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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월) 터키, 에베소 지역 순례
배가 터키의 이즈미르 항구에 도착하였다. 선내 TODAY 소식지에 의하면 오늘 낮 최고온도가 28도이다. 무척 더운 하루 일정이 될 것 같다. 배에서 내리니 45인승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버스로 에베소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이즈미르 도시는 터키에서도 3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구는 약400만명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성령께서 “아시아”지역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유럽으로 가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시아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시아는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라 정확한 표현으로 “소아시아”이며, 이는 당시 로마제국에 속한 한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제2차, 3차 전도여행 시 에베소 지역이 중요한 도시였는데, 에베소가 오늘날 터키에 있는 도시이므로 터키는 초대교회와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와 관련한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터키는 전 국민의 98%가 이슬람교도(수니파)인 이슬람 국가이다.
터키는 한반도의 3.5배(남한의 8배) 크기이며, 인구는 약7천만명이다. 기후는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으며, 흑해 내부지방은 따뜻한 반면, 고산(高山)들로 가득한 산악지대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경험할 수 있다.
에베소
에베소는 로마 제국이 소아시아를 지배할 때의 수도로 당시 정치적으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각지의 물산이 이합집산(離合集散)되는 무역항구이며, 교통상으로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요지이다.
그런데 에베소는 아데미신을 섬기는 우상의 중심지였다. 아데미신은 풍요, 다산, 대지의 신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이곳에 있는 아데미 신전이다. 이 신전은 무려 200년에 걸쳐 건축되었지만, 지금은 기둥 하나만 남아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시절에 에베소 지역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매우 심했던 도시였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의 명에 순응하는 민족에게는 자유를 주었지만, 반역하는 경우 매우 가혹하게 핍박하였다.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 황제에 대한 신적 숭배가 강요되었다. 저들은 “우리 주이시며 신이신 황제여”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므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와서 살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도 이런 배경때문이다.
그리고 에베소교회가 세워질 당시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오염시켰다. 영지주의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만 인정하고 인성(人性)은 부인한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악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니골라당도 이런 사상을 주장한 이단이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6절에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는 내용 중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하였다.
로마의 핍박과 영지주의 이단이 활개를 치자 교인들 중에는 배교(背敎)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래서 당시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던 디모데는 사도 요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요한은 편지(요한1,2,3서)를 써서 사람들에게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참된 믿음가운데 바로 서도록 권면하였다. 요한1서에 이단에 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런 배경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요한1서2: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그리고 요한1서4:1-2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하였다. 요한2서에서도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하였다.
에베소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2년 3개월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심혈을 기울여 교회를 세웠는데 당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신실한 동역자와 아굴로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을 떠나면서 디모데를 후임자로 세웠으며, 오네시모도 이 교회를 섬겼다. 이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던 좋은 교회였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당시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 전도하였고(행18:19), 제3차 전도여행 때에는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여 성령이 강림하자 방언과 예언도 하며, 희한한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책을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었다.(행19:1-10)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너희는 깨어 내가 3년간이나 눈물로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권면하였다.(행20:17-31)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와서 말년을 보내었고, 마리아는 이곳에서 별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그는 이곳에서 감독으로 섬기면서,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저술하였으며, AD 95년 밧모 섬에 유배를 갔을 때 계시를 받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계1:11) 요한은 유배를 당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별세하였다.
매년 5월이면 이곳 에베소에서 아데미신을 위한 축제가 벌어졌는데 당시 에베소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가 이를 하지 못하도록 막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에베소교회는 우리가 보기에 더없이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목회자, 좋은 성도가 있었고, 로마의 박해와 니골라당의 거짓 교훈에 넘어가지 않고 잘 분별하여 참된 신앙을 지킨 교회이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아 에베소 교회로 보낸 편지에서 통해 칭찬과 함께 책망을 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얼마나 좋은 교회인가?
그런데 이 교회를 향하여 책망을 하셨다. 요한계시록 2: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교회에서 재산을 잃을 수도 있고 심혈을 기울였던 어떤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교회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망의 말씀 앞에 두려움이 생긴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사랑과 은혜가 넘치고, 숫자적으로 부흥하고, 지역사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실 것이다. “네 첫 사랑이 어디에 갔느냐?”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을 때의 감격,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의 결심,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들이 나의 마지막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변치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주여, 저를 붙들어 주소서”
누가의 묘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이 누가의 묘이다. 누가는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으며, 터키 북부 아가야 지방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묘를 세웠다.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예수를 믿은 후 바울과 동행하며 선교했다. 자신의 저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본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권으로 책으로 되어있었다)에서 알 수 있다(행 1:10,17).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행 21:17), 로마 (행 28:16) 전도에 동행하였다. 그의 이름은 바울 서신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골 4:14, 딤후 4:11, 몬 24). 데오빌로와 친밀한 교분이 있어(눅 1:3, 행 1:1) 두 번의 서신을 보낸데서 그가 헬라 문학에 정통함을 알 수 있고 또한 의사로서 바울과 함께 전도할 때에 많은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안다. 주후 100년경까지 전도하다가 순교하였고 전해지고 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한 이방인이었던 누가("빛을 주는 자"라는 뜻)는 바울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새롭게 거듭난 누가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병든 영혼에 치료의 광선을 전해주는 의사로 변화되었다. 그 후 누가는 의료 활동을 통하여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박차고 바울을 따라 나섰다.
이때로부터 누가는 바울의 지병(육체의 가시)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선교의 동역자로서 분주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며 그의 주치의와 친구가 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인 누가는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동행하며 많은 고난을 감수했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돕는 자로서 살았던 누가는 병약한 몸으로 고독한 감옥 생활을 하는 바울의 곁을 지켜주는 참된 동반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누가는 기도에 힘쓰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받은 달란트와 은사를 개발하고 활용하였다. 특히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누가는 의술 훈련을 쌓는 가운데 정확한 관찰력과 학식을 갖추어 그가 알고 있는 역사와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이방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고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의 4권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문학적인 책으로 인정받는 누가복음과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데오빌로라는 특정인에게 보낸 개인적인 글이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누가의 손끝을 통해 기록된 이 생명의 말씀들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육신은 물론 영혼의 질병까지 치료하던 ‘사랑받는 의원’ 누가는 의료선교의 길을 최초로 열어놓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 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세상에서의 자랑과 명예를 초월한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항상 말없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업에 전력한 누가는 장성한 신앙인의 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기 원했던 누가의 겸손은 하나님께 높임을 받고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끝이 사망일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임을 자각하고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출 오늘의 누가가 이 시대에 절실히 요청된다.
에베소의 유적지
에베소(Ephesus)는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번영하였던 고대도시이다. 에베소는 유럽대륙에서 소아시아로가는 주요 길목으로서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에베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함께 로마제국의 4대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베소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베소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성경의 명칭 : 아데미)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에베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누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전도와 목회를 한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베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형 대극장
이곳의 유적은 대체적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원형대극장은 3단 형태의 구조로 각 단은 22단계로 되어있다. 이 극장은 반원형 로마식 건축으로 한꺼번에 24,000명 수용이 가능한 노천극장으로 경마, 격검, 씨름, 죄수 사형 등을 거행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폭동을 일으켰던 장소이기도 하다.(행19:21-41) 이로 인하여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떠났다.(행20:1)
순례단 일행은 원형극장 아랫쪽 가운데 서서 함께 뜨겁게 찬양을 드렸다. 사도 바울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의 피가 어린 바로 그 장소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과 한국의 민요 “아리랑”을 힘차게 불렀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와 온 세상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소망하였다. 우리의 찬양을 듣고 다른 외국의 순례자들이 힘찬 박수로 화답하였다.
길바닥의 매춘광고
원형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길바닥에 이상한 그림과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당시 이 근처에 창녀들의 집터가 있었는데 그 앞 길바닥 대리석판에 여자와 돈과 발자국이 하나 그려 있었다. 이 광고판의 내용은 여자와 돈은 여자를 만나려면 돈을 갖고 와야 한다는 것이고, 발자국은 자기의 발을 대어보고 그 발보다 크면 여자를 살수 있다는 암시로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판인 셈이다.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였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아데미 신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아데미 신전이다. 그런데 그 아데미 신전의 전각이 BC 356년에 한 정신병자에 의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후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에베소를 방문하였을 때 아데미 신전을 복구해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자존심이 강한 에베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신의 신전을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재건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아데미 신전을 재건하였는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더 크게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기둥 하나만 남아있다. 우상을 섬긴 나라와 개인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하르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 번째로 로마황제에게 바쳐진 에베소의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은 이 신전은 에베소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바쳐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5현제(賢帝) 중 하나로 추앙받는 현인이었다. 선황의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선황이었던 트리아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한 황제였다. 속주들은 안보와 융성에 힘썼으며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행정, 관료, 군사제도 등 제국의 기초를 다듬고 혁신하였으며 학술과 예술 등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선황처럼, 양자를 들여 자신의 양자 이후에 황제가 되는 안토니누스피우스 황제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 신전은 에베소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띠는 유적이다. 최근에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과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도관, 분수대, 목욕탕
유적지 유물 가운데 2천년전에 사용하였다는 수도관이 있다. 흙으로 만든 토관인데 그 당시에 이런 수도관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물을 잠그는 수도꼭지는 없었고, 계속 물이 흐르게 되어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만든 분수대도 보였다. 그리고 목욕탕(냉,온,열탕)의 유적이 남아있었고, 바닥에는 오늘과 같은 모양의 타일까지 깔려 있어서 당시 문명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공중화장실
공중화장실 아래에 배수망으로 연결된 수로가 흐르며, U자형 구멍으로 용변을 본 후에 변기 앞에 흐르는 물로 그것을 깨끗이 씻어낸다. 이 화장실이 오늘날 비데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셀수스 도서관 : 두란노 서원으로 추정되는 곳
셀수스 도서관은 에베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이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이 도서관은 외부가 16m 높이에 넓이가 21m이고, 실내가 16m x 10m인 대규모 건물이다.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이 건물에 대한 복구는 1970년에 시작하여 1978년에 끝났다. 이 도서관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두란노 서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고라 (장터)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회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아고라는 성역과 대조적으로 속세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대부분의 토론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 또 장터(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17:16)
이 장터 주변에 7개 이상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고기와 많은 물건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후에 판매된 것이었다. 그래서 고기 등 음식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고린도 지역에서도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10:25-28)
바울은 너무 많은 신전 때문에 우상에 대한 문제 우상(고전8,10장)과 관계된 음란(고전5장)과 성만찬이 우상의 전(殿)에서 먹고 마심의 자리같이 되는(고전11:21) 같은 악영향을 고린도전후서에서 많이 다루고 있다.
익투스 (ΙΧθϓΣ)
지금까지 본 것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하거나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다. 세상적인 쾌락과 편리함, 인간적인 지식과 인본주의의 사상에 젖어 살아가던 사람들의 유물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신앙 때문에 핍박받던 자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익투스”(ΙΧθϓΣ)이다. 익투스는 히브리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의 머리글을 모으면 이 단어가 되는데 “익투스”는 “물고기”를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글을 나타내는 표식이 길바닥에 여러 개 새겨져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화려함도 없어 길바닥에 새겨져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밟고 지나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사람들이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약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이다.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 그토록 핍박을 받던 초대 기독교가 불과 300년 뒤인 AD 313년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지 않았던가?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예수사랑의 능력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옵소서.
마리아 기념교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와서 살던 집터에 마리아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에서 AD 431년 제3차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세계교회사에 있어서 1-4차 종교회의가 모두 터키에서 개최되었는데 이곳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개최된 제3차 종교회의에서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일으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하였다.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그 이후 네스토리우스는 선교에 힘을 쏟았고, 네스토리우스의 선교로 인하여 중국에 기독교(景敎라고 함)가 전래되었고, 한국과 일본에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죽었는데,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념교회이다.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베소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섬(성경에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
사도 요한 무덤 교회는 6개의 돔과 130m의 길이 십자가 모형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대리석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전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좌측 복원도 참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탕, 장례식 터 등이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을 ‘핍박의 문’이라 부르는데 이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한 때 핍박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돌을 가져다가 지었다고 한다. 이 문을 만들 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거대한 로마의 정치적인 힘,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적인 힘에 비하여 초대 교회시절에는 너무나 나약하게 보였다. 밟으면 밟히고, 뽑으면 뽑힐 수밖에 없는 연약한 들풀과 같았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야 말로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생명의 종교임을 스스로 공인하였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리고 저들의 포악한 손에 고난당하다 순교당한 선조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 마음들이 하나로 모여서 이 핍박의 문을 세운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영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님이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을 지펴주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다시 한 번 일으키게 하옵소서.
가죽종이 : 양 가죽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낼 때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당부한 내용이 나온다. 그 가죽종이가 양의 가죽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양의 가죽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다. 당시 애굽에서 파피루스라는 종이가 생산되었지만 애굽에서 파피루스의 외국 수출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때 양의 가죽에 쓴 것이다. 가죽에 글을 썼으므로 그 편지가 더욱 오래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게 된다.
배로 돌아오는 길에 이 지역의 특산품인 양가죽제품 판매 매장을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관광객들을 위하여 가죽제품을 소개하는 약10분간 간단한 패션쇼를 보여주었다. 자사제품을 입은 모델(직원)이 보여주는 패션쇼가 끝난 후 일행을 매장으로 인도하였다. 다양한 양가죽제품이 전시 판매되고 있는데 매우 가볍고 디자인도 다양하여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오늘의 순례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시 크루즈로 돌아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매우 힘든 하루였으며, 계속되는 순례 일정으로 피곤이 몰려온다. 내일 그리스 아테네 유적지를 순례하고, 모레 이태리 로마의 유적지를 돌아보면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 성도들이 보고 싶다. “하나님,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