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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
202. 많은 것의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 다. 우리는 인류가 공통된 기원을 지니고 있고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미래를 함께한다는 인식이 부족합니다. 이러한 기본적 인식이 있어야 새로운 신념, 자세, 생활 양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래서 우리는 긴 쇄신의 여정이 필요한 커다란 문화적, 정신적, 교육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새로운 생활 양식을 향하여
203. 시장이 상품 판매를 위하여 강박적 소비주의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에, 사람들은 과잉 구매와 불필요한 지출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쉽습니다.집착적 소비주의는 기술-경제 패러다임이 개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과르디니가 이미 지적한 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합리화된 계획과 기계로 만든 규격화된 상품이 강요하는 대로 생활용품을 구매하고 삶의 양심을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현명하고 옳은 것이라고 느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144) 이러한 패러다임은 모든 사람이 이른바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는 경제적 금전적 힘을 휘두르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탈근대 세계의 인류는 아직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립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자의식을 갖추지 못하여, 그러한 정체성의 결여를 불안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잘것없고 헛된 목적을 위한 수단들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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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근대어 종말], 66-67면
204. 현대 세계의 상황이 "야기하는 불안과 위기의식은 집단 이기심의 ------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145)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식 안에 머물 때 탐욕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다운 공동선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한 사회 안에 만연할수록, 사회 규범들이 개인 욕구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존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엄청난 기상 이변이나 커다란 자연재해의 위협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사회 위기에서 비롯되는 참사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3소비 지향적 생활 양식에 대한 집착은, 특히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상호 파괴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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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근대의 종말], 66-67면
205.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인간은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시 선을 선택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살펴보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참자유를 향한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떠한 체재도, 진선미에 대한 우리의 열린 마음,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우리 마음 깊은 곳에심어 주신 그 능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자신의 존엄을 잊지 말도록 호소합니다. 아무리 이 존엄을 빼앗을 귄리가 없습니다.
206. 생활 양식을 바꾸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에게 건전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비자 운동이 특정 상품들을 불매하여, 기업들이 환경에 끼칠 영향과 생산 모형을 재고하도록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기업의 형태를 바꾸는 효과를 발휘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사회적 압력이 기업의 이윤에 손실을 입히면 기업들이 생산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이는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입니다."146) 그러므로 오늘날 "환경 훼손의 문제는 우리의 생활 양식을 반성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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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진리 안의 사랑], 66항
147. [ 베네딕도 16세, 2010년 세겨 평화의
날 담화, 11항.
207 [지구 헌장]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 파괴의 단계를 벗어나 새 출발을 하도록 권유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를 달성하는 데에 필요한 보편 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도전을 제안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공동 운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추구를 요청합니다. ------ 우리 시대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를 일깨우고 지속 가능성을 이룩하려는 확고한 결심을 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고 삶의 흥겨운 축제를 위하여 노력한 때로 기억되도록 합시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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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베네딕도 16세, 201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1항
208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의 본질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에 무관심하며, 우리 주변의 고통이나 환경 악화를 막으려
는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성과 자아도취를 거부하는 자기 초월의 근본자세는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모든 관심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자세는 또한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
한 모든 행동과 모든 개인적 결정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도덕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대안적 생활 양식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2.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에 대하여 교육하기
209. 오늘날 문화와 생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습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현재의발전 그리고 오로지 물질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 인간 마음에 의미나 기쁨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시장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소비 습관에 커다란 변화가 필요한 국가들에서, 젊은이들은 새로운 생태 감각과 관용의 정신을 지니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환경 보호를 위하여 훌륭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습관들이 자라나기 힘든 지나치게 많은 소비와 풍요로운 상황 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210. 환경 교육의 목표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환경 교육이 초기에는 학문적 정보,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 고취와 예방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도구적 이성에 근거한 근대성의 '신화', 곧 개인주의, 무한한 진보, 경쟁, 소비주의, 규제 없는 시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다양한 차원의 생태적 균형 회복을 추구합니다. 곧 내적인 차원에서는 모든 살아 있는것과, 영적으로는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 교육은 신비이신 분을 향한 도약을 이루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신비이신 분께서는 생태 윤리에 가장 깊은 의미를 주십니다. 한편, 생태 윤리 교육 과정을 재정립할 역량이 있는 교육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연대와 책임을,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배려를 길러 나가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211. 그러나 '생태 시민 의식'의 형성을 목표로하는 이러한 교육은 종종 정보 제공에만 머물러 습관의 형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법률과 규범이 존재하고 심지어 효과적인 감독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그릇된 행위를 규재하기에 불충분합니다. 법규범이 의미 있는 지속적 효과를 거두려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적절한 동기 부여로 이를 받
아들여 개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확고한 덕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할 때에 비로서 사람들이 생태적 사명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더 많이 소비하고 지출할 수 있어도 난방을 하는 대신에 습관적으로 옷을 더 껴입는 사람은 환경 보호를 위한 신념과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작은 일상 행동으로 피조물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고결한 일입니다. 교육이 생활 양식의 참다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환경에 대한 책임 교육은 환경보호에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주는 다양한 행동을 고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 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동기에서, 물건을 쉽게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212. 이러한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에 선을 퍼뜨려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더 많은 결실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행동은, 때로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늘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 선을 이 세상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의 실천으로 우리는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삶의 깊인를 더하고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213. 교육은 학교, 가정, 커뮤니케이션 매체, 교리 교육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릴 때에 좋은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면 씨가 뿌려져 평생 그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기에서 가정의 커다란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을 적합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당면한 많은 침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 성장이 요구하듯이 발달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 문화의 중심을 이룹니다."149) 가정에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는 습관을 처음 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물의 올바른 사용, 질서, 청결, 지역 생태계 존중 , 모든 피조물 보호를 배웁니다. 가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측면의 인격 성숙이 이루어지는 온전한 교육의 자리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부탁하고,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어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법을 배웁니다. 또한 공격성이나 욕심을 통제하며, 해를 끼쳤을 때 용서를 청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러한 진심 어린 작은 친절한 행동이 더불어 사는 문화와 우리 주변을 존중하는 문화의 건설에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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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 백주년 ], 39항
214. 정치와 여러 사회단체들도 양심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려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교육에서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우리의 신학교와 수도회의 교육 기관에서 사람들이 책임있는 소박한 삶을 살고, 감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과 환경의 취약함을 배려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중대한 위험에 놓여 있기에, 환경 훼손을 제재할 권력 기관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절제하고 서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215. 이러한 맥락에서, "훌륭한 미적 교육과 건강한 환경 유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150)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우리 공리적인 실용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해 줍니다.아름다운 것을 경탄하며 음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멋대로 사용되고 착취할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근본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사고방식이 우리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 생명, 사회, 인간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가 교육적 노력은 부족하고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대중 매체와 강럭한 시장 활동의 부추김으로 소비주의 패러다임이 계속해서 거세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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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4,항.
3. 생태적 회개
216. 그리스도교 영성의 풍요로운 유산은 이천 년에 걸친 개인과 공동체 체험의 결실로 인류를 쇄신하려는 노력에 값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신앙의 확신에서 솟아나는 생태 영성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관념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세상을 돌보도록 영성이 불어넣어 주는 동기 부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신비 없이, 곧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활동에 자극과 동기와 용기와 의미를 주는 어떤 내적인 힘"151) 없이, 오로지 교리만 가지고 이 위대한 일에 투신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보화를 언제나 받아들여 증진시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영성은 육체나 자연, 또는 세상의 실재에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며 그 안에서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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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 복음의 기쁨 ], 261항
217. "내적인 광야가 엄청나게 넓어져서 세계의 외적인 광야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152)
이러한 까닭에 생태 위기는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신심이 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내세워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우습게 여기고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또 일부는 수동적이어서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는 결심을 하지 않고 일관성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작품을 지키는 이들로서 우리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 생활의 핵심이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체험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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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베네딕도 16세, 즉위 미사 강론,2005.4.
24,. AAS 97(2005), 710면.
218.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며 피조물과 맺는 건전한 관계가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또한 자신의 잘못이나 죄, 악습, 태만의 인정, 그리고 참된 회개와 내적 변화를 요청합니다. 호주 주교들은 피조문들과의 화회라는 의미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화해를 이루려면 우리의 삶을 성찰하며 우리의 행위와 방관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과 피조물에 해를 끼쳐 왔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 곧 마음을 바꾸는 경험이 필요합니다."153)
219. 그러나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매우 복잡한 상황의 해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도구적 이성이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상실하여 결국 윤리 없이 그리고 사회와 환경에 대한 인식 없이 소비주의에 굴복하게 됩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에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임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기에 개인적 노력이나 개인주의적으로 자란 인간들이 연합하여 노력을 기울여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결집된 힘과 일치된 노력이 필요합니다."154)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
220. 이러한 회개에는 여러 가지 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관대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돌봄의 정신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와 무상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으로 선물하셨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아무도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거저 주는 희생의 태도와 관대한 행위를 일으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값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또한 이러한 회개는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커다란 우주적 친교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을 포함합니다. 우리 신앙안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저마다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증진시켜 창의력과 열정을 북돋아 주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로 봉헌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
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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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호주 주교회의, '새로운 지구, 환경적 도전'
(A New Earth-The Environmen-tal Challenge
), 2002.
154. [ 근대의 종말 ], 72면.
221. 이 회칙의 서두에서 제시한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그러한 회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모로 반영하며 우리를 가르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어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동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새들에 대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12.6 )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서도, 새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한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4. 기쁨과 평화
222.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을 독려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교 전통들 안에 담겨 있는 오래된 가르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곧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라는 확신입니다. 소비의 기회가 끊임없이 생겨나 분심이 들고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실재 앞에서 차분히 머무르는 행위는 우리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간의 실현에 이르는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절제를 통하여 성숙해지고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을 제안합니다. 이는 바로 검소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검소함은 우리가 작은 것들의 진가
진가를 차근차근 알아볼 수 있게 하고, 삶이 우리에게 주는 기회들에 감신하면서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탄식하지도 않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지배의 논리를 피하고 단순히 쾌락을 쌓는 일을 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23. 이때에도 얽매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절제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이는 부족한 삶도 아니고 열정이 없는 삶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실 순간순간을 더 잘 즐기며 사는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의미를 체험하고 가장 단순한 현실에 익숙해져 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떨쳐버려 덜 피곤하고 고민도 덜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형제적 만남, 봉사, 능력 개발, 음악과 미술, 자연과의 만남, 기도 안에서 만족할때 그러합니다. 행복하려면 우리를 마비시키는 특정한 욕구들을 억제하는 법을 알고, 삶이 주는 많은 다른 가능성들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224. 지난 세기에는 절제와 겸손이 긍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에서 특정한 덕의 실천이 전반적으로 약회될 때, 환경의 불균형을 비롯하여 많은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생태계의 통합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 삶의 통합에 대하여 당당히 이야기하고, 모든 위대한 가치들을 촉진하고 결합해야 할 필요성을 당당하게 말해야 합니다.우리가 겸손하지 못하고 인간이 아무런 제한 없이 모든 것을 집배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게 되면 결국 사회와 환경에 해를 입히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립적 존재로 여기고,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배제하고 우리의 자아를 그 자리에 앉히면, 그리고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를 규정하는 우리의 주관을 믿는다면, 앞에서 말한 건전한 겸손이나 행복한 절제의 증진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225. 더 나아가, 어느 누구도 스스로 평화롭지 않고서는 절제하면서도 만족한 삶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과 부분적으로 관런됩니다. 내적 평화는 상태계 보호와 공동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제대로 이루어진 내적 평화는, 삶의 깊이로 이끄는 경탄의 능력이 함께하는 조화로운 생활 양식에 반영됩니다. 자연은 사랑의 언어로 넘치지만, 소음이 계속되고 근심과 혼란이 이어지면 겉모습만이 숭배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은 부조화를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서두르면서 마치 자신이 뭔가를 이룩하고 있다고 느끼고자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다시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환경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통합 생태론에는 피조물과 평온한 조화를 되찾고, 우리의 생활 양식과 이상에 대하여 성찰하며,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것들 안에 살아 계신 창조주를 바라보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분의 현존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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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복음의 기쁨], 71항
226. 우리는 태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차분한 태도로 살아가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누군가와 온전히 함께할 수 있으며, 순간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충만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에 핀 나리꽃과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라고 권유하셨을 때나, 당신께 질문하는 부자 청년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며"(마르 10,21)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 온전히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피상적이고 공격적이며 충동적인 소비자로 만드는 병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227. 식사 전후에 잠시 하느닝께 감사드리는 것이 이러한 태도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저는 모든 신자가 이 소중한 관습을 다시 받아들여 내면화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짧지만 이러한 축복받은 시간은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우리에게 피조물을 선물하신 것에 대하여 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해 주고, 노동을 통하여 이 음식을 우리에게 마련해준 이들을 떠올리게 하며, 가장 궁핍한 이들과의 연대를 재확인시켜 줍니다.
5.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사랑
228. 자연을 돌보는 일은, 더불어 사는 삶과 친교의 능력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그래서 우리가 형제자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형제적 사랑은 무상의 것이어야만 하며 결코 누군가가 해 준 것 또는 앞으로 해 줄 것에 대한 보답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 무상성은 우리가 바람과 태양과 구름을 통제할 수 없어도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보편적 형제애를 논할 수 있습니다.
229.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착하고 성실한 것이 가치 있음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윤리, 선, 신앙, 정직을 비웃으며 도덕적 타락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쾌락적 피상성이 우리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회생활의 기초가 무너지면, 인간이 개인적 이익을 지키려고 서로 다투게 되고,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잔인함이 발생하며, 환경 보호를 위한 참다운 증진이 저해됩니다.
230.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모범은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고 사랑의 작은 길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한 통합적 생태는 폭력, 착취,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이와는 반대로, 광란의 소비 세계는 모든 형태의 생명을 착취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231. 서로를 돌보며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 대한 투신은 개인들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에 대한 투신은 개인들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156)에도 영향을 주는 애덕의 탁월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사랑의 문명"157)이라는 이상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회적 사랑은 참다운 진보를 위한 열쇠입니다. "더욱 인간답고 더욱 인간에게 걸맞은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생활 - 정치, 경제, 문화 - 에서 사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하며, 사랑이 지속적으로 모든 활동의 최고 규범이 되어야 합니다."158)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의 작은 몸짓들의 중요성과 더불어 사회적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환경 훼손을 효과적으로 막고 돌봄의 문화가 온 사회에 스며들도록 장려 합니다. 이 사회적 역동성 안에 다른 이들과 함께 참여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영성에 속하는 것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이를 통하여 자신이 성숙하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32. 모든 이가 정치를 직접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과 도시의 환경을 보호하면서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하는 수많은 다양한 단체들이 사회 안에서 꽃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는 건물, 분수, 방치된 가념물, 경관,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의 보호, 청결, 개선, 미화를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들 주변에서는 유대가 수립되거나 회복도며 새로운 지역 사회 관계망이 형성됩니다.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체는 소비주의적 무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 정체성, 곧 보존과 전달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세상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삶의 질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집에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활동은 자기 자신을 내주는 사랑을 표현할 때에 강럴한 영적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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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진리 안의사랑], 2항
157. 바오로 6세, 1977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AAS 68(1976), 709면.
158 [간추린 사회 교리], 582항
6. 성사의 표징들과 안식의 거행
233. 세상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채워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펼쳐집니다. 따라서 나뭇잎, 이슬, 가난한 이의 얼굴에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159) 이상적 관상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찾고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활동을 더 깊이 느끼고 외부의 피조물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더 잘 이해하면 관상이 더 완전해집니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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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수피 영성가 알카하바스(Ali al-Khawas)는 자신이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내적 체험을
세상의 피조물과 지나치게 분리시키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에는 미묘한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초심자들도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가지, 흐르는 물과 윙윙대는 파리들. 삐걱거리는 문과 새들의 지저귐 안에서, 또 울리는 현악기와 피리 소리, 병자의 탄식과 고통받는 이의신음 안에서 그 신비를 간파하게 됩니다.", 비트라이 마이에로비치(Eva De Vitray-Mey-erovitch)편집, [ 수피즘 선집 ] (Anthologie du Suofisme)
, 파리, 1978, 200면.
160. 보나벤투라, [제2명제집](ln ll Sent.),23.2.3
234. 십자가 요한 성인의 가르침대로, 이 세상 실재들과 경험들 안에 있는 모든 선함은 "하느님 안에 탁월하게 무한히 현존 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 숭고한 실재들 하나하나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161) 이는 이 세상의 유한한 것들이 실제로 신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성가는 하느님과 모든 존재 사이의 그 긴밀한 유대를 체험하고 이로써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162) 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산의 웅장함에 경외를 느끼는 이는 이 경험을 하느님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고 자신이 체험하는 이 내적 경탄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산들마다 정상이 있고. 높고 장엄하며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넘칩니다. 이 산들은 제가 사랑하는그분과 같습니다. 외딴 계곡들은 고요하고 아늑하며 시원하고 그늘져 신선한 물이 흘러넘칩니다. 그곳은 다채로운 식물과 아름다운 새소리로 인간의 감각에 깊은 휴식과 아늑함을 주고, 우리가 고독과 고요 안에서 기운을 북돋우고 휴식하도록 해 줍니다. 이 계곡들은 제가 사랑하는 그분과 같습니다."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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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십자가의 요한, [ 영혼의 노래](Cantico
Espiritual), XIV, 5
162.[ 영혼의 노래], XIV , 5.
163.[영혼의 노래 ], XIV, 6-7.
235. 성사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연을 받아들이시어 초자연적 생명을 전달해 주시는 수단으로 삼으시는지를 보여 주는 특권적인 방식입니다. 경신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또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도록 초대됩니다. 물, 기름, 불, 색깔은 그 모든 상징적 힘을 지니게 되어 우리의 찬미에 포함됩니다. 강복하는 손은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 삶의 여정에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의 친밀함을 반영합니다. 세례 때에 어린이 몸에 붓는 물은 새 생명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해서 세상을 도피하거나 자연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특히 동방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동방에서 가장 사랑받는 말의 하나인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일치와 변모된 인간의 전형을 표현하기 위해 어디서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 소리에서, 색깔에서, 빛에서, 향기에서 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164)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강생하신 말씀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물질세계의 일부를 취하시고 궁국적인 변화의 씨앗을 세상 안에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물질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성은 전례 행위 안에서 그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습니다. 전례에서 인간의 몸은 성령의 성전으로 그 내적 본질을 드러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육신을 취하신 바로 주 예수님과 결합됩니다."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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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동방의 빛 ]
(Orientale Lumen), 1995.5.2., 1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카톨릭 교회의 가르침]5호 ( 1995), 13면. AAS 87(1995), 757면,
165. [ 동방의 빛], 11항
236. 피조물은 성찬례 안에서 가장 탁월하게 드높여집니다. 감각적인 방법으로 직접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실 때 최상의 표현에 이릅니다. 주님께서는 강생의 신비의 정점에서 작을 물질을 통하여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가닿고자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위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오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십니다. 성찬례 안에서 이미 완성이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세상의 핵심, 사랑과 생명이 무한히 넘쳐흐르는 중심이 있습니다.성찬례 안에 현존하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나 되어 온 우주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성찬례는 그 자체로 우주적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면에서는 늘 세상의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166)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품고 그 안에 스며듭니다.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세상이 복되고 온전한 경신례로 하느님께 되돌아갑니다. 성찬의 빵 안에서 "창조는 성화를 향하여, 나아갑니다."167) 따라서 성찬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위한 빛의원천이며 동기로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가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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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 2003.4.17
, 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카톨릭교회의가르침] 25호( 2003), 438면.
167. 베네딕토 16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 강론, 2006.6.15.. AAS98(2006), 513면
237. 주일 성찬례 참여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주일은 유다교의 안식실처럼,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자신과의 관계,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주일은 부활의 날 새 창조의 '첫날' 입니다. 이 새 창조의 맏배는 주님의 부활하신 인성으로 피조 세계 전체의 결정적 변모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아가 주일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 16 8)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안식의 가치와 축제의 가치를 결합시킵니다. 관상하는 안식이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것으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수행하는 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그 의미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용성과 무상성의 차원을 우리의 노동 안에 포함시키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또 다른 방식의 활동으로서, 우리 본질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활동을 공허한 행동주의로부터 보호합니다. 또한 우리가 배타적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끝없는 탐욕과 고립감을 막아 줍니다. 안식일 율법은 이렛날 일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 (탈출 23,12).0 안식은 우리가 더 넓은 시각으로 다른 이들의 권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처럼 성찬례를 중심으로 하는 안식의은 주간 전체에 빛을 비추고 우리가 자연과 가난한 이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고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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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카톨릭 교회 교리서]. 2175항
7. 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 관계
238. 성부께서는 모든 것의 궁극적 원천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되시어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는 자애로우신 분이십니다. 성부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성자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성자께서는 세계의 중심 깊이 현존하시면서 새로운 길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세상은 하나의 신적 근원이신 삼위께서 창조하셨는데, 각 위격은 각자의 고유성에 따라 이 공동 사업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세계를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관상할 때, 우리는 온전하신 삼위일체께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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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요한 바오로 2세 [교리 교육], 2000.8.2.,
4항, [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23/2(2000),
112.
239. 3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삼위께서 모든 실체 안에 그 표징을 남겨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인류가 원죄 이전에는 각 피조물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삼위이심을 입증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단언하기도 하였습니다."그 [자연이라는] 책이 인간에게 열리고 우리 눈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을 때에는"170) 자연 안에 삼위일체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이 성인은 모든 피조물은 그 안에 고유한 삼위일체 구조를 담고 있으며 실제로 인간의 시야가 그토록 좁고 어둡고 취약하지 않았다면 이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그는 삼위일체의 열쇠로 현실을 읽도록 노력하라고 우리를 채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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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보나벤투라,[삼위일체의 신비에 관한 논쟁 문제] (Quaest. disp.de Myst. Trinitis), 1.2 concl.
240. 거룩한 위격들은 실체적 관계이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은 하나의 관계망입니다. 피조물들은 하느님을 향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모든 생명체는 다른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기에, 우리는 온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뒤얽혀 있는 많은 지속적 관계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1) 이는 우리가 이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대에 대하여 경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현을 위한 열쇠를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 타인, 모든 피조물과 친교를 이루어 살면서 관계를 맺을수록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며 거룩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그 내면에 새겨 주신 삼위일체의 역동성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적 연대의 영성을 기르도록 초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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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신학 대전 ], I.q.11, art.3; q.21, art.1,ad.3; q.47, art.3 참조
241. 예수님을 돌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제 이 상처 입은 세상을 모성애로 함께 아파하며 돌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꿰찔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해하신 것처럼 피박받는 가난한 이들과 인간의 힘은로 황폐해진 이 세상의 피조물 때문에 지금도 슬퍼하고 계십니다. 완전히 변모하신 성모님께서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묵시 12.1)여인이시며 하늘로 들어 올려지시어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십니다. 영광스러운 몸이 되신 성모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며, 피조물이셨던 분으로서 그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온 생애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을 뿐만 아니라(루카 2,19.51 참조), 이제는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더 지혜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성모님께 간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242.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마리아의 곁에서 요셉 성인이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노동하는 자애로운 삶으로 마리아의 예수님을 돌보고 보호하며 이집트로 모셔 가서 불의한 이들의 폭력에서 벗어나시도록 해 주었습니다. 복음은 요셉을 의롭고 근면하며 강인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깊을 자애도 보여 주는데 이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강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 사람은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겸손하게 사랑하고 봉사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요셉 성인이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 것입니다. 성인은 우리에게 돌보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세상을 우리가 자애롭고 온유하게 돌보도록 요셉 성인이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9. 태양 너머
243.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아름다움에 얼굴을 맞대듯 마주할 것이고(1코린 13.12 참조) 세상의 신비를 경탄하고 기뻐하며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주도 우리와 함께 그 무한한 충만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영원의 안식일을 향하여,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늘 나라에 있는 공동의 집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영원한 삶은 우리가 함께 나누는 하나의 경이가 될 것입니다. 그 삶 속에서 눈부시게 변모된 피조물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이바지를 하게 될 것입니다.
244.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늘 나라의 잔치에도 받아들여질 것임을 인식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이 집을 돌보는 데에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찾아 이 땅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시작이 있다면 또 세상이 창조된 것이라면, 우리는 시작하신 분, 창조주이신 분을 찾아야 하기" 17
2) 때문입니다. 노래하며 걸어갑시다! 이 지구를 위한 우리의 투쟁과 염려가 결코 우리 희망 의 기쁨을 앗아 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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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대 바실리오, [6일 창조에 관한 강론], 1,2,6, PG 29, 8
245.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아낌없이 내어 주라고 권유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힘과 빛을 주십시오.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께서 늘 세상 중심에 현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이 땅과 궁극적으로 결합하셨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새로운 길을 찾게 언제나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주님, 찬미받으소서!
* * *
246. 기쁨과 고뇌가 담긴 이 긴 성찰을 마치며. 저는 두 가지 기도를 바치기를 제안합니다. 하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와 함께 드릴 수 있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이 제시하는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받아 들이도록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온 세계에 계시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 계시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로 감싸 안으시는 하느님
저희에게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돌보게 하소서.
저희가 평화로 가득 차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저희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
이 지구의 버림받고 잊힌 이들을 구하게 하소서.
저희 삶을 치유해 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약탈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외로 가득 차 관상하며
모든 피조물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비오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하느님 아버지,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나이다.
전능하신 성부께서 손수 빚으신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현존과 자애로 충만하나이다.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만물이 당신을 통하여 창조되었나이다.
성자께서는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이 땅에 속하셨으며
인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셨나이다.
성자께서는 오늘도 당신 부활의 영광 안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 살아 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성령님, 성령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이 세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하시나이다.
성령께서는 또한 저후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저희를 선으로 이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삼위일체이신 주 하느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공동체를 이루시니
만물의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세상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희가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통하여
저희의 찬미와 감사를 일깨워 느끼도록
저희에게 은총을 주소서.
사랑의 하느님,
이 세상에 저희에게 맞갖은 자리를 보여 주시어
저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권력과 재물을 가진 이들을 깨우치시어
무관심의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공동선을 사랑하며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보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가 부르짖고 있나이다.
주님,
주님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시어
저희가 모들 생명을 보호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하여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찬미받으소서!
아멘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한 재위 제 3년
20150년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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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 주교님
우리가 주교로서 실천하고 있는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교회 헌장 22항)로
저는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저의 회칙 [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과 함께 보내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 6월 16일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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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 [ 찬미받으소서] 반포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 의 메모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
우리가 주교로서 실천하고 있는
"일치와 사랑의 평화의 유대 "(교회 헌장 22항)로
저는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
저의 '회칙 [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 )를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과 함께 보내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5년 6월 16일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첫댓글 안젤라언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