에너지는 전력을 이용하고 자작나무를 원료로 껌, 펄프, 제지, 빵 등을 만든다.개인 난방은 없고 중앙난방식이다. 철강, 금, 주석, 스텐레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특허 1등국이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 태어났다. 평화상을 제외한 모든 노벨상 수여식을 한다. 영화와 음악 방면에서도 많은 유명인을 배출했다. 국민성은 천천히,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우리나라와 수교 50년이 되었고 6.25때 병원을 지원했다. 입양을 많이 한다. 정치는 입헌군주제인데 입양자가 왕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교민을 2000여 명인데 맨 처음 박정희 대통령 때 간호원 12명이 들어왔다.
스톡홀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물 위에 있기 때문에 <물 위의 아름다움>이란 이름이 늘 따라다닌다. 스웨덴의 관문인 스톡홀름은 발틱해와 마라렌 호수가 만나는 곳에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수도 중의 하나로 물 위에 세워진 매혹적인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새로 만난 인연
7월 28일
사뭇 자작나무 숲길이었는데
언덕도 없는 평지였는데
바위 언덕 길섶이 보인다.
북유럽에선 처음 만난 얼굴
같은 시대에 만난 인연이라고
저도 반갑단다.
나를 만나기까지
새들이 노래해 주고
별과 달이 날마다 찾아왔겠지.
날마다 햇볕도 찾아와 주었겠지.
(버스 안에서 쓴 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시청사이다. 시청사는 1911년 스웨덴의 유명한 건축가 라그나르 오스트베리의 설계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1923년 완성되었다. 우아한 궁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블루홀이라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창문을 높게 설계해 채광 효과를 높였다. 콘서트를 비롯한 각종 다양한 행사를 하는데, 가장 유명한 행사는 12월 10일의 노벨상 수상 축하 만찬회이다. 가장 볼 만한 것은 황금의 방인데, 여기에는 1900만 개의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된 화려한 벽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노벨상 수상 파티의 무도회장으로 사용된다. 시청사 가까이에 그랜드 호텔이 있다. 이 호텔에는 각국의 정상이나 노벨상 수상자가 묵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다음은 역대 국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되었던 대성당으로 갔다. 1279년에 세워진 뒤 여러 차례의 증 개축을 거쳐 148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에는 제단, 왕좌, 설교대 등이 흑단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성당에서 나와 대광장으로 갔다. 1520년 역사에 남은 ‘스톡홀름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당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의 침입에 저항한 바사 왕의 아버지를 포함해 약 90명의 귀족과 고관 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광장은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광장 한편에는 구스타프 3세가 창설한 스웨덴 아카데미가 있다. 여기에서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구시가지 감라스탄 골목을 둘러보고 바사호 박물관으로 갔다. 건물 안을 배 한 척이 가득 채우고 있다. 스웨덴의 국력이 막강하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 시대에 건조한 이 전함은 독일의 30년 종교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1628년 8월 10일 왕궁 근처의 부두를 출발하여 첫 항해에 나섰으나, 스톡홀름 항구에서 돌풍을 만나 수심 32m의 바다 속으로 침몰해버렸다. 침몰한 원인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군함 치고는 아주 큰 배다. 승무원이 437명이나 된다. 배 전체가 180개에 이르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꼬리 부분은 모두 금색으로 덮여 있어 매우 화려하다. 스톡홀름은 물의 도시로 세계의 가장 아름다우 수도에 들어간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국민의 마음이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명예나 재산을 탐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고 한다.
스웨덴 관광을 마치고 배를 타고 헬싱보그로 이동한다. 배 안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뷔페 양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와인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면세점에 가서 며느리와 처의 기념품을 샀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묵주기도도 하고 작품 구상도 하고 일기도 쓰곤 했다. 배에서 자고 아침 5시 반에 식사를 한 다음 7시 반에 배에서 내려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관광을 했다.
7월 29일 (월) 덴마크 코펜하겐, 시청사 앞 광장, 안데르센 거리, 인어공주 동상,
배에서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바라다보이는 건물이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배경이 된 건물이라고 했다. 덴마크는 안델센의 동화로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철학자 키에케고르, 조각가 토르발드센 등을 배출했다. 현지 가이드가 덴마크를 소개했다. ‘의지하지 말자’가 국민정신이라고 했다. 새마을 운동을 세계에서 처음 일으켰고 우리나라 국민체조를 이 나라에서 배워갔단다. 빙하시대에 이루어진 406개의 섬나라이고 인구가 540만이다. 풍력 발전, 낙농, 의료 등이 발달했다. 신용등위는 43위, 노벨 의학상 2명, 노벨 물리학상 1명 수상자가 있다. 새마을 운동을 달가스가, 국민운동을 프론트가 일으켰다. 먼저 시청사 앞 광장으로 갔다. 시청사는 1905년에 완성되었다. 105.6m의 탑이 있다. 이 탑에는 100년에 1000분의 1초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천문시계가 있다. 시청사 바로 옆이 안델센 거리이다.
안델센 동상이 길 건너편 티보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티보리 공원은 어린이 공원으로 안에는 여러 시설과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입장료도 비싸다고 한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안델센 상을 티보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인어공주상 앞에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자기가 물에 빠진 왕자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결혼한 이웃 공주.
왕자를 만나기 위해
혀를 잘라서 주고
사람 다리를 꼬리에 단
인어공주.
마녀가 준 칼로
잠자는 왕자를 찔러 죽이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안데르센 원작이 너무 안타까워
인어공주 동상을 찾아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물거품이 해의 딸로 태어나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었기를
너도 나도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공원엔 들어가지 못했다. 안델센 동상 앞에서 박경선 교장 선생님이 마련해 온 ‘김현숙님,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축하’ 프랑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대구에서 간 우리 일행 외에도 노랑풍선 여행단 여러 사람이 참석했다. 좋은 작품을 쓴 김현숙님께 안델센도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다음에 간 곳은 아말리엔보르 궁전이다. 검소한 건물이다. 18세기 말 당시 궁전으로 사용하던 크리티안스보르 성에 화재가 나자 귀족 4명이 살던 이 건물을 왕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아말리엔보르 궁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궁전에 여왕이 머무르고 있으면 궁전 지붕에 데마크 국기가 걸린다. 궁전 앞에는 1849년 이 나라의 전제군주제를 폐하고 입헌군주제로 바꾼 프레드릭 7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다음은 크리스티안보르 성이다. 이 성은 1167년에 세워진 이후 다섯 번이나 파괴되고 재건되었다. 중후한 바로크 양식의 이건물은 1928년에 완성되었다. 지금은 국회의사당과 여왕의 알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정면 현관 윗부분에는 ‘네 가지 고통’이라는 조각이 있다. 이가 아프다. 귀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고 탄식하는 4개의 조각은 열심히 일하라는 국회의원에 대한 경고 같은 것이다. 중앙에 세워져 있는 것은 뎀마크 왕이었던 크리티안 9세의 동상이다. 자녀들을 차례로 정략 결혼시켜 여러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았기 때문에 유럽의 양아버지라고 불리는 왕이다. 성 옆에는 왕립 도서관(블렉 다이아몬드)이 있으며, 정원에는 키에르케고르의 동상이 서 있다. 국회의사당 앞길로 가면 연못과 분수대가 있는 왕립 도서관이 있다. 남아프리카 화강암을 사용하여 검게 빛나는 건물로, 블렉 다이아몬드라고 불린다. 도서관 기능 이외에 현대 관련 전시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통유리창의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다고 한다. 운하 연안에 형형색색의 목조 주택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 뉘하운(nyhavn)이다. 옛날에는 긴 항해를 끝낸 선원들이 먹고 마시며 휴식을 즐기던 술집 거리로 붐볐다고 한다. 안데르센이 사랑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뉘하운에 세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도 집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야외 카페에는 관광객들이 붐비고, 강 연안에는 빈 배들이 정박되어 있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유유히 강을 오르내리고 있다. 참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인어공주의 동상. 카를스베르 맥주 회사의 2대 사장 카를 야곱센이 왕립 극장에서 상연된 발레 인어공주를 관람하고 인어공주 동상을 건립하기로 했다. 1913년에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슨이 제작하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어공주 사진을 찍기 때문에 사진 찍는 틈을 얻기도 힘들었다. 연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작은 동상이지만 동화와 연결지어 보는 눈들이 뜻깊게 보였다.
멀리서 오페라하우스를 보고 사진을 찍었다. 20세기 10대 건설프로섹스에 선정된 건물이다. 세계의 오페라 하우스 중 가장 첨단적인 건축물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게피온 분수대를 보았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사망한 해군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08년 덴마크의 조각가 안데르스분드 가르드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오늘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가서 잤다.
7월 30일 (화) 놀웨이 오슬로 갈라
배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약 1시간쯤 걸려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도착했다. 1066년 영국 원정 전쟁에서 하랄 왕이 전사하자 이를 계기로 약 200여 년 동안 지속되던 바이킹의 활동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오슬로 시청 2층 벽에는 하랄 왕이 전사한 스탠버드 브리지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1624년 8월 17일부터 3일간 밤낮으로 계속된 대화재로 도시의 대부분이 불탔다. 이 화재를 계기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당시 뎬마크가 지배하던 오슬로 거리를 대대적으로 변모시켰다. 도시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아니아로 바꾸었다. 이 이름으로 약 300여 년간 불리다가 1925년 1월 1일 오슬로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매년 12월 10일에 이 시청에서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있다. 시청 안에 들어가면, 다양한 벽화가 걸려 있다. 독일군 점령기에 억압 받는 오슬로 시민의 모습 등을 주로 묘사하여 당시에 고통 받던 시민의 감정을 나타냈다. 노르웨이는 덴마크 지배를 400년 받았고, 스웨덴 지배를 100년 동안 받았다. 1905년에 독립을 했다. 북유럽 신화인 에다 EDDa 의 이야기를 묘사해 놓은 16개의 나무 조각품이 있다. 정면을 향해 왼쪽부터 이야기 순서대로 놓여 있다. 시청 복도에는 이 시청이 완성됐을 때 세계 각국에서 보내 온 선물들이 전시돼 있다.
평화가 소원인 나라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나라
남의 지배를 받아보지 않은 나라는
평화가 소중함을 모른다.
데마크와 전쟁에서 지고
400년 동안 지배를 받으며,
스웨덴과 싸워서 지고
100년 동안 지배를 받으면서
평화가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전쟁이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평화가 소중함을 깨달았다.
노르웨이 국민의 소원은 평화
전쟁 없는 세계가 소원이다.
노벨평화상을 시상하는 나라
노르웨이는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남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나라.
비겔란 공원 (조각 공원이라고도 함)으로 옮겼다. 조각은 모두 212점, 조각된 인물은 인공 호수 옆에 있는 태아부터 분수에 있는 유골까지 모두 650명 이상이다. 공원의 상징인 화강암 탑은 높이 17m, 중량 260톤으로 총 121명의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작품을 조각한 구스타 비겔란은 작품에 대한 어떤 해설도 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자기나름으로 생각해 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습을 그렸다.
값어치 있는 삶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참 사연도 많다.
서로 사랑을 해서
태어난 아기도
한평생 사랑을 받아야 할 텐데
감당하지 못할 일
우연히 당한 사고
억울한 일
헤어져야 할 슬픈 일
갖가지 사연들이
얼키고 설키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런 사연들 속에서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정문에서 후문까지 거리가 850m라고 한다. 왕궁으로 갔다. 왕궁 앞에는 당시의 스웨덴 왕 카를 요한의 기마 동상이 있다. 현재도 왕궁에는 국왕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점심을 오슬로에서 먹고 갈라로 이동하고 있다. 가는 도중에 1994년 동계올림픽대회가 열렸던 릴리함메르에 와서 스키장 구경을 했다. 지루한 버스에서 지친 몸을 쉬면서 올림픽 경기장 사진을 찍었다. 계속 멧사 호수를 따라왔다. 러시아, 에스토니아, 필란드, 스웨덴, 덴마크를 거쳐 오는 동안 산이 없었는데 여기 와서 높은 산을 볼 수 있었다. 올림픽경기장 건너편이 옷타와강이라고 한다. 눈이 많이 오고 춥기 때문에 지붕과 벽을 검은색이나 쪼코렛 색으로 짓는다고 한다. 더러는 지붕에 풀이 나게 해서 염소를 올려 뜯어먹게 한다고 한다. 갈라 호텔에서 짐을 풀고 밖에 나와서 멀리 보이는 만년설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즐거운 자연 (생각하는 길)
7/30
산들이 저마다 알맞은 키로
제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다.
호수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길다가 짧다가
높다가 낮다가
호수따라 가는 길은
즐거운 멜로디가 된다.
가파른 산에도
집들이 옹기종기.
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기도 하고
젖소와 소들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
절로 나서 자란 나뭇가지에는
갖가지 새들이 노래 불러 주고
산짐승들이 나무 사이에서
마주 서서 털을 핥아 주고 있겠지.
7월 31일 (수) 갈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버스로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를 향해 갔다. 자욱한 안개가 낀 옷타와강을 따라갔다. 안개와 산과 나무와 강물이 어우러진 자연 속에 나도 하나로 어우러진 것 같다. 4만 년 전 빙하기 때 만들어진 얼음 두께 560m 날마다 조금씩 녹아서 내리고 있다. 석회질이 물에 녹아서 물빛이 녹색이 되었다. 피요르드라는 것은 노르웨이어로 내륙부로 깊이 들어간 만을 의미한다.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U자, V자 형태의 계곡에 바닷물이 유입되어 형성된 하구를 말하며 협만이라고도 한다. 삼대 피료르드 중 가장 아름답고 손꼽히는 게이랑 에르는 해안에서 유지 쪽으로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면서 들어간 피요르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산들로 둘러싸인 비경과 가늘고 복잡하게 들어간 하구와 트롤스팅겔부터가 절경이다. 골든 루터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경관이다.
잇달아 나타나는 터널을 수없이 지나서 마의 고개라고 불리는 해발 1000m의 산에 올랐다. 그 동안 산의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산의 절경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마의 고개에서 내려가는 길은 말 그대로 무척 가파로와서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안전벨트를 다시 살펴보게 했다. 올라올 때의 경치 못지 않게 내려갈 때의 경치도 절경이다.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게이랑에르네 도착해서 헬레술트로 가는 FERRY에 탔다. 약 1시간 10분 동안 절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물쭈물하다가 일곱 줄기로 흘러내리는 7인 자매폭포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사뭇 후회가 된다.배에서 내려서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엄청나게 큰 폭포를 사진에 담았다. 다시 버스로 뵈이야에 가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 오스테달 빙원 (일명 푸른 빙원)의 한 자락인 뵈이야 빙하와 피얼란드 빙하 박물관에 들어갔다. 커다란 맘모스(코끼리) 모형이 있고 빙하에서 발견한 5,000년 전 사람 모형도 있다. 약 15분간 영화를 관람했다. 빙하기의 모습, 그리고 빙하기에서 변화해 온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피요르드가 생기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피오르드
하느님이 만든 예술품이다.
빙하를 만들었다가
용암으로 녹여서
만들어내는 피오르드
100만 년 긴 세월에 만든 예술품
큰 마음으로 만들어서
한자리에서는 볼 수 없다.
나는 예술 작품 속에서
패리를 타고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어진 하느님 솜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저 큰 폭포가 산 옆구리에서
펑펑 솟아나오고
산꼭대기에서 줄기줄기
1000m를 흘러 내린다.
그 자리에만 어울리는
개성 있는 바위들.
지금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다시 FERRY로 세계문화유산인 송내 피요르드로 갔다. 송내 피요르드는 길이 204km. 해안 쪽으로 깎아지른 산 사이를 깊숙이 파고 들어간 노르웨이 최장의 협만이다. 빙하의 침식을 받은 급사면이 직접 바다에 빠져 있기 때문에 깊이도 1300m에 이르는 곳이 있다. 이 협만은 피에를란드 협만, 뤼스테르 협만 등 여러 만으로 갈라져서 내륙으로 파고 들었으며, 그 꽃은 빙하를 이고 있는 가파른 요툰헤이멘 산지로 이어진다. 송내 피요르드 관광을 마치고 노르웨이의 레르달로 이동하여 투숙했다.
8월 1일 (목) 레르달, 플롬, 베르겐, 햄스달
해발 669m 지점 크요스포쎈 역에서 내려 폭포와 녹지 않은 얼음을 구경하고 있다.
호텔 조식 후 피요르드의 관문과 같은 플롬에 갔다. 레르달에서 플롬에 오기까지 터널이 45개나 되었다. 여기서는 배와 버스와 기차를 만날 수 있다. 기차를 타고 해발 2m에서 866m의 고지에 올라가며 관광을 한다. 기차 출발 시각이 될 때까지 기차역과 역에 붙어 있는 상점을 둘러보았다. 우리말 관광 책자가 없어서 못 샀다.
기차를 타고 866m 고지를 올라가면서 창밖으로 자연 경관을 감상한다. 한국말, 중국 말, 영어 3개 국어로 방송을 했다.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어디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지만 특히 큰 폭포나 색다른 경치가 나타나면 환호성이 저절로 울려퍼진다. 볼거리가 있는 곳에는 차가 그쳐서 사진 찍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886m 고지에서 기차가 되돌아온다. 올라갈 때 못 본 경치를 내려올 때 볼 수 있다. 폭포수 물보라 속에서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에 환호성이 터졌다. 플롬에서 노르웨이의 제2 도시이며 항만 도시로서 중요 역할을 하는 베르겐으로 이동했다. 베르겐에서는 노르웨이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베르겐 사람이라고 불러 달라고 할 만큼 자기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베르겐은 이구가 약 25만 명이고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이기도 했다. 14~15세기에 북해 둘레의 여러 나라가 상업 발전과 각국의 공동 이익을 목표로 결성한 한자 동맹에 가입했을 때는 그 사무소가 이곳에 설치됐다. 한자 상인들을 통치하는 동시에 특산물인 말린 대구를 수출하며 17세기에 한자 동맹이 막을 내릴 때까지 400년이 넘도록 번영을 누렸다. 항구 옆에 있는 브뤼겐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건물로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브뤼겐 지구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었고 밀집해 있기 때문에 몇 번이나 화재로 불타버렸지만 그때마다 같은 식으로 복원 수리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브뤼겐 건물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항구의 가장 안 쪽에 있는 어시장에 갔다. 생선 외에 과일, 채소, 선물 용품 등도 파는데,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연어와 새우 샌드위
항구 도시 베르겐 시장에서 동행한 일행과 함께
치가 좋았다. 우리 한국 말로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도 있었다. 관광을 마치고 햄스달로 이동하여 투숙하였다.
8월 2일 (금) 햄스달-오슬로 공항-모스코바 공항 21: 40 SU250에 탑승하여 서울로 출발
8월 3일 (토) 11: 10 우리나라 영종도 인천공항 도착하여 버스로 대구 도착 1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