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8절에는 ‘호 로고스’가 등장합니다. 영어로는 십자가의
message나 preaching이지만 원어는 ‘십자가의 호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시며 그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말의 지혜는 사람의 능력이지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인 겁니다.
십자가의 도는 아담 안에 있던 죄인을 죽이고 다시 살리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의 도’ 바로 십자가의 말씀(호 로고스)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십자가의 도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역사입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항상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뜻은 ‘맛이 없다, 맛을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하는
‘십자가의 도’를 누가 달게 수용하겠습니까? 무엇을 할까요? 덤비는 인간들에게
주의 죽음과 다시 사심을 믿고 따라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 하니 맛이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 위 곧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봅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뒤나미스)’입니다.
그래서 고전4:20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 겁니다.
고전15:43절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이 강한 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골1:29절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능력’ 말씀이신 그리스도 곧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9절에 지혜가 나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사람을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를 멸하십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고전1:20) 곧 육체의 지혜(고후1:12)가 있고 신령한 지혜(골1:9)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고전2:7)입니다. 그래서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구하라고도 하십니다(약1:5)
주님께서 지혜를 다하라(막12:33)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총명은 깨달은
것으로부터 나옵니다(엡3:4) 성경의 총명(딤후2:7) 슬기(마11:25)는 사람의 아이큐로
나오는 총명이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는 말씀을 깨닫는데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호 로고스’가 우리 속에
‘뒤나미스’로 역사 하실 때에 참 지혜와 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로 깨닫고 총명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1:20)하십니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나 선비(서기관)
변사(변론자)가 있으면 한 번 나와 보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인간의 지혜는 철학입니다.
철학은 결코 하나님께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문학이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잘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말들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수준인지 스스로 알겁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미련하지만 좋게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영을 주셔서 전하는
자도 알게 하시고 듣는 자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하는 이는
말씀의 지식과 함께 계시의 영을 가지고 말씀과 함께 계시를 넘겨줘야만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
유대인들은 하나님 하는 이름만 들으면 표적을 구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도
따라다니며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노라 하십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헬라는 철학이므로 세상의 지혜를 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이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유대인들에게는
무엇이든 손에 잡혀야 합니다. 바로 율법적인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리낍니다.
헬라인들은 끊임없이 깨달음을 구합니다. 그런데 주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고
주의 살으심과 함께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라고 하니 도무지 논리성이
없으니 미련하게 봅니다. 지금도 유대교식 신자와 헬라식 신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아듣든 비난을 하든지 오직 십자가의 도(말씀)인 그리스도를 전해야죠.
고린도전서의 결론은 교회는 그리스도 곧 사랑(헤 아가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주셨습니다. 교회라는 건물 안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성도들에 한 없이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고 그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고 십자가는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1:25절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 하심은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1)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 2) 이를 전도하는 일(21절)
3) 십자가의 도(18절) 이 모두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다 미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나 약하심이 사람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전1:26절은 대문자로 시작하는데 내용이 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는 뜻은 없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 능력 문벌 좋은 사람 즉 족보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리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만일 있다면 지금도 엘리트 대접을 받겠지요?
사실 교회를 보면 요즘은 고급 사교클럽 같은 교회도 생겼습니다.
교회가 끼리끼리 유유상종하는 구락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미련한 자를 택하였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8))
천한 사람 곧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며 버린 돌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할지 몰라도 저는 엘리트인양 거기에 끼어들려고 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미련했고 약했고 천하디 천했고 멸시받았고 하는 쪽이 더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곧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을 통해 있는 자들을 폐하십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택하사 존재하는 것들을 없애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의 진수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친 이윱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1:29)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랑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할례 받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려는 것 곧 보이는 것을 자랑하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진술합니다(갈6:13-14) 바울은 참으로 대단한 기독교의 레전드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신데 그 지혜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대속물이라는 뜻입니다. 의와 거룩과 구속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효력을 영원토록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고전1:31절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그렇지만 고린도교회는 사람을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까지 육체대로 알았습니다(고후5:16)
지금도 그리스도를 육체로 오신 예수만 알고 십자가까지는 따라가서 그 십자가에
예수를 여태 달아놓고 예수 믿고 죄 사함, 예수 믿고 천국,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그 분의 육체의 부활만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 분은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만 육체로 오셨을 뿐입니다.
언제나 살아계시는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자랑하세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전도이며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과 간증인 겁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