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평
신목(神木)의 내밀한 힘
녹나무의 파수꾼/히가시노 게이고/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2020.
이대영
▮추리소설 작가로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는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우리에게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제목에서 발견되는 살인, 탐정, 저주, 용의자 등의 단어에서 보여지 듯 그의 소설은 미스터리, 서스펜스, 추리, 반전 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서사의 핍진성을 제고하기 위해 일종의 수수께끼 서사기법을 사용하곤 한다. 작중인물끼리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추적해가며 독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서 레이토가 질문을 던지고 사실을 알고 있는 이모 야나기사와 치후네가 다시 나오이 레이토에게 과제로 남기기도 하며, 사람들이 녹나무를 찾는 이유와 사지 유미의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월향신사(月鄕神社)’를 찾은 이유, 가족 모르게 암행을 하는 아버지의 행태와 그가 녹나무에 하는 기념의 내용, 그리고 그가 만나는 여인의 정체, 레이토와 야나기사와 가문과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주거침입, 기물파손, 절도 미수로 유치장에 수감 중인 청년 레이토는 정체불명의 의뢰인이 보낸 변호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만일 자유의 몸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맡기고, 석방 후에 자신을 찾아와 지시에 따르면 변호사 비용을 전액 지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레이토는 석방되어 의뢰인이 이복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레이토에게 자신이 관리하던 ‘월향신사’의 ‘녹나무’ 파수꾼 일을 맡긴다.
녹나무는 지름 5미터, 높이 20미터의 우람한 나무로 마치 큰 뱀이 뒤엉켜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땅바닥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뿌리줄기는 굵고 복잡하게 이어져 있다. 거목의 옆구리에는 큰 구멍이 나 있으며 나무 안쪽에는 한 평 반쯤 넓이의 동굴 같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 녹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로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기도를 하러 온다. 또한, 녹나무 기둥에 소원을 써넣으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으로 낙서를 하거나 조각도로 나무기둥을 훼손하기에 레이토에게 관리업무를 맡긴 것이다.
레이토는 어느 날 순찰을 돌다 여대생인 사지 유미와 마주친다.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녹나무 안에서 무슨 기념(祈念)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인 사지 도시아키를 미행한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석 달 전부터 행선지를 숨기고 수상한 외출을 하는 일이 생기자 승용차에 GPS 장치를 부착하고 사실 확인에 나선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된 레이토는 궁금증이 일면서 사지 유미를 돕게 된다.
낮에는 녹나무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밤에는 기원을 드리러 오는 예약자만 받기에 녹나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기념의 내용이나 방문 배경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 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어 도시아키의 행위는 유미와 레이토에게 궁금증을 가증시킨다.
레이토가 목욕탕에서 만난 노인은 녹나무의 영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아니. 그런 거라면 여기서 입을 딱 다물어야지. 애초에 녹나무님 얘기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섣불리 발설하면 안 되는 걸로 되어 있어. 그런 짓을 하면 영험이 없어진다더라고. 게다가 그게 도저히 말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야. 설명해봤자 아마 믿지도 못할 게야.”(p.138.)
레이토는 노인과의 대화와 치후네와의 동행을 통해 야나기사와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고, 녹나무를 찾은 쓰시마와 그의 부인의 대화를 통해 기념의 내용과 효험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일단 염원은 열심히 했어.”
“전해질까요?”
“글쎄 말이야.”
“누구를 오라고 할 거예요? 역시 마사토?”
“마사토는 당연히 와야지. 그리고 미요코도 꼭 왔으면 좋겠는데.”
“언제쯤?”
“그건 본인들에게 맡겨야지, 언제가 됐건 내가 죽은 다음이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기념에 대한 것은
애들에게 말하면 안 돼.”(p.295.)
레이토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기념의 내용이 녹나무에 남기는 일종의 유언이며,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녹나무에 접속해서 기록된 메시를 꺼낼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녹나무에 대한 기념의 내용이 비밀로 지켜지는 것은 치후네의 판단을 통해 출입자의 허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엄격한 규칙이 전수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기념하러 오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깊은 사연을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 도시아키가 녹나무에 기념하는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도청발신기, 수신 장치, 녹음기를 들고 와 도청을 시도하지만 콧노래와 이와 동일한 피아노 연주소리만을 듣는다. 그러던 중 녹나무에서 나오던 아버지에게 도청사실이 발각되어 상황이 난처해지지만,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에 대해 추궁을 하며 이를 모면한다. 이에 아버지로부터 큰아버지인 사지 기쿠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쿠오는 어려서 신동이라는 말을 듣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그가 장남으로서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음악의 길을 택했고, 대학에서 음악적 열등감으로 자퇴한 후 접한 연극계에서도 자괴감을 느껴 행위예술가로 활동하다 결국, 좌절감에 알콜중독자가 된다. 형이 라임원에서 간경변으로 사망하게 되고, 어머니 다카코는 침해를 앓게 되어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도시아키는 어머니의 방을 정리하다 형이 어머니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의 내용은 “월향신사 녹나무에 맡겼습니다. 부디 받으러 가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월향신사를 찾은 도시아키는 ‘맡겼습니다’라는 의미가 자신의 염원, 즉 형의 ‘마음’을 맡긴 것임을 치후네로부터 듣게 된다.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믐날 밤에 녹나무 안에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염원합니다. 그것을 저희는 예념(預念)이라고 합니다. 예념을 하는 사람은 예념자라고 합니다. 녹나무는 예념자의 그 모든 생각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보름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뿜어냅니다. 그때 녹나무 안에 들어가면 그 염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혈연관계인 사람뿐이지요. 이런 편지를 남기신 것을 보면 형님께서는 어머님이 받아주시기를 원했던 것 같군요.”(p.374.)
보름날에 신사를 다시 찾은 도시아키는 녹나무 동굴에서 그의 형이 맡긴 것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후회와 감사의 마음, 그리고 이것을 피아노 선율에 담은 음악이었음을 알게 된다. 저간의 사정을 통해 유미는 아버지가 이를 악보로 옮기기 위해 만났던 사람이 그가 불륜녀로 오해했던 피아노 강사 오카자키 마나코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한편, 녹나무를 매번 들러 수념을 청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오바 소키에 관한 서사도 이어진다. 오바 가의 아들인 오바 도이치로와 그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던 오바 소키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미 사귀던 남자가 있던 가정부는 이미 임신한 사실을 알면서도 청혼을 한 오바 도이치로를 받아들이고 소키를 출산하여 그는 오바 가의 장남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친자관계로 차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한 아버지는 녹나무를 찾아 기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바 소키는 그가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아버지가 녹나무에 염원한 내용을 수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레이토는 아버지가 수념을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은 소키를 친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승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조언을 해준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는 아버지의 예념을 추론하여 수념하고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치후네가 고문직에서 해임통고를 받는 임원회의에 참석한 레이토는 야나기사와 그룹의 경영이념이 야나기사와 가에 전해 내려온 염원에 기초함을 역설하고 새로운 호텔사업도 치후네의 경영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결함 투성이었던 레이토가 이렇게 자기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녹나무를 통해 치후네가 자신에게 전했음직한 예념을 수념하여 얻은 지혜와 자신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치후네로부터 월향신사를 관리하는 후계자의 소임을 부여받는다.
▮월향신사의 녹나무 거목 기둥의 동굴에 들어가 소원을 빌면 언젠가 염원한 내용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은 전설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설은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염원을 특정 자연물에 의탁하여 한계를 초월하게 함으로써 그 소원을 이루는 서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 월향신사의 녹나무는 일종의 전설 속에 내재하고 있는 힘을 지닌 상징물이다. 치후네의 말처럼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언어의 전달기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자기의 의사를 진솔하게 전달할 수 없는 온갖 상황이 존재한다. 작가는 그것을 중재할 수 있는 매체로 월향신사의 녹나무를 상징화하고 기념과 수념, 보름날과 그믐날, 그리고 가계에 얽힌 비정상적인 혈연관계 등과 같은 소설 기제들을 설정하여 탄탄한 플롯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이끄는 서사의 힘은 인간적 믿음과 사랑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감정들은 시간과 공간 상황에 따라 언어로 표출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특히 가족, 혈육 사이에도 말 못할 사정들이 다수 존재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언어로 전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녹나무는 꼭 필요한 상징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도 분명, 녹나무와 같은 상징물이 존재한다. 이제 나도 녹나무 동굴에 들어가 주변사람들에게 전할 염원의 내용을 하나하나 메모지에 기록해 놓아야겠다. 그러면 내 혈육 중에 누군가가 내 속내를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내가 간절하게 지녔던 염원, 회한, 말로 전할 수 없었던 묵언의 감정들, 그리고 평생 동안 간직했던 나 자신만의 내밀한 속내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