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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0-13 바보같은 성도로! 2018. 3. 25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요.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모든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왕을 선택하라고 말하면, 누구나 다 세종대왕을 선택합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자랑거리인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전 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조선왕조 최고의 왕으로 등극하는 데에는 드러나지 않은 한 사람의 희생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세종대왕의 맏형이었던 양영대군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였던 태종에게는 큰 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왕위를 물려받기 힘든 첫째 왕자가 아니었고 네째 왕자였습니다. 흔히들 양영대군은 주색을 즐기고, 풍류를 좋아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역사에 숨겨진 사실입니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명필이었고, 문장가였으며 학문이 깊은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재능을 숨겨 버립니다.
양영대군은 자신의 동생이자 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 가지고 있었던 인물의 비범함을 보고 자신은 왕위 싸움에서 멀찌기 뒤로 물러 나 버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미친 척 하기도 하고, 그리고 일부러 술과 여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부왕이 차기 왕위를 물려줄 왕자를 선별함에 있어서 자신을 숨겨 버립니다.
만약 자신이 나서서 왕위를 가지겠다고 하면,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발생하겠지만, 자신이 바보처럼 보이고 뒤로 물러 남으로서 동생 충녕대군이 왕이 되는데 일조를 합니다. 그렇게 형들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이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으로 조선 왕조에 빛나는 인물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알면서도 바보처럼 모르게 참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하고, 잘못한 것이 없지만 참아야 하고, 내가 손해가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것을 용납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한 사람이 입을 닫고, 내 한사람이 바보가 되고, 내 한사람이 그렇게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복음전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부분을 보면 몇 가지 어리석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2)하늘의 지혜가 없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3)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4)감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돈을 버는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어리석다, 바보 같다”고 말합니다. 제가 판단하건대 요즘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동네북입니다. 흔히 말하는 호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받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의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박해사를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고 기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올곧게 실천하였던 성도들을 2세기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한 줄 아세요?
2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이유를 어떻게 말하였느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근친상간범, 가족파괴범, 식인범”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모여서 호칭하기를 <사랑하는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니, 분명히 부모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한 형제요 자매들라고 말하면서 나기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근친상간”하는 더러운 놈들이라고 핍박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배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기네들끼리만 모여서 만찬을 먹고 마신다고 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몹쓸 사람”이라고 박해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두고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범이라는 죄목은 더 더욱 가관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성찬식에는 무엇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찬식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몰래 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살이라고 말하고 먹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라고 말하면서 뻘건 음료를 마십니다. 이런 모습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잡아서 피와 살을 먹는 ‘식인범’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의 성찬식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였던 당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허황한 바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현실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여 졌습니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고 모진 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복수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바보 같은 모습에 대해 처음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바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행동에 그들이 감동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바보로 취급되어도 괜찮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이며 진리라는 사실에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우리더러 바로라고 말하더라도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됩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바보가 될 이유가 없는 바울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이에요? 보세요.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문이나, 학문이나 모든 면에서 모자랄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때문에 비천해지고, 어리석게 되고, 매를 맞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 크리스톤’인데, 이 뜻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바보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자신은 바보가 되어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바보로 취급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바울은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바보로 살아간다고 당당하게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바보처럼 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손해 볼 필요 없습니다. 내것을 악착같이 챙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명제가 붙는다면,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목적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나는 낮아 져도 되고, 나는 조금 손해를 보아도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노릇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런 일입니다.
손자한테 지는 할아버지가 많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한테 절대 못 이깁니다. 정말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손주에게 일부러 져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나 어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져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할아버지나 어른들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있기에 져주기도 하고, 어리석은 일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때문에 뺨을 맞아봤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문전박대를 받아봤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받아봤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직장에서 차별을 받고 손해를 받아 보았습니까? 저는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예전에 주일학교 전도사를 할 때에 주일학교 학생 집에 찾아 갔다가 불신 아버지로부터 멱살 잡히고 뺨 맞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창피와 모욕을 당해 보았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나를 모욕하고, 나에게 창피를 주고, 내 뺨을 때리는 그 사람에게 증오와 복수의 마음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던가요? 절대 아니지요.
신기하게도 도리어 그 사람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더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뺨 맞았다고 칼을 들고 나가는 복수와 증오심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하여도 왜 증오심과 복수심이 불타오르지 않나요?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은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로를 위해서 바보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영광인줄로 생각하시길 축복합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요? 모세입니다. 모세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서 죽을 위기를 겪고 버려집니다. 그리고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이 되었다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연단을 받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성경은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으며 바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바보같은 모습입니다. 에굽의 은금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이해 받는 수모가 어떻게 더 큰 재물이 됩니까? 시모와 멸시는 수모와 멸시 뿐입니다. 그것은 절대 은금보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을 위한 수모와 멸시를 세상의 은금보물과 바꾸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모세의 바보같은 행동에 하나님이 모세를 들어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영국 속담에 “One fool at least in every married couple”(결혼한 부부의 어느 한쪽은 바보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한 두 사람이지만, 가정을 이루고 있는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똑똑하면 가정이 편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나요? 남편이든 아내이든 한 사람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한쪽이 약간은 모자라고, 모르는 척하고, 이길 수 있지만 져주는 자세를 가질 때에 가정이 편합니다.
부부가 아니라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쪽이 바보가 되어주는 것은 최상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강한 자만 바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만이 스스로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절 보세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더러운 찌꺼기 같이 자신을 낮춘다고 말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바보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낮아지는 자세가 되고, 내가 만물의 찌꺼기 같이 자신을 버리게 되면, 나는 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얻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후 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고 약자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강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므로 완전하고 강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내가 바보가 되므로 사람들을 지혜롭고 강하게 하였습니다.
10하반절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바보가 되니 다른 사람들이 지혜롭게 되고, 내가 약해지니 다른 사람이 강해지고, 내가 낮아지게 되니 다른 사람이 존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낮아지는 자들이 받게 되는 놀라운 평가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이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심으로 말미암아 가장 거룩한 구원을 완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이런 모습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울은 바보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인들은 지혜롭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복음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납니다. 내 자아가 죽음으로 내가 새 삶을 얻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면서 바보가 되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내가 약재질때에 내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은 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다 잃어 버린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알리바바’의 마윈회장이 얼마 전 연세대학교의 ‘2018 글로벌 지속가능발전 포럼’에서 강연했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어 보면 그냥 첨단 IT기업의 회장이 아니라 신앙인같은 내용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나는 확신한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식을 이길 수는 있지만 지혜를 이길 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또 그는 “인공지능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EQ(감성지수)를 높이고, 지고 싶다면 IQ(지능지수)를 높여라. 하지만 존경받고 싶다면 LQ(사랑지수)를 높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혜와 사랑이 무엇입니까? 지혜와 사랑은 근본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의뢰할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고,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과학과 기술과 지식과 정보를 좇아가다보면 패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승부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첨단 지식만 좇아가다보면 인공지능 ‘AI’에게 질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잃게 되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노인이 묵상을 마친 뒤 물속에 살 가망이 없이 떠내려가는 전갈을 발견합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해주려고 했지만 전갈은 침으로 노인을 쏩니다. 노인은 본능적으로 손을 거둡니다.
몇 분이 지난 뒤 노인은 다시 전갈에게 손을 뻗쳤지만, 전갈은 꼬리의 침으로 노인을 찌릅니다. 전갈에게 쏘인 노인은 손이 붓고 고통스런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 때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말합니다. “이보시오 노인장, 사납고 흉측한 전갈 때문에 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오. 배은망덕한 전갈을 구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시오?”
그때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니다. “침으로 쏘는 건 전갈의 본성이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전갈을 구해주고자 하는 내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오”
나우웬이 말한 내용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전갈에 쏘이면서까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전갈을 건지려고 했던 노인은 예수님이고, 끝까지 자신을 구해주려는 노인을 쏘고 있는 전갈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바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을 닮은 우리는 바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항상 어리석은 바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바보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지혜 있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