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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2-17(968) 신앙생활의 장난과 진실 2019. 3. 24.
“장난”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시지요? “장난친다, 또는 장난 치지마라”는 말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장난이란 말이 <불장난>이란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 단어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장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국어사전의 뜻은“①어린아이들의 놀음놀이. ②실없이 하는 일. ③짓궂게 하는 못된 짓”이라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그냥 단순하게 장난치다가 친구를 죽이거나 궁지로 빠뜨리는 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금 보여지는 이 사진이 그런 내용입니다. 작년에 일어난 사건인데, 17살 또래 여자 아이 두 명이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뒤쪽에서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길가에 걸어가던 친구가 도로 쪽에 걸어가던 친구를 버스 쪽으로 밀어 버립니다. 순식간에 밀려 버린 도로 쪽 여자아이는 달려오는 버스 뒤바퀴 쪽으로 머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바퀴 앞으로 머리가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퀴 옆면에 부딪히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이 비디오가 공개되자 친구를 버스 쪽으로 밀은 여자에게 수많은 비난이 쏟아 졌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아이가 하는 말이 “장난 친다고 친구를 밀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폴란드 경찰은 다르게 판단합니다. 폴란드 경찰에서는 친구를 버스 쪽으로 밀어 버린 여자 아이를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하여서 실형을 살게 하였다는 외신 뉴스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안 됩니다. 장난은 그저 가볍게 모두가 웃고 넘길 수 있는 단계에 머물 때에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를 넘어가면 장난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폭력이고 살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신앙생활의 장난과 진실”입니다. 제가 아주 완곡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래 생각하였던 설교 제목은 “신앙생활에서 장난치지 맙시다”라는 다소 과격하고 직설적인 제목입니다.
제가 목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신학교와 노회와 또는 여러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마치 장난처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난이 무엇이에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장난입니다. 장난치다가 재미가 있으면 더 하고, 하다가 재미가 없으면 금방 때려치우는 것이 장난입니다. 이 장난하다가 저 장난으로 한 순간 바꾸어 버리는 것이 장난입니다. 그래서 장난질한다고 말할 때에는 진중하고 무거운 목적이 아니라, 가볍고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상황을 두고 장난질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장난처럼 행동하시는 분들이 있습디다. 가볍게 장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앙생활이 왜 문제인가요? 하다가 재미있으면 좀 더 하고, 하다가 재미없으면 금방 실증을 느껴 때려치우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장난! 이런 장난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나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행동입니다. 신앙생활은 거룩함입니다. 신앙생활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장난질에 자신의 생명 걸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단순한 장난질에 생명 걸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어때요? 신앙생활에는 생명을 걸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장난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에 재미가 없다. 기도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교회에 다녀 보아도 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죄송하지만, 생명을 걸고 진중하게 신앙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난스럽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모양새로 신앙 생활하니 생명의 역사가 없는 거에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 하지 않으니까 풍성한 열매가 없습니다. 내가 대충대충 장난처럼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장난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신앙생활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마당만 밟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택 현관문 앞에 사과 한 상자가 놓여져 있습니다. 사과 박스 겉면에는 큰 글씨로 “김철민 목사님께”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이 저에게 사과 한 상자를 선물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과박스를 열어 보니 안에는 사과는 하나도 없고 빈 박스뿐입니다. 이때 빈사과상자를 통해서 느낀 제 감정이 어떠하였을 것 같나요? 정말로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진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예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제가 이런 일을 겪고서 여러분들에게 말했다면,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양반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목사님에게 실없는 장난을 친 참 못된 양반이네”
사과박스 선물을 선물 받았는데, 박스만 있고 사과 알맹이가 하나도 없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사람 가지고 장난을 치고, 농락당한 것 같아 참 기분 더럽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마당만 밟는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왔다고 말하면서 예배는 안 드리고 자기 일만 하고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안 만나고 사람들만 만나고 돌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마음이 따라 오고, 정성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경배하러 와서 얼굴만 쏙 내밀고 그냥 돌아갑니다. 오늘날 쉬운 표현으로 말하면, “교회당 문턱만 밟고 가는 사람”입니다.
특히 12상반절 “내 앞에 보이러 오니”라는 문구를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내 앞에 보이러 오니”라는 문구를 세 글자로 줄이면 어떤 단어가 될까요? 그것은 <눈도장>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러 왔으면서 경배는 안하고 눈도장만 찍고 가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 눈도장을 찍습니까? 딱 한 가지 경우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고자 할 때에 눈도장을 찍습니다. 눈도장을 찍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위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눈도장이 쉽게 찍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먼저 선점합니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눈도장이 찍히는 시간대를 잘 구분하여 등장합니다.
눅 14장에 보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석과 말석을 놓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상석으로 불리는 높은 자리가 어떤 자리에요?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반대로 낮은 자리인 말석은,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석진 자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나를 각인시키기 위해 상석에 앉기를 원하고, 눈도장 찍는 것을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눈에 보이려고 교회에 나오는 분이 되지 마십시오. 눈도장 찍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대형교회에서 장로투표를 공고하고 나면, 그때부터 장로직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이 선거작전에 돌입합니다. 본인과 전혀 상관없는 부서에 얼굴을 내 밀고,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모임에 일부로 시간을 내어 참석하고, 또한 참석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일봉을 선뜻 내어 놓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각인시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그런 분들은 교회의 장로라는 중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도를 진심으로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분이 장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복된 교회가 되는 것이지, 사람의 눈이나 의식하고,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기를 원하는 분은 교회 장로로 뽑을 것이 아니라, 시의원이나 구의원으로 출마하도록 권고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사람에 보이려고 신앙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시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쭉쩡이 몸만 교회 마당을 밟은 자가 되어서 안 될 것입니다.
2. 헛된 재물을 드리지 맙시다.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또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고 일언지하에 짤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은 모두 귀하고 소중한 것인데, 쓸모없는 헛된 제물이라 말하니 충격 그 자체입니다. <헛된 제물>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헛된 제물은 정성 없는 제물, 거짓된 제물”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구약시대로 되돌아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 소, 양, 비둘기 같은 짐승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헛된 제물이란,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져오는데 정성이 없고 거짓된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치기는 해야겠지만, 제물의 가격을 생각하니 돈이 아까운 거에요. 그래서 대충대충 사가지고 얼렁뚱땅 바치는 것입니다.
집에서 자기 집 아이 생일이 되면, 양우리에 가서 가장 살찌고 잘 생긴 놈을 골라서 잡아 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는 것은, 양 중에서 가장 약하고 병들고 못난 것! 상품가치가 없는 것을 끌고 가서 바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니 기가 막히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 “너가 바치는 분향이 도리어 내가 가증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보시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안 되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펑펑 사용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헌금을 두고 수백수천번 생각하면서 고민한다면, 이는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에 어떤 분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고 투자합니다. 다섯 손가락에는 보석반지와 금반지가 끼여 있고, 목에 걸린 금목걸이가 매주일 그 모양을 바꿀 정도로 몸치장을 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제법 큰 돈이 있는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성도들의 돈을 모은다고 말하면, 단 돈 1만원을 내는 데에도 꼬치꼬치 따집니다. 남들이 보면 근검절약하여 본 받을 모습이 아니라, 교회에 내는 단돈 만원이 아까워서 벌벌 떠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권사라는 중직을 맡고 있는 분이어서, 다른 성도들에게 더 은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헛된 제물을 드리지 마십시오. 거짓된 제물을 바쳐서도 안 되고, 진실하지 못한 십일조를 드려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헌금생활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헛된 제물>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특히 13절 하반절에 기록된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라는 말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내가 견디지 못하겟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어 표현입니까? 인간의 언어 표현입니까? 인간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너가 하는 꼬라지를 보니 내가 도무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과격한 언어 표현입니다.
헛된 제물을 바치는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역겹고, 보기에 힘이 들었으면,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라고 말했을까요? 견딜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헛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인정 받는 제물을 바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3.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는 안 됩니다.
15절 “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제가 <신행불일치>라는 말을 했습니다. 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는 한자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행불일치는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는 말 따로! 보여주는 행동 따로!”라는 말입니다. 교회 와서는 “아멘! 할렐루야!”를 크게 외치면서 거룩한 척 하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서는 세상 불신자들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말합니다.
여러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사귈 수 잇나요? 저는 그런 분과 절대 사귀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 내 곁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진실함을 믿을 수 없고, 게다가 어떤 것이 나를 대하는 진실인지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인대통령이 남북문제를 위해서 많이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북한 정권, 특히 김정은 정권이 하는 말과 행동을 절대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평화를 이야기 하는 그 순간에도 북한은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을 가동하였다고 합니다. 어제 철썩 같이 한 약속을 오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뒤집어엎어 버립니다.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다릅니다. 그래서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김정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판단할 때에, “너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내가 너를 믿지 못하겠다”라고 판단하신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고, 들어서 안 되는 말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듣는다면, 죽음보다 더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행불일치가 아니라 신행일치(信行一致)가 되는 생활을 합시다. 본문 16절과 17절에 보면 신행일치에 대하서 말합니다. 16절“①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회개) ②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라. 17절 ③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라, ④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⑤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5가지 실천 사항 중에서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만 먹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단지 내가 실천하지 않고 머릿속에만 넣어두니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 안에서만 인정받는 모습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는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처럼, 세상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고 존경 받을 수 있는 모습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요, 세상에 소금으로 살아가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장난삼아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진중한 신앙생활, 교회생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