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高 중심의 기능공 양성책 朴대통령은 일찍부터 과학기술 개발과 기능공 양성에 관심을 가졌다. 1968년 1월 연두기자 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후반은 과학기술이 앞선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 오늘날 경제성장도 기술혁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화된 통론이다. 특히 숙련공은 경제발전의 원동력 이 되는 나라의 재산이며 보배다.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서는 국가의 안전보장도 기대할 수 없다. 기술자와 기능공은 바로 무기인 동시에 국가의 방패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이런 안 목에서 과학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朴대통령은 이런 취지에서 1973년「중화학공업 추진 선언」과 함께「전 국민의 과학화 선 언」도 했다. 그는『우수한 기술자가 5만명은 있어야 한다』면서 한 학교당 수억원씩의 특 별 지원금을 공고(工高) 등에 배정해 기능인력 양성을 독려했다. 공고생들을「조국 근대화의 기수」라고 격려하면서「3정주의(정직, 정성, 정밀)」를 강조했다. 朴대통령의 각별한 관심 아래 공고 중심의 기능공 양성책이 시행됐다. 기계공업을 육상하기 위해 금오공고, 부산기계공고 등 11개 특성화 기계공고를 1977년까지 만들었다. 공고의 교육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각 기업체로 하여금 공고에 선반을 기증케하는「선반보내기 운동」도 벌였다. 각 국영기업체 및 민간 대기업체에 공고 설립을 강력히 권했다. 포항공고, 광산공고, 수도공 고(한전 출자) 동아공고(동아그룹) 대림공고(대림산업) 등 여러 재단 사립공고가 생겼고 공 고를 못 세우는 곳은 직업훈련소를 만들어 기능사 양성에 열을 올렸다. 陸英修 여사도 서울에 정수 직업훈련소, 창원에 한백훈련소를 설립하였다. 각 도마다 직업훈 련소가 들어섰다. 朴 대통령은 지방 순시시에 현지에 있는 공고를 빼놓지 않고 들렸고 기능 올림픽 우승자는 올림픽 입상자와 같은 대우를 했으며 기능 경진대회 우승자는 국전 입상자 와 같은 대우를 하였다. 공고 학생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학에 가는 길도 마련하였다. 공고 졸업생이 같은 전공의 대학에 진학할 때는 아예 입학정원의 10%를 공고생에게 할당해 공고 졸업자들끼리만 경쟁 시켰다. 그리고 공고출신만 입학할 수 있는 구미의 금오대학, 창원의 기능대학도 설립하였 다. 금오대학, 창원 기능대학은 사범케이스이고 앞으로는 공고 출신만 입학하여 이론교육을 강화하는 특수대학을 증설할 계획이었다. 장차 전 문대학 중 우수한 학교를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켜 지방 중핵도시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교육제도 개편 이러한 구도하에서 보면 교육제도 즉 진학문제는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선 진 학문제는 중학교 졸업 후에 생긴다. 일반고교에 갈 것인가, 공고에 갈 것인가? 이는 공고 졸업 후 먼저 기술을 익히고 공고 졸업생만 다니는 우수한 대학이 지방에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들 대학은 공고에서 부족하였던 어학과 이론을 집중적으로 교육하여, 기 술은 각자가 원하는 전문화된 분야만 심도있게 최신 것까지 집중교육 받는다. 현장실습을 받아가며 4년간 교육받으면 현장 근무하는 데에 이상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며 현장에서 환 영받을 것이다. 이들 학교에는 정부 보조사가 있어 학비도 싸다. 공고 졸업기능사도 사기와 긍지가 높고 능력에 따라 출세할 수도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생에게도 문제는 달라진다. 공고전문학교가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기 때문이다. 일반 대학에 여러 단과대학이 있는 반면 공업전문대학은 공과계통만 있고, 그 공 과계통 또한 전문화되어 기계공업전문대학이나 전자전문대학으로 세분화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습기구도 많고 교수들도 우수하며 인원도 많다. 졸업 후에는 즉시 현장에 진출 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된다. 일반 종합대학은 연구요원 양성기관이다. 특히 서울대학 등 일부 명문대학은 대학과정이 없 어지고 대학원 과정만 남게 된다. 즉 치열한 경쟁은 고등학교 때가 아니라 대학 졸업 후이 다. 대학 때 열심히 공부해야만 명문 대학원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지방대학에서도 열심히 하면 명문 대학원에 진학이 가능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이유만으로 학생이 모여든 대학은 신수도가 생기면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신수도 내에는 대학 설립이 불허된 다. 대신에 신수도 주변 80km 내외의 중핵도시에 분산 배치될 것이다. 여자대학도 역시 변할 것이다. 대학을 나와야 좋은 신랑감을 고를 수 있다는 개념이 바뀌어 지도록 지도될 것이다. 외국 선진국처럼 21세기는 여자도 일해야 하는 세대가 된다. 대학은 공부를 하는 곳이고 습득한 지식은 나라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의미 에서 결혼하기 위해서만이 목적이라면 우수한 가정 주부로 교육되는 특수과나 학교가 신설 되어야 한다. 육아, 건강, 요리 외에 21세기는 가정에 정보장치가 투입되고 각종 기계, 전자 기기들이 도입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주부의 과학화」이다. 전기, 수도, 자동차 등의 간단 한 수리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컴퓨터 조작은 필수이다.
기능공 7,8만 양성계획 朴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및 공고생에 대한 애정과 격려로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 공고로 몰 려들었다. 1975년 부산 기계공고, 전북 기계공고, 금오공고 입학생의 67%가 중학교 성적 상 위 5% 안에 드는 학생들이었다. 중학교 수석 졸업자들도 이들 학교 입학생의 10%나 됐다. 당시 학생들은 이렇게 우수한 자질을 가진 데나 어깨에 붙인「조국 근대화의 기수」란 휘장 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았다. 기능올림 픽을 계속 제패했고 중동에 진출한 기능공들이 현지 언론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1970년대 말 한 연말모임에서 朴대통령, 鄭周永 현대그룹 회장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朴대통령이 鄭회장에게『중동에서 당신 덕택에 국위를 선양하게 됐다』고 치하하자 鄭회장 은『각하, 제가 외국말을 잘합니까? 외국인에 비해 능력이 더 있습니까? 우리나라 기술자가 외국 기술자보다 더 우수합니까? 다 기능공 덕택이죠』라면서 공을 기능공에게 돌렸다. 朴대통령은 이에 『그래, 맞아 맞아』하면서 미소를 띠고 공감을 표했던 일이 생각난다.
「2000년대 국토 구상」에서는 매년 7∼8만명의 공고 출신 기능사를 양성할 계획이었다. 참 고로 1977년 일본 공고 졸업생은 15만명 가량이었다. 기술자 양성 및 연구소 설립도 같은 맥락의 일인데 지면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 가지 에피소드만 소개함으로써 최고 통치 자로서 朴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을 기록코자 한다.
1978년경 결재를 받으러 가니 朴대통령이 한 정보 보고서를 보이며 『모 연구소 간부가 카 바레에 자주 나타난다는데 잘 하고 있는 거야』라는 꾸중 비슷한 말씀이셨다. 그래서 『각 하, 저는 밤늦게 야근을 할 때면 돌아가는 길에 이따금 그 연구소에 들렀다가 갑니다. 그때 마다 연구소 건물에는 전등불이 환히 켜져 있는 방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하고 답하니『그래, 나도 부산에 가면 부산 기계공고를 꼭 바라보게 되는데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더구만, 흐뭇했어. 연구하는 사람들도 머리도 식힐 겸 좀 놀 수도 있 겠지』라고 말해 이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또 한 예는『기술 정보는 어떻게 얻나』하고 물으시기에『일주일에 한번씩 아침에 다방에 모여 있는 기술자들로부터 얻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朴대통령이『건물이나 하나 얻어 모일 장소를 마련하지』한 것이 현「엔지니어 클럽」의 창립 동기가 되었다. 설립 기금도 주었다.
한국인의 가치관 한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고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의 가치관이다. 국민 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나라는 흥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밝은 내 일을...」모임에서는 이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의를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한국인다운 가치관의 확립 이 시급하다고 하면서 우려를 표명했었고 우리 모두 공감하였다. 『우리나라는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가치관이 일대 변혁기의 와중에 있다. 가문·가족 중심 의 사회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전통사상은 단절되어 버렸다. 지금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지 않으면 머지 않아 우리 국민은 통제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몇 가지 커다란 변동은 ○교수의 지적처럼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우선 한국 계급사회의 붕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한일합방 후에 양반·관료 등 지배 계급 이 없어지고 해방 이후에는 지주 계급이 사라졌고 6·25때는 살아남기에 급급해 막노동도 서슴지 않았다. 귀천이 없어지고 빈부가 없어졌다. 금화나 은화는 없어지고 엽전(葉錢)만 남 았다 하여 우리 스스로를「엽전」이라 부르며 천시했다. 「무계급」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엔 존경받는 사람이 없어졌고 관료가 되거나 돈버는 것이 출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때문에 학벌 위주의 사회가 되어버려 부모들은 자녀들을 좋은 대학 에 보내기 위해 소 팔고 땅 팔아 서울로만 보냈다. 1960년대엔 시골에서 소 팔아 대학 보낸 다고 대학을 상아탑 대신에「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사회 변동의 또 하나는「국민의 대이동」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일본 거주자·월남 자 등 약 4백만이 남한으로 유입됐었는데 6·25이후에는 더욱「서울로 서울로」현상이 두드 러졌다. 학생·상인·근로자 등 모두 서울로만 모여든 것이다. 학생이 공부를 끝마치면 서울 에 남았고 결혼 후에도 대개 서울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일제시대 40만, 1960년대 초 2백만으로 계획했던 서울 인구가 지금은 1천만명이 넘을 지경이다. 온 국민을 고향 떠난 유랑민(流浪民)으로 만들고 목적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 고 돈 버는 데만 열중케 하였다. 6·25때는 싸움에 이겨야 했고 지금은 돈을 벌어야만 했다. 법과 공익과 의리와 예의는 멀어져만 갔다.
다음은 정신문명의 대변혁이다. 8·15 후에 위대한 승리자요 우리의 해방자인 미군과 함께 미국 문명이 홍수처럼 들이닥쳤다. 주로 미군 사병을 통해서 들어왔다. 이른바 GI문화이다. 우리의 처지로서는 미군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요, 미국문화는 GI문화이든 아니든 본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물질문명이요, 개인주의이다. 우리의 정신공백, 사회의 대혼란 속 에 무비판적으로 흡수돼버린 미국문화는 너무 강력하여 우리나라 전통 정신·문화·사회질 서를 강타하였다. 어설프게 미국화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대변혁들이 최근 수십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당 시 박대통령은 이 문제를 아주 중요시하여 우리나라의 석학들을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여 깊이 연구케 하였다. 고 박종홍 특보는 기본이론을 다뤘고 연구기관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 원이 설립되었다. 장동환 특보는 국민학교 교과서부터 고쳐나갔다. 그래서 그때까지 국민학교 1학년 첫 번째 과정이「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에서「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나라, 나라 우리나 라」로 바뀌어 갔다.
박진환 특보는 새마을 운동 창시자인데 장관급부터 1주일간 새마을교육을 시켰다. 그후 대 기업 사장에서부터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넓혀갔다. 육영수 여사는 예지원을 세워 주부교육을 시켰고 박근혜양도 충효교육운동을 추진해 갔다.
2000년대 국토구상에서도 한국 국민의 가치관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특히 열심히 일하는 국민, 존경받는 근로자, 긍지를 갖는 중산층이 우리의 총자산이며 국력의 기 초라는 인식하에 작업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정신 개조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최근 미국 록펠러 재단은 우리나 새마을 운동을 세계 정신문화운동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박진환 전 특보에게 영문으로 집필할 것을 부탁하여 와서 스위스 소재 록펠러 별장에서 3개 월간 고생을 하였는데 결론에 가서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고민중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각 마을에서는 어제까지 새마을 지도자로 있다가 갑자기 5공 들어서 정화위원회 간부가 되고『앞 장서서 일합시다』하는 입장에서『잘못하면 고발하겠다』는 입장으로 바뀌어졌으니 결론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욕구의 4단계 1977년경 일본의 저명한 동경대 교수 이토카와 히데오를 중화학 기획단에서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그는 전후 일본의 로켓 개발을 주관했고 그후「인간조직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 를 발전시킨 학자였다. 그는 경제성장에 따른 인간의 욕구를 4단계로 구분하였다.
제1단계는 입, 제2단계는 수족, 제3단계는 눈, 그리고 마지막 제4단계는 머리라는 것이다.
1단계에서는 먹고살기에 급급해서 의식주 등 최소한의 본능만 해결해 주면 열심히 일하고 정부에 잘 따르므로 통치도 그만큼 쉽다. 60년대의 우리나라와 지금 북한의 경제사정이다.
2단계로 가면 역시 일은 열심히 하나 1단계보다 편하고 싶어해 손·발로하던 일에 재봉틀이 나 경운기 따위를 이용한다. 재봉틀이나 경운기 따위는 지금 당장은 없더라도 나중에 살 수 있고 TV·세탁기·음향기기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정부통제가 가능할 때다. 1970년 대의 한국경제 수준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눈의 시대인 3단계에 이르면 패션시대가 되어 사치와 허영심이 만연되어 아무도 만 족할 수가 없게 된다.
1970년대 일본의 모습이다. 정부로서는 가장 정책을 펴기에 힘든 단계이다. 사치와 낭비가 심해지고 허영심으로 인하여 서로 질시·불화하고 불평불만이 쌓여 결국 사회적 갈등으로 폭발한다. 그리하여 경제 사회가 혼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선진국 문턱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한 예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도 다가올 3단계를 슬기롭게 잘 넘기려면 정부 주도가 가능한 제2단계인 지금 (1977년)이야말로 국민 가치관 확립이 시급하다는 충고를 덧붙였다. 그 대책을 물으니 중산 층 특히 근로자의 가치관 확립이 가장 중요하고 그 방법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근로정신과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답하여 주었다.
정신교육의 중요성 마지막 단계인「머리」시대에는 이미 물질적 욕구는 충족시킨 후라 지극히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종교·예술·사상가들과 같이 좋은 쪽으로 갈 수도 있고, 반대로 히피·허무주의자·자살자 등 나쁜 쪽도 있다. 물질적 욕구가 없으니 생산에는 도움이 안된다. 3단 계는 물질 만능, 황금 만능의 단계요, 4단계는 정부의 통제가 힘든 단계이다.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은 똑같다. 3단계와 4단계를 떼어놓지 않고 합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3단계 사람에게 가치관을 주어 물질적 욕구를 반감시키는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서 여기 A·B·C라는 세 여직원이 있다고 하자. A가 갖고 싶었던 핸드백을 사서 기분이 좋았는데 B가 내 것은 수입품이다라고 하면 당장 자존심이 상하게 될 것이다. C가 내 것은 세게 최고의 이탈리아제라고 하면 A는 물론 B까지 기분이 상하게 되는데 C 한 사람만 기 분이 좋다. 이 현상이 3단계인 눈의 단계이다. 여기서 A가 똑똑하여 B나 C의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를 불건전하다고 느끼게만 되면 A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남은 돈을 저축하고 국산품 애용의 긍지를 가지면 되는 것이 다. 우리 나라 쌀을 먹으며 농민을 생각하고 긍지를 가지면 된다. 결과적으로 만족하는 중산 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문제는 어릴 때부터의 교육이요, 성인에 대한 정신교육이 다. 자조·근면·절약(저축)·협동에 대한 새마을 정신교육이 그 해결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맺음말 얼마 전에 1992년 서울시 예산이 7조원이라는 기사가 났었다. 약 1백억 달러. 서울시민 1인 당 70만원, 가족당 연 3백만원이다. 서울시민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더 잘했다고, 더구나 서 울이 살기 좋은 곳도 아닌데 이런 막대한 세금을 써야 하는가? 인구 1천만명의 서울시가 괴물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서울시 예산안에는 공해측정기구 구입 비가 30억원이나 포함되어 있다. 대기측정 및 수질측정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단적 으로 서울시의 대기나 수질이 위험수준이라는 증거이다. 환자가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진 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안개가 자주 낀다. 공기가 잘 유통이 안되는 것이다. 여기 에 자동차가 더 늘면 늘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교통체증도 더욱 심해지는데 이는 서울이 동맥경화증이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농촌의 피폐화에 따라 서울로 서울로 모여드는 물결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50년 후 1백년 후의 자손들은 어떻게 될까? 한편 행정수도 건설비가 엄청난 비용이라는 오해가 있다. 신수도의 규모는 처음엔 인구 25 만을, 그리고는 인구 50만을 목표로 한다. 창원의 크기이다. 계획대로 1980년 초에 시작하였다면 지금쯤은 그 윤곽이 완전히 드러났을 것이다. 그 후 12년 동안 새로 건설한 관공서, 대기업체를 위시한 각 업체의 본사 신축, 서 민주택 등이 현 서울이 아닌 신수도에 있을 것이다. 과천의 종합청사, 법원(1978∼1979년에 예산은 확보되었으나 朴대통령이 신수도 문제로 연기토록 보류) 대통령 관저, 그리고 각 대기업체의 본사(63빌딩 금성사 현대 삼성 등), 분 당 일산 등의 신도시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올림픽을 위한 막대한 투자는 신수도 건설에 활용되었을 것이고 (朴대통령은 1996 년 신수도로 이전하면서 올림픽을 열러보자고 하여 신수도 계획에는 올림픽촌이 짜여져 있 었다) 독립기념관은 신수도의 민족 박물관이 되었을 것이고 예술의 전당은 3만평의 문화지 구 내 문화전당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신수도의 공항은 청주로 정하여 부지도 확보해 놓았었다.
신수도 예정지의 반경 10km 내 땅은 정부가 확보,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하여 불하될 계 획이었으므로 초기 투자만 되면 신수도 건설은 흑자건설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1977년 7월「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 공포된 것은 이 대문이다. 1980년에 계획을 확정하고 1996년까지 1차 건설 및 이전을 끝낼 예정이었다.
1982년 全斗煥 전 대통령도 행정수도 건설안에 대한 설명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 나 그 보고의 결과는「선진조국의 건설」이라는 기치와 함께 올림픽을 1996년에서 1988년으 로 8년 앞당긴다는 쪽으로 전력투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 쪽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북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전선이 38선이 아니라 우리나 심 장부인 서울이었다.
계급투쟁적인 민주주의가 선봉장이 되었고 의무를 잊어버린 민주주의가 합세하였다. 사회 불안, 정치불안을 조성하여 88올림픽을 저지시키자는 전략이었다. 투석과 최루탄이 맞섰다. 우리 정부는 올림픽을 담보로 잡혀 제대로 데모 진압을 못한 반면 데모대의 전술은 향상되 었고 폭력화의 양상을 띠었다. 매일같이 우리나라 데모현장이 뉴스망을 통해 전세계에 전해 졌고 이 때문에 올림픽의 취소문제까지 거론됐다. 그러나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의 대거참여로 올림픽은 무사히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이었고 기록도 훌륭했다.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선진국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맛보았다. 그리고는 사전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사치와 과소비의 단계로 돌진하였다. 개인주의는 공 익을 잊은 이기주의로 변하여 갔다. 봉급이 적다고 아우성쳤다. 물가는 뛰기 시작하였다. 일 하는 열의는 식어만 갔다. 올림픽 이후에도 노동쟁의는 기승을 더해갔다. 그 결과 생산성은 떨어지고 우리나라 제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선진국의 꿈은 도리어 멀어져만 갔다. 외국 사람 누군가가『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고 적절한 지적을 했다. 그는 동경올림픽의 후유증을 경험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살까?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5000년이나 나라와 우리말을 지켜온 강인하고 착하고 근면 한 민족이다. 국난이 있을 때에는 의병으로 조국을 수호하였다. 6·25때는『너는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했나?』라는 포스터를 보고 전쟁터로 나갔다. 60 년대, 70년대에는「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슬로건 아래 허리띠를 죄고 땀을 흘렸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잘잘못을 따질 시간적 여유도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몇가지 사항을 자문(自問)하게 된다.
첫째, 2000년대의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
둘째, 지금 나와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점이 나로 하여금 용기를 내어 이 글을 감히 쓰게 한 동기이다. 현 서울을 그대로 두고 국토개발을 다루는 것은 근간(根幹)을 해결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 제만 다루는 것이라는 점과 지금이라도 서울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 좋은 기회(시기, 비용 등)를 놓쳤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강조하면서 이 글을 끝마친다. 아울러 과거 본 계획안 작 성을 위해서 밤낮없이 노력해주신 관계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