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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인정(人情)
양 승 본
난 해방둥이로 1945년생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유달산 기슭인 달동네이다.
우리 집은 엄청 가난했다. 우리 집만 가난한 것이 아니었다. 동네 전체가 가난했다.
집은 산에서 잘라 온 잡목을 대여섯 개 사람의 키 높이만큼 수직으로 세워서 가마니를 걸쳐 놓고 만들어진 움막이었다. 겨울에는 살이 에이는듯한 칼바람이 가마니를 흔들리게 하면서 전신(全身)을 후려치고 있었다.
바람은 마치 우리 식구들을 죽일 듯이 험상궂은 얼굴을 연상케 하면서 사납게 덤벼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살 위인 누나와 나는 서로 붙어서 체온과 체온을 합하여 밤을 보내곤 했다. 여름에는 집안이 찜통이 되어서 모기가 악착같이 피를 빨아댔지만 산기슭에서 잠을 자곤 했다. 가난은 지긋지긋하게 식구들을 괴롭혔다.
아버지의 직업은 부둣가에서 내리는 손님들의 짐을 지게에 지고 갖다주는 지게꾼이었다.
어머니는 선창 가의 노점에서 노점주인 아주머니를 도와 잡일을 하면서 한 푼이라도 벌려고 아침 일직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나는 유달산 아래에 있는 U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도둑질을 했다. 학교 앞에서 단팥을 속에 넣고 쌀가루를 이용하여 양쪽으로 말아서 만든 소위 부께미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우리 움막집에서 한 집 건너에서 사는 이웃이었다.
나는 한 번 그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해준 적이 있었다.
“상철아! 너, 심부름 하나 해주면 안 되겠냐? 잉! 갔다 오면 내가 부께미 하나 줄 것잉께.”
나는 부께미라는 말에 얼른 ‘알았어라우.’하고 대답을 했다.
목포에서 송정 방향으로 약 4km 거리에 있는 자신의 언니네 집에 가서 고약 좀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뒤 목덜미 쪽에 종기가 났는데 언니네가 좋은 고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 때는 달리다시피 갔으나 올 때는 힘이 없었다. 고약을 전해주자 아주머니는 약속대로 부께미 한 개를 주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내 인생에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말이 그날 가장 적중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아주머니가 잠깐 근처의 변소로 간 사이에 그 부께미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서 너 개를 집어 먹고 다시 한 개를 집어 들었다가 그 아주머니에게 걸린 것이었다.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그놈의 도둑질 대가로 받은 매타작이 그 아주머니 앞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나팔을 불어댄 바람에 나는 또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에게 두 번째 매타작을 받았다.
‘굶어 죽어도 도둑질만은 하지 말아야 제. 학교에 다니는 놈이 공부나 할 것이제. 도둑질을…….’ 어머니는 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팼다.
나는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파했다. 밤에는 끙끙 앓았다. 옆에서 어머니가 훌쩍훌쩍 울었다. 누나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다.
내 도둑질은 그날로 끝났다. 그날 나는 ‘죽을 때까지 도둑질만은 하지 않을 것잉께.’라는 결심을 했고, 나이 70이 넘도록 그 약속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나의 도둑질 사건으로 유달산 기슭의 달동네를 떠나 선창가 근처의 개천으로 이사를 갔다. 마침 개천 근처에 살고 있는 정영자가 있었다. 그녀는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누나 친구였다. 그녀는 6학년까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달동네에 살고 있는 그녀의 집을 떠나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개천가에 몇 채의 집들이 도로변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누나에게 개천가를 소개했다. 개천은 바다 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다가 바다로 물을 흘려보냈는데 그 바닷가에서 약 2km 정도 역전 파출소 방향으로 올라간 개천가에 집을 지은 것이었다.
개천은 8m 정도의 넓이였다.
달동네의 집에서 가져온 나무 기둥과 가마니, 그리고 바닷가에서 주워온 판자 몇 개와 쓰레기장에서 수집해온 신문쪼가리 등을 이용해서 지은 움막이었다.
도로 쪽으로는 약 3cm 정도만 걸치고 나머지는 개천 쪽으로 움막집 전체가 세워져 있었다. 도로를 점령하여 교통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가끔 파출소에서 경찰들이 지나가다 단속을 했지만 딱한 사정을 파악하고는 인정(人情)으로 처리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기차역이 가까워서 지게꾼 노릇 하기가 조금 나아졌다. 달동네에 살 때는 주로 부둣가에 가서 지게로 손님들의 짐을 지게에 지고 그 손님의 집까지 가져다준 방법은 같았으나 바닷가보다 역 앞이 더 손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역 앞은 부둣가보다 손님들의 짐을 받아내기 위한 경쟁이 훨씬 치열했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는 손님들이 손에 들고 가기에는 조금 버거운 짐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먼저 달려가 그 짐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개천가의 집에서 살던 우리가 개천가 집을 떠나게 된 것은 1959년 9월 17일 사라호 태풍 때문이었다.
그날 종일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개천 건너에 몇 채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 기와들이 바람에 날아가 개천물 속으로 처박히기도 했다. 거리의 간판이 떨어져 사람이 다치고 선박들은 항구를 나가지 못했는데도 항구에 정박해 있던 수많은 선박이 전부 부서지거나 일부가 파손되었다.
‘사라호’라는 태풍은 정말 무서웠다.
우리 개천가의 집은 새벽 3시경에 심하게 흔들리더니 도로 쪽에 의지한 3cm 쪽이 개천 쪽으로 밀려나면서 집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개천가의 물속에 처박혀졌다. 아버지는 갈비뼈를 다쳤고 어머니는 한쪽 발목을 삐었다. 상옥이 누나는 팔이 찢겼고 나는 발바닥이 못에 찔려 피를 흘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치료를 받지 못했다.
갈 곳이 없어 며칠 동안 개천가에서 가마니를 깔아놓고 지냈다. 주변의 사람들이 와서 밥도 주고 약도 주어서 스스로 치료했다. 어떤 이웃은 누나와 나를 데려다가 직접 밥상을 차려 먹게 하기도 했다. 또 영자라는 누나 친구는 주인집의 양해를 구하여 하루에 한 번씩은 나와 누나를 데려다가 밥을 먹게 해주었다.
남매는 그들의 인정(人情)에 감동하여 찔끔찔끔 울면서 밥을 먹었다.
특히 역전 파출소 김기호 소장은 우리가 개천가에 움막집을 지을 때
“원래 여기는 안 되는 곳인디… 지금도 불법이지만 먹고 살아야제 어떻한당가? 너무 길 쪽으로 많이 들어오지 말랑께요. 도로교통법에 걸린당께요.”
라고 말을 하면서 소위 눈을 감아주던 사람인데 개천가 움막을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랑께요. 큰일 날 뻔 했당께.”
그가 아버지에게 얼마의 돈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한사코 마다했지만, 그는 기어코 돈을 주고 갔다.
도와주는 그 인정(人情)에 나는 가슴이 찡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전하여 한쪽 팔의 손목이 잘려 나갔지만, 절차상의 잘못으로 국가의 보훈(報勳) 대상이 되지 못했다.
파출소장은 그런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지게꾼인 아버지에게 음으로 양으로 인정(人情)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소집영장을 받자 일본으로 밀항을 해버렸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자기의 형을 백안시(白眼視)했다. 반면에 큰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와 일본에서 번 돈을 일부나마 아버지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더러운 돈은 받지 않겠다면서 거절했다.
큰아버지나 아버지의 고향은 목포시 임성리였다. 6.25 전쟁 전까지 그곳에 살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큰아버지가 귀국을 했다. 그는 귀국을 하자마자 지금의 산정동인 Y마을로 옮겼다.
고향의 대부분 재산은 부모가 살아 있을 때부터 장남 제일주의 사상에 젖은 할아버지에 의해 큰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었지만, 그 재산은 아버지의 잘린 손목이 제대 후에 말썽을 부려 그 치료비 용도로 쓰인 후 빈털털이가 되었다. Y마을로 가서 함께 살자는 큰아버지의 제안을 뿌리친 것은 아버지였다.
그는 도움을 거절하면서 큰아버지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세상은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달동네 생활에서 지긋지긋하게 가난과 함께 지냈다.
이사 간 큰 아버지는 U초등학교나 M중•고등학교에서 10여 리 떨어진 S초등학교 근처의 산정동인 Y마을에서 집을 짓고 꽤 많은 농토를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달동네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큰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개천가 부근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영자가 개천가의 천막으로 왔다. 영자나 누나나 학교를 다녔으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텐데, 누나는 방직공장에 다니 영자는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영자가 붕대를 가지고 와서 개천가의 집이 무너질 때 다친 누나의 팔을 싸매주면서 말했다.
“내가 니네 큰집에 갔다 올 것 잉께.”
“왜 그런 당가?”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 잉께.”
영자는 큰집으로 가서 개천에서의 사고를 말했다.
큰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잘살고 있었다. 또 주변에서도 아버지 ‘김인수’는 잘 몰랐지만, 큰아버지 이름인 ‘김인영’이라는 이름은 말하면 돈 꽤나 있는 사람으로 알아주었다.
아버지가 소심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이라면 큰아버지는 통이 크고 배짱도 좋았다. 또 남을 잘 다스리는 왕초 기질도 있었다.
해방 전부터 주먹께나 썼고 그의 부하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큰아버지가 돈을 번 것은 일본에서 밀수에 손을 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소문도 떠돌았다.
전쟁 중에 일본이 한국에 수출하는 모든 물품을 총괄하는 그 지방 지역의 총책으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고, 일본 상인들이 한국으로 수출하는 전쟁과 관계된 물품들을 자기 조직의 깡패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아 가로챈 후 헐값으로 한국에 넘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제사 때 가면 큰아버지는 아버지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전쟁 와중에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수출 관계의 일을 보다가 전쟁 후 약 1년간은 가고시마에서 같은 일을 했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밀수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그 많은 돈을 벌 수 없다는 리를 펴면서 병역을 미필한 문제와 관련하여 비겁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큰아버지가 주장한 말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는 수출 관계의 일을 보고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했던 일본인의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목포에서 건너간 사람이었다. 그녀가 목포의 친정집에 온 것이었다.
그녀는 큰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중에는 큰 집의 상진이 형, 상숙이 누나, 그리고 상만이 등 삼 남매의 옷과 나와 상옥이 누나의 옷도 가지고 왔다.
나는 까만 상의와 바지였는데 옷감이 모두 ‘사지’라는 피륙으로 된 최고급 옷감이었다.
그 여자가 일본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생활에 대하여 증언을 한 것이었다.
“지금도 저의 남편은 김인영 사장님에게 입었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그녀는 남편이 보낸 것이라고 일본 술 ‘사케’와 ‘발렌타인 30년’이라고 쓰인 상표가 붙어 있는 양주도 가져왔다.
그 여자 때문에 큰아버지의 헛소문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는 큰소리를 치는데 이상하게 아버지에게만은 저자세였다. 또 늘 양심의 가책으로 지냈다.
그것은 외할머니의 사망과 관계가 있었다.
총각 시절에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둘이서, 내게는 외할머니가 되는 강진의 B면 외갓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처가에 큰아버지가 함께 간 것은 그곳에 큰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는 친구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다.
외할머니 집 앞에는 목포 방향으로 흘러가는 큰 내(川)와 바로 마을 앞으로 지나는 작은 내(川)가 있었다. 큰 내는 작은 내를 지나서 있었다. 장마철인데 그날 잠깐 비가 개자 아버지는 작은 내에서 족대를 이용하여 천렵을 하러 가려고 했다. 아버지가 큰아버지 보고 함께 천렵을 하자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나의 외할머니를 졸라 외할머니와 함께 작은 내를 건너고 큰 내를 건너 참외밭으로 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외할머니가 말했다.
“상철이 큰 아부지! 비가 올 것 같응께, 내일 가면 좋것 당께요.”
외할머니의 말에 큰아버지는 사돈 관계이기 때문에 어려워해야 할 처지인데도 이상하게 박박 우겼다. 성격 탓이었다.
“가장께요. 비땜 시에 밭에도 못간다요 이?”
아버지도 말했다.
“성님! 장모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당께. 나랑 작은 내로 천렵가장께. 뭣담시 고집을 부린당가?” “
다시 외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산골 물잉께 만야게 비가 온다면 급물살이 되어 위험하당께요.”
“워메! 지는 참외 묵고 싶어 죽겠당께요.”
결국 큰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큰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참외밭으로 갔다. 그리고 망태기에 참외를 가득 따 넣어 집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장대비가 다시 쏟아지면서 큰 내에 물이 불어났다. 평소에 건넜던 징검다리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망태기는 큰아버지가 메야 하는데 사위의 형을 아끼는 마음에 외할머니가 멨다. 끈이 하나여서 한쪽 어깨에 멘 것이 화근이었다.
커다란 돌로 놓아진 징검다리이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 놓는 데 앞서가던 큰아버지는 무사히 건넜지만, 외할머니는 중간쯤에서 징검다리 돌로부터 미끄러졌다.
“워메! 워메!”
단말마(斷末摩)의 비명을 지르면서 외할머니는 급류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한쪽 어깨에 멘 망태기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기우뚱해졌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떠내려간 것이었다.
큰아버지가 큰 내를 건너간 다음에 일어난 순간적인 사고였다. 물속으로 휩쓸려 간 외할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비가 쏟아졌지만, 동네 사람들과 외할머니 식구들은 시신을 찾아 나섰다. 외할머니의 시신은 징검다리에서 약 4km 떨어진 큰 내의 하류에서 찾았다. 냇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시신을 건져 냈을 때야 흥분한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장가를 든 이후 특별히 장모의 사랑을 받았던 아버지로서는 큰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을 것은 뻔했다.
“내가 참외밭에 가지 말고 천렵가자고 했제?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참외를 먹어야 했당가? 입이 있으면 말해 보랑께.”
“…….”
큰아버지는 외삼촌 형제들에게도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형이 어디 외할머니를 일부러 그렇겠는가!
영자의 말을 듣고 개천에서 일어난 사고의 소식을 들은 큰아버지는 동생네 식구들의 사고를 당한 기회를 이용하여 병력을 피하여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것과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사건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형제의 정(情)을 회복하고 싶었다.
영자가 다녀가자 큰아버지는 큰어머니, 나의 사촌 형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상진 형, 대학 2학년에 다니는 그의 누나인 상숙이, 생일은 나보다 몇 달 빠르지만 나와 고등학교 같은 학년인 상만이까지 가족을 총동원하여 개천가에 임시 거처하는 곳을 찾았다.
그때 아버지의 의지는 꺾였다. 가난과 개천가의 움막집에 대한 사고로 가족이 몸에 상처를 입었으며 그 상처로 인하여 마음까지 피폐해진 상태에서 자존심이 약해져 있었다.
“난 니를 항상 기다리며 살았다이, 니도 알 것이여. 성은 S 초등학교 근처에 살고 있으니께. 성이 살고 있는 산정동의 Y 마을은 가난하지만 우선 마을 사람들이 착하당께. 인정(人情)이 넘치는 마을이랑께. 다만 상철이가 다니는 M고등핵교가 10여 리에 있어서 약간 멀다고 할 수는 있제. 하지만 그 뭐 대수랑가? 동네 애기들 중 M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애기들이 많아서 함께 어울려 다니면 재미도 있지 안을랑가? 그리고 인수야! 이제 니도 이 성을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당가? 참말로 이 성은 늘 니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왔당께. 시방부터 마음의 벽을 풀고 살잔께.”
“…….”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큰아버지가 있는 Y마을로 가는 것으로 큰아버지의 과거를 청산(淸算)해 주었다. 그래서 형제간의 인정(人情)이 회복되었다.
큰아버지의 집은 S초등학교 뒤쪽인 산언덕에 있었고 아버지의 집은 학교의 앞에 해당하는 평지에 있었다.
이제 아버지는 큰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었다.
Y마을은 가난했다.
특이한 것은 가난하지만 인심이 좋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형제처럼 지냈다. 모를 심을 때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함께 모를 심는 품앗이 형태로 일을 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해서 항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우리 집 모를 심는 날에는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새벽부터 집집마다 다니면서 ‘민수 아버지 진지 잡수시러 오시랑께요.’ ‘개똥이 아부지 진지 잡수시러 오시랑께요.’ ‘억만이 아부지 진지 잡수러 오시랑께요.’를 외치며 다녔다.
Y마을은 S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약 3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었다. 큰 아버지네가 유일한 기와집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들이었다.
멀리 목포 시내의 중심지역이 보이고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많았지만, 어느 곳이나 가난은 초라한 모습으로 기웃거리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아침 식사는 모를 심어줄 남자 어른들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식구가 와서 식사했다. 직접 모를 심을 일군들 곁에는 코흘리게 남녀 어린이들이 자기의 아버지 곁에 앉아 식사를 하고, 그보다 큰 사람들은 별도로 밥상을 차려 대접을 했다.
대부분의 아낙네들은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을 했고 일군들이 나간 다음에 모여서 식사를 했다.
모를 심는 날은 동네잔치와 같았다.
새참은 직접 모를 심는 들녘으로 내 갔다. 새참 때든 점심때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그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 눈에 띄면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든 지나가는 나그네이든 상관없이 ‘여기 좀 와서 밥좀 묵고 가시랑께요.’라고 정겨운 소리를 지르곤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밥좀 묵고 가시랑께요.’란 인정(人情)의 말이 나의 가슴에 늘 남아서 평생을 그 인정(人情)으로 살았다.
그 인정(人情)의 하나가 전라도 인심이고 목포 인심이었다.
저녁 식사 때도 식사를 하는 마을잔치는 아침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큰아버지네 논에 모를 심을 때는 저녁나절에 꼭 농악 놀이도 이루어졌다. 전라도 사람들의 삶이 녹아든 ‘육자배기’가 나오고 아리랑과 흥타령 등의 노랫소리가 온통 마을 전체를 신나게 돌아다니곤 했다. 춤과 노래가 어울리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도 신나게 어울렸다. 평소에 작은 오해나 감정이 있었다고 해도 어울리는 동안에 서로 쳐다보면서 웃고 눈빛으로 느끼면서 어정쩡한 그 자리를 인정(人情)으로 메워 갔다.
나는 목포 시내 중심가에 있는 M고등학교에서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어서 대학입시에 대한 강박관념은 많았다. 그래도 일요일이면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를 대고 가끔은 목포 부둣가로 가서 낚시질도 하고 때로는 강진에 있는 친척 집이나 율도에 있는 친구네 집에 롤러를 갔다. 비록 외할머니는 계시지 않았지만 강진은 나의 외가가 있어서 그쪽의 친척들이 많았고 내 또래의 청소년들이 많았다. 또 율도의 친구 김철중은 나와 같은 김해김씨로 나랑 같은 반인데 장래 희망이 나와 같은 검사였다.
그날도 일요일이어서 친구네 집에 갈까 하고 나서는데 손님이 왔다.
광주 조선대학교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먼 친척이면서 아버지와 친구로 지내는 김희민이라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 했다고 해서 온 것이다.
그는 학생 손님이 많아서 꽤 돈을 벌었다. 아버지와 어울려 술에 취하더니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그 가사에 나오는 목포지역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나도 따라나섰다.
나는 아버지와 그 친구가 적당한 장소에서 마실 막걸리와 안주를 준비해서 뒤를 따랐다.
“내가 시방 목포까지 오지 않았당가? 항구에 맺은 절개는 모르더라도 사공의 뱃노래부터는 한 번 둘러봐야 쓰것당께. 안 그렇당가?”
“좋아뿌렀어.”
아버지와 그는 노랫말에 나오는 순서대로 둘러보았다. 사공의 뱃노래를 들어본다고 부둣가를 찾았지만 뱃노래를 들을 수는 없어 삼학도 쪽으로 배를 빌려 가려는데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돛단배를 막 띄우려 하면서 구성지게 ‘뱃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더구나 그곳에는 ‘예쁜 아까씨’까지 타고 있었다.
김희민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아자씨! 혹시 쪼개 말 좀 물어봐도 될랑가요?”
“뭣 땀시 그렇당가요?”
“이 배, 삼학도는 안 간당가요?”
“삼학도로 가는 것잉께 탈라면 타시오 이.”
“엄메 참말로 좋당께요 이. 우리가 시방 삼학도를 가고 싶은데 참말로 잘 되뿌렀오 이.”
“그렇따요? 서울서 대학 다니는 우리 큰애기가 오늘 서울서 왔는디 삼학도 좀 가고 싶어 한당께요.”
“참말로 잘 되뿌렸오. 인수야! 오늘 사공의 뱃노래도 들어보고 부두의 아까시도 본 셈이니 참말로 잘 됐다야. 시방부터 배만 앞으로 나가면 ‘삼학도 파도 깊이’를 느낄 수 있응께 참말로 좋다 이.”
“희민이 말이 딱 맞아뿌렀어.”
나는 아버지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때 김희민 아저씨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아까 부르던 뱃노래 한 번 더 불러 보드랑께요.”
“그렇게도 제 뱃노래가 좋당가요?”
“긍께 이렇게 부탁 안한당가요?”
그러자 배 주인은 기분이 좋은지 다시 뱃노래를 불렀다.
정말 노랫말처럼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리고 삼학도 파도 깊이가 느껴지면서 옆에 탄 뱃사공과 그의 딸이 입은 옷의 모습이 아롱 젖은 옷자락으로 느껴졌다.
삼학도에 내렸다. 섬을 한 바퀴 둘러본 김희민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이 돈 얼마 안 되지라요. 대신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당께요.”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부탁이 있당가요?”
“우리 이 섬에서 2시간만 더 있다 갈랑께요. 그때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면 안 된 당가요?”
“2시간 후에 올랑께 걱정 마시랑께요.”
뱃사공은 딸을 태우고 유유히 목포항을 향하여 배를 저어갔다.
아버지와 김희민 아저씨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전쟁 이야기, 일제 강점기 시대 이야기 등으로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상철이 너도 한잔 하것냐?”
“시방은 핵교에 다니는 학상이니께 나중에 어른 되면 먹겠당께요.”
“…….”
희민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거두었으나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야 제.”
그들이 말을 나누는 동안 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입시 준비도 중요하지만, 독서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성격은 친구 청중이도 나와 비슷했다. 대신 나는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는 성격이었다. 학교 시험 때는 옆에서 불이 나도 모를 정도로 공부에 빠졌다. 드디어 2시간이 지나자 뱃사공은 다시 삼학도로 배를 저어왔다.
아버지와 김희민 아저씨는 목포항에서 뱃사공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막걸리 한잔을 따라주었다. 노를 저을 때는 술을 먹어서 안 되는 것이기에 삼학도에서는 한잔도 주지 못했다면서 이해를 구했다.
뱃사공은 초여름의 햇살 아래에서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으면서 눈빛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텁텁한 막걸리를 기분 좋게 마셨다.
이제 술은 없어서 나는 책 한 권만 들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의 안내로 먼저 노적봉에 올랐다. 자리를 잡고 나는 목포의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잠을 자고 있는 모습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시작되었고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난 말이여. 뭣이, 그 거창한 애국자도 아니지만 ‘목포의 눈물’을 들으면 나라 생각, 국민 생각땜시 쪼깨 눈물이 난당께.”
“나랑 똑 같은 맴이네이. 나도 그렇당께.”
“긍께 우린 친구가 된 것이랑께.”
“참말로 그러 제.”
“그렁께 그것이 뭣 땜시인지 모른당께. 하여간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과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서름’에서는 일본 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연인을 보내는 여인의 모습이 느껴진당께.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와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에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 놈들이 생각된 당께. 놈들이 얼마나 악하게 굴었당가? 우리 백성들의 귀를 베고 코를 베어 죽였으니 코무덤까지 생겼지 않았는가? 그런 일본으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시방까지 어찌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당가? 또 임진왜란 때도 그랬지만 특히 일제 강점기 때 호남지방의 쌀을 일본 놈들이 몽땅 공출해갔지 않았당가? 그런디 말시 그 운송 수단이 배였당께. 또 그 출발지가 목포항이 아니었당가? 그래서 그 곡식을 싣고 떠나는 우리나라 사내들과 그들을 보낸 여인들의 맴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겠당가? 이어서 ‘유달산 바람은 영산강을 아느니’ 그리고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에서는 일본 놈들 그 싸가지 없는 놈들의 총칼 앞에 영산강을 내려오는 강제 수송선과 떠나는 남정네들을 보내는 여인네들의 눈물이 얼마나 흘렀겠당가를 생각한당께.”
“참말로 자네 말 듣고 보니 내 가슴이 엄청 아프당께.”
“그뿐인가?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쩌다 옛 상처가 세로워진다.’를 들어보소. 남편이 없는 밤에 홀로 남은 여인들이 조각달을 보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않겠당가? ‘못 오는 님이라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을 생각해 보드랑께. 얼마나 남편이 그리웠으면 ‘마음을 보낼 것을’이라고 울먹이겠는가? 그래도 우리의 목포 여인들은 항구에서 맺은 절개 속에서 목포에 대한 사랑을 지킨다는 것에서 난 참말로 눈물이 난당께.”
“듣고 보니 가슴이 찡하네.”
“그렁께 평시에는 물론 나라가 외침을 당할 때는 국민 모두가 똘똘 뭉쳐 외적을 막아야 하는디 그 당파 싸움질을 했던 꼬락서니들을 생각해 보랑께.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디 일본에서 조선을 침략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응께. 사실되로 말해야 되것 제. 그런디 동인과 서인이란 당파땜시 상대방과 반대말을 하여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깔아뭉게고 싸움질을 계속 했단께. 그 7년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었당가? 산 사람도 산 사람이 아니었제. 시체를 뜯어먹는 일까지 벌어졌당께. 바로 우리 목포의 노적봉을 볏가리로 위장하고 영산강에 횟가루를 흘려보내 쌀 뜸물로 위장하여 일본 놈들을 물리친 그 이순신 장군마저도 시기, 질투하여 감옥에 넣었당께. 그러다가 다시 꺼내어 싸우게 한 그 나쁜 버릇들이 임진왜란 후유증을 벗어나기도 전에 병자호란 때도 똑 같았당께. 남한산성 밖에 외적들이 있는데 그것을 막는데 뭉치기는커녕 성안에서 지들끼리 당권 다툼과 정권 다툼으로 주둥아리만 놀리고 있었당께. 그러니께 45일 만에 항복했고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그 치욕을 당했것제. 우리나라에서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자들이 다시 강제로 끌려와 ‘지화자 좋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돋우고 청 태종의 왕자들은 우리나라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면서 활 쏘는 장난 짓을 하는 가운데 천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3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이마를 찧으며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도 못한 채 충성을 맹세한 조선 임금의 그 초라한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 터질 일이 제.”
“그것은 우리가 일본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도 똑 같았당께. 시상에 일본 깡패새끼들 20여 명이 궁궐에 쳐들어 와 왕비를 농락하고 불을 질러 죽여도 못 막는 나라가 무슨 나라였당가? 참말로 나라가 아니 제. 지지리도 못난 위정자들이었당께.”
“지금도 일부 국회의원들 싸움질하는 꼬락서니들 보드랑께. 그런 놈들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그런당가? 자네초롬 점방을 하던지 나초롬 농사를 짓던지 할 것이 제.”
서녘 하늘에 황혼이 오고 있었다.
김희민 아저씨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가세! 한탄만 하고 있으면 뭣 한당가?”
“자네 말이 맞당께. 어여 가서 자네는 점방 잘하고 난 농사 잘해야 제.”
셋은 목포역으로 갔다.
아버지가 김희민 아저씨에게 차비를 꺼내 주었다.
“무슨 차비랑가? 내가 자네보단 돈이 더 많은 사람인디. 맴으로만 받을 것잉께 그냥 넣어두소.”
“웟다메 시방 무슨 말이랑가? 누가 돈 때문에 그런당가? 다 정이 제.”
“…….”
아버지는 아저씨의 손에 강제로 돈을 쥐어 주었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어머니도 늘 그랬다. 아니, 우리 부모님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집에서나 집에 먼 곳에서 손님이 오면 차비를 주는 것이 목포를 비롯한 전라도 지방에서는 습관처럼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정이 살아있었다.
특히 어머니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부터 아침에 거지들이 오면 밥을 주기도 했지만 일일이 마루에 오르게 하여 밥상을 차려주고 먹고 가도록 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인정(人情)이었다. 김희민 아저씨가 역으로 들어가자 아버지와 나는 집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이 역전 파출소를 지나게 되는데 마침 파출소에서 경찰 한 사람이 나오다가 아버지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상이 훤해 보이네요 이. 지게꾼은 안한 당가요?”
“지 형님 땜시 그만 둔게 한참 됬당게요.”
“참말로 잘 됐응께 보기 좋네요.”
“고맙당께요.”
“그런디 이분은 아들이랑가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당께요. 앗따 이제 알아뿌렸오. 그 때 개천가에서 보았지라우. 어메 그 2년 새 엄청나게 잘생긴 총각이 되었네요 이.”
“고맙당께요. 시방 고등핵교 3학년에 댕기지라.”
“참말로 멋있당께요.”
“야! 상철아! 니 김기호 파출소 소장님인데 시방 뭣하냐? 싸게 싸게 절하지 않고…….”
“…….”
나는 재빨리 90도 각도로 절을 했다. 그가 웃으면서
“반갑네 이.”
라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때서야 우리가 개천가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찾아왔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인정(人情)이 바람처럼 다가와 내 전신을 어루만지듯 했다.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아버지와 걸었다.
철중이와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거의 붙어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물론 큰집의 형이나 누나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다. 2학년이 되면서 큰아버지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자전거를 사주었다. 철중이는 학교가 가까웠는데도 고1부터 자전거로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런 철중이가 부러웠는데 마침 큰아버지가 사준 것이었다.
철중이와 나는 꼭 공부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하게 놀기도 했다. 연애도 딱 한 번 해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늦은 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인데 마침 토요일이었다. 내가 철중이에게 말했다.
“철중아! 우리 서울 구경갈까? 아니면 진도도 좋당께.”
“글시, 난 이모네 가기로 했는디, 차라리 니도 함께 갔으면 좋겠당께.”
“좋아 뿌렸어.”
우리 집은 전화가 없어서 나는 큰아버지네로 전화를 했다. 큰어머니가 받았다.
“큰 엄니!”
“상철이냐? 뭣 땀시 전화했냐?”
“지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갈 것잉께 엄니께 좀 알려주시랑께요.”
“알았응께 재미나케 놀기라 하랑께.”
철중이네 이모네 집은 용해동에 있었다. 박삼례라는 이름의 이모는 철중이 어머니 언니였다. 철중이 이모는 철중이를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그녀는 비록 동생의 아들이지만 철중이를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6.25때 남편을 잃고 철중이보다 한 살 아래의 외동딸 하나를 두고 사는데 농사일을 억세게 했다. 그 덕에 50여 가구 중에서 제법 잘살아가는 측에 들었다. 철중은 그 위로 누나만 둘이 있었다. 철중은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 항구에서 아내와 함께 건어물 가게를 하는데 살만했다.
천중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가면서 철중은 말했다.
“이모는 날 아들로 생각한당께. 내 형제만 있었어도 난 이모네 양자로 갈을 것잉께.”
“잘 해드리랑께.”
“다음에 성공하면 엄니처럼 모셔야지.”
철중이 이모네 집 뒤쪽으로는 대나무가 많은 낮은 언덕 같은 산이 있었다. 박삼례는
“이모!”
라고 대문 앞에서 부르는 소리에 정말 맨발로 뛰어나왔다.
“친구랑 함께 왔어요.”
“잘 했당께. 잘 했당께.”
박삼례는 마냥 기뻐서 외치듯 말했다.
철중이가 이종사촌인 목포M여고 1학년에 다니는 이옥님이를 내게 소개했다.
“김상철이랑께요.”
“옥님이랑께요.”
내가 이성으로 여자를 만난 것은 그날이 난생 처음이었다. 옥님은 이뻤다. 달걀형의 얼굴이 아주 작았고 눈썹은 짙었으며 눈꺼풀은 쌍까풀이 진 모습이었다. 양 볼에 보조개가 있었고 입은 작고 입술은 빨갰다.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컸다.
내 키가 175cm인데 나의 키와 비슷했다.
나는 옥님이가 내 곁에 좀 오래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생각했으나 내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닭을 잡고 반찬을 만들면서 부엌과 텃밭을 드나들었고 먹을 것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진수성찬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였으나 정성과 인정이 곁들여 만든 것이기에 더욱 맛이 있었다. 밤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별을 헤아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하수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별들은 마치 은빛을 발하며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나는 견우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했고 철중은 북두칠성의 전설을 말했다. 박삼례는 6.25 전쟁에 대한 비극을 이야기했고 옥님은 이광수의 ‘사랑’ ‘흙’과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에 빠졌다가 새벽녘에 박삼례가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어서 잠이 들었다.
철중이와 내가 눈을 떴을 때 박삼례와 옥님이가 이미 아침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눈곱만 떼고 우리는 식사를 했다. 우리는 집 뒤의 대나무밭을 지나 실개천으로 갔다.
물이 맑았다. 피라미들이 쏜살같이 오르내리고 모래무지가 개천 바닥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곤했다. 개천가를 조금 걷다가 철중이가 그만 돌아가자는 말에 우리는 집으로 왔다.
‘벌써 가느냐?’고 ‘내일이 일요일인데 하루 더 묶어 가면 안 되느냐?’고 어린애처럼 졸라되는 박삼례의 말을 뿌리친 것은 철중이었다.
“이모! 우리 둘은 대학을 가야 한당께.”
“…….”
나는 박삼례의 말을 따랐으면 했지만, 철중은 내게 가자고 재촉했다. 내가 더 있고 싶었던 것은 옥님이 때문이었다.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었는데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나와 옥님은 서로 편지를 하기로 하고 주소를 교환하였다.
자전거를 타려는데 박삼례가 차비라면서 우리 두 사람에게 꽤 많은 돈을 주었다.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냐?’는 철중의 말에 그녀는 아쉬움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따메 마음의 차비라는 것도 있응께 그럭코럼 알랑께.”
“고맙당께요.”
“고맙당께요.”
진심과 사랑이 담긴 인정(人情)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했고 철중은 ‘옥님이도 잘 있으랑께.’라고 한 반면에, 나는 눈인사만을 보냈다.
그날 밤 나는 집에서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연애편지를 썼다. 얼마나 찢고 다시 쓰고 찢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는지 몰랐다.
편지 제목도 얼마나 여러 번을 생각하고 바꾸었는지 몰랐다. 결국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옥님 씨!’라고 정했다.
학교에 갔다가 학교 앞 우체국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자 달려와서 편지를 부쳤다. 다음날 옥님이가 답장을 보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상철 씨!’로 되어 있었다. 철중에게 제목을 말했더니
“옥님이도 널 좋아하는 것 같당께.”
“그러 제? 그러 제?”
나는 반복해서 확인을 했다.
“그렇당께 왜 자꾸 묻고 그래 쌌냐?”
“알았당께.”
나는 철중에게 허리를 굽혀 큰절까지 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편지를 쓰고 매일 답장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집을 향하는 자전거의 속도가 평소의 2배 속도였다.
그렇게 약 한 달을 보낸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큰아버지 집에서 옥님 네로 전화를 걸었다. 박삼례가 받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는 금방 ‘철중이 학생이랑가? 그동안 잘 있었제?’라고 했다. ‘네, 이모님! 옥님이 집에 있당가요?’라고 말했더니 박삼례의 말은 더이상 들리지 않고 옥님이가 전화를 받았다.
“옥님씨! 상철이랑께요.”
“참말로 반갑당께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만나자고 했다. 내가 집 가까이 자전거로 간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우리 유달초등학교 정문에서 만났으면 좋것당께요.”
“옥님씨가 힘들까봐 그렇당께요.”
“참말로 그 맴이 고맙당께요. 그런디 걱정말드랑께요. 지가 퍼뜩 갈 것잉께요. 사실은 유달산을 함께 올라가고 싶응께요. 가까이 살면서도 못갔당께요.”
“알았당께요.”
사랑의 음성이 유선을 타고 전해오면서 그녀의 인정(人情)이 가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사복 차림으로 하늘색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시간에 맞춰 유달초등학교 교문으로 갔다. 현관에는 박제된 호랑이가 있었다. 전에 보았지만, 다시 구경하면서 쓰인 설명을 읽고 있는데 옥님이가 왔다.
그녀 역시 사복(私服) 차림이었다.
상의는 하얀 블라우스에 하의는 엷은 하늘색 치마를 입었는데 첫날 본 모습보다 더 예뻐 보였다. 나는 악수를 한다는 핑계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교문 밖으로 나와 잡은 손을 놓았다. 내 가슴은 뛰고 그녀의 얼굴은 빨갰다.
교문 밖으로 나와서 다정하게 걸었다. 산길에 들어서자 거의 사람이 없었다. 만나기 전에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노적봉까지 올라갔는데도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짧은 치마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좌우, 상하로 가볍게 펄럭이었는데 그때마다 무릎 위의 넓적다리 부분이 보였는데 하얀 살결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달성각에 갔을 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선각, 마당바위까지 가면서 취미, 독서, 여행, 학교생활, 영화 등에 관하여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의 주제를 찾지 못해 나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드디어 유달산 정상인 일등바위까지 올라갔다.
황혼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포 시내가 거의 보이고 항구 앞의 바다가 보이면서 다도해가 보였다. 아름다운 절경(絶景)을 보고 나도 그녀도 계속 감탄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바위가 황혼빛으로 물들자 마치 황금 같았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서녘 하늘빛과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새로운 세계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참말로 잘 왔네. 우리 목포와 유달산이 그리고 항구와 목포 앞바다의 다도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예전에는 미쳐 몰랐당께. 와! 참말 좋아 뿌렸어.”
“그렁께요. 참말로 목포는 아름다운 도시랑께요.”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絶景)을 우짜자고 이제사 본당까?”
“가까이 두고도 못 본 경치를 시방이라도 보니께 모두 오빠 덕분이당께요.”
“옥님씨 덕분이죠.”
“하여간 오빠나 지나 이런 목포에 사닝께 엄청 좋다니께요.”
“진짜 좋아뿌렀어.”
“…….”
“…….”
나도 그녀도 아름다운 목포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까지 잃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황금빛을 바라보면서 선 채로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빵집에 들러 식사를 대신 한 후 우리는 밤길을 걸었다. 헤어지기 싫어서였다.
그녀의 어머니 박삼례 집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녀를 바로 보내지 않고 대나무 숲 앞 잔디밭에 함께 앉도록 했다. 달이 밝아서 처음 만난 날처럼 별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유성(流星)이 긴 꼬리를 남기면서 떨어져 내렸다. 사방은 소리를 잃어버린 듯 고요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녀의 손은 뜨거웠다. 그러나 나의 손은 그녀보다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뜨거움이 나의 전신(全身)으로 퍼졌다.
나는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 이어서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그곳에도 입을 맞추었다. 나도 그녀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사랑해.”
“사랑해.”
둘은 같은 말을 하면서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았다.
몸을 떼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빠! 내 꽃을 갖고 싶은디 참고 있지라?”
“난 옥님 씨를 죽을 때까지…….”
내가 말하자 그녀가 살며시 일어나더니 옷을 벗었다. 나는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난 말을 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서 발가벗은 그녀는 미(美)의 극치(極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극치(極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답고 그녀보다 더 나를 매혹 시키는 것은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목숨처럼 사랑한당께.”
“옥님이도 오빠를 죽도록 사랑할 것잉께…….”
“…….”
“…….”
나도 그녀도 더이상 말을 잃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빤 오늘 옥님이 맴을 몽땅 가진 것잉께. 이제 옥님이는 오빠 것이제?”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니 깊은 골짜기에 있는 꽃은 오빠가 너랑 결혼식 올리는 첫날 밤까지 참고 있을 것잉께.”
“참말로 고맙당께요.”
그녀가 옷을 입자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조용히 흐느끼듯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오빠! 옥님이가 부탁하나 해도 되는 것이제.”
“뭣이든 말하랑께.”
“그러니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녀가 말한 요점은 ‘내일부터 서로 편지를 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자는 것, 그리고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그때부터 사랑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편지를 쓸 시간에 공부를 더 하고 만나는 시간에 공부를 더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녀는 내게 명함판 사진 한 장을 주면서 말했다.
“오빠 사진도 갖고 싶당께요.”
나는 독사진이 없어 1학년 때 소풍 가서 철중이와 함께 사진을 주었다.
그녀와 나는 수 없이 포옹한 다음 임시 이별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철중이와 나는 미치도록 공부를 했다.
철중이와 나는 무난하게 S대 법대에 입학했다. 나의 합격 소식에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고 아버지는 말은 없었지만, 입이 찢어질 듯 웃음을 내보냈다.
동네잔치가 벌어졌고 M고등학교 교문에는 우리 둘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바닷바람에 기분 좋게 펄럭이고 있었다.
김기호 역전 파출소장은 경찰서 정보과장으로 승진되어 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목포 경찰서장과 지프차를 타고 우리 집을 찾았다.
김 과장은 나를 끌어안으면서 축하를 해주었다. 서장이 책이라도 사라면서 장학금을 주었는데 옆에서 박수를 치면서 제일 기뻐한 사람은 김 과장이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했다. 운전할 경찰은 마시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았다.
다음날은 목포시장을 비롯한 시청공무원들도 다녀갔다.
나는 사법연수원을 나와 목포지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철중이는 광주지검으로 발령을 받았다. 김기호 과장은 목포경찰서장으로 승진되어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발령을 축하해 주었다. 우리 식구들, 철중이, 큰아버지네 식구들, 옥님과 그 어머니가 모여 저녁 식사 겸 축하 잔치를 벌였다. 모든 경비는 큰아버지가 처리했다. 그 자리에서 옥님과 나는 약혼식을 했다.
술잔을 들 때마다 건배사는 ‘목포 사랑’으로 했다.
그리고 모두가 이난영이 불렀던 ‘목포의 눈물’을 제창하면서 모두가 기뻐서 웃고 기뻐서 울었다. 나는 진정 목포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면서 우리가 안식처로 정착할 영원한 항구라는 것을 느꼈다.
내 사랑 목포여! 내 사랑 목포여! 우리는 모두 외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외침이 바로 목포인의 애향심이고 본심이며 ‘목포의 인정(人情)’이라는 것을 뼈와 살에 새기면서 축하를 마무리했다.
어디선가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라는 가요가 들려오고 있었다.
※경기대 교육대학원 졸, 전 용인 서원고등학교 교장, 장편소설 햇살 만들기(전 3권)로 경기도 문학상 수상, 중편소설 다리로 호국문예 국방부장관상 수상, 단편소설 웃음으로 경기문학인상 대상 수상, 수필 고향을 위하여로 농촌문학상 대상(농림식품부장관상) 수상, 제3회 홍재문학상 수상, 한국농촌문학상 심사위원장, 경기문학인협회 회장, 수원문인협회 회장 역임, 경기일보, 국방일보, 문학 21, 한국영농신문에 장편소설 연재, 저서 : 시집, 동화집, 수필집, 장편소설『햇살 만들기』등 20여 권, 현재 <한국영농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