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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기론(形氣論)과 이기론(理氣論)
산과 물 등 자연의 외적모양을 보고 길지를 찾는 것이 형기론이다.
반면에 이기론은 방위와 시간 등의 음양오행 작용을 살펴 길흉화복을 논하는 이론이다.
형기는 용(龍), 혈(穴), 사(砂), 수(水) 등 풍수지리의 외적 변화 현상을 보는 것이다.
이기는 용, 혈, 사, 수의 방위를 측정하여 음양오행법(陰陽五行法)으로 적법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형기론과 이기론의 이해
풍수라는 말은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지만 단순히 풍수가 한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풍수이론은 여러 갈래로 발전해 왔으며 결국은 큰 갈래로 다시 합쳐져 이론으로 정의되었다.
풍수지리의 이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으니 각기 형기론(形氣論), 혹은 이기론(理氣論)으로 불린다.
두 갈래의 이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하여 각기 장단점이 있어 서로 보완적인 입장이 되어야 하나, 이론의 특징에 따라 정반합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비판하고 비하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형기론은 산세의 모양이나 형세상의 아름다움을 유추하여 혈이 맺혀 있는 터를 찾는 방법론이다.
임신한 여성은 보통 여성보다 배가 부르듯이, 산에 혈이 맺혀 있다면 분명히 다른 장소와 유별난 특징이 있을 것이다.
그 특징을 이론화시키고, 산천 형세를 눈이나 감(感)으로 보아 이론에 꼭 맞는 장소를 찾아낸다.
형기론은 혈이 맺힐 수 있는 장소를 찾는 방법이 간룡법(看龍法)과 장풍법(藏風法), 그리고 정혈법(定穴法)으로 나뉘어 계승되었고 이론의 중추로 발전되었다.
이기론을 익히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형기론이 양기(陽氣)인 물과 바람은 무시한 채 음기(陰氣)인 산의 형상만 보고 혈을 찾으니, 음양이 조화를 이룬 혈을 찾기란 실로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기론에 따르면 여자도 남자를 만나야만 임신을 하듯이, 땅에 혈을 맺은 주체는 땅이 아니라 바람과 물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여자라면 모두 임신했다고 오판하는 것이 형기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근본을 의심한다.
이기론의 주장에 따르면 형기론으로는 진혈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고 주장하며, 한국 풍수의 이론은 정교한 형기론에 치우치고 있으나 정작 이론에 맞는 혈을 현장에서 잡지 못하자,
최종적으론 물형론(物形論)에 의지하여 혈을 짐작하는 수준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물형론이 긍극적으로 이기론에서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한 처사이고 물형론이란 심혈의 궁극이 아니고 보조적인 수단이라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오류이다.
형기론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기론자들은 주로 물형론을 들어 형기론이 부족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처럼 형상에 의탁한다고 보고, 물형론(物形論)이 한국 풍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이론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술법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형론은 무엇인가? 물형론은 어떤 장소의 주변 산천을 사람이나 짐승, 혹은 새의 모양에 비유한다.
이것은 산천의 겉모양과 그 안의 정기는 서로 통한다는 전제를 두고, 보거나 잡을 수 없는 지기(地氣)를 구체적인 형상에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물형론에서 생기가 모인 혈은 힘을 쓴 곳이나, 긴장을 한 곳이나, 정신을 집중한 곳이라 한다.
그런데 그 혈의 정의가 애매모호해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어부가 낚시를 드리운 물형이면 고기를 잡기 위해 낚시찌를 유심히 바라보기 때문에 찌의 자리가 혈이라 하기도 하고, 어부의 눈동자 부위가 혈이라 하기도 한다.
금계포란형의 물형에서도 사람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한다. 어떤 사람은 닭도 새이니 날개에 혈이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알의 자리가 명당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닭도 먹어야 사니 부리 부분에 생기가 모였다고 한다.
이렇듯 십인십색을 나타내는 데는 초목으로 뒤덮인 자연 속에서 기가 어디에 뭉쳤는지를 알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산천 형세를 물형으로 감별해 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혈을 잡을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반인들은 풍수를 학문으로 대접하기보다는 그저 흥미거리로 치부해 버린다.
과연 그럴까? 음택을 소점(所點)하는 음택론에서는 생기가 충만한 터를 찾는 방법과 과정을 용(龍), 혈(穴), 사(砂), 수(水)에 맞추어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있다. 즉 물형론은 지극히 부수적인 이론으로 형기론의 이론에 속하기도 하지만 이기론의 학문에 속하기도 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기론이 강하게 발달한 곳이 전라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인데 물형론은 이 지역을 바탕으로 발달하였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형기론이 발달한 지역은 북한 지역과 강원도 일부, 서울지역과 경상도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물형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론자들이 주장하는 형기론이 물형론이라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형기론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이기론은 어떠한가? 이기론은 땅에 혈을 맺어 놓은 주체인 양기로 바람과 물의 순환 궤도와 양을 패철로 살펴서 혈을 찾는 방법이다.
패철을 사용하니, 감각으로 혈을 찾는 다른 이론보다 더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주장이다. 또 패철로 땅의 국(局)을 판단한 다음 산줄기와 물의 길흉을 판별해 혈을 정하니, 풍수 이론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물은 비단 자연의 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정적인 땅을 기계적,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동적인 양기의 총칭이다. 바람까지 포함한다.
이기론이 주장하는 당 나라의 양균송(楊筠松)이 보여준 “가난을 구제하는 비법”도 사실은 형기론의 기법이다.
양균송이 보여주었다는 이치는 아침 끼니를 굶던 집인데 낮에 좌향을 잘 잡아 장사를 지냈더니 저녁 무렵에 굴뚝에서 연기가 솟았다는 고사까지 전하며, 나라의 도읍지나 마을을 정하는 이론에 주로 쓰였다.
묘 터를 잡는 데에도 정확히 적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이 이치가 정확하다면 양균송이 보여준 방향잡기도 이기론이 아니라 형기론에 속하는 것으로 이법(理法)은 역시 형기의 부수적인 용법이다.
형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가장 주장하는 이론이 기(氣)이다. 이기론을 익히고 학습하는 학자들은 기의 흐름을 파악하여 만든 것이 패철이니 모두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형기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은 무한하고 그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데 겨우 패철(佩鐵)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적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맥이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음택이나 양택을 소점함에 있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준을 삼은 것일까? 그것은 바로 기(氣)이다.
기는 산맥을 따라 흐르니 산을 보고 혈을 찾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다. 이어 패철을 놓고 좌향을 살피고 방향을 가리니 이는 부수적인 것이다.
예로부터 형기가 주(主)가 되고 이기가 부(副)가 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형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체질적으로 기를 느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론은 기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부수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이치는 일찍이 여러 문헌으로 나와 있는바,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조차 형기를 주로 삼아 묘제를 정했으니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 주체인가? 풍수의 주된 학파는 각기 이기론과 형기론으로 발달하였다. 중국에서 형기론을 추종하는 학파를 형세파(形勢派)라 불렀고, 이기론을 주장하고 추종하는 학파를 방위파(方位派)라 불렀다.
형세파는 산을 그 기본으로 하여 형세를 기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이상적인 터를 고르지만 학문적 깊이가 있고 수련기간이 필요하여 익히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산과 물이 뚜렷하지 않은 평야지역이나 도시 내부에서는 적용이 어렵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도시가 크지 않았던 과거에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형세파는 중국의 강서지방에서 유행하였다고 하여 강서파(江西派)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양균송(楊筠松)과 증문천(曾文辿)에 의해 시작되어 뢰대유(賴大有), 사자일(謝子逸)에 의해 발전하여 정립된다.
형세파는 지형과 지세를 강조하여 위치와 방위를 결정하여, 용혈사수를 찾고 주의를 기울이며 기의 흐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강서법은 달리 형기론으로 부른다.
방위파는 일찍이 종묘법(宗廟法)이라고 불렸는데 중국의 복건(福建)에서 시작되어 송대(宋代)에 들어 왕급(王伋)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방위파는 오행과 팔괘에 의지하여 상생과 상극을 구별하여 방위를 정하며 복건지방에 널리 퍼져있지만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 유학이 부상하며 풍수적으로 길지를 찾으려 하나 형세파로는 길지를 찾기 어려웠고 배움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웠으므로 유학의 이기(理氣)를 받아들여 이기파로 변하게 된다.
이기론은 형기론과 달리 수련을 적게 하거나, 하지 않아도 패철에 대한 사용법을 알면 능히 적용이 가능하였기에 형세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 유용하였다.
아울러 거국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은 부족하지만 산이 없는 지역과 부분적으로 좁은 공간 배치에는 유용하였다.
따라서 학문적 소양이 깊고, 깊이 있는 산을 연구한 상류사회에는 수용되지 못하였으나 간단하고 단순하여 명료하였기에 하층 사회에서는 지지를 받았다.
두개의 이론은 각기 보충의 형상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오래도록 주된 논쟁을 반복하였다.
한국의 경우 영남지역은 주로 형세파가 주류를 이루고, 호남지역은 방위파가 득세를 하고 있다.
영남지역은 산세(山勢), 혈장(穴場), 국세(局勢), 수세(水勢)를 관찰하고 적용하는 것이 주류이고, 호남은 패철에 의해 측정된 물의 흐름이 지니는 내재된 음양오행에 의거하여 길흉화복을 따지는 것이 주류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가 지리멸렬한 이유 중 한 가지가 바로 이 패철을 신봉하는 풍수이론이 민중 저변에 깔렸고, 주류인 형세파의 이론이 상층의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탓이 크다.
지금도 과거의 묘역을 살피면 왕릉을 비롯한 상층부의 묘제는 대부분 형기론에 따르고 있다.
이기론은 한국에서 그다지 전파가 되지 않았으나 이조 후기부터 일부 지역에서 급격하게 번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 고려시대에는 이기론이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당시의 풍수는 형기론을 중심으로 하였다
송나라 서긍이 서기 1123년 고려를 방문한 뒤 귀국하여 쓴 [고려도경]에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 대한 풍수적 언급이 나온 대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고려 도읍지 개경의 형세상) 대개 乾은 金에 해당되고, 금의 長生方은 巳방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산의 내룡과 수구와의 관계를 사국과 포태법으로 나누어 길흉화복을 나눈 것으로 보아 이기론 풍수가 분명하다. 이것이 호순신의 이론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리오결이나 그 밖의 이기론과는 더욱더 거리가 먼 것이다. 왜냐하면, 서긍이 [고려도경]에 이기론 풍수를 언급할 때 사용한 방법이 호순신의 이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산의 내룡으로 4국을 정하고, 물의 흘러나가는 방향을 가지고 포태법을 따지는 것은 현재 시중의 술사들의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고 호순신의 이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서긍은 호순신보다 동시대 혹은 약간 후대의 사람이다. 호순신 역시 기존의 이론을 재편성 한 것이기 때문에 서긍이나 호순신 모두 동시대 송나라 사람으로서 그 당시 유행하던 이기론 풍수를 수용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고려 풍수에서 이기론을 언급한 것 중 가장 자세한 것이며, 그밖에 이기론 풍수 흔적은 거의 없다.
고려 희종 4년의 기록에 “명당수류파손방(明堂水流破巽方)” 이라는 대목이 있음에서 또 이기론 풍수가 언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기론 풍수는 형세론에 밀려 거의 힘을 쓰지 못하였다는 것이 풍수연구가들의 주장이다.
아마도 이때는 이미 호순신의 이론이 전해졌을 것이지만, 이기론 풍수인 호순신의 이론이 도선국사의 풍수이론인 비보풍수에 말려 유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고려에는 이기론 풍수는 전혀 유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 풍수의 주류는 무엇이며 조선시대의 풍수에 있어 주된 주장은 무었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선 초기의 풍수논쟁을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논쟁의 해답은 바로 정조의 행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형기론에서는 좌향(坐向)이란 기맥이 흐르는 방향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이기론은 수법(水法)에 의해 때때로 적용이 다른데 모두 양균송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단 지 이기는 물의 흐름을 중요시했고 형기론은 산을 중심으로 물의 흐름을 파악하였다.
산을 중심으로 하는 형기론과 물을 중심으로 하는 이기론의 차이는 우리나라의 땅이 형기에 어울리는 산지(山地)인지, 이기에 어울리는 평야(平野)인지의 구분에 따르면 정확할 것이다.
오래도록 두 가지의 이론은 상호 보충하면서서도 시시비비를 가려왔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형기풍수가 주된 풍수였는데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풍수사로 알려진 정조는 패철에 의지하는 이기론을 배격하고 형기론의 견해에 찬성하는 주장을 남기니, “형국과 음양은 서로 안팎이 되므로 어느 한편을 편벽되게 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 경중을 가리라면 형국은 본체가 되고 음양은 용(庸)이요, 끝이다. (중략) 만약 분금에 구애되어 구슬이 되는 안산을 잘못 정한다면 하늘의 기운을 어기고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다.
아무리 패철의 신묘함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풍수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패철을 이용하여 방위를 정하고 음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몸을 수련하여 지기를 체험하여 땅속의 기운을 느껴 음택을 소점하는 것이다.
이기론과 형기론은 공히 기를 중요하게 여기라고 각각 이름에 기(氣)가 들어 있는 것이니 능히 기를 느낄 수 있도록 몸을 수련하여야 할 것이다. 패철의 분금이 전부라고 믿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패철을 이용하는 풍수는 짧은 시간에 배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패철의 사용법을 익히고 책자에 오행팔괘를 분석하여 좌향법을 적어 살피며 어느 곳에서나 남향을 보고 묘를 쓰면 능하다 하여 물이 나는지,
반배(反背)하였는지. 비주(飛走)하는지,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고 묵밭에 묘를 쓰고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반풍수(半風水)가 생겨나는 것이다.
패철을 열심히 공부하고 오랜 세월 공부하면 천하의 명당을 소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방위만 보는 것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니 풍수의 원류가 될 수 없어 음택을 정함에 혈을 찾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양택에서 방위를 정하는 데는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