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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방구하기
험난한 여정 끝에 숨어있는 듯한 바닷가 마을 ‘까보 끄루스(Cabo Cruz)’에 도착했던 나는,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긴장까지 풀고 쉴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관광차 며칠 구경하다 쿠바를 떠날 게 아닌, 일정 기간 머물려고 작정을 하고 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을 구해야만 했는데......
가, 창 없는 방
첫 밤을 보냈고 잠은 잘 잔 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머문 방은 창이 없었다.
물론 소개를 받고 왔던 터라 첫 밤은 그런 방에서라도 잘 수밖에 없었는데, 일종의 ‘폐쇄공포증’ 같은 게 있는 나로서는 애당초 그런 방과는 맞지가 않았기에 다른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정과 현실#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그나저나, 내 여기서의 일정은 어떻게 되어갈까?’ 하게 되었다.
물론 나에겐 그게 최대의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뭔가 확실한 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바람이라도 쐬려고(이 곳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 숙소를 나왔다.
거리엔 두어 마리의 개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사람에 접근하지는 않았다.
너른 아침 바다는 잠잠했다.
멀리 고기 잡으러 가는 배가 한 척 보였으나, 얼마 뒤엔 이미 더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다른 배도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노를 젓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아직도 노를 저어 고기를 잡나?’ 그 현상이 놀랍다 못해 우습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건 내 시각일 뿐,
이곳 어부들의 삶이 그렇다면, 내가 뭘 어쩌겠는가.
그런데 돌아오던 배가 어느새 마을 가까이에 다가 오기에, 뭘 잡아왔나 호기심도 생겼고, 또 두어 사람이 그 쪽으로 가기에, 나도 천천히 따라가 봤다.
그런데 그들은 바다와 붙어있는 그 중의 한 집으로 들어가 거기 담 너머로 배가 잡아온 생선을 다루는 걸 바라보던데, 이방인인 내가 불쑥 끼어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다음 집 쪽으로 간다는 것이(물론 거기서도 구경을 조금 하긴 했지만), 마을의 등대에 가까워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마을 끝 ‘안토니오’ 영감님의 ‘나무집’에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저절로 발길이 닿은 그 집 앞에서 조심스럽게,
“세뇨르, 안토니오!” 하고 부르니,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난 듯한 영감님이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인상이 퍽 맑아 보였다.
물론 어제도 느꼈던 건데, 그 분은 인상뿐만이 아닌 건강상으로도, 대화를 해 보니 정신적인 면에서도 멀쩡한 것 같았다.
‘여든이라는 저 분은 나보다 십 몇 년은 연장자신데, 오히려 나보다 훨씬 정정하신 것 같아......’ 했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분은 반갑게 나를 집 안으로 들이더니 주방 쪽 탁자 의자에 앉게 했는데(어제는 그저 현관 문 안쪽의 의자에 앉아서 얘기만을 나누다 돌아갔기 때문에 못 봤는데), 혼자 사는 노인의 집이라 그러기도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저분했다. 집이 나빠서 그렇다기 보다는 청결 문제 때문 같았다.
특히 비닐식탁보가 너덜너덜 구멍 난 것도 모자라, 개인 접시 밑받침 천도 걸레보다도 더 헤진 모습이라, 위생적인 면에서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차라리 ‘딱하다’는 감정이 일 정도였다.
물론 내가 그런 걸 흠잡으러 온 건 아니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커피 마시겠어요?” 하고 영감님이 물었는데,
“아, 저는 커피는 안 마시고, 물만 주로 마시는데요......” 했더니,
물 한 컵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런데 컵도 때가 낀 상태였고, 또 어디서 퍼온 물인지도 모를 불결한 느낌이어서 선뜻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런 내색 않고 그 물을 받아, 내가 태연하게 마시는 것으로 둘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감님은 나를 환영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뭐든 대접하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이 과일을 아오?” 하고 석류 비슷한 색깔과 크기의 과일을 가져오더니, “이게 ‘치리모야(Chirimoya)’라는 과일인데 맛 좀 보슈.”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먹는 건데요?” 하고 묻자,
자신이 직접 칼로 그 반절을 자르더니,
“씨는 골라내고 그냥 빨아서 드세요.” 하기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갖다 대고 조금 빨아 보았더니, 그 맛이 괜찮았다.
“맛있는데요?” 하고 웃자,
“다 드세요!” 하고 인자하고도 환한 모습으로 좋아했다.
그렇게 내가 난생 처음 맛본 치리모야는 독특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의 열대 과일이었다. 그런데 어찌나 씨앗이 많은지 씨앗 발라먹는 게 일일 정도로 먹기가 사나운 과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엉성하게나마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하나를 다 먹어치웠는데,
영감님이, 내가 발라낸 씨앗과 과일 꼭지 껍질 들을 챙기려 하기에,
“아니, 제가 버리겠습니다. 제가 먹은 건데, 제가 해야지요. 그리고 버리는 것 정도야 저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하면서 내 손으로 그릇을 들고, 거기 뒤쪽으로 열려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니,
허름한 곳간 같은 공간엔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닭 몇 마리가 보였고 고양이도 한 마리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너무 불결해서,
‘아, 이런 데서 어떻게 산담?’ 하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그런 뒤 돌아오니,
“이건, 치리모야 주슨데......” 하면서, 이번엔 본인이 만든 거라며 또 한 컵을 따라주는데,
그 병 역시 어찌나 지저분한지 입맛이 싹 가셨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나는 내색하지 않고 살짝 쥬스를 입에 대봤는데,
“아니, 왜 이렇게 달아요?” 하고 놀라자,
“내가 단 걸 참 좋아하다 보니......” 하면서, “우리 쿠바 사람들이 단 걸 너무 좋아한다오.” 하기에,
“아, 그 얘기는 저도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사실 저는 한국에서는 설탕을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하자,
“그럼, 그 주스는 그냥 놔두세요.” 하고 다시 거둬가는 바람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사실 나는 그 쥬스를 도무지 더 마실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 분의 성의라지만, 너무나 비위생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듯 안토니오 영감님은 아들 토니가 소개해서 오게 된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뭐든 잘해주려고 애를 썼다. 더구나 어제 첫 대면에서도, 내가 윌리암과 방값 얘기를 하는 중에,
“우리 집에 머물면, 돈을 안 써도 되는데......” 하는 말을 하는 등, 내가 자신의 집에 오면, 그리고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하려고 이미 계산까지 해두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아침밥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나는 한국에서는 아침으로 ‘우유’ 한 잔에 삶은 달걀 하나, 과일 하나를 먹는다고 했는데,
그 즉시 그 분이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가서 달걀을 삶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아니, 그러시라고 말씀 드린 건 아니고......” 하고, 내가 당황해 하면서 말리자,
“어쨌든 아침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는데, 사실 좌불안석이면서도 반발을 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렇게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묶인 입장이 되어, 나는 윌리암 집에는 돌아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영감님은 결국 달걀 두 개를 삶아 왔고, 나는 그 중 하나 만을 까서 먹는 걸로 아침을 때웠는데,
영감님은 그러고도 뭐가 아쉬운지, 그 뒷마당에 있던 석류나무에서 마침 다 익은 석류 하나를 따 나에게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쿠바에 와서 또 마당에서 딴 석류 맛도 볼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의 것과는 조금 다른, 달짝지근하기까지 했지만.
그러면서 그 분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집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으면서,
“차라리 어제, 바로 우리 집으로 왔다면,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도 됐을 텐데, 그러면 돈 같은 건 들지도 않을 텐데, 윌리암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 여기로 옮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며 안타까워했다.
물론 나 역시 그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어제 처음 여기에 왔을 때부터, 비록 나무집이라 허술하긴 했지만 어디서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이 집에서 영감님과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그렇지만 오늘 보니, 내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 택시 기사가 ‘바야모’에서부터 윌리암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그랬고, 또 안토니오 영감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어서 그 중간에 있는 윌리암 집에 먼저 닿은 것도 나에겐 악재로 작용해,
무엇보다도 나는 이미 윌리암 집에 짐을 푼 상태라서, 여기로 옮긴다는 건, 안토니오 영감님(친구 아버지)과 윌리암 간의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터라서,
나에겐 절실하기도 했던, 윌리암의 집을 나올 수가 없는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에겐 고민이었다.
그리고 영감님이야 나에게 자기와 함께 지내자고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집안이 너무 더러워서), 만약 며칠이라도 머물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도 윌리암의 창 없는 방이 싫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아무튼, 그러니까 내 이곳에서의 체류의 열쇠는 이제 윌리암이 쥐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까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아무리 친한 친구 토니의 소개로 내가 왔다지만, 돈 문제가 결부된 그의 사업과 관계가 되는 일을, 그저 인정으로 두루뭉술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는 게 문제이기는 했다.
기껏 힘들여 ‘까보 끄루스’에 도착해놓고, 이제는 모든 게 해결됐다며 좋아해야 할 시점에 나는 또 다른 문제 앞에 막막해 해야만 했던 것으로, 우리네 인생사는 늘 한 가지가 끝나면 또 다른 문제점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도 했다. #
#그냥 떠나기에는...#
어차피 목적지인 이 마을엔 왔고 또 하룻밤을 잤으니, 이젠 뭔가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오늘 당장은 그렇게 될지 모르겠지만, 내일이라도 여기서 빠져나가 ‘아바나’에 돌아가 항공권 일정을 조정해 아예 쿠바를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머물 곳이 생기면 다행이고, 또 쿠바 자체적으로 다른 곳을 가서 일정 기간 머물다 예약된 항공권 제 날짜에 맞춰 떠나는 선택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룻밤을 자 보니, 여기 ‘윌리암’ 집에서는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아(부엌을 함께 쓰는 문제와, 방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살 수가 없는 현실이고,
그래도 기왕에 여기까지 찾아온 김에(그 험한 길을 찾아왔는데, 그냥 바로 나간다는 건 너무 싱겁기도 하고 뭔가 손해만 잔뜩 보고 돌아가는 기분에다, 또 오면서 쏟아 부은 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가게 되면 다른 장소를 찾아 또 그만큼의 험난한 과정을 되풀이해야 할 터라 그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 며칠이라도 머물며 추이를 지켜보고 싶은데, 벌써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 어쩐지 잘 될 것 같지 않은 쪽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윌리암의 집에선 오늘 하룻밤을 더 자는 걸로 하고(적어도 오늘은 어떤 식으로든 방을 알아봐야 할 것 같으니까.), 이따가 솔직하게 그에게 내 사정 얘기를 한 뒤,
그가 인간적으로 내가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머무는 걸 허용한다면(?), 이 마을에서 며칠간은 머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이 집이 지저분한 게 걸리기는 하지만, 며칠 정도 못 참을 나는 아니니까.
그런데 영감님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자,
전화벨이 울렸고, 내가 어디 있는지 궁금했던 윌리암이 건 전화였다.
그러면서 곧 여기로 오겠다고 했다는데,
차라리 나에겐 잘 된 일이었다.
그 얼마 뒤 윌리암이 도착했는데 영감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뭐가 필요한지 등을 묻는 모습을 보니, 혼자 사는 친구 아버지인 노인을 일정 부분 돕거나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기회를 노리다가,
“윌리암, 내 얘기 좀 들어 봐. 그런 뒤, 니가 상황을 판단해서 나에게 의견을 주면 고맙겠는데......” 하면서, “내가 어젯밤 자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니네 집에서는 머물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어. 물론 오늘밤 한 번 더 자기는 해야겠지만. 내가 이곳에 올 때 토니에게 제일 첫 번째로 강조한 것이, ‘요리하는 것’이었는데, 난 니네 집에서는 부엌을 함께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방에 바람이 안 통한다는 거야. 더구나 나는 화간데, 적어도 내가 사는 방안에서 뭐라도 보여야 그림도 그리고 할 텐데, 니네 집 방에선 불가능해, 그러니 더 머물 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결국은 내가 이 마을을 떠나게 될 텐데, 여기서 나가게 되면, 어쩌면 바로 쿠바를 떠날지도 몰라. 여기 쿠바는 여행하기가 너무 힘들드라구. 내가 여기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쳐있거든. 그리고 다른 옵션 하나는, 여기는 자연과 함께 하는 집이라, 나가기만 해도 바로 바다고 시원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여기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서 며칠이라도 머물고 싶은데, 나를 여기에 머물도록 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도 3자 대면이라 그런지 조금은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하더니, “그렇지만, 여기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라, 당신이 여기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머물게 되면, 당장 문제가 생길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놀랐고, 안토니오 영감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그가 설명한 내용은,
자기네는 어쨌거나 숙박업 등록(까사)이 된 상태라 내가 자기네 집에 머물면 그 기록이 남는 거고 그 기록이 정부에 넘어가, 내 체류기간 동안만큼은 자신이 내 보호자가 되기도 하고, 자기네는 나에게서 받은 숙박비용 중의 몇 %는 세금으로 내는 거라서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안토니오 영감님 댁에 머물게 된다면, 안토니오 영감님은 숙박업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내가 쿠바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이 조그만 마을에서는 금방 소문이 날 터라) 안토니오 영감님에게 복잡한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안토니오 영감님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던 듯,
“그런가? 나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고, 전혀 관심 밖이었는데......” 하며 안색마저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니가 한 말을 나도 이해하기는 하지만, 안토니오 영감님한테 문제가 생기는 건 나도 결코 원하지 않아. 물론 나는 그런 걸 알 턱이 없어서 그렇게 얘길 했던 것일 뿐이니, 그럼, 그 일은 없던 일로 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건, 이 마을을 떠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윌리암,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냥 떠나는 것보다는 다만 며칠이라도 머물다 가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지내는 건 여기서 지내고, 니네 집에 머문다는 식으로 서류처리를 해 줄 수는 없냐? 나는 범죄자도 아니고 큰 다른 일이 생길 리도 없으니......” 하고 보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정하는 식으로 물었더니, 그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것처럼은 보였다.
(물론 어제 오늘 그의 언행을 접하면서, 나는 이미 그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란 걸 인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토니의 가장 친한 친구라기에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얘기는 그 정도로 진행되었을 뿐, 하룻밤 더 자면서 총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나는,
“기왕에 이 집까지 왔으니, 내가 좀 더 여기에 있다가 점심 먹으러 갈 테니, 다시 얘기하자.”고 하는 걸로, 윌리암은 돌아갔다. #
#낙원의 노인#
윌리암은 돌아갔는데 안토니오 영감님이,
“우리도 이제 밖으로 나갈까요?” 하기에, 그 집 앞으로 자리를 옮겨 거기 바닷가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렇게 보이는 바다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바다가 활짝 열려있었고, 사진을 통해서만 보던 청록 옥색의 다양한 색깔의 변화를 보여주는 확 열린 바다의 물색이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 마을에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든 이 바다를 그릴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고, 또 그려보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는데,
그 앞바다엔 ‘맹그로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었고, 바위인지 조그만 섬인지에는 ‘펠리칸’이 앉아 있었고, 하늘에는 ‘군함조’로 보이는 새도 떠 있고, 그 너머에는 독수리거나 매의 종류인 새들도 몇 마리 떠 있는 등,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환경 속에 사는 이 노인이야 말로, ‘낙원의 노인’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갑자기 나는 또,
‘이런 곳에서 나도 좀 며칠만이라도 지내봤으면......’ 하는 생각 역시 굴뚝 같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 집의 청결 문제 같은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 같았고,
‘며칠이 아니라면 단 하루만이라도 있어 봤으면......’ 하는 식으로 마음이 움직이고도 있었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이 마을과는 이별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어쩌면 이것저것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거추장스럽던 상의 남방을 벗었는데, 그런 데서는 굳이 옷을 걸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안토니오 영감님은 이미 상의가 탈의된 상태였고, 약간 덥기도 했거니와, 그런 환경에서는 옷이 썩 필요한 건 아닐 거란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 노인이(?나도 60대 후반의 노인이니까.) 나무 그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누가 봤다면 매우 평화로운 모습이었겠지만, 물론 나 역시도 평화를 만끽하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곳에서 곧 떠나야만 할 불안한 나그네였다. #
#오리무중#
내가 점심을 먹으러 다시 윌리암 집으로 돌아오는데,
일요일이라 관광객들이 몰려온 듯 바닷가엔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환상적인 색깔의 바다를,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바다가 깊지도 않아 보였지만 물도 많이 빠져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한참 밖으로까지 나가 수영을 하거나, 거기에 서서 낚시를 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렇게 돌아오니 윌리암이,
"세뇨르 리(나), 당신이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머물게 되면, 하루 머무는 비용으로 나에게 5달러를 내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게 무슨 소리야? 5달러씩이나? 세금이 얼마나 나간다고, 그렇게나 달라는 거지?’ 하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즉각 거부의사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냥 싫다며 바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그러니 잠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일단 그것도 수용하기로 했다.
그 정도로 여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깔끔하게 차려준 점심을 먹고(그는 제법 요리도 잘 한다.),
오늘도 음식이 남아서, 저녁에 먹겠다며 보관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그가 플라스틱 통에 넣어 와서, 내 방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러고도 오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내가 머무는 윌리암네 방은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방은 멀쩡한데 바람이 통하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은 공짜로 살라고 해도 못 살 방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밖에 나가기도 마땅찮아서 방안에 있는 탁자에 노트북을 설치한 뒤 요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느라 바빴는데,
윌리암이 두어 차례 찾아와,
“세뇨르 리, 이렇게 바람도 안 통하는데 방에서 뭘 하세요?”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원래 밖으로 잘 안 나가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오늘 하루만 견디면 내일은 안토니오 영감님 집으로 갈 텐데, 하루를 못 참아? 게다가 만약 내가 지금 나가면 어디로 가라고?” 하고 그에게 되물으니, 그도 웃기는 했다.
그러면서 내가 정면에 난 창문 차단막만을 열어놓은 채 방에서 나가질 않자, 또 다시 들렀던 윌리암이,
“세뇨르 리,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하고 신기한 듯 묻기에, 그렇다고 그가 내 노트북의 한글 문서를 알 턱이 없으니,
“내가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냐? 그리고, 그렇다고 내가 나간다면 여기서 어딜 가겠어?” 하는데,
“덥지 않으세요?” 하고 아주 걱정스러운 듯 물어서,
“덥긴 한데, 더운 걸 어쩌라고?” 했더니,
“근데, 왜 에어컨은 안 트세요?” 하고 묻더니, 이제는 아예 자신이 방으로 들어와 에어컨을 틀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 우리 집에서도 그렇지만, 원래 이런 가전제품은 잘 안 틀어. 그저 내 일만을 할 뿐......” 하자,
“그럼, 선풍기라도 틀지 그러세요?” 하고 손가락으로 화장실 쪽 벽에 붙어 있는 선풍기를 가리키는데도,
“그것도 가전제품 아냐? 난, 선풍기도 마찬가지야. 우리 집에도 있지만, 1년 내내 그 비닐 포장도 안 뜯어, 그렇게 난 전자 제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하자,
그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돌아가더니,
그러기를 또 몇 차례, 저녁이 되도록 그 행위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걸로 보아, 그가 여간 활동적이거나 성격마저 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내 비록 이 방에 억지로 앉아 있기는 하지만, 왜 방을 창도 없이 만들어 나 같은 사람을 힘들게 해?' 하는, 무언의 불평도 쏟아 붓고 있었다.
물론 그 역시, 그렇게 방에 처박혀 있는 내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은 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문을 열어놓았더니 그 틈에 모기들이 방에 들어와(특히 화장실에) 있는 걸 보면서도,
‘사람 사는 곳에 모기 없으랴?’ 하며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게 문제였다.
두 번 째 밤을 그 방에서 잤다가 밤새도록 내가 얼마나 모기에 뜯겼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이 꽃 핀 듯 불긋불긋한 건 물론, 짜증스럽게 나에게 잡힌 한 마리에서 터져 나온 피가 어찌나 선명하고 붉은지, 기가 막히다 못해 억울하기까지 했다.
물론 죽은 놈을 밤새 배불린 내 피일 것이었다. #
나, 바닷가 집에서의 하루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는 불안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도 있었다.
#급변하는 상황#
또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 윌리암이 안토니오 영감님 집으로 짐을 옮기자며 서둘렀다. 그래서,
“윌리암, 내가 밤에 생각해 봤는데, 너의 의견은 일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하루에 5달러는 너무 비싼 것 같아.” 하자 그의 표정이 확 바뀌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쿠바에 와서 왜, 굳이 니 보호를 받아야 하지? 내가 이 집에 머물 때야 그렇다 쳐도, 나는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신분인데, 내가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머무는데 왜 윌리암 너에게 책임감을 안겨 줘야 하는지, 왜 내가 너의 관할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지, 나는 그게 이해도 잘 안 되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거든......” 하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별 얘기가 없었지만, 그게 동의한다는 건지는 잘 모를 상황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이제부터 굳이 나를 너의 영역에 넣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 쿠바에 관광객의 입장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하고 선언을 했고, 그도,
“알았다!”고는 했는데,
아무튼 이제 조금은 자유로운 심정으로 그 집을 나섰다.
윌리암은 내 큰 가방을 가슴에 안더니 그 모습으로 자전거에 올라 먼저 갔고,
나는 오늘도 걸어가면서 바다색깔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도 찍는 등 시간을 약간 지체했다.
그렇게 내가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도착하려는데, 어느새 돌아가려고 윌리암이 그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안토니오 영감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마, 내가 도착하기 전에 윌리암에게 뭔가 내 얘기를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는 너무 시골이라 일주일에 외부로 나가는 버스가 세 차례밖에 없고, 오늘 차가 있었는데 새벽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나갈 수가 없으니, 내일 모레 수요일 아침에 나가는 차로 돌아가세요.” 하는 거 아닌가.
“예에?” 하고 내가 놀라 나자빠지려고 하자,
“나는... 이런 복잡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는 것이었다.
내 예감이 맞았고(윌리암이 얘기를 했을 것이었고), 물론 그 말을 이해 못할 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실컷 여기서 지내겠다고 짐까지 들고 온 나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절망에 빠졌고, 그렇지만 그 말에 따라야만 했다.
어차피 윌리암의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나왔고,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서도 못 받아주겠다니.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다음에야, 그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오고도 싶었지만, 나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수요일인 모레 새벽 6시 반 경에 나간다는 그 버스를 탈 때까지는 좋든 싫든 여기에 머물러야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처분만을 바라봐야 할 내 자신이 초라한 건 물론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 내 신세가 처량했고, 한 순간에 내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 영감님한테는,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 때문에 영감님이 이런저런 문제에 시달리게 됐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는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집에 있는 게 편할 리는 없었다.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던 것이다. #
*
그래도 일단 그 순간이 지나자 영감님은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떠날 땐 떠나드라도,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좀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하면서, “혹시, ‘꼬꼬’(코코넛)를 아세요?” 하고 묻기에,
그 이름이 재미있기도 해서,
“‘꼬꼬’요?”하자,
바로 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따라 나갔는데, 집 뒤의 엉성하게 생긴 공터에 있는 야자수 나무에 달려있는 코코넛을 따더니, 직접 칼로 껍질을 벗기면서 손질까지 해서 그 안의 물을 마셔보게도 했고, 나중에는 그 껍질의 하얀부분도 접시에 담아와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어쩌면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인 나를 떠나보내기 전에 뭐라도 더 먹여서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런 걸 즐길 마음과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분의 순수한 마음을 읽었던 지라, 호응을 해드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 걸 먹으면서는 디카로 그 과정의 사진을 찍어 두는 등, 여기에서의 그런 경험도 기록에 남겨두기로 했다. 나 혼자 침울하게 있어 봤자, 그 상황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렇지만 흥이 날 리 없었던 나는, 틈틈이 허망한 심정으로 집 밖으로 나와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곤 했다.
앞으로 내가 이 쿠바를 떠나기까지, 그리고 어딘가로 행선지를 바꿔 움직이는 일까지에 대한 암울하기만 한 앞날을 생각하며, 그에 따른 스스로 마음 정리를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미 예약된 항공권의 출발일이 6월 8일이고(그러면 두 달이나 남았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출발인데, 그 때까지 어디에 가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왜 목적의식도 없이 이 쿠바라는 나라에 와가지고 이 고생을 다 하고 있다지?' 하는 쓰라린 후회만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안 돼 보였던지 안토니오 영감님은,
“한국에서 온 양반, 나 좀 따라와 보슈!” 하고 앞장서더니,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역시 해변의 한 나무 아래로 가, 미리 준비한 장대로 콩깍지 같은 열매를 따더니,
“이게 ‘따마린도(Tamarindo)’라는 건데, 한 번 껍질을 벗겨 보슈!” 하며 본인이 시범을 보이기에, 나도 그 중 하나를 집어 따라 했더니, 뭔가 끈적끈적한 진액이 손에 묻었다. 그러자,
“그걸 한 번 맛봐 봐요.” 하며 역시 시범을 보이기에 나도 따라 했는데,
아주 신맛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감칠맛도 있었는데,
“이것도 먹는 과일이라우! 주스로도 만들어 먹고......” 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모으기에 나도 도왔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걸 물에 섞어 주스를 만들어, 또 한 컵을 주기에,
즐겁지 않은 기분에서도 마셔야만 했다.
그런데 이 '따마린도' 주스는 시원하게 마신다면, 충분히 내 입맛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새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는 기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뒤에도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오후가 깊어가자 영감님이, 본인에겐 냉동 닭이 있다며 꺼내더니 그걸 녹이기 시작했다.
그걸로 소스를 만들어 ‘빠스타’와 곁들인 스파게티를 하겠다며, 일단 나에게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묻기에,
“제가 여기 먹거리를 잘 알면, 그리고 재료가 갖춰진 상황이라면 저도 요리에 참여를 하겠는데, 뭐가 있는지 뭘 넣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를 못하니, 뭐라 말씀 드리겠습니까?” 하고 난색을 표하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인이 직접 요리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마저 보기가 싫었다. 너무 비위생적인 주방인 건 물론, 내가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감님이 요리를 하는 틈을 이용해, 다시 잠시 밖에 나와 혼자 앉아 있었다.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영감님이 불러서 들어가 보니,
그리 짧지 않은 시간에 나온 영감님의 스파게티는 그런 대로 맛이 있었다.
물론 내가 배가 고팠던 이유도 있을 것이었지만.
별 다른 대화도 없이 저녁을 먹고 나는 설거지라도 도와드리려고 접시를 옮기려는데,
“그냥 놔두세요. 물 떠오는 데도 복잡하니, 내가 하리다.” 하면서 극구 말리기에,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어두워져 가고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또 잠자리가 걱정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어차피 이 집에서 자긴 해야 할 텐데, 영감님이 자는 독립된 방이야 그렇다 쳐도, 거실에 속하면서도 오픈된 한 쪽에 개인 침대 하나와 더블 침대 하나 등 세 사람이 잘 수 있는 침대가 있던데,
아까 눈여겨보니, 사람이 누우면 침대가 꺼질 것 같아서 그것도 나를 영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에 영감님이 침대 얘기를 하는데,
나에게 안방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예에?” 내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주인 방을 제가 차지합니까? 차라리 제가 밖에서 자지요." 하고 펄쩍 뛰었는데,
이 집에선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라면서, 이미 내가 잘 침대엔 모기장까지 쳐놓았다며,
이제는 본인이 잘 바깥의 침대 하나에 모기장을 치면서,
“여기는 바람은 잘 통하지만(나무 집이라 나무 틈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 그래도 밤에는 모기가 있거든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도 나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뭐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편함의 연속이었던 것인데, 갑자기,
"샤워 안 하실라우?" 하고 영감님이 묻는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 집의 샤워 시스템이 영 맘에 걸렸고, 타월도 제대로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아까, 아침에 나오면서 했기 때문에, 오늘 밤은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다지 덥지가 않으니......” 하며 난색을 표하자,
“편할 대로 하셔.” 하면서, “피곤해 뵈는데, 들어가 주무시든지......” 하기에,
이제는, 사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왔던 ‘광목’ 천이 큰 짐가방 바깥 지퍼를 열면 바로 꺼낼 수 있어서, 그리고 이럴 때를 위해 가져왔던 터라 그걸 사용하려고,
“저, 영감님, 혼자 사시면서 빨래하시기도 힘들 텐데, 저에게 홑이불(사바나)이 하나 있으니 꺼내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하자,
“생각은 좋은데요, 나는, 그런 빨래를 누군가 여인이 와서 수거해 가서 세탁해오기 때문에 직접 빨지는 않는답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 말고, 그냥 편할지는 모르지만... 편하게 자면 좋겠소.” 하기에,
그러지도 못한 채,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하면서, 이 집에서 유일한 독립 방에 들어가니, 거기는 그래도 침대가 반듯했고 이미 모기장까지 쳐진 상태였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 안으로 핸드폰만 가지고 들어가(나중에 시간이라도 보려고)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영감님이 방의 창을 열었는데, 거기로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니, 정말 더운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4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