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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쓰는 일기
이 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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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기다리는 밤송이들이 알을 떨구려 버둥거린다.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려는 듯 둥지에서 갈색 옷을 짓고 있다. 감나무에는 물까치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불청객의 방문에 놀란 홍시들이 상처 난 몸을 말리며 발갛게 떨고 있는 중이다. 애기배추 위에 그늘을 만들고 있는 들깨들도 온몸으로 밀어올린 알갱이들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시간과 놀고 있었다. 팔순 노부부가 사는 집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마도 산비탈에 있는 콩밭으로 갔을 것이다. 안 과장은 오는 길에 마트에서 산 떡 세 봉지와 꽃게를 주방에 놓고 나왔다. 떡은 어머니가, 꽃게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는 서둘러 낚시 도구를 챙겼다. 하나둘씩 사들인 도구들이 점점 늘어, 아파트 베란다에 두기에는 마누라의 잔소리가 버거웠다. 그래서 시골집에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만 가져다 쓰고 있었다. 노지 낚시에 필요한 발판대만 해도 20㎏ 무게가 나갔다. 발판대를 새로 구입하여 들 뜬 마음으로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돈이 썩어 뭉그러지냐!”며 서슬 퍼렇던 마누라의 눈을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여성이 남성화 된다고 하지만, 얌전하던 아내가 저렇게 변했나 싶기도 하다. 허긴 자신이 그렇게 만든 책임도 있었다. 며칠 전에도 휴대폰 비번을 알아낸 마누라가 카톡방 대화 내용을 보고 난리를 쳐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마누라의 거친 고함에 놀란 이웃들이 경찰을 부른 까닭이었다. 한 달 전에 노래방에서 만난 도우미와 나눈 알콤상콤한 대화가 마누라의 울화통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휴대폰 비번을 까다롭게 설정해놓았지만, 마누라는 비번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안 과장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틈을 이용해 아내는 이를 악물고 비번을 풀어내는 모양이었다. 처음 몇 번은 레스토랑에 나가 저녁을 사주고, 사무실 책상 서랍에 감추었던 비자금을 바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그러나 안 과장의 바람기가 가라앉지 않자 아내는 방법을 바꾸는 듯했다. 시댁은 물론 친정댁 식구들에게 그의 비행을 폭로하고 응원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를 지원해주는 가족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매제들뿐이었다. 시골 부모님의 역정은 물론, 장모님의 잔소리는 마누라보다도 심했다. “자네가 이럴 줄은 몰랐네!”로 시작하는 훈시는 “자네만 믿네!”로 그칠 듯하다가 “사람이란 말이야!”로 이어지면 한 시간 연장은 기본이었다. 특히 통화 중간에 “여자란 말이야!”가 들어가면 자신의 성장 과정과 시집살이, 심지어 주변 여자들의 한 많은 생애까지 줄줄이 걸려 나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장모는 중간 중간에 안 과장이 딴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듯 “내 말이 맞나, 틀리나? 틀리면 틀리다고 말을 하게나!”라고 확인까지 하는 통에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모녀가 작당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즘 들어 딸내미도 마누라에 바싹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녀가 나누는 대화는 온통 주식시장에 관한 것이었다. 눈치를 보아서는 이삼억 정도는 투자를 하는듯한데 정확한 액수를 말 할 마누라가 아니었다. 그의 핸드폰은 항상 주식 케이블방송이 켜져 있으며, 안 과장이 없는 주말에는 9시부터 아예 거실에 똬리를 틀고 하루 종일 주식방송을 듣다가 6시가 되면 저녁을 준비하곤 했다. 백화점에 다니며 최저임금을 받는 것보다는 주식하는 것이 훨씬 낫다며 집에 눌러 앉은 지 햇수로 삼년 째였다. 다행히 지난해에는 수익이 괜찮았는지 상한가를 치는 종목이 나온 날에는 헤헤거리며 저녁도 사곤 했다. 안 과장 월급은 푼돈도 안 된다며 속을 긁기도 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안 과장이 근무하는 통신공사에는 같은 직급인 이 과장과 노 과장이 있었다. 이 과장은 술자리마다 안 과장과 노 과장은 과장도 아니라며 자신만이 유일한 과장이라며 깔깔댔다. 과장 앞에 붙는 성 씨가 문제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안 과장이건 노 과장이건 주말에 숨 막히는 공간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마누라는 초등학교 동창 셋이 떠나는 건전한 스포츠 미팅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새벽에 팬티만 입고 자는 자신을 느닷없이 올라타고 씩씩거리거나, 거실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삼식이를 보는 것보다는 아예 그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안 과장은 결혼 후부터 멀리 출장을 가거나 낚시를 갈 때면 꼭 새벽에 마누라를 올라타는 습관이 있었다. 안 과장이 아내와 침대에서 동침을 한 것은 결혼 후 5년 정도였다. 둘째 아이를 가지고부터는 아예 안 과장을 침대에서 거실로 내쫒았다. 담배와 술 냄새가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잠자리를 같이 하는 횟수도 줄었다. 다만 안 과장이 외국이나 장거리 출장을 갈 때면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그러는지 안 과장의 요구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며 외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각자의 방을 마련해주고 그녀가 안방을 혼자 쓰게 되자 안 과장이 새벽에 들어와 덮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자 그가 거실로 나오고 안 과장을 침실로 밀어 넣게 된 것이었다. 다 큰 아이들이 화장실에 드나드는데 설마 거실에서 자신을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었는지를 귀신 같이 살피고는 등 뒤로 기어 와 물건을 들이대는 데는 피할 재간이 없었다. 한 편으로는 아이들 몰래 부부 관계를 한다는 또 다른 재미도 있었다. 오늘도 안 과장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해 브라자도 동여매고 바지도 그냥 입고 잤다. 그런데 피곤했던지 안 과장의 손이 가슴으로 들어와서야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렇다고 강간죄로 남편을 고소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남편을 오늘도 고이 보내기가 서운했던지 그녀는 현관문을 나서는 안 과장을 향해 시비를 걸었다. “낚시바늘에 떡밥 대신 소주잔을 매달아 놓으면 어떻게 될란가? 아마도 세 인간이 쪼르르 올라올 것이여!”라고. 그렇다고 이 올가미에 걸려들 안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고렇치! 고러치!’ 하며 기분 좋게 받아치며 집을 나섰던 것이다.
안 과장은 서둘러 낚시 도구를 챙겼다. 노부부가 돌아오면 또 들고 있는 농기구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하고, 땀에 전 그들의 옷차림에 낚시를 떠나는 죄책감이 또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12개의 낚싯대와 받침틀, 뒤꽂이, 살림망을 트렁크에 실은 뒤 그는 마지막으로 의자를 얹어 실었다. 그런 다음, 차 시동을 걸고 마당을 빠져나왔다.
마을 앞 삼거리를 지나자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들판을 이루고 있다. 모두가 안 과장의 친구가 경작하는 논이었다. 비록 초등학교 졸업이 그의 전 학력이었지만 백여 명의 동창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친구였다. 신혼 초, 건너 마을 축사 한 편에 있는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친구는 억척스런 강원도 색시를 만나 일가를 이루었다. 지게에 꼴을 베어다 키운 소들이 한 마리 한 마리 늘어나더니 최근에는 2백여 마리가 되었다. 암소 인공수정은 물론, 방역, 황소 거세 작업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가 관리하는 2만여 평의 농지는 트랙터를 비롯한 갖가지 농기구들로 경작되었으며, 최근에는 드론으로 논이며 밤나무에 농약을 살포하는 기술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가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까지 주인을 닮아 축사며 논밭을 오가며 부지런히 일을 했다. 안 과장은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도 좋아하지 않는 친구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격려의 말과 덕담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읍내 동창회 모임에 나가 뒤풀이 장소인 노래방에서 그에게 도우미를 붙여 주는 일 뿐이었다.
승용차는 서공주 IC를 지나 대전 당진 간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돌아온 노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밥은 먹었느냐, 애미와 아이들은 잘 있느냐, 어디로 가느냐, 내일 들를 거냐” 등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네 작은아버지가 어제 다녀가셨다! 특별등기 이야기는 꺼내 놓았으니 네게 전화가 갈께다!”라는 말을 전했다. 오십여 년 동안 아버지가 경작해온 밭을 형제들이 나눠 갖자는 사람이었다. 안 과장은 순간 욱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차동터널 앞이었다. “재수 없게!” 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시원하게 다른 차들을 제치며 속도를 냈다. 순간 ‘찰칵’하는 불빛이 스친다. ‘아뿔사!’ 과속이었다. 안 과장은 또 투덜거렸다 “아! 증말 재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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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모태본능을 자극한다고는 하지만, 안 과장은 고요하게 펼쳐진 물을 보면 한없이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비만 오면 얼기미를 들고 달려가던 마을 앞 도랑도, 여름 날 하굣길에 웃통을 벗고 달려가던 왕둠벙도 물로 넘쳐나던 곳이었다. 읍내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울적한 그를 위무해준 것도 금강이었으며, 대학 MT 때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는 자신이 궁금해졌다는 여지후배를 만나 그날 밤 잠자리를 갖게 해준 것도 물이었다. 신병훈련장에서 뙤약볕 목마름을 참지 못해 달려가 마신 논물은 지금까지 그가 마셔본 음료 중 최고로 기억된다.
여느 낚시터가 되었건 진입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난번에 찾았던 당진의 가교리지는 마을로부터의 진입로가 애매하여 세 번을 헤맨 끝에 겨우 찾은 적도 있었다. 천안의 수신낚시터나 당진의 안국지의 경우는 산 7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밤길에 이곳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번에 찾아가는 한국지는 초행임에도 비교적 국도에 인접해 있어 어려움은 없었다. 안 과장은 일단 관리사무소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맞은 편 산 밑에는 둘레길처럼 목재 데크로 인도를 만들고 중간 중간에 좌대를 놓아 그늘진 곳에서 낚시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안 과장은 핸드폰 문자메시지에 찍힌 8번 좌대를 찾았으나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지체하는 사이 관리인인 듯한 사내가 식당에서 걸어 나와 그에게 어디를 찾느냐고 물었다. 안 과장이 찾던 곳은 첫 번째 좌대로 이미 지나왔다고 알려주었다. 키가 작고 콧수염을 기른 그를 보자 안 과장은 그가 낚시터 주인임을 짐작했다. 안 과장은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황 감독이 그와 싸우고 발길을 끊은 사연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황 감독이 2박 3일 동안 낚시를 하고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해 씩씩거리며 귀가한 날이었다고 했다. 오전에는 늘어지게 자고, 오후에 낚시 사이트를 열어보니 어제의 조황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조황이 사실과 전혀 달랐다. 불같은 성격의 그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때 마침 관리인이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이틀 동안 현장에서 낚시를 한 사람인데 이렇듯 거짓정보를 올려놓으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하자, 관리인은 일주일간의 조황이라며 버벅거렸다.
“낚시꾼들은 인터넷 정보를 믿고 여러 날을 기다린 끝에 출조를 결심하는데, 이렇게 사기를 쳐도 되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변명하지 마세요! 이제는 이 낚시터 끝입니다! 끝!”
그 후로 황 감독은 정말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대물터를 생각하면 이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제는 잊었겠지’ 하고 전화를 하면 수신자 거부명단에 그를 포함시켰는지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관리인은 언뜻 보면 일본사람 같기도 하고, 오랜 동안 병치레를 한 듯 바람 불면 곧 날아갈 것 같은 체형이었다.
안 과장이 차를 돌려 저수지 초입으로 가자 그가 찾던 수상좌대가 있었다. 그가 승용차를 주차하고 황 감독을 부르자, 방 안에 있던 그가 반갑게 맞이했다. 동석하기로 한 서 회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이미 열두 대의 낚싯대를 편성하고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 회장이 왜 늦느냐”고 묻자 그는 평소대로 걸쭉한 언어들을 뱉어냈다.
“쓰벌 놈! 제일 가까운 곳에 사는 놈이 제일 늦장을 부리네!”
중학교 졸업 후, 항상 붙어 다니던 두 친구가 만나 언쟁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에 다소 당황했던 안 과장도 이제는 다툼이 일어나면 아예 뒤로 빠져 그들을 지켜보며 즐기는 여유가 생겼다. 두 사람은 자존심과 승부욕이 서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듯했다. 그들은 음주량이 일정 수준을 지나치면 목소리가 점점 커져 마치 싸우는 듯했다. 그로인해 자주 주변 낚시꾼들의 원성을 샀다. 지난번에는 공주 인근 낚시터로 출조하여 관리인에게 쫓겨난 적도 있었다. 여자동창에게 전화를 걸어 안주가 떨어졌으니 통닭을 사오라고 할 때부터 사고는 예견되어 있었다. 세 명의 남자에 여자 한 명이 동석하면서 빈 술병도 늘어났고, 취사금지라고 큼지막하게 써 놓은 방안은 삼겹살 냄새로 진동했다. 그 소음과 냄새가 관리사무소까지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주변 낚시꾼들의 항의에 관리인은 입금한 예약금을 환불해주는 조건으로 이곳에서 철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환불’이라는 조건에 모두가 ‘콜!’하며 승낙을 했다. 그러나 취중에 어둠 속에서 짐을 챙기는 일은 녹녹치 않았다. 어렵게 도구를 챙긴 이들은 노상에서 한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원인은 차 시동을 걸어 놓고 자동차열쇠를 잊어버렸다고 흥분하는 황 감독 때문이었다. 또한, “예약금 환불을 안 해줘도 된다”는 황 감독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안 과장의 다툼도 시간을 지체시켰다. 우습게도 황 감독의 열쇠는 운전석 옆에 놓은 그의 잠바 속에서 발견되었다. 환불한 돈은 읍내에 나가 술값으로 쓰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도 관리인은 낚시터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떠나는 주정뱅이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황 감독은 양심이 찔렸던지 “떠들어서 미안합니다!”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읍내로 나온 세 사람은 대리운전 기사가 소개해 준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는 소주 한 잔을 더하자며 국밥집으로 향했다. 이들은 낚시터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며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거세졌다. 이에, 안 과장은 그만 해산하자며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또 다시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시골집으로 떠났다. 남아 있던 두 사람은 결국, 식당에서도 쫓겨나 숙소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사지사를 불러 노근함을 달랜 모양이었다. 이들은 두 외국인 여성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돈깨나 썼다고 했다. 그날 밤, 이들이 동서지간이 된 것은 확실했다.
안 과장이 두 낚시꾼 틈에 합류한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 서 회장은 당진에서 상품포장지를 만들고 인쇄를 하여 유명 매장에 납품하고 있었다. 특히 유명 항공사와 도넛 기업이 그의 주 거래처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코로나로 여객기가 비행을 멈추는 바람에 수익이 반 토막 나고 말았다고 했다.
안 과장이 낚싯대를 편성하고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동안 서 회장이 도착했다. 그가 끌고 온 1톤 트럭에는 낚시 도구며 아이스박스, 먹거리들이 한 짐 실려 있었다. 그는 운전석 문을 열며 안 과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 후에 “어이, 개 감독은 어딨냐? 어른이 오셨으면 퍼뜩 나와 인사부터 해야지!”라며 도발을 시작했다.
황 감독은 “쓰벌 놈! 또 시작이네!”라며 반갑게 마중을 나와 짐 옮기는 것을 거들었다. 안 과장이 방에서 술상을 마련하는 동안, 두 사람은 낚시 할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언제 그칠 줄 알 수 없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날이 어둑해지면 캐미를 꽂으러 잠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술판을 이어갈 것이었다. 그들은 짬을 내서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짬을 내서 낚시를 한다고 하는 말이 맞았다.
개 감독은 술만 먹으면 개처럼 짖어댄다고 하여 서 회장이 붙여준 별칭이었다. 서 회장은 친구 중에 진짜 회장이라 부를 사람도 없고, 사장보다는 회장이라는 호칭을 써야 술집에서도 대우 받고, 또 그가 돈을 쓸 것이라 하여 황 감독이 명명해 준 것이었다. 안 과장이 이들 낚시에 합류했을 때, 이미 황 감독은 개 감독이 되어 있었다. 황 감독이 개 감독으로 성격이 바뀐 지는 오래된 듯 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들 세 친구의 초등학교 은사였다. 그의 아버지 역시 술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했다. 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슬레이트 지붕의 집에 살며 딸 하나와 아들 세 명을 양육했다. 학교 기성회 임원들이 십시일반 갹출하여 마련해 준 낡은 집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으로는 생활이 녹녹치 않았던지 그는 염소 등 가축을 키우기도 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투망을 들고 나가 인근 물가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취미였다. 그는 손수 잡아온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이웃과 술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 때, 황 감독의 아버지와 서 회장 아버지는 자주 술자리에서 어울리곤 했다. 어찌 보면 아버지 세대에서 볼 수 있던 장면을 그 아들세대가 낚시터에서 재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황 감독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집에 이르지 못하고 남의 집 담 밑에서 잠들기 일쑤였다. 황 감독은 그의 판박이로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일몰을 앞둔 해가 저수지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강열한 햇빛이 물에서 튕겨 나와 방안으로 들어왔다. 황 감독이 ‘쓰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황 감독이 그동안 살아 온 일대기를 재방송 할 시간이 된 듯했다. 문제는 소리가 너무 크고, 자주 흥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량이 약하여 소주 한 병만 먹어도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흥분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야 이놈들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살아왔는지 아냐! 서 회장 너는 알잖아?”
“개 감독! 또 시작이다, 네가 살아 온 인생을 내가 어떻게 알 언 마!”
“개 감독이라고 하지만 마! 내가 왜 개 감독이여!”
“개 감독을 개 감독이라고 하진 마! 그럼 뭐라고 불러잉 마!”
“하~ 나 참 환장하겄네! 너는 왜 사람을 무시해잉 마! 왜 사람을 무시해? 공직생활 34년에 전국체전 금메달을 아홉 개나 딴 놈인데 네가 나를 무시해? 너도 인정할 건 인정 핸 마!”
“무시하긴 누가 너를 무시 핸 마! 그리고 금메달은 학생들이 땄지, 네가 땄냔 마!”
“아~ 쓰발! 환장하겄네! 너랑은 말이 안 통해 인마! 정말 너랑은 안 맞어! 이제 너랑은 끝이연 마! 이제 끝! 모든 게 끝!”
“오 오~ 예 에~ 나두 콜!”
재미있는 듯 놀려대는 서 회장의 태도에 비위가 틀린 황 감독은 안 과장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 상대를 바꿨다.
“야아! 안 과장! 너나 나나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냐!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나를 잘 되게 하려고 공주 읍내로 전학을 시키지 안했냐! 그때 우리 아버지 동료교사가 나를 체육중학교로 보내 결국 체육고등학교로 간 것 아녀?”
“그랬냐? 그것 까지는 몰랐지! 그건 그렇고, 요즘 스포츠계 학교 폭력사태는 들어 알고 있지?”
“으음! 알고 있지!”
“근데 너무 가혹한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냐! 과거의 잘못을 현재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프로선수 생명을 자르고!”
“가혹하지! 근데 안 과장, 내 말 끊지 말고 잘 들어 봐라 잉!”
화제를 전환하는 안 과장이 못마땅했던지 황 감독이 담배에 불을 댕겼다.
“저 자식은 지가 폭력을 써서 지금 끽소리도 못하고 말을 끊는 거여! 그러니 개 감독 소리를 듣지 인 마! 헤헤 헤!”
“야! 개 감독이라고 하지 말랬지 인마! 내가 무슨 폭력을 써 인 마!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옛날에 운동하며 안 맞고 안 때려 본 놈이 어딘 냔 마!”
“저 자식은 성 폭력도 했을거여! 그럼! 하구도 남을 놈이지, 헤헤!”
“어얼 래! 또 저게 날 무시하네! 나를 그렇게 평가하지 만 마! 내가 공직생활 34년에 전국체전 금메달을 아홉 개나 딴 놈이라고 말 했냐 안 했냐?”
“금메달을 네가 딴냔 마! 네가 땄냐고?”
“얼래리! 너 날 무시하지 말랬지! 내가 전국체전 테니스 4강에 들었었다구 얘기 했냐 안했냐!” 이 새끼만 만나면 꼭 싸우게 되네!”
“아이구~ 재밌어라! 헤헤!”
약이 바짝 오른 황 감독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체육특기생으로 충북대에서 나를 1차로 지명하여 사실 거기로 갈려고 했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학비를 대 줄 사람은 없지! 돈도 없는 놈이 청주에 가서 생활하려니 막막한 거여, 안 과장 너도 그런 내 심정 이해하지!”
“아! 그럼 이해하지!”
“그래서 공주사대로 간 거여, 거기서 지도교수가 나를 잘 봐줘서 연구실 근로학생으로 추천해주셨지, 아 근데 전국체전 4강전에서 충북대 팀을 만난 것 아니었어? 그래 내가 누구냐? 나를 1순위로 지명해줬던 교수님에게 가서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또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드렸지. 그리고 시합에 들어갔는데 체육고등학교 때 우리 동기들을 괴롭혔던 선배 놈이 나와 맞붙게 된 거야! 그야말로 에이스 팀이 붙은 거지!”
“야, 개 감독! 네가 에이스는 무슨 에이스냔 마!”
“저 새끼는! 야 쓰발 놈아! 내가 거짓 말 하는 거 봤냔 마? 공직생활 34년 열심히 살아 온 사람을 왜 그렇게 매도하냔 마!”
“열심히는 무슨 개뿔 열심히연 마! 출장비나 떼어 먹고 다닌 놈이!”
“어얼 래! 아~ 열 받어! 내가 돈 떼먹는 것 봤냔 마?”
“안 봐도 뻔하진 마? 네가 안 떼먹을 놈이냔 마?”
“아~ 쓰발! 안 과장! 내 말 좀 들어봐라 잉?”
“허허! 그래 천천히 얘기해 봐라!”
“봐라잉 마! 안 과장처럼 딱 중심을 잡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줄 알아야지, 저 새끼는 내가 얘기만 하면 무조건 노여!”
“야! 개 감독! 내가 믿게 좀 행동해봐라 인마!”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말싸움을 이어갔다.
“야, 안 과장!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건냐! 그냥 개박살을 내놨지!그 선배가 얼마나 독이 올랐는지 시합에 지고는 테니스채를 발로 밟고 지랄발광을 하더라!, 그게 얼마나 고소했는지 너 아니?”
“야 똥 빵위! 네 자랑만 하지 말고 똥 빵위 시절 애기 좀 해 봐라 잉! 헤헤!”
“똥 빵위? 그래인 마, 나 똥 방위다 인마! 근데 군대도 안 갔다 온 네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똥 빵위를 똥 빵위라고 하진 마! 그럼 너 똥 빵위 아년 마?”
“마져 인마! 나 똥빵위여! 보충역인 샤끼가 무슨? 그래도 나는 향토사단에서 3주 간 조뺑이친 놈이연 마!” 그러니 군대도 못간 네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진 마!”
황 감독은 ‘아니지’라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구 저 똥 빵위! 내가 군대를 왜 못가인 마! 너 전시근로 특공대라고 들어봤냔 마?”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고받는 대화가 안 과장으로서는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야아~ 안 과장! 넌 어디 나왔냐?”
황 감독이 묻는 말에 서 회장도 궁금한 지 안 과장을 쳐다봤다.
“나? 백마부대 하사관학교 출신이지! 증말 나야말로 조뺑이 틀고 왔다.”
“그래? 충성! 이병 황찬성, 우성민방위지구대 임무를 명 받았습니다! 충성!”
갑자기 일어나 전입신고를 하는 황 감독의 행동에 안 과장이나 서 회장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야! 애들아, 내가 똥 방위 시절 얘기 해줄게! 나와 우리 동창 용구, 그리고 니네 중학교 동창인 세정이, 이렇게 세 명이 훈련을 마치고 민방위대로 가지 않았겠냐! 그런데 선임들이 우리 셋을 쪼르르 세워 놓더니 나보고 전입신고를 하라고 하데!”
갑자기 황 감독은 과거로 돌아간 듯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충성! 이병 황찬성 외 2명은 우성민방위지구대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그의 진지한 행동에 안 과장과 서 회장은 또 한 번 배를 잡고 웃었다.
“근데 쓰발! 임철이 새끼 알지? 내칭이 살던 우리 동창 임철이 말여!”
“아, 잘 알지! 나랑 같은 동네에 살다가 그리로 이사 갔었지!”
임철이란 친구는 안 과장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생일이 섣달로 같았다. 중학교까지는 같이 다녔으나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모르던 친구였다.
“아~ 그 쓰발 놈이 내 앞으로 와서 발로 내 다리를 툭툭 치는 거 있지? 툭툭 칠 때마다 나도 훈련소에서 배운 건 있어서, 네! 이병 황찬성! 네! 이병 황찬성! 하고 복창하지 않았겠냐?”
황 감독의 억울해 하는 표정에 두 사람은 또 웃어댔다.
“그때 임철이가 분대장으로 제대 말년이었던 거여! 야! 내 얘기 재밌지? 재밌지 않냐? 야 또 거기에 우리 동네 살던 동창 상훈이도 있었는데, 이 새끼는 실실 웃더니 어디론가 금세 없어진 거 있지! 저도 민망했겄지! 안 그렇냐? 나는 대학졸업 하고 갔으니께 대부분 후배들인데, 다 나보다 고참인 거여! 이거 환장할 노릇하니냐! 근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초등학교 꼬맹이들까지 우릴 무시하는 거 있지?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하면 담벼락에 붙어 담배를 피우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이나 걸며 시간을 때웠지! 근데 면사무소 옆에 초등학교 있잖아? 지나가는 꼬맹이들 보면 얼마나 귀엽냐? 우리가 아가씨! 하고 부르면 애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니? 아저씨! 우리는 똥방위 하고 안 놀아요!” 하며 혀를 내미는 거 있지! 애들도 나를 무시하더라니까!”
“야아. 개 감독! 이제 똥방위가 사람도 아니란 걸 알았냐 인 마!”
“쓰발 놈! 또 무시하네! 열심히 병역의무를 이행한 우리 선후배들을 무시하지 만 마! 너는 뭐! 전시근로역?”
“전시근로 특공대인 마!”
둘은 또 아옹다옹 말다툼을 이어갔다.
안 과장은 캐미를 바꾸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저수지는 이미 검게 그을려 있었다. 옆 좌대로부터 맞은 편 산 밑에 있는 좌대에 이르기까지 붉고 푸른 찌들이 아름다운 야경을 이루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을 물 아래 숨기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붉고 푸른 꽃들, 이곳에도 싱싱한 생명을 유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탐욕과 유혹을 버리기 위해 찾은 낚시터에는 떠 다른 탐욕들이 물 위에 넘쳐나고 있었다.
❙
이튿날, 늦게 일어난 세 사람은 외출을 준비했다. 인근 어항에 나가 바람도 쐬고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서 회장은 자세하게 지역 설명을 하며 차를 몰았다. 이윽고 차가 석문 국가산업단지에 이르렀다. 석문 국가산업단지는 당진시 석문면과 고대면 일원에 충청남도가 사업 시행사로 지정되어 조성한 약 363만 평의 산업단지였다. 이곳에는 인공지능, 바이오, 정보통신, 자율주행자동차 등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7대신성장산업을 집중 배치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도비도와 난지도를 잇는 해상 케이블카 사업과 왜목항과 장고항, 용무치항, 마섬포구, 한진포구, 음섬포구에 이르는 대규모 해양관광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평당 72만원에 분양 중이며 자금지원 및 각종 세제혜택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인프라가 미흡해서인지 대지만 썰렁하게 누워 있었다. 이윽고 승용차가 대호방조제로 접어들었다. 당진시 석문면과 서산시 대산읍을 연결하는 7.8㎞의 방조제는 농업 종합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81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완공한 것이었다. 이곳 방조제에도 어김없이 낚시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삼길포항은 코로나 상황이 무색하게 차량과 사람들로 넘쳐났다. 서 회장은 주차장 주변을 두 바퀴나 돈 끝에 겨우 주차를 했다. 어항은 가을 햇살에 물고기 비늘무늬로 가득 차 있었다. 어항 우측에 있는 섬이 장고항과 왜목마을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섬들은 대조도, 소조도, 우무도, 난지도 순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어항 근처에 주차된 차들은 수산물시장에 온 관광객이 대부분이고, 쭈꾸미 낚시를 하거나 인근에 위치한 가두리 낚시터로 떠난 사람들 것도 많다고 했다.
서 회장의 안내로 세 사람은 2층에 자리한 횟집으로 올라갔다. 어항이 한 눈에 보이는 식당 에는 두 팀이 회를 즐기고 있었다. 한 팀은 가족이 확실했고, 그들 뒤에 자리한 네 명은 남녀가 눈이 맞아 몸 풀러 온 듯했다. 그들이 주문한 병어돔이 나오자 술잔이 속도를 내며 돌아갔다. 빛깔이 선명하고 눈이 예쁜데다가 처음 보는 생선이라 안 과장이 먼저 주문한 것이었지만 식감은 질겼다. 안 과장이 며칠 후에 알았지만, 이는 병어와는 다른 중국산 무점매가리라는 어류였다. 그것도 자연산이 아닌 양식한 고기였다. 그러나 이를 알 턱이 없는 세 사람은 바닷가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을 내며 언성을 높여갔다.
“야! 안 과장! 내가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을 못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 전 국민의 88%가 받는데, 야~ 서 회장! 너는 내가 상위 12%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냐?”
“또 시작이다! 조용히 핸 마! 너 지금 잘 산다고 자랑하냔 마? 더 크게 떠들어 인 마!”
“저 새끼는! 내가 어디를 봐서 상위 12%냔 마? 이거 봐! 이거 봐라?”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가 식탁위에 내 놓은 것은 카드 한 장과 천 원짜리 몇 장이었다.
그의 행동에 또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멀리서 조심스럽게이들을 지켜보던 여주인이 매운탕을 가져 오며 한 수 거들었다.
“오늘 뉴스에 전 국민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대유!”
이 말을 들은 황 감독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야 임마! 황 감독, 들었지! 오늘 술값은 네가 낸 마!”
서 회장의 말에 황 감독은 웃으며 말을 아꼈다. 뒤에 앉아 있던 두 쌍의 커플이 본 게임으로 들어가자며 자리를 떴다. 이에 세 사람도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자며 식당을 나왔다. 큰 도로로 나서자 여기저기서 흥겨운 음악이 울려나왔다. 그러자 안 과장이 바지춤을 올리더니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어 서 회장이 장풍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희한한 장면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오히려 창피하다며 멀리 앞서가는 남녀 커플을 뒤쫓아 달아난 것은 황 감독이었다. 안 과장과 서 회장은 한 잔 더 하자며 선상 횟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얼마 못가 강열한 햇볕에 밀려 그늘로 숨어들었다. 뒤이어 황 감독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야아! 개 감독! 똥개처럼 어딜 그렇게 어슬렁대다 와 인 마!”
“뭐 인 마? 아 쓰발! 그 새끼들은 재주도 좋아! 나폴리로 들어갔어 야!”
“나폴리? 너두 따라 들어가진 마! 왜 돌아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황 감독을 보고 또 서 회장이 또 말싸움을 걸고 있었다. 그나저나 음주운전은 할 수 없으니 항구를 떠나려면 대리기사를 불러야 했다. 황 감독은 이곳에서 5년 정도 근무한 이력이 있어 동료 교사들을 몇몇 아는 모양이었다. 여기 저기 통화를 한 끝에 읍내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친구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황 감독과 체육고등학교 동기로 핸드볼이 전공이라고 했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휴직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사업을 한 모양이었다. 거기서 재산을 다 털어먹어 지금은 빈털터리라고 했다. 이들이 어항을 나와 읍내로 가는 내내 차 안은 떠들썩했다. 초등학교 때 누가 제일 예뻤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친구들의 근황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그리고 자살했거나 사망한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결국 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조용해졌다.
약속 장소는 당구장이었다. 술도 깰 겸 스포츠정신을 발휘한 후 술자리를 하자는 황 감독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동석한 친구는 곱슬머리에 소탈한 인상으로 전에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황 감독은 그를 한 선생이라 불렀다. 당구는 4구 단판 승 복식경기로 진행하되 안 과장과 서 회장, 그리고 황 감독과 한 선생이 한 팀을 이루었다. 경기는 초반부터 신경전으로 내달렸다. 서 회장은 황 감독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견제구를 놓기도 하고, 알을 바짝 붙여 놓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당구 치기에 성공하거나 황 감독이 파울을 하면 엉덩이를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야아~ 쓰벌 놈아! 엉덩이 흔들지 만마! 흔들지 말라고 오!”
“내 맘이연 마! 헤 헤헤!”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한 황 감독은 자신이 실수하는 것에 자책하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심지어 같은 조인 한 선생이 실수를 해도 육두문자를 쓰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 과장과 서 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경기가 막바지에 이르러 쓰리쿠션을 치기에 이르렀다. 앞서가던 황 감독은 서 회장 팀에게 따라잡히자 긴장한 듯싶었다. 그때 서 회장이 앞돌리기를 시도하여 쓰리쿠션에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공의 속도가 너무 빨라 성공 여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쓰리 쿠션 치기에 성공했다는 서 회장과 투 쿠션이라는 황 감독이 서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로 향했다. 그때 한 선생이 쓰리쿠션임을 인정했다. 안 과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선생의 말에 힘을 얻어 쓰리쿠션임을 주장했다. 길길이 날뛰며 cctv로 재확인하자는 황 감독의 주장에 화가 난 세 사람은 모두 당구장 밖으로 나왔다. 화를 참지 못한 서 회장은 낚시터로 간다며 사라졌다.
안 과장과 한 선생은 오랫동안 사귀어온 지인처럼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황 감독이 이들과 합류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고 낚시터로 돌아간다는 서 회장의 메시지가 온 직후였다. 황 감독은 정말 cctv로 확인을 한 모양이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는 투 쿠션이 확실하다며 언성을 높였다.
“야아~ 황 감독! 친구끼리 당구 치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하냔 마아?”
“난 중요햔 마! 나는 승부의 세계에서만 살아와서 시합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좌우명을 갖고 살아왔언 마! 그게 34년이 연 마!”
안 과장과 황 감독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술을 마시던 한 선생이 끼어들었다.
“야아! 황 감독!”
“그려! 말해봐!”
“너 쫓기니? 너 쫓기구 있냐구?”
다서 화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나 쫓기는 거 없어!”
“근데 너 왜 그래?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너 착했잖아?”
“착했지!”
“근데 왜 그래?”
“내가 오죽했으면 지난해에 명퇴를 했겠냐? 공직생활 34년 동안 억눌리고 시달린 시간들이 돌아보니 너무 아까운거야! 그러다 보니 술 한 잔 먹으면 자유로워지고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 있어!”
“야 아~ 황 감독? 너만 공직생활 했냐? 너만 시달리고 틀에 박힌 생활을 했냐고? 그동안 잘 해왔잖아? 야 아~ 황 감독! 너 왜 그래? 너 나 왜 불렀니? 너 내가 친구니까 불렀잖아!“
“그랬지!”
“근데 너 왜 그래? 너 아까 그 친구에게 사과 해?”
두 사람 간의 대화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제 자리를 맴돌았다.
안 과장은 술집에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리고 한 선생의 말대로 자신은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술에 취해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퇴직 전까지는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쫓기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을은 어제와 똑 같은 햇살을 물 위에 띄우고 있었다. 양털 무늬의 구름들이 푸른 하늘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청자 빛 하늘과 흰 구름 사이로 쉼 없이 뿜어대는 아침햇살이 가을을 달구는 중이었다. 이 황홀한 아침을 혼자 즐긴다는 것은 차라리 잔혹한 외로움이었다.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아직도 황 감독은 끙끙 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동안 무슨 일을 그리도 잘못하며 살아왔는지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며 잠꼬대를 했다. 잠자는 동안에도 누군가에게 쫒기거나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밤사이 수많은 죽음의 덫을 피해 살아남은 고기들이 여기저기서 첨벙거렸다. 그것은 생의 찬미였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차면 저렇게 물 위를 차고 오를까를 생각하니 생명의 싱싱함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생명을 낚겠다고 찌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한 없이 작아 졌다. 황 감독과 서 회장이 자고 있는 방문 틈으로 아직도 진한 소주 냄새가 흘러 나왔다. 안 과장은 낚시에 떡밥 대신 소주병을 메달아 보라던 아내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지난 밤, 그들이 술집을 나온 것은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코로나로 문을 닫아야한다는 주인의 요구에 세 사람이 일찍 일어날 수 있던 것은 다행이었다. 한 선생을 돌려보내고, 두 사람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서 회장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쓰발 놈아! 잠이 오냔 마!”하며 서 회장을 깨운 것은 황 감독이었다. 부스스 일어 난 서 회장은 언제 다퉜냐는 듯 늦게 들어 온 두 사람을 탓했다.
“야아~ 똥 방위! 어른 주무시는데 뭐하는 짓이언 마? 복귀신고도 안하고 인 마!”
“네! 충성! 이병 황 찬성! 무사히 임무 마치고 좌대로 돌아왔습니다! 충성!”
부동자세를 취하고 복귀신고를 하는 황 감독의 행동에 세 사람은 다시 감정이 녹아 내렸다.
황 감독이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자 구운 오징어와 인삼이 튀어 나왔다. 술집에서 남은 안주를 싸온 것이었다. 그의 행동에 두 사람은 감탄하며 다시 술자리를 만들었다.
“야아! 안 과장! 내 얘기 좀 들어 봐!”
“듣고 있언 마! 얘기해 봐!”
“첫 발령지로 내가 태안으로 가지 않았겄냐! 시골 중학교에 선생이라고는 열두 명인데 다 대학 아니면 선후배로 걸리는 거여! 그 중 여덟 명이 중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는데 저녁 시간에 할 일이 뭐 있었겄냐? 매일 만나서 술 먹는 거여! 그때 월급이 19만원이었는데 하숙비 10만원을 내면 9만원 남으니 매달 적자인거여!”
“잔소리 그만하고, 매일 주절거리던 연애한 얘기나 해봔 마!”
매번 들어 귀가 피곤해진 서 회장이 황 감독의 말을 끊었다.
“아아~ 저 새끼는 내 말을 자꾸 끊어! 야 임마, 그러면 안 되진 마! 안 과장처럼 점잖게 잘 들어 봔 마!”
“그런데 읍내에 나가 술을 먹고 들어오면 하숙방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거 있지. 청소는 물론, 먹을거리도 챙겨 놓고 인형까지 갖다 놓는 거 있지? 알고 봤더니 서무계에 전입 온 행정직 여직원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어. 그러니 어떡허니? 읍내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나오라고 해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지. 같은 학교에서 이러면 입소문이란 게 있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서로가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했지! 그랬더니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하는 행동이니 막지는 말아달라는 거여! 그러니 어떡하니?”
“어떡허긴 뭘 어떡현 마? 안아주면 되는 거진 마?”
“하아~ 저 새끼는 저렇게 비도덕적이여! 내가 그럴 놈이냔 마! 조용히 내 말 좀 들언 마!”
속이 불편해 오는 지 두유 한 컵으로 입을 적신 황 감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나도 총각이니까 사실, 연애를 해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는 거지. 안 그러냐, 안 과장?”
“그럼, 당연하지!”
“여자가 키는 작은 편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귀엽기도 해서 여러 번 읍내에서 만났어!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모텔에 가자는 거야! 약간은 겁나기도 해서 주저하게 되데! 그러는 나에게 내가 오빠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지저분하게 책임지란 말은 안할 테니 한 번만 가달라는 거야! 그러니 어쩌니? 야! 안 과장,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니? 그래서 들어갔지! 거기서 인연을 맺어 한 동안 재밌게 연애를 했지!”
“도둑놈! 그럼 네가 안 갈 놈이냔 마?”
“저 자식은 비도덕적이야! 너는 생각하는 게 왜 그 모양이냐? 내가 너 같은 놈인지 아냔 마? 야, 안 과장! 내 말 좀 더 들어봐! 재밌지? 안 재밌냐? 근데 몇 달 뒤에 사고가 터진 거야! 이 여자가 공금을 빼돌린 것이 들통이 난거지, 그래 어떡허냐? 그 여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고, 나는 자연스럽게 혼자가 된 거지”
“도둑놈! 너두 그때 그만뒀어야 한 거연 마!”
“어 얼~ 래? 내가 왜 그만 두냔 마? 내가 뭘 잘못했냔 마!”
“야! 너한테 밥 사주고 술 사주다가 돈 떨어져서 삥땅친 거 아년 마?”
“쓰벌 놈! 또 지랄이네! 그게 어디 내 잘못이냔 마!”
서 회장과 황 감독은 또 한 동안 다툼을 이어갔다.
“야아! 안 과장? 내 애기 하나 또 해 줄게. 그러다가 서천으로 발령 난 거 아니겄냐! 가보니 완전히 시골중학교여! 거기에서 또 체육학과 동기생을 만났네! 키도 크고 잘 생긴데다 당시에 스텔라 승용차를 끌고 다녔으니까 인기가 좋았지! 둘이 또 주구장창 죽이 맞아 퇴근만하면 읍내로 술 마시러 다니지 않았겄냐? 근데 서무과 여직원이 나한테 참 잘 해주는 거여!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왔으니 얼마나 귀엽고 예쁘겠냐. 그래서 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애를 했지! 어느 날, 세 사람이 읍내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먹는데 나는 술이 약하잖아, 그래서 그만 들어가자고 하니까 동기가 더 먹고 간다며 먼저 가라데! 그래서 여직원한테 같이 가자고 하니까 한 잔 더 하고 간다는 거야! 그래 어떡하냐? 나는 학교 숙직실로 먼저 들어왔지! 아침에 겨우 눈을 떠서 생각해보니 걱정 되는 거여! 근데 전화를 해도 두 사람 모두 안 받아! 불안하데! 게다가 내 동기 놈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거든. 그래서 여직원 집으로 전화를 했지! 아, 쓰발! 저녁에 안 들어왔다는 거야! 앗차 싶었지! 환장하겄데! 집으로 전화를 한 게 내 실수였지! 결과야 뻔하잖냐? 우리 숙부의 가르침을 망각한 죗값을 받겠구나 생각했지. 내가 첫 발령을 받고 기뻐서 숙부님을 찾아 갔더니 교직에 있는 동안, 술과 노름과 여자! 이 세 가지만 조심하라고 당부하더라고. 이제 엎질러진 물이지 뭐! 교육청에 근무하는 숙부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를 했지. 그랬더니 변호사를 한 명 소개시켜주시데. 그래서 사무실을 찾아가 전후사정을 말했더니, 나는 총각이고 그날 일은 도덕적 책임만 있지 다른 책임은 없으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데. 그래도 어찌 걱정이 안 되겠니! 그날 학부모가 교장실로 찾아와 난리를 치고, 교육청에서 감사 나오고 떠들썩했지! 그래도 교장선생님이 애써 쓰셔서 두 사람은 전보발령! 여 직원에게는 금전적 배상! 교육청은 다른 동일 직종에 그녀를 취업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사태가 마무리 되었지! 안 과장 어때? 재밌지? 재밌쟌냐?”
“재밌긴 뭐가 재밌냔 마? 찌질이도 못난 놈! 너는 그때 짤렸어야 핸 마! 헤헤! 야아~ 안 과장? 저 자식 얘기는 재미없고 이제부턴 내 얘기 해 줄게!”
이제는 졸린다며 이불을 펴고 있는 황 감독을 보며 서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역 앞에 있는 성일약국 2층에서 일을 했쟎냐. 1층에는 약국, 2층에는 제약회사 영업소가 있었는데, 어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어?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 약국 문들이 열리면 자전거로 배달을 하는 일이었지! 주로 구급약과 소독약, 그리고 소화제 같은 약품이었어! 영업팀장이란 놈이 포장해 놓은 것을 어디로 배달하라고 하면, 나는 전달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수금을 하면 꼭 빵구가 나는 거 있지! 그리고 나는 약국을 하면 다 돈 버는 줄 알았는데 미수금이 자꾸 늘어나는 거여! 그러면 이 팀장이란 새끼가 삥땅을 쳤다고 때리고, 돈 못 받아 온다고 때리며 자꾸 폭력을 쓰는 거여! 그러니 내가 어떻게 했겄냐! 야아~ 개 감독! 내가 어떻게 했겄냐군 마?”
서 회장도 술에 취해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황 감독은 반수면 상태에서 “아구구 구!”를 연발하며 신음을 냈다.
“참았지!”
“참았다구?”
“그럼! 참아야지, 헤헤! 우리 영업소 맞은 편 2층에 당구장이 하나 있었어! 거기서 카운트 보던 누나가 있었는데 밤만 되면 집에 가기에는 늦었다고 내 방을 찾아오는 거 있지? 1층 약국에는 알루미늄 셔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열쇠를 채우지는 않았어. 그러면 누나가 당구장 문을 닫고 약국으로 와서는 셔터를 올리고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오는 거야? 거기서 내가 일 년 동안 누나에게 겁탈을 당했다니까? 증말!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전으로 나와 누나한테 그냥 당했다니깐!”
“쓰발 놈! 겁탈 같은 소리하구 있네! 네간 마, 일부러 문을 안 잠군 거 아년 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저 새끼 말은 진정성이 없어!”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던 황 감독이 또 끼어들었다. 서 회장도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서 회장은 영업팀장의 폭력을 참지 못하고 대들어 그곳을 그만 두게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취했음을 인정하고, 그만 자자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밖에서 우탕탕! 소리가 나며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다급하게 안 과장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안 과장과 서 회장이 캡 라이트를 켜고 밖으로 나왔을 때, 황 감독은 저수지에 빠져 있었다. 다행이 수심은 얕았으나 황 감독은 술에 취해 몸의 균형을 잡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안 과장이 뜰채를 내밀자 이를 손으로 잡은 황 감독이 물 밖으로 겨우 나왔다. 그러는 사이 낚시터 관리인은 물론, 노지에서 낚시를 하던 사람들까지 캡 라이트를 켜고 모여 들었다.
황 감독은 그들을 향해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돌아가세요!”를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방으로 들어 온 황 감독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의 모습을 본 서 회장이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 하하! 아이 구, 그 개 버릇을 누구한테 주냐? 아이 구 개망신! 이런 개망신이 어딨냐!”
“야아! 인마! 네가 친구에게 할 소리냔 마? 친구가 물에 빠졌으면 어디 다친데 없냐구 먼저 물어봐야지, 네가 지금 친구에게 할 소리냔 마?”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하는 사이, 서 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관리인으로부터 조용히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세 사람의 입에서 “쓰발 놈!”이라는 소리가 동시에 튀어 나왔다. 처음으로 그들이 화합하는 소리였다.
아홉 시가 가까워오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안 과장은 좌대에서 나와 저수지 제방 쪽으로 걸어갔다. 새로 난 산업도로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지금 이곳을 통과하려면 저들이 몇 시에 일어났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그 순간, 어젯밤 “너 지금 쫒기고 있니?”라고 물었던 한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우린 모두 쫒기고 있는 거야!’
안 과장은 비단 황 감독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쫒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쫒기지 않으면 무언가를 쫒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쫒고 있을 때는 자신이 그 무언가에 쫒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황 감독은 명예퇴직을 한 후 비로소 쫒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 낚시 가방을 메고 저수지 좌대로 들어와 은둔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과장도 정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쫒기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또는 누군가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가을은 곡식과 과일은 물론 사람도 익어가게 하고 있었다.
저수지에는 먹이를 구하러 나온 천둥오리, 왜가리, 기러기 등이 함께 어울리며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새들은 전혀 쫒거나 쫒기는 법 없이 자기의 일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