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9장1절-15절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한 프랑스의 비평가의 글귀가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삶의 현장에서 펼쳐진, 또는 이미 정형화된 삶의 패턴 안에서 자기 합리화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표어인 "생각하여 보라"는 마태복음 6장 28절에서 인용된 구절입니다.
특별히 영어성경으로 이 구절을 보면 "See the lilies of the field grow"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보다'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관사 the와 '들'='Field'입니다. 아무도 돌보지도 않는 황량한 들판에 활짝 펴있는 백합화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분명 황량한 들판에 거칠게 펴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들 중에 '그 백합화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유독 눈에 보이는 그 백합화들을 입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해 본 황량한 곳에 피어있는 꽃들이었을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름답게 필수 없는 상황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피어있는 꽃들이 누구를 비유하며 가리켰던 것일까요?
새들처럼 먹을 것을 위해 쌓아 놓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걱정하지 않는 이들 아닐까요? 반대로, 마태복음에서는 ‘걱정’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반대로 믿음이 있어 걱정하지 않고 오늘에 충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필요한 것을 아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필요를 쫓아다니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필요를 쫓아 살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믿음으로 살것인가?’
이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then "be given"
‘쫓아가서(Run after) 채우지 않고, 추구(Seek)하면 주어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리하면 생각하는 데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므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사는 데로 생각하면, 필요를 쫓아가는 삶, 이로 인해 필요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도 철학도 바뀌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본문은 에스라가 2차 귀환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난 후,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이 기도문 이전에 에스라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옷을 찟으며 통회를 합니다.
9장 1-2절
"이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사람들과 여부스 사라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여기서 방백들과 고관들은 고위 관직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즉, 모범을 보여야 할 리더들이 가장 앞장서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인과의 결혼을 행하고 전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한대로 생각하며 살아갈까요? 본문에서는 상반되는 두 부류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입니다.
4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 까지기가 막혀 앉았더니"
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음을 경험한 자들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들에 피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 지’ 그리고 백합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 않았음을 경험한자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를 입어본자들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값없이 거져 주신 것’ 아닙니까? 그 은혜에 우리가 한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8-9절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박힌 못 같이 피하게 하시고, 울타리를 주셨음을 기억한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은총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말씀을 통해 기억한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총, 십자가를 통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자유케 하신 은총, 죽기를 두려워 하며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 주신 그 은총을 기억한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칭의를 생각합시다. 우리의 자격과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러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택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임을 잊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주목해 볼 것은 에스라는 이 죄악을 그들의 죄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죄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계속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13절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지금 여기 남아있는 이들은 기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조차 모두 죽임을 당했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더 적게 벌을 내리시고 살려주신 이들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남은자'로서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선택받은 이들일 뿐 아니라 몇몇 학자에 의하면 에스라7장에서 언급되었듯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정동안, 남은 자들로서 첫째달 초하루부터 다섯째달 초하루 즉 4개월간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도록 훈련된 자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그들의 조상이 범한 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함으로 격은 죄악의 수레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조상들의 죄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고 통회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하기 보다, 그들의 환경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는 삶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받아 남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전혀 구별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4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리오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필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환경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는 자로 살아, '남은자'로서 즉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통혼하며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로,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도리어 죄의 굴레 속으로 다시 들어간 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언 26장 11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에스라를 쫓아 은혜를 입고 선택받은 이들의 삶이 마치 개와 같고 돼지와 같았던 것입니다.
잊지맙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할 때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인류가 반복해온 죄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개가 토한 그것을 도로 먹는 어리석은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한데로 살아가기 보다, 사는데로 생각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부...
‘내 감은 눈안에 이미 드러와 계신 예수님
나보다 앞서 나를 찾아 주시네
내 뻗은 두손위로 자비하심을 내려주시니
언제나 먼저 나를 위로 하시네
내 노래 가운데 함께 즐거워 하시는
늘 나의 기쁨이 되시네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택해 잡으시고
눈물 거두어 빛살 가루 채우시니
그분은 내 자랑, 나의기쁨, 나의 노래
나의 전부 되시네‘
주님...
이러한 간증과 고백이 넘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늘의 시민권자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중 나는 새를 보며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선택을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하나님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삶이게 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