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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진도 6코스
녹진관광지-진도타워-벽파항-연동마을-선황산 임도-용장성터
20220720
1.벽파진 푸른 바다여, 용장성 붉은 혼불이여
서해랑길 5코스를 해남 우수영관광지로 판단하고서 곧바로 6코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서해랑길 6코스 시작점은 진도대교를 건넌 녹진국민관광지 주차장이다. 주차장 입구에 서해랑길 6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멍청한 짓을 연거푸 쏟아내면서 이리저리 헤맸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 보배의 섬 진도(珍島)를 걷는다. 녹진 국민관광지에서 망금산 진도타워를 향하였다. 습도가 높은 여름날 땀을 뻘뻘 쏟으며 망금산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에 도착했다. 시간에 쫓겨서 진도타워에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량대첩승전광장의 조형물들인 임진왜란·정유재란 참전 진도인물비, 이순신 장군 어록비, 이순신 장군 기념조형물을 거쳐서 전망뎈에 올라 울돌목 그리고 진도와 해남 일대를 조망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데 여기서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서해랑길 진행 방향인 강강술래터와 울돌목무궁화동산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되돌아오는 촌극을 저지르고 말았다.
서해랑길은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 맨 끝 지점에 있는 전망뎈에서 그 아래 강강술래터길을 따라 내려가 울돌목무궁화동산 출입구로 빠져나가면 명량대첩로가 나온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부터 벽파항까지 아주 단순하다. 명량대첩로를 따라 해안을 걸어가다가 진도갯벌·습지보호구역 뎈길로 들어갔다가 다시 명량대첩로로 나와 둔전방조제 입구까지 명량대첩로를 따라간다. 둔전방조제 입구에서 방조제길로 들어가 명량대첩로와 나란히 걸어나가서 방조제 끝에서 명량대첩로와 만난 뒤 벽파항 삼거리까지 따라간다. 벽파항 삼거리에서 잠깐 걸으면 오류삼거리, 왼쪽 벽파항 방향으로 나가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언덕에 오르면 활짝 열린 멋진 풍광을 만나게 된다.
이 길에서는 서해랑길 4코스 탐방길이 확인된다. 그 기준은 옥매광산의 흔적이 상처로 남은 옥매산이다. 옥매산을 기준으로 하여 오른쪽 남쪽으로 삼호마을, 삼지원 나루, 옥동마을, 옥동방조제, 누루목산 금광, 황산면 부곡리 일대, 고천암방조제가 분명히 가늠된다. 그리고 남쪽 끝 서해랑길 3코스의 관두산과 관동방조제, 그리고 두륜산을 어림한다. 그 조망은 걸었던 길의 추억으로 가슴을 부풀린다.
옥매산 왼쪽인 북쪽 들녘을 살피면 오늘 아침 출발했던 서해랑길 5코스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 원문마을이 가늠된다. 그 길을 걸어 우수영관광지로, 그곳에서 다시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으로, 다시 명량대첩로를 따라온 길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둔전방조제에서는 진도의 최고봉 해발 482m 첨찰산과 그 증표가 되는 진도기상대가 분명히 조망된다. 둔전방조제를 지나 둔전배수갑문교에서 뒤돌아보면 근골의 바위가 멋진 금골산이 조망되는데, 그 아래 금성초등학교 교정을 찾아가 금골산 5층석탑을 탐방한 것이 15년 전 일이다. 그 추억을 함께한 인물들과 지금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파마을 입구 반대편 길에서 할머니와 함께 걷던 꼬마가 맞은편에서 걷는 두 길손을 보고는 "안녕하세요." 꾀꼬리처럼 맑은 소리로 인사를 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인사는 나누어야 하는데 나눌 줄 모르는 어른이 되어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꼬마의 맑은 소리의 인삿말에 감동하면서 풍광이 탁 트인 벽파진 언덕에 올라왔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노산 이은상의 눈물겨운 비문 내용과 소전 손재형의 아름다운 서체가 어우러진 빛나는 비석이다. 진도는 이상스럽게 눈물이다. 아름다운 보배의 섬이라고 해도 길손에게는 눈물의 진도가 된다. 이순신 장군이 이뤄낸 명량대첩의 감격의 눈물도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과 12척의 배를 생각하고 민중의 뜨거운 애국심을 생각하면 슬픔의 눈물이 쏟아진다. 그 눈물을 밀어내는 것은 2016년에 복원된 벽파정이다. 벽파정에 올라서 벽파진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는 모든 슬픔을 포용하여 승화시켜 편안한 평화를 준다. 벽파정에 걸린 시 한 편이 이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고려 후기에 판대부사를 지낸 김신윤(金莘尹)이 벽파정에서 읊었다고 한다. "아득한 마음 그지없는데/ 작은 배 일렁이며 배회하네/ 비가 오니 섬들은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바람 이니 물은 하늘에 뜨는구나/ 나그네 신선이 못 됨을 부끄러워했더니/ 이제 견우성을 범하는 신선이 되었구나/ 어느 나라 고을인지 섬 밖엔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벽파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신선의 세상, 고적한 아름다움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벽파진은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행적이 있기 이전에 고려 삼별초군과 연관이 된다. 고려 왕조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군은 이에 따르지 않고 강화도에서 진도 벽파진을 거쳐 용장산 아래로 들어와 용장성을 건설하여 고려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고려 정부군과 몽골군은 벽파진에 상륙하여 용장성을 공격하자 삼별초군은 남도석성으로 피신하여 싸우지만 배중손 장군이 사망하게 되고 김통정 장군이 남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굴포항을 통하여 제주도 항파두리로 옮겨서 항몽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은 제주도 항파두리를 공격하여 삼별초군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삼별초 군대의 행적은 외세에 대한 민족의 주제적 저항의식일까? 권력에서 밀려난 고려 특별 군인들의 철부지 행동이었을까?
진도에서는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을 조성하여 그 길은 벽파항에서 시작하여 선황산과 용장성터까지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벽파항부터 용장성까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과 동행한다. 연동마을을 거쳐 선황산 임도를 따라서 용장성터로 내려가는 길은 삼별초군이 걸었으며 여몽연합군이 거쳐갔던 길이 맞을까?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이 벽파진에 상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벽파진 전투를 포기하고 용장성 전투에 총력을 기울였을까? 배중손과 김통정 장군이 벽파진에서 여몽연합군의 벽파진 상륙 방어 전투를 벌였더라면 삼별초군이 그처럼 무기력하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선황산 임도를 걸었다. 삼별초군의 용장산 행렬이 눈 앞에 나타난다. 뒤이어 여몽연합군의 고려말(語)과 몽골말(語)이 뒤섞인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린다. 선황산 갈림목을 지나 내려가는데 삼별초군의 소리들, 서해의 바닷길목을 지키며 남도 민중들의 외세 저항의지를 고취시키는 항몽의 소리들이 용장성터에서 울려왔다. 약 8개월 동안 항몽의 역사적 공간이었던 삼별초의 용장성터에 혼불이 타오른다. 자주애국, 불굴의 저항정신, 민중의 정신이 자유를 염원하는 형상의 조형물 '고려항몽충혼탑'이 혼불로 하늘에 솟아오른다.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쟁취하려던 삼별초 용사들의 혼불이 용장산성에서 남도석성과 굴포항으로 날아가고 있다.
2.탐방 과정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녹진국민관광단지 입구에 서해랑길 진도 6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남파랑길은 직진하여 망금산 진도타워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아래 울돌목해양에너지 공원에 충무공 이순신동상이 보인다.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 건너 맞은편 오른쪽에 우수영국민관광지가 있는데 보이지 않고 왼쪽 위에 길게 누운 양도 뒤쪽에 우수영마을이 살짝 보인다.
망금산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 진도타워 아래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망금산 이순신명량대첩전승광장에 이순신 장군 어록비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순신명량대첩승전광장 끝에 이순신 장군 기념조형물과 그 뒤에 전망뎈이 설치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산이 건배산 범바위일까?
중앙에 있는 산이 금골산, 그 오른쪽이 도암산, 왼쪽 뒤는 첨찰산인 듯. 서해랑길은 해안을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중앙 오른쪽 뒤는 첨찰산, 중앙 왼쪽 뒤는 선황산, 선황산 뒤쪽 용장성터가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다. 바다의 섬은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굴섬(왼쪽)과 넙섬(오른쪽). 왼쪽 뒤에 감부도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아래 무궁화동산으로 내려가 해안선을 빙 돌아 넙도 뒤쪽의 진도갯벌습지보호구역 갯벌공원을 돌아 그 뒤쪽의 둔전방조제를 통하여 왼쪽 해안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넙섬, 그 오른쪽은 굴섬, 왼쪽의 긴 섬은 녹도, 그 앞의 작은 섬은 현도. 중앙에서 왼쪽 튀어나온 곶(串) 뒤에 감부도가 보이는데 그 앞이 벽파진. 서해랑길은 해안의 명량대첩로를 따라가다가 벽파진전첩비와 벽파진으로 이어진다.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솟은 산이 선황산으로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은 선황산 뒤 용장성터 앞이다.
중앙 앞은 거북선 모형의 조력발전소, 그 오른쪽 철탑 아래의 섬은 피섬인 듯. 피섬 앞에 현도와 그 뒤에 길게 누운 녹도. 바다 건너 왼쪽에 둥그렇게 보이는 산은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옥매산이며 그 오른쪽 해안에 삼지원이 있었다. 맨 오른쪽 뒤에 감부도가 보이는데 그 앞이 벽파진으로 해남의 삼지원과 진도의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 진도와 해남을 잇는 뱃길이었다.
피섬은 어지바위로 불렸으나 명량대첩 당시 수장된 왜군의 피가 스며들어 붉게 보인다고 하여 피섬으로 불리게 되었다.
진도대교는 1984년에 준공된 국내 최초의 사장교로, 2005년 완공된 제2진도대교와 더불어 국내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가 되었다. 건너편은 해남우수영관광지이다.
신동습지구역 3.4km, 용장성터 14.5km 지점. 중앙에 굴섬과 왼쪽에 녹도, 중앙 뒤에 감부, 그 오른쪽에 선황산이 보인다.
망금산은 1597년 정유재란 음력 9월 16일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1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자 왜적은 대규모 군사 이동으로 오인, 혼란을 일으켰다. 지금도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래터(길)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망금산(望金山)은 망금 뒤에 있는 산으로 진도의 관문산이다. 산의 높이는 115m이다. 산정부에 가로 30m, 세로 20m의 토성이 축성된 흔적이 있다. 백제 이후 바다 물목을 지키는 군대 주둔지였다. 충무공 이순신이 진도를 남도(南道)의 요충(要衝)이라 하였고 조선 선조 때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진도를 "가장 중요한 관방지역(最爲緊關之地)"이라 한 점, 『동국여지지』에 "해로 요해지지(海路要害之地)"라 한 것은 울두목[咽喉之地]을 이른 것이다. 망금산성은 이 울두목을 지키기 위한 관방성으로 통일신라시대 축성 이후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관방유적으로 기능을 한 까닭에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무궁화동산 출입구로 나가 명량대첩로를 따라 해안을 돌아나간다.
왼쪽 뒤에 금골산이 보인다. 명량대첩로를 따라 해안을 따라 이어간다.
넙섬 뒤 중앙에 보이는 산이 선황산으로 선황산 뒤 아래 용장성터가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다.
망금산 진도탸워에서 오른쪽 관방성터 강강술래길을 거쳐 오른쪽 울돌목무궁화동산 출입구로 나와 해안을 돌았다.
망금산 산줄기가 남쪽으로 벋어서 곶(串)을 이루었다. 해안 왼쪽에 울돌목무궁화동산 출입구가 있으며, 명량대첩로를 따라 곶(串)을 돌아가면 녹진국민관광지가 나올 것이다. 바다에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현도와 그 뒤 녹도가 길게 누워 있다.
군내면 둔전리 울돌목무궁화동산 출입구 앞 명량대첩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녹진리 녹진국민관광지에 이른다.
뒤의 섬은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굴섬인 듯.
맞은편에 해남군 문내면 옥동리 옥매광산으로 유명한 옥매산이 보인다. 그 왼쪽 뒤는 서해랑길 5코스 시작점이다.
중앙 뒤에 선황산, 그 뒤 용장성터가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다.
해남군 문내면 옥동리 옥매광산이 있는 옥매산, 그 오른쪽에 제각산과 모이산, 그 앞에 옥동방조제와 노루목산 금광이 있다. 서해랑길 4코스에서 모두 확인한 곳이다.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 설매봉 아래 자리한 마을은 둔전마을인 듯. 중앙에서 왼쪽 뒤의 산은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
망금산의 진도타워와 진도대교가 보인다. 앞쪽에 진도갯벌·습지보호구역 해상뎈전망대, 그 바로 뒤가 넙섬, 중앙에 굴섬이 있다. 굴섬 뒤쪽에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현도와 그 오른쪽에 녹도가 분명히 가늠된다.
그 아래 금성초등학교 안에 보물 제529호 금골산 오층석탑이 있다.
남파랑길은 해안의 명량대첩로를 따라 빙 돌아가다가 왼쪽 산기슭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벽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선황산 뒤 용장성터가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며, 중앙 맨 뒤에 봉긋하게 솟은 두 산봉 중 왼쪽은 진도기상대, 오른쪽이 진도의 최고봉 해발 482m 첨찰산이다.
남파랑길은 맞은편 해안 오른쪽 삼거리에서 오른쪽 명량대첩로로 이어지고, 왼쪽 명량대첩로는 중앙의 청색 건물 앞쪽에서 끝난다. 벽파진은 왼쪽 산모롱이를 돌아서 있는데 해안에 길이 나있지 않은지 아니면 위험한 탓인지 남파랑길은 오른쪽 삼거리에서 명량대첩로를 따라 이어진다. 왼쪽의 섬은 감부도이며 그 오른쪽 앞에 벽파진이 있다. 오른쪽의 산은 선황산.
감부도 앞 바다 건너편은 해남군 황산면 일대이다. 사진 왼쪽에서 조금 더 왼쪽에 옥매산과 삼지원 나루터가 있을 것이다.
벽파항 1.1km, 6코스 종점 6.3km 지점인 명량대첩로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벽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쪽에 선황산이 보인다.
명량대첩로와 벽파진로가 만나는 곳에서 좌회전하여 벽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선황산이 나무에 가려 있다.
앞에 보이는 언덕에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가 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를 뒤쪽에서 바라보면서 진행한다.
이은상이 지은 비문을 진도 출신 서예가 손재형이 썼다. 비문 내용이 빛날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몃지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獄)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 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郡守)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陸戰)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臣)에게 상기도 12척의 전선(戰船)이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매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닷목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薈)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 7일 적선(賊船) 13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甘浦島)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진(陳)을 우수영으로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써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그날 진도백성들은 모두들 달려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었으며 이천구(李天龜), 김수생(金水生), 김성진(金聲振), 하수평(河水萍), 박헌(朴軒), 박희령(朴希齡), 박후령(朴厚齡)과 그 아들 인복(麟福) 또 양응지(梁應地)와 그 조카 계원(啓源) 그리고 조탁(曺鐸), 조응량(曺應亮)과 그 아들 명신(命新) 등 많은 의사(義士)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천추에 호국신이 되었었나니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 이는 진실로 진도민의 자랑이로다. 이 고장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전술(疑兵戰術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어리고 녹진(鹿津) 명(鳴羊) 두 언덕 철쇄(鐵鎖)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공의 은공과 정기를 영세(永世)에 드높이고자 벽파진두(碧波津頭)에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미치어 나는 삼가 꿇어 엎디어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 노래를 붙이노니 "12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닷목을 지키실 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눈물을 혼자 지으시다 300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둘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의사혼백(義士魂魄)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 옵소서"
단기 사천이백팔십구년 팔월 이십구일 노산 이은상은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은 글씨를 쓰고 진도 교육구교육감 곽충로는 구내 교직원 학도들을 비롯한 모든 군민과 도내 교육동지들의 성력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벽파항 맞은편 왼쪽에 옥매산과 그 앞 섬 송도 뒤에 삼지원이 보인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해남과 진도를 잇는 뱃길은 삼지원 나루와 벽파진 나루였다고 한다. 송도 오른쪽에 소래도, 그 오른쪽에 추도가 보인다.
고려 삼별초군이 벽파항을 거쳐 용장성으로 들어갔으며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벽파항으로 상륙하여 용장성을 공격하였다. 벽파항 오른쪽 감부도는 배를 만드는 선소가 있었으며, 건너편 중앙에 옥동방조제와 노루목산 금광, 그 오른쪽으로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일대, 왼쪽 끝에 송도와 그 오른쪽에 소래도와 추도, 왼쪽의 산은 대산인 듯.
벽파정이 복원되어 있고 오른쪽에 벽파방조제와 왕새우양식장이 있다. 바다에 감부도가 떠 있다. 바다 맞은편 오른쪽 끝에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이 가늠된다.
벽파정과 벽파방조제 그리고 왕새우양식장이 보인다. 맞은편 왼쪽 끝에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이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방조제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 고개를 넘어 오른쪽 끝의 연동마을로 이어진다.
중앙 아래에 연동마을, 그 오른쪽에 솟은 선황산, 서해랑길은 연동마을을 거쳐 선황산 임도를 따라 선황산 뒤 왼쪽 아래의 용장성터 앞으로 이어지며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 그곳에 있다.
영벽파정은 1207년(고려 희종3)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창건하여 1465년(조선 세조 11) 중건하였으나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었다. 이 정자는 내왕하는 관리와 사신들을 영송(迎送)하고 위로하던 곳으로 정개과 문인들이 아름다운 경승과 감회를 읊어 많은 시구(詩句)를 남긴 장소이다. 벽파진은 정유재란(1597년)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 남은 배를 이끌고 16일 동안 바닷목을 지키실 때 향민들은 공을 도와 죽음으로 명량대첩을 이루었고 고려말에는 삼별초군이 들어온 유적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벽파정을 군민들의 뜻에 따라 새터를 다등머 이곳에 세우다.
2016년 7월 진도문화원장 옥천 박정석 짓고 황초아 쓰다.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 변방엔 거센 바다 가까이 있고/ 손들어 사공 불러 건너려 하는데/ 세상에 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네/ 고요한 밤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차가운 달빛에 만상이 흐른다/ 창강수 같은 술 가득 채워 마시며/ 나그네 흉금을 열고 시름을 씻노라 - 고려 정언(正言) 조희직(曺希直)의 오언율시
조희직(曺希直)은 1366년(공민왕 15) 정언(正言, 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진도로 쫓겨나, 가흥현(嘉興縣)[진도 읍내 북쪽 4㎞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현]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뒤 중앙정부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하였으나, “어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할 것이며, 고려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 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조희직의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 진도의 정경을 읊은 오언율시가 있다. 조희직이 가흥현 호장으로서 해남에서 진도로 가던 중 남긴 시로 벽파정(碧波亭)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옥주지(沃州誌)』에 실려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옥매광산이 있는 옥매산 기슭 왼쪽 해안 옥동선착장에 옥매광산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오른쪽 옥매산 아랫마을이 삼호마을, 송도 섬 뒤가 옥동마을, 그 오른쪽에 옥동방조제가 있다. 서해랑길 4코스에서 모두 확인한 곳이다.
오른쪽에 벽파리복지회관이 있다. 그 오른쪽 뒤에 벽파여객터미널 대합실이 있는 것 같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부족한 병력과 무기, 군량을 확보하며 왜군과의 일대 접전을 준비 중이었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이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았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도 쪽으로 서진하였다. 육로를 이용하여 구례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 열선루를 거쳐 장흥 회령포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이순신은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였으며, 회령포에 이르러 드디어 바다로 출진한다.
1597년 8월 29일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조선 수군의 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이 왜군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은 벽파진에 주둔한 며칠 동안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 힘들었고, 바람이 잠잠해진 후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전투력을 유지하기에 애로가 많았다.
벽파항에서부터 서해랑길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과 동행한다. 선황산 뒤쪽 아래 용장성터까지 이어진다.
벽파리(碧波里)는 해변에 핀 벽도(碧桃)나무의 꽃을 미화해서 붙인 이름이며 벽파항은 벽파리에서 유래하였다. 벽도(碧桃)는 선계(仙界)에만 열린다는 복숭아를 말한다. 벽파항 언덕의 벽파정이 아름다우며 벽파정에서 벽파항 바다를 내려보며 휴식을 취하면 신선이 된다.
자연 암반 위에 벽파정이 세워져 있다.
왕새우양식장의 수차가 돌아가고 있다. 왼쪽에 선황산이 우뚝하고 오른쪽에 목섬이 보인다.
왼쪽에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그 아래 벽파정, 해안에 벽파항이 자리한다.
앞은 벽파리 연동마을 선착장인 듯. 왼쪽은 감부도이다. 감부도 오른쪽 뒤는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일대, 그리고 맞은편 멀리 오른쪽은 황산면 고천암방조제, 중앙 뒤쪽으로는 두륜산이 있을 것이라고 어림한다.
연동마을 가는 숲길 입구에서 벽파항을 뒤돌아 보았다. 맞은편 오른쪽은 해남군 문내면 일대다.
왼쪽 숲길을 거쳐 벽파길로 내려왔다. 맞은편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와 선두리, 학동리 일대를 어림한다. 서해랑길 5코스에서 저곳을 걸어서 해남 우수영국민관광지에 이르렀다.
6코스 종점 4.3km 지점. 왼쪽의 섬은 감부도, 앞은 연동선착장, 바다 맞은편은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일대, 서해랑길은 오른쪽 연동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진도 출신의 소전 손재형 서예가 영향인지 표석의 글씨가 특이하다. '가우리'는 무슨 뜻일까? 고개를 넘어 연동마을로 간다.
고개를 넘어 연동마을로 내려가며 중앙의 선황산을 바라보았다. 서해랑길은 선황산 임도를 따라가다가 왼쪽 움푹 파인 곳에서 고개를 넘어 용장성터로 내려가는 것이라 추정한다.
마을집 벽에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표지판이 붙어 있다.
연촌도예는 산업용품을 제조하는 업체인 것 같다.
남쪽으로 진도 용장성의 터가 있는 선황산과 성재를 남쪽으로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연동 뒷산으로 이어지는 안부에 마을이 있다. 선황산 쪽에서 내려오는 계류가 모이는 못이 연동저수지이다. 이 저수지를 이용하여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구릉지는 대부분이 밭이고 연동저수지 동편 계곡을 따라 나타나는 곡저와 해안가에 평야가 나타난다.
고군면의 최북부 동쪽해안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 서쪽은 선황산을 경계로 군내면 용장리, 남쪽은 오상리, 북쪽은 오류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교통은 고군면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며 벽파리를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선황산을 넘으면 군내면 용장리가 나온다. 마을 앞쪽으로 지나는 801번 지방도를 따라 벽파리와 연결되고, 다시 해안을 따라 내산리를 거쳐 지막리에서 국도 18호선과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오일시를 지나 진도읍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회동을 비롯하여 의신면과 진산면과 연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6코스 종점 3km 지점. 오른쪽 용장성과 선황산 방향의 임도로 진입한다.
군지기미가 무슨 뜻일까? '기미'가 '크다', '바닷가'를 뜻하는 고어라면, 군지항이나 군지바닷가라고 이해하면 될까?
선황산 1.07km, 용장성 1.58km 지점
바다 건너편 왼쪽에 광산 흔적이 있는 옥매산, 그 오른쪽 아래에 삼지원 나루터, 중앙에 옥동방조제와 노루목산 금광(모래산), 그 오른쪽으로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일대가 분명히 확인된다. 서해랑길 4코스에서 모두 확인한 곳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는 선황산 가는 길, 서해랑길은 직진하여 용장성 방향으로 이어간다.
진도군 군내면 용장마을 동쪽의 선황산을 성황당산이라 일컫는다. <옥주지沃州誌>에 따르면, 성황당산성터는 지금의 용장에 있는데, 고진도 때 성황신당(城隍神堂)을 건립하면서 산성을 쌓아 변란이 있으면 입보처로 삼았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이에 주목하여 진도 지역의 향토사가들은 선황산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굴조사 결과 선황산에는 제사유적과 제사에 사용될 제물을 준비하는 용도나 장대(將臺)로 추정되는 건물지만 확인되었다. 2~3m 높이의 건물지 기단이 흙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토성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선황산 갈림목에서 직진하여 용장성터로 내려간다.
사당 정문인 숭의문(崇義門) 좌우에 배중순장군 동상과 배중손장군 항몽순의비가 있다. 뒤의 오른쪽 산봉은 선황산이다.
1.작품명 : "혼불(투혼의 불길)"
2.조형물 크기 : 주조형물-20,500X7,370X9,800(H)mm, 설명판-1,705X300X2,340(H)mm, 바닥석재-37,200X15,200X2,340(H)mm
3.조형물 재료 : 주조형물-황등석, 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 설명판-황등석, 오석, 버닥석재-황등석, 오석
4.조형물 구상 : 삼별초는 이름에서 나타나듯 3과 연관이 깊다.
-강화로부터 시작되어 진도, 제주로 이어지는 세 곳
-자주적, 저항적, 민중적 성격을 지닌 투쟁의 정신
-바다, 들, 산을 옮겨가며 치른 전투환경이 연관이 있다.
-물 : 바다(물)를 배경으로 하여 벌여온 몽골과의 투쟁을 물결로 상징화
-불 : 활활 타오르는 투쟁의 정신을 불꽃으로 형상화
-돌 : 용장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굳건한 정신을 돌을 소재로 표출
5.조형물 설명 : 좌우 날개 형태의 부조와 함께 3개의 띠가 말려 올라간 형태다. 3개의 띠는 바다, 육지, 산성과 함께 자주애국, 불굴의 저항정신, 민중의 정신이 자유를 염원하는 형상이다. 기단 앞부분은 배중손 장군을 필두로 8인의 각기 다른조각상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혼불과 같은 투혼으로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쟁취하려던 삼별초 용사들의 염원이 솟아오르는 형상을 내포하고 있다.
2010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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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저는 서울에서 안내트레킹팀을 따라
1박2일로 3코스를 탐방하고 돌아옵니다.
탐방일에 탐방시작지에서 만나서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