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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광복 70주년 기념행사에
백 경 화
몇 년 전, 대전 엑스포 광장에서 7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낮부터 시작하여 밤까지 이어졌는데, 대전 시민들은 물론이고 각 기관장님들도 다 참석해서 기념식과 축하 행사를 했다. 밤에는 가수들과 즐거운 무대행사를 하고, 행사가 끝나고는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했다.
해마다 축제가 끝나면 불꽃놀이를 한다. 하지만 펑 펑 몇 방 터지고 나면끝이었는데, 이날은 광복 70주년의 뜻깊은 행사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준비를 했는지 불꽃축제도서울세계 불꽃축제서나 보았던 아름다운 불꽃을 보았다. 낮부터 우리 대전 시민들이 많이 나와서엑스포광장과 갑천변은 대만원을 이루어 완전히 축제장의 분위기를 실감케 하였다.
오후 축하무대에서는 가수들과 대전 광역시장의 인사가 이어지고, 간드러진목소리의 김용림 가수와 박현빈 젊은 가수의 노래로 분위기는 더욱고조되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엑스포다리를 건너 강변으로 갔다. 사진촬영을 위해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일찍 가기도 했지만, 불꽃을 얼마나 높이 올릴 것인지 몰라 일단 멀찌감치 강 건너로 간 것이다. 거기에도 불꽃을 보려고 나온 많은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나와서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강물에 비치는 반영과 함께 ‘사진 촬영을위해 어느 곳이 좋을까’ 생각하며 강변에 자리를 정하고 사람들 틈에 앉아서 기다렸다. 무려 4시간을 그렇게 앉아서 기다렸다.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 했던가. 기다림은 희망이 있으니 행복하다.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듬으며 긴 시간을 기다렸다.
밤 10시경, 가수들의 노래가 끝났는지 잠시 잠잠하더니 행사장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졌다. ‘어머나!’ 하는 순간 하늘에서 따다닥 불꽃 튀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불꽃이 솟아오르는데, 하늘이 꽝 꽝 하며 쪼개지는 폭음 소리가 났다. 내 귀의 고막이 터지는 것 같이 크게 울려 가슴이 덜컹했다.
찬란한 불빛은 온 하늘을 수놓았다. 순간에 갑천의 강물과 하늘은 하나가 되어 온통 빨갛게 타오르고, 한 방 한 방 쏘아 올릴 때마다 소리는 얼마나 요란한지 내 심장은 물론 내 뱃속까지 울리고 흔들렸다. 옆에서 모두 감탄과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는 어디를 향해 쏘아야 할지 이리저리 휘두르고 불빛만 따라다니다가 포기하고 하늘과 강물을 보기에 바빴다. 하늘은 불빛으로 별의별 모양으로 수놓고 강물은 빨갛게 용광로처럼 지글지글 타올랐다. 그렇게 한동안 불꽃은 요란하게 이어지더니 갈 때는 말도 없이 흔적도 없이 가버렸다. 아쉬웠지만 통쾌한 가슴으로 일어났다. 그렇게 4시간을 기다렸던 불꽃축제였는데 불꽃 사진은 꽝을 쳤다. 한꺼번에 수십 개의 폭약을 쏘아 올려대니 범위가 너무 커서 나같이 일반 렌즈로는 한꺼번에 다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촬영은 못했어도 그리 섭섭하지 않았다. 시원하게 터지는 불꽃은 70년 전 그날의 자유 대한을 외치는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는 축제의 함성으로 들렸다. 너무 통쾌해서 태극기가 있으면 두 손에 높이 들고 마음껏 흔들고 싶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이 들은 사람들은 해방의 기쁨을 왜 모르랴.
나는 일제 식민지를 직접 살아보진 않았지만 우리 할머니 부모님들이 수십 년을 직접 겪은 일이라서 많은 예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어린 가슴이라도 울분이 치솟았다. 또한 나라를 뒤 찾기 위해서 우리 언니 오빠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싸우지 않았던가. 그때의 억울함에 분노와 슬픔은 평생을 두고도 깨끗이 씻어지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불꽃사진을 촬영하러 가서 생각지 않았던 해방의 기쁨을 맛보며 그날을 상기하는 날이었다. 좋은 사진은 못 담았지만 좋은 세상에서 편히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데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동안 서글펐던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듯 통쾌한 가슴으로 미련 없이 즐거운 축제의 밤이었다.
강릉 안반데기 배추밭
해발 1,100미터가 넘는 강원도의 높은 고산지에는 배추밭이 있다. 수십만 평의 배추밭은 그 옛날 나무 하나 자라지 못했던 황폐한 땅을 강원도의 공무원들과 화전민들의 끈질긴 노고로 기름진 옥토를 만들어 오래전부터 배추를 경작하게 되었다. 이곳 청정지역의 고랭지 배추는 맛이 좋아 전국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주부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8월 초라서 아직 배추가 덜 자라 이른 감이 있지만, 어찌하다 조금 늦게 가면 한쪽에서 수확해 버리면 사진 촬영에 공터가 있음으로 보기가 안 좋아 우리 사진동호회 회원들은 오늘 첫새벽에 만나서 출발했다.
대전에서 출발한 뒤 두어 시간 후, 대관령을 지나고 강릉을 지나면서 구불구불한 산길로 한없이 올라갔다. 아직 첫새벽이라서 하늘만 훤히 보이는 시커먼 산중으로 지그재그 덜컹대며 한참을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밖이 훤하게 밝아오며 산정에 올라선 듯, 산 능선이 보이고 배추밭도 보이고 ‘강릉‘ 안반데기'란 표지판도 보였다.
우리 일행은 다섯 시간여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해돋이와 함께 배추밭을 촬영하려고 꼭두새벽에 출발했지만 일출 시간이 임박했다.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배추 밭길로 오른다. 오르다 보니 벌써 동쪽 하늘에는 벌겋게 물들어 있고, 금방 해님이 출산할 것 같아몸과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가도 해님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그만 길가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거의 다 올라왔으니 배추밭과 일출을 담을 수 있어 기뻤다.
드넓게 펼쳐진 파란 배추밭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힘차게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조용히 받아 드리며 싱싱한 숨을 쉬고 있다. 맑고 신선한 공기는 어느새 내 온몸을 감싸 안으며 밤새 달려온 지친 영혼과 심신을 다독여 주었다.
‘와∼’ 이런 높은 산정에 이 많은 배추밭이 있다니. 이 많은 배추밭을 아름답게 꾸며 경작하는 사람들은 농부이기 전에 위대한 예술가란 생각이 들었다. 비탈진 언덕배기 땅에 줄을 띄워놓고 고랑 처서 심은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배추를 심어 놓은 모습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 한 폭의 예술 작품이었다. 외국의 넓은 푸른 초원이 이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곳곳의 배추밭 주변에 풍력발전기도 있어 더욱 멋스러움을 더해주고, 우리 농민들의 피땀 흘린 결과물이란 생각을 하니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10시경, 같이 온 회원들은 전망대가 있는 앞산 배추밭으로 올라가서 전국사진 촬영대회에 참석하고, 나는 반대편에 있는 배추밭에서 혼자 차근차근히 촬영에 들어갔다. 팔월의 햇볕은 따갑고 덥지만, 파란 하늘과 넓은 배추밭과 강원도의 산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여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두어 시간을 그늘도 없는 뜨거운 볕 양지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며 촬영하다 보니 더위와 갈증이 나를 조금은 지치게 했다. 나는 조금 쉬려고 그늘을 찾았다. 그러나 그늘이 없어 배추밭 가운데에 있는 빨간 집으로 들어갔다. "좀 쉬어가도 될까요?" 마침 50대 중반의 농장 주인인 부부가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었다. 더위에 지치고 목이 타던 터에 타 주신 뜨거운 커피믹스는 그렇게 맛이 있을까. 더울수록 뜨거운 커피가 생각나는 나에게는 정말 생명수였다. 그리고는 정수기의 찬물을 내 물병에 가득 채워 주시며 배추밭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도 들려주었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이 많은 배추가 출하되는 날까지 싱싱하게 잘 자라서 앞으로 우리 식탁에서뿐만 아니라 멀리 외국에서까지 영원히 사랑받는 김치가 되었으면 하고 마음으로 빌어본다. 최고로 더운 날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신 인솔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촬영하고 오니 어려운 숙제를 마친 듯 홀가분하고 한없이 기쁜 하루였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포토 시집「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일상의 소중함
노 복 래
지난해 2월 초순부터 전 세기적인 전염병 바이러스 코로나19로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년 남짓한 동안, 전 세계 인구 중 118,570,818명이 감염되었다. 사망자도 2,629,531명으로 지난 제2차 세계전쟁 시 발생한 사망자보다 희생자 규모가 크다.
특히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에서 많이 발생하였고,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국지적인 통제를 하는 등 엄격한 통제로 대응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정부의 선제적 대응과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생활 속의 큰 불편과 공포 없이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지난 2월 설 명절 때에 일어난 일이다.
예년 평상시 같으면 어머니와 동생들 내외 조카들까지 우리 집에 와서 묵고, 소란 법석일 텐데 이번 명절에는 코로나19 전염병의 영향으로 정부의 시책에 따라 우리 직계가족 끼리 모여 간소하게 조상님께 차례를 모시게 되었다.
예산에 사시는 어머니 댁에 가끔씩 들러 동생을 만나 서로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지만 명절에 못 만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차례를 지내고, 그 이튿날 큰 아들 내외와 손자와 함께 예산 집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세배도 드리며 산소에 가 조상님들께 성묘하러 집을 나섰다. 명절 끝이라 힘들 텐데도 아내는 밤잠을 설쳐가며 어머니께 갖다 드릴 음식을 준비하였고 큰애기는 싫은 내색 없이 내 의견을 따라 동행 하는데 무척 기분이 좋았다.
집에서 출발하여 당진고속도로에 들어서는데 앞좌석에 앉아 있는 큰아들 내외가 서로 주고받는 근심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내용인 즉, 이번 명절에 우리 집에 올 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큰애기 친구한테 맡기고 왔는데 그 친구가 고열이 나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간다는 걱정스런 대화였다. 순간 머릿속에 “아, 큰애기 친구가 혹시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면 그를 접촉한 큰아들 내외도 코로나에 감염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잖아도 오지 말라고 걱정하시던 어머니한테 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어 깜짝 놀란 나는 어머님께 즉시 전화를 드려 다음 주에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후 예산 집으로 가지 말고 다시 대전 집으로 가자고 핸들을 돌리라고 하였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 온 후, 큰아들 내외와 손자에게 우리 집에는 들리지 말고 너희들 집으로 곧장 가라고 이르고 나만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가 밤잠을 설치고 바리바리 준비한 음식을 도로 가지고 나만 혼자 집에 들어오니 영문도 모르고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했다. “왜 혼자서 돌아왔느냐? 점심때가 됐는데 애들은 집에 들러 점심도 안 먹고 갔느냐”며 성화다. 며느리에게 집에 들러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전화를 한 후, 아내는 며느리에게서 자초지종 얘기를 듣고 나서 상황 파악을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내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우리 가족도 혹시 전염병에 감염 될 수 있으니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당장 마스크를 쓰고, 같이 있지도 말고, 방에서 나오지 말고 밥도 따도 먹자”고 제안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전염병 예방을 위한 방송 언론의 힘이 정말로 크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TV와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매일 매일 코로나 전염병 발생 상황을 보도하고 있으나 그 일이 남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 왔는데, 그게 실제로 나한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다가 온 것이었다.
큰애기 친구가 오후 5시에 검사를 하고, 그 결과가 내일 아침에 나온단다. 만약 큰애기 친구가 감염되었으면 그와 접촉한 큰아들 내외 등 우리가족 모두가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결과 양성으로 나오면 격리 수용하여 치료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 하였다.
그 이튿날 8시경, 큰애기로부터 전화가 올 동안 마음이 긴장 되었고, 불과 20여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을 하였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마음의 정리를 하였다. ‘태어나서 수많은 사건과 일들을 겪으면서도 잘 버티고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코로나19 쯤 못 이길소냐’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두문불출이다. 평소 당뇨 심장질환 등 기저질환이 있는 남편을 항상 걱정하고 사는 사람이 나의 아내이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맑은 공기 마시고 숨 쉬며, 신문 읽고 걷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일상의 감사함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튿날 아침, 8시가 조금 지나자 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큰 애기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걱정끼쳐 드려 죄송해요. 검사결과가 나왔는데요, 음성이래요!”
친구가 명절 음식을 많이 먹은 탓에 장에 염증이 있어 체온이 높았다는 얘기이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 그래 다행이구나! 네가 걱정 많이 했겠구나, 고맙다! 이제 편히 쉬거라.”
불과 20여 시간으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나를 되돌아보고 일상의 모든 일에 새삼 감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좋은 기회였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현재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접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올 가을에는 정상적인 일상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보며, 의료진과 방역에 힘쓰고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뉴스 트래블(NEWS TRAVEL)
오 월 석
1996년 12월 26일에 자동차 2종 보통 운전면허를 취득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일을 잊어먹지 않는 것처럼, 나도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날을 기억한다. 2008년 봄에 다시 1종 보통 면허를 취득하여 내 운전면허증에는 1종, 2종 두 가지가 기재되어 있다. 그때 매형이 운전연수 비용을 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운전을 하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1997년부터 운전면허시험에 주행도 포함되고 연수비용도 많이 들어간다는 소식에 1996년 12월 말에 부랴부랴 취득한 것이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2년 뒤인 1998년 처음으로 자동차 운전대를 잡았다. 동생이 타던 차를 인계 받은 것이다.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한 레토나는 깍두기처럼 네모난 모양이었다. 5인승이었는데 뒷자리에 타려면 앞자리 조수석의 의자를 접고 타야해서 불편했다. 하지만 처음 운전을 하는 나로서는 나의 동작으로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검은색 레토나는 마치 군용차량 같았고 무게감도 있었다. 젊은이들한테 무척 인기가 많은 차종이어서 운전하며 설레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주 고장이 나서 짜증나게 한 차량이기도 하다. 내 기억으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수리를 한 것 같다. 레토나는 1단부터 5단까지 기어를 수동으로 변속해야 하는 차량이었다. 그래서 동생이 수 일 동안 연수를 해주었다. 동생은 해병대에서 26개월 간 운전병으로 근무한 베테랑으로 형의 답답한 운동신경에 한 숨을 쉬면서도 인내하며 지도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형이 동생에게 가르쳐 주는 법인데 우리 형제의 경우는 반대였다. 내가 대학교를 마치지 않은 시점에 동생은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덕길을 오르며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초보 운전자들이 언덕길에서 반클러치를 사용하지 못하여 시동을 꺼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초보와 고수는 언덕길을 오를 때 판가름이 난다. 한 동안 동생의 특강을 받고서야 큰 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초보운전 시절에는 시속 40km를 달려도 간담이 서늘하여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었다.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졸음운전을 하여 아찔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운 좋게도 사고는 없었다. 나는 올해로 23년간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라 생각하고 항상 조심하고 있다. 또한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 해도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 무사고 운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정상적으로 운전을 해도 중앙차선을 넘어서 내게로 오는 차량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운전하는 수많은 운전자들과 동물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한 번은 직원이 출근하며 고라니를 쳐서 자동차 번호판에 노란털이 끼여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차량도 부서지고 그 직원도 많이 놀랐다고 한다. 시골길을 운전하며 로드 킬 당한 동물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지금까지 내 차에 달려들지 않은 동물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2020년도 1월에 친한 동생이 장기 렌트를 하면 새 차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자신도 이번에 승용차를 3년간 렌트할 예정이라고 형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사실 나는 새 차를 타 본 적이 없다. 20여 년 간 중고차만 탔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새 차를 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보증금 1,400만원에 한 달 54만원씩 3년을 내야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내 생각에 결정타를 날린 일이 벌어졌다. 올해부터 노후 경유차가 시내에 진입할 경우 벌금을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전시 중심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여러 곳의 신호등 높이에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노후경유차 단속카메라’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타던 쏘렌토는 2005년에 생산된 차량이다. 단속대상에 해당되는 오래된 차량인 것이다. 쏘렌토를 구입할 당시 10만 킬로를 탄 차량이었다. 6년 정도 나와 달린 거리가 12만 킬로미터로 총 22만 킬로미터를 운행한 차량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내 비서역할을 충실히 한 검은색 쏘렌토에 정말 애정이 갔다. 차명은 쏘렌토 GLS, 차량번호 31거 5341, 검은색, 7인승 대형승용차이고, 2005년도에 태어나 2020년 1월에 생을 마감했다. 대전시에서 19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주었고 폐차비로 40만원 정도 받은 것 같다. 자동차정비소에서 마지막 성능검사를 지켜보며 아쉬운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그리고 사흘 뒤 지인의 카센터에 정들었던 쏘렌토를 맡기고 돌아오는데 서운한 마음이 너무 컸다. 무생물과 이별하는데도 이리 마음이 서운한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나는 쏘렌토에게 약속했다. 시간이 지난 먼 훗날에도 너를 잊지 않겠노라고.
2020년 1월 난 문득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으로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답고 좋은 곳이 많고, 내가 가보지 않은 도시도 너무 많았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운전하기도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아 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차종을 9인승 카니발로 정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 명을 ‘NEWS TRAVEL’라고 지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으로 한 번씩 1년에 총 4번 여행을 가보자는 취지였다. ‘NEWS’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라는 의미로 NORTH(북), EAST(동), WEST(서), SOUTH(남)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news’는 14세기 후반 new의 복수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의 옛말로 "새로운 것들"을 의미하는 nouvelles(이는 중세 라틴어 단어 nova를 성경 번역할 때 사용되었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어원이 제일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차를 구입하면서 계획했던 ‘NEWS TRAVEL’ 은 생각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겨우 어머니, 조카들, 아들들을 데리고 서해 홍원항에 갔던 것,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퓰리처상 수상 사진 작품을 구경하고 작은 고모님 댁에 다녀 온 것이 전부였다. 차를 구입하고 9개월이 지나서야 나의 목표가 이루어 졌다. 내게 사랑하는 애인이 생긴 것이다. 애인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NEWS TRAVEL’은 현실이 되었다.
남쪽(SOUTH), 9월 말,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달려 우리가 갈 곳은 장방산 실상사였다. 운전하고 내려가던 중에 함양휴게소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졸음을 쫓았다. 친구는 운전을 하는 나에게 갖가지 과일을 먹여주었고 난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아이들을 키우며 연가를 내고 놀러간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부모님과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하거나 서예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해 사용한 연가가 대부분이었다. 나를 위해, 나의 즐거움을 위해 쓴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었다. 내 친구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고 이야기가 잘 통한다. 둘 다 사찰을 좋아하여 시간될 때 같이 가자고 했고, 이번 여행이 첫 방문지였다. 실상사는 내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간 것이고, 맛집을 따로 찾지 않는 것이 나만의 여행방법이었다. 사실, 나는 먹는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다. 사찰 주변의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서 먹는 것이고 그날은 두부김치를 먹었다. 식당이 허름하긴 했으나 허기를 달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실상사에 가려면 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으로 흘러가는 물의 수량이 웅장했다. 논에는 벼가 한창 자라고 있었다. 실상사는 평지에 있었고 절이 규모는 크지 않으나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절 내에는 대나무숲이 있었다. 친구가 땅 바닥에 글씨를 썼고, 같이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지었다. 커다란 고목에 만들어 놓은 그네에서 여유도 즐겨보았다.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쫓아가는 유혈목이(뱀)와 죽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개구리, 이 조용한 사찰의 한 구석에서 먹이사슬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황색 상사화가 화단에 가지런히 피어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황홀한 파랑색이었다. 사찰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판의 한자를 설명해주니 친구가 너무 좋아했다. 실상사를 나서 지리산 노고단 주차장에서 저녁노을을 기다렸다. 내가 대학교 다니던 1997년에 본 황홀한 붉은 노을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노을을 보긴 했지만, 내가 전에 보았던 그 노을은 아니었다.
서쪽(WEST), 10월 초, 충남 예산군은 대전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도시이다. 대전에서 고속도로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유명한 사찰인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덕숭산 남쪽에 자리한 수덕사는 산 중턱에 있어서 등산하듯 걸어올라 가야 한다. 대웅전 뒤쪽에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버티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소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을 문화기행 때 한밭문학회 문인들과 들렀던 곳이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수덕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확 트인 시야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수덕사에는 전시장도 있어서 운치 있었다. 사찰을 구경하는 것도 행복한데 미술가들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작품들을 감상하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사찰여행을 와서 덤으로 얻은 그림 관람은 우리 둘에게 큰 기쁨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나서 “내가 애인이 생긴다면 꼭 서해의 황금들판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했고, 그 약속을 오늘 지키게 되었다. 서해안의 황금들판을 가르며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은 황홀했다. 우리는 어느새 춘장대해수욕장에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또 노을을 기다렸다. 저녁 6쯤 되니 바람이 세게 불어서 구름의 이동이 빨랐다. 높은 하늘에는 한바탕 구름과 태양이 만든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졌다. 바람이 차서 모래사장에 서있기가 힘들었지만 구름이 천사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이 환상적인 장면을 친구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여행이었고 지인의 소개로 간 횟집에서 십여 가지 해산물로 배를 두둑이 채웠다. 몸과 마음이 충만한 하루였다.
EAST(동), 12월 말, 오늘은 동쪽으로 달리는 날이다. 친구가 나의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보리차, 커피, 과일 등 한 가득 음식과 음료를 챙기느라 계획보다 1시간 늦게 출발했다. 오늘 방문할 사찰은 천년 고찰 영주시의 부석사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학교의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건물이다. 우리는 중간에 졸음 쉼터에서 한 번 쉬고 무량사까지 내달렸다. 거의 3시간이 걸렸고 우리가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40분 정도 되었다. 주차장 근처에 ‘자미가’라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손님은 없었다. 코로나 19의 영향과 을씨년스러운 오늘의 날씨 탓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좀 지난 시각이기도 했다. 우리는 ‘산들정식’을 시켜서 먹었는데 묵, 고등어, 감자전이 나오자마자 깨끗하게 비웠다. 무엇보다도 청국장이 일품이었다. 우연히 찾은 식당이 맛집이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
부석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건축물이 고풍스러웠다. 돌산에 어떻게 건물을 짓고 천년을 지내왔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탱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 많은 고풍스러운 건축물들과 대조적으로 무량수전은 색채감이 있으며 단아하고 반듯하게 지어져 있었다. 건물을 보면 바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질 정도로 아름답다. 무량수전 왼쪽에는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돌이 있는데, 그 돌 때문에 부석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찰을 다 구경하고 나올 때 쯤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졌다. 날씨가 흐려지면서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우리는 서둘러 무공해 사과를 두 상자 산 뒤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그런데 대전을 향해 가면 갈수록 눈이 많이 내렸고 난 핸들을 꽉 잡아야 했다. 혼자도 아니고 친구가 다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생각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내비게이션이 고장이 났는지 안내에 따라 갔더니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미끄러운 하얀 눈 때문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초보시절 처음 운전대를 잡은 것만큼이나 긴장되었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도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눈은 가면 갈수록 굵어졌고 반대편 차선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사고 난 검은색 승용차량도 보였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은 1시간가량 더 이어졌다. 급기야 생각해 낸 것이 가까운 고속도로 IC로 진입하여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시골길에는 차량이 다닌 흔적도 없어 차선이 보이지 않는 도로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검색해보니 추부 IC가 20분 거리에 있었고 천만다행으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친ㄱ를 안전하게 귀가시켰다는 안도감에 뿌듯했다. 앞으로는 일기예보를 더 꼼꼼하게 체크해야 할 것 같다.
NORTH(북), 2021년 1월 말, 강원도 고성에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산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설악산이 있다. 설악산 근방에 월정사와 화암사가 있는데 두 군데 모두 둘러보았다. 강원도는 멀어서 당일 코스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1박 2일의 여행일정을 잡았다. 월정사에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사찰로 가는 도로가 얼어붙어 있고, 월정사 주차장에 내려서 느낀 것은 몸이 아릴 정도로 춥다는 것이었다. 점심에 든든히 먹었던 황태정식도 무용지물이었다. 웅장한 전나무와 대웅전 등의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어 주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전나무숲길을 걸으며 본 설경은 추위에 의한 통증으로 보이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오겠나?’ 하는 생각으로 몇 번 사진을 찍긴 했지만 저녁이 되어 기억나는 것은 추위뿐이었다. 애인이 챙겨준 목도리가 아니었더라면 내 손이 과연 제대로 남아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육군 2사단 노도부대에서 훈련병시절 찬물에 걸레를 빨고 테이블을 닦던 시절, 내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날 정도였다. 난 몇 시간동안 훈련병 시절을 다시 상기시켜야 했고 고통스러웠다. 저녁에 해변의 수산시장에서 산 광어회, 소라, 소주가 언 내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둘째 날에는 해장으로 곰치탕을 먹었다. 그런 후에 속초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에서 바다를 보며 여유 있는 시간을 가졌다. 겨울바다의 파도는 거세고 웅장했다. 속초 시장에서 몇 가지 특산품ㄷ 샀다. 지방으로 가서 사는 지방색이 풍부한 특산품을 사는 것은 행복하다. 지역의 경기활성화에 조금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보람도 있다.
화암사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화암사 주위를 둘러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하여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여행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는 사진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는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으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옛 추억을 불러들여 안주삼아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는 강원도 횡성에도 들러 곰탕 한 그릇을 든든하게 먹고 내려왔다.
살다보면 모든 일은 내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실망을 시키기도 한다. 나와 잘 아는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를 슬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NEWS’의 어원이 프랑스의 옛말로 "새로운 것들"을 의미하는 nouvelles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나는 ‘동서남북’에서 온 새로운 소식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그래서 기획한 나의 ‘NEWS TRAVEL’은 애인을 만나면서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도 선물을 주고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서고 건강하고 행복해야 부모님도 섬기고 자식들도 보살피고 지인들과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새 차를 구입하여 동서남북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한 나, 어느새 시간은 지나서 그 작은 꿈을 이루었다. 새삼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도와주신 매형,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준 듬직한 동생, 나와 동서남북 여행을 함께 해준 애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오늘 이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나의 가치관은 ‘NEWS TRAVEL’로 실천되었고,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2017),
moon5865@hanbat.ac.kr
집
우지강
‘집’이란 보잘것없으면서도 큰 의미를 가진 말이다. 가정이라는 단어를 사회라는 큰 환경 속에서 놓고 보면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담으면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집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대체할 수 없는 공간과 각종 정감과 책임을 결합한다.
집은 행복의 공간이다. 집은 자기감정을 자유롭게 풀고 수양을 쌓는 곳이다. 이 공간은 아늑함과 포근함으로 가득하다. “금과 은으로 만든 집이라도 풀로 만든 집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공간에서는 관현악기가 귀를 어지럽게 하지 않고, 공문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며, 사랑하는 가족과 대화도 나누며 조용히 앉아 책도 열독할 수 있다. 비록 누추하다할지라도, 집은 향기로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찬 공간은 동시에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집은 하나의 의지할 장소이다. 집을 멀리 떠나 아무리 밖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더라도, 집은 항상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역만리에서도 당장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집이기도 하다.
집은 희망이다. 집은 희망의 시작이고 버팀목이다. 화목한 집안은 아름다운 생의 출발점으로 분투의 신심과 힘을 주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희망을 실현함에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집은 우리에게 희망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 장소가 된다.
집은 책임과 의무의 공간이다. 집은 비록 독립적인 사회 단위이지만, 이러한 독립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는 외부 세계와 복잡하게 얽히는 관계를 가지고, 위로는 부모가 아래로는 자녀가 있고, 밖에는 친척 친구가 있으며, 부모에 대해 봉양의 의무가 있고, 자녀에 대해 양육의 책임이 있고, 친척 친구에 대해 서로 돕는 정신이 있다. 이런 복잡한 관계망의 합류지인 집은 가족구성원에게 책임이 부여되고, 이는 가족과 사회를 연결하고 발전시키는 동기가 된다. 그리하여 자아를 강하게 하고 꿈을 좇게 한다.
집은 그리움의 공간이다. 인자하신 어머니와 믿음직한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는 공간이다. 멀리 집을 떠나온 나의 몸에는 어머니가 손으로 쓰다듬어주시던 사랑이 배어 있다. 가끔, 어둡고 조용한 밤이 되면 달빛이 창문을 통해 물처럼 내 침대 앞에 쏟아질 때가 있다. 이때 나는 시선(詩仙) 이백(李白)의『정야사(静夜思)』를 중얼거리곤 한다.
침상에 기대어 달을 보니(狀前看月光)
서리 내린 듯 하얗구나(疑是地上霜)
눈을 들어 산 위의 달을 바라보고(擧頭望山月)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低頭思故鄕)
집은 하나의 귀착점이다. 가을에 낙엽이 뿌리 근처로 내려앉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기에 집은 인생의 출발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예전에 내가 산전수전을 겪었든지, 혹은 크게 위세를 떨쳤든지를 막론하고, 나이가 들면 우리의 의식은 결국 낙엽처럼 태동한 곳을 지향하게 된다.
우리 삶의 여정에는 험난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고난도 있고, 오색찬란한 세계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떤 장벽도 집이 주는 행복과 너그러움, 삶에 대한 의욕, 가족애와 열정적 삶에 대한 동기부여, 타향에서 경험하는 그리움 등을 막을 수는 없다. 비록 인생의 꿈을 실현했다고 해도, 집은 여전히 인생의 출발점이자 돌아가야 할 귀착점이다.
※ 중국 산둥성(山东省) 지닝시(济宁市) 출생, 산둥경제학원(山东经济学园) 졸업, 한밭대 경제학과 석사과정,
niuzhigang@naver.com
선(線)
이 대 영
나이가 들면서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여기에 ‘빈둥거린다’는 주변의 질책만 없으면 금상첨화 아닌가. 그런데 ‘무위(無爲)’가 꼭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가(道家) 사상의 핵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자연에 순응하며 놀고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노자 어르신은 선(線)을 긋지 말라고 하셨다. 선을 그으면 피아가 구별되고 선과 악, 높고 낮음, 밝고 어둠이 갈라지면서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르신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최고의 선(善)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신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다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선(線)을 긋지 않고, 순리대로 흐르는 물을 그냥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렇게 살기에는 요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4대강에 설치된 보 수문을 두고도 여네 마네, 파괴를 하네 마네하며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선(線)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상은 모두 선으로 분할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 선의 안팎에는 엄격함이 존재하여 선을 침범하거나 탈선하면 바로 제재가 따른다. 그러기에 노자 어르신은 문화를 인류의 욕심이 낳은 산물로 보고 ‘무위자연’을 역설하신다. 문화가 인류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하였으니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고까지 하신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발 벗고 달려가 스승으로 모실만한 탄복할 말씀이시다. 이는 인위적 행위로 문화를 창조하여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유가사상에 대한 대립적 관점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꽤나 매력적이다. 문화가 천지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점(點)이 욕심의 출발이라면, 선(線)을 확대하고 면(面)을 높이는 것은 인간의 과욕이다. 이러한 과욕은 곧 이웃 간 불화와 다툼을 낳는다. 우리 선조들은 선을 긋는데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지형의 고저에 따라 서로 양보하며 담을 쌓고, 물길을 트고, 인도를 내고 살았다. 새마을운동 때는 자신의 땅을 내놓아 동네 길을 확장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선을 다시 그으면서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웃으로 통하는 길목을 사유지라는 이유로 막는가하면, 대대손손 내려오던 가옥의 담장을 허물고 물길을 막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주로 시골로 이사를 하거나 휴식처를 마련하려는 외지인들이 개입되었을 때, 더 극열하다. 물론 선이란 영역 다툼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가장 명증한 방법이다. 또한, 선의 영역에서 사유재산을 인정받고 보호하려는 사람들을 비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때의 선은 물리적 가름이다. 사물의 성질과 현상을 파악함에 동반되어야 할 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우리는 ‘선’ 또는 ‘도’를 넘었다는 표현을 쓴다. 이때의 선은 물리적 선이 아닌 보편적 개념의 도덕성을 의미한다. 물리적 개념의 선을 지나치게 우선하다보면 도덕적 마찰을 일으킨다.
지난달, 시골집에 갔던 나는 이웃집이 경매로 팔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아버지, 아버지로 삼대 째 이어오는 집에 젊은 부부가 아들을 낳고 살기에 꽤나 기특해보였다. 더구나 간간히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귀를 즐겁게 했다. 그런데 두 부부가 워낙 게을러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전답을 모두 처분하고 동네를 떠나게 된 것이다. 사정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도와주려 했지만, 이들 부부는 더 이상 고향에 미련이 없는 듯했다. 고향이기보다는 시골을 떠나 도시에 나가 살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있는 듯했다.
코로나 기간에도 경매물건을 잡기위해 현지답사를 오는 외지인들이 동네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돈을 좇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들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다가와 질문을 하는가하면, 우리 집 바깥마당에 차를 대놓고 이웃집을 들락거렸다. 이러한 불청객들을 바라보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집이 팔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이웃집 대문 밖에 있던 우리 집 상수도 계량기를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측량을 하여 선을 긋기도 전이었다. 사유지라 하니 어차피 마당에 수도도 하나 놓을 겸 거금을 들여 계량기를 옮겼다. 이사도 오기 전에 이웃과 공유하던 계량기를 옮기라고 했던 외지인의 요구는 입소문을 타고 동리에 금방 전해졌다. 그리고 이들의 동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후 영역을 표시하는 붉은 플라스틱 말뚝이 땅에 박혔다. 우리 집 담장 안으로 그들의 영역이 일부 포함되었지만, 이웃집 마당과 화장실 일부가 우리 땅으로 확인되었다. 수도 계량기는 묘하게도 영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외지인은 자신들의 일처리가 성급했음을 뒤늦게 사과했지만, 우리 가족을 포함해 동리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예전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몰라서 명확하게 선을 긋고 산 것은 아니었다. 지형에 따라서 서로 양보하여 물길을 트고 담장을 쳐 현재의 가옥구조와 마을이 형성된 것이었다.
외지인은 터를 닦아 동네에서 살 생각을 했는지 집을 수리하고 슬레이트를 걷어내는 등 작업을 이어갔다. 또한 자신들의 무례함을 인지하였는지 시골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며 친분을 쌓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사단은 중장비가 마을길을 엉망으로 만들고, 이웃집으로 들어가 공사를 하던 중에 일어났다. 주인이 옛집 벽을 허물고, 떼어 낸 시멘트와 지붕을 걷어 낸 슬레이트를 포클레인으로 땅에 묻으려다 동네아주머니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는 바로 시청에 민원으로 접수되었고, 달려온 직원들에 의해 공사 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당황한 외지인 부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했다. 결국, 외지인은 다른 사람에게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고 집을 매매한다는 계약조건으로 집을 넘기고 떠났다. 그리고 이전의 사태를 인지하고 있는 또 다른 외지인은 동리사람을 만날 때마다 허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고 다닌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에게 “실없는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볼 때마다 말을 건다고 했다.
우리는 인위적이며 물리적 선을 긋기에 앞서 도덕적 선을 넘지 않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삶을 걸어가는 지혜이기도 하다. 아마 노자 어르신도 지구에 이렇게 많은 선이 그어질지는 예측하지 못하셨을 게다.
노자 어르신을 다시 모셔올 수 있다면, 새소리 가득한 어느 정자에 앉아 술 한 잔 대접하며 선(善)과 선(線)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