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세계』가을호 Zoom-in에 소개된 이성복 시인과의 대담은 유익하고, 또 유쾌했다. 시인의 근황을 알 수도 있었고 시인이 가진 현재적인 고민,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여러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의에 대한 답이 인상 깊었다.
“문학이란 뭐냐. 첫째,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모두 허위가 되는 것, 그러나 얘기해버리면 추문이라 스캔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뜻해. 둘째는 얘기하기 전까지는 별 볼일 없었는데, 얘기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 셋째는 그것으로써 얘기할 수 없는 다른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야. 다시 말한다면, 언어가 들어가지 않는 부분을, 언어를 통해서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게끔 해주는 것이지. …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잘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딴지를 거는 것이지. …
…젊은 사람들의 난해한 시 모르겠고, 활자를 크고 작게 하거나, 행 갈이를 이상하게 하는 것은 혁명이라기보다 혁명의 제스처로 보여. 더 나아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도발적으로 파괴한다든지 하면 납득이 안 가. 내 취향이 그러하니 보수라해도 할 수 없지 뭐.”
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보수’를 감수하면서까지 젊은 사람들(시인)에 대해 한 말은 음미할 만했다. 물론 여기에는 모순이 있기는 하다. 젊은 시인들의 시에 염증을 내고 읽지 않는 이가 이성복 시인인 것이 사실이고, 그렇게 만든 것 또한 젊은 시인들의 시다.
젊은 시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징후로 들 만한 것으로 『시와사상』 〈내일을 여는 시〉 코너에 ‘나의 시를 말한다’가 아닐까 한다. 나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독자에게) 이 코너에 있는 젊은 시인들의 글은 외려 시에 대한 이해를 해치는 듯하다. 산문이 이해의 분명한 전달을 목표로 하는 글임에도, 분명히 이해된다는 이 전제가 불쾌하다는 듯한 기분을 푹푹 풍기면서 글을 비틀고 뒤집고 패대기 치고 있다. 시와 산문이 구분이 안 되고 있다. 더욱이 읽을 때는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네 명의 시인이 쓴 글이 읽고 난 후 편편이 구분되지 않고 대동소이하게 느껴졌다. 내용 중 ‘자궁’ 쪽은 이제 진부함을 넘어 지겹다.
시평을 쓰는 일이 즐거운 일일 수는 없다. 그나마 좋은 시를 발굴하는 느낌이 들 때가 좋고, 그 시의 좋은 점이 막 상상이 되어 머리 속에서 글이 되어 나갈 때가 좋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평을 쓰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괴롭다.
좋다고 여겨지는 시가 있어도 시는 그 시 하나로 완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김선우 시가 그랬다. 시를 형상화 하는 방법으로 사물의 이름을 변주하면서 시에 육체성을 입혔는데, 이 번 시도 그랬다. ‘나생이’를 ‘나새이’로, ‘무꾸’가 ‘무우’에서 ‘무’로, 이 번에는 ‘오르가슴’이 ‘오, 가슴’으로 말법이 바뀌면서 관능으로 나아갔다. 만만치 않은 형상화 능력에 찬탄을 보내기는 하지만 그의 ‘관능’도 습관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 시가 리뷰된다면 선자들이 안이하게 선택한 결과이거나 시인의 기세에 눌린 측면도 무시 못하게 있으리라 본다. 뽑다보면 그런 힘을 발하는 게 시고 저항하고자 하는 게 選者다. 이것이 그 힘든 시평을 쓰게 하는 즐거운 이유이기도 하다.
시평이 길어지는 것도 방지하고 부분평을 남발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을 피하기 위해 열 편 정도로 엄격하게 한정을 하다보니, 아쉬운 시들도 있다. 옮겨놓고 시간을 두고 보면 아무래도 좀 객관화 되긴 한다. 아쉬운 시들은 다음과 같았다.
박지웅(「빗속의 기록」, 『시와반시』05가을호)의 시는 상황과 그 상황에 서 있는 (막말을 하며 문짝을 걷어차고 나가버린 저녁/그녀도 저렇게 막이 벗겨진 얼굴로 내 뒤에 서 계셨다) 화자의 진정성은 잡혔지만 좀 단선적이었다.
송기원(「꽃향기」, 『문학나무』05가을호)은 이 번 가을호에 20여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고 있다. ‘사방천지 꽃향기 가득한 봄날, 그대와 나도 이승저승을 떠나 꽃향기를 먹으며 배부릅시다.’는 이 권면은 넉넉해 보였다.
문성해(「어떤 장사」, 『문학나무』05가을호)의 시는 「외곽의 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시에 비해 깊이가 좀 떨어졌다.
이장욱(「불놀이야」, 『시선』05가을호)의 시는 재미있다. 상상력의 비약이 자유스럽다. 재미있지만 오래보니까, 애드벌룬이 들어올리는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다루는 사람(시인)이 같이 허공에 뜬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유로운 상상도 그 패턴이 유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었다.
정병근(「옥상」, 『시선』05가을호)의 시시한 것에 대한 관찰이 돋보였다.
‘꽃이란 무엇인가/백주 대로의 섹스처럼/염치도 수치도 모르는 꽃/세월이나 가난 따위는 더더욱 모르는 꽃’
차한수(「티눈」, 『미네르바』05가을호)의 시는 여행시나 산행시는 이만은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가 아닌가 싶다.
‘다시 수태를 뒤집어쓰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하늘을 담은 콩잎 만한 새끼(자라)들과 함께 자꾸 하늘이 콩잎이 되고 있었다’
분홍돌고래 보뚜를 아세요? 아마존 강에 사는 보뚜는 분홍빛 갑옷으로 치장한 돌고래의 이름이지요. 밀림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분홍 가슴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돋아있고요, 새의 부리 같은 분홍색 긴 입을 뾰죽 내밀고 있지요. 분홍 보뚜는 눈이 멀었죠. 하지만 보뚜는 천리 밖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밝답니다. 보뚜는 물 밖으로 걸어 다닐 수도 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의 일이랍니다. 보뚜는 물 밖으로 나오면 흰옷을 입고 모자를 써요. 모자를 벗으면 다시 돌고래가 되지요. 강 밖으로 나온 보뚜가 어여쁜 소녀나 멋진 사내로 변신해서 외로운 사람들을 홀려 황홀한 수중도시인 엥깡찌로 유괴해간다거나 거북이 등딱지도 뚫을 수 있는 무서운 이빨로 잡아먹는다는 건 아마존 강가 마을에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보뚜가 아마존 밀림에만 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멍하니 벤치에 앉아 분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훌쩍거리는 소녀가 있다거나, 낮술에 취해 비틀대는 청년을 보았다면 그건 분명 보뚜와 사랑에 빠진 거죠. 가엽지만, 보뚜에게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죠. 늦은 밤 지하의 낡은 클럽에서 황홀한 춤을 추며 살짝 웃는 소녀가 있다면, 주말 오후 공원에서 황금빛 다리 근육을 뽐내며 축구공을 차던 청년이 땀을 닦으며 말을 걸어온다면 조심하세요. 그건 바로 분홍돌고래 보뚜예요.
하지만하지만! 너무 무서워하지만은 마세요. 분홍돌고래 보뚜는 영혼이 맑은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니까요. 자신 있으면 부딪쳐 봐도 돼요. 인생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보뚜에게 잡아먹히는 게 두렵지 않거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엥깡찌로 납치되는 게 두렵지 않다면요.
보세요. 분홍돌고래 보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면 따라 오세요.
엥깡찌에 가서 가볍게 술 한 잔하며 얘기 나눠요, 우리.
—김요일,「분홍돌고래보뚜」전문, 『애지』05가을호
『시인세계』가을호에는 정끝별 시인이 《시와 여로》코너에서 ‘울산’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 서두에 분홍 돌고래 보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동화적 사실이 전제된다고 해서 이 시의 재미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시에 주목한 것은 〈사랑에 대한 낭만성 부여〉다. 같은 사랑을 말하더라도 비극적인 것이 대다수인 반면에 이 시는 사람을 아주 편케 하는 위무의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속도’와 ‘경쟁’이 전부인 세상살이에 치이고 찌든 영혼들을 위로하는 맑음이 이 시에는 있다. 동화가 주는 푸근함이 있고, 모험적인(살벌하지 않은) 도전이 있다.
분홍돌고래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분홍)는 편안함을 주고, 가슴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돋은 것이나 새의 부리 같은 긴 입을 가진 것은 수륙의 동물이 결합된 데서 오는 이질성과 더불어 어떤 새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눈이 멀었어도 천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또다른 경로로 다가온다. 여기서 변신의 이미지는 모자와 흰 옷!
‘용궁’이라는 익숙한 이미지에 ‘엥깡찌’라는 수중도시는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또 익숙한 잉어 이미지에 돌고래 ‘보뚜’는 새롭다. 무엇보다 말의 울림, ‘엥깡찌’라는 말과 ‘보뚜’라는 말의 울림도 좀 남다르다. ‘보뚜’라는 발음에는 뱃고동 소리 같은 울림이 있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이별하고 절망하는 세상에 보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거라니까, ‘분홍돌고래 보뚜’는 존재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실재이다.
밤의 꽃이 바다 위에 피었다 몸으로 난 모든 길이 열렸다 어둠에서만 만개하는 꽃. 바다는 어디를 건드려야 꽃의 문이 열리는지, 씨방이 부푸는 꽃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었다 물결무늬를 해변에 새겨놓고 멀리 나가 있는 바다 별들이 푸르게 빛나는 밤, 북극성은 그 날 우리의 머리 위에서 어디론가 가 버리고 무덤에 엎어져 있던 흰 조개껍질들 나선형 궤적을 따라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릿한 냄새에 무너지고 하늘에서는 바다보다 더 바닷내음이 풍겨나왔다 별을 향해 교신의 줄을 긋는 폭죽들 황금호랑가시나무 이파리 타다닥 불꽃막대에서 피어나고 핏물도 가지시 않은 하현달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갈 때,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났다.
—윤정옥,「을왕리 밤바다에서」전문, 『창조문학』05가을호
‘분홍돌고래 보뚜’의 사랑이 동화 속의 사실이라면 ‘을왕리 밤바다’의 사랑은 현재적이며 (당시 뿐일지라도) 완성된 사랑이다.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난 것이 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시는 사랑의 감정이 충만된 화자의 상태가 역으로 이미지를 불러온 듯한 느낌을 준다. 시를 쓰다보면 이미지가 치고 나가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어떤 충일한 상태가 그 이미지의 조합을 휘어잡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선 후자에 해당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어떤 충일한 상태- 사랑에 대한 감정의 고조 -가 ‘을왕리 밤바다’에 대해서 재해석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밤의 꽃이 바다 위에 피었다 몸으로 난 모든 길이 열렸다 어둠에서만 만개하는 꽃.’ 다소 생뚱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런 갖다 붙임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사랑으로 가득찬 화자의 상태가 끌어낸 진정성’이랄 수 있겠다. 이것은 이어지다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릿한 냄새에 무너지고 하늘에서는 바다보다 더 바닷내음이 풍겨나왔다’는 부분에서 한 번의 전환점을 이루고, ‘별을 향해 교신의 줄을 긋는 폭죽들 황금호랑가시나무 이파리 타다닥 불꽃막대에서 피어나고 핏물도 가지시 않은 하현달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갈 때,’ 바로 이 상태가 절정을 이루어낸다. 〈내 안에 ‘그’라는 꽃도 활짝 피어났다.〉는 이 고백이 가능하게 하는 절정! 이 시는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능력보다도 진심이었던 사랑의 과정이 불러온 시라 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 뽕짝풍의 각설이 타령이 들려왔다
어딘가 이 촌스러움이, 오래된 서글픔이 마음에 들었다
탄불에 끓는 소라와
뽕짝소리를 종이컵에 담아 파는 아저씨, 땀을 닦으며
쥐포를 굽는 아줌마의 노동 앞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뽕짝노래가 메들리로 이어지면서 울려 퍼졌다
내 구두처럼 무겁게 흰 갈매기가 날면서 울었다
바닷가에 서면 왜 몸을 흔들고 싶어질까
깊은 바다 속 문어처럼 스무스하게
팔다리를 흔들고 춤추고 싶을까
바닷가에 서면 뛰어오르는 물고기같이 싱싱해져
끝 모를 슬픔의 깃발을 집어 던지고
자유롭고 호기심에 찬 시선이 방파제처럼 길게 뻗어갔다
천박하게 울어대는 뽕짝이
비치보이스의 노래보다 기분 좋을 때
바닷바람과 가을과 가을 타는 사람들이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신현림,「바닷가에 서면」전문, 『시작』05가을호
이 시는 접어놓고 긴가민가 했는데, 볼수록 괜찮았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에 대한 어떤 편견(?)마저도 이기게 하는 힘이 있다. (이건 모든 시에 다 적용된다. 뭐랄까. 편식을 뒤집는 맛 같은 것이랄까?)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고, 바다 이야기이면서 육지 이야기고, 무거운 이야기(‘내 구두처럼 무겁게 흰 갈매기가)이면서 가벼운 이야기(’춤추고 싶을까‘)이고, 천박하면서 고풍스럽고 화자와 주변의 정황이 가까우면서 멀다. 결국은 내 이야기면서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여행 중이면서 정지 중(선착장)이다. 삶의 고단함(’서글픔‘)을 이야기하나 발랄하고 경쾌하다.
시의 구성에 있어서도 (대충) 한 번에 내려쓴 시 같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소품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소품만은 아니다 싶은 느낌을 다른 한 편으로 주는데, 암튼 월미도 선착장을 떠오르게 했다. 사람을 ‘물고기같이 싱싱’하게 하는 힘이 이 시에는 있다.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난다 돋아나 깔깔거린다 기쁨을 잃은 살갗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측간에서 할미는 빗자루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중이 괴기 먹는디야 중이 괴기 먹는디야 까슬한 빗자루 지나간 자리마다 꽃모가지들 툭툭 져내렸으나 내 등은 깊게 패이고 패인 살이랑 사이로 다시 무섭게 돋아나 깔깔거리던 꽃모가지들 중이 괴기를 먹어도 중이 괴기를 먹지 않아도 먹구렁이처럼 감겨드는 어둠 잘라 짓찧어도 꽃물 한번 들지 않고 기쁨을 잃은 살갗 내가 죽고 죽어도 골백번 고쳐죽어도 여태도 온밤내 돋아나 깔깔거리기만 하는 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김 근,「밤마다 축제」전문, 『시와사상』05가을호
이 시는 좀 감정의 과잉이다. 톤이 높고 감정의 절제가 덜 되어 있다(‘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 화자의 목소리가 더 시끄러운 듯하다. 그러나 화자에게 내재된 어떤 상태가 그를 그냥 내두지 않는다.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상태, 돋아나서 깔깔거리는 상태, 그래서 살갗은 기쁨을 잃은 상태다. 여기서 ‘시끄러움(청각)’은 ‘가려움(촉각)’과 같은 상태인데, 가려움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지닌다.
빗자루로 내 등을 쓸어내리는 것은 왜 할미일까.
‘중이 괴기 먹는디야’의 반복이 치는 한 번의 전환과 ‘중이 괴기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로 다시한번 치는 재반복이 삼겹살의 기름띠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그 반복의 내용이 주는 의미 여부는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육체적인(‘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혹은 정신적인(내면의 반영이 육체로 나타난 것일 수 있기에), 그래서 개인적인 억압의 상태는 가려움을 넘어 주변의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정도이다. 대충 가려움을 제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등이 깊게 패이고 패인 살이랑 사이로 다시 무섭게’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상태니까, 더 악화되기만 하는 정황이다.
일회적인 처방으로, 혹은 정기적인 처방으로도 가시지 않는 아픔이 이 시에는 있다. 그것이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나는 것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이 부분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아쉬움도 있다. ‘내가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어도’가 식상하고 ‘아으 시끄러운 꽃모가지들’이 남의 얘기처럼 들리는 측면이 있다.
난해와 서정 사이의 거리가 이 정도면 적당하지 싶다.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린다
숨겨둔 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
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었다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고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렸다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
종가의 대소사를 활대질로 다 받아주면서
얼마나 울어서 지운 것인가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마루에서 주무신다
봄볕은 모로 누운 어머니를 마루로 여기는 듯
축 늘어진 젖통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걸레질로 지운 나이테가 파문처럼 옮겨 앉은 몸은
걸레를 쥐어짜듯 뒤틀려 있다
모로 뒤척이는 몸에서 훔친 자국 같은 그림자가 밴다
닦을수록 어두워지는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마루의 속을 이제야 알겠다
걸레의 잠이 끝나면 마루 또한 잠들 것이다
제 그림자로 숨겨둔 현 지울 때까지 울어재낄 것이다
—차주일,「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전문, 『시작』05가을호
오래된 시골집 대문은 바람을 받으면서 나이테를 중심으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오랜 시간 바람과 길항하면서 더 단단한 부분은 남고 약한 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간 결과다. 이 때 대문은 마르면서 깨질 정도로 단단해져 있다. 드러난 옹이 부분은 말라붙은 송진이 호박처럼 굳어 근사한 문양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대문이 바람을 받아 나이테를 중심으로 돋을새김 되는반면 물과 더불어 걸레의 면이 나이테를 건드림 받는 마루는 나이테가 없어져 간다. 흐릿해져 가는 것도 들어맞을 터인데 이에는 물때가 한 몫하지 싶다. 암튼 이 때도 마루는 오랜 시간 젖으면서 말라가는 가운데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릴 정도로 바싹 마른 상태를 유지하며 동시에 ‘숨겨둔 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어둔 것같은 상태가 된다. 발 딛기에도 미안한(조심스런) 어떤 상태를 체험했다면 그런 상태라 보면 된다.
이 시는 상당히 세밀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런 상태로부터 묘사로 간다. 나이테는 옹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나이테 자체가 휜 것은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았기 때문이며 그 문양(옹이)은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려 퍼지는 형국이다. 문제는 그런 것이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종가의 대소사를 활대질로 다 받아주면서’ 걸레질을 한 어머니가 ‘울어서 지운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머니는 마루와 더불어 걸레로 살아오신 분. 그렇기에 마루에서 누우면 그 자체로 마루가 된다. 그래서 봄볕조차도 어머니를 마루로 여겨 축 늘어진 젖통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이미 걸레로 살아온 삶은 쥐어짠 걸레처럼 뒤틀려 있는데 그 나이테의 파문은 어머니의 몸으로 옮겨앉았다. 뒤척이는 몸에서 훔친 자국 같은 그림자가 배는 것도 이 때문.
마루를 통해 어머니의 생을 이해한 화자는 ‘닦을수록 어두워지는/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마루의 속을 이제야 알겠다’는 단정적 깨달음에 이르고 ‘걸레의 잠이 끝나면 마루 또한 잠들 것이다/제 그림자로 숨겨둔 현 지울 때까지 울어재낄 것이다’는 그 하나됨과 속성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그것은 나이테가 없어질 정도의 세월이 전제된, 이미 걸레와 같아진 어미가 있기에 가능한 절정의 상태다.
현관에 놓여 있는
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
남편의 검은 구두
겉은 멀쩡한데
더 이상 출항이 정지된
먼 바다 폭풍을 헤치고 온
군함 같은 검은 그것을
바로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전에 병들어
염전이 보이는 바닷가 요양원에 있을 때
그 염전에서 보이던 수평선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걸까
남편의 구두는
그때보다도 더 말끔하고
그때보다도 더 반짝이는데
현관문을 등지고 묵묵히 안방을 향해 있는
막 지나가고 있는 오늘을
담고 있는
검은 구두가
검은 구두를 놓고 있는 현관이
왜 이렇게 고요하기만 할까
배추요 무요 양파요 라고 외치는
행상 트럭의 뒤를 따라왔듯이
내일을 따라왔는데
오늘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내일이
차창에 부닥쳐오는 빗방울처럼
왜 이렇게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흘러내리기만 하는 것일까
—최정례,「검은 구두」전문, 『황해문화』05가을호
차주일의 시가 ‘마루’와 ‘어머니’가 시적 소재였다면 최정례의 시는 ‘현관의 구두’와 ‘남편’이 시의 중심에 있다. 그게 꼭 남편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지만 아내나 남편을 다루는 시는 이만해야 하지 않나 싶은 전범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서정, 암갈색의 톤이 잡히는 시다.
서정은 ‘현관에 놓여 있는/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남편의 검은 구두’로 인해 출발된다. 화자는 그것을 ‘겉은 멀쩡한데/더 이상 출항이 정지된/먼 바다 폭풍을 헤치고 온/군함 같은 검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한 화자의 인식은 그 구두를 바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구두 속에는 남편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흔적이 있기에 그렇다.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구두는 병들어 염전이 보이는 바닷가에 요양했던 때를 떠올리게 하고, 다시금 쳐다보는 구두가 더 반짝이고 더 말끔한데 왜 더 외로워 보이는지 자문하게 한다. 다시금 현재적 상태. 구두는 말이 없다. (남편도 구두처럼 말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방문과 현관 사이의 거리는 짧지만 검은 구두가 흡수한 고요가 두렵다. 고요가 엄습해온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상황이다. 이제 안방의 남편은 먼 존재다, 구두로 인해. 거기서 구두를 벗고 있는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배추요 무요 양파요 라고 외치는/행상 트럭의 뒤를 따라왔듯이/내일을 따라’온 자신을 발견하고 ‘오늘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겠는 내일이/차창에 부닥쳐오는 빗방울처럼/왜 이렇게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흘러내리기만 하는 것일까’ 회의하는 근본적인 자각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구두는 말이 없을 테고 …… 화자가 구두가 있는 현관에서 안방이라는 그 먼 거리를 건너 가 남편에게 건넬 첫마디가 자못 궁금해진다.
지리산 아래 가채 마을에 사는 김판개 씨는
오늘도 제 몸에 밧줄을 묶고
절벽을 탄다
벼랑 끝에 매달려
바위의 귀때기를 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절벽 끝에 매달린 김판개 씨
틀림없다, 꼭 바위에 한 쪽 귀때기 같을 거다
먹어본 적 있는가, 오독오독 씹히는 귀때기 무침!
커다란 양푼 속
시커먼 바위의 귀때기들을
주물럭주물럭 양념을 하고 무치는
김판개 씨 아내의 솥뚜껑만한 손이여
저 절벽 저 바위덩어리들도 궁금하긴 궁금했나봐
해마다 해마다 귀때기 내미는 걸 보면
이 세상 한 소식 듣고 싶긴 듣고 싶었나봐
외로움과 침묵과 묵언정진이
저 바위덩어리한테도 참 어렵긴 어려웠나봐
—유홍준,「石耳버섯」전문, 『시안』05가을호
나희덕은 유홍준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휴홍준(劉烘埈)은 기억을 ‘즐기고’ 있다기보다는 기억과 ‘싸우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축조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흐름을 통해 스스로를 방기한다. 고통을 직설적으로 발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섬뜩하다.
이 시는 나희덕이 말한 유홍준의 시의 특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섬뜩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다감함마저 엿보인다.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사도 분명하다. 서사의 주인공은 김판개 씨 부부, 진짜 주인공은 바위덩어리. 따라서 다음의 추측에 이른다.
‘해마다 해마다 귀때기 내미는 걸 보면(석이버섯으로)’ ‘저 절벽 저 바위덩어리들도 궁금하긴 궁금했나’보다는 추측. ‘이 세상 한 소식 듣고 싶긴 듣고 싶었나봐’ 하는 추측. ‘외로움과 침묵과 묵언정진이/저 바위덩어리한테도 참 어렵긴 어려웠나봐’하는 추측에 이른다. 그 추측을 가는케 하는 것은 김판개 씨 부부가 제공한 귀때기무침 때문이었을 거라는 추측은 더 가능해진다. 물론 그 전에 그가 바위의 귀때기처럼 매달려 따는 모습도 있기는 하지만. 귀때기 무침에 소주가 그리운 시간이다, 시절이.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 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 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 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부챗살처럼 늘어난다.
사정없이 목을 잡아당기는 개줄에 저항하면
네 다리는 갑자기 하나가 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며 아스팔트에 끌린다.
아무리 달려도 서 있을 때처럼 조용한 바퀴 옆에서
심장과 허파를 다해 헐떡거리는 다리.
오토바이 굉음 소리에 빨려 들어가는 헐떡거림.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종종거려도
도저히 둥글어지지 않는 네 개의 막대기.
느슨해지자마자 팽팽해지는 개줄.
—김기택,「오토바이와 개」전문, 『문학과사회』05가을호
김기택이 발표한 시 중에서 (내가 아는 한)「어느 날, 혀는」, 「교통사고」, 「잎새들」 3편이 계간평에서 다루어지거나 리뷰되었다. 「잎새들」선정은 공감이 되었지만 「교통사고」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큰 새로움이 없는 것을 다루었고 「어느 날, 혀는」은 지나치게 길었다. (내용없이 짧은 것도 지겹지만 시가 긴 것도 큰 흠이라고 생각한다.) 형식에 있어서도 산문식으로 3덩어리에서 5덩어리를 이루는 그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았다. ‘시는 사유 이전, 혹은 사유 이후’라고 한 것은 김현이지만 그의 사유의 특징(형상화)은 사유를 정황으로 환치해 묘사해 들어가는 능력에 있다. 그 묘파는 세밀에 세밀을 더하지만 증폭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의 묘사에서 증폭의 힘을 갖는 것은 상황에서 나온다. 화자는 절대 시인이 아니지만, 대체 ‘개새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정황이 성립에서부터 휘청거린다. 그 것은 또 말 한 마디의 상황이 아닌가.
그러한 아쉬움을 두고 보는 김기택의 이 시는 형식과 내용에도 새롭다. 정황 자체가 섬뜩함을 담고 있어서 담담한 묘사가 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시야말로 김기택 다운 시가 아닌가 한다. 시를 대한 맨 처음, 야 나도 본 적이 있었는데 하는 반성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오토바이처럼 시가 굴러가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그래서 시에서 따로 진술이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좋은 시다.
쟁기가 멍에를 잡아채자
소의 목덜미에 주름이 잡힌다
맨 처음 멍에를 얹었을 때
그 쓰라린 예닐곱 개의 주름은
한 개 혹 속에 갇혔다
글 쓰는 이가
펜혹으로 세상을 두드리듯, 소는
멍에터에 묻힌 어린 주름살의 힘으로
대지 위에 초록주름을 잡는다
하늘의 짝이 된다
이 시는 좀 진부하다. 비육우나 있지 일소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기에 멍에터가 있는 소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렇고 펜혹이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의 세상이기에 그렇게 말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가 현재적 사실로 육체성을 입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환기하는 힘이, 또 그 기억에 존재하는 진정성이 이 시의 힘이다. ‘쟁기가 멍에를 잡아채자/소의 목덜미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다. 그래서 여물을 먹는 소의 목덜미를 빗어주고 궁둥이를 쇠빗으로 긁어주고 그랬던 것이다. 코를 뚫고 소금을 붓는 것을 본 사람의 눈에 ‘맨 처음 멍에를 얹었을 때/그 쓰라린 예닐곱 개의 주름’이 잡히는 것을 못 보았을리 없고 그것이 끝내는 ‘한 개 혹 속에 갇’히는 사실을 모를리 없다. ‘멍에터에 묻힌 어린 주름살의 힘으로/대지 위에 초록주름을 잡는다’는 인식까지는 많은 사람이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 목덜미에 무덤을 얹은 채/쇠방울을 흔드는 젖은 눈’이라는 인식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앟다. 게다가 ‘밀이며 보리며 벼의 뿌리는/멍에터에서 빠져나간/일소의 터럭을 닮았다’는 선언은 쉽게 나올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 지점이 개성이 확보되는 자리라 여겨진다. 전제에서 다소의 진부함이 있더라도 형식에서 교과서적인 시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이 시의 강점이 누구러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너무 같은 형식으로 시를 쓰고 있다.
피사의 斜塔만큼
地球儀 기울기만큼
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正名이나 無名보다는 斜名이 마땅하다 싶어
사람과 귀신 사이 도깨비처럼
하늘이나 땅보다는 반공중을 떠다니듯이
목디스크 아닌 허리디스크로 기울어진 듯이
떨떠름한 눈길로 삐딱하게 꼬나보며
옥의 티가 아니라
티 있는 옥돌이 마땅하다 싶어서
視角은 저절로 삐딱해져버렸다
기울어져 돌아가는 지구에 붙어살자면
최소한 지구처럼 23.5도쯤이라도 기울어져야지
중심잡기 위해서 기울어져야 했을 피사의 탑처럼
삐딱할수록 바르다고
반듯하게 돌아가는 삶이라고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준다
—유안진,「斜視로 본다」전문, 『시안』05가을호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자는 게 뭐 그렇게 새롭겠나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마지막 행에서 설득을 당했다.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주니 좀 삐딱하게 사는 게 어떠냐는 설득에 다시 시의 앞 행으로 갔다.
‘피사의 斜塔만큼/地球儀 기울기만큼/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왜냐? 더 기울어지면 그예 자빠지니까, 그래서 ‘만큼’이다. 그것이 ‘斜名’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온다. ‘삐딱하게 꼬나보다’가 ‘視覺은 저절로 삐딱해져버렸’는데 이 ‘삐딱해진 것’은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니,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는 것은 삐딱하지 않아서이지 싶다. 〈신발밑창〉이 그렇다고 말한다니 안 믿을 도리가 없다. 나도 斜視로 보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시평을 마치면서 떠오르는 말이 두 개 있다.
“나의 의지, 그것은 인간에 매달린다. 그리고 사슬로 내 자신을 인간에게 묶어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초인을 향해 위쪽으로 낚아채이고 말 것이다. 내게 또다른 의지가 있어 초인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짜라투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