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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9~14)
목사님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와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는 준비하기가 더 쉽지 않았습니다.
제목과 본문을 세 번 바꿨습니다.
담임목사님께 “주보에 제목과 본문을 이렇게 올려주십시오”라고 문자를 보냈다가, 제목과 본문이 바뀌어서 새로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약간 혼선이 있어서 주보에 본문과 제목이 잘못 나갔습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교훈을 얻을 차례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거, 자칫하면 설교가 아니라 강의가 되기 쉽겠다’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죄에는 이러, 이러한 종류가 있다, 사죄란 무엇이다, 이런 것을 조직신학에서 죄론, 속죄론이라고 하는데 그런 강의가 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작년 상반기에는 주기도문 강해설교를 했고, 하반기에는 십계명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사도신경 강해설교를 하고 있는데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것은 설교가 아니고 설명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이렇게 합시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가 기본적인 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니까 ‘이런 뜻입니다’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일 오후예배나 수요예배에서는 그런 교육 목적의 설교, 강의형 설교가 적합하고,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낮예배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것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자주 갖는데, 죄의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려면 더욱 그렇게 될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작년에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부분에서 죄의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설교노트를 보니까 1년 반 전인 작년 5월 30일에 그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의 원고를 읽어보니까 죄 문제에 대해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다 적혀 있었습니다..
죄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예화들도 그때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대해 설교를 해야 하는데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한참 생각을 하다가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말씀 드리면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은 존재들입니다.
죄를 용서 받은 우리는 먼저 그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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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 죄가 깨끗하게 씻김을 받았다’ ‘죄 사함을 받았다’ ‘용서를 받았다’ 하는 확신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사도신경을 가지고 제대로 신앙을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까지 와서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데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5절은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뿐만 아니라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이와 같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를 ‘사죄의 종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원래 로마천주교의 신부였고,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나 사죄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수도적 삶을 살더라도 내면에서 솟는 죄악된 생각과 감정을 다스릴 수는 없다'며 괴로워했습니다.
어느날 수도원의 탑에 올라가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이때 루터가 매달린 말씀이 시편 22편이었습니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죄 사함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탄식입니다.
그 탑에서 루터는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탑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그 탑은 없어졌는데 탑이 있던 자리에 지금 돌무더기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다음 주일이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죄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니 가지셔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가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의 1절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로 끝이납니다.
1절 뿐만 아니라 2절, 3절, 4절이 모두 같은 말로,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라는 말로 끝납니다.
후렴은 더욱 강하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해 주셨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는,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저는 종종 사도신경과 감리교교리적선언을 연결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감리교교리적선언은 네 번째 조항에서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읖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릎 믿으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감리교인은 죄를 용서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리적 선언의 해설서를 보면 죄를 용서하심이 은혜의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죄의 확신이 있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작년에 주기도문의 “우리 지를 사하여 주시옵고”에 대해 말씀드릴 때 제 신학교 동창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좀 특별한 내력을 지니고 있고 퍽 가깝게 지낸 동창생입니다.
이름이 이필은(李弼殷)인데요, 30여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오늘 그때 드린 말씀의 뒷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분은 원래 북한의 해군대위였는데. 1965년 12월에 서해상을 통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온 분들을 지금은 탈북민이라고 부르는데 그때는 귀순용사라 부르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이필은 대위도 큰 환영을 받고 대한민국 해군대위로 임관해서 해군본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상관이 크리스천이었는데 그분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죄인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 갈등이 큰데 죄 문제까지 겹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락기도원에 들어가서 밤을 새면서 몸부림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예수님을 통해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귀순수기를 써서 출판했는데 이 부분의 제목을 “참된 자유를 찾다”라고 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온 것은 자유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자유, 외형적인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은 참된 자유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유인, 다시 말씀드려 속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자유인인척 하는 사람,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나라에서 이필은 대위를 보고 ‘남한의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은 북한 해군장교였다가 남한의 해군이 되었으니 배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당시 배와 비행기에 대해서 공부하는 조선항공과라는 학과가 있었는데 그 학과에 가서 위탁교육을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이필은 대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북한 해군장교였다가 남한 해군장교가 된 것도 변화이지만,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 더 큰 변화입니다. 죄인이었다가 용서 받은 죄인이 된 것이 근본적 변화입니다. 저를 신학교에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1967년에 연세대학교 신학과 2학년에 편입을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군 생활을 하면서 계속 진급해서 대령이 되었고 해군 정훈감이 되었습니다.
해군본부교회 장로로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간에 문제가 생겨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귀순 초기에 여러 가지 갈등이 심했는데 술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술을 너무 많이 퍼마신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병이 깊어져서 이제 소생할 가능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졌을 때 군목이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이 대령님, 이 대령님은 이제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이필은 대령은 힘을 다해서 “군목님, 염려하지 마세요” 하고서 얼마 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 눈을 감은 것입니다.
그 군목님은 성결교 목사님이신데 그 분에게 “목사님, 제 동창생을 천국으로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하나하나 확인하고 나서 믿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고서 그 다음에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사죄의 확신을 가졌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롭게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대로 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정하기 위해 성경에서 사죄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9절 이하에 여러 말씀들이 나오고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여러 번 읽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셨다고, 곧 죄 사함을 주셨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본문으로 택하게 되었습니다.
9절, 우리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야합니다.
죄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말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입니다.
‘하마르티아’는 ‘빚맞추다’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죄의 획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0절,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1절,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해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2절,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에서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13절,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골로새서는 옥중서신 거운데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서 쓴 편지 가운데 하나인데 사죄의 확신이 있으면 감옥에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도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인데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한”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한다는 말이 유난히 자주 나옵니다.
대강 세어보아도 열 번이 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4장 4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입니다.
사죄의 확신이 있으면 감옥 안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세리장, 요즘 말로 하면 세무서장입니다.
부자입니다.
점잖은 척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왜 체면 불고하고 나무에 올라갔을까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을까요?
그에게는 죄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본능적인 죄의식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지요.
그 위에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동족의 재물을 갈취해서 로마인들에게 바치는 일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가복음 19장 7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 그 예수님이 자기가 사는 여리고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적극성을 발취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오늘날 교회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즐, 소외감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돌무화과나무의 역활을 해야 합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가복음 19장 8절의 말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이 말대로 행했을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삭개오의 이야기가 성경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눅 19:9)
10절의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습니다.
속죄의 확신은 천국의 입장권입니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화평을 누리며 살아야합니다.
우리나라에 탈북민들이 3만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탈북민들은 남한에 오면 먼저 조사를 받고 그 다음에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남한 사회에선 사는데 필요한 일들을 배웁니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올 때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는데 그때 매우 감격한다고 합니다.
제 사무실에 몇 해 전까지 탈북민 자매가 한 분 일하고 있었는데 이 분이 한 번은 “목사님, 저 남한에 와서 두 번 울었어요.” 했습니다.
첫 번째는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라고 합니다.
‘아, 내가 정말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구나!’ 하면서 울었달고 합니다.
그 다음은 언제냐고 물었더니 여권을 받았을 때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여권을 받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여권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는데 여권 첫 장에 인쇄되어 있는 글을 읽고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권을 열면 제일 앞장에 이런 말이 한글과 영어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소지인이 아무 지장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대한민국 외교부장관
이것을 읽고, 아, 대한민국이 나를 이렇게 위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또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여러분과 저를 정부 이상으로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보호하고 인도해 주십니다.
탈북민이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에 대해 이렇게 감격했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모범적으로 잘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재입북’이라고 하는데 치근 10년 사이에 재입북한 사람이 31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천국시민이 되었는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탈북민이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심각한 것이 마약 범죄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 가운데 마약을 흡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필로폰을 북한에서는 빙두라고 부르는데 빙두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의약품이 많이 부족한 형편인데 아플 때 빙두를 흡입하면 일단 고통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또 여러 가지 이유로 마약이 널리 퍼져 있는데 북한 당국도 최근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민들 가운데는 북한에 있을 때 마약을 흡입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탈북민 범죄의 34.4%가 마약사범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천국시민이 되었는데 예전에 하던 좋지 못한 습관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교회력, 또 우리 신앙생활의 단계에 따라서 주제별로 체계적으로 잘 엮어져 있습니다.
찬송가 250장에서 282장까지는 회개와 용서를 주제로 한 찬송들입니다.
속죄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는 찬송들입니다.
283장, 284장, 285장은 거듭남을 주제로 한 찬송들이고, 286장에서 289장까지는 거룩한 생활을 주제로 한 찬송들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찬송들입니다.
그 가운데 283장은 오늘의 본문 가운데 14절의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만들어진 찬송입니다..
1절,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속죄함 받은 것을 기뻐해야 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2절,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내 맘이 새로워
주 뜻을 준행하면서 죄 길을 버리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준행하면서 죄 길을 버려야 합니다.
3절,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자녀 된 것을 곧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는 속죄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령님이 증언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마귀는 ‘너는 지금도 죄인이야’라고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4절,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내 주의 은혜 입으니 늘 평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속죄함을 받은 우리는 평안함을 누려야 합니다.
후렴을 보세요.
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잠시 후 봉헌시간에 이 찬송을 부를 것인데 여러분, 그렇게 살겠다고 서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찬미하면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으며, 사도신경을 가지고 힘있게 신앙을 고백하며 사죄의 획신 가운데 변화된 삶을 살기에 힘쓰고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그의 피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어린 양이신 예수님, 우리 죄를 사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죄 사함 받았다는 확신이 우리 가운데에서 나날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나날이 뜨거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진심으로, 힘있게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속죄함 사람답게 새롭게, 기쁨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여 부옵소서.
대속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