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 정치 활동을 접고 지식소매상 유시민, 저자 유시민으로 돌아와 그간의 활동과 현재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며 보낸 1년. 이 책은 그러한 오랜 성찰의 기록이다. 오랜 성찰의 끝에서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이다.
그는 이 헌법의 조문들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아름다운 인간상과 세계상을 그리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이 조문들이 담고 있는 당위와 이상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임을 일깨운다. 또 단지 법률적이고 정책적 차원의 정보가 아니라, 온갖 과학적, 철학적, 역사적, 경제학적 지식을 참조해 민주주의와 인간, 자유와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이 책은 자신의 삶과 경험, 이념과 주장을 성찰하기 위해 씌어진 회고적 에세이의 성격을 갖는다. 저자 유시민은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감추는 객관적인 논설보다는, 그것을 진솔하게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에세이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25년 전 ‘항소이유서’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바 있는 그가 이번에 또 다른 반성문과 경위서를 들고 독자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저자는 좀더 근본적인 통찰과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보인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아니라 성찰과 참여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자 한다.
“내 개인으로서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야 15년밖에 남지 않았다. 영어 실력을 더 개선할 수는 있겠지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나는 한국의 ‘내수시장’에서 활동하는 ‘지식소매상’으로 살 운명인 모양이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더라면, 모국어만큼은 아니라도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영어를 읽고 이해하고 말하고 영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한국 독자만이 아니라 세계시민들을 상대로 세계인이 관심을 가진 주제를 연구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었을 텐데. 두뇌가 한참 잘 돌아가던 젊은 시기에 보냈던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정부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쓰고, 가치 있는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이런저런 조직을 만들고, 거리 시위와 집회를 여는 데 썼던 그 많은 밤과 낮. 그 시간들이 쌓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 거기서 느끼고 배운 모든 것들이 사회생활과 공직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지식인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기초 훈련도 받지 않고 전장에 투입된 소년병과 같았다. 요행히 살아남아 지식소매상으로서 시장의 한 귀퉁이를 붙들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었던 젊은 날의 그 일들은 내 개인이 지식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함께 가져가버렸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아무렇게나 뒤엉켜버린 내 삶을 돌아보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 짙은 아쉬움이 남는 것만은 또 어쩔 수가 없다. ...
내가 만약 지금 대학에 들어가는 청년이라면 무엇을 할까? 학문을 하는 데 필요한 영어 실력을 기르고, 수학과 라틴어와 한문을 공부하고, 철학과 물리학 분야의 고전을 읽을 것이다. 우주와 세계의 질서, 국가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필요한 지식 탐구의 도구를 풍부하게 갖추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세계시민과 소통할 정신적·학술적·문화적 능력이 있는 지식인.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287~289쪽)
“대한민국에는 부족한 게 많지만 무엇보다도 도서관이 부족하다. 재능이 입증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듬뿍 준다고 해서 노벨상을 타는 과학자가 나오는 게 아니다.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공공도서관이 가뭄에 콩 나듯 있을 뿐이다. 그나마 값비싼 건축자재를 써서 겉은 화려하게 지었지만 서가와 장서는 형편없이 부족하다. 건물을 짓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도서 구입비는 쥐꼬리만큼 책정한다. 그래서 공공도서관들까지도 왕왕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양서를 기증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처럼 도서관이 빈약한 나라에서 노벨상을 받는 과학자가 나온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동네의 작은 공공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있었을 때 나는 그런 정책을 제안하고 문화부 공무원들과 실무 협의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 없이 넓은 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를 구입해서, 또는 임대해서 그곳을 도서관으로 꾸미는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분원으로 지정해 운영 시스템을 넣고 학부모와 주민 자원봉사를 받아 운영하면 크게 돈이 들어갈 일도 없다. 이창동 감독이 장관을 너무 일찍 그만두는 바람에 이 기획이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두고두고 생각해도 아깝기 짝이 없다.“(295쪽)
“비서가 승용차를 운전해주고 전화를 대신 받아주는 서민을 본 적이 있는가? 냉난방이 잘되는 사무실에서 1억 원 연봉을 받고 근무하면서 해마다 두세 차례 이상 공식·비공식 외국 여행을 다니는 공직자가 서민일 수 있을까? 회의 시간에 상임위원장실 소파에 앉아 여비서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주말 라운딩 때 날린 티샷 비거리를 자랑하는 사람도 서민인가? 대한민국 0.1%에 들어가고 남을 만한 부자 기업인들과 마주 앉아, 봉사료 포함해 1인당 10만 원이 넘는 일식 메뉴로 스코틀랜드산 몰트위스키를 곁들인 만찬을 즐기기도 하는 사람이, 자기가 밥값을 계산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방송 카메라 앞에서는 너나없이 서민경제를 챙기노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사는 국회의원들이 서민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더 열심히,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자주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방문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보고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연구하고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299쪽)
“정말 필요하다면 헌법을 고쳐서 정치인을 수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과연 좋아질까? 정치인도 수입하자고 외치는 분들께는 슬픈 소식이 되겠지만, 답은 뻔하다. “수입해봐야 별수 없다.” 왜일까? 수출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는 정치인은 지구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무역자유화를 외치는 분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나라 미국에서도 정치인들은 별로 신뢰받지 못한다. 헤르만 셰어Hermann Scheer라는 분이 벌써 이 문제를 검토했다. 셰어는 독일연방의회 의원을 지낸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이다. 세계재생에너지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한 국제적 유명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Die Politiker이라는 책에서 주요 국가들의 정치인 신뢰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다. 몇 나라의 사례를 소개한다.“(308쪽)
“그렇지만 나는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법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명한 ‘맛집’을 경영하는 식당 주인 겸 주방장이 느끼는 자부심과 닮았다. 좋은 야채와 육류를 생산하는 농민이나 생산기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훌륭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좋은 재료를 가져다 멋진 요리를 만들어 수준 높은 단골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주방장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기존의 메뉴를 혁신하고 남들이 다 쓰는 양념을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방법으로 배합하는 요리사의 능력은 다른 전문 직업인들의 고유한 능력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나는 믿는다. 맛있는 음식으로 많은 고객들의 입을 즐겁게 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맛집 주인처럼, 나도 재미있거나 유용한 지식을 많은 독자들과 나누어 가지는 데서 행복을 얻는다.”(358쪽)
보수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불가피한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키려 한다. 어떤 질서든 상관없다. 전제군주제, 개발독재, 천황제, 심지어는 공산당 일당독재조차도 보수가 지키려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보수는 진보와 달리 경험주의적·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견해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익이 일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단결한다. 보수의 경쟁력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단일한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줄서기 문화와 냉철한 이해타산 능력이다. 그래서 보수가 망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부패로 망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보수의 힘은 일반적으로 진보를 능가한다. 보수의 무능과 부패와 나태함이 민중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진보가 승리를 거두며, 그 진보의 승리는 보통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68쪽)
“나는 ‘장로 대통령’의 탄생을 기뻐하는 기독교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왜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통령이 장로이기 때문에 국정을 잘 이끌 수 있을 것이라든가, ‘장로 대통령’의 존재가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을 파탄내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그가 ‘교회 장로’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다음번에 다른 종교를 믿는 대통령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실을 기독교가 그 종교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종교는 사생활에 속한다. 종교 활동을 대통령의 직무 수행과 뒤섞지 않는 한 어떤 종교를 어떤 방법으로 믿든 상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헌법 제20조의 정신을 무시하는 언행을 반복할 경우에는 대통령의 종교 활동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폭약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은 지난 5,000년 동안 여러 종교와 접촉하면서 큰 갈등 없이 그 종교들을 받아들였다. 몇몇 불행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여러 종교들이 직접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서로 인정하면서 공존해왔다. 이 공존의 규칙이 깨지면 국민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회 갈등의 목록에 종교가 추가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이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140쪽)
“내가 근자에 본 장관 가운데 제일 아무렇게나 ‘장관질’을 하는 사람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아닌가 싶다.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 댁 아드님이 크게 출세한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가 권력의 완장을 두르고 공공기관 문짝을 걷어차면서 사람을 쫓아내는 소위 ‘친북좌파 척결투쟁’의 선봉에 설 줄은 미처 몰랐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기자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은 것은 그가 맡은 부처와는 특별히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장관이 욕먹을 짓을 하면 그 욕이 결국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231쪽)
“그렇지만 나는 운이 좋아서 그런지 이런 정치보복의 광풍을 지금까지는 큰 탈 없이 견뎌냈다. 그러나 완벽하게 바른 삶은 몹시 드물다. 나도 끝까지 털어대면 먼지 나지 말란 보장이 없다. 환경운동연합 최열 대표처럼 20년 넘게 사재를 털어가면서 환경 보호에 헌신한 시민사회 지도자도 검찰의 먼지털이식 조사에 걸려 구속영장이 청구되지 않았는가.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기는 했지만 그는 앞으로 기나긴 법정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검찰을 동원한 일종의 공안통치라고 할 수 있는데,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모든 정치세력을 심리적으로 압박해 입을 다물게 하는 효과를 낸다. ‘털어도 털어도 먼지 한 점 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 덤벼!’ 이명박 정권은 지금 야당과 시민사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정작 자기네는 온몸 덕지덕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267족)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한 가지다.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 진보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싸운다. 예컨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려고 한다. 진보의 사고방식은 연역적 구조를 가진다.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추상적 공리公理에서 시작해 구체적 실천 전략과 전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일관성 있고 복잡한 논리 체계를 만든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의견이 갈라지면 누가 옳은지를 두고 논쟁한다. 그들 사이의 내전은 때로 보수와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고 처절하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향해 개량주의자, 베른슈타인주의자, 수정주의자, 이념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히틀러와 나치스는 진보파의 분열을 이용해 손쉽게 권력을 장악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는 마지막까지 프랑코에 대항했다. 그러나 공화주의 진영은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이념 논쟁과 무력 충돌 끝에 자멸했고 프랑코 군대는 바르셀로나에 사실상 무혈 입성하는 행운을 누렸다. 진보의 경쟁력은 이상을 향한 열정과 논리의 힘이며, 망할 때는 거의 언제나 ‘연합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망한다. ...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쓸 때,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내면이 충만해지고 삶이 온전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 일만큼은 어느 누구한테도 크게 뒤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 행복하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서 가끔씩은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나만의 행복이다. 다른 사람은 나와는 다른 일을 하면서 이런 행복을 얻을 것이다.”(32쪽)
“나는 「청춘예찬」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읽을 때 가슴이 설렌다. 괴롭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으랴만 조금은 별나게 괴로운 청춘을 보내서 그런가. 「청춘예찬」도 설레게 하지 못했던 내 가슴을, 겉모양은 영어 번역문처럼 못나 빠진 헌법 제10조가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렇다.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 존엄하고 가치있는 인간이다. 대한민국 최고 규범인 헌법이 내가 그런 존재임을 보증하고 있다.”(31쪽)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말은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대한민국 헌법에 그것을 적어 넣은 고마운 이는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나를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년들에게 괴롭기 짝이 없는 청춘을 선사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을 구별할 줄 몰랐던 사람. 그래서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국민을 학살하면서 권력을 움켜쥐었던 사람. 대통령이 뇌물을 받지 않으면 기업인들이 불안해져서 투자가 위축되고 국가경제가 멍든다는 ‘애국적 소신’에 따라 천문학적 규모의 뇌물을 받았던 사람. 29만 원에 불과한 재산을 가지고도 품격 있는 노후생활을 즐기는 현대판 이적異蹟의 주인공. 이름을 대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사람이 제5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협력한 어떤 헌법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1981년 여덟번째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행복추구권’ 조항을 넣었다.”(33쪽)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사건을 경험하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한 견해와 태도를 달리한다. 괭이갈매기의 동종살해와 인간의 대규모 동종살해를 보면서 안타까움과 연민과 분노를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진보적’이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이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인 만큼 불가피한 일이며, 무슨 수를 쓰든 간에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별 느낌이 없다면 당신은 이미 ‘보수적’이거나 앞으로 그리 될 가능성이 많다.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는 말이냐고 항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느 한쪽도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67쪽)
유시민 (작가프로필 보기) - 민주주의와 자유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나머지 20대를 거리와 감옥에서 보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유럽으로 가서 공부했다. 나이 마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책과 칼럼을 쓰고 방송 일을 하다가 2002년부터 정치에 직접 참여했다. 좋은 대통령 만들기, 좋은 정당 만들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하겠노라며 뛰어다녔는데, 성공한 일도 있고 실패한 것도 많았던 6년간의 정치 활동은 결국 2008년 국회의원 낙선으로 끝이 났다. 지금은 원래 직업이었던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와 글쓰기와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를 직업정치인들의 전유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이 정당과 정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글을 쓰고 강의하는 일도 더 좋은 정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독일 마인츠대학교 경제학 석사, 개혁국민정당 대표, 16, 17대 국회의원, 44대 보건복지부 장관
지은 책으로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의 경제학카페>, <대한민국 개조론> 등이 있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머리말 4 프롤로그 _ 권력의 역주행을 대하는 현명한 자세 11
1부 헌법의 당위
행복 29 | 자유 36 | 주권 42 | 유신헌법 47 | 양복 입은 침팬지 54 | 존재와 당위 58 자연 63 | 진보와 보수 66 | 지구 행성 73 | 파시즘 78 | 경쟁 85 | 국가 88 | 복지 94 헌법애국주의 100 | 애국자 105 | 국가 정체성 109 | 법치주의 115 | 미네르바 123 차별 128 | 종교 133 | 학생 인권 141 | 체벌 146 | 재산권 149 | 통일 154
2부 권력의 실재
대의민주주의 163 | 이무기 169 | 역린 175 | 대통령 178 | 알바언론 악플언론 183 낚시 189 | 국부 197 | 정치 중립 200 | 위선 206 | 카리스마 212 | 심기보좌 216 측은지심 222 | 장관 227 | 코드 인사 232 | 이미지 237 | 초심 240 | 인내 244 관운 247 | 피터의 원리 253 | 장관 매뉴얼 256 | 공무원의 영혼 260 | 부정부패 263 리더십 268 | 멍텅구리배 274 | 신임 280 | 영어 286 | 도서관 291 | 국회의원 297 정치인 수입 개방 305 | 정당 311 | 최장집 320 | 지역주의 330 | 민주당 334 사회자유주의 337 | 연합정치 343 | 장하준 349 | 지식소매상 356
에필로그 _ 선과 선의 연대를 위하여 361
대한민국 헌법, 권력의 역주행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대한민국 헌법, 권력의 역주행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의회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질서를 담은 첫 헌법을 공포한 순간부터 그랬다. (……)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선언한 대로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다 지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 본문 중에서
1년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유시민, 헌법을 말하다!
유시민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비판적 논객에서 방향을 바꿔‘정당 개혁’을 모토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할 때도, 캐주얼 차림으로 국회의원 선서를 하기 위해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을 때도, 참여정부 시절 여당 최고위원에서 복지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참여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난 6년간 늘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던 그가 2008년 18대 총선 대구에서 출마 의사를 밝히고 ‘예상대로 낙선’한 후,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다. 간혹 인터뷰나 방송토론 프로그램에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런 때에도 최대한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향후 행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지식소매상’이라는 글자가 박힌 명함을 들고 출판사 구석방에서 집필에만 몰두했다. 스스로 ‘유배 생활’, ‘내적 망명’이라고 이름 붙인 그 기간 동안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 책은 유시민이 정치 활동을 접고 지식소매상 유시민, 저자 유시민으로 돌아온 후 최초로 그간의 생각을 정리해 발표한 것이다. 오랜 성찰의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헌법’이다. 그는 이 헌법의 조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상과 세계상을 그리고 있는지 음미하며, 이 조문들이 담고 있는 당위와 이상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한다.
돌아온 ‘지식소매상’, 유시민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유시민은 경제학이라는 전공에 구애받지 않는 폭넓은 지식과 날카로운 시사적 감각, 촌철살인의 명쾌한 문장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논객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당시 시사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학생, 직장인, 지식인들이라면 그의 책을 한 권쯤 읽지 않은 독자들이 없을 정도였다. 오래전 씌어진 『거꾸로 읽는 세계사』,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는 아직도 수많은 독자들의 교양 욕구와 지식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그런 그가 ‘정당 운동’을 모토로 다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을 때, 독자들의 마음에 기대와 함께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런 그가 본격 교양 에세이 『후불제 민주주의』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사실 그는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열심히 글을 썼다. 그가 2003년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던 「유시민의 아침편지」는 정치인 블로그 글쓰기의 원조였다. 아침편지에 담긴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국감장, 의총장, 지도부 회의장에서 느끼는 단상들은 정치현장과 시민들의 일상에 다리를 놓았으며, ‘아침편지’ 팬들이 당원이 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의원생활을 접으면서 아침편지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팬들은 블로그에 유시민의 아침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아마 한국의 정치사에서 유시민만큼 글을 통해 소통하는 정치인도 드물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최장집 교수에게 논쟁을 청했던 국회의원이었고, 대선출마선언을 하기 전에는 의정 활동과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대한민국개조론』을 집필했던 ‘작가’였다. 이제 그는 정치인이나 작가 중 어느 하나로 분류되기 어려운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유일하게 그 경계를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작가, 혹은 하이브리드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유시민이 작가 선언을 해도 여전히 정치 활동을 계속하리라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책에는 언뜻언뜻 앞으로의 정치행보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다시 맹자를 읽으면서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챙긴다. 시비지심 가득한 자아를 내면에 담은 채, 측은지심에 이끌려 겁도 없이 공직에 뛰어드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다시는 그런 만용을 부리지 말아야지!” 226쪽, 「측은지심」 중에서
“정당개혁운동가로서 나는 지난 5년 동안 정말 비참한 실패를 겪었다. 이 실패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느낀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더 능력 있는 분들이 나타나서 내가 실패했던 그 일을 보란 듯이 성공시키는 것을 보고 싶다. 그 성공에 나의 아주 작은 힘을 표 나지 않게 보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319쪽, 「정당」 중에서
이 책은 독자에 대한 계몽적 관점에서만 씌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과 경험, 이념과 주장을 성찰하기 위해 씌어진 회고적 에세이의 성격을 갖는다. 저자 유시민은 자신을 감추는 객관적인 논설보다는, 저자의 육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에세이의 형식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는 극작가 출신 전 체코 대통령인 바츨라프 하벨의 회고록 To the Castle and the Back(2007년 출간)이 재직시절 일기와 서간문 모음으로도 충분히 문학적인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이 바로 낙선 정치인들이 흔히 보여주는 업적과시형 자서전이나 미셀러니, 정책 홍보용 책자들이다. ‘헌법’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과 정보를 기대한 독자라면, 혹은 단순한 정치 회고록을 기대한 독자라면 이 책의 구성과 어조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구성을 지닌 아포리즘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러한 단편들이 모여서 ‘헌법’이라는 복합적인 대상에 대한 가장 풍부한 해설을 이룬다. 독자들은 어디든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서 그곳부터 읽어 내려갈 수 있다. 헌법에 대한 지식과 저자의 정치경험, 개인적 삶의 단상을 ‘후불제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사유로 끌고 가는 이번 책은 ‘문학적으로 쓴 논문’이라는 에세이의 원래 정의에 부합하는 시도다. 그의 행보가 당장 ‘직업 정치인’으로 전환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정치가 직업정치인들의 전유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지닌 채, 정치와 글을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지금 ‘헌법’인가?
1년 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권력의 일방적인 독주에 항의하던 수많은 시민들이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헌법 제1조>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최근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도 ‘공공성’과 ‘공화국’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생각만큼 단단하지 못하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우리 사회가 공공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중요시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나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성찰의 목소리도 들린다. 한 사회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보되었다고 여기는 바로 그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로부터 위협당하고 무너질 수 있다. 찬란한 민주주의를 꽃피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거를 통해 집권한 히틀러의 경우를 굳이 재론하지 않더라도 많은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진실이다. 그때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백이 바로 이 ‘대한민국 헌법’ 첫머리의 선언이다. 이것이 저자가 지금 헌법 읽기를 제안하는 이유다. 그는 지금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환기해야 할 모든 원칙과 이상들이 다 헌법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과정과 그 근본적인 원인들을 정치 활동의 경험과 다양한 지식을 동원해 사유한다. 그중 핵심적인 몇 가지 분석틀과 용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후불제 민주주의 민주주의란 정직한 대가를 치러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인데, 한국 사회에는 그것이 이미 제도와 법 규정의 형식으로 먼저 주어졌기에 비용과 대가를 할부로 치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오래전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위해 누군가 흘린 피와 땀을 대가로 오늘날 우리가 현재의 ‘문명적’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전 로마의 노예들을 위해 싸운 스파르타쿠스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의 전사들, 1980년 광주의 시민들까지……. 이들이 전해준 것은 위대한 선물이지만 공짜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구현, 헌법 이념의 구현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며, 우리가 치르는 비용만큼 또 우리 사회와 인류 공동체가 누리게 되리라는 전언은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어떤 냉소적인 비평보다도 알찬 내용을 담고 있고, 또 더 큰 위로가 된다.
“헌법이 담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 조항 하나하나에는 인류의 문명사가 들어 있다.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 복지와 사회적 안정을 갈망하는 인간의 오랜 꿈을 담은 헌법 조문들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뇌하고 싸우고 노력하고 헌신한 동서고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쓰였다. 제헌헌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23쪽
양복 입은 침팬지’와 ‘왕조 시대의 문화유전자’ 현 정부가 ‘문명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진화생물학적 시각이 담겨 있다. ‘자유 민주주의’란 인류의 이기적 유전자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시킨 사회 제도라는 것. 이는 사유재산제도와 보통선거제도를 토대로 한 대의정치라는 제한적 의미만이 아니라 관용과 연대 등의 사회문화를 통칭한다. 복지 제도, 사회보장 제도 역시 이러한 문명적 진화의 산물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유전자는 여전히 고대의 생존전략이었던 ‘강력한 지배자와 수직질서’에 익숙하다. 양복을 입었지만 사고방식은 탕가니카 침팬지들의 반민주적 저문명 사회에 익숙한 엘리트들이 오늘날에도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로 인한 ‘문명 역주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각 개체가 이 상황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다는 ‘정치적 개명’을 하는 것이라는 주장.
“유신헌법은 조잡한 습작이 아니었다. 그 세련된 터치를 보면 전문가의 솜씨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독재의 폐쇄회로’를 디자인한 이는 누구였을까? 유신헌법은 두뇌는 명석하나 심성은 혼탁한, 소위 명문대학 출신의 법률 전문가들이 만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양복 입은 침팬지’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내 안에도 그 침팬지가 살고 있다. 이 침팬지를 제압하고 길들이지 못하면 문명이 야만으로 복귀한다.” 54쪽
“침팬지 무리가 성문헌법을 도입한다면, 제1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게 합당하다. 우리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주권은 ‘짱’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짱’에게서 나온다. 힘이 제일 센 수컷이 ‘짱’을 먹는다. 이 나라는 완벽한 파시즘 국가다. 제2조 영토 조항은 아마 이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영토는 강 옆 바나나 숲에서 뒤쪽 봉우리까지이며 허락 없이 여기 들어와 과일을 따 먹는 놈은 모두 죽인다. ‘짱’은 모든 암컷들에 대한 성적 결정권을 가진다는 둥, 수컷들은 예외 없이 사냥 참가 의무를 진다는 둥, 마초 스타일의 파시즘 국가에 어울리는 조항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81쪽
“왕국의 신민에게는 자애로운 ‘국부’와 ‘국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화국의 주권자에게는 대통령과 영부인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 마음속의 왕을 죽여야 민주공화국이 산다.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우리의 문화유전자 안에 남은 침팬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헌법적·법률적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고 5년 계약직답게 행동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백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서 인기를 잃는다. 사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하는 대통령은 권력 오남용을 거부하는 시민의 저항과 비판에 부닥쳐 인기를 잃는다. 우리 사회가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11쪽
법치주의 저자에 따르면 현 정권에서 가장 많이 오용되고 있는 말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본래 국민이 법을 잘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통치자는 법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대통령과 권력기관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이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다시 말해 통치세력은 법에 규정된 것 이외의 행동은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해서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청계천 광장에서 야간 촛불집회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다음과 같은 대한민국 헌법 제21조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면서 촛불집회를 주도한 단체 실무자들을 구속했다.” 112쪽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을 공공연하게 하면서, 텔레비전에 나와 국민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법치주의라고 설교하는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봐도 문명의 역사에 대한 교양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엄하게 보면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주권자인 국민에게 도전하는 발칙한 망동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120쪽
“검찰은 미네르바의 글이 국가 신인도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악영향을 미쳤는지 입증하지 않았다. 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국가권력이 이런 객관적 타당성이 전혀 논증되지 않은 주관적 심정적 판단에 따라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발부한다면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와 법치주의는 설 곳이 없어진다. 권력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처벌하는 인치만이 있을 뿐이다. 표현의 자유는 오류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만약 오류를 말할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표현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오류를 저지를 위험에서 벗어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검사나 판사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타인의 주장이 오류인지 아닌지를 재단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인간은 아니다.” 126쪽
헌법애국주의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의 용어를 빌린 것으로, 헌법이 규정한 공화국의 원칙, 공공성의 원리를 지키는 행위가 애국이라는 것이다. 공직자가 공무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도,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해국’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라스는 히틀러의 국가주의 범죄에 대한 악몽 때문에 애국주의라는 가치를 우파의 전유물로 방치한 것을 독일 좌파의 중대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신은 독일연방공화국 헌법 정신 실현에 기여하는지 여부를 애국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하면서 우파의 국가주의적 애국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헌법애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개념은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민족주의에 입각한 우파의 공격적 애국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03쪽
어느 사회자유주의자의 성찰과 회고: 정치적 이슈
이 책은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소재로 해 행복, 자유, 민주주의, 국가, 진보와 보수 등의 주제에 대해 온갖 정보를 참조해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논의를 펼친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헌법의 이상’과 대비되는 ‘권력의 실제 모습’을 다룬다. 저자 자신이 실제 정부와 국회와 정당 활동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회고하고 성찰함으로써, 헌법의 절차에 따라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는 정부와 국회의 권력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피는 것이다. 헌법이 말하는 당위만큼이나 권력의 실질적 작동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저자이기에 가능한 접근이다. 이로 인해 이 책에 담긴 논의들은 추상적으로만 흐르지 않고 훨씬 더 생생한 육체를 지니게 된다. 원래 이상와 현실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는 먼저 인정하고 출발한다. 거기서 시작해 당위와 실재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좁히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당위와 실재 사이의 거리에 반비례하며, 따라서 헌법은 곧 우리 사회의 민주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이런 포지션에서 그가 던지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나는 이 신문사의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대통령의 코드 인사 그 자체에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여러분 회사 사장님은 신입 기자를 뽑을 때 지원자의 철학적·정치적 입장이나 언론관을 무시하고 뽑느냐고. 문제는 코드 인사 그 자체가 아니다. 대통령의 철학적·정책적 코드가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합리적인 것인지, 공직을 받은 사람들이 정말로 그 코드에 맞는 능력 있는 인물인지, 그걸 따지는 것이 옳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도 진보 성향 신문들은 일관성이 있어서 좋다.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 인사를 쇠몽둥이로 내려쳤던 보수 신문들은 정권이 바뀌자 안면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코드 인사에 대해서 솜방망이로 때리는 것조차 망설이는 기색이 완연했다. 심지어는 YTN 사장에 대한 정치적 코드 인사를 하기 위해 이사회를 날치기로 연 것도 비판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장하준 교수의 책에서 한미FTA 반대론을 끌어낸다.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자신의 도덕적·정치적·철학적·이론적 견해와 경제적 손익계산에 입각해 한미FTA를 반대할 수도 있고 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다리 걷어차기’를 비판하는 장하준의 보편타당한 이론을 쌍방 간의 관세·비관세 장벽의 폐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한미FTA 반대 논거로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차원 혼동의 오류’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학자의 주장과 대통령의 선택을 같은 잣대로 재단해 규범적 평가를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경청할 가치가 있다. 감세, 산업과 금융에 대한 규제 철폐, 민영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에 필요한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인 동시에 선진 산업국의 경제 안정성과 삶의 질을 해치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필요한 사회통합의 기초를 파괴한다. 장 교수의 책은 공정하지 못한 세계무역 질서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선진 산업국 내부의 불합리한 경제 질서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이 비판은 또한 이미 산업국의 대열에 들어선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적절한 비판일 수 있다.” 355쪽
먼저 현 여당과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오른쪽 세력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이들은 거대 보수 신문과 재벌, 보수 지식인 집단과 손잡고 참여정부에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정부를 국민에게서 이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금 폭탄론, 좌익 포퓰리즘론, 대북 퍼주기론, 잃어버린 10년론이 대표적 사례다.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적 언급도 빠지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자유주의적’ 측면에 비판의 화살을 집중해 한나라당 세력과의 차이를 지우는 데 성공한 진보 진영은, 과연 그러한 담론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나? 진보 세력은 사실상 빈손이었고 값진 전리품은 거의 보수 진영이 챙겨가지 않았나?
“‘북한 주석궁에 국군 탱크가 진입하는 것이 통일’이라고 하는 극우 지식인들의 주장은 헌법 제4조 위반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 헌법은 헌법을 준수한다고 취임 선서를 한 대통령이 평화적 통일 정책 아닌 다른 통일 정책을 추진할 수 없도록 못 박아둔 것이다.” 155쪽
“그때 나를 향해 삿대질하고 소리 질렀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다시 당선되어 국회에 있다. 지금은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인사에 대한 야당의 공세를 막아내고 정부를 두둔하느라 여념이 없다. 공천을 받지 못했거나 낙선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스스로 낙하산이 되어 공공기관에 투입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이념 성향을 진보자유주의 또는 ‘사회자유주의’로 규정한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도 존중하고 사회주의자도 존중한다. 그러나 원칙도 일관성도 없이 오로지 이익만을 좇아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정치인은,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236쪽
“진보 정당들은, 내부에서는 많은 성찰과 자기비판을 하는지 몰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외부의 비판에 대해서 귀를 닫은 정당처럼 보인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당직자들의 분노에 찬 표정과 격앙된 목소리가 벌써 들린다. ‘나라 망친 짝퉁 진보 노무현 잔당아, 너나 잘하세요.’ 비판하는 쪽의 오류가 비판받는 쪽의 오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내가 모든 면에서 옳다고 확신해서 진보 정당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내 오류와 그들의 오류는 별개의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죄 많은 사람이 손에 든 촛불이라도 때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324쪽
물론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참여정부 세력에 대한 회고와 성찰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지지층에 대한 애정과 참여정부의 성과를 언급하면서도 ‘정치세력화하지 못했다’는 말로 아픈 속내를 드러낸다. 또 열린우리당이 ‘보수’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의 연합정당이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노선의 실질적 지지층은 사회자유주의 세력이었다고 설명하는 부분도 눈길을 끈다. 현재의 민주당에 대해서 그는 “사실상 호남 지역기반 위에서 보수 자유주의 세력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보수 야당이 되고 말았다”(336쪽)고 언급한다.
“나는 2005년 4월 2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당의장 선거에 출마해 4등 턱걸이로 집권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열린우리당이 붕괴할 운명임을 예감했다. 그 정당은 정신적으로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코앞에 두고 당원과 대의원 자격에 관한 당헌과 당규를 고쳤다. 그 결과 국회의원과 직업정치인들이 대의원 선출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후보들은 안타깝게도 대의원 줄 세우기, 금품 제공, 값비싼 식사와 향응 제공 등의 구태를 저질렀다. 어떤 지역에서 온 대의원은 유시민이 사회주의자, 빨갱이라는 색깔론이 돈다며 대회장에서 나를 붙잡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248쪽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시대적 과제에 잘 대응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의 구조적 양극화와 보수 편향의 담론시장,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 정책이라는 제약 조건을 극복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를 만들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집권 세력의 역량 부족은 대통령의 리더십과 집권당의 무기력, 그리고 집권 세력의 정치 기반 붕괴 등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나도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 책임을 물어 나를 국회의원직에서 해고했다. 나는 마땅한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343쪽
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언론에 대한 비판, 지식인 사회에 대한 지적, 집단으로서의 국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민주화 이후 일부 거대 보수 신문들은 알바언론에서 악플언론으로 변신했다. 그들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축적한 시장 지배력을 동원해 민주화가 창출한 거대한 언론 자유 공간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스스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되었다. 언론은 보도를 통해 국민의 생각과 가치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권력이다. 그런데 신문사 사주들은 자기가 임명한 경영진을 통해 보도의 내용과 논조를 배타적으로 지배한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기 때문에 교체되지도 않는다. 스스로 대자본의 소유자이며 사회적 특수계급에 속하는 이들 거대 보수 신문의 사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국민의 생각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하면 신문은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를 위협하는 흉기가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런 일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184쪽
“진보 정권을 무너뜨리고 보수의 역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언론권력을 아낌없이 행사한 거대 보수 신문의 행태가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그 무자비한 칼날이 무서워 법령과 도덕 규범을 어기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이 보수 신문들의 서슬 푸르던 감시와 비판의 칼날이 지금은 솜방망이로 변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거대 보수 신문들이 보수 정권과 유착하는 행태를 지속한다면 결국 이명박 정권은 권력형 부정부패의 늪에 깊이 빠지고 말 것이다.” 267쪽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시적 위협 요인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주권 의식과 책임 의식이 부족한 국민 자신이다. 억제할 수 없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욕망을 무제한 충족시켜주겠다고 공언하는 거짓 구세주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그리고 그 욕망이 충족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가차 없이 돌아서서 또 다른 메시아를 고대하는 무책임한 주권자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이 스스로를 계몽하고 발전시키는 꼭 그만큼씩만 앞으로 나아간다.” 53쪽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체험하는 상황이 반드시 벌어져야 할 불가피한 사태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냥 생략하고 건너뛸 수 있었던 상황 또한 아니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의 ‘문명 역주행’은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다수 국민의 욕망을 연료로 삼아 시동을 걸었으며, 아직도 그 동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과 보수 세력에게 권력을 맡겼던 국민들은 당황하고 있지만 아직 판단을 명확하게 바꾸지는 않았다. 국민들이 추가적인 연료 공급을 완전히 중단하고 남아 있는 관성의 힘마저 다 소진한 후에야, 비로소 이명박 정부의 ‘문명 역주행’은 멈춰 서게 될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역주행의 끝이 어디쯤일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1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