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흐르는 내 마음의 선율
절 집의 범종 소리는 남성 바리톤처럼 깊고 무게가 있기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의 끊어질 듯 여운을 길게 끌다가 다시 울리는--- . 어찌 들어보면 , ‘속세의 규칙을 상징하는 듯한 박자’를 아예 망각해 버린 울림이라 나에겐 해탈(解脫) 내지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의 깨우침으로 추상되기도 한다. 그래서 깜깜한 신 새벽에 잠깨어 뒤척일 때, 먼 산사에서 범종 소리가 들려오면, 밤사이 ‘5감(五感)’이 잠들어 다소 여백이 생긴 내 마음에 큰 깨우침이 스며들기를 기원하곤 한다.
교회 종소리는 범종 소리에 비해 음이 높고, 박자도 빠르기 때문에 , 비교적 밝은 편이다. 또 밝기에 평화롭고----. 아무래도 감각들을 예민하게 세워놓는 밝은 낮 시간 동안엔, 교회 종소리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지난 일요일, 모처럼 변산 바닷가에 나가 들판 길을 걷던 중 어촌 교회 종소리를 들으니 한가로움이 비길 데 없었다. 평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늦가을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졸음에 빠진 농촌 들녘이 제격일 것만 같다. 그리고 청각적으로 표현하자면 들판을 가로질러 퍼지는 그 종소리이고-----. 그러고 보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 라는 전쟁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 헤밍웨이가 교회 종소리를 등장시킨 것은 아주 천재적인 구성이었다.
그 날 하루 동안 일어나는 해변의 풍경변화는 시간 그리고 빛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먼 들녘이 아주 엷은 뿌우연 빛으로 가려져 있었다. 한 낮이 지나서야 그 기운이 가셔 풍경은 맑고 뚜렷해 보였다. 저녁 무렵, 산등성에 있는 나무 숲 뒤로 해가 넘어가자, 그늘이 들판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풍경 색깔을 퇴색시키는 그 그늘이 바로 저녁 어스름이고, 그 어스름이 짙어지면 색깔은커녕 형체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되는 것이다.
해가 질 무렵엔, 시선을 들판에서 노을이 보이는 바다로 돌려야할 것 같다.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 하루 일을 마치고 포구를 향해 하얀 물살을 가르며 돌아오는 고깃배들 모습은 왠지 모르게 훈훈하게 만들었다. 위험한 바다 위에서 하루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 아니면 아침에 빈 배로 나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올 것이란 풍요에 대한 상상 때문일까 ? 이 때엔 ,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리 중 가장 단조롭고 투박하다 느껴온 어선들의 통통거리는 소음마저도 드넓은 그 저녁 바다에서는 정겹게 들리게 만들었다.
그 어선들 너머로 아득히 펼쳐지는 바다 끝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야릇한 동경심과 더불어 방랑자의 여수 비슷한 어떤 출렁임이 가슴에 이는데, 저녁노을까지 비치다보니----!
참 이상하다 ! 밝게 물든 아침 노을의 모습엔 힘찬 정열이 스며있어 보이는데 ---- . 그 웅장한 화려함이 저녁 무렵엔 왜 처연하고 애잔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저녁은 하루를 마감하는 과정이고, 가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과정이며 , 내가 속한 장년기는 삭막한 겨울 같은 노년에 이르기 직전 단계라면--- . 못다 이룬 것에 대한 아쉬움, 방황 가운데 상당 세월을 허비했다는 자각과 더불어 찾아오는 허탈감, 그리고 어느 듯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허무 등등이 그 저녁노을 속에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가을 격포 해변에서 하루 동안 내 마음에 흐르는 선율은--- .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서로 뒤 얽혀 구성된 비발디 ‘4계’ 비스듬한 교향악인가 보다.
끝
* 이렇게 멋있는 변산 해변 코 앞 ‘위도’에 ‘핵 폐기장’을 만들고 , 새만금 간척 사업을 하다니----! 관광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주민들이 화염병 들고나선 행동--- , 충분히 이해된다 ! 개발한다고 고색창연한 문화재를 망가뜨리고, 아름다운 자연미를 망치며 씨멘트를 덕지 덕지 쳐 발라놓던 개발 독재 세력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참 멋없는 정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