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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나이 드는 것이 싫지만 세월은 그것을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나이에 비례해 더 자라 가길 소망하며 오늘의 말씀 시작해보겠습니다.
19장
18:38의 “나는 그(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는 말씀을 참고할 때, 19:1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것은 풀어줄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집요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함에 있어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공식적으로 세 번(18:38; 19:4; 19:6)이나 예수님의 무죄함을 선언했음에도 그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당시 로마 지방관들의 아킬레스건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지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날 경우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민란은 ‘팍스로마나’(로마로 인한 평화)를 기치로 한 로마의 세계 통치 체계를 흔드는 위협 요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당시 황제는 티베리우스였는데, 티베리우스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반란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대규모 민란이 일어날 경우 해당 지방관을 즉시 교체했습니다. 빌라도는 티베리우스의 사위이긴 했지만 그 역시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1-16을 보면, 이 본문이, 또 다른 측면에서, 예수라는 미스터리하면서도 무시할 수 만은 없는 한 죄수와 민란 사이에서 갈등하는 빌라도에 관한 서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앞가림을 위한 현실적인 결정을 하게 되지만,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는 그의 고뇌를 본문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18장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1차 심문을 마치고, 그는 예수님에 대해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발로 재판은 종결되지 못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줄 명분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에게 태형(때리는 형벌)을 가한 후에, 사람들 앞에 예수님이 매맞은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나름의 형벌을 가했으니 풀어주자’라고 말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발(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은 계속됩니다. 이러한 반발은 사실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폭압 통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유대인들이었지만 이 날은 달라 보였습니다. 그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세력화되었습니다. 영적인 비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양 진영 간의 전쟁. 그 큰 전쟁의 하수인이 된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향해 비장의 무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것와 관련한 직접적인 언급(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이 나옵니다.
다른 건 같으면 빌라도가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유대인들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은 그의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고, 유대인들과 갈등 관계를 만들어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건 만은 그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계속되는 그의 무죄 선언에도 유대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대면하고 있는 이 사람, 처음에는 자기 도취에 빠진 몽상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빌라도의 귀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그가 하는 말이나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하는 말들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특히 빌라도를 당황하게 만든 말은 19:7의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그가 대면한 예수, 그의 눈빛이나 그가 하는 말, 그의 몸가짐 등을 종합해 볼 때 문득 ‘그래서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에서는 어떤 사람이 신적인 능력을 가졌거나 신과 내밀한 소통을 한다고 여겨질 경우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우를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빌라도에게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예수가 그런 사람으로 비쳤는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말에서는 알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19:10까지는 빌라도가 우위에 있는 입장에서 대화가 진행되지만 9:11부터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이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라고 말씀 하시는데, 이 말씀은 빌라도의 짐을 덜어주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를 그 자리(재판장의 자리)에 앉혀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의도적으로/자발적으로/적극적으로 예수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빌라도가 다른 말을 몰라도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12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즉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이 구절은 초대 교부들이 빌라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단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11절의 예수님의 말씀 이후에 빌라도는 더 이상 재판장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예수의 변호인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변호인입니다. 그가 예수를 풀어줄 방법을 ‘찾는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 ἐζήτει(에제테이)의 시제가 미완료과거라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단발성이 아니라 반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이 빌라도에 관해 이토록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걸어가신 길,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예수님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 또한 그와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디테일입니다.
한 가지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러한 저의 해석이 저의 주관적인 관점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빌라도에 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텐데, 제가 신약학 석사 과정(Th.M)을 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빌라도에 관한 이미지는 유태계 학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끝까지 주장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명분이 그와 같은 점에 있었다는 것을 유태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유태인 학살의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세운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2:15(“유대인은 …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입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학자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범죄를 희석시키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물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은 빌라도에게 있고, 유대인들은 당시 예수를 잘 알지 못한 채 그런 행동을 했다’라고 포장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해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이다’와 같은 말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복음주의 계통에서는 이러한 유태인들의 노력에 비해 예수님의 재판기사에 관한 연구가 미미합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책임이 빌라도에게만 전가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서 학자로서 4복음서는 이구동성으로 빌라도에 관해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부들은 그보다 더 빌라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재판장인 빌라도가 극구 반대하는 데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터툴리안은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콥틱 교회에서는 빌라도를 성인으로 추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 관한 많은 기록들은 빌라도가 초기 기독교 복음 메시지 형성에 기여한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반대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폭력적인 성정이나 평판 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도신경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을 빌라도가 듣는다면 무덤에서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대목에 대한 라틴어 원문의 ‘본디오 빌라도’는 ‘under Pilate’로 풀이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빌라도 법정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고난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빌라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주도한 것은 유대인들이었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시위를 배후조종했고, 이 건에 대해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다고 빌라도를 위협했습니다. 19:12은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을 통해 빌라도가 반역자를 옹호한다면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상소야 쓰는 사람 마음에 달렸고, 의심 많았던 티베리우스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빌라도의 모습은 이러한 상황을 의식한 빌라도가 머리를 식히는 장면으로 읽혀집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빌라도에게 마지막 카드를 던집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아뿔사! 그들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에든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그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제 1의 자부심으로 내세우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 가이사를 왕으로 고백하는 이 장면과 누가복음 19장 41-44절이 오버랩되면서 예수님의 재판은 마무리됩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이때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22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이 때의 빌라도의 모습은 그 전 장면과 사뭇 달라 보입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더 이상은 타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보입니다. 유대인들과 내키지 않는 타협을 한 그에게서 왠지 모를 씁쓸함마저 느껴집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 명패에서만큼은 진실을 담기로 한 것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게 새겼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 그분은 유대인의 왕을 넘어 만왕의 왕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왕,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설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화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소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죄의 형무소로 발걸음을 돌리는 우리는 그분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유가 너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보다 더 자유롭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30절, “다 이루었다”
다 이루셨습니다. 마치 덜 이루신 것처럼 덜 떨어진 삶을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분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겠습니다.
33절,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디테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36절에서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마찬가지로 그분은 약속에도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약속으로 가득한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38절,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예수님 살아 생전에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오히려 커밍아웃을 했네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람은 보는 관점이 이렇듯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는 관점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그들의 커밍아웃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그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20장
1-10절
사랑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일찍이 일어나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간 것이 그것입니다. ‘나도 이런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나’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의 귀는 선택적으로 듣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적어도 세 번,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텐데, 9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그런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를 외면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6절,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예수님을 사모하며 안타까워하던 마리아가 마침내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장면입니다.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29절
샬롬(שָׁלוֹם)(안녕! 안녕하세요? 평안하세요!)은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 간에 가장 흔한 인사 중 하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에이레네 휘민(εἰρήνη ὑμῖν)이라는 헬라어로 표현(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되었지만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평범한 인사를 본문 안에서 세 번(20:19 21, 26)이나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성경은 매우 밀도 있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기록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그런 인사를 하신 것과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한 이례적인 기록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하나님과의 화평이 찾아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그 단절을 해소하시기 위해, 그렇게 화평이 깨진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단절되어 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담이 무너진 것을 의미합니다.
깨진 하나님과의 화평에 회복의 물꼬가 트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평강/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이 건네신 첫 마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에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것들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화평을 이루신 이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화평을 선물로 건네시는 인사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건네는 ‘Hello, Hi, 안녕하세요, 샬롬’ 등과 같은 인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비록 예수님께로부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는 말씀을 듣긴 했지만 도마는 의심한 만큼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핵심 메시지를 뽑아냈습니다. 의심하고 퇴행으로 흘러버리는 사람과는 차별되는 점입니다. 의심을 통해 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런 의심은 생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학문 활동(예: 신학)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활동을 거치지 않고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는 것입니다.
31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기록 목적에 부합하게 요한복음을 읽어 낸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일이 요한복음 공부를 통해 더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또한 제 자신이 그러한 대열에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해 나가길 소망합니다.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넘치도록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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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건을 그 시대의 정황가운데 읽는 것이 성경을 보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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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는 예수님을 모함하여 십자가에 넘긴 유대인들이 유월절이자 안식일을 정결케 보내기 위해 시체를 십자가에서 치워달라고 합니다.(19:31)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에 조금의 흠도 생기지 않도록 신경쓰는데 진심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시체를 싸던 세마포만 남겨진 것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다고 하니(20:1-9)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꼭 오셔야했던 이유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두 무리의 사람이지만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제한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반대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일하실 때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해석하고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진리의 말씀되신 성령하나님께 구하며 나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만이 우리 영을 살리고, 새롭게 하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려함이니라
아멘. 예수 만이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샬롬!!!
모든 상황가운데서 샬롬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샬롬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로 충만하세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현실적인 이득을 위해서 가이사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외치는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고난을 감내하며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또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유대인들과 그 순간에 자신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강구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대조를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